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기담집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5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비채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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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젊은 날의 피카소 전이라는 전시회에 다녀온 적이 있다. 피카소의 초기작을 보면서, 저 정도 그림이야 내가 발로 그려도 그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초기작은 훗날 그가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대가로 인정을 받은 후에 재평가를 받은 작품인 것이다.

 

말하는 원숭이 이야기를 들어 보신 적 있는지? 그리고 또 잠깐 아래층에 내려간다고 한 남편이 사라졌다가 한참 뒤에야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발견되었다는 말을 들어 보셨는지? 이 정도는 돼야 기담 혹은 괴담의 범주에 들어가는 게 아닐까. 아마 범인(凡人)이 이런 소재의 이야기를 했다면 술좌석의 농담 혹은 우스갯소리로 치부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무라카미 하루키 같은 베스트셀러 작가가 쓰면 또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이번에 새로 나온 하루키의 소설집 <도쿄기담집>은 최신작이 아니다. 2005년에 나온 책으로 모두 5편의 ‘기담’스러운 단편 소설집이다. 나는 맨 먼저 맨 마지막에 실린 <시나가와 원숭이>편부터 읽기 시작했다. 다른 이유는 없고 그저 제목이 마음에 들었다. 내가 시나가와라는 지명을 알 리가 없고, 뒤편에 달린 원숭이에 시선을 끌었다. 안도 미즈키라는 여성이 기억상실 때문에 병원을 찾고, 상담사를 찾으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리고 상담의 과정을 거쳐 아주 오래 전, 고교시절 자살한 학교 후배에게서 모든 것이 연유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종착역에는 도쿄 시나가와의 말하는 원숭이가 있었다. 그런데 진짜 이야기는 말하는 원숭이가 아니라, 자신이 어려서부터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로부터 도피하고 싶었다는 진실을 대면하게 되는 주인공의 이야기다. 그녀가 다시 기억력을 되찾게 되었는지 아닌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개인적으로 5편의 단편 중에서 <하나레이 해변>이 가장 재밌었다. 하와이 하나레이 해변이라는 곳에서 상어에게 물려 다리를 잃고 결국 목숨마저 잃게 된 어느 청년의 어머니 사치의 이야기다. 하와이에서 윈드서핑이 목숨까지 걸 정도인가 하는 생각에 절로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사치는 예전에 미국 생활 덕분에 현지에서 영어 소통에 문제가 없다. 그런 세심한 장치까지 배려해 주다니, 역시 하루키답다. 아니면, 본인이 미국 케임브리지에서 2년간 체류한 경험 덕분인지 미국 생활에 대한 그의 감상을 책 곳곳에서 엿볼 수가 있다. 어쩌면 하루키의 재즈 사랑도 그 덕분인지도.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상실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서 어떻게 해서 그녀가 호놀룰루에 오게 되었는지 그리고 이런저런 만남을 통해 사치의 과거를 되짚어 가는 품이 고수다운 풍모를 여실히 보여준다. 아무런 부담 없이 타인의 삶을 엿보는 그런 즐거움이라고나 할까. 소설을 읽는다는 것 자체가 주인공/타인의 삶에 의도했던 그렇지 않던 간에 개입한다는 점에서 보이저리즘(관음증)의 다른 표현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아들의 기일 즈음해서 하나레이 해변을 찾아 며칠씩 보내곤 하는 그녀에게만 왜 외다리 서퍼가 보이지 않는건지 참으로 기이할 따름이다.

 

남자가 평생 동안 만나야 할 의미 있는 여자의 수는 세 명 뿐이라는 아버지의 말을 따라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남자 준페이의 고민 역시 재밌다. 어차피 깨지기 마련인 터부를 마련하는 고수 하루키는 한 번의 만남 그러니까 다시 말해 원 스트라이크 이후 투 스트라이크를 준비한다. 정말 딱 맞는 상대를 만났다고 준페이는 생각하지만(물론 육체관계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기리에는 자신의 직업도 알려 주지 않는 그야말로 살아있는 미스터리다. 어쩌면 이렇게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글발을 보여주는지 하루키답다. 대뜸 기리에가 직업 킬러가 아닐까 생각해 보지만 그렇게 쉬운 직업으로 정할 리가 없지. 얘깃거리가 떨어지지 않는 두 사람이야말로 천생연분이 아니었을까. 결국 준페이는 기리에의 자극을 받아 만날 자리를 옮겨가는 콩팥 모양의 돌에 대한 이야기를 지어낸다. 창작에 있어 정말 중요한 건, 영감이 아니라 어떤 식의 자극이라는 하루키 식 고백일까? 미스터리한 그녀의 실종 역시 예측가능한 좌표상에 자리 잡고 있다.

 

하루키 소설집의 공간적 배경은 소설집의 제목이 가리키고 있듯이 대도시 도쿄다. 인구 천만명이 사는 예의 공간에서 사람들은 만나고, 헤어지고, 다투고, 싸우고, 화해하며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그렇게 다양한 삶의 모습이 스펙터클하게 변화하는 공간의 이야기가 하루키 식 기담의 원천이 아닐까. 얼마 전 뉴스에 보니 셀카가 뭐라고 남들보다 압도적인 셀카를 찍으려다 절벽에서 추락사하고 고압선에 감전되어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더라. 이 이야기야말로 기담이 아닌가.

 

판에 박힌 듯 돌아가는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어, 자신도 모르게 가정을 떠나 자발적 홈리스가 된다는 이야기도 이젠 식상하다. 일상의 모든 책임과 의무에서 벗어나고 싶은 내면세계의 일탈 욕구가 빚어낸 이야기도 이제는 설명 가능하다. 어느 시대에는 통용되지 않던 이야기나 상식도 시간이 지나가면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불과 백 년 전만 하더라도 여성참정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폭도나 정신병자로 치부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진짜 이 소설집에서 하루키에 대해 말하고 싶은 건 그런 상식의 수용 문제가 아니라 그의 작풍 또는 스타일이 아닐까. 정확하게 꼭 집어서 이게 바로 하루키 스타일이야라고 말하기 쉽지 않지만, 재즈와 위스키를 사랑하는 여피 스타일적인 삶의 방식 말이다. <하나레이 해변>의 사치처럼 상실 가운데서도 그런 여유를 가지고 살 수 있는. 물론 그러기 위해선 금전적 여유가 수반되어야 하겠지만. 하루키는 두말할 것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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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인간
성석제 지음 / 창비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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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다. 그동안 성석제 작가의 다른 책들도 꾸준하게 읽어 왔는데, 이번에 새로 나온 신간 <투명인간>처럼 현실계에 다가선 작품이 있었나 싶을 정도다. 그는 소설이라는 장르를 통해, 해방 전 시대부터 현대사를 관통하는 서사를 구축해냈다. 그리고 글쟁이답게, 소설이라는 형식 속에 창조해낸 캐릭터들의 광휘는 눈이 부시다 못해 찬란하기까지 하다.

 

최근 우리나라를 방문한 ‘저파’ 프란치스코 교황의 낮은 곳에 임하라는 메씨지가 일종의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는데, 성석제 작가 역시 우리가 흔히 보는 막장드라마의 필수 요소인 재벌이나 권력자들을 등장시키는 대신 밑바닥 인생에 초점을 맞춘다. 소설 <투명인간>의 주인공 만수의 3대 이야기는 그야말로 한국 현대사의 축약판이다. 만석꾼이었던 그의 할아버지는 젊은 시절 좌익 사상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옥고를 치르고, 집안이 단박에 거덜 나 야반도주를 감행한다. 그렇게 산골에서 화전을 이루기 살기 시작한 만수네는 천만다행으로 한국전쟁이라는 참화는 피해갈 수 있었지만, 하루 벌어먹고 살기 힘든 가난이라는 고통의 질곡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줄줄이 사탕처럼 형제들이 즐비한 만수는 온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모은 백수처럼 그리고 훗날 또 다른 총기를 보여준 석수처럼 뛰어난 재능의 소유자는 아니었지만, 수십일 을 걸어 천릿길을 마다하지 않는 돈끼호떼의 둔마 로시난떼처럼 그렇게 자신의 길을 묵묵하게 걷는 오늘의 대한민국 건설에 이바지한 장삼이사의 전형으로 그렇게 다가온다. 돌아가신 할아버지는 머나먼 월남에서 고엽제로 어이 없이 비명횡사한 집안의 기둥 백수의 뒤를 이어 집안의 가장이 된 만수에게 가족이야말로 우리네 삶을 이루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하다는 말을 그야말로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각인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보다 훨씬 잘난 석수가 자신을 형대접 하지 않아도, 그를 온전하게 받아 주며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해 가며 살얼음판 같은 인생 역정을 겪는 식구들을 전심전력을 다해 뒷바라지 한다.

 

삶에서 평범함을 추구하지만, 도무지 평범할 수 없는 인생의 간난신고를 겪은 만수의 삶을 읽으면서 우리에게 과연 국가란 어떤 의미인가라는 1차원적 질문을 마주하게 된다. 1960, 1970년대 고도의 독재개발을 추구한 국가는 국민에게 무한한 인내와 희생을 요구했다. 인간관계에서 최소 단위를 구성하는 만수네 가족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백수는 순전히 자신이 가진 천재성으로 성공의 끝자락에 다가서지만, 어찌할 수 없는 가난은 결국 그의 발목을 잡고 전쟁터로 파병된다. 집안의 기둥 백수는 월남에 파견되어 조국근대화의 최전선에서 달러를 벌어 훗날 만수 가족이 신산한 서울 생활을 버틸 수 있는 단초가 되는 재봉틀을 사는데 일조했다. 백수는 명분 없는 전쟁에서 장렬한 전사도 아닌 미군이 월남 정글을 초토화시키기 위해 사용한 에이전트 오렌지라는 초강력 고엽제 때문에 어이없이 병사하게 된다.

 

청운의 푸른 꿈을 안고 구로공단에 먼저 취업한 친구의 편지에 상경한 만수의 누이 역시 사실을 담보하지 않는 편지의 의미 없음을 현장에서 직접 깨닫게 된다. 몸뚱이 외에 아무런 생산 수단도, 자본도 가지지 않은 이들이 갈 곳은 정해져 있으며 그 누구도 환영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성석제 작가의 소설은 명징하게 우리에게 보여준다. 문제는 40년이 지난 오늘에도 예의 불평등과 소득분배 불균형의 문제는 여전히 개선될 여지가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이 가운데 우리의 주인공 만수가 부딪히는 사회적 현실 또한 불편하다. 소설의 전반부가 산업화의 여명기와 성숙기를 그렸다면, 각자의 목소리로 등장하는 캐릭터들의 목소리가 어느 정도 정리된 후반부에는 비로소 만수가 주인공으로 나서기 시작한다. 공간의 배경 역시 만수네 일가가 살던 시골에서 벗어나 도시화의 영향으로 본격적인 이촌향도가 진행된 1980년대에는 경제성장과 더불어 서울로 이동한다. 성석제 작가의 <투명인간>을 읽으면서 이렇게 다양한 주제와 소재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놀라운 이야기를 빚어낸 작가의 글발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것 또한 역사의 질곡을 있는 그대로 체험하지 못하지 않았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추정해본다.

 

민주화 투쟁의 열기가 치솟던 시절에도 우리의 주인공 만수는 우직스럽게 공장에 취업해서 자신의 일을 누가 보건말건 그야말로 투명인간처럼 묵묵하게 해낸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외치는 대학생 혹은 엘리트의 외침은 만수에게 사치일 뿐이다. 아직 독립하지 못한 동생들의 대학교 학비를 벌기 위해 짠돌이 소리 듣기를 마다하지 않으면 알뜰살뜰 돈 모으기에 전념하는 그에게 누가 돌을 던질 수 있겠는가. 우리 아버지 세대의 임무를 부모 세대가 아닌 형제 세대에게 전가한 것도 책임감과 부채 의식의 극대화라는 성석제 작가의 전략이었을까.

 

좀 먹고 살만해지니 닥친 전대미문의 IMF 경제위기 속에서도 특유의 끈기와 성실함을 무기삼아 할아버지의 유언대로 가족의 테두리를 온몸을 내던져 지켜낸다. 만수네 가족을 덮치는 시도 때도 없는 간난신고의 스펙터클함에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더 놀라운 것은, 예의 사건사고들이 우리 현대사에 실제로 벌어졌던 일이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마치 이미 존재하고 있던 역사적 사실에 성석제 작가가 창조해낸 각양각색의 캐릭터들의 조합을 적절하게 맞춰 놓았다고나 할까. 다시 한 번 캐릭터들의 보여주는 다채로운 광휘에 갈채를 보낸다.

 

개인적으로 <투명인간>은 성석제 작가가 전작 <조동관약전>에서 보여준, 시대상에 대한 사적 투쟁의 침잠이라는 점에서 <만수전(萬壽傳)>이라고 부르기에 손색이 없을 것 같다. 똥깐이가 난장을 부르는 부정적인 측면에서 슈퍼맨(초인)이었다면, 만수는 ·니체의 위버멘쉬(초인)에 더 가깝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물론 주인공 만수가 어떤 철학적 사유를 통해 모든 것을 개인적 노력으로 극복해내는 초인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이 소설을 나는 가난이 부여한 다양한 고통이라는 질곡에서 벗어나기 위한 만수 혹은 우리 장삼이사를 시험에 들게 하는 끝없는 도전에 대한 응전의 기록이라고 부르고 싶다.

 

<투명인간>의 가독성은 엄청났다. 흥미로운 역사서(우리나라 현대사)를 읽는 재미에 덧붙여서 희비극적인 요소를 두루 갖춘 캐릭터들의 향연에 책장 넘기기를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물론 때때로 마주하게 되는 극적인 결정의 순간에 내가 이 상황에서 만수라면 어떤 결정을 했을까라는 고민도 빼놓을 수가 없다. 최근에 어떤 책을 읽으면서 자신을 투영한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최고의 몰입이었다. 2014년 대표작으로 꼽기에 부족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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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
천명관 지음 / 창비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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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고 읽는 천명관 작가의 소설집이 새로 나왔단다. 아직 이창래 선생의 신작도 다 못 읽어서 버벅대는 판에 나의 손가락은 절로 구매로 향한다. 도대체 칠면조와 육체노동자랑 무슨 상관일까? 닭(치킨)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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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5
다나베 세이코 지음, 양억관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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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엔가 일본 작가 야마다 에이미의 소설을 읽으면서 이 작가 참 도발적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예의 작가의 책을 읽은 독서모임에서 그녀보다 고수가 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그녀의 이름이 바로 다나베 세이코였다. 아마 <침대의 목적>과 <아주 사적인 시간>을 추천받았던 것 같은데 묵혀 두고 있다가, 지난주에 <춘정 문어발>로 다나베 여사의 문학 세계에 빠져 들었다. 그 다음에 읽은 책이 바로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이하 <조제>)이다. 이 책도 오래 전, 어느 여행지에서 우연히 어느 커플이 동명의 영화를 꼭 보라고 추천했었다. 예전 같았으면 그렇게 추천 받은 영화라면 바로 구해서 봤을 텐데, 이제 영화마저 나의 관심사에서 멀어진 지라 그냥 안보고 버텼다. 그렇게 길게 돌고 돌아 이제야 <조제>와 만났다.

 

다나베 여사는 1928년생이니까 우리 나이로 87세다. 28세도 아닌 87세라니. 그런데 젊은 처자 못지않은 감각으로 여성들의 은근하면서도 오묘한 심리를 까발리는데 도가 튼 모양이다. 어느 인터뷰에서 보니 그녀의 관심은 오욕칠정의 세계가 그야말로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파란만장한 남녀 관계에 있다고 했던가. <조제>에 실린 9편의 단편을 통해 다나베 여사는 우리가 즐겨보는 <사랑과 전쟁> 뺨치는 파격적이면서도 달달한 연애이야기를 풀어낸다.

 

자매간에도 질투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 주기라도 하듯, 첫 번째 에피소드인 <어렴풋이 알고 있었어>에서는 일이나 연애에서 모두 잘 나가는 동생을 둔 언니의 속마음을 보여준다. 살림에는 일가견이 있지만 요즘 말로 하면 모태솔로라고 해야 하나. 언젠가 결혼해야지 하는 생각은 하고 있지만 그마저도 자기 뜻대로 풀리지 않는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했는데 이야기의 주인공 고즈에는 그마저도 관심이 없는 모양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동생 미도리가 어느 날 갑자기 먼저 결혼하겠다고 선언했을 때, 예비신랑감에 필요이상의 기대를 보이는 고즈에. 야릇한 갈등의 전조를 내비친다.

 

다음은 역시 표제작인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이다. 조제는 이 단편의 여주인공 구미코가 프랑수아 사강의 소설의 주인공 조제를 본 따 지은 자신의 별명이다. 어려서 뇌성마비 진단을 받아 하반신마비의 장애를 가진 조제는 우연한 기회에 대학생 츠네오에게 도움을 받아 인연을 쌓게 된다. 그런 조제를 돌봐주던 할머니마저 돌아가시고, 그야말로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을 수 없는 그런 상황에 처한 조제를 찾아간 츠네오는 동정과 연민에 휩싸이게 된다. 츠네오는 그렇게 조제를 사랑하게 되고, 그녀가 보고 싶어 하는 야수의 왕 호랑이를 보러 동물원을 찾는다. 그리고 해변여행을 떠나 물속에서 자유롭게 유영하는 물고기들에게 자신들을 투영하며 스스로 죽었다고 생각한다. 완전무결한 행복이 죽음 그 자체라니. 너무 내냉소적인 게 아닐까.

 

아직까지 영화를 보지 않아서 어떤지 모르겠지만, 이 짧은 단편을 가지고 두 시간짜리 영화를 만들려면 반드시 각색 작업이 필요하겠지. 중요한 스토리와 주인공들의 이벤트는 그대로 가져가면서 러닝타임 두 시간을 채우기 위한 다양한, 하지만 소설에는 등장하지 않는 그런 이야기들을 채용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가능한 한 롱테이크로 촬영하지 않았을까? 도대체 어떻게 새로운 버전의 <조제>를 만들었을지 궁금하다. 기회가 닿는 대로 영화를 봐야지 싶다.

 

<조제>에는 어쨌거나 다양한 사랑에 대한 버전이 실려 있다. 우리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이모와 조카의 관계를 다룬 <사랑의 관>은 섬뜩하기까지 하다. 아무리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선언과 함께 진행되지만 못내 마음이 불편한 건 어쩔 수 없다. 어쩌면 마지막이기 때문에 더 강렬한 여운을 남긴 것인지도 모르겠다. 워커홀릭으로 일에 미친 남편의 빈자리를 채우는 일을 통해 알게 된 연하남과의 줄타기 연애는 아슬아슬하게 다가온다. 하지만 다나베 여사는 절제의 미덕에 대한 서사도 빠뜨리지 않는다. 하긴 무림의 절대고수라면 이 정도는 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남편이 일에 미쳐서 나를 돌봐주니 않으니 어쩔 수 없이 바람피우게 되었다, 진부하다 진부해. 치키라는 손가락 인형의 입을 빌려 자신의 감정을 전달하는 고전적 수법이 아기자기하게 느껴졌다. 이 양반 대단하구나.

 

 

 

 

남자는 여자가 원하는 것을 알고는 있기나 하나? 열 살 연상의 남자는 연하의 여자를 자신의 별장에 고이 모셔 두고 일에 너무 바쁜 나머지 찾지 않는다. 폭주족이 인근에 출몰하자, 자기 대신 조카를 보낸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격이라는 걸 잘 알면서도 묘한 긴장감을 즐기는 듯 한 태도가 영 마뜩치 않다. 결혼 중에 다른 여자를 임신시키고 헤어지는 순간에도 밥타령을 하는 남편의 “욕망에 충실한 빛나는 에고”를 냉소적으로 찬양하기도 한다. 전처와의 인연을 끊지 못하고 두 집 살림을 하는 남편을 호색의 날다람쥐라고 부르는 에리코의 이야기는 또 어떤가. 요즘 유행하는 말로 썸타는 사이도 아니면서 내 것인 듯 아닌 듯한 그런 미묘한 여성의 감정선을 잡아내는 기술이 정말 유려하다.

 

이렇게 다양한 사랑의 방정식을 통해 다나베 여사는 남자들에게 묻는 것 같다. 니들이 사랑이 뭔지 아냐고 말이다. 물론 이 질문은 남자는 소중한 취미라고 쓴 다나베 여사 정도는 돼야 물을 수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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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퇴장 주커먼 시리즈
필립 로스 지음, 박범수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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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필립 로스의 신작 <유령 퇴장>의 원제인 Exit, Ghost는 셰익스피어 희비극에 나오는 무대 용어라는 말로 이 리뷰를 시작하고 싶다. 누가 읽어도 노대가의 얼터 이고(alter ego)가 분명한 네이선 주커먼을 전면에 내세운 소설 <유령 퇴장>은 2011년 911테러 이후, 테러가 일상의 위협이 되어 버린 시절에 남성성을 잃은 71살 노작가의 욕망 고백이다.

 

탱글우드 축제로도 유명한 버크셔 산골에 지난 11년간 자발적 혹은 타의에 의한 은둔을 하던 주커먼은 암에 걸려 밀레니엄 캐피탈 뉴욕으로 복귀한다. 더 치명적이었던 것은 예의 암이 근원지가 전립선이었고, 생존을 위해 선택한 전립선 절제술은 문필가로 필명을 날리던 노작가를 요실금 때문에 기저귀 차고 다니는 한물 간 노인네로 격하시켰다는 점이다. 그냥 그렇게 조용하게 근치 치료를 마치고 다시 버크셔로 복귀하려던 주커먼의 계획은 뉴욕 리뷰 지의 광고란의 부동산 교환 공고를 보고 전화 다이얼을 돌리는 순간, 무모한 순간으로 돌입하게 된다.

 

여느 작가들처럼 노숙한 주커먼 역시 노년에 자신의 영감을 불러 일으켜줄 대상으로 젊은 여성을 골랐던가. 30대 초반의 여피 부부 제이미 로건이 대상이다. 이미 발기불능으로 남성으로서의 자신감을 상실한 주커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성으로서의 욕망마저 거세된 것은 아니었다. 한편, 소설가를 꿈꾸는 제이미와 그녀의 남편 빌리 데이비도프(유대계 미국인)는 1년 정도 뉴욕에서 떨어진 외딴 곳에서 집필 활동을 꿈꾼다. 그런 마당에 나름 이름난 작가인 주커먼의 산골 오두막에서 지낼 수 있다니 이 얼마나 황홀한 경험이겠는가.

 

소설 <유령 퇴장>은 노년의 작가와 여피 부부의 미묘한 관계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한 때 젊은 시절의 주커먼이 숭배해 마지않던, 하지만 이제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은 불세출의 작가 E.I. 로노프(이하 매니 로노프)를 필립 로스는 등장시킨다. 그의 알려지지 않은 사생활을 중심(이복누이와의 근친상간)으로 한 전기를 통해 일약 문단의 스타가 되려고 결심한 제이미의 전 남자친구이자 프리랜서 작가인 리처드 클리먼은 집요하게 주커먼에게 매달리면서 자신에게 협조를 요구한다. 그가 그렇게 뻔뻔하게 나오는 데는, 로노프의 마지막 애인이었지만 이제는 암에 걸려 역시 치료 중인 에이미 벨레트가 건네준 로노프의 장편 소설 사본이라는 무기가 있었다.

 

<유령 퇴장>은 2004년 재선을 노리는 조지 W. 부시와 민주당 대선후보 존 케리의 대결 시기인 10월말에서 11월초까지의 일주일을 시간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심지어 세계대전을 치르면서도 공격받지 않았던 미국 본토에 대한 직접적인 타격에 의한 충격을 제이미 로건의 다양한 방식의 공격적인 언사를 통해 필립 로스는 절실하게 그려내고 있다. 텍사스 휴스턴 유전재벌 아버지를 둔 제이미는 별다른 직업 없이, 물가 비싸기로 유명한 뉴욕의 어퍼사이드 아파트에서 유유자적한 삶을 보내고 있다. 게다가 자신을 숭배하는 남편까지 둔 그런 매력적인 여성이다. 임포텐츠이지만 여전히 자신의 남성성을 증명하고 싶어 하는 무기력한 노작가의 치열한 욕망 고백은 한편으로는 자신이 숭배해온 작가 로노프를 방어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을 에이미에게 약속하면서도, 자신의 능력을 그에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런데 필립 로스가 진짜 이 책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저물어 가는 삶의 말년에 서서 훗날 어떤 치기 어린 젊은 작가가 나서서 자신의 삶을 들춰내서 망신을 주지나 않을까 하는 노파심이 아니었을까? 노골적인 작가의 욕망을 <그와 그녀>라는 다이얼로그 방식으로 풀어나가면서도(필립 로스의 문학적 상상인지 아니면 실재했던 이야기인지 그 경계마저 모호하다), 자신이 올곧게 주장하는 ‘젊은이들이여 제발 쓸데없는 짓 좀 하지 말라’는 경고는 분명하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자신도 젊었을 적에는 그랬었노라고 말하는 모순에도 도달한다. 성공과 명성을 원하는 리처드 클리먼(저널리스트 혹은 작가지망생)을 도대체 무슨 방법으로 막을 것이냔 말이다. 자신만의 신화에 흠집을 내고, 성공에 집착한 남자를 모욕하는 방법으로 타격을 가하려는 주커먼의 시도는 수포로 돌아간다. 그리고 설사 그가 전혀 사실이 아닌 주장으로, 로노프에 대한 (의도적) 명예훼손을 저지른다고 하더라도 이것을 밝혀줄 사람은 이미 사자(死者)가 아니었던가.

 

필립 로스는 반복해서, 욕망에 사로잡힌 주커먼의 언동이 무모하다고 곳곳에서 독자에게 신호를 보낸다. 문단에서 성공을 거둔 것 말고는 전혀 내세울 게 없는 자신보다 무려 40살이 많은 이 노땅 작가에게 제이미 로건이 뭐가 아쉬워서 끌린단 말인가. 그녀에게 돈이 부족한가, 배움이 모자라나(그녀가 하버드 출신이라는 점을 잊지 말자). 11년 전에 시작된 살해 협박 때문에 자발적(?) 은둔에 들어간 주커먼은 자신의 인생에 아무도 들이지 않는 삶의 방식을 고수했지만, 일견 무모해 보이는 순간의 욕망 때문에 판단착오의 연쇄반응을 경험하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욕망에 눈이 먼 주커먼이 치명적인 실수로 파멸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필립 로스 정도 되는 작가가 그 정도의 분별력은 가지고 있겠지.

 

<유령 퇴장>은 올해 82세의 필립 로스가 지난 2007년(75세)에 발표한 주커먼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이다. 70대 노대가는 여전히 자신만의 영역에서 자신의 언어로 빛나는 순간을 창조해내고 있었다. 휴대전화로 점령당한 밀레니엄 캐피탈 거리에 대한 생생한 묘사, 문인과 문창생 간에 끝없이 이어지는 현학적 대화 그리고 클리먼 같은 풋내기 부수기야말로 생의 마지막을 앞둔 문학 십자군인 자신의 마지막 임무라고 선언하는 장면은 정말 압권이었다. 과연 스스로를 ‘유령’이라고 생각한 얼터 이고의 ‘퇴장’이 사실일까. 살아 있는 미국 문학의 전설이 되어 가고 있는 필립 로스의 대단원은 어디일지 문득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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