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율표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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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고 있는 책을 또 사는 패기의 정체는 무엇일까. 분명 나는 프리모 레비의 <주기율표> 구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지난 금요일 같은 책의 리커버 에디션을 샀다. 반값에 못 미치는 가격으로 데려 왔다고 희희낙락했던 기억이 아직도 잔상으로 남아 있는 듯하다. 그리고 바로 책을 펼쳐서 읽기 시작했다.

 

사실 기존 책은 프리모 레비 작가의 전작에 도전하면서 샀지만,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 내게 어디 그런 책들이 하나둘이던가. 그러던 차에, 책에 소개된 21개의 원소들이 작가의 얼굴 위로 떡하니 인쇄된 표지를 보니, 두 번 생각할 것 없이 바로 구매를 결정했다.

 

사실 <이것이 인간인가>를 비롯한 프리모 레비를 읽는 건, 도저히 재현할 수 없는 인류사의 비극을 다시 만나는 것만큼의 무게로 다가왔다. 어쩌면 의도적으로 독서를 미루거나 방치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다가 어느 날, 아무 생각 없이 책을 펼쳐 들었고 그대로 빠져 들었다. 그제서야 프리모 레비의 책들을 본격적으로 찾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모두 잊어 버렸다. 그것 역시 기억의 의도적 작용이 아니었을까 싶다. 당장의 스트레스도 감당하지 못하는 하나의 존재가 인류사적 비극을 읽는다고 해서 작금의 삶이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뭐 그런 얕은 생각이 아니었을까.

 

늘 그렇지만 이번에도 서설이 길었다. 아무래도 인생책이라 부를 만하다고 공언한 만큼, 본격적인 썰을 풀기에 앞서 워밍업한 것 정도로 보면 될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무언가 거창한 리뷰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뭐 그럴 만한 능력이 되지 않기에. 그저 기록으로 남기고자 하는 마음에 자꾸만 말이 길어지는 그런 느낌이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6개의 불활성기체 중에 하나인 아르곤으로 시작하는 게 심상치 않다. 참고로 나머지 5개의 불활성기체는 헬륨·네온·크립톤·제논 및 라돈이라고 한다. 프리모 레비는 왜 다른 원소들과 좀처럼 섞이지 않는 보통 사람은 잘 모르는 아르곤으로 이야기를 시작했을까 나는 곰곰 생각해 본다. 그것은 바로 스페인에서 1500년대에 이탈리아 피에몬테 지방으로 이주한 유대인 조상에 대한 이야기에 기원한다. 여호와로부터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에서 추방당한 이래, 전 세계를 돌면서도 자신들의 고유한 정체성을 지키는데 전력했다. 유일신 사상과 언어 그리고 경전은 그들의 정체성을 지탱하는 기반이었다. 소수민족으로서 유대인들은 이방인이자 화학에서 말하는 불순물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무언가 손에 잡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한다. 그런 이유로 나는 이 책을 읽는 키워드로 불활성기체와 불순물을 채택한다.

 

1930년대는 물질보다 정신을 강조하는 파시즘, 군국주의 전성시대였다. 쾌락주의자이자 태생적으로 어쩔 수 없는 유물론자일 수밖에 없었던 미래의 청년 화학도는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핍박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이탈리아에서 인종법이 시행되면서 유대인의 대학입학은 원천적으로 차단되었다. 다행히 인종법 시행 이전에 토리노 대학에 진학한 레비는 학업을 마칠 수는 있었지만, 우등으로 졸업하고서도 취업에 난항을 겪는다. 대학시절에는 비슷한 삶의 궤적을 그린 친구 산드로를 만나 육체적 단련을 했다고 했던가. 친구가 전수해준 자연의 곰고기 맛은 훗날 암울한 철의 시대에 생존에 꼭 필요했다고 진술했던가. 아니 어쩌면 그것도 나의 해석일 지도 모르겠다. 오독의 자유야말로 독서가 제공하는 즐거움 중의 하나가 아니었던가.

 

<주기율표>에서는 가능하면 전작 <이것이 인간인가>에 나온 아우슈비츠 이야기는 배제하고 화학자로서 평생 밥벌이와 아우슈비츠에서 결국 그의 목숨을 건질 수 있게 했던 원소와 얽힌 이야기들에 방점을 찍는다. 사실 구판 <주기율표>를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나를 주저하게 했던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그런 주기율표를 장식하는 원소 기호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아직도 고등학교 시절 외웠던 수헬리베붕탄질산으로 이어지는 암기의 기억은 여전하니까. 그 시간들이 프리모 레비 같은 연구 실험자들에게는 세상의 비밀을 밝히는 소중하면서도 동시에 즐거움의 시간이었을 진 모르겠지만, 또 누군가에는 고통의 시간들이기도 했다는 걸 알아주려나.

 

한편 프리모 레비는 밥벌이와 암으로 죽어가는 아버지를 부양하기 위해 광상에서 니켈을 제련해내는 일이 궁극적으로 독일군의 세계정복에 필요한 포탄에 사용될 지도 모른다는 양심적 고민도 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의 패배를 정점으로 독일 제3제국이 기울어 가기 시작하면서 이탈리아는 추축국에서 이탈했고, 한 때 동맹국이었던 독일은 중부와 북부 이탈리아의 정복군으로 변신했다. 무장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얼치기 빨치산 활동에 나섰던 프리모 레비는 파시스트 민병대에게 체포되어 총살될 운명에 처하게 된다. 심문 중에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밝힌 프리모 레비는 민병대에게 총살당하는 대신, 악명 높은 절멸수용소 아우슈비츠로 이송된다. 이후의 이야기들은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자세하게 다루고 있으니 패스하도록 하자.

 

운명의 여신은 아우슈비츠로 이송된 650명의 이탈리아 유대인 중에 살아남은 20명에 프리모 레비를 채워 넣었다. 그리고 그는 고작 3~4개월 밖에 생존 기간이 되지 않았던 아우슈비츠-모노비츠에서도 천우신조로 생존하는데 성공했다. 도덕률에 따라 생전 도둑질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던 사람이 극적으로 변신해 가는 과정도 생생하게 등장한다. 과학도이면서도 토마스 만과 체사레 파베세의 글들을 사랑했고, 카를로 레비와 긴즈부르그의 반파시스트 동지이기도 했던 청년 프리모 레비는 이탈리아로 귀환해서는 보통 사람들처럼 직장을 잡고, 수용소에서 사라진 옛사랑 대신 새로운 사랑을 만나 가정을 꾸리고 돈을 벌어야 했다. 이거야말로 밥벌이의 지겨움이 아니었을까. 수용소에서 겪은 정신적 트라우마에 시달리면서도 그는 증언을 위한 글쓰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운명은 프리모 레비를 부나공장에서 강제 노역하던 시절, 상사였던 로타르 뮐러 박사에게로 인도한다. 많은 시간이 지났고, 모든 것을 세세하게 기억하는 레비에게 나치 돌격대원이었던 뮐러는 자신에게 유리한 기억들만 취사선택하고, 아무도 부인할 수 없었던 지척의 절멸수용소 아우슈비츠에서 매일 같이 피어오르던 검은 연기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몰랐다고 변명한다. 프리모 레비가 아우슈비츠 생존자 전부를 대변하는 것도 아니라는 점과 뮐러가 나치의 홀로코스트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수정주의 역사를 대표하는 것도 아니지만, 대부분의 독일인들이 과거의 극복타령을 하며 취했던 방관 혹은 의도적 외면이 이러하지 않았을까 싶다. 내키지 않는 해후를 약속한 레비와 만나기로 했던 뮐러 박사의 편지가 도착한지 8일 뒤에 죽었다는 소식은 초현실적이었다.

 

역설과 모순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건 과연 어떤 기분일까. 물질을 지배하는 건 정신이라는 파쇼적 교육의 세례에도 불구하고, 치열한 실험으로 입증된 사실만 추구한 화학자/작가 프리모 레비의 <주기율표>는 가히 인생책이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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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0-04-06 13: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2007년에 나온 표지로 갖고 있는데 개정증보판이 안 나왔나봐요?

레삭매냐 2020-04-06 13:33   좋아요 0 | URL
저도 말씀 하신 예전 구판으로
사두었는데... 리커버로 다시 구매
하게 되었네요. 이번엔 책도 읽었구요...

개정증보판인지는 비교해 보지 않아
서 잘 모르겠습니다.

페넬로페 2020-04-06 19: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커버에디션을 검색해도 알라딘에 왜 검색이 안될까요?

레삭매냐 2020-04-06 22:17   좋아요 1 | URL
제가 검색해 보니 알라딘에서 나온
어나더 커버 에디션으로 한정판으로
나왔나 보네요.

더 이상 시중에서는 구할 수가 없는
그런 책으로 추정됩니다.

120퍼센트 2020-04-07 09: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매냐님 글 읽고서 리커버판 사고싶어서 계속 뒤졌는데...더이상 없는거군요 ㅜㅜ 레삭님 글 읽고 이책 정말 읽고싶어졌어요, 구판은 표지가 영...그렇지만요

레삭매냐 2020-04-07 10:34   좋아요 1 | URL
작년엔가 한동안 리커버 에디션
바람이 불었었는데 아마 그 때
잠시 나온 한정판인가 봅니다.

전 지난 금요일날 사서 주말 동안
읽었네요.

말씀하신 대로 구판 표지가 여엉
아니긴 하지요. 딱히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더라는 ㅋㅋ

treehyun 2020-04-10 08: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프리모 레비‘ 참 대단한 사람이죠. 그 참혹한 상황에서도 살아남은 분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에, 그 당시 세상과 비교되어 역시나 세상은 달라질거라는 믿음을 가질 수 없었나 보다 싶어 아릿했던 기억이 나네요.

레삭매냐 2020-04-10 08:51   좋아요 0 | URL
위키피디아에 보면 사고사라는 주장도
있는데... 아무래도 자살이 맞는 것 같습
니다.

강제수용소에서 살아 남은 많은 분들이
결국 비극적인 죽음을 맞은 분들이 많더
라구요. <쥐>의 저자 아트 슈피겔만의
어머니도 그러셨죠.

초딩 2020-04-12 16: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앙 알라딘에서 이 글 제목으로 메일 보냈어요 ㅎㅎㅎ
제목 너무 근사합니다!

레삭매냐 2020-04-12 19:38   좋아요 0 | URL
그랬군요...

저는 미처 몰랐네요 :>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초록 2020-04-14 15: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레드삭스매니아님. 잘 지내시죠? ^^ 알라딘 북글에 자주자주 올라오셔서 저도 자주자주 읽곤하네요..^^

레삭매냐 2020-04-22 16:17   좋아요 0 | URL
아주우~ 잘 지내고 있답니다. 초록님도 잘 지내시는지 궁금하네요.
 
회전목마의 데드히트 - 개정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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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을 위해 건물에 들어서는 순간 구내식당에서 점심 준비가 한창인지 쌉싸름한 우엉조림 냄새가 코를 찌른다. 계속해서 구내식당 밥이 그냥저냥 하던데, 나가서 사먹을까 아니면 그냥 구내식당에서 먹을까. 전자는 내 돈이 들고, 후자는 공짜다. 그나저나 춘수 씨 정말 이럴 거야?

 

며칠 전부터 서가에서 얌전하게 잠자고 있던(자그마치 6년 동안이나) 춘수 씨의 단편 소설집들을 차례차례 읽고 있는 중이다. <빵가게 재습격>은 어디에 있나. 이 참에 마저 다 읽어야 하는데.

 

춘수 씨가 업계의 고수라는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의 팬이라는 말은 절대 아니다. 그는 자신의 소임을 책을 쓰고, 책쟁이는 그의 소임인 책을 읽을 뿐이다. 게다가 서가에 책이 있는데 읽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말이다.

 

서문에 춘수 씨는 이번 소설집이 사실과 소설의 어중간한 어디라고 선언했던가. 나중에 가서는 다 구라고 또 모두가 소설이라고 하질 않나. 어쨌든 소설은 카무플라주이던 아니던 간에 듣고 쓰기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사실 좀 김이 샜다. 원래는 그래서 소설가들이 그렇게 글을 쓰지 않은 순간에는 산삼을 노리는 심마니처럼 이야기를 채취하기 위해 사람들을 부지런히 만나러 다닌다 뭐 그런 식의 전개를 노렸는데 말이다.

 

삼십대 초반의 춘수 씨는 자신감으로 가득한 그런 느낌이다. 뭐랄까 전형적인 일본 사람의 모습이라고나 할까. 타인의 공간에는 절대로 제 멋대로 침투하지 않는다. 다만, 그가 허용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것은 마치 뱀파이어 같다는 느낌이랄까. 춘수 씨가 만들었는지 아니면 어디서 들었는지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들은 확실히 흥미롭고 짜임새가 있으며 그가 어느 소설지망가 은행원에게 말했던 것처럼 템포까지 두루 갖추고 있다. 이런 요소들이 삼십대의 춘수 씨가 가지고 있던 자신감의 원천이 아니었을까.

 

잘 들은 이야기를 자신만의 이야기로 체화시키는 것도 기술이라면 기술일 것이다. 게다가 그 주체가 소설가라면 더더욱 필요한 기술이지 않을까. 섹스가 산불(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처럼 공짜라고 생각하는 춘수 씨는 우연히 만난 출판사 직원이 직장과 애인을 잃고 낯선 사람들에게 돈을 받고 관계를 맺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우리는 왜 잘 모르는 이들에게 그런 내밀한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걸까. 일상화된 상실과 내재화된 고독이 파편화된 개인을 그렇게 만든 게 아닐까. 상대에게 자신은 얼마면 되겠냐고 대범하게 묻는 춘수 씨의 당돌한 질문 앞에 할 말을 잃는다. 물론 춘수 씨는 그 선을 넘지 않는다 절대로. 선을 넘지 않는 우리의 춘수 씨. 그렇게 얻은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걸까. 그녀의 피스타치오 까는 소리가 좋았더라, 이런 건 도대체... 선밴님!

 

반바지(레더호젠) 때문에 지긋지긋한 결혼생활과 사랑하는 딸마저 인생에서 지워 버린 엄마의 이야기는 또 어떤가. 우리는 모두 어쩌면 삶에서 어떤 획기적인 계기가 필요했는 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함부르크에서 시간을 들여 방문한 레더호젠 장인들의 가게에서 그들이 그런 엄격한 요구를 하지 않았다면, 과연 이혼이라는 결심에까지 도달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짝사랑에 빠진 동아리 청년 대학생은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관찰에 나선다. 물론 그 청년의 이야기는 도를 넘어선다. 그냥 주변에서 어정거리면 좋았을 것을, 보다 적극적인 행동에 나선다. 야구장 근처에 집을 세내고, 아버지에게 빌린 망원카메라 렌즈로 그녀를 훔쳐보기 시작한다. 이놈의 자식, 정말. 그렇게 도를 넘어선 스토킹은 청년의 영혼과 몸을 모두 망쳐 버린다. 자신의 본업인 공부는 뒷전이고, 씻지도 않고 오로지 망원렌즈로 그녀를 훔쳐보기에만 열중인 것이다. 방학이 되었고, 그녀는 떠났으며 대상이 없어진 청년은 다시 정상으로 돌아오게 되었다는 이야기. 그러니까 그런 것들도 모두 한 시절의 충동이 빚어낸 환영 뭐 그런 게 아니었을까. 간단하다, out of sight, out of mind. 다만 모든 일이 그렇 듯 시간이 좀 필요할 뿐. 소설의 어디선가 그런 서로 지워가는 시간에 대한 문구를 읽었던 것 같은데 메모를 하지 않아서인지 어쩐지 못 찾겠다. 그 땐 참 그 부분이 마음에 와 닿았는데 말이지.

 

사람은 뭔가를 지워버릴 수는 없다-지워지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59)

 

춘수 씨 덕에 1980년대 초반 그야말로 끗발 날리던 빌리 조엘의 노래를 다시 찾아서 들어봤다. 폐쇄된 철공소에 대한 이야기를 그린 노래는 <앨린타운>이었고, 베트남 노래는 <굿나잇 사이공>이더라. 모두 1982년에 발표된 그의 LP <나일런 커튼>에 수록된 곡이지. 앨범은 그다지 히트치지 못한 듯. 과연 춘수 씨는 추억을 멋들어지게 소환해내는 이야기의 주술사가 아닌가 싶다.

 

그냥 춘수 씨의 이야기와 조언을 들으니 나도 문득 이야기를 써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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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02 11: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삭매냐 2020-04-02 15:16   좋아요 0 | URL
네 맞습니다.
활자중독자는 외출 할 때, 혹시라도
읽게 될 지 모르니 뭐라도 들고
나서지 않으면 불안증에 시달리게
되죠.

점심 먹고 나서 카페에 가서 <반딧
불이>를 절반이나 읽었네요.

이러다가 노트와 연필로 챙길 판이네요.

서니데이 2020-04-04 15: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무라카미 하루키 책은 계속 개정판이 나와서, 오래 전 책도 신간처럼 느껴져요.
레삭매냐님, 좋은 주말 보내세요.^^

레삭매냐 2020-04-06 13:34   좋아요 0 | URL
말씀해 주신 대로 책들이 원체
다양한 판형으로 계속해서 나오다
보니 다 새롭게 느껴지네요 :>

주말 인사 감사합니다.
 
중국행 슬로보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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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막 베트 미들러가 부른 흥겨운 스타일의 <중국행 슬로보트>를 들었다. 뭐 춘수 씨의 첫 번째 소설집 <중국행 슬로보트>랑 뭔 상관이 있는 진 모르겠지만 아무튼. 어제 <나이트우드>를 다 읽고 나서 후련한 마음에 집에 가려는데, 가방에 읽을 책이 없는 게 아닌가. 그래서 사무실 책장에 쟁여둔 책 중에서 아무 책이나 한 권 집어 들었다. 얍실하니 3월의 대미를 장식하기에 아무런 부담이 없는 그런 책으로. 그리고 춘수 씨의 <중국행 슬로보트>가 당첨!

 

집에 가는 길에 표제작인 <중국행 슬로보트>를 다 읽었다. 긴 거리도 아닌데, 역시 춘수 씨의 가독성 하나는 알아 주어야 한다니깐. 두 편의 장편을 발표하고, 그야말로 풋내기 작가 시절에 여기저기서 청탁을 받아 쓴 7편의 단편들이 오롯하게 수록된 게 바로 <중국행 슬로보트>. 오래 전에 득템해둔 책인데, 6~7년이 지나서야 읽게 되다니. 나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춘수 씨의 팬은 아니라고 하면서 꾸역꾸역 그의 책을 읽는 건 또 무언가. 아마 줄리언 반스의 경우가 비슷한 게 아닐까.

 

1990년대 춘수 씨의 책들이 우리나라에서 거의 센세이션을 일으켰는데 가만 그 이유를 다시 생각해 본다. 참고로 그 시절에는 춘수 씨에 대해 관심도 없었고, 책도 거의 읽지 않았다. 그 땐 뭐하고 지냈는지 모르겠다. 춘수 씨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쿨함에 우선 포인트를 주고 싶다. 주인공은 절대 선을 넘지 않는다. 요즘 한참 대세라는 누구처럼 마구잡이로 들이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시대를 넘어온 세대들이 이제는 사회의 움직이지 않는 꼰대로 자리 잡았지만, 암튼 그 땐 그랬지.

 

자신이 원하지 않은 일은 타인에게도 강요하지 않는다. 잔디 깎는 청년은 물론 어느 사모님과 일탈에 빠지기도 한다. 마지막 일터에서는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면서 고용주가 주는 샌드위치와 맥주를 넙죽넙죽 받아먹는다. , 어디선가 누군가가 제공하는 선의를 잘 받아들이는 것도 능력이라고 했던가. 설렁설렁 일하는 다른 이들과 달리 자신은 일이 재밌어서(그것도 역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보수에 상관없이 열심히 잔디를 깎았다고. 요런 쿨함이 바로 삼십대 초반 춘수 씨의 장점이었나 보다. 소설을 읽다 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들도 다수 등장하지만,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이해할 필요가 있나 하는 마음으로 휙휙 넘긴다. 가난한 아주머니를 등에 업고 지낸다는 설정은 좀 그랬다. 이게 뭐야!

 

표제작에서는 중국인 친구들과의 만남에 대한 춘수 씨의 경험으로 추정되는 이야기들이 등장한다. 시험을 보러 가서 만난 중국인 샘의 이야기는 불과 수십 년 전에 대륙에서 서로 죽이는 그런 관계였던 두 민족 사이에서 화해가 가능한 지, 그 점이 나는 궁금했다. 뭐 아직 영맨이었던 시절 춘수 씨의 천진난만함 아니면 특유의 정치적 무관심 때문이었을까. 전공투 세대라는 사람이 어쩌면 그렇게 무심할 수 있는지도 참.

 

애인과 싸우고 호텔에 지내면서 아마도 피아노 레슨을 하는 젊은 여자와 하는 게임에 대한 이야기가 제일 흥미로웠다. 애인과 한바탕 싸우고 둘이 와야 할 휴가를 홀로 지내는 주인공. 게다가 5일 예약을 숙소에는 연일 비가 내린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아무 일도 없어야 정상이겠지만, 매력남 춘수 씨가 가는 곳에는 언제나 이야깃거리가 넘친다. 한물간 책들로 비수기 호텔 도서관에서 만난 묘령의 여인과 스무고개 게임을 하는 춘수 씨의 젊은 날은 정말 스타일 넘치는 재기로 가득했다. 셜록 홈즈 뺨치는 추리력으로 상대방의 신뢰를 얻고, 지평을 넓혀가는 탁월한 재주란! 게다가 역시나 그는 절대로 선을 넘지 않는다. 절묘한 후퇴 전략으로 상대방을 자신의 영역으로 끌어 들인다. 연애의 고수만이 구사할 수 있는 기막힌 재주가 아닐 수 없다.

 

3월의 마지막 20분을 남겨 두고, 춘수 씨의 <중국행 슬로보트>를 다 읽었다. 개운했다. 가끔은 이런 불량식품 같은 맛의 책을 읽는 것도 독서의 즐거움이 아닌가. 너무 딱딱하고(어제 읽은 <나이트우드>가 그랬다), 읽어야 하는 책이라고 해서 읽는 그런 독서가 아닌 무한의 자유로움이 배어 있는 그런 독서 말이다. 책장을 보니 춘수 씨의 <반딧불이><회전목마의 데드히트>가 더 있더라. 나중의 슬럼프를 대비해서 이 책들은 예비해 두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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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트우드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67
주나 반스 지음, 이예원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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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한다. 주나 반스의 기념비적이라는 모더니즘 소설 <나이트우드>를 읽기 전에 윤조원 교수님의 강의를 듣지 않았다면 가뜩이나 이해가 어려운 이 소설을 포기해 버렸을 것이다. 사실 이번에 세 번째다. 지난달 초에 책을 사서, 세 번만에 다 읽었다. 물론 시도를 거듭할수록 진도는 더 나갔지만, 나의 책에 대한 이해는 더 나아지지 않았다. 그저 <나이트우드>를 다 읽었다는 것 하나만으로 만족하고 싶다. 지금은 적어도.

 

소설 <나이트우드>에는 네 명의 주요 인물들이 등장한다. 첫 번째 선수는 가짜 남작 펠릭스(이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폴크바인, 그의 부인 바로니 로빈 보트, 로빈을 그야말로 죽도록 사랑하는 노라 플러드 그리고 또다른 연인 제니 페더브리지다. , 정말 중요한 선수 한 명을 빼먹었다. 무면허 의사이자 밤의 제왕이라고 할 수 있는 아일랜드계 미국인 매슈 오코너. 그가 없었다면 소설은 아예 진도가 나가지 않았으리라.

 

소설은 사랑과 죽음을 비롯한 삶의 모든 분야를 다룬다. 모더니즘 소설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이며 동시에 아무 것도 아닌 그런 이야기들이 독자의 이해 영역을 마구 헤집어 놓는다. 베를린과 파리, 빈 그리고 뉴욕을 넘나드는 밤의 주인공들은 우리의 고민해결사 돌팔이 의사 매슈 오코너에게 모든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나에게 밤은 어떤 시간인지 묻는다. 나에게 밤은 사유의 시간인 동시에, 책을 읽기에 너무나 좋은 시간이다. 밤에 지펴지는 어둠은 사유를 위한 완벽한 조명이 아닐 수 없다. 밤은 자신을 돌아보게 해주는 그런 시간이며, 내가 맺고 사는 관계에 대해 되짚어 보게 해준다. 밤이 그런 생각의 시간이라면, 낮은 정리된 생각들을 실행하는 그런 시간이라고나 할까.

 

<나이트우드>에서 무언가 액션이 이루어지는 그런 서사는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주인공들 간에 벌어지는 애증의 관계, 집착에 대한 해설과 의미 부여는 우리의 수다꾼 매슈가 도맡아서 해결해 준다. 겉으로는 화려한 시절이지만, 등장인물들은 하나 같이 상실이라는 깊게 베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돌팔이 의사를 찾는다. 밤이라는 시간과 돌팔이 의시가 그야말로 끝없이 늘어놓는 수다의 힘은 상상을 초월한다. 아니 그의 두서없이 펼쳐지는 수다 가운데,이미 우리가 기대한 해결책이 숨어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주나 반스가 구사하는 다이얼로그에 명징한 해답을 기대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굳이 모든 걸 이해하려고 애쓰지 마라, 강의 어디선가 만난 윤조원 교수님의 일갈은 나에게 그야말로 한줄기 빛이었다.

 

내가 읽어 내리는 문장들을 굳이 이해해 보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지? 문장으로 치환된 주나 반스 작가의 내면화된 세계, 혹은 상실감 같은 감정들에 대해 아는 바가 없으니 더욱 갑갑할 수밖에 없다. 아니 이러다 나는 영영 모더니즘 소설과는 담을 쌓고 살 게 되는 게 아닐까? 두려우면서도 아쉬운 마음이 스치고 간다. 또 다른 모더니즘 걸작이라는 <제노의 의식>도 고이 모셔 두었는데, 아예 읽지도 말아야 하나 하는 고민에 휩싸인다.

 

개인이 맺는 관계는 모두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펠릭스보다 더 방황하는 유대인에 가까운 로빈의 심리는 어떻게 파악해야 할까.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오로지 자식을 재생산하기 위해 미국인 로빈을 배우자로 맞은 행운아의 아들은 성직자가 되겠다고 선언한다. 행운아의 아버지는 가짜 귀족행세를 하는데 공을 들인다. 이제는 끝장나 버린 신분제 사회의 끝자락에 대한 미련이라고 할까.

 

솔직히 말해서 로빈과 노라 그리고 제니 사이에 전개된 삼각관계에 대해서는 작가가 구사하는 감정선을 따라가지 못했다. 다만 그들이 중계인으로 등장하는 젠더퀴어 매슈 오코너의 역할은 흥미로웠던 것 같다. 아마 그가 없었더라면 나는 <나이트우드>를 억지로라도 끝까지 읽지 못했으리라. 이해를 하지 못하면서도 끝까지 읽는 건 또 무언가. 매슈 오코너의 지휘 아래, 아무리 공감을 시도해 봐도 명징하지 않은 서사 가운데 내밀한 은유와 상징들을 잡아내기란 나에게 처음부터 불가능한 미션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악전고투 끝에 <나이트우드>를 다 읽는 것으로 3월의 대미를 장식하게 되어 기쁘다. 윤조원 교수님의 <나이트우드> 강의를 다시 한 번 들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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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20-04-01 08: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 좋아하는 지인은 이 책이 재미없다고 했어요. 그래도 퀴어 문학을 논할 때 언급되는 작품이라서 한 번은 읽어야봐야겠어요. ^^

레삭매냐 2020-04-01 09:09   좋아요 0 | URL
솔직히 책은 재미 드럽게~ 없습니다.

모더니즘 소설의 기념비적인 작품
이라는 선전 때문에 읽기는 했는데
영~ 감흥이 없네요.

퀴어 문학에 대한 부분도 그닥...
 
망자들 을유세계문학전집 101
크리스티안 크라흐트 지음, 김태환 옮김 / 을유문화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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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에는 스위스 출신 작가 크리스티안 크라흐트의 신간 <망자들>을 읽었다. 일본 가무극인 노에서 따온 조()-()-()3단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왜 느닷없이 독일어 작가가 일본 가무극 타령이냐고. 그건 소설을 만나 보시면 바로 알 수 있다.

 

1930년대 초, 동서양의 독일과 일본은 제각각 다른 스타일의 파시즘 국가로 변신 중이었다. 전자가 아돌프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즘, 국가사회주의 스타일이었다면, 일본은 만주사변으로 중국 동북부를 침공하고 탈아입구라는 메이지 유신 이래 구호를 들고 아시아의 패자가 되겠다는 군국주의 파시즘이 대세였다.

 

베른 출신 에밀 네겔리는 영화감독이다. 당대를 주름잡던 프리츠 랑이나 무르나우 혹은 에이젠슈타인에 버금가는 그런 영상감각을 가진 유망주로 등장한다. 그리고 독재자였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소설 <망자들>에는 제목처럼 사방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소설의 다른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아마카스 마사히코가 사는 일본에서는 셋푸쿠(할복)하는 사무라이를 몰래 촬영한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었다.

 

극와 극은 항상 서로 어떤 동질감을 느끼기 마련이다. 유년 시절, 천재소년이었던 역사적으로 만주국의 요괴였던 아다마스는 제국의 선전물 제작과 미국의 문화제국주의에 저항하기 위해 다른 영화 선진국이었던 독일에 영화 전문가를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한다. 아다마스는 어쩌면 독일 자본과 기획으로 양성된 파시스트였는지도 모르겠다. 크리스티안 크라흐트는 실존 인물을 기묘하게 비트는 방식으로 소설에 긴장감을 잔뜩 불어 넣는다.

 

우파(UFA, 처음에는 나치 우파 영화사로 잠깐 착각했었다) 영화사의 후겐베르크는 실력 있지만 해외로 파견하는데 전혀 부담이 없는 에밀 네겔리를 선택해서 일본에 보내기로 결정한다. 예나 지금이나 영화 산업에는 막대한 자본이 든다. 한 마디로 영화를 만들기 위한 기술력과 기획은 어떻게 해볼 수 있지만, 그 영화를 실제로 만들기 위해서는 돈이 든다는 현실을 외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본과 예술의 접목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게 셀룰로이드 추축은 착착 현실화되어 간다.

 

물론 후반의 비극적 전개를 위한 부비트랩을 조심스레 설치하는 것도 작가는 잊지 않는다. 우매한 독자는 작가의 그런 세심한 설정보다는 일본 군국주의자들과는 전혀 정서가 맞지 않는 찰스 채플린이 등장하고, 네겔리의 독일 애인 이다가 참석한 자리에서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시베리아 출병을 의미하는 북진론과 남방의 천연자원을 얻기 위한 남진론이 대결하는 대화에 더 관심이 갔다. 당시 일본 제국의 주력이었던 만주의 관동군은 소련을 주적으로 상정해서 전쟁에 대비하다가, 결국 해군이 중심이 된 남방작전으로 수정되면서 동남아 정글에서 연합군을 상대로 전쟁을 치르지 않았던가.

 

사실 노의 1막에 해당하는 조()에서는 지루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이야기가 느릿하게 흘러가는 걸까. 하지만 2막인 하()에서는 비로소 흥미진진한 서사가 등장하고 달리기 시작한다. 찰스 채플린 호위에 나선 무뚝뚝한 표정의 일본 장교가 딸 아이에게 줄 채플린에게 사인을 아다마스에게 요청하는 장면은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엘리트 청년으로 성장한 아다마스가 사소한 복수에 집착했고, 방화범이기도 했다는 점은 그의 천재성을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마지막 규()는 진짜 비극의 재현이자 일본을 방문한 가이진(外人) 네겔리의 부서진 영혼이 어떻게 타격받았는지를 마치 카메라의 필름 롤이 도는 듯한 생생한 현장감으로 중계된다.

 

크라흐트 작가는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그리고 흑백필름에서 컬러필름으로 넘어가는 영화의 역사적 순간을 포착해낸다. <동경 이야기(Tokyo Story)>의 대가 오즈 야스지로는 이미 1930년대에 일본을 대표하는 영화감독이었던 모양이다. 굳이 영화의 미적 아우라를 해치는 사운드트랙이 필요한가라는 시네마틱 질문에 대해서는 그 시절 영화에 대한 지식의 부족으로 더 할 말이 없을 듯 싶다. 흑백 필름으로도 영화의 미적 영상미를 재현해 내는데 전혀 부족함이 없다는 의견에 대해서도. 이런 영화적 난제들까지 크라흐트가 의도적으로 커버했다면, 소설에 둘러져 있던 완벽한 소설이라는 띠지는 전혀 과대광고가 아닐 것이다.

 

우파 영화사의 유일신 후겐베르크는 유대계 지식인 지크프리트 크라카우어와 로테 아이스너에게 포섭된 네겔리에게 일본으로 건너 가 동양적 야만성을 포착하라고 지시한다. 서구 제국주의적 사고의 발로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 재능 있는 감독은 제작자의 의도에 따라 꼭두각시가 되어 하라는 대로 영화를 만들 계획은 눈곱만큼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야말로 아티스트로서 자존감을 지키고 싶어서였을까? 후반으로 갈수록 소설은 사실 대신 죽음이 다양하게 얽힌 변주곡으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크라흐트의 <망자들>은 가이진이 바라 본 정적인 일본 문화에 대한 시선, 독일과 일본 두 제국이 경쟁하듯이 영화를 이용한 선전전에 나서게 되는 일련의 과정 그리고 부유하는 죽음에 대한 사유들로 복잡한 그런 소설이었다. 엔딩에 등장하는 덧없는 죽음 역시 겉보기에 화려한 할리우드의 삶을 좇는 부나방 같은 그런 게 아니었을까. 다른 건 몰라도 엔딩 하나는 정말 화끈했다. 이제 읽다 만 크라흐트의 <제국>을 다시 펼쳐 들어야 할 시간인가.


Vanitas vanitatum et omnia vanit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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