뼈들이 노래한다 - 숀 탠과 함께 보는 낯설고 잔혹한 <그림 동화> 에프 그래픽 컬렉션
숀 탠 지음, 황윤영 옮김 / F(에프)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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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열광해 마지않는 디즈니 제작 애니메이션의 상당수가 저작권을 지불할 필요가 없는 야코프와 빌헬름 그림 형제의 <그림 동화>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호주 서부의 시골 아저씨 숀 탠은 저자들 생전에 리뉴얼이 자그마치 7번이나 이루어진 <그림 동화>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석조 조각과 토우 느낌이 나게 종이 반죽과 공기 건조 점토 그리고 아크릴 물감을 이용해서 재창조해냈다. 사실 나도 하나 가지고 싶은 생각이 살짝 들 정도로. 저자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자신이 만든 작품(!)은 팔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지 아티스트라면 이 정도 패기는 있어야겠지.

 

그림 형제가 1807년부터 수집하기 시작해서 1812년에 처음으로 펴낸 <어린이와 가정을 위한 이야기>에는 86편의 수집된 민화 혹은 민담이 실려 있었다고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신데렐라 그리고 백설공주 등의 이야기의 원래 서사는 정말 잔혹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들은 디즈니나 다른 편집자들이 아이들 용으로 순화한 이미지라고나 할까. 반면 숀 탠 작가는 아무래도 원작에 가깝게 다시 창조해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야 어른이니까 괜찮지만, 백설공주의 계모가 사실은 친모고 사냥꾼에게 자기 딸을 죽이고 허파와 간을 가져 오라는 명령을 내렸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게다가 위기 서사를 겪은 공주는 자신의 결혼식날 어머니를 초대해서 공개처형에 준바하는 처벌을 내렸다. 디즈니식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신데렐라 역시 살벌하기는 마찬가지다. 하긴 그림 형제들도 어린이와 가정에 맞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처음에 실렸던 이야기들 가운데 선별해서 18개 정도는 빼는 편집능력을 선보여 주기도 했다.

 

다시 <뼈들이 노래한다>로 돌아가 보자. 숀 탠은 그림 동화 중에서 가장 중요한 컷을 선택해서 입체화시킨다. 이미지를 우측에 배열하고, 좌측에는 축약된 이야기를 배치한다. 사실 나도 200개에 달하는 원작 그림 동화에 대해 정통하지 못하다 보니 인터넷으로 도움을 받기도 했다. 어느 신문사에서 잔혹동화 시리즈를 다루고 있어서 몇 편 읽어 보기도 했다.

 

그런데 어떤 이야기들은 우리 동양 사회에서도 들어본 것 같은 유사성이 보인다. 가령 예를 들어 나이가 들어 음식물을 흘리는 할아버지에게 나무로 만든 그릇을 주고, 부모가 구박하자 아이가 나중에 자기가 어른이 되면 부모에게 여물통을 준다는 말은 우리네 어느 동화랑 상당히 비슷하지 않은가 말이다.

 


<거위치는 소녀>의 이야기는 원래 자신이 누려야 할 것이 아닌 것을 사악한 방법으로 차지한 시녀에 대한 처벌 서사가 등장한다. 작가가 만든 대문에 걸린 말하는 말 ‘팔라다’ 밑에 떨어진 핏자국을 보지 못했다면 그리고 더 많은 이야기를 찾아보지 않았다면 아마 그냥 무심하게 넘어갔을 지도 모르겠다.

 


64번째 <새하얀 새>는 샤를 페로의 동화 <푸른 수염>과 그 맥을 같이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신화, 전설 그리고 민화에 등장하는 터부(taboo)는 반드시 깨져야 한다는 진리를 담고 있다. 경고가 주어진다, 무엇무엇은 반드시 하면 안된다고.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들은 이들에게 그것은 하지 말라는 것은 반드시 해봐야 한다는 메시지로 탈바꿈되어 전달된다. 보지 말라는 것은 보고 싶고, 하지 말라는 행동은 반드시 해야 한다. 그래야 뒤 따르는 그에 응징을 가하는 처벌 서사가 완성되니 말이다. 동서양을 막론한 서사의 법칙이라고나 할까.

 

Spirit Shakers : https://www.youtube.com/watch?v=So109Xuzv28

 

아무런 재주가 없는 곰손이지만, 문득 숀 탠 작가의 작업 내용을 보다 보니 나도 종이반죽과 공기 건조 점토만 있다면 작가처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착각에 잠시 빠져 보았다. 작가가 달래 작가더냐 하고, 어설픈 창조에 나서려는 자신을 말린다. 아, 그리고 보니 집 어딘가에 오래 전에 사둔 스피릿 셰이커가 네 개 있을 텐데. 매스 아트 칼리지 출신 존 베어링굴드란 아티스트가 13년 전부터 만든 거였구나. 유튜브의 세상, 참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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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스 민음사 모던 클래식 46
유디트 헤르만 지음, 이용숙 옮김 / 민음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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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제 신문기사를 통해 유디트 헤르만이라는 독일 출신 작가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리고 부지런히 중고서점에서 그의 책을 찾을 수 있는지 알아보았다. 아쉽게도 민음사에서 모클 시리즈로 나온 작가 책 세 권 중에 두 권이 절판되었다. 오늘부터 패밀리 세일 들어간다고 하는데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목록을 검색해 보았으나 역시나 없다. 일단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단지 유령일 뿐>은 주문했다. 대한통운이 파업 중이라던데, 당일배송이 가능할까부터 걱정이 되었다. 파업에 나선 노동자들 걱정이 아니라. 그렇게 난 이기적인 인간이었다.

 

냉큼 도서관으로 달려가 절판된 책 <알리스>와 <여름 별장, 그 후>를 빌려서 허겁지겁 읽기 시작했다. 마르케스의 <예고된 죽음의 연대기>처럼 죽음의, 사신의 그림자가 소설 시작에서부터 등장한다. 주인공은 베를린에서 죽어가는 옛 연인 미햐를 간호하기 위해, 아니 그의 임종을 지키기 위해 츠바이브뤼켄으로 달려온 알리스다. 그런데 미햐에게는 아내 마야도 아이도 있다. 굳이 알리스가 이곳까지 올 필요가 있었을까. 사실 암으로 죽어가는 옛 사랑 앞에서 알리스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아이를 데리고, 마야와 알리스가 잠시 묵을 집을 찾아다니는 장면도 처량하기 그지없다. 기묘한 것은 미햐와 알리스의 관계가 종언을 고했을 때, 바로 마야와의 새로운 관계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현재가 달라질 건 없겠지만. 결국 미햐는 죽었고, 마야와 아이 그리고 알리스는 베를린으로 되돌아간다. 모든 것이 무너져 버리고 나니 모든 일이 가능했다(42P).

 

두 번째 <콘라트> 편에서는 루마니아 남자 그리고 안나와 함께 이탈리아 몬테발도 산이 보이는 가르다 호수 부근에 사는 지인 콘라트와 로테 부부를 찾은 알리스의 이야기다. 사람 좋아 보이는 콘라트 씨는 고열로 곧 병원신세를 지게 되었다. 70세의 콘라트 부부에 비하면 젊은이인 45세의 알리스는 친구들과 누오보 폰테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살인적 비용을 감수하면서. 그런데 알리스와 콘라트는 도대체 무슨 사이지? 어떤 사이길래 다른 친구들까지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 걸까? 그 질문에 대해 알기도 전에 콘라트에게는 죽음의 그늘이 드리워지기 시작한다. 실컷 술파티를 벌인 알리스 일행이 콘라트가 입원한 병원으로 로테를 데리고 차를 몰고 갔다가 그 유명한 가르다 호수에서 수영을 즐긴다.

 

누군가는 죽어가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삶의 축복을 한껏 즐기는 모양이다. 그것이 삶의 피할 수 없는 모습일까. 일행이 집에 돌아오는 길에 주유소에 들러 차에 기름을 넣고, 돌로미티 아이스크림을 먹는 동안 콘라트는 영면에 든다. 정원사가 이탈리아 말로 그들에게 콘라트 씨의 죽음을 알린다. 비타 브루다, 그렇지 인생은 끔찍한 거지. 콘라트는 관에 실려 알프스를 넘어 독일로 갔다. 남은 이들은 타인의 죽음에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삶의 순간들을 영위한다.

 

다음 주자는 리하르트다. 어느 토요일 오후, 마르가레테가 전화해서 알리스가 담배와 물이 필요하다고 한다. 곁에서 죽어가고 있는 리하르트를 간호해야 하기 때문에 잠시라도 틈을 낼 수가 없었던 걸까. 알리스는 두말 하지 않고, 독서삼매에 빠진 라이몬트에게 알리고 집을 나선다. 리하르트와 마르가레테에게 가는 길에 가게에 들러 담배 두 갑과 생수 두 병을 사서 주황색 봉투에 담아 배달한다. 그런데 또 알리스는 리하르트 부부와 어떤 관계지? 전편에서 콘라트 씨는 전염성 질환으로 돌아가신 것 같은데, 리하르트의 병명은 등장하지도 않는다. 왜 그가 자리에서 죽어 가고 있는지. 집으로 돌아온 알리스는 라이몬트는 얼음처럼 차고 달콤한 맥주를 마시고, 다음날인 일요일에는 호수를 찾아 수영을 한다. 그전 이야기들에서 부겐빌레아와 협죽도가 등장했었는데 이번에는 이름 모를 푸른 꽃이 등장한다(네번째 말테 삼촌 이야기에서는 11월 개나리다). 물론 꽃 이름은 모르겠고. 마르가레테는 리하르트가 죽기도 전에 햄버거 스테이크와 맥주를 제공하는 장례식 준비에 대해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죽지도 않은 사람의 장례식 타령이라니, 아무래도 우리네 문화와는 달라서인지 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좀 그렇지 않은가. 리하르트가 죽었다는 소식은 결국 듣지 못했다.

 

그런데 한 사람의 삶에서 죽음이 이렇게 가까울 수가 있는 걸까? 알리스는 사신인가? 그녀가 가는 곳마다 죽은 사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것인가. 아니면, 알리스가 앞으로 임종을 맞을 이들과의 관계의 연장선에 서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동안 너무 죽음과 담을 쌓고 살아와서 죽음에 대해 아는 게 없는 것인 지도 모르겠다. 유디트 헤르만는 기묘하게도 죽음의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자세한 설명을 해주지 않는다. 게이 삼촌 말테의 연인으로 추정되는 프리드리히 씨의 만남도 좀 이해하기 힘들다. 자신이 얼굴도 모르는 삼촌의 죽음에 대해 아는 프리드리히 씨와 만나 무엇을 하겠다는 거지? 사실 자신도 잘 모른다.

 

마지막 망자 라이몬트의 경우는 예전의 경우와 상당히 다르다. 자신과 함께 살던 남자가 아니었던가. 살아남은 자는 살아야 한다. 그래서 알리스는 주변 정리에 나선다. 망자가 남긴 물건을 정리하는 일은 정말 쉽지 않을 것 같다. 온갖 사연이 담긴 물건들을 정리한다는 건, 어쩌면 그 사람과의 인연도 같이 정리한다는 뜻이 아닐까. 그전 이야기에 등장했던 신원 불명의 루마니아 남자도 등장해서 사실 좀 반가웠다. 알리스 말고는 다른 등장인물에 대한 이야기가 없어서 좀 아쉬웠는데 유디트 헤르만은 그런 사실을 알기라도 하듯이, 그런 캐릭터들에 대한 전언을 남긴다. 그런데 라이몬트는 왜 죽었지, 궁금한데 작가는 알려 주지 않는다. 그것도 명백한 하나의 전략이겠지만.

 

처음으로 만난 유디트 헤르만의 소설의 곳곳에서는 창백한 고독이라는 이미지가 떠올랐다. 세상 무심한 듯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이 이런가 싶기도 하고. 삶과 죽음이라는 경계선에 위태롭게 매달린 어느 실존의 모습을 엿본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기대했던 강렬한 서사는 존재하지 않지만, 어쩌면 누구나 회피하고 싶어 하는 죽음이라는 주제로 우리네 삶의 단면을 관조하고 변주했다는 점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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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나무 2018-11-23 15: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저 <여름 별장, 그 후> 있어요!!! 근데 저걸 언제 왜 샀는지는 도통 기억에 없어요! ㅋㅋ
<알리스>는 중고서점에서 구해봐야겠어요! ^^
왠지 이 겨울에 어울리는 작가가 아닌가 싶네요~

레삭매냐 2018-11-23 15:38   좋아요 0 | URL
<여름 별장, 그 후>는 어제 <알리스>랑
같이 도서관에서 빌려다 읽기 시작했답니다.

어째 책 좀 사서 볼라치면 죄다 품절/절판인지.

<단지 유령일 뿐>은 영화로도 있다고 하더라구요.

서가를 찾다 보면 정말 벼라별 인연으로 만나게
되는 책들이 다 있더군요. 우수수한 계절에 딱
맞는 작가라는 의견에 격렬하게 공감합니다.
 
당신이 남긴 증오
앤지 토머스 지음, 공민희 옮김 / 걷는나무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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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열여섯 살짜리 흑인 남자애가 백인 경찰의 손에 죽었다. 그런데 그 친구가 만약 내 친구라면? 그리고 내가 그 현장에 있었다면? 나는 과연 그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생전 경험해 보지도 그리고 상상도 해보지 않은 일이라 과연 어떨까 싶다. 앤지 토머스의 <당신이 남긴 증오>는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이야기를 풀어 나가기 시작한다.

 

인종주의 문제는 미국의 뿌리 깊은 문제고, 여전히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문제다. 소설의 주인공 스타 아마라 카터는 백인 친구들이 빈민가라고 생각하는 가든 하이츠 출신이다. 아버지는 교도소에서 3년형을 살고 출소해서 가게를 운영 중이다. 어머니 리사는 간호사로 18세에 스타를 낳았다. 어쩌면 스타의 가정은 흑인 가족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의 축소판일 지도 모르겠다. 스타의 오빠 세븐은 이복형제다. 스타의 부모는 스타는 어떻게는 가난의 대물림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고 싶어, 자식들을 백인들이 다니는 윌리엄슨 고등학교에 진학시켰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흑인이라는 카터 가족의 정체성이 없어지는 걸까? 크리스 브라이언트라는 백인 남자애와 사귀고, 헤일리와 마야 같은 백인 친구들과 어울린다고 해서 백인 경찰 I-15의 총에 맞은 죽은 어린 시절 절친 칼릴 해리스가 돌아올 것 같지는 않다. 설상가상으로 스타는 더 어렸을 때, 삼총사 중의 하나였던 나타샤가 총에 맞아 죽는 걸 목격하기도 했다. 백인 경찰의 과잉진압도 문제지만, 총기규제도 좀 더 쎄게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아니 어쩌면 <당신이 남긴 증오>에는 인종주의와 총기규제 등 미국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모든 문제의 도가니탕일 지도 모르겠다.

 

경찰로 주류 백인사회에 편입된 스타의 삼촌 카를로스는 스타를 설득해서 경찰서에 와서 진술을 하라고 종용한다. 스타가 어려움을 이겨 가며 진술을 하는데 성공했지만, 그런다고 해서 백인 경찰 I-15의 유죄가 입증된 것은 아니었다. 당연히 비무장한 흑인 소년에게 세 방이나 총탄을 쏜 백인 경찰을 처벌하라는 흑인들의 요구가 폭동에 준하는 폭력을 수반하고 거세게 발생한다. 이렇게 되리라고 예상을 했지만, 그 예상이 적확하게 들어맞았다는 사실에 실망할 수밖에 없다. 헤일리와 마야가 스타에게 경찰 총에 맞아 죽은 칼릴을 아느냐고 묻는 말에 스타는 모른다고 거짓말한다. 거짓은 언제나 더 큰 파국을 몰고 오는 걸 스타가 과연 몰랐을까. 텀블러 친구맺기가 끊어질 걸 걱정할 게 아니라, 스타는 진실을 친구들에게 사전에 털어 놓아서 우정의 미세한 균열을 막았어야 했다.

 

마약 중독자 브렌다의 아들인 칼릴이 어떻게 해서 마약 거래상이 되었는지 스타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거리에 나온 흑인 아이들은 너무나 쉽게 범죄 조직의 손쉬운 먹이가 되었다.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휴대폰이나 농구화 같이 아이들이 너무나 가지고 싶은 물건들을 사기 위해 가장 손쉬운 방법이 바로 흑인 갱단에 가입하는 것이었다. 그런 칼릴을 마약 거래상으로 몰아 당연히 백인 경찰의 총에 맞아 죽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고, 아무도 처벌받지 않는 현실이 너무나 초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자유와 정의가 넘쳐흐른다는 민주주의의 본 고장 미국의 진짜 모습이 고작 이런 것이었나. 정말 거지 같구나.

 

T.H.U.G. LIFE

 

스타의 엄마 리사가 자신의 사랑하는 딸에게 들려준 미국 흑인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야말로 이 책 <당신이 남긴 증오>에서 저자 앤지 토머스가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아무리 올바른 일을 하더라도, 일은 어디에선가 꼬일 수도 있는 법이다. 그렇다고 해서 옳은 일을 하지 않을 것인가? 그것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마약과 갱단이라는 일상적이고 구조적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양질의 교육이 필요하다. 스타의 아빠 빅 마브도 고등학교 졸업장이 없어서 그 고생을 하지 않았던가. 이 세상의 어느 부모가 자신의 자식들이 거리에서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죽는 비극을 원하겠는가. 또 하나의 역설은 스타의 엄마 리사가 주장하는 것처럼, 모두가 가든 하이츠 같은 빈민가의 삶이 싫다고 해서 떠나 버린다면 남은 사람들은 어쩌란 말인가? 우직하게 빅 마브처럼 마을 공동체를 위해 활동하는 음지의 활동가도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투팍이 한 말을 인용해서 거듭해서 주장하듯이, 분노와 증오로는 어떤 것도 해결될 수 없다.

 

사실 우리는 이미 칼릴 해리스를 쏜 경관 I-15 브라이언 크루즈 주니어가 대배심에서 풀려날 것을 예상하지 않았던가. 과연 미국 사회에 정의는 살아 있는가? 16살짜리 꼬마 흑인 소년의 목숨보다, 어이 없는 이유로 총을 쏜 백인 경관의 목소리가 더 가치있게 들리는 현실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하는가 말이다. 더군다나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 이후, 미국 사회에서 증오 범죄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저자 앤지 토머스는 분노와 증오 같은 감정적 대응 대신 이성적인 판단에 방점을 찍는다. 하지만 과연 내가 만약 칼릴의 형제였다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 있을 수 있을까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앤지 토머스는 소설 <당신이 남긴 증오>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미국사회에 만연한 인종주의와 폭력에 대한 서사를 구축해 나간다. 가든 하이츠 출신 스타는 주로 백인들이 다니는 윌이엄슨 고등학교에서 백인 친구들과도 무리 없이 지내야 하고, 또 집에 돌아와서는 빅 마브와 리사의 딸로 흑인이라는 정체성에 맞게 지내야 한다. 하지만 중요한 결정의 기로에 섰을 때, 빅 마브의 딸 스타는 “우리의 목소리가 무기”다라는 주장에 동조해서 경찰서에 출두하고 진술을 하고 대배심에 나가는 용감한 결정을 내린다. 결국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인식하면서 성인으로 성장하는 과정도 멋졌다.

 

Do the right thing!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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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열린책들 세계문학 158
하인리히 뵐 지음, 홍성광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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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참 웃긴다. 이 책을 2011년에 샀는데(무려 7년 전에!) 도대체 어디에 두었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지난번에 읽은 <천사는 말이 없었다>를 빌리러 도서관에 갔다가 이 책도 빌려서 같이 읽었다. 분량이 적어서 부담이 없었다.

 

1952년 가을의 어느날 서독의 대도시 쾰른에서 시작된 프레드 보그너 씨의 이야기는 48시간에 걸쳐 진행된다. <천사는 말이 없었다>에서 바로 종전 당시의 풍경을 하인리히 뵐이 묘사했다면,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에서는 종전 뒤, 제법 시간이 흐른 뒤 폐허된 독일에 대한 살풍경한 모습을 다루고 있다. 소설의 주인공은 어느 성당 산하 관청의 전화 교환수로 일하는 프레드 보그너다. 자신의 월급 320마르크를 모두 아내 캐테(카타리나)에게 가져다 주고 자신은 지인들에게 돈을 빌려 호텔방을 전전긍긍한다.

 

주택관리 위원회 회장으로 힘깨나 쓰는 프랑케 부인 때문에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지내지 못하고 부랑자 같은 거리생활을 하는 중이다. 전쟁이 끝나고 별별 일들이 벌어진다고 하는데, 노동자가 안식할 곳이 없어 거리를 방황하는 게 확실히 정상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보그너 씨의 그런 행동이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랬다. 자신이 한 달 동안 벌 수 있는 수입이 뻔한데, 그렇게 지인들에게 빚을 지다가는 언젠가 결국 모두에게 외면당하는 상황이 오지 않겠는가 말이다. 이미 다수의 지인들이 그의 방문을 두려워하지 않았던가. 하긴 오죽 했으면 자신이 과외를 맡은 집에서 일하는 하녀에게 돈을 빌릴 생각을 다 했을까.

 

하인리히 뵐은 이 소설을 1953년에 발표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패전국 독일이 라인 강의 기적을 이룰 것이라고 누가 예견했을까. 지금은 사실상 유럽 대륙의 패자로 프랑스와 더불어 통합유럽을 이끌어 가는 쌍두마차가 되었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패전으로 인한 민족의 자존감 상실 그리고 빛이 보이지 않는 미래에 대한 암담함이 소설의 곳곳에 산재해 있다. 어쩌면 독일의 민족의 미래와 주인공 프레드 보그너의 그것은 동일시해도 괜찮을 정도로 말이다.

 

소설의 또 다른 시선의 보그너의 아내 캐테의 것이다. 보그너 아저씨가 어쨌든 빚을 내서 거리에서 슈납스와 굴라시 수프를 먹고, 핀볼 게임을 한다면 온전하게 세 아이의 육아를 맡은 캐테의 시간들은 더욱 갑갑하게만 느껴진다. 남의 더부살이를 하는 신세에, 이미 쌍둥이를 잃은 경험 그리고 설상가상으로 임신했을 가능성이 대두되면서 캐테의 고민은 더욱 깊어간다. 전쟁 중에 통신병이었던 보그너 씨는 비니차와 세바스토폴 같이 한때 무적의 독일군이 석권했던 러시아 평원의 격전지에서 독일 본토로 연락을 했었다고 했던가. 그런 과거의 영광이 지금의 폐허 같이 신산한 삶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캐테에게 지금 중요한 것은 일용한 양식과 지옥 같은 시간들을 버텨낼 현금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전히 사랑하는 보그너 씨와의 이별을 상상한다.

 

그런데 여전히 가부장적 시스템이 작동하는 독일 사회에서 애가 셋이나 딸린 여성이 남편의 경제적 부양 없이 가정을 유지하는 게 과연 가능했을까? 게다가 막둥이는 갓난쟁이가 아니었나. 물론 캐테의 그런 결정을 내리게 된 배경에는 무력감에 빠진 보그너 씨가 행사하는 가정폭력을 하나의 원인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도저히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가난이 횡행하는 가운데서도, 하나 같이 살찐 가톨릭 사제들과 드로기스트(일종의 쁘띠 부르주아)들의 구호가 난무하는 쾰른이라는 대도시의 삶은 사회적 양극화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지금의 그것과 다를 게 없다는 느낌이 불쑥 들었다.

 

제발트 선생 덕분에 독일 폐허문학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현장에서 패전 이후 독일의 비참한 현실을 직접 경험한 하인리히 뵐의 글을 통해 폐허문학의 실체와 마주하게 되었다. 며칠 전에 7년 전에 산 책을 드디어 서가의 귀퉁이에서 발견했다. 집에 멀쩡하게 있는 책을 두고 도서관에서 빌려다 읽었다니. 리뷰도 어떻게 대강 쓴 그런 기분이다. 리뷰가 나의 기록을 위한 것이라는 걸 생각한다면 썩 나쁘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책은 빨랑 읽고 나서 바로 기억이 휘발되기 전에 써야 한다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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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북소녀 2018-11-21 12: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덕분에 웃어요^^ 저도 이런 웃긴 사례가 있어서요.ㅋ

레삭매냐 2018-11-21 13:24   좋아요 1 | URL
정말 당황스러운 장면 중의 하나는...
중고서점에 책 살 때, 이 책은 손님이
그전에 구매하신 책입니라 - 라는
멘트를 들을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만.

뒷북소녀 2018-11-21 13: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구매창에 팝업 뜰 때도 당황스러운데 직접 그 멘트를 날려주다뇨. ㅋㅋㅋ

레삭매냐 2018-11-21 14:22   좋아요 1 | URL
가끔 내가 이 책을 샀나 안 샀나 헷갈릴
때가 있더라구요...

그런데 도대체 책은 찾아볼 수가 없고...
읽고는 싶고. 분열하는 나의 자아

카알벨루치 2018-11-21 14: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달과 6펜스>2권 다른출판사꺼 샀다가 하나는 선물줬다는...근데 진짜 웃깁니다 다 읽고 난 후 발견한 책 ㅎ

레삭매냐 2018-11-21 14:24   좋아요 1 | URL
아 책 선물 ~~~

요즘엔 책 선물 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워낙 선수들 말고는 책을 읽지 않으니
말입니다...

저만 그런 게 아닌 것 같아 위로를 받
습니다.

카스피 2018-11-22 11: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 떄로는 책정리를 해야되요.저도 있는 책을 또 사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 사실을 확인하면 제 자산이 종 황당해지더군요^^;;;

레삭매냐 2018-11-22 14:13   좋아요 0 | URL
이사 핑계 대고 책정리한다고 하면서도...
선뜻 책장에서 책을 발라 내기가 너무
힘드네요.

이런 판에도 꾸준하게 책을 사대고 있으니
답답한 노릇입니다 ㅠㅠ 격하게 공감합니다.
 
브루투스의 심장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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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타에 등장한 짧은 북트레일러를 보고 자그마치 30년 전에 발표된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 <브루투스의 심장>을 읽었다. 정말 오래 전부터 읽고 싶었던 책인데 이제야 읽게 됐다. 역시 책읽기에는 타이밍이 있는 모양이다.

 

중견 산업기계 제조업체인 MM중공업에서 흙수저로 자기 능력 하나만 믿고, 사장의 둘째딸과 결혼해서 기업을 통째로 삼키겠다는 야심에 불타는 남자 스에나가 다쿠야는 니시나 도시키 전무에게 접근하기 위해 아마미야 야스코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다. 문제는 친밀한 관계를 넘어 성적 관계까지 갖다가 그만 덜컥 아이가 생겨 버린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야스코와 관계를 맺은 사람이 자신 뿐만 아니라 MM중공업의 미래의 후계자이자 개발실장 니시나 나오키와 라이벌 하시모토 군도 있다는 점이다. 각각의 이유 때문에 야스코를 제거하기로 결의한 세 남자는 ABC 알리바이로 A가 야스코를 죽이고, 뒤에 대기하고 있던 B와 C가 시체를 릴레이로 운반하는 작전을 세워 야스코를 제거할 계획을 세운다. 경찰의 추적을 피하기 위한 기발한 아이디어가 아닌가.

 

어린 시절, 부모에게 학대받으며 로봇전문가로 자수성가한 남자 다쿠야는 냉정하기 그지없는 남자다. 오로지 성공을 위해서라면, 자신과 몸을 섞은 여자 혹은 자신의 아이를 가진 지도 모를 야스코를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 없애버릴 수 있다. 물론 소설은 세 남자의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는다. 야스코라고 생각하고 인계 받은 시신이 알고 보니 총 계획의 수립자였던 나오키라는 사실에 다쿠야와 하시모토는 경악한다.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일이 틀어진 것일까? 초짜 장르 소설작가답지 않게 히가시노 게이고는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법에 정통한 면모를 보여준다.

 

일단, 범인이 누구인지에 대해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둔다. 그리고 연쇄살인 프로젝트는 계속된다. 만년필에 장치한 청산가스에 교살된 나오키에 이어 두 번째 희생자 하시모토가 죽는다. 다쿠야도 비슷하게 죽을 뻔한 위기를 모면한다. 도대체 범인은 누구인가? 자신을 죽이려는 계획을 눈치 챈 야스코가 선수를 친 걸까? 사야마 형사는 집요하게 범인의 뒤를 추적한다. 세상에 완전범죄는 없다고 생각하는 형사는 공모자들의 알리바이를 깨기 위해, 살인 동기와 행적을 집요하게 추적한다. 최근에 읽은 그렉 올슨의 소설에서 에스더 반장도 그랬었지. 속된 말로 아다리가 들어맞지 않기 때문에 사건 종결 뒤에도 추적을 멈추지 않는다.

 

다쿠야를 몸종 부리듯 하는 MM중공업의 둘째딸 호시코의 행동도 전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오로지 출세를 위해 그녀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처럼 보이는 다쿠야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수중에 넣게 되면, 그동안의 수모를 갚기 위해 자신의 와이프도 처단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지 않은가. 무능해 보이는 임원과 자신에게 적대적인 성향의 안전과장을 내치겠다고 결심하는 장면은 그의 공격적 성향을 잘 드러내준다. 물론 더 놀라운 그의 인격이 결말 부분에서 기다리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사람보다 로봇을 더 사람답게 생각하는 그런 성향이라고나 할까.

 

물론 모든 계획이 주인공 다쿠야의 계획대로 실행되지 않는다. 경찰을 경찰대로, 가장 유력한 공모자로 다쿠야를 지목하고 그의 알리바이를 깨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가운데 의외의 인물이 등장해서 그의 뒷조사에 나선다. 아, 그리고 보니 소설의 처음에 등장한 로봇에게 어이 없이 죽음을 당한 유지의 이야기가 있었지. 장르소설에서 절대 어떤 등장인물도 소홀하게 대접할지 말아야 한다. 아무리 비중이 적은 선수라고 하더라도, 작가가 절대 허투루 등장시키는 법이 없으니 말이다.

 

나오키와 임신 2개월된 야스코의 죽음에 대한 의혹을 파헤치는 가운데, ABC 프로젝트에 가담한 또다른 인물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된다. 그러니까 네 번째 인물인 D가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야스코가 임신한 아이는 죽은 나오키와 하시모토 그리고 다쿠야의 아이가 아니라는 사실도 드러난다. 그럼 도대체 그 아이는 누구의 아이란 말인가? 진범은 과연 누구인가와 아이의 아버지는 누구인가라는 두 개의 중첩된 미스터리가 기가 막히게 어우러지면서 소설 <브루투스의 심장>은 종반으로 치닫는다.

 

몰입도가 대단한 책이었다. 다 읽을 때까지 뒷 부분이 궁금해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만큼 읽는 재미가 대단했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정갈하게 차린 정통 추리물이 선사하는 성찬의 즐거움을 도저히 거부할 수가 없었다고 고백해야 할 것 같다. 독서 슬럼프에 빠졌을 때, 읽으면 정말 단박에 탈출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은 그런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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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북소녀 2018-11-20 12: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잠들기 직전에는 절대 읽으면 안되겠네요. 궁금해서 잠을 못 잘 수도 있을테니 말이죵.ㅋ

레삭매냐 2018-11-20 13:19   좋아요 1 | URL
그러게 말입니다 - 잠자기 전에 좀 만
읽고 자려다가 낭패를 봤네요 :>

카스피 2018-11-21 00: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흠 레삭매냐님의 리뷰를 보니 이 책은 과거 사회파 추리소설을 연상시키는 것 같아요.

레삭매냐 2018-11-21 08:38   좋아요 0 | URL
게이고 선생이 소설의 오락적 재미
뿐 아니라 그런 사회적 풍토까지
다룬 게 아닐까 싶네요. 물론 전자
가 더 파워풀하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