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종교를 위한 인문학
김경집 지음 / 시공사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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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한국 교회는 건강한가?’라는 질문으로 이 책에 대한 리뷰를 시작하고 싶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교계 지도자는 배임과 횡령죄로 재판을 앞두고 있고, 성직자들의 각종 추문은 하루가 멀다 하고 터져 나오는 상황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여전히 성장지상주의와 대형교회화는 소리 없이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기독교인의 수는 날이 갈수록 줄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사회에서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기독교계의 권위는 이미 땅에 떨어진지 오래고,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꿈꾸는 이들에게 희망은 요원해 보이기만 한다. <눈먼 종교를 위한 인문학>의 저자 김경집 교수는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각성하고 다시 한 번 교회일치운동에 전념할 것을 이 책을 통해 주문하고 있다.

 

저자는 우선 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가 하나가 될 것을 주장한다. 그러기 위한 첫 걸음으로 기독교 정경인 성경의 일치화가 이루어져 할 것이다. 기독교 신자로 왜 여전히 우리는 고어투와 한문투로 된 성경을 읽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훨씬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쉬운 길이 있는데 굳이 약대(낙타)나 애급(이집트) 같이 보통 사람이 들으면 알 수 없는 말을 써야 하는지 이해불가다. 그것은 마치 중세시대 사어(死語)로 된 라틴어 성경을 고집했던 성직자들의 모습을 보는 느낌이 든다. 성경을 읽는다는 것 자체가 특권이었던 시절 말이다.

 

김경집 교수는 누구나 다 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존의 시각과는 달리 해석한다. 로마 황제 아우구스티누스의 호구 조사 때문에 만삭의 몸을 한 아내 마리아와 요셉은 고향 베들레헴을 찾는다. 베들레헴의 여관은 이미 만원이었고, 요셉 가족은 어쩔 수 없이 마구간에 기숙하게 된다. 문제는 이 불쌍한 가족을 외면한 이들이 바로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라는 지적 앞에서 순간 뜨끔해졌다. 이기적인 나의 모습을 거울로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건강한 영성을 가진 신앙인이라면, 풍찬노숙하는 요셉 가족을 외면하고 편안하게 잠을 이룰 수가 있었을까 하는 질문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21세기에도 여전히 명예살인(honor killing)이라는 야만이 계속되는 가운데, 이천년 전 성령으로 잉태한 처녀 약혼녀 마리아를 아내로 받아들인 용기 있는 남자 요셉에 대한 분석도 예사롭지 않다. 착하고 선량한 청년 요셉은 약혼자 마리아를 보호하기 위해 씨족사회를 떠나 살기로 결심하기에 이른다. 지금 같이 교통이 발전한 시대에 고향을 떠나 새로운 곳에 정착해서 사는 일쯤 아무 일도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당시 유목사회에서 정든 고향을 떠난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성경에서 찾아낸 작은 서사를 예리하게 분석해내는 저자의 능력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예수 그리스도는 짧은 공생애 동안 수많은 비유로 제자들을 가르치셨다. 하지만 당시 직접 예수 그리스도를 대했던 열두 제자들은 스승의 설명 없이는 하나님나라의 신비를 일깨우는 계시를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들의 면면을 자세히 살펴보면, 요즘 표현으로 찌질하기 그지없다. 명실상부한 예수 그리스도의 첫 번째 등장하는 베드로를 보자. 그의 직업은 어부로 안식일조차 지키기가 쉽지 않았다. 경제적으로 부유하지 않았던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며 굶기를 밥먹듯 했을 것이고 멸시와 탄압도 이겨내야 했다. 어쩌면 그들은 세속적인 욕심을 가지고 메시야를 따랐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마침내 하나님나라의 기쁜 소식(복음)을 듣고 자각한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데 그 누구보다 앞장섰다. 이런 사도들의 영광 이전에 있던 고난에 대해 우리는 신중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아울러 신앙공동체 리더를 세우는 과정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처럼 보잘 것 없는 직업을 가진 이들이 배제되고 있지는 않은지 저자는 조용한 목소리로 묻고 있다.

 

중세이래로 무소불위의 절대권력을 행사하던 교회는 마르틴 루터와 지오다노 브루노 같은 종교개혁가들을 파문에 처하고, 이단으로 몰려 화형에 처했다. 시대를 앞선 이런 예언자들의 고난은 외면하고, 제사장의 역할만 하려는 이 땅의 교계 지도자들에게 저자는 쓴소리를 아끼지 않는다. 근본주의에 입각한 한국 교회의 주류 보수교단은 하나님나라의 구현을 위한 사랑의 실천이라는 기독교 정신의 본질보다 그 외형적인 면에 치중하는 형식의 권위를 강조하며 사회정의를 요구하는 목소리에 귀를 닫고, 점점 더 특정한 기득권층을 위한 종교화되고 있다고 저자는 진단한다.

 

이러한 진단을 바탕으로 저자는 오늘날 한국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의 근본 원인을 잘못된 신학에서 찾는다. 나만 잘살면 된다는 기복신학, 오로지 성장만이 선이라는 번영신학, 민주성이 결여된 권위주의와 근본주의가 지배하고 있는 현실을 냉혹하게 비판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종교학자 제임스 파울러가 제시한 신앙 발단 단계이론을 통해 올바른 신앙의 성장을 권면한다. , 이제 모든 문제에 적용되는 해답은 아니지만 필요한 솔루션이 구체화됐다. 문제는 인식의 전환과 그에 따른 실천이 남아 있다. 다시 한 번 성경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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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루스트라도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29
미겔 시후코 지음, 이광일 옮김 / 들녘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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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솔직하게 고백해야 할 게 한 가지 있다. 필리핀 출신의 작가 미겔 시후코의 <일루스트라도>를 읽고, 책에 나오는 크리스핀 살바도르에 대해 고개를 갸웃거리며 위키피디아로 검색을 해봤다. 정말 타고난 이야기꾼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뻔뻔한 작가는 이 흥미진진한 메타소설 속에서 그 흔적을 쫓는 가공의 인물을 다양하면서도 신뢰가 가는 방식으로 멋지게 창조해냈다. 전형적인 메타소설의 양식을 빌려, 각종 시, 메타소설, 인터뷰, 블로그 댓글과 자학적 유머까지 동원해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방식으로 크리스핀 살바도르에게 생명을 불어 넣었다. 모름지기 소설가라면 이 정도는 해야 하는 게 아닌가.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 출신의 미겔 시후코는 은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났다는 표현에 적합한 성장 배경을 가지고 있다. 필리핀 국회의원 출신 아우구스토 시후코 주니어의 아들로 태어나 국제학교를 졸업하고 필리핀 최고의 대학인 아테네오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19세기 후반, 스페인 통치 아래 선각자들이란 뜻의 <일루스트라도>는 스페인 식민지배 아래 필리핀 민중의 비참한 현실을 자각한 중산 계급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자유주의 사상과 유럽의 민족주의 영향을 받은 일단의 그룹이다. 이 중에는 실존 인물인 필리핀 독립운동가 호세 리살도 포함되어 있다. 미겔 시후코는 <일루스트라도>를 자신의 야심찬 데뷔작 제목으로 삼았다.

 

미겔 시후코는 직접 본인의 이름으로 메타소설 속에 등장해서 미국 허드슨 강에서 시신으로 발견된 진짜배기 필리핀 작가크리스핀 살바도르가 마지막으로 매달리던 <불타는 다리>를 추적하기 시작한다. 필리핀의 모든 추악한 사실을 담은 <불타는 다리>는 필연적으로 사라져 버렸는데, 시후코는 필리핀 역사를 관통하는 살바도르 가문에 대한 이야기와 조국 필리핀과 망명지 캐나다/미국을 오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스페인 식민지배 이래 필리핀 근현대사를 조명한다.

 

초보 작가이기는 하지만, 이런 심각한 주제만으로 500쪽이 넘어가는 장편소설을 전개하지는 않는다. 자신의 친구이자 스승인 크리스핀 살바도르를 추모하며, 동시에 조국 필리핀을 떠나 캐나다에 뿌리를 내리고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그야말로 코즈모폴리턴적인 삶을 사는 21세기 자발적 망명객이자 이방인의 초상을 섬세하게 묘사해낸다. 다시금 마닐라로 돌아가 스승의 흔적을 쫓는 과정은 마치 연어가 자신이 태어난 강으로 회귀하는 그것처럼 느껴졌다. 도대체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메타 소설적 창조인지 독자는 헷갈릴 지경이다. 전형적인 미국 여인으로 등장하는 뉴욕 여친 매디슨과의 관계는 마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사이에서 정체된 필리핀의 현실에 대한 메타포로 다가온다. 군부의 쿠데타 위협이 일상화되고, 일체의 정치적 행위가 희화화된 필리핀 국가의 현실을 작가는 냉정하게 꼬집는다.

 

개인적으로 크리스핀 살바도르에 죽음에 대한 논쟁을 다룬 SNS 열전(熱戰)과 소설의 중간중간에 등장하는 필리핀 청년 에르닝 이십의 에피소드를 눈여겨 보았다. 모든 사건 사고가 인터넷 소셜 네트워트를 통해 실시간으로 생중계되고, 곧바로 연쇄반응을 일으키는 신()소통의 시대의 위력을 작가는 예리하게 짚어냈다. 조국을 떠나 새로운 세계에 정착을 시도하는 필리핀 신인류의 전형으로 나오는 에르닝 이십의 과장된 좌충우돌기는 한편으로는 우스우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스스로를 낮추며 블랙유머의 대상으로 삼는 작가의 치기가 느껴지기도 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국과 필리핀, 태평양이라는 시공을 가로 지르는 일종의 로드무비 같은 형식의 소설에서 크리스핀의 과거를 쫓는 여정은 어느 순간 서사를 위한 목적이 아닌 하나의 수단으로 뒤바뀐다. 그가 왜 죽었고, 그가 남긴 필생의 역작 <불타는 다리>의 행적은 중요하지 않다. 온갖 상념으로 가득 찬 상태로, 크리스핀의 과거 아니 조국 필리핀의 과거 속에서 부유하는 작가의 실존만이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150년 역사를 아우르는 필리핀 국가의 정체성에 대한 조명과 작가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들이 중첩되는 <일루스트라도>는 확실히 매력적인 소설이다. 가공의 인물인 크리스핀 살바도르가 소설 속에서 자신의 글을 통해 세상의 변혁을 바랬던 것처럼, 그의 창조자 미겔 시후코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까? 앞으로 계속될 작가의 도전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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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레트 브렌델 피아노를 듣는 시간
알프레트 브렌델 지음, 홍은정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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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 팝송을 즐겨 들었다. 그중에서도 헤비메틀팬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즐겨 듣던 음악의 디스트레스(distress) 요소가 되기 시작했다. 나이가 들기 시작했다는 증거였을까? 고리타분하다고 회피해오던 클래식 음악을 찾아 들었다.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명동에 있던 디아파송 같은 클래식 전문음반가게에서 알프레드 코르토, 디누 리파티 그리고 상송 프랑수와 같은 거장 피아니스트들의 복각 CD를 애써 구해 들었다. 연주자에 대한 편식이 있어서였는지 알프레트 브렌델의 이름은 알고 있었지만, 소장하고 있던 CD는 아마 슈베르트의 <송어>가 유일하지 않았나 싶다.

 

위키피디아로 브렌델에 대한 정보를 검색해 보니, 오스트리아 출신 피아니스트라는 설명이 나왔다. 지금은 체코 공화국이 된 비젠베르크 출신의 알프레트 브렌델은 유대계 독일인이라고 한다. 알프레트 브렌델은 17세인 1948년에 데뷔해서, 관절염 때문에 공식적으로 은퇴한 2008년까지 60년간 연주자로 활약한 말 그대로 거장(그로스마이징거)이었다. 책을 읽는 동안 그의 연주가 다시 듣고 싶어 부랴부랴 유튜브로 슈베르트 즉흥곡을 찾아 들었다. 암보로 무대 위에 놓인 피아노 저편을 응시하며 물 흐르듯 전개되는 브렌델의 연주는 일품이었다.

 

연주자의 주관적인 해석보다는 언제나 작곡자의 원곡에 중점을 두는 브렌델의 편곡에 대한 생각이 마음에 들었다. 그는 특히 다양한 오페라를 피아노곡으로 편곡한 프란츠 리스트에 대해 탁월한 평가를 내린다. 개인적으로 리스트가 피아노곡으로 편곡한 <헝가리 무곡>을 무척이나 좋아하는데, 브렌델은 다양한 시도의 편곡을 지지하면서도 여전히 작곡가의 원곡이야말로 연주자가 지향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저자는 위대한 작곡가인 루트비히 판 베토벤에 대해서도 다양한 평가가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와 동시대를 살던 미학자들이 베토벤 음악의 캐릭터가 가진 심리적인 요소와 도덕적인 요소가 있다고 썼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요소가 있는지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아무래도 독자는 피아노에 전문가가 아닌지라, 그가 주장하는 대로 크게 연주해야 하는 부분에서는 크레셴도를 좀 더 작게 시작해야 한다고 하는데 이런 부분에 대한 인지는 정말 오랜 기간의 연습과 연륜이 쌓이지 않으면 불가능한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브렌델에게 피아노란? 그에게 피아노는 목적을 위한 수단이란다. 모든 변화무쌍함을 보여줄 수 있는 악기이자, 해석자의 감성과 유머를 표현해낼 수 있는 수단이라는 말일까? 그에게 피아노는 또한 수많은 사운드가 담긴 통이다. 이것을 전달하기 위해 자신의 수단인 피아노가 최고여야 한다는 주장도 펼친다. 명필을 붓을 가리지 않는다는 동양의 격언은 적어도 브렌델의 피아노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모양이다. 한편으로 그의 주장에 공감이 되면서도, 청중을 위해 직접 공장을 찾아가 노동자들 앞에서 피아노 연주를 마다하지 않은 마우리치오 폴리니의 그것과는 대척점에 서 있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브렌델은 작곡가야 말로 연주자에게 필요한 정보의 원천이라는 상찬을 아끼지 않는다. 그렇다, 베토벤과 모차르트 같은 작곡가가 남긴 원곡 없이 어떻게 그들을 음악을 재현해내는 연주자가 존재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해서 연주자가 작곡가의 종이나 노예 같은 존재는 아니라고 단언한다. 모든 연주자는 자신만의 개성을 가지고, 자신 고유의 해석을 통해 청중과 만나게 된다. 또한 모름지기 모든 연주자는 필히 작곡을 공부해서, 원작곡가가 원곡에서 보여준 의도를 파악하는데 소홀함이 없어야 한다는 주장일 것이다. 예술가의 놀라운 논리전개에 절로 고개가 숙여질 뿐이다.

 

솔직히 전문가인 알프레트 브렌델의 이야기 전부를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처럼 광대한 피아노 연주의 세계는 물론이고, 그가 템포와 리듬 그리고 해석을 설명하기 위해 인용한 피아노곡들은 생소하기만 했다. 그래도 그가 존경하는 사부인 에드윈 피셔와 알프레드 코르토,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 그리고 한스 폰 뷜로 같이 익숙한 이름이 나올 때면 반가운 기색이 들었다. 과연 피아노 전공자가 브렌델의 글을 읽는다면 어떻게 반응했을지 참 궁금하다.

 

아무래도 독일계 연주자이다 보니 모차르트와 베토벤, 슈만과 슈베르트 등 주로 독일계 작곡가들의 작품을 위주로 소개된 점이 아쉽다. 다른 에세이에도 나온 것처럼 다양성(variety)을 추구했으면 좋았으련만. 하긴 A부터 Z까지도 영어가 아닌 독일어로 소개가 됐었지. , 이제 책을 읽었으니 브렌델의 음악을 들을 차례다. 그의 고별연주 앨범에 실린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하이든 그리고 바흐의 곡이야말로 이제는 은퇴한 비르투오소가 우리에게 남긴 최고의 유산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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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 상점
조경환 지음 / 생각을담는집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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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오리 요리를 먹어 보았는가? 트레이에 잘 조리된 오리고기가 실린 카트를 길다란 식당 주방장 모자를 정갈하게 쓴 요리사가 끌고 나와, 전병에 싸서 소스에 바로 찍어 먹을 수 있게 오리고기를 발라주는 모습이 참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 서비스가 끝나고 요리사가 돌아가기 전에 팁을 주어야 하지만 말이다. 이 장면에서 요리는 먹는 즐거움도 있지만, 시식하기 전에 보는 즐거움도 무시할 수 없다는 진리를 다시 한 번 깨달을 수가 있었다. 조경환 작가의 <북경상점>은 수백년 역사를 가진 북경(베이징)에서 노자호라 불리는 한다하는 상점에 얽힌 다채로운 이야기를 독자에게 풀어내준다.

 

역시 예상대로 도시 투어의 기본은 역시 먹거리 기행이라는 말처럼 작가는 북경에 가면 누구나 한 번 꼭 먹어봐야 하는 북경오리 전문점 이야기로 상점기행을 출발한다. 북경 제일의 오리요리 전문점이라는 <전취덕>이 일번타자로 등장한다. ‘천하제일루라는 명성이 부끄럽지 않게 가게 앞에 줄지어선 손님들의 모습이 고스란히 카메라에 담겨 있다. 역시 학자답게 <전취덕>의 유래에서부터 자의 필획이 하나 빠진 사연을 추적하는 장면에서는 감탄이 절로 피어났다. 그렇다고 상점 소개에 꼭 필요한 위치나 단가 그리고 중국어를 할 줄 모르는 독자를 위해 무얼 먹으면 되는지까지 자세한 소개가 줄줄이 이어진다. 과연 언제 북경에 가게 될진 모르겠지만 <전취덕>의 오리요리는 꼭 한 번 먹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 역사상 최대의 판도를 자랑하던 강희건륭 연간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소맥 요리 전문점 도일처 이야기도 일품이다. 산서성 출신 왕서복이라는 이가 세웠다는 도일처의 자랑거리인 소맥 요리는 만두 비스무레한 음식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1752년 당시 황제였던 건륭제가 직접 소맥 요리를 맛보고 그때까지만 해도 현판이 없던 가게에 <도일처>라는 현판을 직접 하사하면서 가게가 흥했다고 했던가. 가게 역사를 한눈에 보여주는 청동 조각상을 보며, 역시 대륙 스타일이지 싶었다.

 

차 한 잔에도 정성을 다하는 중국인들의 면모가 엿보이는 오유태찻집을 비롯해서, 왕족과 대신들의 신발을 짓기 위해 2100번의 바느질을 마다하지 않는다는 내연승, 100% 수작업만을 고집한다는 모자전문점 성석복 그리고 한 번에 8,000명이나 되는 인원에게 쇄양육(양고기)을 접대할 수 있다는 동래순 등 북경 상가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전문 대로와 대책란 거리에 포진한 유구한 역사의 노자호들과의 만남은 확실히 인상적이었다.

 

우정을 제외하고는 못 자르는 것이 없다는 왕마자 상점의 검은 호랑이가위는 정말 탐이 났다. 언제 북경에 가게 될진 모르겠지만, 다른 건 몰라도 이 가위만큼은 꼭 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해 바다를 건너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짜장면이 된 북경식 원조 작장면 이야기에선 귤이 회하를 건너 탱자가 되었노라는 고사가 생각나기도 했다. 어지간한 맛집 블로거를 뺨치는 요릿집 소개도 일품이었다.

 

조경환 작가의 상점방문기를 읽으면서, 어떤 상점이든지 단순하게 좋은 물건을 취급하고 친절한 서비스로 고객을 접대한다는 기본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20세기 기술문명의 시대가 속도전 같은 생산시대였다면, 21세기는 바야흐로 개별적 소통을 중심으로 한 소비시대로 규정할 수가 있겠다. 새로운 소비시대의 결핍을 채워주는 것이 바로 작가가 초점을 맞춘 서사(스토리텔링)이 아닐까? 모주석(마오쩌둥)과 주총리(저우언라이) 그리고 좀 더 시대를 올라가 강희제와 건륭제 그리고 곽말약의 에피소드가 얽힌 가게라면 누군들 마다하겠는가. 그리고 개인적으로 왜 작가는 이 책에 소개된 노자호를 중국식 이름이 아닌 한자 독음으로 굳이 표기하는지 궁금했는데, 말미에 실린 글을 통해 그 이유를 알 수가 있었다.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중국에서 100% 수작업으로 칼을 만드는 명장(名匠)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이제는 세계 G2 국가로 성장한 중국에서 만든 제품이 싸구려라는 왜곡된 이미지를 갖고 있었는데 장인 정신이 빚어내는 정성이 깃든 상품에 그런 평가를 내릴 수 있는지 스스로 묻게 됐다. 북경마니아의 노자호순례기를 통해 그동안 모르고 있던 중국의 비물질 문화유산에 대해 재고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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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언수 소설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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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여름 김언수 작가의 글과 처음으로 만났다. 문학동네 카페에서 연재된 <설계자들>의 인연으로 출간 즈음한 모임에서 작가도 처음으로 만날 수가 있었다. 킬러를 주인공으로 삼은 장편 <설계자들>은 그 소재의 선택에 있어 정말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3년이란 시간이 흘러 이번에는 9편의 단편을 모은 소설집 <>으로 그를 다시 만날 수가 있었다.

 

<설계자들>도 그랬지만 이번 소설집 역시 잘 읽힌다. 타이틀인 <>을 제외하고는 소설집에 실린 순서대로 읽지 않고 마음 가는 대로 읽었다. <>에는 그야말로 질풍노도의 삶을 접하게 된 어느 십대 소년의 정체를 알 수 없는 분노라는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누구나 꿈꿔 왔지만, 그 시절에는 언감생심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기득권에 대한 반항 때문에 억울하게 테니스장과 화장실 청소를 해야 했던 나의 이야기에 공감이 갔다. 그리고 그 덕분에 남고 학생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문학과 조우하게 되었노라는 서사가 마음에 들었다. 그가 만난 문학은 분노에 차 샌드백에 쉴 새 없이 잽을 날리고, 풋워크를 배우는 예의 십대 소년에게 뿐만 아니라 전쟁터인 이 세상을 사는 모두가 언젠가는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 꼭 만나게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두 번째 인스톨인 <금고에 갇히다>는 설정이 멋지다. 일확천금을 노리며 어느 부자의 특수강으로 만든 사설금고에 갇힌 두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 이야기는 우리가 꿈꾸는 성공신화의 허구를 그대로 드러내 준다. 성공강박에 빠진 사회는 그저 우리에게 노력해서 성공하라고 다그치지만 성공 이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의 언급도 없다. 어떤 삶이 성공한 삶인지는 전적으로 주관적이지만, 이러이러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무언의 공식이 지배하는 비현실이 그대로 드러난다. 엄청난 돈과 보석 그리고 금붙이 가득한 금고에 갇히지만 외부에 단절된 공간 속에서 그것의 가치는 제로(zero). 금으로 만든 주사위를 굴리며 베네수엘라 미녀와 해보려던 수작을 뱀놀이 승부에 목숨 거는 두 사내의 절박함에 그저 헛웃음이 나올 뿐이다.

 

비슷한 시절을 보낸 작가의 서술이 절절하게 다가온다. 선배 세대처럼 절박하지도 그렇다고 후배 세대처럼 세련되지도 못한 어중간한 시대를 보낸 세대의 고백이 줄줄이 이어진다. 어쩔 수 없이 마틴 스코시즈의 <비열한 거리>(Mean Street)<레 미제라블>을 연상시키는 <단발장 스트리트><꽃을 말리는 건, 우리가 하찮아졌기 때문이다> 모두 회한과 허무주의가 팽배해 있던 어느 시절과 묘하게 겹쳐지는 느낌이 들었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 아무런 꿈도, 야망도 그리고 미래에 뭐가 되겠다는 결심도 없었던 를 떠올리게 한다.

 

소설가의 기발한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인스톨은 역시 <참 쉽게 배우는 글짓기 교실>이다. 귤을 사가지고 집으로 귀가하는 길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들에게 납치되어 비더게부르트라는 기묘한 장비에 올라 모진 고문을 당하고 마침내 자료만 있다면, 불필요한 기술은 제거하고 명료하면서도 짧은 문장을 쓰는 법을 배우게 되는 주인공의 비참함이 묘한 공명을 울린다. 국민에게 위임받은 권력이 어제부터인가 주권자 위에 군림하면서, 지배자 행세를 하는 경찰국가의 원형이 씁쓰름함을 자아낸다.

 

파리 목숨 같은 시간강사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 그야말로 똥 덩어리 같은 시집의 발제문을 작성해야 하는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못해 엉뚱하게도 섹스를 하자고 선포하고 행동에 옮기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지식인의 이야기, 집에 어울리지도 않는 소파를 들여 놓았다가 다시 빼내지 못해 친구에게 말도 안되는 시간에 도움을 청하는 명동에만 눌러 붙어 사는 사내 이야기, 실직으로 아내에게 구박을 받으면서 돌아가실 날만을 기다리는 아버지에게 몸에 좋다는 알부민을 공급하기 위해 기세 좋게 아내의 통장을 들고 나섰다가 재수 털린 가장의 이야기 등등 이렇게 하면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거창한 패러다임이 아닌 같은 소시민적 삶의 정곡을 찌른 서사가 참 마음에 든다.

 

마지막 인스톨인 <하구(河口)>에서는 어디선가 본 듯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성공의 입구에서 그놈의 술 때문에 추락해서 시골로 내려온 사내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술이었다는 아이러니한 설정이 주목을 끈다. 바닥까지 내려온 사내보다 고수들과의 술자리는 알코올의 유혹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는 사내를 제자리로 돌려보낸다. 이들이 보내는 황폐하기 짝이 없는 시간은 그들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 걸까.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그런 허황된 약속 따위는 하지 않는다.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인생에서 가장 황홀한 시절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고작이다. 그 정도로 만족해야 하는 걸까? 알 수 없는 일이다.

 

5년 주기로 돌아오는 위기로 자기계발 서적 대신 소설이 그 자리를 꿰찰 거라는 전망을 들었다.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다. 팽팽하면서도 군더더기 없는 글로 무장한 김언수 작가의 귀환을 축하하며, 돌아온 소설시대에 지속될 그의 날렵한 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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