지상아와 새튼이 - 한국 최초 법의학자 문국진이 들려주는 사건 현장 이야기
문국진 지음 / 알마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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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아무래도 이 책 이야기는 제목에 나오는 두 단어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해야할 것 같다.

 

지상아 : 산모의 자궁 내에서 사망한 지 오래된 태아

새튼이 : 어린 아이의 미라

 

<지상아와 새튼이>는 우리나라에서 저명한 법의학자이자 의사평론가이신 문국진 선생이 사건 현장에서 자신이 직접 체험하거나 혹은 주변에서 들은 이야기 모음집이다. 사실 동화 주인공 같아 보이는 책 제목이 내 예상과는 다른 뜻이어서 조금 놀랐다.

 

개인적으로 법의학에 대해 관심이 많지만 역시나 체계적인 공부를 하지 않은 이로서 그저 미디어나 책을 통해 만나는 정도가 전부였다.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케이블 텔레비전에서 종종 보는 CSI(Crime Scene Investigation), 악을 응징하는 시리얼킬러 덱스터 그리고 마지막으로 독일 출신의 법의학자 마크 베네케의 저작 정도가 전부다. 이런 루트가 모두 해외의 사례를 다룬 것이라면, 문국진 선생의 글은 우리나라에서 과거 혹은 현재진행형의 사건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변별점을 가진다.

 

모든 사건은 흔적을 남긴다는 유명한 법칙에 따라 범죄 현장을 보존해야 한다는 건 상식이다. DNA 대조 같은 과학적 수사방식이 도입되기 전에 이미 이런 혜안을 제시한 이가 바로 19세기에 등장한 프랑스의 저명한 법의학자 에드몽 로카르라고 한다. 모든 범죄자는 사법기관에 체포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완전 범죄를 꿈꾼다. 이 글을 쓰다가 문득 궁금해진 것이 과연 사건사고 중에서 미결로 처리되는 것이 얼마나 될까 하는 점이다. 아마 꽤 많은 미결 사건들이 있다고 하는 걸 들어보면, 아마도 완전범죄에 성공해 법망을 빠져 나간 이들의 수가 제법 되지 않을까 싶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범죄 현장 보존과 현장검증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아무리 완벽한 범죄라고 하지만, 어딘가에 범인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구멍이 나 있기 마련일 것이다. 바로 그런 빈틈을 문국진 선생 같은 법의학자가 메우는 것이다. 마크 베네케의 글에서는 사체에 꼬이는 벌레들로 사망 시간을 추정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읽으면서 놀랐었는데, 문국진 선생의 글에서는 그 이상의 놀라운 일들을 접할 수가 있었다. 가령 예를 들어 살해된 뒤 물에 던져진 것인지 아니면 익사한 건지 사체 내의 플랑크톤을 분석해서 사인을 밝힐 수 있다는 것도 처음 알게 됐다.

 

한편 문국진 선생의 글이 딱딱해 보이는 법의학적 분석만 있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다. 사람이 살다 보면 벌어질 수 있는 상상을 초월하는 경우의 수가 도출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메밀껍질 때문에 과민성 쇼크사를 하기도 하고, 사인을 밝히기 위한 부검을 혐오하는 피해자 가족에게 법의학자가 봉변을 당하기도 하며, 김치에 있는 성분 때문에 각성제 복용자로 오해 받기도 하는 그야말로 기상천외한 이야기들이 차고 넘친다.

 

문국진 선생의 <지상아와 새튼이>를 통해 미스터리한 범죄를 해결하는 법의학의 명쾌한 해답은 물론이고, 각종 사건 사고를 통한 우리 사회의 여러 단면을 간접 체험할 수가 있었다. 어떻게 보면 복잡하고 어려운 법의학에 부담 없이 다가갈 수 있는 개론서로 백점이다. 그런 점에서 전문적인 분야를 직접 체험하고 오랫동안 연구한 분들의 성과를 높이 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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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2-01-19 2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법의학이라는 분야는... 다소 생소하네요. 책 이름 듣고 저도 동화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글을 읽다보니까 조금 섬뜩하기도 하고, 이상하게 끌리기도 하네요. (흐흐~) 몰랐던 분야에 대해 첫걸음을 내딛는 방법으로 책만한 것이 없는 것 같아요!
 
주크박스의 철학-히트곡 엑스쿨투라 2
페테르 센디 지음, 고혜선.윤철기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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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크박스와 관련된 개인적 일화를 하나 소개하겠다. 오래전 자주 들르던 맥줏집이 하나 있었다. 좋아하는 야구 경기를 매일 저녁 볼 수 있었고, 무엇보다 맥주 값이 싸서 자주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구석에 있던 요상한 기계와 만났다. 말로만 듣던 주크박스였다. 바텐더에게 잔돈을 바꿔다가 알파벳과 숫자 조합으로 된 좋아하는 곡을 듣는 그런 시스템이었다. 이제는 어디 가도 볼 수 없는 사라진 공룡 같은 존재였다고 해야 할까. 신기한 마음에 내가 좋아하는 가수인 프린스의 을 꾹꾹 눌러서 듣고 있는데, 주인장이 그 노래가 마음에 안 드는지 홱 바꿔 버리는 게 아닌가. 주크박스와 관련된 잊을 수 없는 에피소드다.

 

문학동네에서 엑스쿨투라라는 새로운 인문서적 시리즈로 세상의 빛을 보게 된 페테르 센디의 <주크박스의 철학-히트곡>은 거리의 상가에서 그리고 이동하는 대중교통 수단에서 곁에 선 이의 아이폰에서 무시로 들을 수 있는 “히트곡”(tube)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 고찰을 시도한다. 그렇지 않아도, 케이팝이 휩쓸고 있는 우리나라 대중음악의 흐름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팬으로 고급예술이라기보다는 하위문화로 취급받는 대중음악에 대한 철학자이자 전문 음악이론가의 연구가 내심 반가웠다.

 

서론에서 페테르 센디는 히트곡에는 우리의 귀에 착 달라붙는 ‘귀벌레’ 같은 바이러스가 있으며 동시에 일종의 철학적 존엄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맙소사! 시작부터 예상을 뛰어 넘는다. 히트곡의 개념과 논리를 규명하기 위해 진부함과 특이함이라는 요소를 도입하기도 한다. 한편, 프랑스 출신의 이 철학자는 대중음악에 대한 분석에서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입장을 견지한다. 마르크스의 사유를 빌어 센디는 인간 간의 관계뿐만 아니라 물신성과 비의성(秘義性)을 가진 ‘사물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에 초점을 맞추면서 히트곡을 “대중예술과 키치”의 영역 속으로 내몬다.

 

한편, 페테르 센디에 앞서 대중음악에 대한 예리한 비판을 가한 이가 있으니 그의 이름이 바로 발터 벤야민이다. 벤야민은 몇 세대 전에 이미 우리가 현재 대량생산되어 어디서나 즐기고 있는 케이팝의 전위대이자 롤모델 소녀시대의 훅송으로 변신한 후렴구의 비의성에 철학적 담론을 덧씌운다. 아티스트가 아닌 엔터테이너로 거대자본과 기획으로 양성된 케이팝 아이돌 가수의 히트곡에는 페테르 센디가 언급하는 ‘영혼’(pysche)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다. 그렇게 우리는 저렴하고 얼마든지 복제와 대체가 가능한 자본예술의 힘으로 만들어진 ‘키치’스러운 음악에 포위되어 있지 않은가.

 

작가는 정신분석학의 알레고리를 이용해서 대중가요 히트곡의 본질을 분석한다. 히트곡에 담긴 ‘말’의 이면에는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욕망의 구현과 갈망이라는 서로 상충하는 그야말로 탄탈로스의 목마름이 있다고 페테르 센디는 쓰고 있다. 그가 실례로 든 <말, 말, 말>의 달리다와 알랭 들롱 버전을 들으니, 거의 강박 수준으로 변조된 반복 서사의 위력을 곧바로 느낄 수가 있었다. 기표와 기의로 경이롭게 교차하는 “말”(parole)이 그전 그런 멜로디 위에서 펼치는 언어의 향연은 가히 환상적이었다.

 

작가가 시도하는 히트곡(tube)의 외연 확대는 음악 자체뿐만 아니라, 키르케고르의 대중극(솔직히 이 부분의 변주와 반복에 대한 작가의 서술은 이해하기 정말 어렵다)과 영화에까지 도달한다. 프리츠 랑 감독의 전설적인 명화 에 등장하는 <페르귄트>의 운명적인 곡조는 물론이고 알랭 레네 감독의 <우리는 그 노래를 알고 있다>까지. 그야말로 키치스러운 “그저 그런 곡조”에 포위되어 쾌락적 소비에 탐닉하는 대중의 현실계 재현이라고 부르고 싶다.

 

지난주에 정말 오랜만에 고등학교 동창을 만났다. 그 친구는 나에 대한 추억의 일성으로 크리스 드버그의 “The Lady in Red”를 꼽았다. 학업에 찌들려 있던 그 시절, 크리스 드버그의 그 노래는 그야말로 귀벌레처럼 나의 귀에 기생하고 있었나 보다. 누군가에게 내 내밀한 자아의 한 부분이 대중음악이라는 진부함을 관통해서 특이함으로 각인되어 있다는 점이 그저 경이로울 따름이었다. 그렇게 각자의 소리 바이러스를 간직한 채 우리는 오늘도 스산한 도시의 밤거리를 배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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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랍어 시간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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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만화가 김태권 씨가 라틴어를 배운다는 말을 듣고서 부러워한 적이 있다. 그 이유 중의 첫 번째는 비록 죽은 언어지만, 서양 문화의 원류를 직접 대할 수 있는 라틴어를 배우고 있다는 아카데믹한 이유와 두 번째로는 라틴어를 배우는데 투자할 수 있는 넉넉한 시간이 부러웠다. 그런데 그런 라틴어도 아니고 희랍어라니. 고대희랍어는 라틴어 이전의 언어가 아니었던가. 희랍어를 배워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를 원전으로 읽을 수 있다니, 상상만 해도 즐겁다. 한강 작가의 <희랍어 시간>에는 희랍어를 가르치는 시력을 잃어가는 한 남자와 그 남자에게 희랍어를 배우는 세상의 소리를 잃은 어느 여자의 이야기다.

 

이렇게 <희랍어 시간>의 리뷰를 한 달 전에 쓰기 시작했다. 어떤 책이든 책을 막 읽고 나서 생생한 기억이 가시기 전에 리뷰를 썼어야 했는데 자그마치 책을 다 읽고 나서 한 달도 넘어서 마무리 짓기에 나섰다. 내가 생각해도 대단한 배짱이 아닐 수 없다. 굳이 한참 뒤 리뷰의 좋은 점을 찾는다면, 모두 휘발해 버리고 남은 그 책에 대한 강렬한 잔상 정도라고 해야 할까.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로버트 드 니로와 마틴 스코시즈의 듀엣의 <택시 드라이버>가 연상됐다. 불면에 시달리며, 도시의 불빛 사이로 미끄러지듯이 택시를 모는 주인공 트래비스. 등장인물에게서 떼어낼 수 없었던 바로 그 외로움이 <희랍어 시간>의 두 주인공에게도 그대로 느껴졌다. 여자 주인공이 그 많은 언어 중에 희랍어를 배우려고 했지? 이제는 그런 소소한 기억마저 희미하지만 남자 희랍어 강사가 갑자기 날아든 새와 부딪혀 안경이 부서지고 여자의 도움을 받게 되는 장면은 조각도로 한땀한땀 정성스레 새긴 판화처럼 기억에 생생하다.

 

신체적으로 무언가를 상실하고 있는 두 사람의 이야기에 독자는 절로 고개를 끄덕인다. 두 개의 깊은 상실의 골짜기에서 위태로운 줄타기는 과연 어떤 결말을 작가가 예비하고 있는지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내가 기대하고 있던 내러티브 대신 그 자리에 섬세하면서도 탐미적인 묘사가 파고들기 시작한다. 여자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는 순간을 작가는 뛰어난 촬영감독처럼 잡아낸다. 그야말로 책에 밑줄을 죽죽 긋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다. 매순간 떠오른 감정의 메모를 하지 못한 게 그저 아쉬울 따름이다. 그렇게 휘발된 감정의 부스러기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으니까.

 

여자의 삶을 어머니의 사망, 이혼 그리고 아이의 양육권 송사의 과정으로 갈무리한 점도 인상적이다. 심리치료와 불면증까지 더해지면서 독자는 여자의 현재 상황에 대한 파악을 끝낸다. 그렇게 시작된 소설의 곳곳에서 주인공이 구사하는 언어와 작가가 시전하는 문장의 치열한 사투가 이어진다. 소설 <희랍어 시간>은 독자의 감정선을 무시로 자극하면서도, 역설적으로 임의적 감정의 개입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 땅에 살면서도 어쩔 수 없이 이방인일 수밖에 없는 남자의 운명에 대한 서사도 빼놓을 수 없다.

 

이 책 때문에 한 동안 소멸의 이데아에 대한 환영과 잠잠하던 외로움에 대한 그윽한 파문이 일었었다. 아주 그윽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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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 세계 역사를 바꾼 스탈린그라드 전투 590일의 기록 서해역사책방 7
안토니 비버 지음, 안종설 옮김 / 서해문집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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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에 대한 일반적인 오해 한 가지. 많은 사람들이 전쟁의 극적 전환점이 1944년 6월 6일,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히틀러의 제3제국은 서유럽을 침공한 미영 연합군 때문에 전쟁에 진 것이 아니라, 동쪽으로부터 진격해 온 붉은 군대에 의해 결정타를 얻어맞은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전국(戰局)에서 파죽지세의 독일군의 예봉이 꺾인 것일까? <여기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의 저자 안토니 비버는 1942년 코카서스의 유전지대와 소련의 중앙을 궤멸시키겠다는 청색작전(오퍼레이션 블라우)으로 시작된 스탈린그라드에서 독일 제6군의 참패를 그 시발점으로 분석한다.

 

저자는 이 책의 시발점을 히틀러의 1941년 소련 침공에 둔다. 유럽 대륙에서 공산주의와 도저히 양립할 수 없었던 국가사회주의(나치즘)의 기수 히틀러는 프랑스, 베넬룩스, 스칸디나비아 그리고 발칸반도에서 거둔 기적적인 성공을 바탕으로 300백만에 달하는 독일군과 헝가리, 루마니아 추축군까지 합하면 400백만 명의 병력으로 소련을 상대로 한 건곤일척의 승부를 걸었다.

 

히틀러와 같은 과였던 희대의 독재자 스탈린은 점증하는 독일군의 침공 계획에 대한 첩보를 무시하고, 히틀러가 독소불가침 조약을 깨지 않을 거라는 희망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다. 그런 오판과 1930년대 군부에 대대적인 숙청으로 다수의 일선 지휘관을 잃은 붉은 군대 전쟁 초기 우수한 화기와 훈련으로 무장한 독일군에 일방적인 패배를 거듭했다. 하지만 모두가 아는 대로, 독일은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를 불과 몇 킬로미터 남겨 두지 않은 상황에서 주코프가 이끄는 소련군의 매서운 반격과 동장군의 엄습으로 적도(赤都) 공략에 실패한다.

 

1942년 여름, 이번에는 주공(主攻)의 방향을 코카서스 유전지대와 남부 공업지대로 눈을 돌린 히틀러는 파울루스 상장이 이끄는 정예 제6군과 호트 대장의 제4기갑군단을 주축으로 한 대병력으로 스탈린그라드 공략에 나선다. 사실 작전 초기에 소련 수반의 이름을 딴 볼가 강변의 도시는 그다지 매력적인 전략 포인트가 아니었다. 폴란드 침공 이래, 전격전으로 단련된 독일 기갑부대와 야전사령관들에게 엄청난 병력 소모를 요구하는 시가전만큼은 피하고 싶은 주제였다. 독일 공군의 위력적인 폭격 아래, 폐허가 된 스탈린그라드 시내가 훗날 독일 제6군의 발목을 잡게 될 줄은 스탈린그라드 함락을 목전에 둔 독일군으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590일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그리면서 안토니 비버는 초기에 소련을 배신하고 독일군 편에 붙은 히위에 대해 미처 모르고 있던 사실을 알려준다. 소련 첩보기관이었던 KGB의 전신에 해당하는 베리야가 이끄는 NKVD는 적군만큼이나 아군에게 피해를 준 애국전쟁의 반역자 히위들 처단에 앞장섰다. 사실, 이러저러한 이유로 독일군에게 투항한 소련 병사들에게 어떤 선택지도 만만하지 않았다. 주코프의 천왕성 작전으로 스탈린그라드가 역포위된 후, 히위들이 발악적으로 싸운 이유가 절로 이해가 됐다. 다시 소련군에게 투항한다고 해도 그들이 돌아갈 곳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1942년 11월 19일 소련의 파울루스가 이끄는 독일 제6군을 파멸시키려는 천왕성 작전이 시작될 때까지만 하더라도 독일군에게는 병력을 온전하게 유지한 채, 전역을 탈출해서 재정비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소련 첩보부에서는 이미 독일 전선의 좌측을 맡고 있는 루마니아 군대의 취약점과 낮은 충성도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주공의 방향을 북쪽에 집중시켰다.소련의 거대한 포위망이 완성되면서, 여름 동안 스탈린그라드 시내를 실제적으로 장악하고 있던 독일군은 거꾸로 완전 포위가 되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공군 사령관이자 제국원수 괴링은 공중 보급으로 포위된 독일군에게 충분한 식량과 탄약을 보급할 수 있다고 자신했지만, 현실은 최고지도자의 낙관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한 해 전의 러시아의 겨울이 얼마나 파국적이었는지 절실하게 체험했음에도, 독일 전쟁지도부는 1942년 겨울에도 특별한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 부상자를 위한 의약품을 비롯한 식량과 탄약의 절대적인 부족, 물샐틈없는 포위로 지원군으로 나선 폰 만슈타인의 공격마저 차단시킨 붉은 군대는 한 때 독일군 최정예 부대였던 제6군이 포위된 스탈린그라드를 그야말로 지옥으로 만들었다. 최후사수를 외치며 병사들에게 절대적으로 부족한 보급품 수송은 외면한 히틀러의 구원을 기다리며, 독일의 젊은이들은 야만적인 전쟁터에서 그렇게 목숨을 잃어나갔다.

 

저자 안토니 비버는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지휘한 전쟁지도부나 장군들의 이야기로만 서술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지옥도가 재현된 스탈린그라드 시내에서 적과 살을 맞대고 싸운 일선의 병사들이 안락한 조국의 가정에 보낸 애절한 편지 사연으로 참혹한 전쟁의 실상에 조심스럽게 접근한다. 히틀러의 잇단 성공에 현혹되어, 조국을 파멸로 이끈 지도자에게 맹목적 충성을 다하던 독일 국민과 병사들이 스탈린그라드에서 처절한 패배와 포위된 독일군을 외면해 버린 지도자에 환멸을 느끼게 되는 과정도 유감없이 잡아냈다. 아울러 병사들에게는 마지막까지 항복하지 말고 싸우라고 한 장성들이 자신들은 아무런 죄책감 없이 적군에 투항할 때를 대비해서 다양한 짐을 챙기는 장면에서는 정말 할 말을 잃었다. 심지어 일선의 병사들은 당장 허기를 채울 빵 한 조각이 없어 굶주리는 마당에 버터를 두껍게 바른 빵을 개에게 먹이는 장면에서는 분노마저 일었다.

 

스탈린그라드 전장의 주요 인물 중의 하나였던 독일의 상승장군 에리히 폰 만슈타인에 대한 작가의 평가도 인상적이었다. 독재자 히틀러에게 유일하게 맞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프로이센 출신의 원수 만슈타인은 개인의 보신을 최우선으로 하면서, 독재자의 명령에 일방적으로 복종했다. 군인으로서 군국주의 국가였던 프로이센의 전통을 따른 결정이었다면 정말 할 말이 없지만, 의미 없이 죽어간 수많은 병사들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히틀러의 어이없는 명령을 무시할 수도 있는 권위가 있었지만, 만슈타인은 그렇게 하지 않았고 결국 제6군 파멸에 일정 부분 기여했다. 그래도 만슈타인은 스탈린그라드의 대승에 힘입어 곧바로 역공에 나선 붉은 군대를 하르코프 공방전에서 분쇄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안토니 비버는 스탈린그라드 전역의 다양한 면모를 조명하면서 전쟁으로 인한 비극을 재구성한다. 장 자크 아노 감독의 <에너미 앳 더 게이트>(2001)에서 나온 그대로, 소련군은 자국 병사의 희생은 아랑곳 하지 않고 제대로 무장도 못한 병사들을 스탈린그라드 시내로 쓸어 넣었다. 영화에서 소총도 없어서, 전우가 죽으면 그 죽은 병사의 소총을 가지고 전장으로 달려 나가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면서 설마했는데 그게 사실일 줄이야. NKVD 소속의 코미사르는 적군과 맞서 싸우기보다 내부의 반역자를 색출하는데 혈안이었는데 이 책을 통해 그 이유를 확실하게 알 수가 있었다. 독일은 포로가 된 독일군에 대한 소련군의 만행을 좋은 선전 자료로 이용했는데, 그에 못지않은 자신들의 잔학행위는 철저하게 숨겼다. 선전상 괴벨스는 스탈린그라드 참패를 철저하게 숨기고 온 국민을 총력전에 내모는데 매진했노라고 안토니 비버는 증언한다.

 

참혹했던 스탈린그라드 전투 590일은 히틀러의 제3제국 파멸의 전주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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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미술애호가의 방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호영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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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가 예술애호가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단계는 다음과 같지 않을까 싶다.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문학, 시간과 공간에 제약을 받지 않는 음악 그리고 마지막으로 미술. 오래전에 파리에 들러서 그 수많은 뮤지엄들을 돌면서 파리지앵이 부러웠던 건 우리로서는 오리지널의 아우라를 직접 접하기 힘든 명작들을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볼 수 있다는 점이었다. 2012년 대한민국에 사는 보통 사람이 다빈치의 <모나 리자>나 티에폴로가 그린 <비너스의 탄생>을 실물로 보기란 정말 난망하니까 말이다.

 

조르주 페렉 선집의 1탄으로 막 세상의 빛을 본 <어느 미술애호가의 방>을 받는 순간 허겁지겁 달려들었다. 책은 말할 것도 없고, 세상의 온갖 아이콘과 도상학이 담겨 있는 미술에 대해서도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으니까 말이다. 게다가 그동안 말로만 듣던 조르주 페렉의 작품과도 처음 만나는 기회라 더 바랄 게 없었다. 금상첨화로 두께도 얇아 보여서 선택도 쉬웠다. 한편으로는 이 “천재 작가”가 어떻게 자신의 문학 세계에 미술 장르를 접목시킬지 궁금했다.

 

조르주 페렉은 우선 <어느 미술애호가의 방>에 다음의 세 명의 주인공을 등장시킨다. “어느 미술애호가”에 해당하는 독일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양조업으로 자수성가한 사업가 헤르만 라프케. 그리고 그의 예술적 패트론을 받아 <어느 미술애호가의 방>이라는 걸작을 탄생시킨 화가 하인리히 퀴르츠. 마지막으로 퀴르츠의 작품을 학술적으로 분석하고 세상에 알린 레스터 K. 노박이다. 이들의 서로 상호보완적인 작동의 법칙에 따라 소설은 전진한다.

 

첫 번째 세계대전에 앞서 미국의 피츠버그에서 열린 대규모 미술 전시회를 통해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퀴르츠의 <어느 미술애호가의 방>은 학술적으로 그리고 대중적인 선풍을 끌기 시작한다. 바로 이 사건을 중심으로 작가는 독자의 관심을 이끌어낸다. 기존에 라프케가 수차례의 유럽방문을 통해 수집한 그림들의 총체를 퀴르츠는 화폭에 담아냈다. 그가 <어느 미술애호가의 방>이라는 그림에 담아낸 세밀화 덕분에 도시의 광학기구 상인들은 밀려드는 주문에 환호성을 질러야 했다. 이 무명의 작가는 단순하게 기존의 그림을 베끼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를 위한 변형(variation)도 마다하지 않았다. 회화에 숨겨진 도상학의 비밀을 찾아내는 것만큼 전시회를 찾은 대중들은 숱한 시간을 이 그림 앞에서 보냈다.

 

성공한 사업가이자 위대한 컬렉터였던 라프케가 죽고 나서 그가 수집한 그림들이 경매에 붙여졌다. 니콜라 푸생, 잔바티스타 티에폴로, 프랑수아 부셰 그리고 한스 홀바인 같이 저명한 화가는 물론이고 생전 처음 들어보는 화가의 이름 앞에 독자는 어쩔 수 없이 주눅이 든다. 이 기묘한 내러티브의 달인은 그렇게 주눅 든 독자의 어쭙잖은 예술 지식에 아랑곳 하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렇게 경매에 나온 그림과 엄청난 호가의 나열 끝에 독자를 기다리고 있는 마지막 한 방은 가히 절묘했다!!!

 

근대 자본주의가 틀을 잡기 전까지만 해도 예술품은 창조자(예술가)가 자신의 후원자에게 헌정하는 방식이 대세였다. 하지만, 산업혁명 이후 예술품은 하나의 투자 대상이 되었다. 생전에 꼴랑 단 한 작품을 팔았던 반 고흐의 그림들이 지금은 상상을 초월하는 가격으로 거래되고 있는 사실을 보면 바로 이해가 될 것이다. 페렉은 <어느 미술애호가의 방>에서 그 예술 작품이 가진 가치로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경매장 호가 기준으로 평가되는 현실을 자신의 방식으로 비판한다. 소설에서 라프케가 정말 좋아했고, 자신이 궁극적으로 그림을 수집하게 된 계기가 된 <위스키를 마시는 사람들>에 대한 설명은 작가의 예술에 대한 사고를 집약해주는 장면이다.

 

하인리히 퀴르츠가 기존의 예술 작품을 통해 새로운 작품을 탄생시키는 과정에 대한 예술적 고찰은 조르주 페렉이 이 작품을 창조했는가에 대한 자기고백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작가와 작품에 전혀 들어 보지 못한 <어느 미술애호가의 방>이라는 작품을 뻔뻔하게 끼워 넣는다. 작가가 나열하는 수많은 오리지널 예술 작품은 픽션과 현실의 경계를 허문다. 그렇게 새롭게 창조된 작품의 영롱한 “아우라”는 작품의 끄트머리에서 기다리고 있는 극적인 반전으로 독자를 몰고 간다. 기계적 복제가 오리지널의 아우라를 위협하는 시대에 작가는 천재적 재능과 기묘하면서도 조마조마한 매력으로 독자를 희롱한다.

 

체계적으로 예술의 도상학과 아이콘을 배우지 않은 무지한 아마추어 미술애호가에게 이번에 새로 선보인 조르주 페렉의 <어느 미술애호가의 방>은 유쾌한 자극으로 다가왔다. 오르세에서 그리고 벨베데레에서 마주한 오리지널의 감흥이 그동안 잠자코 있던 역마살을 헤집는다. 페렉과의 첫 만남은 기대 이상으로 만족스러웠고, 앞으로 나올 조르주 페렉 선집에 대한 기대에 한껏 부풀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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