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 두번째 무라카미 라디오 무라카미 라디오 2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오하시 아유미 그림 / 비채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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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 모음집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마지막 장을 덮었다. <앙앙>이라는 패션잡지에 연재된 하루키의 에세이 모음집이라고 하는데, 이 책을 읽고 나니 50년도 더 전에 녹음되었다는 전설의 프로코피에프의 음반도 들어 보고 싶어졌고, 노르웨이에서 판매하고 있다는 그 몸에 좋다는 바다표범 생기름도 먹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 역한 맛을 견딜 자신은 없지만.

 

책 리뷰에 앞서 먼저 고백할 게 하나 있다. 가장 대중적인 일본 작가 중의 한 명인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제대로 읽어본 게 하나도 없다.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1Q85>, <해변의 카프카> 그리고 <노르웨이의 숲>까지도.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건, 그의 책 중의 몇 편의 기행문과 잡문은 접했지만. 그래서일까? 하루키는 나에게 소설가라기보다 에세이스트로 더 친근한 기분이다.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역시 나와 하루키의 기묘한 관계의 연장선에서 무시로 그렇게 내게 다가왔다. 제목 한 번 잘 뽑았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일 년 동안 연재했다는 이 에세이집은 하루키가 나중에 소설에 써먹으려고, 자신만의 소재 창고에 소중하게 수장해둔 비장의 무기다. 글로 독자와 만나야 하는 소설가에게 이야기 수집은 선택이 아닌, 필연의 그것이려나. (하루키에게) 마음 가는 대로 쓱쓱 쓰는 소설쓰기보다 훨씬 더 어려운 에세이 쓰기는 그의 말대로 확실히 새로운 영역에 대한 도전이리라. 어떤 글을 써도 책을 사주는 고정 팬을 지닌 베스트셀러 작가의 에세이 쓰기는 어렵노라는 엄살이 귀엽게 들린다.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는 하루키가 직접 체험한 에피소드에 대한 자신만의 단상을 양념으로 잘 버무린 샐러드 같은 느낌의 에세이집이다. 그래서 가독성이 무척 좋다. 일면 가벼워 보이는 에피소드의 뒷면에는 사물을 꿰뚫어 보는 탁월한 글쟁이의 내공이 담뿍 담겨 있다고나 할까. 재밌고 읽기 쉬운 글을 끊임없이 생산해 내는 하루키의 능력이 그저 부러울 따름이다. 보통의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사물의 자세한 부분까지 예리하게 짚어내는 하루키의 시저스 샐러드같은 글은 독자의 마음을 흔드는 울림이 있다.

 

상식에 어긋나는 행동 때문에 꽁한 마음을 풀지 않는 작가의 까칠함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의무적으로 참가해야 하는 출판사가 주최한 파티에서의 어색함보다 차라리 적은 인원이 모인 파티에서 중년부인의 타조사육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마음에 든다는 솔직한 고백이 사뭇 매력적이다. 어지간해서는 잘 사인을 해주지 않지만, 간곡하게 부탁하면 마지못해 파인애플 같은 요란한 그림 대신 이름만 방명록에 다소곳하게 적어 놓는 말도 마음에 든다. 지나친 상업화와 치열한 국가대항전이 되어 버린 올림픽에 대한 냉정한 평가도 일품이다. 달리기/마라톤에 미친 작가가 미국 나이키 본사에 있다는 전설의 조깅 코스를 직접 뛰어 보았다는 부분에선 마냥 부러웠다. 야구라면 누구 못지않게 좋아한다고 자부하는 나에게 내가 열렬하게 응원하는 팀의 라이벌 3루수 알렉스 로드리게스의 유연한 플레이에 대한 극찬에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지만 가슴이 좀 쓰리더라. 오하시 아유미 씨가 그린 양키즈의 핀스트라이프 유니폼은 더말할 것도 없고.

 

바야흐로 신나는 여름휴가 시즌이 됐다. 누군가 부담 없이 휴가지에 가서 읽을 만한 가벼운 책을 추천하라고 한다면, 자신 있게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에서 발행된 하루키 월드 초대장을 건네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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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 4 - 무슬림의 역습과 인간 살라딘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 4
김태권 글.그림 / 비아북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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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공교롭게도 김태권 작가의 <십자군 이야기> 시리즈는 시오노 나나미 여사의 <십자군 이야기>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비슷한 시기에 출간되고 있다. 시오노 나나미 여사의 십자군 이야기가 기존의 정치적 관점 대신 십자군 원정을 통해 가장 큰 수혜를 입은 상인집단의 활동과 원정의 다양한 측면에 대해 일정 부분 초점을 맞춘다면, 김태권 작가는 종래의 정치적 관점을 기본으로 이슬람의 관점에서 객관적 사실을 다루고 있다는 느낌이다. 언제나 그렇듯, 역사란 이야기를 다루는 사람의 시점이 중요하다.

 

무릇 시리즈라 하면 화끈하게 알파에서 출발해서 오메가까지 달려주는 그런 맛이 있어야 하는데 김태권 작가의 경우에는 1,2권과 나중에 다시 연재를 시작하면서 나온 3,4권의 간극이 원체 길다 보니 전반부에서 중요하게 다루던 미국 행정부에 대한 날선 비판은 후반부에서는 아예 사라져 버렸다. 김태권 작가가 계속해서 연재를 계속했더라면 과연 어떤 이야기가 십자군 이야기 속에 녹아들었을지 자못 궁금하다.

 

십자군 원정 초반까지도 십자군 세력의 침공이 종교전쟁이라는 실체를 인식하지 못했던 무슬림들은 기독교 전사들의 지배가 공고화되면서 비로소 기독교도들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한 지하드(성전)에 나서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분열 때문에 프랑크 기사들에게 단일대오 전선을 만들지 못했던 무슬림 세계는 알레포와 모술을 근거로 한 걸출한 지도자 이마드 앗딘 장기의 영도 아래, 기독교 제후들에 대한 반격을 개시한다. 1144년 팔레스타인 기독교 제후국 중의 하나인 에데사를 함락시키면서 장기는 일약 무슬림 세계의 스타로 부상한다. 에데사를 공략하는데 성공한 장기는 평생의 숙적이었던 부리 왕조가 지배하던 다마스쿠스를 정복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다했으나, 노예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이 부분은 삼국지에서 일세를 호령하던 호걸 장비의 죽음과 너무 비슷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김태권 작가가 제대로 그려주었다.

 

사실 이번 네 번째 십자군 이야기의 주인공은 무슬림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하다고 일컬어지는 영웅 살라흐 앗딘 유수프, 우리에게는 살라딘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군사적 영웅이라기보다 유약한 서생 스타일에 가까운 아이유브가 어떻게 해서 이슬람 세계의 대권을 차지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김태권 작가의 서술은 음미해볼만하다. 아이유브/살라딘의 경우에 영웅이 역사를 움직인다기 보다는 역사가 영웅을 만들었다는 해석이 더 옳지 않을까? 티크리트 쿠르드족 출신인 살라딘은 어려서 무슬림 세계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다마스쿠스에서 수학하고, 숙부인 시르쿠 휘하에서 그야말로 생사를 넘나드는 격전을 치르면서 최고의 자리에 오른 그야말로 입지전적 인물이다.

 

문무를 갖추고 비상하는 예비영웅 살라딘에게 삼촌과 함께한 이집트 원정은 그야말로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자신의 주군인 누르 앗 딘/누레딘과의 마찰을 끝까지 피하면서 살라딘은 결국 누레딘의 사후 유일한 무슬림 세계의 지도자로 부상한다.

 

역시 뭐니뭐니 해도 오랜 기간 동안 전개된 십자군 전쟁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무슬림의 영웅 살라딘과 서구 최강의 전사로 칭송받았던 사자왕 리처드의 대결이다. 그런 점에서 먼저 링 위에 오른 스타이자 인간 살라딘에 김태권 작가는 먼저 초점을 맞춘다. 온갖 신화나 에피소드로 치장된 영웅의 그것이 아닌 있는 모습 그대로의 영웅상은 그래서 더 인상 깊게 다가온다. 살라딘이 이집트 술탄의 자리에 오르는 과정은 고진감래의 전형이었다. 시리아에서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고 있는 주군 누레딘의 날카로운 감시의 눈초리는 살라딘의 행동을 제약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명목상의 주군과 비상하는 술탄은 일촉즉발의 위기까지 치닫지 않았던가. 어쩌면 누레딘이 급사하지 않고, 살라딘과 무력충돌까지 갔다면 심각한 분열 때문에 무슬림 세계의 통일은 더 늦어졌을테고 예루살렘 왕국으로 대표되는 팔레스타인 기독교 왕국은 서방 십자군의 도움으로 그 명맥을 더 이어가게 되지 않았을까. 역사의 가정이란 덧없었다는 걸 뻔히 알지만, 누구에게도 해가 되지 않는 역사적 상상력은 참 유쾌하지 않은가.

 

중세의 완벽한 재현을 위해 당대의 각종 미술자료와 회화는 물론이고 태피스트리까지 섭렵했다는 김태권 작가의 노고에 박수를 보낸다. 하지만, 외적으로는 그의 노고가 빛을 발할 진 모르겠지만 1,2권에 비해 현저하게 줄어든 현재를 관통하는 신랄한 비판정신은 상대적으로 줄어든 것 같아 아쉽다. 간간히 보여주는 현실비판으로는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래서 더 '부시 당나귀'가 아쉬운 모양이다.

 

이제 네 번째 단행본도 나왔으니 어서 빨리 다음 십자군 이야기의 시퀄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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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 -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공경희 옮김 / 포레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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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이런 미친 놈이 다 있지.”

 

밀워키의 살인귀 제프리 다머라는 실존 인물을 모델로 했다는 조이스 캐럴 오츠의 픽션 <좀비>의 첫 이미지는 나에게 그렇게 다가왔다. 죽지 않고 이승을 헤매는 어쩌면 불쌍하기 짝이 없는 ‘좀비’가 등장하는 소설일 거라는 예상으로 조이스 캐럴 오츠의 <좀비>와 만났다. 그런데 소설에 나오는 좀비는 좀 달랐다. 그 좀비를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희생자를 좇는 어느 살인자의 기록이더라.

 

주인공은 쿠엔틴은 늦깎이 대학생으로 소설의 배경이 되는 마운트 버넌의 교외 유니버시티 하이츠에서 학생들을 세입자로 받는 건물의 관리인이다. 아버지를 교수로 둔 유복한 가정의 평범한 군상 중의 하나다. 적어도 겉보기에는 말이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점은 쿠엔틴의 전과다. 십대 소년을 성추행했다는 전과로, 그는 현재 보호관찰 중에 있으며 정기적으로 심리학자와 만나 집단치료를 받고 그 결과가 당국에 보고된다. 한 마디로 과거에 작은 실수가 있었지만, 주변의 도움으로 갱생의 길을 걷고 있다는 설정이다. 그런데 과연 이런 표면의 모습이 주인공 쿠엔틴의 모든 삶의 지표를 있는 그대로 말해 주는 걸까. 바로 이 지점에서 소설 <좀비>는 일상에서 위장된 살인자의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좀비>는 제3자의 시선에서 본 살인자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살인자 자신의 기록이다. 조이스 캐럴 오츠는 정말 냉정한 시선으로 될수록 작가 자신 감정의 개입 없이, 선악에 대한 판별을 할 수 없었던 연쇄살인자의 실상을 재현해내고 있다. 흔히 연쇄살인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소설에서 그렇듯, 쿠엔틴 역시 “내 좀비”를 만들겠다고 부랑자, 마약중독자나 노숙자 같이 연고가 없어 사라져도 찾을 이가 없는 이를 상대로 끔찍한 범죄를 감행한다. 게다가 용의주도하게 아무도 자신을 의심하지 않게 가능하면 멀리까지 나가서 범행 대상을 물색한다. 어려서 자신의 성적 정체성 때문에 아버지와 심각한 불화를 겪은 쿠엔틴은 타인의 자유의지를 무시하고 자신의 명령에 절대복종하는 좀비를 만들겠노라는 망상에 빠져, 독학으로 전두엽 수술을 공부하고 실천에 옮긴다. 소설은 플래시백 기법을 이용해서, 현재의 시점에서 쿠엔틴의 과거를 기술하고 그동안 그가 저지른 범죄를 재구성한다.

 

대부분의 공포소설에서 그렇듯, 아드레날린은 범인의 끔찍한 범행 순간이나 아슬아슬한 추격 장면에서 교감신경을 자극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소설 <좀비>에서는 기존의 상례를 거부한다. 겉으로 보기에 지극힌 정상적인 캐릭터인 쿠엔틴처럼 홀로 사시는 할머니의 정원을 돌보고 다정다감한 손자, 교수 아버지의 지원을 받는 착실한 아들 혹은 커리어우먼으로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는 누나의 동생이 끔찍한 범죄의 주인공일 수도 있다는 사실에 방점을 찍는다. 그래서 사실 소설을 읽는 동안, 하이라이트 범행이었던 ‘다람쥐’ 사냥 때문에 이 연쇄살인자가 경찰에 체포되고,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면서 쿠엔틴 가족이 받을 충격의 여파를 기대했다. 아니, 어쩌면 이런 끔찍한 범죄자가 철저하게 자신의 정체를 감추고, 평범한 얼굴로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조이스 캐럴 오츠가 그리는 공포의 근원인지도 모르겠다.

 

보통 같았으면 소설 <좀비>의 모델이라는 제프리 다머를 검색해 봤을텐데, 소설에 몰입하기 위해 다른 정보를 의도적으로 접하지 않았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니 그는 정말 평범해 보이는 백인 청년이었다. 하지만 구글이 토해내는 그의 엽기적인 범죄 행각에 대한 기술은 정말 상상을 초월했다. 제프리 다머가 소설의 쿠엔틴처럼 실제로 희생자의 ‘기념품’을 보관하고, 희생자를 좀비로 만들려고 했다는 것을 읽으면서 현실이 문학적 상상력을 능가하는 공포의 원형을 제시할 수도 있다는 사실에 그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뱀다리] 부제로 따라 붙은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는 어쩔 수 없이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를 연상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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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양이 2012-04-30 1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리뷰 잘 읽었습니다. 현실이 문학적 상상력을 능가하는 공포의 원형을 제시한다. 공감합니다!
 
시작은 키스
다비드 포앙키노스 지음, 임미경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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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서 바로 감이 오지 않는가? 그렇다, 프랑스 출신 다비드 포앙키노스의 신간 <시작은 키스>는 바야흐로 연애의 계절에 무시로 우리의 곁을 찾아온 달달구리한 연애소설이다. 리뷰의 제목을 “한 편의 컬트영화처럼”이라고 뽑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미 이 책이 영화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물론 그 영화가 컬트영화인진 모르겠지만, 아마도 지극히 프랑스적인 감각의 영상이 아닐까 싶다. 그런 점에서, 책의 표지에 나오는 키스를 암시하는 발돋움 사진도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시작은 키스>를 다 읽고 나서 바로 표지를 보면 무릎을 칠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소설표지 한 번 잘 뽑았다.

 

책을 읽는 동안 삶에서 에로스와 타나토스는 불가분의 관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으로 삶에서 지고의 행복을 찾지만, 유한한 존재인 인간에게 타나토스의 순간 역시 피할 수가 없는 숙명이다. 다만 그것이 언제 우리를 찾아 오는가하는 시간의 문제일 뿐. 주인공 나탈리(작가의 이름에 대한 설명이 매우 흥미롭다)는 운명이 맺어준 짝인 프랑수와와 만나 사랑에 빠지고, 몇 년간의 연애 끝에 결혼에 골인한다. 아, 그들을 커플로 맺어준 운명의 매개체가 다름 아닌 살구 주스였다는 점 역시 특이하다. 모름지기 사랑이란 그런 거였구나.

 

그냥 그렇게 소설이 흘러갔다면 얼마나 싱거웠겠는가. 어느 휴일, 조깅을 하러 나선 프랑수와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뜬다. 홀로 남겨진 젊은 아내 나탈리의 충격과 상심이 얼마나 컸을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아직 그런 어마어마한 상실의 경험을 해보지 않아서일까. 나탈 리가 상실의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순간, 소설의 전개상 긴장감의 고조를 위해 투입된 그녀의 보스이자 사장 샤를의 존재감이 치솟아 오른다. 나탈리가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샤를의 아내를 지적하기 전까지, 몰랐던 이 뻔뻔한 남자의 스테이터스를 알아채고 분노하기에 이른다. 사랑을 가장한 육욕에 지나지 않았을까. 어쩌면 그것도 모를 일이다.

 

자, 이쯤에서 소설의 진짜 주인공이 등장할 차례다. 그것도 우리의 주인공 나탈리의 기습적인 키스를 받으면서 말이다. 세계 모든 나라의 부러움과 찬사를 받는 사회복지의 천국 스웨덴 출신 마르퀴스가 바로 주인공이다. 우연을 가장한 숙명에 대해 여기에서 이야기하고 싶지 않지만,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도둑 키스로 <시작은 키스>의 전반전은 화려한 피날레를 내린다.

 

소설의 원제목인 “델리카테스”에 대해 이야기했던가. 프랑스어로 섬세한, 세련된, 허약한, 예민한 그리고 다루기 힘든 등등의 다양한 뜻을 가진 형용사 ‘델리카’의 여성명사형이라는 “델리카테스”야말로 사랑하는 남편을 잃고, 세상이라는 거친 바다를 항해하는 여성 나탈리와 왠지 모르게 영화 <파니 핑크>의 원제목을 연상시키는 남자 마르퀴스의 만남에 이보다 더 적절한 표현도 없을 것 같다. <시작의 키스> 곳곳에 등장하는 ‘델리카’한 상황에 독자는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다.

 

다시 나탈리와 마르퀴스의 만남으로 돌아가, 선수 같지 않고 오히려 어설퍼 보이는 마르퀴스의 매력이야말로 일 외에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고 상실의 슬픔을 안은 채 하루하루를 살던 매력적인 커리어 우먼 나탈리의 감성을 자극한다. 그 뒤의 이야기는 어쩔 때는 독자의 예상대로 혹은 그렇지 않게 진행되면서 사랑의 왈츠를 완성한다. 남자 작가가 “미소의 왈츠” 같은 찰나의 미학이 듬뿍 담긴 어휘를 구사할 수 있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게다가 소설의 곳곳에 등장하는 친절한 “원주”도 소설의 빼놓을 수 없는 재미다. 소설의 진행에서 특정한 사건의 빌미가 되는 순간을 포착해서 글로 형상화해낸 다비드 포앙키노스의 기법 역시 멋지다. ‘그렇지 연애소설이라면 이 정도는 돼야지’하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자신의 경험을 기술하듯이 사랑에 빠져 정신 못 차리는 남자 마르퀴스의 심리에 대한 묘사도 뛰어나다. 첫 데이트 후에 기교 넘치는 말 대신, 솔직하게 ‘아름다운’ 시간을 보내게 해줘서 고맙다는 말로 상대방을 사로잡다니. 연애에서 때로는 현란한 언어의 기교 대신 정공이 가장 빛을 발할 수 있다는 점을 다비드 포앙키노스는 깨닫게 해준다. 두 번째 데이트를 앞두고 사랑의 환영에 빠져 전혀 준비를 하지 못해 허둥대는 마르퀴스의 모습에 절로 공감이 갔다. 역시 멋진 데이트는 어렵구나 하고.

 

연애하기 정말 좋은 계절이 왔다. 그리고 모두에게 아름다움을 향한 비자가 발부되었다. 선택은 모두의 몫이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처럼, 다비드 포앙키노스의 <시작은 키스>가 우리를 위한 길라잡이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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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영화포스터 커버 특별판)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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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어떤 책과 만나게 되는 특별한 경로가 있을까? 전작주의를 하는 작가가 아닌 이상, 미지의 작가와 만나는 그런 기대와 즐거움 그리고 유명 문학상 수상작이라는 타이틀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오늘 읽은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한 번 읽어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이름은 많이 들었지만 미처 읽지 못했던 영국 출신의 저명한 작가 줄리언 반스의 작품이자, 영미문화권에서 최고의 권위를 자랑한다는 최신 맨부커상 수상작이니 말이다.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크게 두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첫 번째는 소설에서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평범한 청년 토니 웹스터의 성장소설로 시작된다. 다양한 이야기 중에서 왜 하필 작가는 역사소설 시간을 이 경장편 소설의 시작으로 삼았을까? 주인공과 그 친구들의 짧은 소개가 끝나자마자 소설은 거두절미하고 본론으로 파고든다. 우리 기억 속의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과 불충분한 문서가 빚어내는 확신이라고 했던가. 얼핏 보기에 성장소설의 외피를 두른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가 어느 순간 미스터리로 변형을 하는 순간, 초반의 이 문장은 결말에 대한 강렬한 예고편으로 다가온다.

 

청년의 이야기에 러브라인이 빠질 수가 없을 것이다. 우리의 화자 토니는 평범하게 살다가 대학에 진학하고, 베로니카를 만난다. 그리고 예의 만남이 그의 삶에 굵직한 족적을 남긴다. 별 의미 없었던 풋사랑이 추억이 40년 뒤에 자신의 삶에 다시 개입하게 되는 순간이 참 인상적이었다.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면서 보통의 삶을 산 자신과는 달리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세상을 등진 유수의 대학 출신 에이드리언은 그래서 더 대조적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절친 에이드리언은 자신의 전 애인 베로니카가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지 않았던가.

 

분명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로 돌아가는 플래시백 구성으로 시작된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두 번째 장에서 비로소 본 궤도에 오른다. 20년간의 결혼생활을 한 마거릿과 토니는 여전히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다. 그들의 관계도 지극히 서구적 관계의 한 양태가 아닐까? 은퇴 후의 삶을 영위하던 토니에게 어느 날 전 여자 친구였던 베로니카의 어머니 포드 부인이 남긴 유언장이 날아들면서 우리의 화자는 혼란에 빠진다. 잊을 수 없는 첫사랑에 대한 아련한 추억 때문이었을까, 자신보다 언제나 한 수 위였던 베로니카를 어렵게 수배해서 만나면서 소설의 결말에 대한 호기심은 증폭된다. 40년에 걸친 러브 스토리가 어떻게 끝날까 궁금해진다. 클리셰를 훌쩍 뛰어넘어, 추리소설 뺨치는 설정과 반전은 보너스다.

 

평소와는 달리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읽으면서 이 책 저 책 읽다 보니 집중이 쉽지 않았다. 게다가 주인공 웹스터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으면서, 쉽게 읽으리라는 나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어쩌면 아직 도달해 보지 못한 삶의 어느 지점 혹은 경험해 보지 못한 관계에 대한 생래적 거부감 때문이었을까. 내러티브에 대한 이해는 수긍할 만하지만, 소설에 대한 개인적 체화의 부족으로 인한 만족도는 현저하게 떨어지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것도 아니라면, 줄리언 반스라는 작가에 대한 지나친 기대감이었을까.

 

첫 만남에 대한 기대가 아무래도 컸던 모양이다. 달랑 이 작품으로 줄리언 반스의 문학세계를 판단하는 건 아무래도 섣부른 판단일 것 같다. 그전에 사둔 다른 책에 도전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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