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베르토 볼라뇨라는 작가는 순전히 을유문화사 덕분에 알게 됐다.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된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이라는 제목부터 수상하기 짝이 없는 논픽션이 그 주인공이었다. 그리고 달랑 한 편의 논픽션으로 그의 팬이 되기에 충분했다.

 

칠레에서 태어나 멕시코에서 자랐고, 스페인에 정착해서 창작활동을 한 볼라뇨는 우리 나이로 50세인 2003년에 세상을 떠났다. 올해가 딱 볼라뇨 10주기가 되는 해였구나. 그런 점에서 그의 대표작이자 무지막지한 분량을 자랑하는 메타 소설 <2666>이 크리스마스 선물로 출간예정이라고 한다. 물론 그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구입 클릭을 눌렀다.

 

 

 

 

그동안 우리나라에는 을유문화사에서 1권만 나오고, 나머지는 모두 열린책들을 통해 출간됐다. 작년에 나온 <야만스러운 탐정들>을 제외하고 그렇게 긴 분량이 아니어서 그야말로 부담 없이 읽을 수가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볼라뇨 책의 무게가 나가지 않는다는 건 절대 아니다. 그러다가 제대로 된 분량의 <야만스러운 탐정들>에서부터 진도가 나가지 않기 시작했다. 물론 이전의 다섯 권의 기출간 책은 모두 읽었다. 그리고 나머지 네 권도 사긴 했지만 완독을 하지 못했다. 내년엔 기필코 볼라뇨의 책을 다 읽으리라.

 

이 글을 포스팅하게 된 이유인 메타 소설 <2666>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우선 1,752쪽에 달하는 이 무지막지한 소설은 5권으로 분권되어 세상의 빛을 보게 됐다. 이 책이 나온다는 소문을 들은 이래, 과연 몇 권의 책으로 나올까 궁금했었는데 5권이구나. 그럼 권당 300쪽 정도라는 이야기로군.

 

무엇보다 이 책에서 내 눈길을 사로 잡은 것 중의 하나는 바로 역자가 그동안 출간된 역자와는 달리 라틴 아메리카/스패니시 문학 번역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송병선 교수님이라는 사실이다. 그간 마누엘 푸익과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작품 등에서 그가 보여준 믿을 만한 번역에 <2666>의 번역을 그가 맡았다는 점이 반가웠다.

 

분량만큼 놀라운 점 중의 하나는 책의 단가가 10% 할인 전에 66,660원이라는 점이었다. 할인을 하고 나서도 60원 빠지는 6만원이다. 다른 이유 없이 무조건 볼라뇨의 유작이라는 점에서 바로 구매했지만, 과연 책의 판매가 얼마나 될지 그리고 나처럼 책을 산 사람 중에서 완독을 하게 될 이가 얼마나 될지 너무 궁금하다. 이 책은 온통 궁금한 점 투성이로구나. 내용은 더더욱.

 

2014년 나의 새로운 숙제가 될 <2666> 어서 오라. 과연 볼라뇨가 어떻게 해서 불멸의 작가가 되었는지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

 

[뱀다리] 출간예정작인 볼라뇨의 <2666>이 왜 다른 온라인 서점에는 하나도 뜨지 않고 유일하게 알라딘에서만 판매 중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666 세트 - 전5권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송병선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볼라뇨의 책을 꼬박 꼬박 읽어 오고 있다. 심지어 읽지는 못해도 모두 샀다. 이제 끝판왕이 나왔다. 2013년 최고의 선물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주문번호 001-A000536025] 문학동네에서 쏟아져 나오는 책을 따라 잡기가 너무 힘듭니다. 사서 읽기의 무한반복에도 끝이 없다고나 할까요. 어쩌면 이리도 꼭 마음에 드는 책들만 뽑아내는지요. 이번 물류창고 털기를 통해 그동안 애장하고 싶었지만 미처 마 련하지 못한 책들과 만나 보고 싶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야만적인 앨리스씨
황정은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과잉정보의 시대에 살고 있는 어느 독자는 앞으로 읽게 될 소설을 접하기 전에 이미 다양한 언론 매체와 팟캐스트를 통해 해당 책에 대한 다수의 정보를 접했다. 그 독자는 어쩔 수 없이 그 책에 대한 선입견 내지는 작은 편견을 가지고 독서의 출발점에 설 수 밖에 없는 운명이다. 지금 여기서 말하는 그 책은 바로 황정은 작가의 <야만적인 앨리스씨>.

 

사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내가 아는 황정은 작가는 팟캐스트를 통해 매주 듣는 정감 있는 목소리의 주인공으로,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우직하게 고수한다는 정도의 정보 밖에는 없었다. 그리고 비로소 <야만적인 앨리스씨>를 통해 황 작가의 작품과 처음으로 대면하게 됐다. 그리고 예상하지 못했던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자신이 인상 깊게 읽은 책의 문장들을 자근자근 읊조리던 그녀가 갑자기 씨발됨이라는 다소 충격적인 주제를 독자에게 날것 그대로 내던진 것이다.

 

 

 

소외된 이들의 부유하는 삶이 소용돌이치는 가상의 공간 고모리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바탕으로 한 <야만적인 앨리스씨>를 단순한 성장소설 혹은 가정폭력에 대한 글이라고 규정한다면 그것은 작가가 어느 인터뷰에서 말한 것처럼 의미의 누락이 되지 않을까? 어쩌면 너무 뻔한 이야기일 수밖에 없기에, 이 불친절한 작가는 독자에게 풀 수 없는 숙제를 던진 느낌이다. 작가와 독자가 벌이는 일종의 게임이라고 해야 할까? 작가의 의도는 그렇지 않은데, 독자는 자신만의 독법으로 책을 읽는다. 충돌과 갈등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한편, 훈련된 독자는 이 소설의 결말에 가서 기대했던 종래의 기승전결 서사가 전달하는 뚜렷한 의미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직감한다. 어쩌면 이런 설정조차도 작가가 의도한 장치일까. 작가가 구사하는 모든 문장이 갖가지 의문부호를 달고 내딛기 시작한다.

 

묵직한 장편소설이 무엇이든 빨리 변하는 세태와 융합하지 못하면서, 등장한 경장편 소설은 하나의 트렌드가 되었다. 경장편이든 본격 장편이든, 그 그릇에 어떤 이야기를 담는가는 오롯하게 작가의 몫이다. 그렇다면 그 그릇에 든 음식을 소비하는 건 독자의 그것인 셈이다. 내겐 너무 불친절한 황정은 작가는 폭력의 형상화라는 요리하기 쉽지 않은 재료로 독자의 구미를 돋운다. 그래서였을까? 작가는 자신이 일본 오사카에서 만난 여장 노숙자에게서 <야만적인 앨리스씨>의 원형을 본 것 같다. 독자는 당연히 앨리스씨는 누구이고, 그가 왜 야만적이라고 불리는지 궁금하지만 이에 대한 대답을 들을 수가 없다. 오직 약간의 확실하지 않은 추정만이 가능할 따름이다. 어디로 가든 방향을 잡을 수 있는 사거리에 선 여장 부랑자 앨리시어의 모습은 역설적으로 아무 곳으로도 갈 수 없는 방향성이 상실된 시대의 초상처럼 다가온다.

 

나는 궁금하다. 소설에서 거듭되는 씨발됨이 대물림된다고 하는데, 어느 세대의 지고한 희생으로 예의 폭력의 악순환을 끊을 수 없는지. 앨리시어가 입에 달고 다니는 그 어휘는 폭력을 끔찍하게 생각하면서도 결국엔 자신이 가치전도된 가해자가 되어 내뱉는 변형된 언어폭력의 반증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지울 수가 없다. 그리고 결국 앨리시어도 자신이 당한 폭력을 대물림하겠지라는 냉소에 도달하게 된다.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걸까.

 

이것은 황정은 작가가 전개하는 폭력 3부작의 전초라고 한다. 1/3 지점에서 판단하기란 쉽지 않다. 퍼즐은 나머지 두 조각이 더 필요하다. 그래서 난 속도전을 원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브라더 케빈 - 제2회 문학동네 대학소설상 수상작
김수연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떤 편견 없이 사물을 대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브라더 케빈>을 읽기 시작하면서 든 상념이다. 하긴 이미 카뮈는 이십대에 세상을 뒤흔든 걸작을 쓰지 않았던가. 이십대 젊은이가 쓴 <브라더 케빈>은 그렇게 내게 다가왔다.

 

처음부터 총 맞아 죽은 미국 출신 래퍼 투팍이 등장하니 좀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곧 우리네 일상이라고도 할 수 있는 학원, 특목고 그리고 보충수업 등의 낯익은 어휘가 달려오자 곧 반갑게 받아들일 수가 있었다. 올해 열다섯 살 난 김성준 군의 눈을 통해 독자는 그들의 세계 속을 탐험하게 된다. 소설은 공부에는 그다지 소실 없는 청소년이 부유하고 극성맞은 엄마의 닦달 때문에 특목고 진학전문학원에 들어가고, 같은 반이 된 초딩들과 지도를 맡은 선생님에게 수모를 받으며 성장해 가는 과정을 그린다.

 

 

이 정도라면 여느 성장소설과 다를 게 없을 것이다. 성장소설 스타일의 클리셰이가 들어서려는 순간, 젊은 작가는 우리 기억 너머로 사라져 버린 전설적인 래퍼 투팍을 소환한다. 누구나 투팍의 음악을 세 번만 들으면 바로 브라더가 된다는 말을 내뱉으며 성준의 세계에 진입한 케빈은 그야말로 성준과 호형호제하는 브라더가 된다. 부모의 이혼으로 부재한 부상(father figure)을 대체하기 위한 장치였을까? 무리 없이 혼연일체가 된 둘은 고난이도의 씨워크와 문워크를 즐기며, 한 마음이 되어 홍대클럽을 전전하며 그 유명한 놀이터 랩배틀도 마다하지 않는다.

 

물론 독자는 곧 성준의 독백처럼 현실성 떨어지는 서사를 늘어놓는 브라더 케빈의 무용담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기 시작한다. 뭐 그래도 상관없다. 누구는 해리 포터에 나오는 죽음의 저주마저 불사하고 엄마 카드를 훔쳐 호그와트로 가겠다고 하는 판에 말이다. 역사는 희비극으로 반복된다고 했던가. 희극으로 출발한 소설은 비극을 목전에 두고 극적인 유턴을 감행한다. 어쩌면 청소년기를 이제 막 겪은 작가가 또래의 무수한 후배들에게 정신 차려 임마, 세상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아!’라고 외치는 느낌도 들었다.

 

입시지옥에 시달리며 초등학교 시절부터 학원에 투입되어 미래를 설계하는 아이들에게 꿈이 뭐냐고 묻는다면 어떤 대답을 들을 수 있을지 궁금하다. 소설에 등장하는 홍 아무개 국회의원처럼 자신이 설계한 대로 인생이 재단되어진다면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개인의 성공이 개인의 노력으로 치환되고 평가받는 시대에 이 청년 작가는 자신이 구축한 스토리라인에 빠져 울고 웃는 독자에게 계속해서 골치 아픈 질문들을 투팍의 랩처럼 그렇게 툭툭 내던진다.

 

소설 <브라더 케빈>에서 보여주는 확실한 점 한 가지는 우리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과거와 별리(別離)라는 원치 않는 과정을 견디어 내야 한다는 것이다. 청소년이 되기 위해 부모의 이혼 때문에 발생한 아버지의 부재로 남자다운 자신감을 갖추지 못했던 주인공 성준은 브라더 덕분에 비로소 청소년이 되기 위한 전환과 도약의 계기를 마련한다. 물론 그 브라더의 그림자 뒤에 투팍이라는 희대의 래퍼가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 좀 생경하지만, 모두에게 성장하기 위한 방식이 똑같을 수는 없을 테니까.

 

<브라더 케빈>은 한 세대가 공감할 만한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잘 버무린 비빔밥 같다는 느낌이다. 이제 문단에 나온 청년작가가 무럭무럭 자라나길 기원하며, 자신의 데뷔작으로 성장소설을 고른 새내기 작가가 과연 다음번에는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궁금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