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를 돌봐줘
J.M. 에르 지음, 이상해 옮김 / 작가정신 / 2007년 11월
평점 :
절판


 

오래전 교보문고 매대에서 이 책을 봤다. 이 책의 제목을 들여다 보면서 애완동물에는 별로 관심이 없지만(이 책은 애완동물에 대한 책이 아니다) 애완견 기르기에 대한 책인가 하고 궁금해 했던 기억이 난다. 물론 그 시절에 책을 사서 읽진 않았다. 아주 한참 시간이 지난 다음에 비로소 이 책이 절판의 운명에 처한 다음에야 그리고 그의 신간 <메이드 인 차이나>를 보고 나서야 <개를 돌봐줘>를 읽게 됐다. 결국 책과의 인연은 그렇게 가는가 보다.

 

프랑스 출신의 작가 장 미셸 에르의 데뷔작 <개를 돌봐줘>를 읽으며 우리나라 천명관 작가가 떠올랐다. 비범한 데뷔 소설로 문학계에 뛰어 들었지만, 어째 그 후로는 그만 못하다는 느낌이랄까. 장 미셸 에르의 경우에는 후속작 <메이드 인 차이나>와 너무 비교가 된다. 조국 프랑스에서 벗어나 중국까지 아우르는 글로벌한 스케일이지만 파리의 한 골목에서 벌어지는 미스터리한 사건을 다룬 <개를 돌봐줘>만 못하다는 생각이다.

 

소설은 초반 둘르 불레트 가에서 벌어지는 서로 앙숙인 이웃 간의 치열한 전쟁으로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라디오 방송작가 막스 코른느루와 달걀 아티스트 으젠 플뤼슈는 그야말로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다. 그저 그들의 진흙탕 싸움이 치열할수록 독자들은 즐거울 따름이다. 한쪽이 장군을 부르면, 다른 한쪽은 멍군을 부르는 공격과 방어전을 어쩌면 이렇게 재미지게 구성하는지 신예 작가답지 않은 노련함에 책을 읽을수록 빠져든다. 마치 천명관 작가의 <고래>를 읽을 때처럼.

 

, 그럼 이 유쾌한 소설의 제목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주인공 중의 한 명인 막스 코른느루가 이웃 브리숑 부인의 애견 엑토르를 <파리의 노트르담> 상자로 죽이고 그 사실을 숨기면서 롤러코스터 전개가 펼쳐진다. 정신이 오락가락 하는 관리인, 편집증으로 똘똘 뭉쳐 기괴한 영상을 재창조해내는 자모라 감독, 아파트의 꼬마 말썽꾼 브뤼노 등등 개성 넘치는 등장인물들이 소설을 다채롭게 만드는데 일조한다. 그렇지만, 한바탕 소동 끝에 브리숑 부인이 번지 점프로 죽으면서 <개를 돌봐줘>는 미스터리물로 방향을 튼다.

 

이 사건을 맡은 타뇌즈 반장이 사실은 경찰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놀랍지도 않을 지경이다. 브리숑 부인이 누군가에 의해 타살된 것이라고 굳게 믿고 사건의 실마리를 풀기 위해 노력하던 투톱 주인공 으젠 플뤼슈마저 시체로 발견되면서, 그와 가장 사이가 좋지 않았던 막스 코른느루가 유력한 용의자로 떠오른다. 너무 당연한 설정인가? 홀로 남은 막스가 힘들게 이야기를 이끌어 가며 도대체 누가 범인인가로 독자를 인도한다.

 

사소한 이웃 간의 다툼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살인사건 그리고 연이은 대폭발로 모두 13명이나 되는 세입자들을 날려 버리면서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된다. 후반에 가서 이런 결말로 이야기가 끝나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물론 범인은 우리가 아는 범주의 인물이다. 누구나 다 범인이 될 수 있고, 또 아닐 수도 있다. 바로 그 점에 미스터리/서스펜스의 재미가 있다. 게다가 서사의 주인공 역시 필요에 따라 무대에서 곧바로 퇴장시킬 수도 있다. 유머로 시작해서, 이런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설정이 그저 놀랍기만 하다.

 

사실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는 일에 삐져서 상대방을 골탕 먹이는 일에 열중하는 막스와 으젠의 전투 전개 과정은 너무 재밌다. 무지막지하게 많은 피자 배달을 시키고, 남우세스러운 야릇한 잡지구독신청은 차라리 귀엽기까지 하다. 부적과 주술에 능한 도사로 포장해서 끝없는 전화공세에 시달리게 하는 수는 정말 인상적이었다. 양념처럼 등장해서 기괴한 시를 읊조리고, 극한의 말썽의 선보이는 꼬마 악동 같은 이웃의 배치도 마음에 든다. 이런 유머를 곁들인 소스를 후반부에 준비된 앙트레에 흩뿌리는 장 미셸 에르의 기법은 탁월하다. 소설의 곳곳에 배열된 캐리커처와 스케치는 상상만으로 부족한 부분을 곧잘 채워준다.

 

장 미셸 에르의 <개를 돌봐줘>는 대중소설이 지녀야할 모든 미덕을 고루 갖추고 있다. 유머스러운 이웃 간의 전쟁에서 시작해서, 살인사건이 벌어지면서 미스터리로 전환되고, 살인범의 정체를 쫓는 서스펜스까지 그야말로 이보다 더 좋은 순 없을 것 같다. 물론 결말은 온전하게 작가가 지배한다. 뛰어난 추리소설 팬이라면 이미 범인이 누구인지 알겠지만, 나같은 보통의 독자에게 그건 무리가 아닐까 싶다. 그저 작가가 먹여 주는 대로 스푼에 담긴 달콤쌉싸름한 시리얼을 소화해내면 될 테니까. 그것으로 만족한다.

 

빛나는 데뷔작의 아우라 때문에, <메이드 인 차이나>에서는 조금 실망했지만 여전히 장 미셸 에르에 대한 미련의 끈을 놓을 수가 없다. 어떡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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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님은 갈수록 유머러스해진다
모옌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평점 :
품절


나는 호들갑쟁이다. 무엇보다 책에 관해서 그렇다. 작년 가을, 중국 출신의 작가 모옌이 2012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는 소식에 일단 그의 책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열세 걸음>, <개구리>, <홍까오량 가족>, <모두 변화한다>, <티엔탕 마을 마늘종 노래> 그리고 오늘 이야기할 <사부님은 갈수록 유머러스해진다>까지. 그런데 지금까지 읽은 책은 <사부님> 뿐이다. 호들갑이 지속적인 책읽기로 이어지지 않으니 큰 일이다.

 

모옌과의 첫 만남은 수년전 책을 다시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할 무렵에 만난 중국 현대 소설선 <만사형통>에 실린 단편 <먹는 일에 관한 이야기 둘>이었다. 사실 오래 전이라 무슨 내용인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그러니 실제적인 첫 만남은 <사부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다. 모두 세 개의 중편이 실린 소설집의 백미는 역시 타이틀인 <사부님은 갈수록 유머러스해진다>가 아닐까 싶다.

 

한 때 잘 나가던 선구적 노동자 딩스커우 사부는 어느날 갑자기 직장에서 강퇴(강제퇴직)을 당한다. 이럴 수가 있나 그래. 중국 노동자의 모범으로 칭송받던 딩 사부 역시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구조 조정이라는 미명 아래 길거리로 내몰린다. 시장님을 비롯해서 높은 분들에게 항의해 보지만, 수억 인구를 자랑하는 중국에서 그런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별무소용이다. 그러던 차에 도제 샤오후의 기발한 제안으로 딩 사부는 새로운 사업을 하나 시작한다. 어찌어찌해서 장만한 고물 버스를 개조해서, 인공호수 부근을 찾는 연인들에게 러브하우스(?)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체면을 앞세워 사양하던 딩 사부도 배고픔 앞에 어쩔 수 없이 승복하고 만다. 문제는 이게 큰 돈벌이가 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각종 연인들의 편의를 위한 제품을 장만하면서 딩 사부의 러브하우스는 상종가를 치기 시작한다. 호사다마라고 좋은 일에는 항사 마가 끼는 법, 과연 딩 사부의 아담한 연인들의 휴게소사업은 어떻게 될까?

 

쇠불알볶음 때문에 이러저러한 에피소드가 끝없이 발생한 두 번 째 이야기 <> 역시 읽을 만하다. 소는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생산을 위해 절대 필요한 존재다. 집단생산의 상징인 인민공사 소속 소들도 귀한 대접을 받는다. 문제는 다른 곳에 한눈 팔지 말고 일만 열심히 하도록 거세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작가 모옌은 소를 거세하면서 벌어지는 에피소드에 다양한 유머 코드를 넣으면서 재밌는 전개를 구사한다. 빼어난 기술을 자랑하는 수의사 동지를 소 잡은 우마왕이라고 표현한 장면에서는 절로 웃음티 터져 나온다. 그런데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지 않을까? 거세된 소처럼 죽어라 일만 하고 자신들의 정치적 목소리는커녕 자신들의 대표조차 마음대로 뽑지 못하는 중국의 인민들이야말로 정치적으로 거세된 존재라고 말이다. 요즘 읽고 있는 샤리아르 만다니푸르의 <이란의 검열과 사랑이야기>에서 이란 정부의 검열관들이 상상을 초월하는 성적 코드 잡아내기에 달인이라면, 중국의 공안들은 이렇게 중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들을 잡아내는데 달인이 아닐까. 소 솽지를 둘러싼 한바탕 소동은 거세를 잘못해서 살모넬라균에 지독하게 중독된 솽지를 잡아먹은 인민공사 지도급 인사들의 집단 식중독으로 끝난다. 사건 처리를 비꼬면서 이거야말로 프롤레타리아 계급 문화대혁명의 위대한 승리라고 떠벌리며 피날레를 장식한다. 멋지다.

 

마지막 에피소드 <삼십 년 전의 어느 장거리 경주>는 모든 일에 있어 거의 전능한 능력을 보여준 우파분자, 그 중에서도 주충런 선생에 대한 오마쥬다. 1960년대 중국 각지에서 대부분의 우파분자들이 혹독한 시절을 보내는 동안에도 글쓴이의 사는 동네로 추방된 우파분자들은 각자 맡은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며, 쾌활하고 낙천적으로 지냈다고 증언한다. 저자가 다닌 다양한 소학교의 노동절 체육대회와 관련된 현란한 이야기가 쏟아져 나온다. 관람대를 만들기 위해 멀리 장백산에서 운반된 홍송 재목을 훔쳐 어머니 관을 짜려던 얼치기 도둑 이야기, 주 선생이 내로라하는 탁구선수를 완패시킨 이야기하며 하나 같이 모옌의 장기인 리얼리즘에 바탕한 이야기들이다. 이 탁월한 우파분자 주 선생이 참가한 장거리 경주 우승으로 화려한 마무리를 맺는다.

 

인민해방군 출신의 작가 모옌은 철저하게 체제 안에서 허용될 수 있는 이야기에 초점을 맞춘다. 그렇다고 미국에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하진처럼 폭넓은 표현의 자유가 허용되는 건 아니다. 리얼리즘에 탁월하지만, 항상 경계에 근접해 있을 따름이다. 왜 경계를 뛰어 넘어 곪아 가고 있는 체제의 급소를 찌르지 않는지 궁금하다. 딩 사부의 휴게소 사업 에피소드도 사회주의 체제 하에서 그런 게 가능할지 의문이 들게 만든다. 아무리 노동 계급의 영웅이라고 하더라도, 구조 조정되어 먹고 살 게 없어진 마당에 국가가 책임지지 않는다면 수치스러운 일이라도 감수해야 한다고 모옌은 냉정하게 그린다.

 

무산계급이야말로 공산주의 국가의 기둥이라고 하지만, 권력화된 무산계급의 위선과 타락을 보여주는 <> 역시 마찬가지다. 냉소적으로 사건을 전개해 가며 선을 넘지 않는 기법 역시 탁월하다. 체제 내에서 작품활동을 계속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타협이었을까? 모옌의 소설에는 과거의 중국이 아닌 현재의 중국 이야기는 왜 없는 것일까. 그가 중국 정부가 환영하는 어용작가라는 비판 역시 다시 한 번 곱씹어 봐야하지 않을까 싶다. 개인적으로 모옌보다 더 높게 평가하는 같은 인민해방군 출신의 옌롄커 작가의 문화혁명과 대약진 운동에 대한 반성 같은 날선 비판을 그에게 기대하는 건 무리일까. 갈수록 고단수가 되는 딩스커우 사부의 유머가 그저 우습게 읽히지만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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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변화한다 - 모옌 자전에세이
모옌 지음, 문현선 옮김 / 생각연구소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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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주 오래전 어느 미술관에서 20세기 현대미술의 아이콘이 된 피카소의 젊은 시절 작품전시회를 관람했다. 솔직하게 말해서 그의 현대미술도 그렇지만, 그가 젊은 시절 그린 습작 같은 그림을 보면서 저게 뭐야, 저건 나라도 그릴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훗날 일가를 이루게 되면 그런 시절도 다 평가를 받는 것이 인지상정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오늘 이야기할 모옌의 경우도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사실 작년 모옌이 노벨문학상을 받기 전까지만 해도 그는 그냥 그런 중국 작가 중의 한 명이었다. 하지만, 스웨덴 한림원에서 그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발표하는 순간 그는 그냥 그런 중국 작가가 아닌 노벨문학상을 받은 대가의 반열에 오르게 됐다. 나도 그의 작품은 그냥 짧은 단편을 하나 만났을 뿐, 본격적으로 그의 작품을 읽기 시작한 건 그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 이후였다. 그리고 이 작가에 대한 생각(다른 표현으로 하자면 편견)은 이전과 영원히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환상적 리얼리즘의 대가라는 모옌의 첫 번째 회상록이라는 거창한 타이틀답지 않게 <모두 변화한다>에는 모옌의 자전적 이야기가 담겨 있다. 마치 작가의 위상 변화를 예언하듯 제목 한 번 멋지다. 그렇지 모든 건 변하기 마련이지. 중국혁명의 상징이었던 마오 주석이 죽고, 세상은 다시 한 번 바뀐다. 작가 모옌은 자신의 회상에서 이전의 문화혁명이 가져온 혼란상 대신 신중국 건설의 이데올로기를 이식하기 위한 적절한 타이밍으로 1979년을 꼽았지만, 어쩔 수 없이 1969년 문화혁명이 한창이던 시절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노라고 고백한다.

 

그 시절 아이들은 한국전쟁에 참가한 고물 트럭 국방색 가즈51의 속도감을 숭배했다. 그리고 회상록의 화자 는 대학을 포기하는 대신 군인이 되기 위해 인민해방군에 입대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여러 귀인의 도움을 받았다고 읊조린다. 어느 국가든 개발 단계에서 군이야말로 최고 엘리트 양성소가 아니었던가. 훗날 대문인이 되는 작가 지망생 역시 군에서 그의 화려한 경력을 출발한다.

 

군복무 기간 동안, 베트남과의 전쟁도 체험한 천재 영웅은 장교로 진급하고 드디어 해방군 예술대학에도 진학하게 되면서 성공가도를 달리게 된다. 연달아 영화 <붉은 수수밭>의 원작인 <홍까오량 가족>을 발표해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기도 했다. 그리고 소설의 성공은 경제적 여유와 드디어 노벨상수상이라는 영예에까지 도달하게 되었다는 그의 소회를 전한다.

 

그 사이사이에 끼어든 허즈우와 루원리, 그러니까 작가의 어린 시절 친구들의 일화에 개혁개방 그리고 이제는 G2의 대국이 된 중국현대사를 적절하게 섞은 작가의 비망록으로 다가온다. 책의 띠지에 실린 대로 이 책이 모옌의 회상록이라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잘 쓰인 한 편의 소설이라는 점에는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과연 어디까지가 소설이고, 어디까지가 자신의 회상일까 그 부분부터 명확하지 않다. 그러기에는 여백이 너무나 많다. 그냥 작가 모옌에 대한 짧은 소개서 정도라고 하면 되지 않을까. 회상록이라고 하기에는 빈 공간이 너무 많고, 그렇다고 소설이라고 부르기엔 서사의 힘이 달린다.

 

모옌의 다른 작품도 그렇지만, 문학이 다루어야 할 핵심 과제에서 작가는 회피신공을 보여주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제는 사회주의도 아닌 그렇다고 자본주의도 아닌 이상한 시스템으로 변질되고 있는 중국식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 대신 자신이 보고 싶은 그리고 국가가 보여 주고 싶은 사회의 단면에 천착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다. 정말 첨예한 빈부의 격차 문제, 중국의 화약고라 불릴 정도로 불만이 팽배해져 가고 있는 수억을 헤아리는 농민공들의 모습, 최근 세기의 재판으로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보시라이 재판 같은 부정부패 이슈를 정면으로 돌파해 볼 요량은 작가에게 묻고 싶다. 이 정도로는 그가 누구인지, 그의 문학세계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판단하기에는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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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시공사 베른하르트 슐링크 작품선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박종대 옮김 / 시공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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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에 읽을 책에 대한 리뷰를 9월에 쓰려니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책을 다시 뒤적거리면서 리뷰를 쓰게 됐다. 책의 제목인 <주말>처럼 주말 동안 벌어진 일을 어느 4월의 주말에 다 읽고 싶었지만 그렇게는 안되었다. 생각보다 시간이 좀 걸리는 독서였다는 기억이 난다.

 

최근 문학동네 팟캐스트 <문학이야기>를 통해 슐링크의 소설집 이야기를 들었고, 올해 4월에 읽은 슐링크의 장편 소설 <주말>을 읽었지만 리뷰를 쓰지 않았다는 기억이 났다. 그리고 책을 다 읽은 후의 의식을 치르지 않았구나 싶었다. 소설 <주말>은 독일 작가 베른하르트 슐링크가 기술한 어두운 독일 현대사의 후일담이다.

 

어느 주말, 전설적인 독일 적군파 테러리스트 외르크의 석방에 즈음해서 그의 석방을 기념하기 위해 11명의 친구들이 모인다. 그 중에는 외르크와 함께 적군파 활동을 했던 동지들도 있으며, 외르크의 친누나로 이 모임을 주최한 크리스티아네가 중심에 있다. 친구들의 직업도 다양하다. 글 쓰는 교사, 전직 조직원이었다가 전향해서 덴탈랩을 운영하며 성공한 사업가가 된 치과기공사, 저널리스트, 외르크의 구명을 위해 노력한 변호사에 이르기까지 작가가 펼치는 흥미로운 서사를 위한 모든 직업이 동원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외르크는 저널리스트이자 동료였던 헤너가 자신을 밀고했다는 생각을 감방에서 지낸 20년간 품고 있다. 이 설정만으로도 초반에는 서로 회피하지만, 가공할만한 폭발력일 가진 이야기라는 사실을 독자는 짐작하게 된다. 사업가 울리히의 딸인 도를레가 외르크를 유혹하는 해프닝은 서사의 전개에 긴장감을 고조한다. 이젠 혁명 따위가 다 뭐냐, 먹고사니즘이 최고다라는 자본주의 계급의 이해를 대변하는 전향자 울리히는 스스로 옹립한 정당성을 웅변한다. 동시대의 동지들은 모두 변신해서 사회의 한 축을 구성하는 일원으로 살고 있지만, 여전히 20년 전 외르크의 이데올로기에 취해 다시 한 번 혁명의 깃발을 치켜 올리기를 기대하는 청년 마르코 한의 등장은 조금 낯설게 다가온다.

 

물론 슐링크가 이 정도로 3일간의 짧지만 강렬한 이야기를 이끌어 가지는 않는다. 배신의 진짜 주인공을 밝히고, 또 외르크의 과거사를 촉발시키는 새로운 등장인물을 투입하면서 이야기는 긴장으로 치닫는다. 외르크를 석방시키는데 공헌을 한 변호사 안드레아스와 열혈청년으로 여전히 혁명을 꿈꾸는 마르코 한의 대립은 소설의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장치로 작동한다. 한편, 주변에서는 자신의 진로를 두고 옥신각신하지만 정작 외르크 자신이 꿈꾸는 삶은 무엇이었을까. 그저 담장 밖의 평범한 삶을 원하지 않았을까? 긴 투옥 끝에 그가 기대한 건, 소설에 나오는 그런 갈등이 아니었으리라. 우리는 상대방을 위한다고 하지만, 정작 그가 원하는 것이 그것이 아니라면 어쩔 것인가. 슐링크가 이 소설을 통해 던지는 질문의 파문은 은근하면서도 헤아릴 수 없는 깊이가 있다.

 

다양한 군상이 등장하는 <주말>을 통해 슐링크가 진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무엇일까. 독일 전전세대와 전후세대의 갈등에서 시작된 대립과 단절의 역사에 대한 고찰이 아니었나 조심스럽게 추정해 본다. W.G. 제발트가 <공중전과 문학>에서도 말했듯이, 비참했던 과거를 집단의 기억에서 배제하고, 조국재건이라는 테제 아래 매진했던 기성세대의 허위와 위선을 공격했던 적군파 집단은 극한 무력투쟁을 주장하며 점차 대중으로부터 고립되어 갔다. 그들의 대의에는 공감하지만 그들의 투쟁방식에 동의할 수 없었던 다수 대중에게 외면 받은 운동은 결국 소멸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문제는 자신들이 옳았다고 생각했던 전후세대도 시간이 지나 아버지 세대가 되면서 반복되는 대립과 단절을 극복하지 못했다는 것이 슐링크의 지적이다. 전전세대를 나치 노인네라고 부르며 살인자라고 비난했지만, 전후세대의 대표 주자인 외르크 역시 4명의 무고한 사람을 살해하고 24년형을 살지 않았느냐는 페르디난트의 비난이야말로 소설 <주말>의 핵심이다.

 

물론 슐링크는 이 모든 문제에 대한 대답을 이 책에서 제시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들에게 당면한 과제인 지하실에 고인 물을 파내는 협업으로 일촉즉발에 대한 갈등을 미봉하고 마무리하는 결말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쩌면 그 방식이야말로 그들에게 최고의 해결책이 아니었을까. 시간이 지나고 그 시절의 사건에 대해 객관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시점이 되면 옳고 그름이 보이지 않을까. 그렇다고 해서 시간이 해결책이다라는 무책임한 말을 하고 싶지는 않다. 나머지 판단은 어디까지나 독자의 주관에 따른 것일 테니까.

 

슐링크가 이 시대 마지막 테러리스트의 삶을 통해 던지는 여러 질문은 깊은 잔상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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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제임스 설터 지음, 박상미 옮김 / 마음산책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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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에 20년 지기 대학 동창들을 만났다. 오늘 아침에도 회사 동료와 말했지만 오랜 친구들과의 어떤 일들은 그렇게 시간이 오래 됐는데도 어제 있었던 일처럼 생생한가 하면, 불과 며칠 전의 일은 까맣게 잊어버리게 되다니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고.

 

제임스 설터라는 이름을 들으면서 참 낯설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전혀 모르는 이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름 책 좀 읽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문학에 대해 내가 모르는 게 아는 것 이상이구나 싶다. 지지난달 문학동네 팟캐스트 <문학이야기>에서 다시 한 번 제임스 설터의 이름을 듣고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된 그의 작품 <어젯밤>을 구입해서 천천히 아주 느린 속도로 읽기 시작했다. 모두 10편의 단편이 실린 그의 소설집 <어젯밤>은 확실히 특이한 소설이다.

 

이 책의 역자 박상미 씨는 배신을 이 책의 코드로 뽑았는데, 책을 다 읽고 나니 수긍이 갔다. 하지만 내가 고른 이 책의 코드는 배신보다는 기억이라고 말하고 싶다. 왕년에 군인이었던 작가 제임스 설터는 자신이 경험한 동료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군인이라면 누구나 죽어서 묻히고 싶어하는 알링턴 국립묘지(아마 우리나라도 치면 현충원이겠다)에 갈 수 없는 어느 군인의 이야기를 잔잔하게 들려준다. 그는 어떤 일 때문에 그럴 수 없게 되었지만, 그에게 더 소중한 것은 야나와 함께 보낸 그 시절에 대한 그리움과 기억이다. 내가 추구하는 가치보다 더 소중한 무엇이라면, 그 군인처럼 생각할 수 있을까? 한 때 군인이었던 작가는 가치와 추억을 동일선상에 두고 독자는 어떤가라고 조용하게 묻는다.

 

제임스 설터의 단편은 묘하게 과거의 좋았던 시절에 대한 회상을 현재에 대입하며, 끊임없이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플라자 호텔>이 그 대표 중의 하나다. 월 스트리트에서 성공한 중년의 아서는 어느 날 예전에 사랑하던 여인 노린에게서 전화를 받는다. 그 시절 누구보다 아름다웠던 여인의 추억은 스멀거리는 욕망을 주술처럼 불러낸다. 전화 받고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이 일이라는 아서와 노린과의 대화는 묘한 기대감을 불러 일으킨다. 게다가 노린은 남편과 헤어져 돌아왔단다. 아주 평범한 그들의 대화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며 많은 것들을 함축한다. 한 때, 여자 때문에 유대교 계율을 어기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던 남자. 결혼하기 전 그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었지만, 자신이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남자는 물러선다. 그리고 다시 재회하게 된 남자는 그녀에게서 세월의 흔적을 보고 다시 한 번 뒤로 물러선다. , 이런 상황에서 당신이라면 어쩔 텐가 하고, 또다시 묻는다. 제임스 설터의 단편은 그의 글을 소비하는 독자의 자아에 대한 끝없는 질문의 연속이다.

 

기억만큼이나 배신도 <어젯밤>을 지배하는 알고리즘의 하나다. <포기>에서는 겉보기에 아내와 지극히 평범한 결혼생활을 영위하는 남자의 이율배반적인 배신을 적확하게 지적한다. 아니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을까. 게다가 이 이야기는 사실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라고 하니 더욱 기가 찰 노릇이다. 예술가들의 행위는 보통의 도덕률마저도 뛰어넘는다는 말인가. 여기서 포기는 어떤 포기를 말하는가? 남편에 대한 아내의 포기인가? 아니면 내 인생의 절반을 포기하는 남자의 심정인가? 이 포기에 대한 시간적 배경 또한 공교롭게도 어젯밤이다.

 

<귀고리> 역시 마찬가지다. 문학 작품에 등장하는 금기는 모두 깨지기 마련이고, 해서는 안되는 행위에 대한 대가는 언제나 치르게 되어 있다. 문제는 그것이 비극을 바탕으로 한다는 점이다. 두 가지를 모두 다 가지고 싶어 하는 남자에게 선택은 그렇게 어려운 것일까. 유복한 가정생활 그리고 정부(너무 평범한 어휘일까) 사이에서 갈등하는 남자 브라이언은 자신의 애인 패밀라가 자신의 장인과 어떤 관계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그만 질투심에 사로 잡힌다. 여기서도 보통 사람이 가지게 될 흔한 도덕은 실종된다. 자신도 그 순간, 매력적인 패밀라에게 차였다는 사실도 모르고. 관계는 중첩된다. 그 중첩되는 관계 속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선택하고, 그 결과에 대해 만족감을 누릴 수도 반대로 비탄에 빠질 수도 있다. 자신의 선택에 당신을 책임질 준비가 되어 있는가? 또다시 제임스 설터는 묻는다.

 

왜 작가가 표제작이자 마지막 이야기 <어젯밤>을 말미에 배치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 정도로 <어젯밤>은 배신의 코드에 적합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자궁에서 시작되어 전신으로 퍼져 가는 병을 매조지하기 위해 마지막 만찬을 준비하는 아내와 남편. 남편은 사랑하는 아내를 먼저 보낸 다음을 대비하기 위해 부부가 알고 지내는 친구 수잔나를 초대한다. 죽음에의 초대. 이 초대는 두 여자 모두에게 끔찍하기 짝이 없는 초대다. 그 죽음을 실행해야 하는 남편 월터는 더하겠지만 말이다. 마지막 만찬에서 남편은 생전 마셔 보지 못한 575달러 슈발 블랑을 주문한다. 그는 35달러가 넘는 와인을 시켜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죽음 앞에서는 비용조차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그 비싼 마지막 와인을 수잔나에게 따라줬다는 사실이다. 이쯤되면 독자는 어느 정도 눈치를 챘어야 했는데. 죽음이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 독자의 이성은 무장해제당했다. 그 다음 전개는 죽음의 실행, 배신 그리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전이다. 도대체 당신이라면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대 독서의 강렬한 즐거움을 느끼고 싶은가? 그렇다면 제임스 설터를 읽을지어다. 수잔 손택의 비평을 빌리지 않더라도, 제임스 설터의 책은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다. 첫 경험이 이럴진대, 그의 대표작이라고 하는 <가벼운 나날>(1975)은 또 어떨까. 단언컨대 2013년 최고의 독서 체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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