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멘트 가든
이언 매큐언 지음, 손홍기 옮김 / 열음사 / 2005년 12월
평점 :
절판


대망의 이언 매큐언 전작 완독을 눈앞에 두고 있다. 어제 작가의 초기작 <시멘트 가든>을 읽었다. 그리고 바로 이언 매큐언 선생 최고작이라는 <속죄>를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책도 역시나 재밌다. 이런 몰입도로 최근에 책을 읽은 적이 있었던가. 아니면, 작가의 최고 걸작이라는 아우라 때문에 내가 빨려 들어간 것인지도 모르겠다. 원래 <시멘트 가든> 이야기를 하려다가 또 삼천포로 빠져 들었다. 언제나 늘 그렇듯이.

 

<시멘트 가든>은 일 년 전에 위화 작가의 책에서 영감을 얻어 중고서점에서 구입했지 아마. 구입해서 조금 읽다 말았는데, 소설의 화자 15세 소년 잭의 아버지가 정원을 꾸미려고 엄청난 분량의 시멘트를 구입하는 장면만 기억에 남아 있었다. 그 시멘트가 과연 어떤 소재가 될지 궁금했었다. 그리고 다시 일 년이 지난 5월부터 본격적인 이언 매큐언 전작 읽기에 돌입했는데, 그 중에 가장 빨리 읽은 책이 아닐까 싶다. 하루 만에 다 읽었다. 물론 짧은 분량 탓도 있겠지만, 젊은 시절의 이언 매큐언이 구사하는 스토리텔링의 힘이 그만큼 강렬했다는 방증이 아닐까.

 

소설 서두에서부터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잭과 줄리, 수 그리고 막내 톰의 아버지가 지병인 심장병으로 돌아가셨다는 전언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잭의 아버지는 시멘트 포대를 엄청나게 사들여 정원을 꾸미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아버지가 정원 가꾸기에 빠져 있는 동안, 이제 막 질풍노도의 청소년기에 접어든 잭은 큰누나 줄리와 함께 여동생 수를 상대로 의사놀이라고 그들이 명명한 성적 유희에 빠져든다. 무언가 바로 폭발할 것만 상태인 잭의 가정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지병으로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던 엄마가 세상을 뜨면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굴러가기 시작한다.

 

이제 고아가 된 십대 아이들은 위탁가정으로 뿔뿔이 흩어질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어머니의 죽음을 세상에 알리지 않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아버지가 준비해둔 시멘트가 등장할 차례다. 아무 것도 모르는 톰을 제외한 잭과 줄리, 수는 시멘트로 어떻게 엄마의 죽음을 은폐할 것인가. 그리고 엄마의 죽음에 관한 비밀은 영원히 지켜질 것인가.

 

이언 매큐언이 전매특허로 구사하는 소설에서 어떤 결정적 사건을 전후로 한 인과관계의 전개는 초기작 <시멘트 가든>에서 그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해서 소설이 평면적인 구성으로만 전개되는 건 아니다. 한 개의 트랙이 엄마의 죽음과 은폐에 관한 것이라면, 다른 한 가지 트랙은 성적으로 호기심이 충만한 소년의 상실감이 어떤 방식으로 파괴된 삶의 균질성에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작가의 리포트라고나 할까. 어머니는 죽는 순간까지 아이들의 미래를 걱정하며, 은행 예금의 관리를 큰딸인 줄리에게 부탁한다.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몰라도 당장의 시급한 불을 끄기 위한 재정적 장치는 마련된 셈이다. 아마 엄마가 준비한 돈이 없었더라면 이야기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이 그들의 가족이 해체될지도 모른다는 단순한 두려움 때문에 구축한 그들만의 세계는 타인이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세계일 수밖에 없다. 줄리의 멋쟁이 남자친구 데릭이 그들의 세계에 침입했을 때, 그들의 세계는 붕괴의 전조를 보이기 시작한다. 설상가상으로 잭과 줄리의 성적 호기심 혹은 충동에서 유발된 관계는 파국의 순간을 정점으로 인도한다. 이언 매큐언이 초창기에 작품을 발표하던 시절에, 문학 기자들이 그를 엽기작가로 판단한 것도 무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파격적인 이야기들을 나는 <시멘트 가든>과 <첫사랑, 마지막 의식>을 통해 접했다. 그런 초기 작품들에 비하면, 그 후에 발표된 작품들은 상당히 완화된 소재의 일상성을 담보한 작품들로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소설에서 일어나야 하는 일들은 예외 없이 반드시 일어난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소설에서 그리는 우리 인간 삶의 진실, 숙명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건 뒤의 사후처리는 오롯하게 남겨진 자들의 몫이 아니었던가. 어머니의 죽음은 그들이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두려움에서 비롯한 상궤에서 어긋난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결정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인가는 예상했던 그대로다. 이제 30세의 나이로 첫 장편소설 <시멘트 가든>을 발표한 청년 매큐언의 출발은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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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목련 2017-07-10 12: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초기작이라니 더욱 궁금하군요. 얼마나 파격적일까.

레삭매냐 2017-07-10 13:50   좋아요 1 | URL
후기에 발표된 작품들에 비해
어둡고, 소화하기가 부담스러운
면이 있습니다.

목나무 2017-07-10 15: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그런 어둡고 금기에 가까운 이야기들이 좋아서 이언 매큐언을 좋아하게 되었네요.^^
오늘부터 다시 <첫사랑, 마지막 의식>을 읽어보려구요. <넛셸>이 생각만큼 재미없어서 다시 초기작을 읽어보려 합니다. ^^

레삭매냐 2017-07-10 16:04   좋아요 1 | URL
<첫사랑, 마지막 의식> 그리고 <시멘트 가든>
이 작가가 초기에 추구한 세상의 다크 사이드
를 대변하는 그런 작품이 아닐까 싶네요.

물론 작가의 기질이 완전하게 변하진 않았지만,
뭐랄까 순화된 느낌 정도라고나 할까요.
 
첫사랑, 마지막 의식
이언 매큐언 지음, 박경희 엮음 / Media2.0(미디어 2.0) / 2008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이언 매큐언의 책 중에서 미디어 2.0에서 그동안 출간된 책들은 구할 수가 없다. 모두 절판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부커상 수상작인 <암스테르담>과 <이런 사랑>은 중고서점을 통해 구했는데, 작가의 초기 소설집인 <첫사랑, 마지막 의식>은 구할 수가 없어서 하는 수 없이 도서관에서 빌려다 읽었다. 도서관에서도 독자들이 애정하는 책이 아니었는지 상태가 너무 훌륭해서 깜짝 놀랐다. 다른 책들은 얼마나 읽어댔는지 책장이 다 너덜거릴 정도였는데 말이다. 나로서는 반가운 일이었지만.

 

<첫사랑, 마지막 의식>은 1975년 이언 매큐언 선생이 발표한 초기 소설집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왜 한 작가의 전작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왜 초기작부터 순서대로 읽어야 하는지에 대해 다시 한 번 알 수 있었다. 자타가 인정하는 글솜씨이지만, 왜 작가는 이런 소재를 가지고 단편들을 지어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100쪽 : 시체란 것은 삶과 죽음이 대조되어야 비로소 의미가 있다.

 

그가 쓴 8편의 단편에는 결핍이라는 공통적인 요소들이 자리잡고 있다. <입체기하학>에서는 주인공 남편이 이미 아내의 제멋대로 행동에 신물이 난 상태다. 아내와의 대화를 통한 해결보다는 자신만의 연구에 몰입해 있는 화자에게서 위기에 처한 결혼문제의 해결을 위한 노력의 결핍이 엿보였다. 증조부가 남긴 타인의 24인치에 달하는 페니스 표본을 애지중지하는 장면을 도저히 정상적이라고는 볼 수가 없을 듯 싶다. 결국 증조부가 남긴 탁월한 일기에서 발견한 입체기하학 기술로 아내의 존재를 소멸시키는 남자. 이 단편은 이완 맥그리거 주연의 단편영화 <사랑의 기하학>이라는 제목으로 만들어졌다고 했던가. 공포와 괴기를 오가는 설정이 아닐 수 없다.

 

이어지는 <가정 처방>에서는 세상에 두려울 게 없는 비행청소년의 성적 판타지가 등장한다. 어쩌면 이렇게 당대 비행청소년 세계를 명확하게 짚어냈는지 그저 놀랄 지경이다. 비둘기들에게 유리 조각을 먹이로 던져 주고, 산 채로 잉꼬를 산 채로 구웠다고? 1실링을 주고 그 바닥에서 소문난 룰루 랄라 양의 비밀스러운 곳을 보겠다던 주인공이 느닷없이 타겟을 바꿔 근친상간으로 넘어가는 장면에서는 경악을 금할 수가 없었다. 거의 모든 것이 결핍되어 있던 소년은 비행으로 세상에 맞선다.

 

모든 상황이 비극으로 종결되는 <여름의 마지막 날>은 또 어떤가. 부모님을 잃고 나서, 형의 제안으로 하숙을 치는 것으로 연명하던 화자의 삶에 등장한 고래 같은 여인 제니. 주인공의 누나 케이트 대신 제니를 무척이나 따른 아기 앨리스와 더불어 구성된 결핍 삼총사는 비극으로의 질주를 조용히 시작한다. 열두 살배기 소년과 같이 기우뚱거리는 보트를 타는 장면은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Shallow Hal, 2001) 같은 로맨스 코드를 기대해 보게도 하지만, 지금까지 작가가 구사한 전복의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않는 비극적 결말로 마무리된다.

 

정말 짧은 단편 <극장의 코커 씨>에서는 성행위에 가까운 전위연극 준비를 하는 중에 정말 불상사가 벌어지는 과정을 코믹하게 그리고 있다. 그들에게는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공간 혹은 계기가 결핍되어 있었던 것일까. 게다가 주인공의 이름이 무려 코커(cocker)라니. "You Are So Beautiful"이라는 제목의 아름다운 노래를 부른 조 코커(Joe Cocker)가 들으면 발작을 일으킬 지도 모르겠다. 짧은 만큼 강렬한 이미지를 남긴 글이었다. 놀랍군 놀라워. 이런 발상을 할 수 있다니 말이다.

 

<나비>에서는 천연덕스러운 소녀 살해범의 심리 묘사가 이어진다. 자신이 마지막으로 목격한 소녀의 죽음에 자신은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말하는 장면에서부터 의심은 시작된다. 누가 봐도 피의자 스타일의 인상을 가진 주인공이 부인할수록 독자의 심증은 굳어져 간다. 진짜 사건의 재구성을 통해 화자가 진범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죄책감이나 양심이 결핍된 진범은 스스럼없이 자신이 “죽인” 소녀의 부모를 만나러 간다. 일련의 과정을 무덤덤하게 수행하는 싸이코패스 킬러의 초상을 이언 매큐언 선생은 면도날처럼 날카롭게 각인한다.

장어를 잡아 떼돈을 벌기 위해 어살을 만들던 남자는 애인 시셀과 함께 거주하던 방에서 소음을 만들어내던 주체가 엄청나게 큰 시궁쥐라는 사실에 경악한다. 그들의 주변은 쓰레기 처리장을 방불케 하는 암울한 공간으로 변해가고, 생계를 위해 공장에 나가기 시작한 시셀은 파김치가 되어 돌아온다. 이것은 어떤 미래에 대한 꿈 결핍증에 시달리는 청년들의 초상이라고 해야 할까. 어머니를 잃고 연극배우 출신 이모 미나의 보호를 받으며 살게 된 소년 헨리의 이야기도 결핍으로 충만되어 있다. 우선 부모의 결핍, 영원히 무대에서의 삶을 지속하고 싶은 나머지 조카마저 배우로 만들어 자신이 상연하는 삶이라는 연극 무대에 올리고 싶어하는 미나. 조카 헨리가 싫어하는 여장을 강요하는 장면에서는 합리적 이성의 결핍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지 엿볼 수가 있었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게 읽은 단편은 바로 <벽장 속 남자와의 대화>다. 사랑하는 남편을 잃고 홀로 된 “벽장 속 남자”의 엄마는 인생의 단계를 밟아 성인으로 성장해야 할 아들이 마치 귀여운 강아지가 성견으로 자라는 것을 막기 위해 성장억제 호르몬 주사를 처방한 것처럼, 언제나 자신의 품 안의 자식으로 남아 있길 원한다. 그 결과, 언어발달도 늦은 십대 소년이 된 벽장 속 남자는 엄마에게 새로운 애인이 생기자 정신지체아라는 모욕을 받으며 집에서 쫓겨난다. 이 또한 예정된 수순이었을까. 식당에서 일자리를 얻기도 하지만 여드름쟁이 셰프에게 구박을 받다가 펄펄 끓는 기름을 악당의 사타구니에 퍼붓는 기백을 발휘하기도 한다. 삶의 정상궤도에서 벗어난 소년은 절도와 수감, 보호감찰을 차례로 경험한다. 외부와 철저하게 단절되어 벽장 안이 가장 편안하고, 엄마의 보호를 받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심정을 방문한 사회복지사에게 고백하는 캥거루족을 뛰어넘은 자라족 남자의 이야기는 서글프다. 벽장 속 남자는 그야말로 사회적 결핍이 만들어낸 결정체일 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다양한 사회의 모습을 단편으로 담아낸 노작가는 나이가 들면서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들어내게 된 모양이다. 냉전시대 적에게 이미 노출된 지도 모르고 열심히 비밀공작을 수행한 스파이물에서, 엄마의 자궁 속에서 살부 음모를 알게 된 태아의 이야기로, 신혼 첫날 파경에 이르게 된 남녀의 혼돈으로, 자신의 종교적 신념에 따라 의도적 자살에 이르게 된 소년 이야기로, 평온한 주말 하루가 악몽으로 변해 가는 과정에 대한 추적으로, 과거 애인의 죽음에 관련된 폭로로 관계가 틀어지는 친구들의 이야기에 이르는 다양한 삶의 이모저모를 문학이라는 그릇에 담아냈다. 이언 매큐언 작가의 전작읽기가 슬슬 마무리되어 가는 순간에 아주 적절한 초기작 읽기였다고 자부한다. 이제 <이런 사랑>, <시멘트 가든> 그리고 <속죄>가 남았다. 분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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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7-07-20 10: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저도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었는데... 이언 매큐언 책은 거의 그랬던 것 같아요. 절판된 책이 많다니 왠지 욕심이 나는군요. 하하.

레삭매냐 2017-07-20 10:51   좋아요 0 | URL
저는 이번에 이언 매큐언 책 읽으면서
모든 책을 다 구했는데, 이 책만 못했네요...

중고서점을 통해 구하려고 대기 중이랍니다.
 
지금 두 가지 길을 다 갈 수만 있다면
마일리 멜로이 지음, 강정우 옮김 / 책세상 / 2013년 11월
평점 :
절판



한동안 영국 문학잡지 그랜타가 선정했다는 팔팔하고 전도유망하다는 젊은 미국 작가들의 책을 컬렉션한 적이 있다. 기존 작가들의 글을 읽는 것도 좋지만,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이렇게 새로운 작가들을 발굴해내는 재미가 있다고나 할까. 아쉽게도 널리 알려지지 않은 만큼, 국내에 소개되기도 어렵고 또 소개되었다고 하더라도 잘 팔리지 않아 곧 절판되곤 했다. 절판됐어도 절판본 사냥이라는 재미를 선사해 주니 이 어찌 즐겁지 않은가.


언제나처럼 서설이 길었다. 지난 주말 한겨레 사설에 등장한 켈리 리처드 감독의 <어떤 여자들>을 읽었다. 그 영화가 궁금해서 찾아봤다. 그리고 내 눈을 사로잡은 영화의 한 커트. 그것은 바로 베스 트래비스와 제이미가 말을 타고 거니는 장면이었다. 어라, 이 장면 내가 어디선가 읽은 내용인데. 위키피디아를 통해 그 단서를 찾을 수가 있었다. 바로 그랜타가 선정한 앞으로 기대되는 미국 작가 중의 한 명이 마일리 멜로이의 단편집 <지금 두 가지 길을 다 갈 수만 있다면>(2009)의 첫 번째 에피소드인 <트래비스 B>를 각색해서 모두 세 개의 옴니버스 구성으로 영화 <어떤 여자들>은 이루어져 있다. 나머지 두 편의 이야기는 마일리 멜로이의 첫 번째 소설집인 <Half in Love: Stories>(2002)에서 소환되었다.


지난 3월 13일날 구입해서 읽기 시작했는데, 읽다 말았다가 이번에 이틀 만에 다 읽을 수가 있었다. 하바드 대학 출신 마일리 멜로이는 미국 몬태나 주 출신으로, 이 소설집에 나오는 다수의 이야기들의 공간적 배경은 몬태나 깡촌이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밀레니엄 캐피탈 뉴욕이나 시카고 혹은 로스 앤젤레스 같은 대도시의 화려한 삶이 아니라 어쩌면 진짜 미국 사람들의 평범하지만 삶의 진한 페이소스를 담은 단면을 짚어볼 수 있는 그런 공간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학비 대출 때문에 자그마치 9시간 운전을 해서 글렌다이브로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에게 학교법을 가르치러 오는 풋내기 변호사와 사랑에 빠지는 카우보이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해서, 클라이언트와 함께 떠난 캠핑에서 성추행을 당한 소녀의 이야기, 어쩌면 자신이 애인이 될 뻔한 아리따운 아가씨의 애인이자 자신의 친구가 불의의 사고로 죽고 지긋지긋한 마을을 떠나기 위해 자신을 상품으로 걸고 래플 게임에 나서게 되는 과정이 담담하게 그려진다. 단편소설이 삶의 진실을 담고 있다는 어느 평론가의 말이 바로 연상됐다. 내가 체험하지 못한 다른 이들이 그리는 삶의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는 책을 읽는 게 아닐까. 그런 점에서 마일리 멜로이가 구사하는 이야기들은 확실히 탁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난 의사형과 건들거리며 스키 강사로 사는 에런과 조지 형제가 등장하는 <스파이 대 스파이> 역시 흥미롭다. 한 부모 슬하에서 자랐지만 서로가 각기 다른 상대방의 삶을 전혀 이해하지 않으려고 고군분투하는 장면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그래, 가족의 실체란 어쩌면 그런 건지도 몰라라는 상상을 구체화했다고나 할까. 결국 금지된 코스에 도전했다가 심각한 부상 혹은 죽을 뻔한 사고현장에서 치고 박는 장면으로 형제는 나름대로 방식의 화해에 도달한다. 그래 그렇게 가는 거지. 이 단편도 눈덮인 스키 리조트를 배경으로 해서 영화화한다면 멋진 장면이 연출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에 관한 옴니버스 구성이라면 아마 안성맞춤일 것이다.


<투스텝>에서는 도무지 바람기를 주체할 수 없는 자신의 남편에 대해 지청구하는 여자친구가 모르는 비밀에 대한 이야기가 눈길을 사로 잡는다. 그렇다, 바로 화자가 욕하는 남편이 일하는 병원에서 일하는 간호사 혹은 레지던트 중의 한 명이 바로 청자인 것이다. 과연 화자는 모든 것을 알고, 그녀를 소환해서 이런 희비극 무대를 마련한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화자는 정말 뛰어난 배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감정을 정말 잘 조절할 수 있는. 독자는 화자가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청자의 모놀로그를 통해 파악해낸다. 청자 역시 유부녀란다. 어떻게 해서든 결혼을 유지하려는 여자친구와 자신의 불륜을 알게 된 남편이 도저히 자신을 용서하지 않으리라는 사실 속에서 과연 청자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그 외에도 끔찍하게 살해당한 자신의 딸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살인범의 고스족 여자친구를 상대하는 중년의 아버지 이야기도 등장한다. 비밀을 꼭 알아내야 직성이 풀리는 걸까? 어쩌면 사실을 모르는 것이 현재의 행복해 보이는 현상을 유지하는데 더 도움이 되는 건 아닐까?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는 감당할 수 없는 사실에 휘청거린다. 자신이 어마어마한 상속의 주인공이 될 지도 모른다는, 환상을 심어준 <릴리애너> 할머니의 등장에 적어도 속으로는 환호작약하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단편도 즐겁다. 수많은 남편들을 갈아 치우며, 상상을 초월하는 부를 축적한 할머니가 자신에게는 일전 한 푼 남기지 않고 개를 비롯한 동물들에게 유산을 남겼다는 소식에 분노하지 않을 예비상속자가 어디 있을까 싶다. 하지만 죽었다던 할머니가 멀쩡하게 등장해서 증손녀들에게 강아지 알레르기를 선사하고, 아버지의 실업과 긴축재정 때문에 피자 같은 패스트푸드 조차 마음대로 사먹을 수 없는 가장에게 잠시나마 희망을 펌프질한다. 릴리애너 할머니는 등장할 때처럼, 사라질 때도 아무런 기약 없이 떠나면서 다시 한 번 희망을 좌초시키는 역할을 충실하게 해낸다. 소설의 초반에 혹시 유령이 등장했나 싶어서 잠시 긴장했다는 건 비밀이 아니다.


자기 아이들에게 수영을 가르치던 자신보다 나이가 훨씬 더 어린 수영 코치와 바람이 난 아버지의 갈등을 그린 <아이들>, 딸들의 등쌀에 아내와 사별한 후 자신이 진짜 사랑한 여인과 결혼하지 못한 채 홀로 외롭게 세월을 보낸 아르헨티나 지주 <아구스틴>이 코끼리 잡는 총으로 하마터면 문제의 근원 중의 하나인 둘째딸을 쏠 뻔한 장면에서는 왜 그렇게 통쾌하게 느껴지던지. 모든 것에 마음이 후해질 수밖에 없는 미국식 명절 크리스마스에 보니와 클라이드의 히치하이킹을 받아 들였다가 곤욕을 당하게 되는 가족이 등장하는 <오 타넨바움>도 흥미진진하다. 희대의 강도들처럼 어느 순간 돌변하는 게 아닌가 하는 나의 상상은 다른 방식으로 전개됐다. 딸에게 곤경에 처한 이들을 외면해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가르쳐 주겠다는 선의가 결국 외도로 결말이 나는 장면에서는 후안무치한 남자 에버렛의 뺨을 갈겨 주고 싶었다. 뭐 삶이 다 그렇게 가는 거겠지.


전반기에 읽은 탁명주 작가의 <도마뱀이 숨 쉬는 방>과 함께 마일리 멜로이 작가의 <지금 두 가지 길을 다 갈 수만 있다면>을 감히 올해 내가 만난 최고의 책들로 손꼽고 싶다. 좋은 책이라면 동시대인이 공감할 만한 특별한 무언가를 담고 있어야 한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두 작품 모두 자극적인 MSG를 사용하는 대신, 단백한 소재들을 재료 삼아 정말 타의추종을 불허할 만한 그런 멋진 그리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미묘한 감정선들을 기가 막히게 포착한 이야기들을 담아냈다. 내가 아는 모든 지인들에게 이 책을 소개해 주고 싶다. 왜 마일리 멜로이의 다른 작품들이 아직도 미출간의 늪에 빠져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채 출간된지 한달도 안되는 마일리 멜로이의 신간 <Do Not Become Alarmed?>는 이번 여름을 뜨겁게 달굴 책 중의 한 권이라고 한다. 원서라도 사서 읽어야 하는 걸까, 고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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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떨어진 폴 2 - 인간계 생활 매뉴얼
남지은 지음, 김인호 그림 / 홍익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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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제 2권이다. 두 번째 “인간계 생활 매뉴얼”에서는 옥황상제에게 대들었다가 화과산 아래 수백년 동안 깔려 지내야 했던 손오공처럼 그분에게 반항했다가 인간계로 추락한 넵퍼 폴이 그분과 대면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분명 그분은 폴의 아버지일 텐데, 그런 암시가 조금도 주어지지 않아 궁금증이 폭증했다. 그분은 묘하게 폴을 설득해서 말 잘듣는 착한 학생으로 만들어서 본래 임무에 충실하게 만들었다. 천사도 아닌 넵퍼 쯤이야 그분께서 어련히 다루어 주실까 싶었다. 아, 지금까지 폴은 Paul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제목을 유심히 보니 Paul이 아니라 Fall이었다. 이런 심오한 뜻이 숨어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인간도 천사도 아닌 믹스종 넵퍼 폴은 태생에서부터 숨은 기호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계로 추락한 넵퍼.


천사들의 지상 아지트이자 알 수 없는 능력을 가진 알은 자신의 카페에 등장해서 꼬장을 부리던 연극배우 시내에게 조금씩 끌려 들어간다. 천사도 인간과 사랑을 할 수 있단 말이지. 하긴 폴의 존재가 인간과 천사의 만남이 아니었던가. 그렇게 작가들은 만화의 곳곳에 그런 신화적 기호들을 잘 배열해 두고 있었다. 좌절하려는 시내에게 알은 더할 나위 없는 그런 위로를 안겨 준다. 어쩌면 거친 현실이라는 바다를 항해하는 우리 외로운 인간들에게 진짜로 필요한 것은 알이 선사해주는 그런 진정성이 담긴 위로가 아닐까 싶다. 꿈을 포기하지 말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라는. 물론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말이다.


한편, 어디선가 숨어서 호시탐탐 넵퍼 폴에게 복수할 기회를 노리던 우리의 궁 아저씨는 비밀무기를 만들어서 세상의 악을 부스트업하는 비밀병기를 만들어내는데 마침내 성공한다. 그리고 폴을 꼬드겨서 그를 소멸시키는데 성공하려는 순간, 여주 공서희 양이 짜잔~하고 나타나서 폴을 구해낸다. 서로 은혜를 입고 갚고 하면서 사랑을 맹글어 가려는 클리셰이의 전개가 흐뭇해지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자자 그렇다고 그렇게 마냥 이야기가 공서희 양과 훈남 폴의 연애로 이어지면 곤란하니 이쯤에서 걸출한 라이벌을 한 명 등장시킬 순서다. 그것은 바로 공서희 양이 딱 하루 동아리 활동을 하던 번역동아리 출신의 또다른 훈남 윤희산 군. 누구 못지 않게 달달하고 화끈한 연애를 꿈꾸던 공서희 양에게 윤희산의 등장은 그야말로 금상첨화가 아니던가. 자신도 모르게 자기 운명의 파트너라는 생각이 자꾸만 드는 폴의 심장이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한다. 물론 마냥 스토리가 달달로맨스로 흘러 가면 곤란하니, 이쯤에서 공서희 양과 폴의 관계를 눈치챈 궁 아저씨의 훼방작전이 무르익을 전망이다. 자, 이제 이어질 3권을 기대하시라.


다음 스토리가 궁금해서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니 웹툰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네이버가 운영하는 코미코란 사이트에서 현재 연재 중이다. 이제 무료 콘텐츠의 시대를 갔는지, 연재 만화를 보려면 돈을 내야 한단다. 내가 돈을 내고 온라인 연재 웹툰을 본 적이 있던가. 이렇게 책으로 만나게 된다면 또 몰라도 온라인 연재를 돈내고 보게 되지는 않을 것 같다. 디지털의 아날로그화에는 대찬성이고 기꺼이 돈을 지불할 용의가 있지만, 여전히 구시대 사람인지라 디지털 미디엄에 대해 페이는 좀 꺼려지는 게 사실이다. 뭐 또 시간이 지나고 아날로그를 디지털이 완벽하게 대신하게 된다면 또 생각이 달라질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잠시나마 넵퍼 폴과 고시낭인 공서희 양과 함께 하는 시간들은 즐겁고 유쾌했다.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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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이언 매큐언 작가의 <넛셸>이 출간될 거라는 소식을 들었다. 1년 전엔가 어떤 출판사 이벤트로 이언 매큐언 작가의 책 <이노센트>를 받았다. 물론 당장 읽지 않았다. 아마 위화 작가의 책에 나오는 그의 글 때문이었나. 비교적 신간에 해당하는 <칠드런 액트>의 출간 소식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아, 그리고 보니 오래 전에 그의 부커상 수상작 <암스테르담>을 아마 읽었던 것 같다. 역시나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 시절은 리뷰도 쓰지 않던 시절이라 막연하게 읽었다는 기억 하나 뿐이었다. 그리고 그의 절판된 책 <시멘트 가든>도 일단 구해 놓았다. 사서 조금 읽다가 접어 두었다.

 

어쨌든 신간 출간 소식을 듣고 중고서점에 달려가 <칠드런 액트>를 사서 읽기 시작했다. 첫 선택으로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초로의 판사와 수혈 받지 않으면 당장 죽을 지도 모르는 뛰어난 재능을 가진 소년과의 대화가 인상적인 수작이었다. 사람들이 이래서 이언 매큐언, 이언 매큐언 하는가 싶었다. 올해 BBC 필름 영화로 발표될 전망이라고 하는데, 어떤 식으로 영화화될는지 기대가 된다. 주인공 피오나 메이 판사 역은 노련한 배우 엠마 톰슨이 맡았다. 소설에서 이언 매큐언은 오랜 결혼생활의 종지부를 찍을 지도 모르는 가정의 위기에 봉착한 유능한 판사의 개인적 고민과 한 생명을 살려야 하는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번뇌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과연 타인의 삶에 우리가 어떤 결정을 내릴 수 있는지 그리고 그 영향력 등에 대해 고민하게 하는 수작이었다.

 

지난 달 중순부터 시작된 나의 이언 매큐언 읽기의 두 번째 작품은 <이노센트>였다. 이미 가지고 있던 책이었기 때문에 선택이 수월할 수밖에 없었다. 참혹한 2차세계대전이 끝난 냉전 시대 동서방의 첩보전의 격전지였던 베를린에서 벌어진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이어서 그런지 더 실감나는 이야기들이 인상적이었다. 이 작품 역시 1993년에 영화화된 바 있다. 앤소니 홉킨스 주연이라고 하는데 오래 전 영화라 구하기가 쉽지 않다. 이언 매큐언 작가는 또다른 작품 <스윗 투스>에서 비슷한 변주를 시도한 것 같은데 아쉽게도 국내에는 아직 소개되지 않은 책이다. 원서로라도 구해서 읽어야 하나 고민 중이다. 역시나 첩보원이 등장하고, 냉전 시절 문학가들에 얽힌 플롯이 아주 매력적인 느낌이다. 위키피디아에서 살짝 내용을 살펴보았는데 마구 읽어 보고 싶어졌다.

 

 

나의 세 번째 이언 매큐언 도전작은 <체실 비치에서>. 도버 해협에 위치한 체실 비치로 신혼여행을 떠난 서로 다른 두 계급 남녀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첫날밤이 너무나 두려운 신부, 욕망에 불타는 하류 계급 출신 풋내기 신랑의 감정이 뒤섞인 끝에 결국 파국으로 치닫는 설정에 그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어댔다. 게다가 분량도 부담이 없어서 그랬는진 몰라도 이틀 만에 다 읽을 수가 있었다. 항상 엉뚱한 상상에 체실 비치를 구글맵으로 검색해 읽어 보기도 했다. 당장 가볼 수 있다면, 달려가 봤을 텐데 하는 또다른 공상에 빠져 보기도 했다. 이 작품 역시 BBC 필름에서 영화로 제작해서 내년 1월 경에 공개될 예정이라고 한다. 영국 출신 극장 연출가 도미닉 쿡의 영화 연출 데뷔작이다. 작가의 필력도 대단하지만, 이언 매큐언 선생은 영화복도 타고난 모양이다. 2007년 부커상 후보에 올랐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돌고 돌아 다시 <암스테르담>으로 돌아왔다. 이 책 역시 미디어 2.0에서 나온 책으로 절판된지 오래됐다. 중고서점에서 구해다 읽기 시작했는데 그전에 읽었던 기억이 전혀 나지 않는다. 이렇게 새로울 수가 있나 그래. 내용은 흥미로웠다. 지난 주말 독서모임 동료분이 말해준 대로, 이언 매큐언은 결정적인 사건으로 소설을 시작해서 그에 얽힌 인간사를 고민과 번뇌를 풀어간다는 스타일이 그대로 드러난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잘난 출판업자 부인 몰리 레인의 때이른 죽음, 각기 다른 순간에 고인의 연인이었던 이들의 부침을 그린 스토리로 1998년 부커상을 받았다.

 

그리고 대망의 신작 <넛셸>을 읽었다. 지난달 독서모임에서 아직 출간되지도 않은 이 책을 그렇게 추천했건만, 이언 매큐언의 다른 책들에 비해 내공이 떨어진 느낌이라고나 할까. 영원한 문제작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햄릿>의 변주 그리고 영화 <마이키 이야기>의 오마쥬까지는 좋았는데 주변에 하도 엽기적인 사건사고들이 넘쳐 나다 보니, 엄마 트루디의 뱃속에 있는 태아가 아버지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미는 엄마와 숙부의 계획에 경악하면서도 속수무책인 상황에 대한 묘사가 흥미로웠다. 다만 시각적 정보도 없이 오로지 청각적 정보에만 의존해서 그리고 엄마가 즐겨듣는 팟캐스트와 라디오드라마로만 세상을 배우고 판단하는 것이 부족할 지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어른도 쉽지 않은 와인 테이스트로 산지까지 알아내는 장면에서는 정말 작가의 분신인 듯한 태아의 모습에 무릎을 꿇을까도 싶었다. 너무 멀리 나가셨소이다 이언 매큐언 선생.

 

 

어쨌거나 다시 수집해둔 이언 매큐언의 다른 작품 읽기에 나섰다. <토요일>. 표지갈이를 하고 새롭게 출간됐지만 내 수중에 있던 책은 구간 <토요일>이었다. 아, 왜 국내에 출간된 이언 매큐언의 모든 책들은 번역자들이 다 다른 건지 그것도 궁금하다. 예전에 헤르타 뮐러의 책을 읽으면서 역자들이 모두 달라 하나의 작가가 아니라 다른 작가의 작품을 읽는 게 아닌가 싶었던 경험에 아무래도 가능하면 동일한 번역자가 같은 작가의 작품 번역을 해주는 게 어떨까 싶다는 의견도 독서모임에서 피력했었다.

 

<토요일>은 2003년 두 번째 이라크전쟁을 앞둔 2월 13일 토요일 하루를 그린 작품으로 주인공 헨리 퍼론의 고달픈 하루에 방점을 찍는다. 신경외과 전문의를 주인공으로 삼은 작가는 자그마치 2년 동안이나 뇌수술 하는 장면을 직접 보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으면서 실제 수술 장면을 마치 해부하듯 고스란히 소설에 옮겨 담았다. 개인의 평온한 일상이 언제라도 예상하지 못한 폭력에 의해 부서질 수 있다는 설정이 정말 공포스러웠다. 우리 사회는 아니지만, 이라크전쟁으로 촉발된 기존 중동질서에 혼란이 IS 극단적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의 발호를 부추겨 오늘날 서방세계의 안전을 위협하는 하나의 원인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어쩌면 이언 매큐언의 예언이 담긴 묵시록으로 읽을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한달여에 걸쳐 모두 6권의 이언 매큐언 책들을 섭렵했다. 지금 읽고 있는 책은 역시 영화로도 만들어진 <이런 사랑>이다. 과학 저술가로 활동 중인 47세 중년 남자 조 로즈가 애인 클라리사와 피크닉을 즐기던 화창한 날에 벌어진 풍선 사건에 개입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다룬 소설인데 초반은 좀 지루했지만, 드 클레랑보 신드롬이라는 어려운 이름으로 알려진 도끼병 환자 제드 패리가 등장하면서 소설이 재밌어지기 시작했다. 이래서 소설은 결정적 순간이 있다는 것일까. 초반엔 충격적이었지만 그냥 그렇게 전개되던 소설이 단박에 흥미진진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영화도 구해놨는데, <사랑을 견뎌내기>라는 소설과는 좀 다른 제목이라 흥미로웠다. 36살의 대니얼 크레익이 원작 소설의 주인공보다 열 살이나 어린 역할을 멋지게 해낸 듯 싶어 기대가 된다. 아무리 봐도 미친 사랑에 빠진 제드 패리 역의 리스 이판도. 소설을 다 보고 나서 영화도 봐야지.

 

이언 매큐언과의 나의 마지막 여정은 <시멘트 가든>을 거쳐 <속죄>로 마무리될 전망이다. 아직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솔라>와 <스윗 투스>의 출간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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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6-29 19:0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전작 읽기의 모범을 보여주시는 레삭매냐님. 정말 존경합니다. 저는 전작 읽기를 시도하다가 포기해서 엎어진 일이 많아서 전작 읽기를 결산하는 글을 써본 적이 없습니다. ^^;;

레삭매냐 2017-06-29 23:03   좋아요 2 | URL
아직 전작을 완성한 게 아니라 중간점검
수준인데, 과찬이십니다 :>

세 권 플러스 소설집도 하나 있었네요.
일단 구해야겠네요.

진짜는 로베르토 볼라뇨인데 큰산이네요.

AgalmA 2017-06-29 21: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작 읽기는 ˝이언 매큐언은 결정적인 사건으로 소설을 시작해서 그에 얽힌 인간사를 고민과 번뇌를 풀어간다는 스타일˝... 이런 걸 발견하게 되어 좋은 거 같아요^^
도선생 책 열심히 읽어가며 저도 제 나름의 종합을 하게 되는 게 좋더라고요^^
레삭매냐님의 이언 매큐언 도전 바라만 봐도 흐뭇하네요^--^ 끝이 얼마 안 남았군요. 짝짝짝~

레삭매냐 2017-06-29 23:06   좋아요 2 | URL
지금까지 잘 달려 왔는데 남은 걸
잘 마무리해야지 싶습니다.

최고작이라는 <속죄>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도끼 선생의 책도 도전해 보고 싶은데
원체 대작들인지라 ㅎㄷㄷ 하더라구요.

목나무 2017-06-30 09: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 진짜 대단하시네요. 한 달 새에 이리 많은 작품들을....^^
영화도 챙겨보시기까지...저는 <속죄>를 영화로 만든 <어톤먼트>만 봤네요.
<첫사랑, 마지막 의식>은 이미 읽으신 건가요? 언급이 없는 듯하여...
저는 이 단편집도 무척 좋았거든요.
전작 끝까지 하시기를 응원합니다. ^^ ㅎㅎ

레삭매냐 2017-06-30 09:54   좋아요 2 | URL
지금 <이런 사랑> 읽고 있는데
예전처럼 진도가 쫙쫙 나가지 않네요.
일반적 독서 슬럼프가 아닌가 싶습니다...

말씀하신 소설집은 구할 수가 없어서요 :>
개인이 파는 중고책은 배송료가 비싸서
고민 중이네요. 일단 질를까요?

<첫사랑>까지 더하면 네 권 더 읽어야겠네요.

목나무 2017-06-30 09:58   좋아요 2 | URL
<첫사랑, 마지막 의식>은 단편집이긴 한데... 저는 그 단편들이 조금 충격적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내용들이....... 그래서 제가 매큐언이란 작가를 제대로 인지하고 또 좋아하게 되었다는...ㅎㅎㅎ
레삭매냐님의 취향이 어떤지 몰라서 반드시 구입하라고는 말씀 못드리겠는데 언젠가 기회가 되면 읽어보셔도 좋을 듯해요. 장편과는 또다른 매력이 확실히 있어요. ^^

레삭매냐 2017-06-30 10:22   좋아요 2 | URL
뭐 이왕에 시작한 컬렉션이니 언제고
수중에 넣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6년 전부터 번역 중이라는 <솔라>는
과연 언제 나오는 걸까요.

<Sweet Tooth>가 아주 궁금한데 원서
로라도 살까 고민 중입니다.

단발머리 2017-06-30 12: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 정말 멋지십니다.
저는 딱 두 권 읽었는데, 레삭매냐님 페이퍼 읽으면서 어, 어, 어... 이것도, 이것도, 이것도 읽어야겠다, 하고 있습니다.
사실 도서관에서 대출해서 저희집까지 왔다가 다시 돌아간 책들도 여럿 있습니다. ㅠㅠ
이렇게 한 작가의 책을 주욱 이어서 읽는게 참 좋은데,
전 그게 잘 안 되더라구요. 레삭매냐님 보고 도전받네요.
아하.... 이렇게 하는거구나~~ 하면서요^^
속죄,편 기다립니다.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레삭매냐 2017-06-30 14:12   좋아요 1 | URL
나름 슬럼프여서 완독에 성공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남은 책들 모두 읽는
쾌거를...

저도 도서관에서 빌리기만 하고 반납하기를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이언 매큐언 선생의
<넛셸> 읽고서 햄릿 빌렸다가 펴 보지도 못
하고 반납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