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루스트라도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29
미겔 시후코 지음, 이광일 옮김 / 들녘 / 2013년 5월
평점 :
절판


 

솔직하게 고백해야 할 게 한 가지 있다. 필리핀 출신의 작가 미겔 시후코의 <일루스트라도>를 읽고, 책에 나오는 크리스핀 살바도르에 대해 고개를 갸웃거리며 위키피디아로 검색을 해봤다. 정말 타고난 이야기꾼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뻔뻔한 작가는 이 흥미진진한 메타소설 속에서 그 흔적을 쫓는 가공의 인물을 다양하면서도 신뢰가 가는 방식으로 멋지게 창조해냈다. 전형적인 메타소설의 양식을 빌려, 각종 시, 메타소설, 인터뷰, 블로그 댓글과 자학적 유머까지 동원해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방식으로 크리스핀 살바도르에게 생명을 불어 넣었다. 모름지기 소설가라면 이 정도는 해야 하는 게 아닌가.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 출신의 미겔 시후코는 은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났다는 표현에 적합한 성장 배경을 가지고 있다. 필리핀 국회의원 출신 아우구스토 시후코 주니어의 아들로 태어나 국제학교를 졸업하고 필리핀 최고의 대학인 아테네오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19세기 후반, 스페인 통치 아래 선각자들이란 뜻의 <일루스트라도>는 스페인 식민지배 아래 필리핀 민중의 비참한 현실을 자각한 중산 계급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자유주의 사상과 유럽의 민족주의 영향을 받은 일단의 그룹이다. 이 중에는 실존 인물인 필리핀 독립운동가 호세 리살도 포함되어 있다. 미겔 시후코는 <일루스트라도>를 자신의 야심찬 데뷔작 제목으로 삼았다.

 

미겔 시후코는 직접 본인의 이름으로 메타소설 속에 등장해서 미국 허드슨 강에서 시신으로 발견된 진짜배기 필리핀 작가크리스핀 살바도르가 마지막으로 매달리던 <불타는 다리>를 추적하기 시작한다. 필리핀의 모든 추악한 사실을 담은 <불타는 다리>는 필연적으로 사라져 버렸는데, 시후코는 필리핀 역사를 관통하는 살바도르 가문에 대한 이야기와 조국 필리핀과 망명지 캐나다/미국을 오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스페인 식민지배 이래 필리핀 근현대사를 조명한다.

 

초보 작가이기는 하지만, 이런 심각한 주제만으로 500쪽이 넘어가는 장편소설을 전개하지는 않는다. 자신의 친구이자 스승인 크리스핀 살바도르를 추모하며, 동시에 조국 필리핀을 떠나 캐나다에 뿌리를 내리고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그야말로 코즈모폴리턴적인 삶을 사는 21세기 자발적 망명객이자 이방인의 초상을 섬세하게 묘사해낸다. 다시금 마닐라로 돌아가 스승의 흔적을 쫓는 과정은 마치 연어가 자신이 태어난 강으로 회귀하는 그것처럼 느껴졌다. 도대체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메타 소설적 창조인지 독자는 헷갈릴 지경이다. 전형적인 미국 여인으로 등장하는 뉴욕 여친 매디슨과의 관계는 마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사이에서 정체된 필리핀의 현실에 대한 메타포로 다가온다. 군부의 쿠데타 위협이 일상화되고, 일체의 정치적 행위가 희화화된 필리핀 국가의 현실을 작가는 냉정하게 꼬집는다.

 

개인적으로 크리스핀 살바도르에 죽음에 대한 논쟁을 다룬 SNS 열전(熱戰)과 소설의 중간중간에 등장하는 필리핀 청년 에르닝 이십의 에피소드를 눈여겨 보았다. 모든 사건 사고가 인터넷 소셜 네트워트를 통해 실시간으로 생중계되고, 곧바로 연쇄반응을 일으키는 신()소통의 시대의 위력을 작가는 예리하게 짚어냈다. 조국을 떠나 새로운 세계에 정착을 시도하는 필리핀 신인류의 전형으로 나오는 에르닝 이십의 과장된 좌충우돌기는 한편으로는 우스우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스스로를 낮추며 블랙유머의 대상으로 삼는 작가의 치기가 느껴지기도 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국과 필리핀, 태평양이라는 시공을 가로 지르는 일종의 로드무비 같은 형식의 소설에서 크리스핀의 과거를 쫓는 여정은 어느 순간 서사를 위한 목적이 아닌 하나의 수단으로 뒤바뀐다. 그가 왜 죽었고, 그가 남긴 필생의 역작 <불타는 다리>의 행적은 중요하지 않다. 온갖 상념으로 가득 찬 상태로, 크리스핀의 과거 아니 조국 필리핀의 과거 속에서 부유하는 작가의 실존만이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150년 역사를 아우르는 필리핀 국가의 정체성에 대한 조명과 작가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들이 중첩되는 <일루스트라도>는 확실히 매력적인 소설이다. 가공의 인물인 크리스핀 살바도르가 소설 속에서 자신의 글을 통해 세상의 변혁을 바랬던 것처럼, 그의 창조자 미겔 시후코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까? 앞으로 계속될 작가의 도전을 기대해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알프레트 브렌델 피아노를 듣는 시간
알프레트 브렌델 지음, 홍은정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려서 팝송을 즐겨 들었다. 그중에서도 헤비메틀팬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즐겨 듣던 음악의 디스트레스(distress) 요소가 되기 시작했다. 나이가 들기 시작했다는 증거였을까? 고리타분하다고 회피해오던 클래식 음악을 찾아 들었다.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명동에 있던 디아파송 같은 클래식 전문음반가게에서 알프레드 코르토, 디누 리파티 그리고 상송 프랑수와 같은 거장 피아니스트들의 복각 CD를 애써 구해 들었다. 연주자에 대한 편식이 있어서였는지 알프레트 브렌델의 이름은 알고 있었지만, 소장하고 있던 CD는 아마 슈베르트의 <송어>가 유일하지 않았나 싶다.

 

위키피디아로 브렌델에 대한 정보를 검색해 보니, 오스트리아 출신 피아니스트라는 설명이 나왔다. 지금은 체코 공화국이 된 비젠베르크 출신의 알프레트 브렌델은 유대계 독일인이라고 한다. 알프레트 브렌델은 17세인 1948년에 데뷔해서, 관절염 때문에 공식적으로 은퇴한 2008년까지 60년간 연주자로 활약한 말 그대로 거장(그로스마이징거)이었다. 책을 읽는 동안 그의 연주가 다시 듣고 싶어 부랴부랴 유튜브로 슈베르트 즉흥곡을 찾아 들었다. 암보로 무대 위에 놓인 피아노 저편을 응시하며 물 흐르듯 전개되는 브렌델의 연주는 일품이었다.

 

연주자의 주관적인 해석보다는 언제나 작곡자의 원곡에 중점을 두는 브렌델의 편곡에 대한 생각이 마음에 들었다. 그는 특히 다양한 오페라를 피아노곡으로 편곡한 프란츠 리스트에 대해 탁월한 평가를 내린다. 개인적으로 리스트가 피아노곡으로 편곡한 <헝가리 무곡>을 무척이나 좋아하는데, 브렌델은 다양한 시도의 편곡을 지지하면서도 여전히 작곡가의 원곡이야말로 연주자가 지향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저자는 위대한 작곡가인 루트비히 판 베토벤에 대해서도 다양한 평가가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와 동시대를 살던 미학자들이 베토벤 음악의 캐릭터가 가진 심리적인 요소와 도덕적인 요소가 있다고 썼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요소가 있는지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아무래도 독자는 피아노에 전문가가 아닌지라, 그가 주장하는 대로 크게 연주해야 하는 부분에서는 크레셴도를 좀 더 작게 시작해야 한다고 하는데 이런 부분에 대한 인지는 정말 오랜 기간의 연습과 연륜이 쌓이지 않으면 불가능한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브렌델에게 피아노란? 그에게 피아노는 목적을 위한 수단이란다. 모든 변화무쌍함을 보여줄 수 있는 악기이자, 해석자의 감성과 유머를 표현해낼 수 있는 수단이라는 말일까? 그에게 피아노는 또한 수많은 사운드가 담긴 통이다. 이것을 전달하기 위해 자신의 수단인 피아노가 최고여야 한다는 주장도 펼친다. 명필을 붓을 가리지 않는다는 동양의 격언은 적어도 브렌델의 피아노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모양이다. 한편으로 그의 주장에 공감이 되면서도, 청중을 위해 직접 공장을 찾아가 노동자들 앞에서 피아노 연주를 마다하지 않은 마우리치오 폴리니의 그것과는 대척점에 서 있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브렌델은 작곡가야 말로 연주자에게 필요한 정보의 원천이라는 상찬을 아끼지 않는다. 그렇다, 베토벤과 모차르트 같은 작곡가가 남긴 원곡 없이 어떻게 그들을 음악을 재현해내는 연주자가 존재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해서 연주자가 작곡가의 종이나 노예 같은 존재는 아니라고 단언한다. 모든 연주자는 자신만의 개성을 가지고, 자신 고유의 해석을 통해 청중과 만나게 된다. 또한 모름지기 모든 연주자는 필히 작곡을 공부해서, 원작곡가가 원곡에서 보여준 의도를 파악하는데 소홀함이 없어야 한다는 주장일 것이다. 예술가의 놀라운 논리전개에 절로 고개가 숙여질 뿐이다.

 

솔직히 전문가인 알프레트 브렌델의 이야기 전부를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처럼 광대한 피아노 연주의 세계는 물론이고, 그가 템포와 리듬 그리고 해석을 설명하기 위해 인용한 피아노곡들은 생소하기만 했다. 그래도 그가 존경하는 사부인 에드윈 피셔와 알프레드 코르토,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 그리고 한스 폰 뷜로 같이 익숙한 이름이 나올 때면 반가운 기색이 들었다. 과연 피아노 전공자가 브렌델의 글을 읽는다면 어떻게 반응했을지 참 궁금하다.

 

아무래도 독일계 연주자이다 보니 모차르트와 베토벤, 슈만과 슈베르트 등 주로 독일계 작곡가들의 작품을 위주로 소개된 점이 아쉽다. 다른 에세이에도 나온 것처럼 다양성(variety)을 추구했으면 좋았으련만. 하긴 A부터 Z까지도 영어가 아닌 독일어로 소개가 됐었지. , 이제 책을 읽었으니 브렌델의 음악을 들을 차례다. 그의 고별연주 앨범에 실린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하이든 그리고 바흐의 곡이야말로 이제는 은퇴한 비르투오소가 우리에게 남긴 최고의 유산이리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북경 상점
조경환 지음 / 생각을담는집 / 201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북경오리 요리를 먹어 보았는가? 트레이에 잘 조리된 오리고기가 실린 카트를 길다란 식당 주방장 모자를 정갈하게 쓴 요리사가 끌고 나와, 전병에 싸서 소스에 바로 찍어 먹을 수 있게 오리고기를 발라주는 모습이 참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 서비스가 끝나고 요리사가 돌아가기 전에 팁을 주어야 하지만 말이다. 이 장면에서 요리는 먹는 즐거움도 있지만, 시식하기 전에 보는 즐거움도 무시할 수 없다는 진리를 다시 한 번 깨달을 수가 있었다. 조경환 작가의 <북경상점>은 수백년 역사를 가진 북경(베이징)에서 노자호라 불리는 한다하는 상점에 얽힌 다채로운 이야기를 독자에게 풀어내준다.

 

역시 예상대로 도시 투어의 기본은 역시 먹거리 기행이라는 말처럼 작가는 북경에 가면 누구나 한 번 꼭 먹어봐야 하는 북경오리 전문점 이야기로 상점기행을 출발한다. 북경 제일의 오리요리 전문점이라는 <전취덕>이 일번타자로 등장한다. ‘천하제일루라는 명성이 부끄럽지 않게 가게 앞에 줄지어선 손님들의 모습이 고스란히 카메라에 담겨 있다. 역시 학자답게 <전취덕>의 유래에서부터 자의 필획이 하나 빠진 사연을 추적하는 장면에서는 감탄이 절로 피어났다. 그렇다고 상점 소개에 꼭 필요한 위치나 단가 그리고 중국어를 할 줄 모르는 독자를 위해 무얼 먹으면 되는지까지 자세한 소개가 줄줄이 이어진다. 과연 언제 북경에 가게 될진 모르겠지만 <전취덕>의 오리요리는 꼭 한 번 먹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 역사상 최대의 판도를 자랑하던 강희건륭 연간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소맥 요리 전문점 도일처 이야기도 일품이다. 산서성 출신 왕서복이라는 이가 세웠다는 도일처의 자랑거리인 소맥 요리는 만두 비스무레한 음식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1752년 당시 황제였던 건륭제가 직접 소맥 요리를 맛보고 그때까지만 해도 현판이 없던 가게에 <도일처>라는 현판을 직접 하사하면서 가게가 흥했다고 했던가. 가게 역사를 한눈에 보여주는 청동 조각상을 보며, 역시 대륙 스타일이지 싶었다.

 

차 한 잔에도 정성을 다하는 중국인들의 면모가 엿보이는 오유태찻집을 비롯해서, 왕족과 대신들의 신발을 짓기 위해 2100번의 바느질을 마다하지 않는다는 내연승, 100% 수작업만을 고집한다는 모자전문점 성석복 그리고 한 번에 8,000명이나 되는 인원에게 쇄양육(양고기)을 접대할 수 있다는 동래순 등 북경 상가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전문 대로와 대책란 거리에 포진한 유구한 역사의 노자호들과의 만남은 확실히 인상적이었다.

 

우정을 제외하고는 못 자르는 것이 없다는 왕마자 상점의 검은 호랑이가위는 정말 탐이 났다. 언제 북경에 가게 될진 모르겠지만, 다른 건 몰라도 이 가위만큼은 꼭 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해 바다를 건너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짜장면이 된 북경식 원조 작장면 이야기에선 귤이 회하를 건너 탱자가 되었노라는 고사가 생각나기도 했다. 어지간한 맛집 블로거를 뺨치는 요릿집 소개도 일품이었다.

 

조경환 작가의 상점방문기를 읽으면서, 어떤 상점이든지 단순하게 좋은 물건을 취급하고 친절한 서비스로 고객을 접대한다는 기본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20세기 기술문명의 시대가 속도전 같은 생산시대였다면, 21세기는 바야흐로 개별적 소통을 중심으로 한 소비시대로 규정할 수가 있겠다. 새로운 소비시대의 결핍을 채워주는 것이 바로 작가가 초점을 맞춘 서사(스토리텔링)이 아닐까? 모주석(마오쩌둥)과 주총리(저우언라이) 그리고 좀 더 시대를 올라가 강희제와 건륭제 그리고 곽말약의 에피소드가 얽힌 가게라면 누군들 마다하겠는가. 그리고 개인적으로 왜 작가는 이 책에 소개된 노자호를 중국식 이름이 아닌 한자 독음으로 굳이 표기하는지 궁금했는데, 말미에 실린 글을 통해 그 이유를 알 수가 있었다.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중국에서 100% 수작업으로 칼을 만드는 명장(名匠)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이제는 세계 G2 국가로 성장한 중국에서 만든 제품이 싸구려라는 왜곡된 이미지를 갖고 있었는데 장인 정신이 빚어내는 정성이 깃든 상품에 그런 평가를 내릴 수 있는지 스스로 묻게 됐다. 북경마니아의 노자호순례기를 통해 그동안 모르고 있던 중국의 비물질 문화유산에 대해 재고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가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 김언수 소설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3년 전, 여름 김언수 작가의 글과 처음으로 만났다. 문학동네 카페에서 연재된 <설계자들>의 인연으로 출간 즈음한 모임에서 작가도 처음으로 만날 수가 있었다. 킬러를 주인공으로 삼은 장편 <설계자들>은 그 소재의 선택에 있어 정말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3년이란 시간이 흘러 이번에는 9편의 단편을 모은 소설집 <>으로 그를 다시 만날 수가 있었다.

 

<설계자들>도 그랬지만 이번 소설집 역시 잘 읽힌다. 타이틀인 <>을 제외하고는 소설집에 실린 순서대로 읽지 않고 마음 가는 대로 읽었다. <>에는 그야말로 질풍노도의 삶을 접하게 된 어느 십대 소년의 정체를 알 수 없는 분노라는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누구나 꿈꿔 왔지만, 그 시절에는 언감생심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기득권에 대한 반항 때문에 억울하게 테니스장과 화장실 청소를 해야 했던 나의 이야기에 공감이 갔다. 그리고 그 덕분에 남고 학생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문학과 조우하게 되었노라는 서사가 마음에 들었다. 그가 만난 문학은 분노에 차 샌드백에 쉴 새 없이 잽을 날리고, 풋워크를 배우는 예의 십대 소년에게 뿐만 아니라 전쟁터인 이 세상을 사는 모두가 언젠가는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 꼭 만나게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두 번째 인스톨인 <금고에 갇히다>는 설정이 멋지다. 일확천금을 노리며 어느 부자의 특수강으로 만든 사설금고에 갇힌 두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 이야기는 우리가 꿈꾸는 성공신화의 허구를 그대로 드러내 준다. 성공강박에 빠진 사회는 그저 우리에게 노력해서 성공하라고 다그치지만 성공 이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의 언급도 없다. 어떤 삶이 성공한 삶인지는 전적으로 주관적이지만, 이러이러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무언의 공식이 지배하는 비현실이 그대로 드러난다. 엄청난 돈과 보석 그리고 금붙이 가득한 금고에 갇히지만 외부에 단절된 공간 속에서 그것의 가치는 제로(zero). 금으로 만든 주사위를 굴리며 베네수엘라 미녀와 해보려던 수작을 뱀놀이 승부에 목숨 거는 두 사내의 절박함에 그저 헛웃음이 나올 뿐이다.

 

비슷한 시절을 보낸 작가의 서술이 절절하게 다가온다. 선배 세대처럼 절박하지도 그렇다고 후배 세대처럼 세련되지도 못한 어중간한 시대를 보낸 세대의 고백이 줄줄이 이어진다. 어쩔 수 없이 마틴 스코시즈의 <비열한 거리>(Mean Street)<레 미제라블>을 연상시키는 <단발장 스트리트><꽃을 말리는 건, 우리가 하찮아졌기 때문이다> 모두 회한과 허무주의가 팽배해 있던 어느 시절과 묘하게 겹쳐지는 느낌이 들었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 아무런 꿈도, 야망도 그리고 미래에 뭐가 되겠다는 결심도 없었던 를 떠올리게 한다.

 

소설가의 기발한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인스톨은 역시 <참 쉽게 배우는 글짓기 교실>이다. 귤을 사가지고 집으로 귀가하는 길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들에게 납치되어 비더게부르트라는 기묘한 장비에 올라 모진 고문을 당하고 마침내 자료만 있다면, 불필요한 기술은 제거하고 명료하면서도 짧은 문장을 쓰는 법을 배우게 되는 주인공의 비참함이 묘한 공명을 울린다. 국민에게 위임받은 권력이 어제부터인가 주권자 위에 군림하면서, 지배자 행세를 하는 경찰국가의 원형이 씁쓰름함을 자아낸다.

 

파리 목숨 같은 시간강사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 그야말로 똥 덩어리 같은 시집의 발제문을 작성해야 하는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못해 엉뚱하게도 섹스를 하자고 선포하고 행동에 옮기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지식인의 이야기, 집에 어울리지도 않는 소파를 들여 놓았다가 다시 빼내지 못해 친구에게 말도 안되는 시간에 도움을 청하는 명동에만 눌러 붙어 사는 사내 이야기, 실직으로 아내에게 구박을 받으면서 돌아가실 날만을 기다리는 아버지에게 몸에 좋다는 알부민을 공급하기 위해 기세 좋게 아내의 통장을 들고 나섰다가 재수 털린 가장의 이야기 등등 이렇게 하면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거창한 패러다임이 아닌 같은 소시민적 삶의 정곡을 찌른 서사가 참 마음에 든다.

 

마지막 인스톨인 <하구(河口)>에서는 어디선가 본 듯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성공의 입구에서 그놈의 술 때문에 추락해서 시골로 내려온 사내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술이었다는 아이러니한 설정이 주목을 끈다. 바닥까지 내려온 사내보다 고수들과의 술자리는 알코올의 유혹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는 사내를 제자리로 돌려보낸다. 이들이 보내는 황폐하기 짝이 없는 시간은 그들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 걸까.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그런 허황된 약속 따위는 하지 않는다.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인생에서 가장 황홀한 시절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고작이다. 그 정도로 만족해야 하는 걸까? 알 수 없는 일이다.

 

5년 주기로 돌아오는 위기로 자기계발 서적 대신 소설이 그 자리를 꿰찰 거라는 전망을 들었다.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다. 팽팽하면서도 군더더기 없는 글로 무장한 김언수 작가의 귀환을 축하하며, 돌아온 소설시대에 지속될 그의 날렵한 을 기대해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특성 없는 남자 1
로베르트 무질 지음, 안병률 옮김 / 북인더갭 / 2013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난 천년의 마지막 즈음에 독일에서 99명의 저명한 소설가, 평론가 그리고 학자에게 20세기 가장 뛰어난 문학작품 100권을 선정했다. 그 중에서 1위에 오른 작품은 독일 문학의 거장으로 손꼽히는 토마스 만이나 프란츠 카프카가 아닌 조금은 생소한 이름의 오스트리아 출신 로베르트 무질이 쓴 <특성 없는 남자>라는 작품이었다. 도대체 어떤 작품이기에 그 쟁쟁한 작가들의 작품을 제치고 당당하게 독일 문학 1위에 올랐을까 하는 호기심이 생겼다. 그리고 이번에 북인더갭을 통해 출간된 <특성 없는 남자>를 통해 20세기 독일 모더니즘의 고전이 된 예의 작품과 만날 수가 있었다. 아 그런데 모더니즘 소설이라고? 엄청난 분량만큼이나 이 책을 읽을 독자는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할지어다.

 

오스트리아 케른텐 주 클라겐푸르트 출신의 로베르트 무질은 필생의 역작인 <특성 없는 남자>를 1921년부터 구상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나치의 탄압을 피해 스위스로 망명해서 1942년까지 계속해서 썼고, 결국 미완성 원고로 남긴 채 작고했다. 무질이 소설의 주인공으로 내세운 울리히는 명백하게 작가 자신의 분신이다. 이전 세기에 유럽 대륙을 질풍노도처럼 누볐던 영웅 나폴레옹을 흠모하며 기병학교에 사관후보생으로 입교하였으나, 자신이 그저 한낱 모험을 쫓는 젊은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번에는 눈부시게 발전하는 현대문명을 선도하는 기술자의 길에 도전한다. 기술자로서 자유나 광활한 사유보다 예의 전문성에 매달리게 될 거라는 두려움 때문에 이번에는 수학자가 된다.

 

보통 사람들과는 달리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에 대해 사유하고, 주변환경과 주변 인물들을 분석하는데 시간을 보내는 주인공 울리히는 아이러니하게도 스스로 가진 특성을 포기함으로 자신이 누릴 수 있는 현세의 기쁨을 포기한다고 선언한다. 작가는 32살의 청년 울리히를 그의 창조자 로베르트 무질에 그대로 등치해도 무방할 것 같다. 개인적으로 이렇게 문학적 감성보다는 규율 혹은 논리적 사고를 가진 저자가 어떻게 해서 소설가가 되었을까 라는 점이 궁금하다.

 

‘결정적 사유’의 개척자답게 울리히/로베르트 무질은 독자가 기대하는 평범한 서사 구조가 아닌 울리히 개인의 내부에 침잠한 광활한 사유를 무한대로 퍼올리는데 주력한다. 유럽의 모든 것을 휩쓸어 버린 일차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인 1913년 8월, 그가 살던 카카니엔(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의 수도 빈(Wien)은 다양한 사상, 철학 그리고 예술의 중심지였다. 정신분석학의 창시자로 손꼽히는 프로이트를 필두로 해서, 비트겐슈타인, 클림트, 실레, 쇤베르크로 대변되는 사실상 유럽의 문화수도였다. 수도 빈이 품고 있던 이런 문화적 다양성은 주인공 울리히가 만나고, 소설의 전개에 따라 차례대로 소개되는 주변 인물들과의 접점을 통해 로베르트 무질이 구사하는 사유 속에 그대로 녹아든다.

 

소설 속의 울리히는 스스로에게 현실감각을 박탈하고, 특성 없음을 자신의 캐릭터로 삼기 시작하면서 현세의 어떤 확실한 기쁨을 제거해 나간다. 과연 어떤 특성도 없는 사람이 존재할 수 있을까? 어쩌면 특성 없다는 것이 또 하나의 특성이 되는 건 아닐까? 울리히가 세 명의 부랑아와 마주쳤을 때 모든 사물이 경계(적대)를 통해 존재한다는 사유의 전개도 흥미롭다. 적대적 개념쌍이 아이러니하게도 존재의 이유가 된다니, 발상의 전환이 놀랍기만 하다. 세 부랑아는 그런 차원에서 그에게 적대적 위협이 아닌 ‘구원’이었다.

 

소설의 구심점 중의 하나로 작용하는 저물어 가던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즉위 70주년을 기념하자는 다소 모호해 보이는 ‘평행운동’이 관심을 끌었다. 실제로 카카니엔의 황제가 1차 세계대전 중에 사망하면서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이미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된 신사조에 대항하는 구질서 회복 운동 정도로 규정해야 할까. 개혁에 반동해서 어느 사회에서나 벌어지는 시대착오적인 모습의 이 운동은 주창자인 라인스도르프 백작 또한 그 성격을 규정할 수 없다. 어쩌면 수십년 뒤에 이웃나라 독일의 병합되어 자발적인 병영국가(garrison state)의 원형질을 제공하는 실마리가 되었다고 한다면 너무 앞선 예단일까.

 

개인의 사소한 일상에서 출발해, 가정, 지인, 병리적 사회현상 그리고 국가적 차원의 운동에 이르기까지 로베르트 무질은 끊임없이 사유의 확장을 시도한다. 확실히 서사보다는 사유에 방점을 찍은 그의 기술은 조금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그것이 또한 이 탁월한 모더니즘 소설의 특징인 것일까? 인내를 가지고 끈질기게 읽어 가지만, 도무지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저자의 복잡한 사유의 전개를 쫓아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아무래도 한 번의 독서만으로는 무질의 사유를 이해하기란 난망할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물론 너무 세세한 것에까지 ‘결정적 사유’를 발동시킨다면 독서의 진도가 나가지 않겠지만. 어쨌든 나에게 <특성 없는 남자>는 결코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