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펜하우어와 니체의 문장론 - 책읽기와 글쓰기에 대하여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홍성광 옮김 / 연암서가 / 2013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각설하고 본론으로 직접 들어가자. 이 책의 역자 홍성광 씨는 서두의 <해설>에서 글쓰기의 본질을 독자적 사고, 독창성이라고 못 박는다. 힐링의 시대를 지나 소통의 시대, 다시 한 번 글쓰기 능력이 각광을 받고 있다. 사물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고 자신의 사고를 가다듬는 글쓰기야말로 이 시대가 요구하는 스펙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작금의 현실은 어떠한가? 텍스트 읽고 쓰기에 전혀 훈련이 되지 않은 몰지각한 이들이 세상에 넘쳐난다. 역자가 꼽은 글쓰기에서라면 둘째가라고 한다면 서운해 할 두 명의 철학자가 지하에서 통곡할 일이다. 그들이 바로 쇼펜하우어와 니체다.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먼저 고백해야할 점이 한 가지 있다. 누구나 한번쯤은 다 들어봐서 아는 이 철학자들의 저서를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책은 아예 접해본 적이 없으며, 니체의 저술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읽긴 했지만 여전히 이해불가며 그나마 쉽다고 생각한 아포리즘 모음집 역시 예상과 달랐다. 이렇게 스스로의 무지에 대해 고백하고 나니 속이 다 시원하다.

 

먼저 쇼펜하우어는 독자적 사고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런 점에서 무턱대고 읽는 독서를 지양한다. 독서는 자신의 생각이 아닌 타인의 생각에 매몰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사고가 막혀 있을 때만 독서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독자적 사고를 해야 한다는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이 필요할까? 하루가 다르게 발전해 가는 현실세계에서 모든 것을 체험하면서 사고의 능력을 기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단호함과 확고함으로 준비된 사람이야말로 자신이 표현하려는 것을 정확하게 해낼 수 있다고 말한다. 읽다 보니 어째 니체의 위버멘쉬가 떠오른다.

 

저술가의 분류에 있어서도 쓰기 위해 쓰는 사람보다 사물 자체를 서술하는 낫다고 쇼펜하우어는 말한다. 그는 표절이 난무하는 21세기 한국에서도 새겨 들을만한 정직하지 못한 저술에 대해서도 일침을 가한다. 익명성에 대해서도 쇼펜하우어는 비판적인 견해를 제시하는데, 요즘 인터넷상에서 벌어지는 익명의 덧글논쟁과도 일맥상통한다. 익명으로 행해지는 비평음 모두 거짓말과 사기로 규정하는데, 자유주의자들이 들으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다.

 

저술의 기술적인 측면에서 쇼펜하우어는 간결하면서도 구체적인 표현으로 누구나 다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글을 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너무 당연한 일이지만, 요즘 다수의 신문기사는 물론이고 문학비평 같은 경우에는 해설이 없으면 이해할 수가 없을 지경이다. 표현이 명료하지 못하고 모호한 문장에 대해서는 어딘가 정신적으로 빈곤하다는 반증이라는 지적이 무섭다. 충분한 사고를 한 다음에 쓴 글이 그럴 수 있을까? 상대방과의 소통을 위해 정확하고 간결한 문장이야말로 최선의 방법일 것이다.

 

책을 많이 읽어 바보가 된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 보았는가? 쇼펜하우어는 독서의 맹점에 대해서도 신랄한 비판을 마지않는다. 어떻게 보면 독서하는 나의 머리는 타인의 생각이 뛰노는 놀이터에 불과하단다. 그런 점에서 저자는 다시 한 번 독자적 사고가 필요하다는 점을 독자에게 주지시킨다. 그리고 독서를 통해 세상이란 참으로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터득할 것을 주문한다. 글쓰기를 뛰어 넘어 양서를 접하고 대하는 태도에 이르기까지 선배 독서가의 충고는 끊이지 않는다.

 

이렇게 쇼펜하우어가 글쓰기/독서에 대해 구체적인 실천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면, 이와는 달리 니체는 불가의 선문답 같은 아포리즘으로 독자에게 도전한다. 모든 진리는 서로 통달한다고 했던가. 잘 쓰기 위해서는 보다 잘 생각(사고)해야 한다고 니체는 말한다. 불멸의 문체는 꿈꾸는 이들에게는 이 같은 아포리즘을 남기기도 했다. 문필가가 되기 부끄러워 하는 자야말로 최고의 저자가 될 것이라고.

 

아이러니하게도 서툰 문필가도 우리에게는 필요하다고 니체는 말한다. 어쩌면 막장 드라마가 범람하는 우리 현실에 딱 들어맞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덜 발달하고 미성숙한 이들의 취향에 제격이라니 말이다. 그들만의 욕구를 채워주기 위해 미성숙하고 서툰 문필가 또한 필요하단다.

 

쇼펜하우어의 명확하면서도 간결한 글쓰기에 대한 글들은 그야말로 귀에 쏙쏙 들어왔다. 반면 니체의 쉬워 보이지만 오히려 수많은 사고를 거듭해야 비로소 알까말까하는 아포리즘들은 전혀 와닿지 않았다. 니체가 자신의 글이 읽히지 않기를 바랐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그의 글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신의 능력에 좌절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물론 이조차도 자위적 사고의 발로이겠지만. 어쨌건 20세기를 주름 잡았던 두 명의 철학자의 글을 통해, 글쓰기에 대해 한 수 배웠다. 그들은 끝없이 독자적인 사고를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글쓰기를 하라고 목 놓아 외치는데 그들의 충고가 앞으로 나의 글쓰기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 자못 궁금하다. 여전히 남의 생각의 놀이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글쓰기가 될지, 아니면 깨달음 대로 그것을 뛰어넘는 독자적 글쓰기가 될지 지켜볼 일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페르노 1 로버트 랭던 시리즈
댄 브라운 지음, 안종설 옮김 / 문학수첩 / 201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댄 브라운이 돌아왔다. 오래전 <다빈치 코드>를 읽고 가히 충격에 빠졌었다. 중세 르네상스 시기의 걸작 <최후의 만찬>에 숨겨진 기호도상학적 코드를 바탕으로 비밀결사 조직인 시온 수도회 그리고 중세 말의 알비 십자군 전쟁에 이르는 정말 기상천외한 전개와 숨막히는 추격 등등 그야말로 재밌는 소설이 갖추어야 할 모든 요소를 갖춘 읽는 재미를 흠뻑 느낄 수 있는 책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소설을 이끌어 가는 주인공으로 나선 하버드대 출신의 패션 감각 넘치는 중년의 독신남이자 기호도상학 분야에서 세계적 권위를 자랑하는 로버트 랭던 교수의 활약까지 더해지면서 댄 브라운 소설은 그야말로 탄력을 받았다.

 

댄 브라운은 신작 <인페르노>는 모두가 주지하다시피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피렌체 출신의 시인 단테 알리기에리의 <신곡>을 이루는 한 파트로 우리말로 하면 지옥편 정도라고 할 수 있겠다. 작가는 성공한 자기 전작의 패턴을 <인페르노>에서도 그대로 반복한다. 어쩌면 진부할 정도로 말이다. 미스터리한 인물의 죽음으로 시작되는 <인페르노>에서 영화 버전에서 주인공을 맡은 탐 행크스의 이미지를 떠올릴 수 밖에 없는 로버트 랭던 교수의 재기용은 물론이다. 여기에 영국 출신의 IQ208의 천재 시에나 브룩스를 사이드킥으로 장착했다. 바로 이 두 인물이 닥터 이블(Doctor Evil)의 인류 종말 프로젝트를 막는 메시야로 분한다.

 

아 한 가지 패턴이 빠졌다. 시온 수도회 같은 역할을 하는 집단으로 컨소시엄이 등장하는데, 소설의 초반 총상을 입고 기억상실에 빠진 랭던을 집요하게 추격하면서 소설의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임무를 수행한다. , 다음 요소로는 공간적 배경인 피렌체다. 피렌체에 한 번이라도 가봤더라면 좀 더 구체적인 묘사를 할 수 있겠지만 아쉽게도 소설과 인터넷 블로그 정도로 만족하자. 중세 르네상스의 발원지이자 메디치 가의 후원으로 양성된 수많은 예술가들의 흔적이 남아 있는 장소이자 동시에 소설의 미스터리를 증폭시키는 핵심인 단테의 고향으로 앞으로 영화화될 때 어떻게 그려질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이렇게 철저하게 준비된 진용을 바탕으로 랭던 교수에게 벌어진 사건의 단서를 찾는 것으로 소설은 숨 가쁘게 달려간다. 마치 모든 시내가 강에서 만나 바다로 흐르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실체는 산드로 보티첼리의 <지옥의 지도>를 거쳐, 베키오 궁전의 <마르시아노 전투> 그리고 단테의 데스마스크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보통 사람들은 상상할 수도 없는 도상학적 전문 지식으로 독자를 휘몰아쳐 간다. 과연 작가 댄 브라운에게 그런 도상학적 분석 능력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쪽 분야에 거의 문외한인 독자로서는 작가의 권위에 그대로 복종할 수밖에 없다. 기호와 도상이 보여주는 비유(parable)가 늘 그렇듯, 자의적 해석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어째 입맛이 씁쓸해지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다.

 

어찌어찌해서 랭던 교수와 그의 조수 시에나는 이 모든 사건의 중심에 젊은 나이에 생물학 특허로 엄청난 돈을 번 생화학자 버트런드 조브리스트가 있다는 것에 도달한다. 안타깝게도 조브리스트는 바로 소설의 맨 처음에 죽는 것으로 나왔고, 그가 남긴 인류 종말 프로젝트의 가동을 둘만의 노력으로 막아야 하는 절체절명의 임무가 기다린다.

 

<다빈치 코드>에서 이미 선보인바 있는 모종의 음모이론은 전작 <천사와 악마>, <다빈치 코드> 그리고 <로스트 심벌>에 의해 더 정교해진 느낌이다. 그것은 아마도 무명의 작가 시절 그가 접할 수 있었던 정보와 자료에 비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이 시점에서 그가 모을 수 있는 그것의 양의 차이일 것 같다. 그런 자산을 바탕으로, 댄 브라운은 성공신화의 반복에 재도전한다. 그리고 확실히 스케일도 더 커졌다. 그동안 로버트 랭던이 소규모의 음모에 맞섰다면, 이번 <인페르노>에서는 인류라는 종의 구원을 위해 역설적으로 자신이 개발한 인류 멸망 방정식으로 인류를 파멸시켜야 한다는 정신 나간 닥터 이블을 막아야 한다. 문제는 이 닥터 이블이 그런 능력과 충분한 자금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 스케일은 더 커지고, 그에 맞서는 대응 또한 스펙터클해질 수밖에.

 

<인페르노>에 등장하는 여러 텍스트(도상 포함) 중에 에센스는 역시 단테의 <신곡>이다. 신곡 3부작 중에서 특히 지옥(인페르노)에 대한 선명한 묘사는 기존의 추상적 개념의 지옥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면서 교회로부터 멀어져 가던 대중의 발걸음을 되돌리는데 일조했다고 한다. 소설에 나오는 닥터 이블 조브리스트는 현세를 우리가 인지 못하는 인페르노로 간주하고, 자신이 창안한 솎아내기야말로 모든 문제의 해답이라고 생각한다. 바로 그 생각이 소설 <인페르노>를 추동하는 힘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산드로 보티첼리의 <지옥의 지도>의 상세를 보고 싶어 인터넷으로 검색해 봤지만, 심지어 출판사에서 제공한 이미지조차 너무 작아서 책에서 묘사된 부분을 대조할 수가 없었다. 단테의 <신곡>에 대한 정보를 인터넷으로 검색하다 보니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롱펠로우가 번역한 영문 전문을 귀스타브 도레의 삽화와 함께 무상으로 서비스하는 것을 보고 왜 우리나라의 대학은 이런 서비스를 하지 않을까라는 엉뚱한 질문에 도달하게 됐다.

 

어쨌거나 댄 브라운의 신작 <인페르노>는 읽는 재미가 있는 책이다. 읽는 동안에는 만사 제쳐두고 읽을만하다. 문제는 그렇게 열심히 다 읽고 나서 인기작가의 자신만만한 성공신화 반복이 어째 불편하게 느껴졌다는 점이다. 물론 이 소설도 영화화가 될 것이고, 탐 행크스가 주연하는 로버트 랭던의 이미지도 되살아나겠지. 하지만 같은 작가가 계속해서 반복하는 클리셰이(cliche)가 더 이상 반갑지 않은 건 나만의 생각이려나.

 

[뱀다리]

지옥의 가장 암울한 자리는 도덕적 위기의 순간에

중립을 지킨 자들을 위해 예비되어 있다.“도대체 이 문구는 어디에서 온 걸까? 원서 미리보기를 봐도 나오지 않던데.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신곡을 패러프레이즈한 문구라고 하던데 궁금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너를 봤어 - 김려령 장편소설
김려령 지음 / 창비 / 201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영화나 소설 <완득이>를 보지 못했다. 그러니 김려령 작가의 글은 처음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할 것 같다. 그동안 청소년 문학을 주로 발표해 왔다고 하는데, 신작 <너를 봤어>는 그녀의 온전한 첫 번째 성인소설이다. 책을 읽는데 무언가 도움이 될까 싶어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봤더니 신작 발표 즈음한 기자간담회에서 인생을 좀 아는 사람들의 사랑 이야기라는 말로 신작을 소개했다.

 

<너를 봤어>에는 잘 나가는 소설가 유지연과 결혼한 전직 소설가이자 이제는 편집자인 40대 중반의 정수현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나름대로 성공하고 문단에 알려진 아들을 상대로 삥을 뜯는 어머니에게 시달리는 장면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똑 부러진 며느리 역시 개천에서 용을 산 거지, 개천을 산 건 아니라는 말로 막무가내 시어머니의 삥을 거부한다. 독자는 조금은 일반 가정사 같지 않은 갈등 구조에 호기심을 비치기 시작한다.

 

이내 주인공은 아내가 아닌 다른 여주 서영재에게 마음을 홀랑 빼앗긴다. 그야말로 운명적인 사랑이라고 해야 할까. 나이 마흔 여섯 살에 찾아온 첫사랑을 어찌해야 할 것인가. 이거 불륜 서사의 시작인가? 나의 착각이었다. 달랑 6년간의 결혼생활을 끝으로 A출판사의 에이스이자 시대의 흐름에 올라탄 베스트셀러 작가는 이승과 이미 고별한 상태다. 이것을 깨닫는데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 역시 작가의 설계였다면 탁월하다. 아니면 상황 파악에 늦된 독자의 아둔함 탓이겠지.

 

정수현의 불행하기 짝이 없는 가족사를 하나둘씩 드러내며, 출판계와 문단을 배경으로 한 자못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끼어든다. 물론 제법 단련된 책쟁이가 아니라면 그다지 관심이 없는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그 바닥 이야기가 재밌게 들렸다. 남주 정수현이 비교적 예측가능함을 상징한다면, 그 대척점에 서 있는 여주 서영재는 예측불허의 명랑쾌활로 무장된 캐릭터다. 거기에 두 사람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세 번째 인물로 윤도하까지 더하면 이젠 내용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 영화 <Three to Tango>의 제목이 안성맞춤이다.

 

아내와 사별한 정수현은 언제라도 새로운 사랑을 찾아 떠날 수 있는 몸이지만, 개천에서 용을 산 아내는 그럴 의도가 보이지 않는다. 마치 영화 <식스 센스>를 연상시키는 곳곳의 장면에서 죽은 아내는 여전히 미친 존재감을 발산한다. 이러니 터무니없는 불륜이 연상되는 것도 당연하지. 다 뛰어 넘어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첫 번째 성인소설로 너무 무거운 전개가 아니었나 싶다. 어쩔 수 없이 타나토스의 포로가 된 남주에게 로코식 해피엔딩을 기대한 것은 무리였을까. 차근차근 설명하는 대신, 미련하고 살벌한 사랑을 선택한 주인공의 마음이 참 안타까울 따름이다.

 

문단과 출판계에 대한 맛보기식 서술이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었다. 그 바닥에 구르지 않은 사람이 이렇게 신랄한 이야기를 쓸 수가 있을까? 글쟁이와 출판사의 관계를 사()와 사()의 관계로 표현한 점이나, 엉뚱한 복장으로 엄숙한 수상 식장의 분위기를 휘젓고 다니는 타조 상상은 정말 압권이었다. 글쓰기가 누군가에게는 숨막히는 노동이겠지만, 지상(至上)의 독자에게는 유희이자 오락일 수도 있다는 아이러니 또한 인상적이었다. 글쟁이와 출판사의 손을 떠나 전국적인 유통망을 통해 독자의 손으로 흘러 들어간 책의 운명은 온전하게 그들의 몫이라는 선언은 정말 마음에 들었다. 날로 책을 씹어 먹던, 잘게 찢어 염소 먹이로 사용하든 간에 말이다.

 

다시 한 번 이 미련하고 살벌한 사랑, 다 읽고 나니 마음이 짠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물의 역습
에드워드 테너 지음, 장희재 옮김 / 오늘의책 / 201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난 주말에 폭우를 뚫고 강원도 영월에 있는 고씨동굴에 다녀왔다. 동굴 입구에 들어서자 그렇게 무더운 여름인데도 초강력 에어컨을 틀어 놓은 것 같은 냉기가 전해졌다. 막 동굴탐험에 나서려는 순간, 안내하시는 직원 분이 동굴 우측에 주욱 진열된 헬멧을 의무적으로 착용해야 한다고 말씀해 주셨다. 날도 더운데 웬 헬멧이냐며 투덜거리면서 헬멧을 썼다. 그런데 높낮이가 천차만별인 동굴을 지나면서 수도 없이 머리가 종유석으로 이루어진 천장에 부딪혔다. 만약에 헬멧이 없었더라면...... 생각만 해도 아찔해졌다. 미국 출신의 기술문화 사학자 에드워드 테너는 헬멧을 비롯한 9개의 사물에 대한 이야기를 이 책을 통해 은밀하게 들려준다.

 

저자는 우선 서문에서 이 책에서 주로 다루게 될 주제인 테크놀로지와 테크닉 간의 상호보완적인 관계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한다. 테크놀로지가 인간에 의해 변형된 자연 세계라고 정의하고, 테크닉은 우리가 이것을 사용하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익숙하게 사용하는 간단한 기기들도 초기에는 사용방법을 익히기 위해 엄청난 시간이 필요했다고 한다. 초기 진공관 라디오 사용자들은 수신, 동조, 검출, 증폭 그리고 재생에 이르는 자그마치 열두 가지 이상의 절차를 숙지해야 비로소 라디오를 들을 수가 있었다. 요즘엔 쉽게 설명된 매뉴얼조차 읽지 않고 무턱대고 기기에 달려드는 현대인들에게 과연 그런 복잡한 절차를 익힐 인내심이 있을지 궁금하다.

 

글의 서두에서 내가 쓴 헬멧은 고대시대 전장에서 적의 치명적 공격에서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 고안된 보호구에서 유래된다. 고대 이래 갑옷과 헬멧은 생사를 가르는 중요한 보호구였지만, 16세기 총기류가 보급되면서 헬멧의 아성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역사를 통해 다양한 형태의 헬멧들이 부침을 거듭했고, 병사들뿐만 아니라 민간 분야에까지 그 영역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2차세계대전 즈음에 노동자들의 머리를 18킬로그램까지의 충격을 보호해줄 수 있는 산업용 플라스틱 헬멧을 개발해냈다. 전장과 위험한 작업장 뿐만 아니라 헬멧은 스포츠 분야까지 확산되었다. 우리가 즐겨 보는 프로야구 타자들이 헬멧을 쓰는 모습이 이제 어느덧 일상화되지 않았던가.

 

에드워드 테너는 인류가 엄마의 젖을 빠는 행위를 첫 번째 테크닉으로 그리고 젖병을 인류가 접하게 되는 첫 번째 테크놀로지로 규정한다. 그렇다면 인류의 첫 번째 기술적 통과 의례는 무엇일까? 걸음마를 생각해 보면 바로 답이 나올 것이다. 신발의 사용이 바로 그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신발이 없다면 상처로 피곤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신발이 발을 너무 잘 보호해서 발이 민감해진 것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오늘날도 10억 이상의 인구가 맨발로 생활하지만 상처 없이 잘 지낸단다. 어쨌든 각종 위험으로부터 발을 보호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기본적인 형태의 샌들이라고 한다.

 

세계인이 즐겨 신는 일본식 샌들 다시 말해 조리(게다)는 일본의 기후에 최적화된 샌들의 형태를 고수한다. 살생을 금하는 일본의 종교적 이유 때문에 가죽신이나 부츠 대신 도입된 조리는 갇힌 발 때문에 발생하는 각종 질병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있다는 지적이 인상적이었다. 게다가 저렴한 비용으로 쉽게 제작할 수 있다는 잇점 때문에 조리의 글로벌화는 현재진행형이라고 한다. 물론 일회용품으로 전락해서 천지에 범람하는 플라스틱 조리 제품으로 인한 환경문제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음악 건반과 타자 자판의 상호 작용에서 시작한 건반 역사에 대한 저자의 기술은 한층 더 흥미롭다. 서양 중세에서 발명된 가장 복잡한 기계 중에 하나라는 오르간에서 출발한 음악 건반은 하프시코드, 해머클라비어 같은 테크놀로지의 혁신이 있었다면, 카를 바흐가 개발한 새로운 형태의 운지법은 테크닉의 혁명이었다. 비로소 서양 음악의 중심으로 떠오르게 될 피아노를 위한 모든 준비가 완성된 순간이었다.

 

19세기 중반에는 이전까지만 해도 부유 계층을 위한 전유물이었던 피아노 제작 기술에 기계화를 통한 대량 생산과 상업적 홍보가 곁들여지면서 대중문화의 일부가 되기 시작했다. 저렴한 피아노조차 살 수 없는 이들을 위해서는 아코디언이라는 대체품이 탄생하기도 했다. 테크놀로지의 혁신이 테크닉을 발전을 도모하듯, 피아노 역시 마찬가지였다. 21세기는 그 어느 때보다 뛰어난 기교를 지닌 연주자들로 넘쳐 나고 있다. 고도로 발달된 녹음 기술로 인해 사운드 엔지니어는 거의 무결점의 레코딩을 쏟아내고 있고, 고성능의 장비들과 편집기술 역시 완벽한 연주에 한몫하고 있는 중이다. 피아노의 경우, 엔지니어 보다 위대한 작곡가와 연주자의 테크닉이 테크놀로지의 향상과 개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것은 저자가 주장하는 동일한 선상에서의 테크놀로지와 테크닉 간의 상호 보완 작용에 대한 정확한 예가 아닐 수 없다.

 

유사 이래 인류의 자연에 대한 끊임없는 도전은 테크놀로지의 개선과 발전을 가져 왔고, 이를 이용하는 테크닉 역시 계속해서 진화해 왔다. 에드워드 테너가 던지는 근본적인 질문은 다음 세대에는 이 두 가지 요소가 어떤 방식으로 결합하게 되는가이다. 가령 예를 들어, 조만간 상용화돼서 시장에 선보이게 될 예정인 에릭 슈미츠의 구글 안경 프로젝트는 스마트 시대에 획기적인 테크놀로지 이정표로 거듭나게 될 전망이다. 하지만, 지나친 인터페이스에 의존한 나머지 발생하게 될 프라이버시 이슈 같은 문제들은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은 아직 발표되지 않았다. 언제나 그렇듯 빠르게 변화하는 테크놀로지에 대한 규제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이렇게 최첨단 테크놀로지에 의존하다가는 언젠가 공상과학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사이보그 인간이 출연하는 게 아닌가라는 질문도 무시할 수가 없을 것 같다. 그런 점에서 혁신 디자인의 세계는 장려되어야 하지만, 새로운 창의와 도전을 위해서는 일정한 여지를 남겨 두어야 한다는 주장도 일리가 있다. 새로운 세기에는 또 어떤 테크놀로지와 테크닉이 우리 인류에 의해 재발견될지 궁금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눈먼 종교를 위한 인문학
김경집 지음 / 시공사 / 201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늘날 한국 교회는 건강한가?’라는 질문으로 이 책에 대한 리뷰를 시작하고 싶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교계 지도자는 배임과 횡령죄로 재판을 앞두고 있고, 성직자들의 각종 추문은 하루가 멀다 하고 터져 나오는 상황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여전히 성장지상주의와 대형교회화는 소리 없이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기독교인의 수는 날이 갈수록 줄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사회에서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기독교계의 권위는 이미 땅에 떨어진지 오래고,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꿈꾸는 이들에게 희망은 요원해 보이기만 한다. <눈먼 종교를 위한 인문학>의 저자 김경집 교수는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각성하고 다시 한 번 교회일치운동에 전념할 것을 이 책을 통해 주문하고 있다.

 

저자는 우선 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가 하나가 될 것을 주장한다. 그러기 위한 첫 걸음으로 기독교 정경인 성경의 일치화가 이루어져 할 것이다. 기독교 신자로 왜 여전히 우리는 고어투와 한문투로 된 성경을 읽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훨씬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쉬운 길이 있는데 굳이 약대(낙타)나 애급(이집트) 같이 보통 사람이 들으면 알 수 없는 말을 써야 하는지 이해불가다. 그것은 마치 중세시대 사어(死語)로 된 라틴어 성경을 고집했던 성직자들의 모습을 보는 느낌이 든다. 성경을 읽는다는 것 자체가 특권이었던 시절 말이다.

 

김경집 교수는 누구나 다 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존의 시각과는 달리 해석한다. 로마 황제 아우구스티누스의 호구 조사 때문에 만삭의 몸을 한 아내 마리아와 요셉은 고향 베들레헴을 찾는다. 베들레헴의 여관은 이미 만원이었고, 요셉 가족은 어쩔 수 없이 마구간에 기숙하게 된다. 문제는 이 불쌍한 가족을 외면한 이들이 바로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라는 지적 앞에서 순간 뜨끔해졌다. 이기적인 나의 모습을 거울로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건강한 영성을 가진 신앙인이라면, 풍찬노숙하는 요셉 가족을 외면하고 편안하게 잠을 이룰 수가 있었을까 하는 질문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21세기에도 여전히 명예살인(honor killing)이라는 야만이 계속되는 가운데, 이천년 전 성령으로 잉태한 처녀 약혼녀 마리아를 아내로 받아들인 용기 있는 남자 요셉에 대한 분석도 예사롭지 않다. 착하고 선량한 청년 요셉은 약혼자 마리아를 보호하기 위해 씨족사회를 떠나 살기로 결심하기에 이른다. 지금 같이 교통이 발전한 시대에 고향을 떠나 새로운 곳에 정착해서 사는 일쯤 아무 일도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당시 유목사회에서 정든 고향을 떠난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성경에서 찾아낸 작은 서사를 예리하게 분석해내는 저자의 능력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예수 그리스도는 짧은 공생애 동안 수많은 비유로 제자들을 가르치셨다. 하지만 당시 직접 예수 그리스도를 대했던 열두 제자들은 스승의 설명 없이는 하나님나라의 신비를 일깨우는 계시를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들의 면면을 자세히 살펴보면, 요즘 표현으로 찌질하기 그지없다. 명실상부한 예수 그리스도의 첫 번째 등장하는 베드로를 보자. 그의 직업은 어부로 안식일조차 지키기가 쉽지 않았다. 경제적으로 부유하지 않았던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며 굶기를 밥먹듯 했을 것이고 멸시와 탄압도 이겨내야 했다. 어쩌면 그들은 세속적인 욕심을 가지고 메시야를 따랐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마침내 하나님나라의 기쁜 소식(복음)을 듣고 자각한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데 그 누구보다 앞장섰다. 이런 사도들의 영광 이전에 있던 고난에 대해 우리는 신중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아울러 신앙공동체 리더를 세우는 과정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처럼 보잘 것 없는 직업을 가진 이들이 배제되고 있지는 않은지 저자는 조용한 목소리로 묻고 있다.

 

중세이래로 무소불위의 절대권력을 행사하던 교회는 마르틴 루터와 지오다노 브루노 같은 종교개혁가들을 파문에 처하고, 이단으로 몰려 화형에 처했다. 시대를 앞선 이런 예언자들의 고난은 외면하고, 제사장의 역할만 하려는 이 땅의 교계 지도자들에게 저자는 쓴소리를 아끼지 않는다. 근본주의에 입각한 한국 교회의 주류 보수교단은 하나님나라의 구현을 위한 사랑의 실천이라는 기독교 정신의 본질보다 그 외형적인 면에 치중하는 형식의 권위를 강조하며 사회정의를 요구하는 목소리에 귀를 닫고, 점점 더 특정한 기득권층을 위한 종교화되고 있다고 저자는 진단한다.

 

이러한 진단을 바탕으로 저자는 오늘날 한국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의 근본 원인을 잘못된 신학에서 찾는다. 나만 잘살면 된다는 기복신학, 오로지 성장만이 선이라는 번영신학, 민주성이 결여된 권위주의와 근본주의가 지배하고 있는 현실을 냉혹하게 비판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종교학자 제임스 파울러가 제시한 신앙 발단 단계이론을 통해 올바른 신앙의 성장을 권면한다. , 이제 모든 문제에 적용되는 해답은 아니지만 필요한 솔루션이 구체화됐다. 문제는 인식의 전환과 그에 따른 실천이 남아 있다. 다시 한 번 성경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