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인들과 진화하는 적들
김숨 지음 / 현대문학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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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대산문학상을 세 여성작가들이 휩쓸었다는 뉴스를 읽었다. 세 주인공 중의 한 명인 김숨 작가의 <여인들과 진화하는 적들>을 어제 부곡도서관에서 빌려다 읽었다. 어떤 책은 300쪽 남짓해도 읽기가 버겁지만 또 어떤 책은 금세 다 읽을 수가 있다. 물론 작가의 내공과 노력이 한땀한땀 쌓인 책을 이렇게 빨리 읽어도 되나 하는 죄책감이 들기도 하지만.

 

소설은 단수로 시작된다. 그녀(김미선-며느리)와 여자(정순자-시어머니)가 소설 제목에 나오는 여인들이다. 어떻게 요즘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트렌드를 장악한 막장 시월드의 재탕이 아닐까 하는 예감이 든다. 물론 독자의 기대와는 상반된 서사가 펼쳐진다. 지난 5년간 삶을 공유했지만 전혀 살갑지 않은 시어머니와의 이야기를 하는 그녀가 자신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아토피에 걸려 고생하는 자기 아들에 들이는 돈은 아깝지 않지만, 자신이 홈쇼핑 콜센터 직원으로 일하는 동안 육아와 살림을 도맡은 시어머니가 침이 마르는 구강건조증으로 음식을 제대로 드시지 못하게 되자 소용되는 비용이 그녀는 아깝게 느껴진다. 전문대졸의 내세울 게 없는 그녀는 중산층의 평범한 삶을 꿈꾸지만 그녀를 옥죄어 오는 상황은 그녀의 바람대로 진행되지 않는다. 토목회사에 다니는 남편은 부동간 경기 침체로 언제 잘릴지 파리목숨이고, 자신 역시 임신-출산을 억척스럽게 치르며 지켜낸 직장에서 해고된다.

 

그동안 자신의 빈자리를 채워 주던 시어머니의 존재가 이제는 부담스러워진 것이다. 그녀는 진화와 멸종 운운해대며 한바탕 여자에게 설교를 늘어놓지만, 자신 역시 시장에서 도태된 마당에 그녀의 말은 설득력을 가지지 못한다. 항상 주눅 들어 자기주장 대신 말수를 아끼는 여자가 못마땅할 따름이다. 게다가 구강건조증으로 하루가 다르게 여위어 가는 시어머니를 내쫓을 궁리에 여념이 없다. 아들 민수가 어느 자라자 더 이상 여자가 필요없어졌다는 냉혹한 현실분석이 그 뒤에 자리한다.

 

사실 소설 <여인들과 진화하는 적들>은 단 하루 사이에 일어난 일에 방점을 찍는다. 단수라는 결핍 상황에서 며느리는 무능력한 남편, 아토피에 걸려 피부가 짓무른 아들 등의 원인을 여자(시어머니)에게 돌린다. 물론 그것이 터무니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러기에 더 답답할 뿐이다.

 

여인들의 갈등을 주축이 된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다. 그렇다면 그녀들의 진화하는 적들은 누구를 지칭하는 걸까라는 질문에 자연스레 도달하게 된다. 김숨 작가는 그 점에 대해 친절하지 않다. 서사의 개연성을 통해 독자는 적들의 정체를 조심스레 규정해 본다. 혹자는 여자의 가장 큰 적은 여자 자신이라고 했는데, 그녀와 여자의 관계를 보면 이중생물 관계처럼 서로 공생하면서 상호적대적인 관계로 진화하는 건 아닐까? 그런 점에서 여자의 무반응, 무대응은 주목할 만하다. 그녀가 여자에게 손자의 종기에 침을 발랐다는 이유로 모멸과 멸시를 퍼붓지만 그녀의 반응은 역시나 뚱하다. 다만, 여자의 구강건조증과 민수의 아토피 증세 심화가 어떤 연관을 가지지 않나 추측만 가능할 따름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부엌 주도권을 두고 그녀와 여자가 갈등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부엌일 중에 설거지를 가장 싫어하는 그녀보다 월등한 실력을 자랑하는 여자가 자신의 입맛에 맞게 부엌을 변경한 장면에 대한 묘사는 확실히 남자 작가라면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정밀하게 그려냈다. 여자의 장끼인 아귀찜 준비하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어지간한 관찰력이 없다면 쉽지 않을 듯 싶다.

 

지난주에 읽은 김이설 작가의 <환영>에 나오는 아이에 대한 집착/미련은 김숨 작가의 <여인들과 진화하는 적들>에서도 비슷한 형태로 등장한다. 아이를 위해서 굳은 일도 마다하지 않고 벌이에 전념하지만, 실상 아이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소통과 대면의 시간은 부족한 엄마의 빈자리를 할머니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현실 묘사가 특히 그렇다. 언제부터 아이의 육아가 부모가 아니라 조부모의 몫이 된 걸까.

 

여자의 마르는 침 이야기는 소설에서 중요한 모티프를 제공한다. 명백하게 그녀가 제공한 모멸과 멸시 때문에 발생한 스트레스가 결핍을 상징하는 구강건조증으로 연결된다. 어찌 보면 아무 것도 아닌 분비물 침이 부족해서 시간과 비용을 들여야 하는 상황이 가뜩이나 결핍 투성이 가계에 생채기를 냈다는 사실 때문에 그녀는 짜증스럽기만 하다. 자신이 원인제공자라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는 장면에서는 이중생물의 이중성을 드러내는 것만 같다. 그녀와 여자는 같은 종이기에, 공생이 가능하지 않을까하는 일반의 환상에 균열을 제공한다.

 

결말 부분이 조금 황망스럽긴 하지만, 상상력을 가득 담은 개연성 넘치는 서사 구조와 여성작가 특유의 디테일이 참 마음에 들었다. 또 이렇게 멋진 우리 문학 한편을 만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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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 시티 민음사 모던 클래식 17
레나 안데르손 지음, 홍재웅 옮김 / 민음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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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인류는 창조 이래 유토피아를 꿈꿔 왔다. 젖과 꿀이 흐르는, 그리고 일용할 양식을 위한 노동이 없는 곳이야말로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 유토피아가 아니겠는가. 산업화와 그에 따른 기계문명의 발달이 우리에게 그런 유토피아를 가져다 줄 거라고 믿어왔지만, 그건 한낱 환영에 지나지 않았다. 생산력의 비약적 발전으로 (상대적으로) 적은 노동으로 보다 많은 생산물을 얻을 수 있게 되었지만 재화의 불균등한 분배 때문에 잉여 생산물의 집중은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 그리고 영양분의 과다 섭취와 운동부족으로 우리 몸은 날로 비대해져 가고 있다. 이렇게 언 듯 보면 전혀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자본주의와 생산 그리고 비만이라는 상이한 소재를 가지고 스웨덴 출신의 작가 레나 안데르손은 <덕 시티>란 발칙한 창조물을 세상에 내놓았다.

 

예전에 대학에서 나에게 상징에 대해 설명해주신 교수님의 강의에 따르면, 영화 포스터 하나만으로도 그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 수 있다고 했다. 그 논리를 그대로 <덕 시티>의 책표지에 적용시켜 보면 좀 더 이해가 쉽지 않을까. 현실을 픽션화한 소설 <덕 시티>의 주인공 중의 한 명인 도널드 D(명백히 월트 디즈니 만화 주인공의 의인화다), 도널드가 사랑해마지 않는 대학교수 데이지 그리고 이 둘과 묘한 삼각관계를 이루는가 하면 실제적으로 덕 시티를 지배하는 자본가 존 폰 앤더슨이 나란히 표지에 등장한다.

 

부차적인 설명을 할 것도 없이 <덕 시티>는 세계 최고의 자본주의 국가 미국을 상징한다. 아들 조지 W. 부시 시대에 쓰인 이 소설에는 전쟁도 등장한다. 덕 시티의 에이햅군은 지방을 내부의 적으로 규정해서 그야말로 치열한 살과의 전쟁을 벌인다. 고도비만이 일상인 삶 가운데, 도널드는 삼촌 존 폰 앤더슨이 운영하는 도넛 공장에서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도넛 생산에 여념이 없다. 가끔 나오는 불량 제품은 그의 입으로 쓱싹 사라져 버린다. 우리의 주인공 도널드는 먹어도 먹어도 허기가 가시지 않는다. 채워지지 않는 끝없는 욕망에 시달리는 현대인의 발현이라고 해야 할까.

 

한편, 이미 영양의 과잉 섭취로 뚱뚱이들이 넘쳐 나는 가운데, 새로운 먹거리 상품을 개발해서 시장에 내놓으려는 탐욕스러운 자본가 존 폰 앤더슨이 있다. 자기 나름의 성공 신화에 빠진 그는 자신의 제품에는 절대 입조차 대지 않는다. 자기가 만든 다양한 제품 때문에 자유와 평화가 넘쳐 나는 덕 시티 시민들은 당뇨를 필두로 한 각종 성인병에 시달리지만 그에게는 다른 세상 이야기일 뿐이다. 그는 그 누구보다 체지방 관리에 엄격하며, 혹독한 다이어트를 일상처럼 수행한다. 각성한 자본가답게 르네상스 시대 메디치 가문처럼 문화 후원은 물론 대학 강의에 참석하며 글쓰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속물처럼 보이지만, 성공신화에 내몰리는 현대인의 표상 정도로 보면 될 것 같다.

 

현대문명 비판 소설 <덕 시티>는 숱한 상징들로 넘실거린다. 인슐린과 설탕 자원으로 덕 시티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자본가 존 폰 앤더슨은 투자가 아닌 투기로 세계 경제를 엉망진창으로 만들고도 막대한 공적 자금으로 회생한 월 가의 이미지와 정확하게 맞아 떨어진다. 소설에 나오는 흰 고래들은 그저 다달이 손에 쥐여지는 급여로 근근이 버티는 보통 사람을 의미한다. 어느 순간 공공의 적으로 내몰려, 에이햅군에게 이끌려 강제수용소로 향하는 흰 고래들의 모습에서는 지난 세기 홀로코스트를 떠올리게도 한다. 영양 과잉 섭취로 비만에 시달리면서도 운동으로 자신을 제어하지 못하는 다수의 흰 고래들은 문자 그대로 잉여취급을 받는다. 우리의 주인공 도널드 D도 예의 부류에 속할 테지만, 든든한 뒷배(존 폰 앤더슨) 덕분에 강제수용소행도 면하고 좋은 의료진의 도움으로 생을 이어간다.

 

모든 것이 계량화된 자본주의 시스템 아래 인간의 몸 역시 똑같은 취급을 받는다. 아름다움의 다양성은 무시되고, 획일화되고 성형된 아름다움이 미의 기준으로 제시된다. 건강한 몸 역시 마찬가지다. 예전엔 뚱뚱한 몸이 부의 상징이었다면, 바뀐 시대에는 비만은 나태와 의지박약의 상징일 뿐이다. 돈과 시간이 충분한 사람들은 권력화된 자신의 이상적 몸만들기를 위해 아낌없이 투자한다. 그리고 채소와 과일 같은 제대로 영양 섭취를 못하는 가난한 사람들이 비만에 시달리게 되는 역설과 맞닥뜨리게 되는 것이다.

 

<덕 시티>에서 진짜 무서운 요소는 부지불식간에 이루어지는 전체주의적 통제다. 예전에는 불온한 사상을 통제했다면, 덕 시티에서는 암묵적인 동의 아래 공공의 적인 지방을 통제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내가 아무리 뚱뚱하다 하더라도 내가 먹고 싶은 걸 먹지 못하게 하는 통제가 초래할지도 모르는 문제야말로 이 책에서 던지는 강력한 메시지다. 책에 등장하는 지식인 해럴드 벨은 권력자 앞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먹고 싶은 걸 먹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맛대가리 없는 건강식 대신 불법 레스토랑에서나 취급하는 프렌치 프라이, 고기 파이 같은 진짜 먹거리야말로 인류가 추구해야할 음식이라고 굳게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가 주장하는 음식에 대한 자유의지는 이제 어쩌면 유토피아에서나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덕 시티>를 읽는 동안에 참 많은 생각들이 들었었는데, 막상 리뷰를 쓰다 보니 대부분 휘발되어 버렸다. 전장에 투입된 도널드의 세 명의 조카들, 도널드-데이지 그리고 존 폰 앤더슨으로 이어지는 삼각관계에 대한 이야기, 인류가 단 것을 먹기 위해 진화해 왔노라는 이야기 등등 소설의 후반부로 갈수록 종잡을 수 없어지는 서사 구조 탓으로 돌려야할까. 현대문명을 신랄하게 비판한 현대판 우화를 본 느낌이다. 마지막으로 이 소설을 영화로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감독은 다음의 사람을 추천한다. 마이클 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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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새
케빈 파워스 지음, 원은주 옮김 / 은행나무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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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다가 말했던가? 인생은 고()의 연속이라고. 우리 삶은 순간은 어쩌면 고통스러운 찰나의 연속과 비연속으로 이루어졌는지도 모르겠다. 너무 비관적이라고? 미국 출신 작가 케빈 파워스의 <노란 새>를 읽어 보면 무슨 말인지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역사는 후대가 평가해준다는 말이 있다. 여전히 역주행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그런 말조차 사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조지 W. 부시 시대에 시작된 이라크 전쟁은 이제 과거인가, 아니면 여전히 현재진행형인가? 신예 작가 케빈 파워스의 <노란 새>는 과거와 현재진행형 중간지대에 걸친 작가 자신의 트라우마를 어떻게 보면 평범해 보이는 과거와 현재의 교차편집이라는 패턴으로 구성하기 시작한다.

 

사실 그것조차 독자에겐 별 관심거리가 아니다. 우리는 21살에 자원입대해서 이라크 전쟁터에 나간 청년/소년병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가 궁금하다. 자신이 실제로 이라크에 파병된 경험을 바탕으로 이 소설을 쓴 케빈 파워스는 어쩌면 평생 자신의 기억 창고에 담아 두었어야 했을지도 모를 이야기를 고통을 한가득 담은 픽션으로 재현한다.

 

 

읽다 보면 이게 소설인지 아니면 작가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노란 새>는 이라크 티그리스 강을 볼 수 있는 가공의 공간 알 타파르를 배경으로 한다. 어려서부터 시와 문학을 사랑했던 청년 존 바틀 이병은 자신의 남성성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자원입대를 선택한다. 그의 선조들이 1차 세계대전, 2차 세계대전, 한국전과 월남전에서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조상들처럼 바틀은 전쟁이라는 가공할 만한 폭력 앞에 무기력한 존재일 뿐이다. 인격체로서의 존엄 대신, 기계 부품처럼 취급되며 하지(이라크 사람들을 비하해서 부르는 표현) 민간인들에게 총격을 가하는 장면이 무감각하게 묘사된다. 여느 전쟁처럼 누가 적군이고 누가 민간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공황 상태에서 철부지 소년병들은 명령에 의해 사방에 총질을 하고, 격렬한 전투 후에 자신이 살아 있음에 신에게 감사한다. 내가 아닌 전우가 죽었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 이 얼마나 비참한 진실인가.

 

살아남아 조국으로 귀환한 뒤에도 여전히 전쟁의 섬망에 시달리는 바틀에게는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와 그에 얽힌 비밀이 있다. 전우이자 동료였던 머피 이병의 죽음에 대한 강박이다. 광산 출신의 머프는 십대 소년으로 역시 자원입대한 동료다. 그의 어머니는 바틀에게 머프를 무사하게 데려와 달라고 부탁한다. 고대의 금기에 대한 터부처럼 어떤 언약도 지켜질 수 없다. 서사는 열사의 땅 이라크에서 죽음을 맞은 소년병의 비밀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한다.

 

케빈 파워스는 자신과 자신의 경험을 투영한 존 바틀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전쟁이라는 이름의 극한 폭력이 얼마나 사람을 황폐하게 만드는지 건조한 목소리로 진술한다. 전쟁을 직접 체험한 사람들은 전쟁에 찬성하지 않는다. 그 누구보다 전쟁의 폐해를 잘 알기 때문이다. 1945년 드레스덴 대폭격을 직접 체험한 커트 보네거트가 세계적인 반전 작가가 된 것을 보라. 얼치기 전쟁광들만 3일만 버티면 된다는 망상을 주문처럼 외울 뿐이다.

 

물론 바틀이 전쟁에 나가지 않았더라도 그의 삶이 또 다른 고통으로 점철되었을 거라는 추정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하지만, 누구나 일상에서 체험할 수 없는 극한의 비극을 전장에서 체험한 베테랑의 이야기는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이라크 전쟁의 기원이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한 미정보부의 잘못된 정보에 따라 후세인을 거세한다는 목적에서 비롯되었다는 따위의 설명은 그해 봄에 전쟁은 우리를 죽이려 했다(The war tried to kill us in the spring)”는 소설의 시작에서부터 부정된다.

 

도대체 이라크에서 상실된 젊은이들의 생명은 도대체 무얼 위한 것이었단 말인가? 그 누구도 잘못 시작된 전쟁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 현실이 두렵기만 하다. 월남전에 투입된 수많은 미군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은 명분이나 이유 없이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낯선 장소에서 전투를 치르고 그렇게 죽어갔다. 그들의 사후에 추증되는 훈장 따위는 바틀이 그랬듯이 하나의 장식의 의미 밖에 가지지 않는다.

 

미숙한 소년병 머프와 바틀이 있다면 그 대척점에는 전쟁기계 스털링 하사가 있다. 그래봐야 그들보다 서너살 위의 고참으로 실전에서 단련된 마초 이미지를 사방에 흩뿌린다. 정도의 차이겠지만 그 역시 전장에서 분열되어 가는 자아의 한 단면을 그대로 노출한다. 요나 선지자의 최종 목적지가 자신들이 싸우고 있는 니네베였다는 주지시키면서, 십자군 행세를 하는 그의 모습이 영 못마땅하다. 전쟁 영화 <블랙 혹 다운>에서 내내 반복되던 구호인 “No one left behind"는 진짜 군인 스털링에게는 아마 적용되지 않는 모양이다.

 

파괴되어 가는 인간 정신을 죽음의 시각화라는 표현으로 정교하게 추출해낸 케빈 파워스의 역작을 읽으며, 다시 한 번 전쟁의 비극과 왜 전쟁이 있어서는 안 되는지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됐다. 헤밍웨이 이후 최고의 전쟁문학이라는 상찬이 헛된 말이 아니었다. 미국 문단에 새롭게 등장한 분더킨트의 지금까지 보다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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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민음사 모던 클래식 4
조너선 사프란 포어 지음, 송은주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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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더킨트 조너선 사프란 포어와는 <모든 것이 밝혀졌다>로 처음 만났다. 그의 데뷔작이었다. 우리나라에는 9-11 사건과 드레스덴 대폭격의 트라우마 속에서 사는 두 명을 주인공으로 한, 두 번째 작품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이하 <엄청>으로 표기)이 먼저 소개됐다. 두 소설 모두 영화화되었고, 자신의 뿌리를 찾아 우크라이나로 떠난 어느 청년의 이야기를 그린 <모든 것이 밝혀졌다>는 소설과 영화 봤다. <엄청>은 아직 영화로 만나 보지 못했다.

 

소설의 주인공 오스카 셸은 9 살배기 꼬마다. 그는 아버지 토머스를 9-11 사건(2001)으로 잃었다. 책의 나오는 빌딩에서 떨어지는 어느 사람의 이미지는 그의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고간 소년의 트라우마를 직접적으로 대변한다. 곤충과 우주 그리고 발명하기를 좋아하는 오스카는 아버지의 유품 중에 꽃병에 담긴 열쇠를 발견한다. 오스카가 사는 뉴욕에만 16천만개가 넘는 자물쇠가 있을 거라고 추정하고, 또 다른 단서인 블랙이란 사람의 이름을 바탕으로 자물쇠 수색전을 시작한다. 아무리 미국의 뉴욕이라지만, 일개 꼬마가 전화번호부에 나오는 낯선 사람을 찾아간다는 게 가능할까라는 현실적인 질문이 뒤따른다.

 

오스카가 <엄청> 소설을 이끌어가는 메인 캐릭터라고 한다면, 또다른 서사의 한 축은 오스카의 할아버지 토머스다. 독일 드레스덴 출신의 토머스는 유서 깊은 독일의 도시 드레스덴을 쑥대밭으로 만든 대폭격(19452)으로 사랑하는 이들을 모두 잃는다. 자신의 가족, 사랑하는 연인 애나 그리고 애나가 임신한 아이까지. 히로시마 원폭보다 더 파괴력이 강했다는 드레스덴 대폭격에 대한 작가의 기술은 현현된 지옥도를 떠올리게 한다. 홍학을 잡아먹는 사자, 피부가 녹아내린 피해자들, 아수라장에서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장면들은 9-11 사건의 그것을 연상시킨다. 빌딩이 무너져 내리기 전, 뜨거운 불길 속에서 사람들이 서로 손을 잡고 같이 뛰어내렸다고 했던가. 분더킨트 작가는 무엇 때문에 그런 가공할 만한 폭력이 발생했는지에 대한 고찰보다는 단순한 전개를 서술한다. 모든 것의 시발인 정치적 요소는 배제하고, 그저 현상만을 독자에게 들려주는 작가의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생전에 자상했던 오스카의 아버지 토머스가 가업을 물려받아 보석상인으로 일하면서, 뉴욕타임즈나 타임의 오자 찾기 놀이(진정한 교열자)를 책에 구현한 빨간 똥글뱅이를 보면서 처음에 나는 도서관에서 먼저 이 책을 빌린 독자의 만행이라고 생각하고 규탄해 마지않았다. 하지만, 책에 곳곳에 등장하는 타이포그래피와 더불어 작가가 고안한 하나의 장치였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그만 무안해지기도 했다. 이 작가, 만만하게 볼 위인이 아닌걸.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가 중의 한 명으로 커트 보네거트를 꼽는다. 미국 출신의 반골 작가는 전쟁 중에 드레스덴 폭격을 직접 체험한 사람이다. 할아버지 토머스와는 달리, 그는 이 참상을 목격하고 적극적으로 문학(<5도살장>)을 통해 반전 메시지를 전달해 왔다. 경우는 좀 다르지만 할아버지 토머스는 세상과의 소통을 거부하고 말하기를 그만 둔다. 말을 할 수가 없게 된 그는 빈공책을 들고 다니면서 필담으로 세상과 소통한다. 생각만 해도 얼마나 불편한 일인가. 그 뿐인가, 삶이 죽음보다 무시무시하다고 생각하고 새로 꾸린 가정에서 임신한 아내를 두고 사라져 버린다.

 

그렇게 한 세대를 건너 뛴 할아버지 토머스는 아들 토머스가 죽은 다음에 다시 뉴욕에 나타나 손자 오스카와 조우한다. 아들에게 부치지 못한 수많은 편지와 함께. 소설 초반에 할아버지 토머스와 오스카의 이야기 그리고 오스카 할머니이 이야기가 교차 편집되면서 조금 헷갈린 것도 사실이다. 동시에 나는 왜 오스카의 이야기에 집중하지 못하고 작가가 복잡하게 만드는지 조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떤 단서라도 되듯, 자물쇠와 열쇠 그리고 다양한 형태의 열쇠 구멍 사진을 보며 난감했다. 무언가 비밀이 담겨 있을 것 같은 자물쇠를 여는 순간의 희열을 기대하도록 풋내기 작가 조너선 사프란 포어는 잔뜩 분위기를 조장한다. 그 다음은 말하지 않으련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 책을 통해 작가가 진짜 하고 싶었던 말보다, 주변의 것들이 더 신경쓰이는지 모르겠다. 지금은 아이들도 모두 휴대전화를 가지고 다니지만, 10년에 이미 휴대전화를 가지고 있던 미국 소년 오스카의 물질 조건에 더 관심이 갔다. 잘 나가는 변호사 엄마를 둔 덕분에 프랑스어를 배우고, 비용에 대한 걱정 없이 택시를 타고 자물쇠 수색에 나서고, 낯선 꼬마가 찾아와도 놀라지 않는 보통 사람들의 모습(나중에 오스카는 엄마가 모든 걸 셋업해 두었다고 추정한다)이 신기하기만 했다. 영국출신의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에게 끊임없이 편지 쓰고 마침내 답장을 받아내고야 마는 장면에서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이 또한 불가능한 일에 대한 또다른 형태의 희망고문이 아닐까.

 

불의의 사고로 아버지를 잃은 소년이 고인의 발자취를 찾는 여정이라는 점에서 충분한 감정몰입이 된 것 같다. 하지만, 조너선 사프란 포어는 너무 무리하게 어린 소년에게 이십대 청년의 생각과 조변석개하는 감정을 우겨 넣은 건 아닌지 궁금하다. 지나치게 조숙한 아이의 사고와 태도는 비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요즘 아이들이 다 그렇지 뭐라고 한다면 또 할 말이 없겠지만. 그래도 그저 아버지를 상실한 아이의 시선만으로 치부하기엔 부담스럽다. 그래서인지 허핑턴 포스트의 아니스 쉬바니는 조너선 사프란 포어를 줌파 라히리, 주노 디아스 등과 함께 당당하게 15명의 가장 과대평가된 현대 미국 작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는 이 작품에 대해 9-11 사건에 얄팍하게 편승한 독창성(originality)이 결여된 작품이라고 혹평했다.

 

미국에도 문학권력이 존재한다면 프린스턴 출신에 미국 문학계를 주름 잡는 조이스 캐롤 오츠의 애제자인 분더킨트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 같다. <모든 것이 밝혀졌다>,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 그리고 <엄청>을 읽었지만 여전히 특별한 감흥 대신 기교감만 느껴지는 건 나만의 착각이려나. 남편이 그렇다면 그 부인인 니콜 크라우스의 작품은 어떨지 궁금해졌다. 참고로 <엄청>은 그의 엄청나게아름다운 여신인 부인에게 헌정된 작품이다.

 

[뱀다리] 그런데 뭐가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깝다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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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제의 경제학
헨리 조지 지음, 전강수 옮김 / 돌베개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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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의 총선과 대선에서 우리 국민들의 큰 관심을 끈 이슈가 바로 경제민주화였다. 사회에서 생산된 부의 불공정한 분배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개혁이 필요하다는 점은 선거를 앞둔 각 정당의 고민이었다.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이 문제에 대해 이미 130년 전에 치열한 고민을 한 경제학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사회문제의 경제학>의 저자 헨리 조지다.

 

사실 돌베개에서 나온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칼 마르크스는 알았어도 산업자본주의 신생국가 미국에서 토지단일세라는 과격한 주장(?)을 전개한 경제학자가 있다는 사실은 미처 모르고 있었다. 이 책의 원 제목인 <Social Problems>이 말해주듯 이 책이 나온 1883년의 미국 사회의 다양한 경제 문제들을 저자는 냉철하게 분석한다. 그의 해석에 따르면 실제로 평등과 자유를 기본 모토로 삼은 미국을 지배하는 건 기업이라는 진단에 도달한다. 노무현 대통령이 21세기에 말했던 것처럼 이미 권력은 시장에 넘어갔다는 말은 19세기에 나온 말이었다.

 

헨리 조지는 토지의 사유화가 오늘날 그리고 현대에까지 지속되는 부의 불공정한 분배의 원흉이라고 이 책을 통해 적시한다. 그는 이미 그의 대표작인 <진보와 빈곤>(1879)에서 사회의 모든 생산활동은 토지를 기반으로 이뤄진다고 주장했고, <사회문제의 경제학>에서도 예의 문제를 심화시켜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방대한 토지를 소유한 계급이 노동생산물을 독점하고, 노동자를 착취하고 부당한 억압을 일삼는다고 그는 꼬집는다. 이 책을 읽으면서 왜 그렇게 고전주의 경제학자들이 지대를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알 수가 있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모든 생산은 토지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토지야말로 사회경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고, 이 토지에 대한 토지단일세 개혁을 통해 공공에게 그 이익을 돌려주어야 한다는 것이 이 책의 핵심 내용이다.

 

아울러 헨리 조지는 민주국가 미국의 비참한 현실에 대해서도 가감 없이 들려준다. 남북전쟁을 통해 노예해방에는 성공했지만, 토지를 독점한 지주 계급은 야만적인 노예제도 보다 더 효율적인 착취 도구로 산업노예 제도를 창안해 냈다고 선언한다. 최소한의 생존과 재생산을 위한 저임금으로 노동자들을 부리면서 부의 영구적인 대물림을 고안해냈다. 자본가 계급은 정당한 방법이 아닌 불의와 불평등한 분배, 입법 로비, 주가조작 그리고 사기마저 마다하지 않으면서 부를 축적했다. 미국의 어린 아이들은 가계를 돕기 위해 가혹한 유아노동에 내몰리는 상황을 있는 그대로 들려준다.

 

19세기 미국에서도 정의로운 부의 분배를 방해하는 세력이 있었는데, 이런 악의적인 정치선전에 동원된 프로파간다의 한 축으로 교회 설교자가 있었노라고 그는 증언한다. 빈곤, 범죄, 저임금, 과잉생산, 정치적 부패 같은 존재하는 모든 불의한 존재도 창조주 하나님의 뜻이라는 주장에는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구호단체나 애스턴이나 밴더빌트 가문의 자선 사업은 어떻게 보면 민주국가 시민에게는 모욕이나 다를 바 없다는 헨리 조지의 주장은 일면 과격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국민에게 마땅히 공여되야할 토지 사용 지대나 독점 사업으로 벌어들인 재화를 빈민들에게 시혜라도 베푸는 듯이 투척하는 모습은 기만적이라고 헨리 조지는 일갈한다.

 

신생국가 미국의 방대한 미개척지는 구세계의 매력적인 투자 대상이었다는 주장도 일리가 있다. 산업혁명을 거친 영국의 토지는 이미 귀족계급이 독점했고, 유산계급은 이제 막 새로 개척 중인 신대륙에 눈을 돌렸다. 토지 가치의 상승이 이자나 임금 상승으로 이어지지 않고 임금 하락과 대량의 실업자를 양상하게 되는 역설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설명해준다. 나같은 아마추어 독자에게는 그마저도 쉽지 않은 설명이었지만. 그 대표적인 예로 투하자본이 집중된 미국 철도사업의 실태를 헨리 조지는 들었다. 기계화와 분업을 통한 노동력절감 역시 분배의 양극화를 심화시킬 따름이다. 어떤 종류의 개선의 혜택도 모두 토지 소유자에게 돌아가는 상황은 부의 집중과 독점을 강화시킨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노동자들은 지주의 (산업)노예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프랑스 인권선언에 명시된 공적 재난과 정부 부패는 인권에 대한 무관심과 멸시 때문이라고 헨리 조지는 주장한다. 천부적인 권리이면서 양도불가능한 누구나 평등하고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자연권에 입각해서, 토지 사용권은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돌려 줘야 한다는 것이 미국 국부 중의 하나인 토머스 제퍼슨의 주장이기도 하다. 정부 권력에 대한 직접 통제를 강화해야 공적 재난과 정부의 부패를 막을 수 있다는 부분은 지금 우리의 상황에도 정확하게 들어 맞는다. 상품 가격 상승을 유발하는 다양한 간접세와 공공부채 역시 개선되어야 한다고 헨리 조지는 지적한다. 어쩌면 이렇게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세태와 꼭 들어맞는지 책을 읽는 내내 전율의 연속이었다.

 

 

19세기 미국의 주력 산업이 철도사업이었다면, 21세기 미국을 선도하는 산업은 에너지산업일 것이다. 엔론 사태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공정한 경쟁을 통한 가격인하 서비스를 소비자에게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수지계산을 맞추기 위해 담합은 물론이고 주가조작도 마다하지 않는 추악한 민영화 사업의 폐해는 이미 130년 전부터 벌어지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공정한 경쟁을 주도할 정부에 대한 지속적인 통제와 감시가 필요한 것이다. 막대한 비업무용 부동산을 보유한 대기업과 재벌집단에 대해서도 중과세를 부과해서, 투기를 원천봉쇄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헨리 조지의 혜안은 우리 사회경제 전반에 적용되지 않는 부분이 없을 정도다.

 

어쨌든 헨리 조지는 모든 문제의 근원을 토지 사유화와 물질적 진보에 두었는데, 과연 그의 토지단일세 이론이 21세기 현재에도 모두 적용되는지에 대해서는 좀 더 생각해봐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현실주의 경제학자답게 그는 자신의 주장이 19세기 미국의 사회경제제도를 단번에 바꾸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높은 지능과 고결한 도덕성으로 무장한 개인이 각성하고, 사상의 전달을 통해 사회 개혁을 도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쉽지 않은 독서였지만, 시대를 앞선 선지자의 생각을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독서였다. 기회가 된다면 헨리 조지의 주저인 <진보와 빈곤>도 읽어 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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