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르노빌의 봄 핵없는 세상을 위한 탈핵 만화
엠마뉘엘 르파주 지음, 해바라기 프로젝트 옮김 / 길찾기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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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크라이나 키예프에서 백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체르노빌에서 원전사고가 터진 것이 지금으로부터 딱 30년 전의 일이다. <게릴라들: 총을 든 사제>로 처음 만난 프랑스 출신 일러스트 작가 엠마뉘엘 르파주의 그림을 체르노빌 방문기로 다시 만나게 됐다. 얼마 전부터 계속해서 보고 싶다고 생각만 하다가 오늘 드디어 읽을 수가 있었다.

 

다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2008년 엠마뉘엘 르파주를 비롯한 일단의 예술가 그룹이 2011년 후쿠시마 원전사고 터지기 전, 가장 큰 핵재앙이었던 구 소련의 체르노빌을 방문해서 재앙의 잔재를 기록하는 프로젝트를 가동 중이었다. 데생악퇴르 그룹의 일원으로 체르노빌을 방문할 계획을 세우던 이들은 심각한 고민에 사로잡힌다. 그것은 바로 체르노빌 원전사고가 터진 지 22년이나 지났지만 여전히 방사능 피폭에 대한 위협이 가시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들은 체르노빌을 방문하는 동안 먹을 안전한 먹거리 확보부터 시작한다.

 

아무리 안전을 강조한다 하더라도 방사능이 잔존하는 이상, 방사능 피폭이 초래할 암이나 갑상선 질환 같은 각종 질병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는 현실이 제기된다. 바로 그 지점에서 과연 이런 위험요소들을 무릅쓰고 프로젝트를 가동할 충분한 이유가 되는가라는 점에 대해 묻게 된다. 자라나는 엠마뉘엘의 아이들에게 아버지가 필요하다는 식구들의 조언도 무시할 수 없다. 설상가상으로 평생 그림그리기를 업으로 삼아온 엠마뉘엘은 그림을 그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어쩌면 체르노빌이라는 이름이 가진 잠재적 위협에 대한 방어기제가 작동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고민 끝에 르파주는 일단의 동료들과 체르노빌 행을 감행한다. 비행기를 동원한 신속한 방법보다 서구 유럽에서 폴란드를 거쳐 체르노빌에 도달하는 육로는 물리적 거리감을 확인할 수 있는 계기였다.

 

체르노빌 원전사태가 터진 1980년대는 여전히 냉전의 열기가 뜨거운 상태였다. 어느 정부나 그렇듯 공산주의 종주국이었던 구 소련 역시 최악의 원전사태를 숨기기에 급급했다. 방사능 피폭의 후유증을 예상하지 못했던 용감한 이들은 화염에 휩싸인 원전의 불길을 잡고 사태를 진전시키기 위해 일선에서 최선을 다하던 기술자들과 노동자들은 방사능 피폭으로 모두 사망한다. 방사능을 피하기 위해 수십만의 사람들이 정든 고향을 떠나야 했고, 피폭된 2세에서 4세 수많은 아이들이 숨졌다. 어디 그 뿐이던가? 체르노빌의 최전선에서 싸우던 처리반요원들이 없었다면 서구 사회 역시 안전할 수 없었으리라고 작가는 진단한다.

 

금지된 도시에는 현재에도 고향으로 돌아온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데생악퇴르 그룹은 체르노빌 부근에 거처를 구하고 활동을 개시한다. 예술가 집단들은 이방인들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현지인들과 조금씩 소통하고, 그들의 내면세계에 접근을 시도한다. 식탁에서 음식과 보드카를 나누는 교제야말로 아이스브레이킹의 최고의 방법이었지만, 과연 체르노빌 사람들이 권하는 음식을 먹어도 되는지 프랑스 예술가들은 고민에 빠지지만 곧 주저 하지 않고 음식을 나누기 시작한다.

 

엠마뉘엘 르파주는 체르노빌의 암담한 현재를 그려 서방세계에 진실을 알리겠다는 사명으로 체르노빌을 찾았지만, 체르노빌의 아름다운 이면을 발견하고 고민에 빠진다. 틱 틱 거리며 라돈 수치를 보여주는 방사능 측정기를 따라 움직이는 작가의 손길은 곧 원래의 솜씨를 되찾는다. 술자리의 달아오를 흥취에 젖어, 현지인들을 희화화하는 그림을 그리기도 하지만 곧 예술가 본연의 모습을 되찾아 서방인들이 보길 원하는 암울하고 묵시록적인 그림 대신, 당시 체르노빌의 현실을 그리고 싶다는 자신의 바람에 따라 르파주는 그야말로 붓 가는 대로 그리기 시작한다. 그렇기 바로 그게 장인의 예술혼이 아니었던가.

 

자신들을 덮친 핵 재앙으로부터 달아나는 대신 맞서 싸우는 체르노빌 사람들에게서 작가는 희망을 그린다. 체르노빌에서 인류 스스로를 파괴할 수도 있는 기계문명을 대표하는 방사능 오염 물질은 후크 선장의 한쪽 손목을 뺏어간 악어처럼 사람들을 노리는 이미지로 형상되어 등장한다. 그리고 안전하고 저렴하다는 이유로 곳곳에 지금도 지어지고 있는 원자력 발전소가 어느 순간 재앙으로 돌변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바로 이웃나라 후쿠시마 사태에서도 뻔히 보고서도 각성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체르노빌의 봄>을 통해 되돌아보게 됐다. 조금 불편하고 에너지를 덜 소비하는 한이 있더라도, 기존 17기의 원전을 폐쇄하기로 결정한 독일의 선례대로 그린에너지와 재생에너지를 개발해서 누구도 원하지 않는 재앙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야말로 최선의 원전 대책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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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 마음산책 짧은 소설
이기호 지음, 박선경 그림 / 마음산책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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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독서는 언제나 그렇듯 충동적이다. 이기호 작가의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도 그렇게 충동적으로 구매해서 읽었다. 모두 40편의 짧은 소설이 실린 소설집에는 2016년 대한민국을 읽을 수 있는 모든 코드들이 집대성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다. 그래서 그렇게 빨리 읽을 수가 있었을까? 아니 어쩌면 온라인 지면을 메우는 단신 뉴스들을 읽고 있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나는 먼저 청년들의 가장 큰 고민인 취업을 다룬 글들이 눈에 들어왔다. <비치보이스>에서는 고등학교를 졸업학도 별 볼 일 없이 지내던 청년 셋이 여름을 맞아 멋진 비키니 입은 여대생들과 썸씽을 꿈꾸며 달랑 편도 교통편을 이용해서 바닷가를 찾는다. 하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휴가지의 비싼 바가지 요금과 당장 아르바이트 전선에서 돈을 벌어야 한다는 현실 뿐이었다. 그들의 한바탕 모험기는 결국 폭염이 기승을 부리는 무더운 여름날 주차장 알바를 하다가 살이 데이는 고통으로 끝을 맺는다. 무위도식하는 청년들에게도 남들 같이 느긋한 휴가를 즐기고 싶다는 욕망이 살아 꿈틀거리는 장면을 목격했다고 해야 할까. 역시 취업전선에 나섰지만 계속 실패하던 청년이 참 쉽죠잉~을 남발하는 스타 쉐프의 초간단 또띠아 만들기에 도전했다가 밀대 대용으로 사용하던 소주병을 깨먹으면서 곤히 잠든 아버지와 어머니를 깨우는 불상사로 마무리되는 이야기는 또 어떤가. 아무리 일 없이 지내는 백수라지만, 배고픔과 맛있는 것을 먹고 싶다는 이라는 인간 기본의 생리 현상은 무시할 수 없는 모양이다. 아, 그리고 누가 쉽다고 해서 누구나에게 적용이 되는 건 아니라는 간단한 진리로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생활전선에 시달리다가 극단적 결정을 내린 남자의 이야기는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아버지가 물려주신 주물공장의 부도로 결국 졸음쉼터에서 만오천원 짜리 화덕과 번개탄으로 생을 마무리지으려던 남자의 결심은 느닷없이 등장한 트럭 운전사 아저씨의 방해를 받는다. 라이터를 빌려 달라고 하질 않나, 간이 잘밴 고등어를 싸게 넘겨 주겠다고 하니 기가 찰 노릇이다. 또하나의 희비극은 삼만원에 주겠다는 고등어를 살 돈이 없다는 거다. 마지막에 트럭 운전사 양반은 주인공이 삶을 마감지으려던 화덕으로 별도 좋은데 고등어나 구워 먹잔다. 그리고 남자의 흘러 내리는 눈물. 그런 거 보면 이 세상은 여전히 살 만한 곳이 아닐까 싶어진다.

 

이승에서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으면 저승 가서 그만큼 받게 된다는 전형적인 인과응보식 이야기도 진부하지만 울림이 쎄다. 우리는 바쁘고 피곤하며, 시간이 없다는 갖가지 이유를 대며 우리를 이렇게 키워 주신 부모님의 마음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었던가. 아버지 제삿날 돌아가셔야 자식들이 두 번 걸음하지 않는다는 어머니의 자식걱정 앞에 정말 할 말을 잃어 버렸다. 그 자식들은 나이 드신 어머니의 그런 걱정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몫이 될 수도 있었던 재산 나부랭이를 두고 입씨름을 벌인다. 이런 대조야말로 구차한 오늘을 사는 우리네 초상에 대한 저격이 아니였던가. 층간 소음으로 위층에 사는 우락부락한 남정네를 찾아간 아래층 남자는 치매에 걸린 할머니가 손주를 돌아가신 영감으로 착각하고 뒤쫓는 기괴한 장면을 보고 할 말을 잃어 버렸다. 주변의 이런 소소한 이야깃거리들이 소설이라는 형식으로 멋지게 탈바꿈할 수 있다니 놀랍기만 하다.

 

공무원 생활을 은퇴해서 농사를 시작한 아버지가 벌이는 에피소드도 만만치 않다. 평생 서류 작업만 해오신 양반이 농작물 경작법에 대한 노하우를 가지고 계실 리가 만무하지 않은가. 결국 책을 보고 유기농 토마토를 손주들에게 물리도록 공급하시겠다는 야심을 가지고 출발하셨지만, 농약으로 범벅이 된 토마토를 한 아름 안겨 주시는 상황은 정말. 그 이듬해에는 식용 옥수수 대신 사료용 옥수수를 보내시는 통에, 주인공의 어머니가 전화로 먹지 말라고 만류하기에 이른다. 한편 잘하던 숯불돼지갈비집을 때려치고 시의원 선거에 나갔다가 처참한 득표수를 기록한 친구를 말리는 당부 편지도 또한 일품이다. 결국 당선도 되지 못하고 숯불구이집도 망하고, 대신 통닭집을 운영하던 중에 때가 되어 다시 시의원에 도전하겠다는 친구에게 차라리 시의원 연봉이 탐나서 업종전환을 시도하는 게 아니냐고 조심스럽게 묻는다.

 

외국인 백만시대에 바다 건너 저 멀리 아일랜드의 골웨이라는 곳에서 온 아일랜드 출신 원어민 선생님은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술을 마셔대는 한국 풍습에 혀를 내두른다. 아일랜드 사람들도 술이라면 못지 않은데, 이곳과는 차원이 다르다. 누가 배달의 민족이 아니랄까봐 낮밤 없이 피자와 치킨이 배달되는 동방예의지국 코리아에서는 특히 연말이 되면 너나 할 것 없이 환송회와 송년회를 빌미삼아 말아 마시고, 꺾어 마신다. 결국 우리의 주인공 데이비드 로지 씨는 속병이 나고, 골웨이의 한가한 펍에서 마시는 맥주가 그리워지기에 이르렀다는 말씀이다.

 

표지에도 등장한 <아파트먼트 셰르파>에 대한 풍자는 천민자본주의가 만연한 현 세태를 예리하게 꼬집는다. 원동기 면허증 같은 건 필요 없고 튼튼한 체력을 요구하는 점주의 질문에 주인공은 별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25층의 위용을 자랑하는 치킨집의 최대고객 행복아파트는 배달원에게 엘리베이터 사용을 금지한단다. 배달의 편리함은 좋지만, 치킨을 배달하는 청년에게 공동전기료가 부담되는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이용하라는 강제에 기가 막힐 노릇이다. 이게 그냥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냐고 한다면 정말 세상을 몰라도 너무 모르시는 말씀이다. 이렇게 현실과 문학적 허구를 넘나들면 종횡무진 글을 써제끼는 이기호 작가의 글을 읽다 보니 어느새 새벽녘이 되었더라.

 

단편소설의 핵심은 삶의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라는 신형철 평론가의 말을 빌리지 않아도, 충분히 이기호 작가의 짧은 소설들은 우리네 삶 속에 덕지덕지 묻은 그런 진실들을 캐내고 있다. 너무나 현실을 복제한 것 같은 이야기 속에 감동을 먹어 가슴이 뭉클해지기도 했다가, 묘하게 비튼 풍자에 웃음을 빵빵 터트리기도 했다. 오락적 차원에서라면 정말 별평점 열 개를 줘도 모자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순전히 미스터 버티고 서점 사장님의 특별한 띠지로 읽기 시작했는데 그야말로 백점만점이다. 역시 띠지 글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따뜻한 봄날의 햇살 같은 단편소설집

이런 소설이면 정말로 잘 팔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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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9-08 16: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 분량이 짧아서 그런지 책을 빨리 읽으셨군요. 전 단편집 한 권 읽는데도 하루 이상 걸려요. ㅎㅎㅎ

레삭매냐 2016-09-10 17:37   좋아요 0 | URL
분량이 짧기도 하지만 너무 재밌어서 읽는 속도가
붕붕 났습니다.
어떤 책은 얇아도 진도가 팍팍 나가지 않을 때가 있더라구요.
 
여름, 어디선가 시체가
박연선 지음 / 놀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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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방면에서 다양한 장르의 글을 잘 쓴다는 박연선 작가의 한국형 코지 미스터리 <여름, 어디선가 시체가>를 읽었다. 여름에 자고 나니, 아침에 가을이 되었더라는 날씨치럼 그렇게 푹푹 찌던 폭염이 드디어 물러가고 가을이 도래했다. 그렇게 계절의 전환기로 접어드는 늦여름에 딱 맞는 재밌는 미스터리 소설로 폭염을 몰아낸 것 같아 기분이 좋다.

 

네 소녀 실종사건이라는 15년 전, 운산면 두왕리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파헤치는 수사관 역할을 방년 21세 처녀이자 삼수생 강무순 씨가 캐스팅됐다. 그녀를 서포트하는 조연 역에는 종갓집 소년 꽃돌이(유창희)와 무슨의 할매이자 폭력노파 홍간난 여사를 배치했다. 장르물이라고 해서 굳이 심각할 필요가 없다고 박연선 작가는 선언한다. 얼마든지 유쾌할 수 있다는 가능성애 도전했다는 느낌일까.

 

드라마와 영화 시나리오 작가로 일가를 일군 작가답게 마치 드라마 대사를 치는 듯 호흡이 빠르고 경쾌하다. 누군가에게는 비극으로 기억될 네 소녀 실종사건을 다임개술(타입캡슐)이라는 지난 시절에 유행했던 소재를 이용해서 외부에서 투입된 강무순이가 느슨해 보이지만 무언가 알 수 없는 비밀을 가진 이들의 이야기를 구성지게 파헤친다. 무순 역시 15년 전에, 비극의 현장에 가찹게 존재할 수 있었던 그런 상황이었지만 위기를 모면하고 할아버지의 상을 당해 홀로 계신 홍간난 여사를 위무하고 보필하라는 특명을 받고 두왕리에 잔류하게 되었다.

 

무순과 꽃돌이는 팀을 이루어 보물상자이길 바랐던 다임개술 안에 들어있던 몇 가지 단서들을 빌미로 네 소녀 실종사건에 연루된 당사자들의 운명을 한 꺼풀씩 차례로 벗겨낸다. 첫 번째 주자는 종갓집 아기씨로 만인의 연인이었던 유선희, 마을의 소문난 말썽꾼이었던 유미숙, 목사관의 둘째딸이자 무순을 잘 챙겨 주던 조예은 마지막으로 효녀로 유명했던 황부영의 과거와 현재에 박연선 작가는 소설의 포커스를 정조준한다. 문득 누군가의 생과 사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에 희비가 교차하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매 챕터의 끝에 주마등이라는 코너로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의 독백도 등장한다. 아무래도 네 소녀 실종사건의 키를 쥔 것으로 보이는 신원불명의 캐릭터의 이야기는 코지 미스터리 소설의 긴장감을 한껏 고조시키는 역할을 무난하게 수행한다. 꽃돌이 소년이 진중하게 무게를 잡는 역할을 해냈다면, 폭력노파 홍간난 여사는 그 반대편에 서서 가볍지만 두왕리 대소사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는 오지라퍼로 종횡무진 활약한다. 다수의 작품활동을 통해 캐릭터의 밸런스에 대한 감각을 익힌 덕분이라고나 할까. 지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경계선을 잘 유지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코지 미스터리답게 어쩌면 그런 균형감각이 중요했을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눈여겨 본 점 중의 하나는 다른 건 몰라도 드라마 시작하는 시간 하나는 칸트 뺨치는 정확도를 자랑하는 드라마교의 열혈신자인 홍간난 여사를 앞세운 드라마 비판이다. 천편일률적인 내용의 드라마 전개를 예상하는 홍간난 여사의 숭악한 손녀 무순도 예외는 아니다. 빤한 소재를 반복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제작진의 시청률 타령 때문이라고 해야 할까. 다시 네 소녀 실종사건이 수면 위로 드러났을 때, 두왕리를 습격한 언론에 작태에 대해서도 작가의 비판은 냉정하고 준엄하다. 그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알 권리를 두왕리 사람들이 아니라 정말 큰 비리를 저지른 정치인과 기업인들에게 추상같이 적용시키기만 해도 우리의 국격이 상승하지 않을까?

 

후반으로 갈수록 작가는 소설 곳곳에 깔아둔 밑밥에 걸린 이야기들을 주낙 낚듯이 수확한다.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원인과 결과 그리고 범인 설정이야말로 모든 미스터리가 갖추어야할 기본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꼭 꼬집어 이야기할 수 있는 결핍도 존재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참을 만한 소설의 가벼움 때문이라고 한다면 과언일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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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뒷조사 복음서 뒷조사
김민석 지음 / 새물결플러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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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새물결플러스에서 <마태복음 뒷조사>라는 책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검색하다 보니 그 전에 이미 <마가복음 뒷조사>라는 책이 먼저 출간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마침 구할 수가 있어서 어제부터 읽기 시작했다. 기독교 복음서를 웹툰으로 구현하려는 시도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다들 진중한 책읽기를 싫어하는 세대에, 웹툰이라는 접근방식이 신선했다고나 할까. 하지만, 역시나 성경이라는 큰 틀의 텍스트 안에서 맴돌기라는 전형에서 벗어나지 못한 느낌이다. 신약 복음서에 대한 전거를 전승과 구약에 의해 해석하다 보니 생길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운명이라고 해야 할까.

 

구성은 불신자의 대표선수라고 할 수 있는 사판 검사가 대중을 미혹시킨다는 이유로 복음서를 고발한다. 그러자 사판 검사의 맞수이자 예수 그리스도 시대를 증언할 수 있는 유력한 용의자로 예수 그리스도가 탔던 나귀의 68대손 하몰을 등장시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초반에 등장했던 스튜어트 변호사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는 취약 포인트가 드러나기도 한다. 아마 <마태복음 뒷조사>에 등장하려나.

 

독자는 <마가복음 뒷조사>를 읽다 보면 알게 되겠지만, 사판 검사는 불신자치고는 기독교 신앙에 대해 상당한 지식과 교리의 핵심을 찌르는 의구심을 가진 캐릭터로 등장한다. 사판 검사가 예리한 공격수라면, 성서동물원을 탈출한 나귀 하몰은 사판 검사의 예리한 창을 교묘하게 방어해내는 소방수 역할이다. 김민석 작가가 구상한 취조 스타일도 마음에 들었지만, 법정 드라마로 엮어냈어도 재밌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초기 기독교의 두 스타였던 바울과 베드로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해서 바울 서신보다 뒤늦게 쓰인 복음서의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는 와중에, 로마의 통치에 대항해서 일어난 유대전쟁이 비슷한 시기에 있었다는 사실도 깨닫게 됐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사후에 특별히 기록된 문헌도 없이 예수 그리스도가 행한 이적이 자세하게 전해지게 되었느냐는 사판 검사의 초반 공격에 나귀 하몰은 당시 유대에서 행해지고 있는 공동체 구전전승이 해결책이었다고 답한다. 기록문화에 앞서 구전전승의 신빙성에 무게중심을 두었다고 해야 할까. 요즘 같이 디지털 문화가 발전한 시대라면 각종 동영상들이 대신하겠지만 말이다.

 

<마가복음 뒷조사>의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 생존 당시에도 제자들이 이해할 수 없었던 수많은 비유(parable)의 현대판 해석에 집중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작가가 보여주는 이집트로부터의 탈출, 바빌론 유수에서 벗어난 유대인들의 모습이 궁극적으로 가르키는 지점이 기독교 교리의 핵심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라고 설명한다. 기존의 기독교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몰라도 기독교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과연 이해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 기독교 웹툰은 기독교 초심자라기 보다 만화 후반에 소개되는 아련한 과거를 가진 사판 검사처럼 가나안 성도들을 위한 게 아닐까.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제국의 통치로부터 유대를 해방한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이 생각하고 있던 정치적 해방 곧 구원과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삶을 통해 구현하려고 했던 구원 사이의 간극은 너무나 달랐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민족으로부터도 그리고 당연히 로마 황제의 버금가는 세속의 권력을 가진 ‘신의 아들’일지도 모른다는 개념 때문에 로마인들로부터도 환영받지 못했고, 기득권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 들였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 제사장들과 로마 총독 빌라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 위에서 처형시키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십자가 처형과 이어지는 부활이야말로 기독교 구속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점은 부인할 수가 없을 것이다. 다만 저자는 이런 일련의 과정들을 설명하는 데 있어, 다시 (구약) 성경이라는 텍스트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태생적 문제점을 가고 있다는 점이 아쉬웠다. 성경, 복음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인용해야 한다는 점이 아이러니라고 해야 할까.

 

솔직히 읽기 전에는 공관복음 중에 가장 먼저 저술된 <마가복음> 저술에 관련된 무언가 새롭고 파격적인 이야기들을 기대했었는데 그런 부분 대신 교리와 비유 설명이 주를 이루고 있어서 좀 지루해졌다. 사판 검사가 저명한 유대 랍비 저리가라할 정도로 신학적 지식으로 무장한 나귀 하몰의 이야기에 교화감동될 거라는 클리셰이에 가까운 설정은 충분히 예상 가능하지 않았던가. 뭐랄까 ‘복음 전파’라는 작가의 기획의도와 취지를 따르지 못하는 무언가 부족한 구성이라고 해야 할까. 그리고 복음서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현대인들의 고민과 오늘날 교회가 반성해야 할 지점 등에 대한 부분이 너무 간략하게 처리된 것 같아 아쉽다. 그런 점에서 스튜어트 변호사와 콩이 등장하는 후속편이라고 할 수 있는 <마태복음 뒷조사>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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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읽는 사람에게 영원한 저주를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42
마누엘 푸익 지음, 송병선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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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아는 지인에게 부탁을 해서 마누엘 푸익의 <이 글을 읽는 사람에게 영원한 저주를>의 영문 번역판을 구해서 읽기 시작했다. 물론, 모국어가 아닌 다른 나라 말로 된 책을 읽기는 쉽지 않았고 도중에 포기해 버렸다. 지난주에 마누엘 푸익의 이 쎅시한 제목을 가진 책이 출간예정이라는 말을 듣고 심히 기뻤다. 그래서 작가의 바이오그래피를 정리해 봤고 그가 쓴 8편의 소설 중에서 내가 읽은 책이 몇 권이나 되는지 봤더니 <거미여인의 키스>가 전부였다. 그래서 중고서점으로 달려가 <조그만 입술>을 구해서 읽기 시작했는데 이 소설 역시나 매혹적이었다. 한 때 할리우드 키즈로 영화감독을 꿈꾸던 작가의 소설을 읽는 재미는 더 바랄 게 없을 정도였다. 오늘 지난 주말에 주문한 책이 도착했고, 기갈 들린 사람처럼 허겁지겁 책에 몰입했다.

 

푸익의 대표작 <거미여인의 키스>처럼 <이 글을 읽는 사람에게 영원한 저주를>에도 두 명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아르헨티나 출신으로 밀레니엄 캐피탈 뉴욕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부유한 노인네 라미레스 씨와 그를 간호하는 36세의 남자 래리(로런스 존)가 주연을 맡았다. 작가가 사랑한 영화처럼 수많은 다이얼로그로 이루어진 소설은 일상적인 대화를 통해 상대를 알아가고 이해해 가는 과정이 느릿한 속도로 전개된다. 어쩌면 이 소설도 연극 무대에 올리기에 아주 적합한 그런 작품이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유년시절부터 할리우드 영화를 즐겨본 푸익은 비록 자신의 꿈처럼 영화 연출을 담당하는 감독은 되지 못했지만, 자신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소설에 영화기법을 담아내는 것으로 자신의 꿈을 이뤘다. 뉴요커답게 자신의 프라이버시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노인 요양사 래리는 대화를 통해 무시로 자신의 개인영역에 침입하려는 라미레스와 충돌한다. 하지만 수년간의 실업자 생활 때문에 살인적인 뉴욕의 물가를 감당할 수 없었던 래리는 라미레스의 휠체어를 밀어 주고 자신의 모국어인 영어로 수다를 떠는 손쉬운 돈벌이를 마다할 수가 없었고, 서로 다른 삶의 궤적을 그려온 두 개인은 서로에 대해 알아가게 된다.

 

 

푸익은 허위와 진실이 교차하는 래리와 라미레스의 수많은 대화를 통해 주인공들의 면면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동시에 무엇이 과연 진실인지 알 수 없게 만들어 버렸다. 시대적 배경은 1978년, 라미레스의 고국 아르헨티나에서는 다른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처럼 가혹한 군부통치가 진행 중이었고 투옥과 연이은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던 라미레스는 부유한 형의 후원으로 석방된 뒤 뉴욕에서 고문 후유증을 치료 중인 것으로 추정된다. 아내와 아들 그리고 며느리는 군부의 폭탄 테러로 모두 죽었다. 아니 그런 것으로 보인다. 기억상실증에 시달리는 것으로 라미레스의 말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두서없이 이어지는 두 주인공들의 대화는 종교와 권력, 연애, 사랑에 이르는 광범위한 주제를 아우른다. 신경쇠약과 우울증에 시달리는 라미레스가 래리가 들려주는 대화의 디테일에 지나치게 집착한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도대체 무슨 피자를 먹었는지가 왜 중요하다고 생각한 걸까.

 

라미레스는 그나마 나은 편이다. 뉴욕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한 박사로 역사학 교수 자리도 지냈다는 래리의 진술은 더 오락가락한다. 미국 역사상 첫 패전으로 기억될 베트남전이 끝난지 고작 3년 밖에 안된 상황에서, 래리는 양심적 병역기피자였노라고 또 어떤 날에는 해병대로 2년간 베트남에 파병되었다는 말로 독자를 현혹시킨다. 라미레스를 추잡한 관음증 환자라고 비난하면서 자신의 성생활에 관련된 이야기를 서슴지 않기도 한다. 라미레스를 간호하는 미모의 간호사와의 썸타는 관계부터 시작해서 자신의 실패한 결혼생활, 아버지와의 불화에 이르는 자신의 이야기들을 끊임없이 늘어놓지만 어디까지나 사실인지 래리가 전달하는 주관적이고 파편화된 정보만으로는 도저히 가늠할 수가 없다. 이 지점이야말로 푸익이 소설의 제목에 언급한 것처럼 “이 글을 읽는 사람에게 영원한 저주”가 되는 게 아닐까.

 

 

래리와 라미레스의 대화에 주목하다 보면 한 가지 두 사람의 공통점을 발견하게 된다. 지식인으로 각자의 고국에서 망명자 신세라는 점이다. 마르크스주의자이자 노동조합 지지자인 라미레스의 처지야 이해할 수 있지만, 미국에 사는 뉴요커 래리의 경우는 어떨까? 아무런 명분도 없던 베트남전에 대한 격렬한 반전운동으로 결국 철군에 성공했지만 1970년대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미국 사회의 냉담한 반응을 래리를 통해 푸익은 재현해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다가오고 있던 신자유주의 시대의 도래를 앞두고 보수화되고 있던 미국 내에서 마르크스주의자이자 노조활동가 출신 교수는 어디에서고 환영받지 못하는 처지였다. 그렇기 때문에 지식인 래리는 실업자나 바텐더, 정원사, 웨이터나 노인 요양사 같은 비정규직 일자리를 전전할 수밖에 없었던 게 아닐까. 소설 속에서 래리와 라미레스의 대화는 두 개인이 그리는 삶의 궤적을 추적하는 퍼즐 게임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편, 심리학에 관심이 많았던 푸익 작가가 심리상황극과 유사한 상황을 매개로 방어기제가 작동 중인 상대방의 심리 저변을 돌파해 보려고 노력하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소설의 전반부에서 래리와 라미레스의 비등해가는 갈등을 변주하며 긴장을 유도했다면, 후반부에서는 좀 더 중요한 래리의 프로젝트가 등장한다. 그것은 바로 라미레스가 옥중 수기라는 메모를 통해 비밀리에 수행한 작업을 해독하는 과정이다. 어쩌면 이 프로젝트를 통해 래리는 자신이 원래 속해 있던 대학사회로 복귀를 도모했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소설을 읽다가 래리가 라미레스가 철저하게 방어기제를 발휘해서 숨기고 있는 어떤 비밀을 밝히려고 투입된 CIA의 스파이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긴 요즘 스릴러 비밀첩보물을 너무 많이 본 모양이다. 그리고 또 라미레스의 과거를 집요하게 파헤치는 래리의 대사에서는 문득 로베르토 볼라뇨의 <칠레의 밤>이 연상되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전반에 비해 후반으로 갈수록 이 글을 읽을 사람들에게 내려질 저주를 추동하는 원심력이 떨어진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누엘 푸익의 <이 글을 읽는 사람에게 영원한 저주를>은 제목만큼이나 매력적인 소설이지만, 텍스트 자체에 대한 해석은 정말 저주에 가까울 정도로 난해하다고 결론을 내리고 싶다. 동시에 자신의 작품세계 완숙기에 접어든 작가의 자신감이 엿보이기도 했다. 자신이 가진 최대의 내공을 시전해서 쓴 작품이라고 해야 할까. 이번 여름에 프리모 레비를 읽은 것처럼, 이번 가을에는 마누엘 푸익에 도전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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