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은 속삭인다
타티아나 드 로즈네 지음, 권윤진 옮김 / 비채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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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가을에 타티나아 드 로즈네의 <사라의 열쇠>를 읽었다. 이번에 새로 출간된 그녀의 <벽은 속삭인다>를 읽으면서 나중에 나왔지만 작가의 이름을 세계에 (책과 영화로) 널린 <사라의 열쇠>를 읽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벽은 속삭인다>는 드 로즈네의 대표작을 위한 전주곡이라고 호칭하고 싶은 마음이다.

 

소설의 주인공 파스칼린 말롱은 매력적인 남편 프레데릭과의 15년에 걸친 결혼생활을 최근에 끝내고 홀로서기에 나선 커리어 우먼이다. 프레데릭은 컴퓨터 프로그램 개발업에 종사하는 파스칼린에게 상상력이 없다고 핀잔을 주고 했단다. , 컴퓨터 프로그래밍인 상상력 없이 가능한 일이었던가? 일종의 편견의 벽에 마주쳤다.

 

나이 마흔 살의 이혼녀는 생후 6개월 밖에 되지 않은 딸 엘레나를 잃고 다시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 물론 이유는 설명되지 않는다. 요즘처럼 기술이 발전한 시대에 정 원한다면 불임이 극복하지 못할 장애물도 아닌데라는 상념이 따라 붙는다. 드 로즈네는 아이 잃은 엄마 파스칼린의 심리 상태를 여성 작가답게 예리하면서도 모성애 넘치는 관점으로 독자에게 들려준다.

 

문제는 파스칼린이 새로운 출발을 위해 둥지를 튼 아파트에서 오래 전에 끔찍한 살인사건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새로운 집에서 도대체 잠을 이루지 못하고, 좋지 않은 컨디션 때문에 고생하던 주인공은 그 사실을 알아내고 연쇄살인범에게 희생된 꽃 같은 아가씨들의 운명에 자신의 삶을 대입하기 시작한다. 주변인들이 초반에 그녀에게 정신과 의사를 찾아 가라고 했던 것처럼 어렸을 적 트라우마가 존재한다고 하지만, 아무래도 그녀의 반응은 정상적이지 않다. 아마도 신혼 시절에 딸 엘레나를 잃은 상실감의 발로가 아닐까?

 

개인적으로 지나치게 연쇄살인범에게 희생당한 아가씨들과 자신이 잃은 아이를 동일선상에 두는 파스칼린의 과도한 피해의식이 책을 읽는 내내 부담스럽게 다가왔다. 더 당혹스러웠던 점은 어느 순간, <사라의 열쇠>에서 중요한 키워드로 작용하는 1942716일의 벨디브 유대인 일제검거사건이 튀어 나왔다는 점이다. <사라의 열쇠>에서는 워낙 중요한 사건으로 다뤄지기 때문에 이해할 수가 있었지만, 이번 작품에서는 왜 그 사건이 나왔을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어쩌면 <벽은 속삭인다><사라의 열쇠>의 확장을 위한 습작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다 들 정도였다.

 

과거의 잊고 싶은 기억이 공간에 스며 들 수 있다는 그리고 그것이 인간의 불안정한 심리상태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타티아나 드 로즈네의 설정에는 한편 수긍이 가기도 했다. 과거에 벌어졌던 사건을 몰랐다면 그냥 모르고 살 수 있겠지만, 알고 난 뒤에 혼자 집에 있을 때 오싹한 살인사건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그 또한 강심장의 소유자이리라.

 

내가 사랑했던 사랑의 행복이 나에게는 참을 수 없는 분노로 다가올 수 있다는 열린 결말이 무척이나 강렬하게 다가왔다. 과연 파스칼린이 프레데릭과 새로운 말롱 부인에게 무슨 말을 했을지 너무 궁금했다. 한 번 만난 작가와의 재회는 짧았지만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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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군대의 장군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1
이스마일 카다레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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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경제위기로 시달리는 그리스가 위치한 발칸 반도는 고래로부터 잦은 외세의 침략에 시달렸다. 어쩌면 그런 점에서 반도국가인 우리나라와 유사한 운명을 가졌는지도 모르겠다. 그 발칸 반도에 알바니아라는 조그만 나라가 있다. 처음으로 알바니아 출신 작가의 글을 읽었다. 이스마일 카다레, 정치적인 이유로 프랑스로 망명해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작가의 데뷔작 <죽은 군대의 장군>이 오늘 이야기할 작품이다.

 

소설을 읽기 전에 지난 천년의 끝자락에 인종청소라는 끔찍한 학살로 전 세계에 충격을 주었던 코소보 사태 즈음에 한불작가교류프로그램으로 프랑스를 찾은 이청준 작가가 이스마일 카다레를 직접 만나 나눈 인터뷰 기사를 읽었다. 그 인터뷰에서 카다레는 당시 알바니아가 속해 있던 발칸 반도를 휩쓸던 살육과 광기의 악순환과 그에 대한 해결책을 이야기했다. 카다레 작품 세계의 시원을 이루는 <죽은 군대의 장군>을 읽는데 예의 인터뷰가 도움이 되었다.

 

<죽은 군대의 장군>의 얼개는 비교적 간단하다. 소설에서는 알바니아-이탈리아 전쟁이라고 명백하게 밝히지 않고 있지만, 2차 세계대전 당시 발칸 전역의 역사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쉽게 추측이 가능한 사실이다. 전쟁 당시 알바니아에서 전사한 이탈리아 병사들의 시신을 수습하라는 국방장관의 명령으로 장군(이 소설의 주인공들은 이름을 갖고 있지 않다)은 과거의 적국 알바니아를 찾는다. 그 과정에서 하나씩 드러나는 불편한 진실을 이스마일 카다레는 예리한 시선으로 추적한다.

 

장군이 조국을 떠나기 전부터 수많은 사연을 가지고 있는 유가족들이 그를 찾는다. 어떤 이들은 사랑하는 아들을, 또 어떤 이들은 아버지를 잃고 비통해 하는 장면이 정말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그 중에서도 고위 장교이자 백작 가문의 Z대령을 찾아 달라는 미모의 미망인의 부탁이 장군의 뇌리에 각인된다.

 

공산국가 알바니아를 철권으로 다스리던 독재자 엔베르 호자의 통치 아래 있던 미묘한 정치 상황이 살짝살짝 엿보인다. 전사자 유해 발굴을 위한 복잡하기 짝이 없는 서류 절차는 아무 것도 아니다. 시신 수습의 과정에서 장군과 그의 보좌역인 신부가 맞닥뜨리게 되는 알바니아 국민의 적대감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 적대감의 원류에는 바로 Z대령이 소속되어 있던 청색 대대, 보복 부대의 만행이 이유였다는 점이다.

 

동맹국이었던 독일과는 달리 전쟁에서 그다지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지 못했던 이탈리아군은 발칸의 소국(小國) 알바니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태어나면서부터 총을 손에 들고 싸운다는 알바니아 유격대에 맞서 이탈리아군은 패주하고 탈영해서 농촌으로 숨어 들어가 촌락의 머슴으로 살았다고 한다. 어느 무명 병사의 일기장을 통해 그런 생생한 사실을 알게 된 장군은 그것으로 스스로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인다.

 

수만 명에 달하는 전사자의 유해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장군은 스스로를 전쟁터에서 그렇게 스러져간 죽은 병사들의 군대 지휘관이라는 환영에 빠져든다. 명예롭게 조국을 위해 죽은 것으로 알려진 이들이 실제로는 갈봇집을 드나들고, 적국 농가의 머슴으로 목숨을 부지하고 또 때로는 보복이라는 이름으로 잔학 행위를 마다하지 않았다는 괴상망측한 사실이 장군이 그동안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던 신념과 가치를 가차 없이 공격한다. 수치화되고 통계화된 죽음의 기록은 비극 그 자체다.

 

이스마일 카다레는 <죽은 군대의 장군>으로 20년 전 그의 조국 알바니아에서 벌어진 비극을 문학적으로 재구성했다. 그가 이 소설을 통해 제시하는 반전 메시지는 간결하면서도 명확하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런 전쟁의 포화 속으로 이렇게 멋지고 용감한 젊은이들을 몰아넣었단 말인가! 저자가 인터뷰에서 스위스와 그리스를 섞어 놓은 것처럼 아름답다는 알바니아의 산하를 붉은 피로 물들인 전쟁의 폐해는 그 땅을 사는 이들의 가슴에 지울 수 없는 상흔으로 남아 있노라고 카다레는 증언한다.

 

알바니아인들은 거칠고 후진한 민족입니다. 아이가 태어나기 무섭게 사람들은 요람에 총을 갖다 두지요. 이 무기가 삶의 일부가 되도록 말입니다.” (41)

 

논리적 판단보다는 관습과 명예를 먼저 생각하는 알바니아인들의 기질을 이보다 더 적확하게 표현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해양민족에게 바다는 진출의 상징이었겠지만, 산악민족인 알바니아인들에게 바다는 침략자들의 통로였다. 그 바다를 통해 침입하는 외세에 맞서 단신으로 총질을 해대는 장면은 일견 무모해 보인다. 하지만, 끝없는 전쟁과 살육이 그들에겐 어쩔 수 없는 일상이었다는 카다레의 글에 자연스레 수긍이 갔다.

 

조국을 떠나 멀리 타국에서 문학 활동을 하는 노망명객의 데뷔작을 수십 년이 지나서야 만나게 됐다. 언제나 그렇듯 나의 문학 오딧세이는 그렇게 의도하지 않은 만남으로 시작되기 마련인가 보다. 국내에 출간된 이스마일 카다레의 작품을 하나씩 읽어보고 싶어졌다. 다음에 읽을 책은 <꿈의 궁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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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측 증인]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변호 측 증인
고이즈미 기미코 지음, 권영주 옮김 / 검은숲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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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출간된 실비아 페데리치의 <캘리번과 마녀>라는 책의 서평을 읽었다. 이 책에서 현대 자본주의는 철저하게 계서화된 남성우월주의를 바탕으로 여성의 노동력을 착취한다는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는 비평을 접할 수가 있었다. 여성이 직장에서 남성과 같은 일을 하면서 보수가 남성의 1/3 밖에 되지 않는다는 어느 보고서가 있었다. 자본주의를 굴리기 위한 노동력의 재생산과 보육이라는 중요한 축을 구성하고 있으면서도 여성에 대한 착취와 억압 구조는 여전하다는 이야기다.

 

왜 추리소설 리뷰에 앞서 이런 딱딱한 이야기를 하느냐고? 간단하다. 고이즈미 기미코의 <변호 측 증인>에는 바로 그런 여성에 대한 사회의 모순된 시각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참 그전에 한 가지 고백할 게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아주 치명적인 오독을 했다. 처음의 서장에서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이 주인공 미미 로이(야시마 나미코)의 남편인 야시마 스기히코라고 생각했는데 그 반대였다.

 

작가는 현재의 결과에서 과거로 돌아가는 플래시백 기법으로 사건의 전모를 밝혀 나간다. 미미 로이는 잘 나가는 클럽 레노의 에이스 스트립 댄서 출신이다. 그런 그녀가 정말 굴지의 기업인 야시마 그룹의 후계자 스기히코와 결혼하게 된 거다. 그 다음 스토리는 좀 빤하다. 그렇게 잘난 집안의 사람들이 스트립 클럽에서 뭇 남성들 앞에서 벌거벗고 춤추던 스물두 살의 여자를 며느리로 순순히 받아들일 리가 없다.

 

일단 야시마 집안의 골칫덩이의 열렬한 구애로 결혼에 골인은 했지만 그 다음이 더 걱정이다. 사실 여기까지는 우리나라 막장드라마의 흔한 내러티브 전개다. 문제는 살인사건이다. 괴팍하고 제멋대로인 야시마 그룹의 총수인 스기히코의 아버지가 살해된 것이다. 게다가 자신의 남편이 범인이라고 생각한 미미 로이는 살해 현장에서 남편의 흔적을 없애는 증거 인멸을 시도한다. 문제는 남편이 아니라, 자신이 범인으로 지목된 거라는 것이다. 게다가 존속살해죄로 사형이 선고됐다. 이제 엄청난 유산이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목숨을 걱정해야 할 처지가 된 것이다. 미미 로이는 과연 억울한 누명을 벗을 수 있을 것인가.

 

프랑스 대혁명으로 기존의 계급 사회의 질서를 타파했다고 생각해왔는데, 21세기 자본에 의한 계급의 고착화는 상상 이상으로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부익부 빈익빈에 입각한 양극화 현상은 자본주의를 긍정적 발전 방향이 아닌 부정적 방향으로 인도하리라는 것이 중론이다. 아무리 발버둥 쳐봐야 극복할 수 없는 빈부의 격차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재벌가의 아들과 결혼해서 신분상승을 꿈꾸는 신데렐라 스토리의 드라마가 대중의 인기를 끌고 있다는 사실은 바로 이런 빈부의 격차로 인한 사회문제에 대한 반증이다. <변호 측 증인>의 주인공 미미 로이는 본인이 의도했던 그런지 않던 간에 누구나 부러워하는 집안의 며느리로 신분이 바뀌었다. 골칫덩이긴 하지만 류머티즘을 앓으며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회장의 뒤를 이을 후계자의 청혼을 거절할 여자는 드물 것이다. 게다가 다른 일도 아니고 스트립 댄서라는 그녀의 전직은 야시마 집안과의 갈등을 파국으로 몰고 간다.

 

고이즈미 기미코는 한술 더 떠서 새로운 안주인을 자신들의 상사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야시마 집안과 기존에 관계를 맺고 있던 이들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스기히코의 누이인 라쿠코와 그녀의 남편인 히다를 시작으로, 노회장의 수발을 담당하는 집사와 가정부, 기사까지도 미미 로이의 존재를 부정한다. 이런 상황에서 유산 상속이라는 범행 동기가 뚜렷한 미미 로이가 범인이 아니라면 누가 범인이겠는가. 그렇다고 처음 그대로의 설정으로 가는 것도 추리소설 애독자의 기대에 대한 배신이겠지만.

 

개인적으로 책을 펼 때, 가장 먼저 눈길을 사로잡은 것이 바로 “성분 함량표”다. 고전의 반열과 대반전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얻었다. 그건 아마 일본에서의 이야기겠지. 사실 고이즈미 기미코는 처음 들어보는 작가다. 어쩌면 장르 소설에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어서일 수도 있겠지만. 가장 낮은 점수는 ‘선정성’이라고 되어 있는데, 어쩌면 주인공이 스트립 댄서 출신이라는 점을 고려해 볼 때, 너무 낮게 평가된 게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상상을 해봤다.

 

역설적이게도 고전의 반열에 올랐다는 말은 그 결말에 대한 예상도 어느 정도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는 말일 것이다. 고이즈미 기미코의 <변호 측 증인>도 예외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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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트브레이크 호텔
서진 지음 / 예담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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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1월, 로큰롤의 제왕이 탄생했다. 그의 이름은 엘비스 프레슬리. 미국 미시시피주 투펄로 출신의 촌뜨기 청년은 마이크와 치지도 않는 기타로 세상을 정복했다. 연인은 떠났고, 외로운 거리를 걷던 노래의 화자는 죽을 지도 모른다는 가사가 실린 2분이 조금 넘는 노래 <하트브레이크 호텔>에 전 미국은 환호했다. 엘비스는 ‘펠비스(pelvis;골반)’이라는 표현처럼 유튜브 동영상 속의 제왕은 엄청난 환호 속에서 노래하고 춤추고 있었다. 그렇게 신화는 시작됐다.

 

엘비스 프레슬리에게 첫 번째 밀리언셀러의 영광을 안겨준 곡 <하트브레이크 호텔>과 반세기도 넘는 시간을 거쳐 우리에게 온 서진의 소설 <하트브레이크 호텔>에는 도대체 어떤 접점이 있는 걸까라는 생각으로 책을 펴들었다.

 

전혀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3개국에 산재한 7개의 도시를 무대로 작가는 ‘시간의 속도’를 장착한다. 무한대로 확장된 시공 속에 아주 특별한 공간이 존재한다. 그 이름은 바로 <하트브레이크 호텔>. 유한한 존재라는 숙명의 인간은 고래로부터 시간여행에 대한 환상을 버릴 수가 없었다. 현재를 사는 인간이 과거에 집착하는 것은 유한한 생명만큼이나 필연적인 사실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인간이 꿈꾸는 시간여행은 현실을 부정하거나 혹은 바꾸고 싶은 심리적 귀결이 아닐까.

 

그래서 소설에 나오는 ‘드림 머신’은 묘하게 삶에서 지치고 외로운 영혼들을 위로하고 불가능해 보이는 희망의 단초가 되는지도 모르겠다. 이루어질 수 없는 욕망에 대한 애절함이 곳곳에서 느껴진다.

 

남녀 사제가 아닌 여여사제 간의 야릇한 로드 무비 형식을 취하고 있는 황령산 드라이브 사이에 낀 이야기들은 어느 것 하나 평범한 것이 없다. 사별한 옛 아내를 잊지 못하고 삶의 마지막 순간을 가장 행복했던 곳(다시 하트브레이크 호텔이다)에서 마무리하기 위해 찾아온 노인, 돈이라면 무슨 못하는 일이 없을 것 같은 마이애미의 건달, 두말할 것 없이 바로 영화 <터미네이터>가 연상되는 시간여행자 등등은 끝나지 않고 순환되는 뫼비우스의 띠를 완성한다.

 

책을 읽다가 문득 작가가 공간적 배경이 되는 도시들의 아우라를 제대로 잡아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다시 생각해 보니 그렇게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라스 폰 트리에가 미국 삼부작을 찍기 위해 미국을 찾을 필요가 없었다고 말한 것이나, 영화 <카사블랑카>가 모로코에서 현지 로케이션이 되었던가? 이미지의 시대에 라스베가스가 주는 환락과 허무의 상징성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작가가 4년 만에 발표한 작품답게 구성에 있어 조금도 빈틈이 보이지 않는다. 그만큼 정성을 들였다는 방증이리라. 의도했건 그러지 않았건 간에 일견 무미건조해 보이는 면들은 오히려 ‘상심’한 이들의 심리를 극대화하는데 아주 적절하게 사용되고 있었다. 인생이 행복하고 즐거운 이들이 왜 “하트브레이크 호텔”을 찾겠는가. 결핍에 시달리고, 위로가 필요한 이들에게 예의 공간은 존재의 의미를 가질 뿐이다.

 

그런데 그거 아나? 상심과 비통에 치료약은 오직 시간뿐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시간이 지나고 나면 언제 그랬냐고 자조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다만 그 시간의 속도가 중요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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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12-18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전 시간에 담긴 양이 중요한줄 알았어요..^^;;
 
초록 눈 프리키는 알고 있다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54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부희령 옮김 / 비룡소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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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처음 만난 작가 조이스 캐럴 오츠의 <초록 눈 프리키는 알고 있다>를 읽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호랑이는 토끼를 잡을 때도 전력을 다한다. 반세기를 훌쩍 뛰어 넘는 필력을 가진 저자이지만, 청소년 문학으로 분류되는 이 작품에서도 그녀의 화려한 문학적 아우라를 엿볼 수가 있었다.

 

소설은 첫 페이지에서 ‘경계’를 넘는다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언제나 그렇듯, 경계를 뛰어넘어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건 쉽지 않은 결정이다. 십대소녀 프랭키(프란체스카) 피어슨은 이 매력적인 소설의 주인공으로, 자신이 어떻게 해서 ‘초록 눈 프리키’를 만나게 되었는지 담담한 어조로 독자에게 설명한다. 전직 미식축구 선수이자 저명한 스포츠 해설가인 셀러브리티 아버지를 둔 프랭키의 가정은 완벽해 보인다. 잘나가는 가장에, 예술 활동을 취미로 삼은 아내, 아버지의 뒤를 이어 미식축구 선수인 오빠 토드 그리고 두 명의 귀여운 딸내미들.

 

그런데 진짜 이야기는 이제 시작된다. 작가는 미국 교외에 사는 중산층 가정의 구성원인 어느 십대 소녀의 눈에 비친 결혼생활에 방점을 찍는다. 조이스 캐럴 오츠는 겉보기에 화려해 보이는 그네들의 삶의 본질을 파고든다. 한 꺼풀 들추고 보면, 아버지 리드는 전형적인 마초로 완벽한 가정에 대한 강박관념에 시달리고 있다. 자신의 가정을 위협하는 요인은 아예 싹부터 잘라 버려야 한다고 굳게 믿는 사나이다. 자신의 결혼생활을 방해하는 예상치 못한 장애물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 숨어 있을 줄 누가 알았을까.

 

삶의 균열은 아내로 자신을 곁에서 보좌해야 할 임무를 가진 크리스타에서 비롯된다. 첫 번째 아내를 잃고 두 번째로 맞은 아내 크리스타의 삶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리드의 입장이 애처롭게 하나씩 차례로 소개된다. 대학생이 되어 가정 밖에 머무르는 오빠 토드야 그렇다치고, 한참 예민한 사춘기 소녀 프랭키는 궤도에서 탈선한 채 달리는 것처럼 보이는 부모의 불화에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자신을 독립된 인격체로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액세서리처럼 생각하는 리드를 견딜 수 없었던 크리스타는 결국 별거를 감행한다. 더 이상 스테이플러로 박아 넣은 미소를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속물적인 시애틀 교외의 삶에 천착하던 프랭키는 필사적으로 부모의 별거를 감추려고 노력한다. 리드의 폭언과 폭력을 참지 못하고 스카짓 하버로 거처로 옮긴 크리스타는 새로운 곳에서 제2의 인생을 맞이한다. 그런 그녀와는 달리, 주인공 프랭키는 가정을 지키지 못하고 자신만을 생각하고 아버지 리드, 자신과 그리고 어린 동생 사만다를 버린 엄마 크리스타를 용서할 수가 없다. 그에 비하면 아버지는 가정을 지키기 위해 싸우고 또 사우겠다고 선언하지 않았던가. 이런 비틀린 애정이 <초록 눈 프리키는 알고 있다>의 비극의 씨앗으로 작동한다.

 

가정의 행복에 대한 격언처럼 알려진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의 첫 구절인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를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모든 가정이 추구하는 행복이라는 지점이 요원하기만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조이스 캐럴 오츠는 무엇 하나 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완벽한 가정의 해부를 통해 미국 사회의 실체를 살짝 보여준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내가 원하는 행복이라는 가치가 가족의 구성원에게 똑같이 적용될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기 위해선 무엇보다 소통이 중요하지만, 그 소통을 위해서 변화와 실천을 할 수 있는 의지가 필요하다는 것도 깨닫게 됐다. 나의 생각을 타인에게 주입시키려는 리드의 과욕이 모든 사달의 발단이 아니었던가.

 

조이스 캐럴 오츠가 정교하게 기술한 부모 간의 역학관계도 눈여겨볼 관전 포인트다. 왜 크리스타는 진작 리드의 폭력에 전문가나 지인의 도움을 오청하지 않았을까. 사후약방문식의 처방이 아니라, 뼈아프지만 문제의 근본을 드러내고 해결에 나섰다면 그런 비극의 주인공은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한편, 미국 가정 내 만연한 폭력의 실체를 보는 것 같아 오싹해지는 느낌도 들었다. 크리스타의 리드에 대한 애증도 빼놓을 수 없다. 사랑하지만 함께 할 수 없는 비극이 그녀의 애증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면 과장일까?

 

아주 작은 단서조차 흘릴 수 없는 조이스 캐럴 오츠의 미국 사회의 기초를 이루는 가족에 대한 심리 스릴러 <초록 눈의 프리키는 알고 있다>는 의외의 수확이었다. 민음사의 청소년문학 임프린트인 비룡소 “블루 픽션” 시리즈로 출간돼서 여느 청소년 소설이겠지 하는 나의 추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십대 소녀의 이메일, 법정 진술 그리고 크리스타의 비밀 일기 등은 <초록 눈의 프리키는 알고 있다>의 구성을 풍부하게 해주는 다양한 요소들이다. 다양한 매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대가의 솜씨는 역시 기대이상이었다. 지난봄에 읽은 <블론드>가 대작이었다면, 이번에 읽은 <초록 눈의 프리키는 알고 있다>는 소품으로 조이스 캐럴 오츠의 문학세계에 접근할 수가 있었다. 만족스러운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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