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하겠습니다
이나가키 에미코 지음, 김미형 옮김 / 엘리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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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보고서, 아사히신문사에서 잘 나가던 저널리스트의 일탈 정도로만 생각했었는데 책을 다 읽고 나서 나의 선입견이 틀렸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회사 인간이 넘쳐 나는 세상에, 대책 없이 돈보다 시간과 자유를 찾아 나선 아프로 헤어를 한 50대 중년 아줌마의 삶에 대한 초상이라고나 할까. 어쩌면 회사 인간일 수밖에 없는 현대인의 비애를 담담하게 그려낸 한 편의 칼럼 같다는 생각도 불쑥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현실감을 잃지 않으면서 동시에 재밌다는 사실도 빼놓을 수 없었고.

 

모든 일에는 발단이 있기 마련이다. 엘리트 코스를 거쳐 살아온 이나가키 씨는 비교적 안정적인 신문사 데스크 업을 과감하게 때려치우고, 아무 것도 보장되어 있지 않은 거친 황무지를 선택했다. 시작은 출입처 경찰들과 동료들이 어울렸던 노래방이었다고 했던가. 가발 하나로 인생이 뒤바뀌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는데 그녀에게는 그게 반전의 기회였던 모양이다.

 

작가는 대다수 월급쟁이의 대표선수가 되어 돈과 승진이라는 두 수레바퀴 속에서 자유와 시간을 자발적으로 회사에 반납한 대신, 물질적 보상으로 받은 돈으로 흥청망청하는 소비를 즐겼노라고 담담하게 고백한다. 물론 그것도 일본 사회가 고도의 성장기를 누릴 시절에는 모두에게 행복한 일이었으리라. 하지만, 달도 차면 기우는 법 어디 세상사가 다 그런가. 자본주의의 기본이 불황과 호황인 것처럼 세상사도 마찬가지였으리라. 게다가 신문사에서 드문 여성으로서 승진에서 밀리다 보면 자신이 차별 받고 있는 건 아닌지 하는 자괴감에 시달릴 수도 있다고 전한다. 그렇기에 어쩌면 더더욱 불필요한 소비에 매달리게 된 게 아니었을까? 다 입지도 못할 옷들을 사대고, 맛집 투어를 하는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퇴사를 결심하고 돈 없는 라이프스타일을 결정한 순간 불필요한 소비를 줄여야겠다고 결심했던 모양이다 작가는. 그 후 지은이는 소비를 줄이는 게 문제가 아니라, 아예 사용하지 않아야 아낄 수 있다는 돈오의 경지에 오르게 된다. 대량생산 대량소비 시대에 굳이 없어도 되는 물건들을 생산해 내고, 소비를 부추기는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신랄한 비판도 이어진다. 아마 그런 돈오의 결정적 계기는 오사카 데스크에서 잘 나가다가 시코쿠의 시골로 전근하게 되었던 게 아니었을까. 우동 현에서 100엔짜리지만 행복하게 한 끼를 때울 수 있다는 자족감과 더불어 모든 것의 기준이 우동 몇 그릇으로 환전되는 세상 이야기가 정말 색다르게 다가왔다.

 

대형마트에서 비용이 재래시장보다 상대적으로 더 들긴 하지만 언제나 먹을 수 있는 먹거리들을 사오는 것과 제철이 아니면 구경할 수 없는 재래시장에 대한 비교는 전해 주는 바가 적지 않았다. 그리고 보니 어제 저녁 냉장고에서 고이 썩어가고 있던 상추에 대한 아스라한 추억이 떠올랐다. 결국 내 뱃속으로 가는 대신 음식물 쓰레기 통으로 직행하게 될 운명의 상추를 나는 왜 샀을까? 편리라는 이름으로 굳이 사용하지 않아도 될 돈을 허공에 뿌리면서 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도 들었다. 찬바람이 들어야 비로소 볼 수 있다는 무느님에 대한 작가의 찬양에 그래서 더 공감이 갔을 지도 모르겠다.

 

물론 <퇴사하겠습니다>에는 이상적인 이야기들만 기재되어 있는 건 아니다. 퇴사를 결정하게 되면서 부딪혀야 하는 실제적인 이야기들도 실려 있다. 우선 회사가 부담해 주던 국민연금과 건강보험부터 시작해 보자. 28년간 장기 근속한 덕분에 적지 않은 퇴직금을 받게 되었지만, 국가에서 세금으로 자그마치 1/7이나 띠어 간다는 이야기에 기겁했다. 회사 인간을 돌보아 주던 회사가 보호막을 거두자마자 국가가 개입하지만, 막상 그동안 꾸준히 부어온 고용보험의 혜택을 받기란 난망하다. 우리도 마찬가지지지만, 독립 후에 재취업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아마 받을 수 없는 모양이다.

 

가끔 회사로 걸려 오는 신용카드 회사의 재직 확인의 경우처럼, 따박따박 월급을 받아 가는 월급쟁이 회사 인간에 대한 신용보증을 회사가 해왔지만 이나가키 씨처럼 제 발로 회사를 뛰쳐나간 사람에겐 그런 일도 가능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퇴사하기 전에 신용카드 발급 받으라고 했던가. 살인적인 물가로 유명한 도쿄에서 방 구하기는 또 어떤가. 월세를 떼 먹힐까봐 보증인이 없는 경우에는 신용보증회사를 이용하라고 하는데 그것도 역시 비용이 든다. 이놈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 없인 무엇 하나 되는 일이 없다. 돈을 회사로 바꾸어도 무방할 것 같긴 하지만.

 

이나가키 씨는 회사를 그만 둔 후에 일이 하고 싶었다고 썼다. 그리고 보니 일이 싫어서 회사를 그만 둔 건 아니었다고 강력하게 어필한다. 다만 회사 소속으로 월급을 챙기면서 글을 쓰던 시절과 프리랜서 작가에게 원고 의뢰를 하는 건 하늘과 땅 차이라고 냉철하게 지적한다. 되짚어 보면, 자기가 데스크를 담당하던 시절에도 다른 프리랜서 저널리스트들에게 그렇게 하지 않았던가. 바운더리 안에서 볼 적에는 실감하지 못했던 일들이 바운더리 밖으로 쫓겨났을 때에는 더 큰 차이로 다가오는 게 아닐까. 그것조차도 담담하게 받아 들여야 한다고 이나가키 씨는 회고한다. 다 맞는 말이니 반박의 여지가 없었다.

 

어느 순간 나도 이나가키 씨치럼 돈보다 시간과 자유를 위해 그런 결단을 내릴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도달하게 되었다. 아마도 아니겠지. 당장 부양해야 하는 가족과 돈이 없으면 유지할 수 없는 자잘할 것들 때문에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 없으리라.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이나가키 씨처럼 신나게 돈을 쓰며 사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뭐 사는 게 다 그렇지 안 그래? 문득 <퇴사하겠습니다>가 정말 퇴사를 심각하게 고민하는 이들에게 어떻게 읽히게 될지 궁금해졌다. 나하고는 아마도 생각이 다르겠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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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1-24 15: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우리나라에 ‘소소한 지름’, ‘탕진잼’이 유행하더군요. 저렴한 가격의 물건을 구매하는 것을 즐기는 겁니다. 저 같은 경우는 새 책보다는 출간연도가 꽤 지난 책들을 많이 샀어요. 아무래도 헌 책의 가격이 저렴하니까요.

레삭매냐 2017-01-24 17:28   좋아요 0 | URL
저도 비슷합니다... 탕진잼이라~

이번에 이사하면서 책장에 책이 한가득하다는
걸 다시 한 번 깨달았으면서도, 또 책을 질렀네요.

요즘 관심있는 존 버저 아저씨의 책들을 두 권
주문했지요. 이것도 나름 탕진잼이라고 할 수 있
을까요? ㅋㅋ
 
토니와 수잔 버티고 시리즈
오스틴 라이트 지음, 박산호 옮김 / 오픈하우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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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영화 <녹터널 애니멀스>가 개봉했다. 영화 <싱글맨>으로 감독 데뷔를 한 탐미주의자 톰 포드 감독의 두 번째 영화로 오스틴 라이트 교수가 1993년에 발표한 다섯 번째 소설을 영화화한 것이라고 한다. 아쉽게도 19금 영화라 그런지 상영관 수도 다른 영화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고, 상영 횟수도 적은 상영관에서는 달랑 한 번 정도다. 내가 사는 곳 근처에 있는 영화관 상영시간은 새벽 12시 반이다. 보라는 건가 말라는 건가. 생전에 오스틴 라이트 교수의 <토니와 수잔>은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고 하는데 사후에 영화화되고 다시 읽히는 걸 보면 역시 걸작은 언제라도 재평가 받게 되는 운명이라고 해야 할까. 소설 표지도 에이미 아담스가 주연을 맡은 영화 포스터를 사용했다.

 

500쪽 가까운 분량이지만, 한 번 빠지게 되면 헤어날 수 없는 그런 마력을 가진 소설이다. 우선 <토니와 수잔>의 구성은 요즘 잘 볼 수 없는 액자식 구성으로 되어 있다. 수잔 모로의 전 남편 에드워드 셰필드가 아직 출간되지 않은 자신의 역작 <녹터널 애니멀스>(야행성 동물)이라는 기묘한 제목의 원고를 보내면서 소설은 시작된다. 시카고의 부유한 여피로 조용하게 살고 있는 수잔에게 에드워드는 어쩌면 찌질한 남편의 초상일지도 모르겠다. 현재 남편 아놀드는 심장전문의로 유명병원 이사 면접을 보기 위해 뉴욕 출장 중이다. 그런 그녀에게 에드워드가 보낸 원고는 작은 파문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수잔의 일상이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그런 평온한 일상이라면, 소설에 등장하는 토니 헤이스팅스(분명 에드워드의 분신처럼 보인다)의 재앙은 유혈과 폭력을 동반한 비극이다. 메인 별장으로 떠나던 길에 펜실베이니아 모처의 주간고속도로에서 동네 불량배 삼인조와 사소한 시비가 붙게 되고, 대학 수학교수 출신의 인텔리 가장의 아내와 딸을 불량배들에게 납치되어 비극적인 죽음을 맞게 된다. 과연 토니는 이런 비극을 감당해낼 수 있을까?

 

토니의 재앙이 거친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면, 수잔의 삶 역시 그렇게 순탄하지만은 않다. 3년 전, 남편 아놀드는 올해 49세의 수잔보다 훨씬 젊은 비서 린우드와 불륜을 저질렀다. 시카고 인근의 전문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치는 지식인 수잔은 두 번째 파경을 감당할 준비가 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니,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의 가정을 지키겠다는 자신의 의지에 반하는 결정을 내릴 수 없었던 걸까? 겉으로 완벽해 보이는 수잔과 아놀드의 가정에도 미묘한 균열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오스틴 라이트 버금가게 그런 삶의 균열을 포착해 내는데 일가견을 보여 주었던 제임스 설터 작가의 문학세계가 떠올랐다.

 

수잔의 현재와 소설 속 토니의 과거가 계속해서 교차하면서 소설 <토니와 수잔>의 긴장은 고조된다. 액자소설 <녹터널 애니멀스>의 막간마다 현재의 수잔은 과거 자신과 토니의 러브스토리를 들려준다. 15세 때, 에드워드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죽고 수잔의 부모는 잠시 에드워드를 거두기도 했지만, 수잔은 자기 가정의 프라이버시가 침해당한다는 이유로 그를 경원했던가. 그 뒤 8년이 지나 시카고에서 영문학 석사과정을 밟고 있던 수잔과 로스쿨에 진학해서 인권 변호사의 꿈을 꾸던 에드워드는 우연히 만나 잠재워 두었던 사랑을 꽃피게 된다. 결국 결혼에 골인한 두 남녀에게 에드워드가 미래의 보장된 성공을 의미하는 로스쿨을 포기하고 오랫동안 꿈꿔 왔던 작가가 되겠다며, 밥벌이를 모두 수잔에게 맡기고 자아를 찾겠다며 숲 속 오두막으로 떠나면서 결혼생활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때마침 같은 아파트에 살던 유부남 아놀드 모로가 고기 써는 칼을 휘두르며 미쳐 가는 아름다운 셀레나와의 결혼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나머지 부분은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자신의 이상적 결혼을 불륜으로 망쳐 버린 수잔이 수많은 고민 끝에 결국 에드워드와의 말다툼을 꼬투리 잡아 자신의 불륜을 고백하는 장면은 정말 압권이었다. 사랑에서 비롯된 결혼이 어떻게 파국으로 치닫게 되는지에 대한 오스틴 라이트 식의 전개방식이 소설의 DNA를 디테일하게 잡아내기로 유명하다는 영문학 교수님답다는 생각이 번쩍 들 정도로 말이다.

 

수잔은 자신의 불륜과 이혼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자신의 전문가적 능력을 발휘해서 애써 에드워드의 작가적 능력을 폄하한 것처럼 보인다. 자신의 냉혹한 비평에 에드워드가 자살하지 않을까 염려하면서도, 한 때 자신이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남자보다 현재 자신의 평온한 삶이야말로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까지 지켜야 한다는 결연한 의지를 비치면서 말이다. 그런데 에드워드가 쓴 걸작 <녹터널 애니멀스>를 읽으면서, 상대적 빈곤감에 시달리게 된다. 로스쿨에 다니던 미래의 촉망받는 변호사에서 작가 지망생으로 그리고 다시 생업을 위해 보험업에 투신한 자본주의자가 문학 소비자인 자신은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그런 작품을 썼다는 사실을 그녀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25년 동안 갈고 닦은 교육자이자 지식인의 인지부조화라고나 할까? 수잔은 안온한 자신의 삶에 파문을 던진 에드워드의 미완성 원고를 읽으면서, 과연 “인생에는 단순히 책을 읽는 것만으로는 바꿀 수 없는 것들이 존재”한다는 작가의 주장에 전적으로 공감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소설 <토니와 수잔>은 수잔의 그런 내적 갈등을 섬세하게 다루면서, 동시에 사랑하는 아내와 딸을 잃고 나락으로 추락한 토니 삶의 궤적도 놓치지 않고 추적한다.

 

소설 속 소설에서 토니의 조력자로 등장한 바비 안데스 부서장의 역할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무력한 지식인의 상징이자 수잔으로 대치해 봐도 무방할 것 같은 토니를 끊임없이 자극하면서 아내와 딸에 대한 복수를 유도하는 캐릭터라고 해야 할까. <녹터널 애니멀스>의 엔딩 부분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바비 안데스에 비해, 무능한 남편 에드워드의 모습은 상대적으로 왜소하게 다가왔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가정을 지키지 못한 남자의 모습이 오롯하게 구현되는 장면도 일품이었다. 한편, 로라와 헬렌을 레이 마커스 일당으로부터 구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수치심과 굴욕감에 시달리는 토니의 모습은 현실 세계에서 에드워드와의 파경을 막을 수 있었던, 아니 의도적으로 막지 않았던 수잔의 그것과 기묘하게 겹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가 의도한 이런 소설적 구도의 탁월함에 다시 한 번 감탄했다. 역시 놀랍군. 대가라면 이 정도 실력을 갖추어야 한다고 소설 <토니와 수잔>은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잠깐 본 영화 <녹터널 애니멀스>는 디테일에서 사뭇 소설 <토니와 수잔>과 결을 달리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우선 소설의 공간적 배경은 시카고에서 LA로 이동되었고, 주간고속도로의 재앙 역시 펜실베이니아가 아니라 텍사스였다. 수잔이 에드워드에게 받은 원고를 뜯다가 손을 베는 장면도 의미심장했지만 소설에서는 등장하지 않는 장면이었다. 사실 소설의 시작은 에드워드가 자신의 소설에 부족한 무엇인가를 찾아달라는 부탁으로 시작됐지만, 소설이 진행되면서 그다지 영향력을 가지지 못하게 되었다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패션 디자이너 출신 감독인 톰 포드는 탐미주의자답게 영상미 하나는 뛰어나게 연출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기회가 된다면 영화도 보고 싶지만, 지금으로선 불가능하지 싶다.

 

오스틴 라이트 교수는 지금으로부터 14년 전에 작고했다고 한다. 작가는 생전에 모두 8편의 소설들을 발표했는데 국내에는 <토니와 수잔>이 아마 처음으로 소개된 것 같다. 앞으로 작가의 다른 책들도 소개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역시나 문학의 세상은 광활하고 여전히 모르는 작가들이 넘실거리는 그런 대양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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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로마사 1 - 1000년 제국 로마의 탄생 만화 로마사 1
이익선 지음, 임웅 감수 / 알프레드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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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도착순서 때문에 이익선 작가가 쓰고 그린 <만화 로마사>2권부터 읽게 되었다. 책의 서문에는 감수를 임웅 선생이 맡았는데 왜 21세기를 사는 우리가 로마사를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이 들어 있었다. 보통 사람은 경험에서 배우고, 현명한 사람은 역사에서 배운다는 말이 있다는데 현명해지기 위해 그리고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에겐 역사를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감수자는 어느새 로마사하면 모두가 알게된 시오노 나나미의 영웅 엘리트주의에 대한 냉정한 비판도 마다하지 않는다. 얼토당토않은 국정교과서의 등장으로 가짜 역사가 판을 치는 세상에, 우리는 고대인의 지혜를 빌릴 정도의 수준이 되었는가 싶어 기분이 찜찜해졌다.

 

모두가 알다시피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가 로마를 건국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그전에 이미 아이네이아스라는 트로이전쟁의 망명자가 알바롱가에 원시 로마를 세웠다는 전설이 구전으로 전승되어왔다. 로마 이전에도 역사가 있었기 때문에 서양 문화의 원류가 되는 그리스 미케네 문명을 필두로, 예의 미네케 문명을 초토화시키고 그리스에 암흑시대를 가져온 도리아인들의 내습 그리고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대결로 유명한 도시국가 시절도 빠지지 않고 저자는 언급하고 있다. 당시 지중해의 패권을 다툰 두 세력은 그리스와 페니키아인들이 북아프리카 지금의 튀니지 부근에 세운 카르타고였다. 그에 비하면 라틴인들의 로마는 조그만 부락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대전쟁에서 패한 망명자들이 세운 소국 로마가 세계적인 대제국으로 성장하게 된 배경에는 어떤 진실이 숨어 있는 걸까. 로마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로마의 관용(클레멘티아)과 포용력을 그 첫 번째 이유로 꼽을 것이다. 고대사회에서 공동체의 배타성은 필연일 수밖에 없었다. 오로지 혈연으로 구속된 관계만이 온통 적대적인 환경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방인들에게 기본적으로 배타적인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테베레 강변에 건국한 도시국가 로마는 가진 게 아무 것도 없었다. 자원도, 고대 시대에 국가경영에 필수적인 인력도 턱없이 부족했다. 그렇게 때문에 한때 적이었던 상대까지도 생존을 위해 포용할 수밖에 없는 그런 절박한 상황이었다. 그런 소국 로마의 약점이 대제국으로 가는 과정에서는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큰 장점으로 작동했다는 것이다.

 

로마의 초대왕이었던 로물루스는 생산인력의 재생산에 필수적인 여인들을 이웃 사비니 부족에게서 약탈하는 방식으로 처리했다. 훗날 로마의 특징을 이루게 되는 무력에 의한 제압이 하나의 국가적 방식으로 채택되는 순간이었을까. 사비니 여인의 납치 사건은 관용과 포용을 상징하는 로마의 한 특징으로 자리 잡게 되었노라고 작가는 분석한다. 이 사건은 훗날 르네상스 시대 혹은 근대에 이르기까지 회화의 한 가지 인기 주제가 되어 니콜라 푸생이나 자크 루이 다비드 같은 화가들에 의해 재탄생하기도 했다. 그들의 그림을 보면, 로마 시대의 복원보다 당대의 상황에 맞는 복식으로 재창조했다는 점이 눈에 띄기도 한다.

 

건국 이래 250여 년 동안 로마는 왕정시대였다. 일종의 부족연합체였던 로마의 원주민이라고 할 수 있는 라틴인에, 그들이 주변에서 납치해온 사비니 계 사람들이 다수를 차지했다. 로마 원주민들은 농업에 주로 종사했는데, 훗날 로마에 새로 합류하게 되는 에트루리아인들은 상공업에 능통한 상인과 기술자들이 많았다. 거의 전쟁을 날을 지새우다시피 하는 상황에서 병장기를 만들 에트루리아인들의 존재는 절대적으로 필요했고, 다수 공공건축물의 수요 역시 그들의 도움을 필요로 했다. 이렇게 구성된 다민족 국가 초기 로마의 모습은 어느 사회나 그렇듯, 서로 다른 배경을 지닌 라틴인과 사비니인 그리고 에트루리아인 간의 갈등을 잉태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로물루스의 뒤를 이어 추대에 의해 두 번째 로마 왕이 된 철학자 같은 사비니계 누마 폼필리우스는 로마인들 간의 갈등을 잠재우고 사회적 통합을 이루기 위해 종교를 이용하기에 이른다. 훗날 기독교를 국교로 삼기 전까지 로마 사회는 기본적으로 열린 다신주의 시스템이 대세를 이루고 있었다. 로마의 상징처럼 된 야누스 신전을 세우고, 왕이 스스로 대신관(폰티펙스 막시무스, 공화정 말기 카이사르도 대신관을 역임했다)이 되어 국가 제의를 주관하면서 무례하고 난폭한 성정의 로마 시민 교화에 나섰다. 다시 라틴계 툴루스 호스틸리우스가 3대 왕위에 올라 라틴 원조국가라고 할 수 있는 이웃 알바롱가를 복속시키고 로마인으로 받아 들여 본격적 세력 확장에 나선다.

 

4대 왕 앙쿠스 마르키우스는 테베레 강 어귀의 오스티아를 정복하면서 비로서 지중해로 나가는 관문을 여는데 성공했다. 그의 시대에 등장한 에트루리아인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는 이방인으로 선거를 통해 왕위에 오르는데 성공한다. 여기서 다시 한 번 다른 사회에서라면 처음부터 불가능했던 이방인 출신 왕의 등장이 로마에서는 가능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하지만 5대왕부터 마지막 왕까지 모두 에트루리아인들이 왕위를 독식하면서 나머지 라티인과 사비니인들의 불만도 비등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비교적 선정을 펼치던 타르퀴니우스는 선왕 앙쿠스의 아들들에게 암살당하고, 노예 출신이라고 알려진 세르비우스 툴리우스가 타르퀴니우스 미망인의 기지로 왕위를 계승하게 된다. 그후 44년 동안, 6대 왕 세르비우스는 외적의 침입을 물리치고 성벽을 쌓아 로마의 안전을 도모했고, 인구조사를 통해 전쟁에 필수적인 병력 무장한 시민들의 숫자를 파악한 획기적인 군사개혁 등의 선정을 베풀어 로마 시민들의 인기를 끌었다.

 

문제는 막장 드라마 주인공 같은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의 등장이었다. 연로한 장인 왕 세르비우스를 죽음에 몰아넣으며 왕위에 오르는 막장극을 연출한 희대의 악당은 공포 정치와 숙청 같은 정적 제거라는 방식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했다. 신전 건축 같은 대규모 공사로 시민들에게 노역을 부과하면서 원성을 쌓아갔다. 막장 드라마의 압권은 타르퀴니우스의 망나니 아들 섹스투스의 루크레티아 성폭행 사건으로 결국 왕정의 몰락을 가져왔다. 저자는 현실성이 떨어지는 예의 사건보다 경제침체기에 타르퀴니우스의 통치에 불만을 품은 로마 시민들의 자신들의 권리를 되찾고, 왕의 추방시킨 사건이라고 분석한다.

 

<만화 로마사> 1권에서 다룬 내용들은 실제 역사라기 보다, 아무래도 후손들에 의해 미화된 전설 혹은 전승에 가까운 이야기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느낌을 받았다. 어쨌든 거시적인 차원에서 로마 건국에 대한 이야기들을 살펴봤고, 로마 왕정 초기 시대의 문제점들과 갈등을 신생국 로마가 어떤 방식으로 현명하게 풀어나갔는지 그런 흐름을 주도한 정치 지도자로서 왕들에 대한 모습 그리고 왕정 폐지라는 폭력적인 방식으로 전개된 공화정의 대두에 살펴 볼 수가 있었다. 로마사라는 대항해의 산뜻한 출발이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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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
존 버거 지음, 강수정 옮김 / 열화당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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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알게 되었는데 열흘 전, 이 책의 저자인 존 버저 선생이 영면에 들어가셨다고 한다. 작가 생전에 그의 책은 몇 권 가지고 있었지만 한 권도 읽지 않고 있다가, 돌아 가셨다고 하니 부리나케 고인의 책을 뒤적거리게 됐다. 서문에 나온 대로 모두가 잊어가는 신자유주의판 자본주의의 총아 이윤이 유일한 추구해야할 욕망이 되어 버린 시절에 망자에 대한 이야기가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는데, 그런 이야기를 하신 분이 막상 그 세계에 들어갔다는 전언에 다시 한 번 인생무상을 느끼게 된다.

 

소설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은 세계 각국을 나그네처럼 부유하는 저자가 스스로 ‘파쇠르’(passeur: 사공 혹은 밀수꾼, 안내자)가 되어 포르투갈의 리스본에서 출발해서 스위스의 제네바 그리고 폴란드의 크라쿠프로 독자를 인도한다. 자전적 스타일의 소설은 먼저 첫 번째 기착지로 리스본을 선택했다. 대항해 시대 브라질과 모잠비크 같은 거대한 식민지를 거느렸던 세계의 중심 포르투갈이 어쩌면 리스본을 강타한 대지진을 변곡점으로 삼아 자본주의 산업혁명에 동참하지 못하면서 쇠락해 갔다는 묵시적 예언이 등장하기도 한다. 현지에 가보지 않은 사람은 도저히 알 수 없는 그런 분위기를 전달하면서 존 버저 작가는 리스본의 거리들을 부유한다. 예상하지 못했던 곳에서 돌아가신 어머니와 해후하는 장면에서는 망자에 대한 작가 나름의 추모의 염(念)이 읽히기도 했다. 아무래도 특이한 소설이라는 점에는 동의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소설의 어디에선가 어머니가 즐겨 쓰시던 “이젠 너무 늦었어!”란 상투적 표현이 어떤 사건에 대한 지칭이 아니라 시간이 접히는 방식, 다른 표현으로는 구원할 수 없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가르는 시간의 주름에 대한 것이라는 부분을 읽고는 가히 충격에 빠졌다. 어쩌면 소설가, 작가의 임무는 바로 평범한 일상에서 이런 심오한 사유를 이끌어낼 수 있는 문장을 만들어낼 수 있는 전문기술가란 말인가. 대가가 달리 대가의 대접을 받는 게 아니었군. 어디선가는 세상에 헛소리를 쓰는 일이 너무 많다고 투정하는 아들에게, 지금 그걸 어떻게 알 수 있냐고 다만 자신이 거짓말을 쓰는지 아니면 진실을 쓰는 지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구분해야 한다고 훈수두는 부분도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그걸 혼동하면 안된다고 망자는 준엄하게 아들을 꾸짖는다. 소위 말빚을 지고 사는 글쟁이라면 깊이 새겨 두어야 할 말이라고 생각된다. 죽음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었고, 우리의 존재 이유는 고치기 위해서라는 어머니의 주장은 계언처럼 가슴을 파고든다.

 

제네바에서 생을 마친 맹인 시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만남을 그린 이야기도 자못 흥미진진하다. 사실 전설적인 보르헤스에 대해서도 명성의 그림자만 밟았을 뿐, 사실 그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다. 아니 왜 아르헨티나 사람이 스위스에 가서 죽었지하는 마음에 네이버캐스트의 도움을 받아 간략한 대시인의 삶을 추적해 봤다. 국가사회주의자 페론 시절 어처구니 없는 탄압을 받기도 하고, 가계의 유전적 원인으로 실명한 위대한 시인의 일대기가 다시 한 번 나그네의 기억을 통해 욕망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도시에서 되살아난다. 칼뱅의 도시 제네바에 가보지 않았으니 존 버저의 말처럼 얼마나 모순적이고 불가사의한 도시인지 직관으로는 알 방법이 없지 않은가. 망자 어머니, 작가 그리고 작가의 딸 카티아와 찾은 보르헤스의 묘지에서의 시간은 한없이 더디게 흘러간다. 전혀 물리적이지 않은 비현실적인 설정이지만 소설을 읽으면서 존 버저의 돌아가신 어머니도 예의 묘지에 함께 있었을 거라고 상상하고만 싶어졌다.

 

다음에 등장하는 폴란드의 유서 깊은 도시 크라쿠프에서 작가는 역시 망자가 된 켄을 추억한다. 히틀러라는 미치광이 전쟁광의 초기 성공을 상징하는 폴란드에서의 블리츠크리크, 세계대전의 변곡점이 되었던 스탈린그라드에서의 역사적 패배 같은 에피소드들이 차례로 등장하면서, 거리에서 주점에서 자신에게 비평의 실체를 전수해준 뉴질랜드 사람 켄에 대한 추억들이 몽글몽글 피어오른다. 처음 만났을 때 29년이라는 세월을 초월해서, 어린 꼬마에게 자기연민을 혐오하며 지식인의 나약함을 경계해야 한다는 도덕적 명제를 전수해준 사나이. 인간이 인간을 만나 정신적 교류를 하는데 과연 그런 나이차가 중요한 걸까? 상대방을 진정한 하나의 인격체로 대한다면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얼마 전, 오래 전에 만난 동생이 그 시절에 무슨 생각으로 자신들을 대했느냐는 질문에 빙그레 떠올랐던 미소가 생각났다. 삶이 다 그런 거지.

 

*** 지금까지 당연히 출판사에 표기된 방식으로 John Beager는 존 버거라고 생각해 왔는데, 아니었다. 오늘 유투브에서 본 동영상에 의하면 존 버저는 자신의 이름을 “버저”라고 발음했다. 이보다 더 명백한 증거가 있을까? 앞으로 다시는 버거라고 부르지 않겠다. 그의 이름은 버저다.

 

마드리드에서 만난 베네수엘라 신경제 출범식을 준비하는 홍보전문가들의 분주한 모습을 옵서버(관찰자)로서 지켜보는 모습도 흥미로웠고, 프랑스 아르데슈 골짜기에서 발견된 라스코나 알타미라 동굴벽화보다 훨씬 오래 전에 크로마뇽인들이 그렸다는 신비한 쇼베 동굴벽화에 대한 설명도 인상적이었다. 결국 나는 존 버저 선생의 글을 통해 뉴저먼 시네마의 기수 베르너 헤어조크 감독이 연출을 맡은 다큐멘터리 <잊혀진 꿈의 동굴>에까지 도달하게 되었던 것이다. 현생인류보다 훨씬 존재했던 단순한 원시인들로만 알려졌던 크로마뇽인들은 동굴에서 야생곰들과 함께 거주하면서 목탄으로 놀라운 인류사적 회화의 시원을 우리에게 남겨준 것이라고 저자는 명징하게 증거한다. 그의 설명을 듣고 다큐멘터리를 통해 영상으로 만나본 동굴벽화의 실체는 현대인들의 형상화를 능가하는 수준이라 놀라고 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존 버저가 전문가의 입장에서 기술적 제작 방식까지 분석하면서 동굴인들의 회화에 접근했다면 미술문외한인 독자는 그저 경이의 눈길로 헤어조크 감독의 카메라가 인도하는 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소설의 대미를 장식하는 독일 베를린에서 출발해서 폴란드를 거쳐 모스크바에 달하는 대초원길에서 만난 폴란드 출신 이민자들의 신산한 삶에 대한 스케치는 아직 읽어 보지는 못했지만 다른 분들이 남긴 리뷰를 통해 만난 존 버저의 또다른 걸작 <제7의 인간>에서 다룬 주제들과 일맥상통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20세기 지도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조국 폴란드의 말과 동사 변화를 지키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어야 했던 역사적 사실에서부터 돈벌이를 위해 정든 고향을 떠나 차별과 무시를 감수해 가면서 기피하는 노동으로 돈을 벌고 성공해서 귀향하게 되는 이민노동자들의 삶은 이천년 전 지중해를 방황하던 오디세우스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다. 돌아온 고향은 그들이 떠나기 전의 모습과 달라졌고, 악착같이 이국땅에서 번 돈으로 자신들의 소박한 꿈을 이루려는 소망들이 나열된다. 노비 타르크라는 마을에서 벌어지는 미렉과 단카의 떠들썩하고 흥겨운 결혼식 그리고 갓 태어난 올렉까지 가세한 가정의 탄생을 역시 옵서버의 입장에서 일체의 가감없이 마치 한 편의 포토리얼리즘을 보는 듯 존 버저는 묘사했다.

 

내가 처음 만난 존 버저의 작품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과의 조우는 기이했다. 오롯하게 여행기라고도 할 수 없고, 그렇다고 해서 미술평론가로서 그의 특기만 나와 있는 것도 아니고, 유년 시절부터 시작해서 망자와의 대화, 그리고 예술평론가로서 어떤 방식으로 출발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단편적인 정보들이 두서없이 제공된다. 독자는 존 버저라는 이름의 파쇠르가 인도하는 길을 따라 헤매다 보면 어느새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게 내 모습이었다. 역시나 대가의 면모는 한 권의 책으로는 도저히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뭐 이제 시작이다. 앞으로 읽어야 할 존 버저의 책들이 많이 남아 있다는 점에 안도했다. 정유년 새해 목표 중의 하나는 존 버저의 책읽기로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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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로마사 2 - 왕의 몰락과 민중의 승리 만화 로마사 2
이익선 지음, 임웅 감수 / 알프레드 / 2017년 1월
평점 :
품절


 

 

역사를 전공하지 않은 비전문가가 쓰고 그린 로마사를 읽는 느낌은 어떨까라는 마음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2~3년 정도 걸릴 것을 예상하고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지만, 이미 시간이 훌쩍 지나 10년이나 되는 시간이 필요했고 드디어 올해 세상의 빛을 보게 됐다. 그리고 로마사에 대한 컨텐츠는 기대 이상이었다. 이미 마키아벨리의 <로마사논고>, 예전과는 열광했지만 지금은 정치적 성향 때문에 더 이상 관심을 끊게 된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그리고 최근 연달아 출간되고 있는 콜린 매컬로의 <마스터스 오브 로마> 시리즈를 통해 익숙하면서도 동시에 오래 전에 읽었기에 잊어버려 생소한 이야기들을 다시 만나게 됐다. 특히 로마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넘어가는 시기는 역사적으로도 오래되었기도 하거니와 사료들의 절대부족으로 인해 저자가 표현한 대로 전승에 상당 부분 의존해야 하는 점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만화 로마사> 두 번째 이야기는 기원전 509년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가 이끄는 반왕정 세력이 거만한 타르퀴니우스를 몰아내는 것으로 시작된다. 건국 이래 250년 동안 지속된 왕정은 라틴계와 사비니계 토착 귀족과 에트루리아 왕들의 연합체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저자는 유부녀 폭행 사건으로 공화정 혁명이 시작되었다는 전승에 의문을 표하며, 대신 귀족 계급과 전쟁을 통해 획득한 토지분배라는 당근정책으로 민중을 포섭해 숫적 우위를 지키려는 왕정 세력 간의 계급투쟁적 성격도 가지고 있었다고 분석한다. 어찌 되었던 더 이상 왕의 독재를 원하지 않았던 로마 민중과 귀족들은 로마 부근에서 호시탐탐 왕정복고를 노리는 타르퀴니우스의 위협은 물론이고, 인근 부족의 침입에도 대비해야 하는 이중고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특히 클루시움의 강력한 에트루리아 연맹의 수장이었던 포르센나의 원조를 받아 거의 신생 공화정 로마를 포위하고 탈환직전까지 가지만,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기록될 정도의 기개와 의기를 가진 가이우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 같은 영웅들의 분전에 힘입어 가까스로 포르센타를 설득해 그전에 점령한 베이이를 반환하는 굴욕적인 조건으로 포르센나군을 철수시키는데 성공한다.

 

로마 공화정 체제의 수호를 위해 이런 외부로부터의 충격과 싸우는 와중에, 로마 내부에는 당장 해결해야 하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원로원으로 대표되는 로마의 실질적 지배계급인 귀족과 상대적으로 권한과 사유재산이 적었던 평민 간의 대립이었다. 로마가 궁극적으로 미래에 ‘팍스 로마나’라는 세계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그런 내부의 모순을 해결해야만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의 관점에서 본다면, 공화정 로마의 끊임없는 팽창은 제국주의적 수탈의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다. 귀족에 비해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평민을 달랠 수 있는 전리품과 토지를 분배하기 위해서는 전쟁이 꼭 필요했다. 그런 실제적인 이유 때문이었는지 하루가 다르게 팽창하는 로마의 위협을 느낀 이탈리아 반도 내의 유력한 부족은 시시때때로 로마를 침공해 왔다.

 

문제는 그런 상시적 전쟁국가 로마의 현실이 평민들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평민들의 의무 중에 하나인 병력소집에 응하게 되면, 그들의 농경지는 누가 경작한단 말인가. 그리고 증가하는 채무 때문에 채무 노예로 전락하게 되는 심각한 사회적 문제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공교롭게도 로마 평민들의 의무였던 군복무는 그들에게 짐이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사회적 평등권 주장이 점증해 가던 로마 사회에서 그들이 가진 강력한 항의의 수단이기도 했다. 기원전 494년 볼스키 족과 아이퀴 족의 침공 와중에 로마군의 중무장 보병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평민들이 침공에 대비하는 대신, 성산으로 알려진 몬스사케르 산에서 자신들의 권리신장을 주장하며 시위에 돌입했다. 로마 원로원은 하는 수 없이 그들의 요구를 수용하면서 평민들의 권리를 보호할 2인의 호민관 제도와 평민회 도입을 승인하기에 이른다. 공화정 도입 이래 반세기만에 로마 평민들은 비로서 의미 있는 승리를 거둔 것이다.

 

계속되는 외적의 침입에 대항해서 오늘날 미국 신시내티 시의 유래가 된 킨킨나투스를 독재관으로 선출해 군사대권을 맡기기도 했다. 훗날 술라나 카이사르가 원래 독재관 취지를 변형시켜 자신의 독재에 이용하기도 했지만, 첫 독재관이었던 킨킨나투스는 보름만에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고 대권을 원로원에 반납하는 그야말로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원형을 보여주기도 했다. 어쩌면 공화정 로마가 숱한 위기를 모면하고 국가를 유지한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그런 엘리트 계급의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현재 진행 중인 국가원수 탄핵의 과정에서 들어나는 지배 엘리트 계급의 파렴치한 국정농단 행위를 보며, 왜 우리나라에는 고대 로마 사회에서 숱하게 목격할 수 있는 그런 끝없는 사회지도층의 자기희생 대신 부정부패와 기회가 되었을 때 사리사욕을 챙기겠다는 추한 욕망만이 존재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다. 21세기 현대인들의 사고가 기원전 5세기를 살던 사람들보다 못하다는 비애감에 서글퍼졌다.

 

다시 고대 로마로 돌아가 로마 평민들은 호민관 제도와 평민회 도입에 이은 최초의 성문법이라고 할 수 있는 <12표법>(BC 451), 귀족과 평민간의 결혼을 허용하는 카놀레이우스법(BC 445), 2명의 최고지도자인 집정관 중 한 명은 평민 중에 선출되어야 한다는 리키니우스법(BC 367)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평민회 의결 사항은 원로원의 승인 없이도 법적 효력을 지니게 된다는 호르텐시우스법(BC 287) 등이 차례로 통과하면서 귀족과 평민 간의 갈등이 진정 국면에 접어들게 되었다. 외부적으로도 가공할 갈리아 족의 침공으로 수도 로마가 거의 점령될 뻔하기도 하고, 50년에 걸친 삼니움 전쟁으로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위기는 곧 기회라는 말이 있듯이 5번이나 독재관의 자리에 오른 마르쿠스 푸리우스 카밀루스의 지도 아래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발전의 전기를 마련했다. 특히 마그누스 그라이키아의 거점이었던 타렌툼 전쟁으로 도시국가 타렌툼을 정복하면서 지중해 패권 장악을 위한 거점 확보에 성공한 것도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타렌툼 전쟁에서 상대했던 피로스 대왕의 코끼리 부대와의 전투는 공화정 로마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 넣었던 카르타고 한니발 부대의 맛보기였던가.

 

물론 일단의 평민들을 위한 개혁 조치들과 법안들이 마련되었다고 해서, 파트리키(혈통 귀족)와 플레브스(평민) 간의 갈등이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두 계급 간의 차별은 존재했고, 이 두 계급 간의 계급투쟁은 어쩌면 공화정 로마 기간 동안 내내 지속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었다. 브루투스가 100명을 추가해서 300명 정원이 된 원로원은 태생적으로 보수적일 수밖에 없었고, 새로운 인원의 충원에 인색했다. 부유한 평민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정치적 성공을 의미하는 원로원 진출을 도모했지만, 건국 이래 수백 년을 이어오면서 특권층을 형성하게 된 파트리키들은 자신들의 기득권 시스템을 흔들 지도 모를 신입 회원의 증가를 원하지 않았다. 어쨌든 원로원이 중심이 된 과두정 형태의 로마 공화정은 왕정을 붕괴시켰고, 대외적 갈등들을 봉합시키면서 이탈리아 반도 통일에 성공했으며 세계 제국으로 가는 도약을 준비하기에 이르렀다. 곧 출간될 3권 <지중해 쟁탈전>에서는 훗날 로마의 곡창이 되는 시칠리아 섬의 원주인이었던 해양세력 카르타고와의 일대결전이 기다리고 있다.

 

오래전 역사 시간에 막무가내로 외웠던 12표법, 리키니우스법 그리고 호르텐시우스 법이 생기게 된 과정을 다시 돌아보는 건 역시 거시 만화사에서나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싶다. 모름지기 역사 공부를 위해선 과정이 중요한 법인데, 무조건 암기식으로 외우니 그게 오래 갈 리가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만화 혹은 독서로 만나게 되니 그야말로 이해가 쏙쏙 됐다. 역사 교육의 현장에서도 이런 방식으로 교육이 이루어지면 정말 좋겠다는 공상을 해봤다. 시대가 퇴행한 것 같은 국정교과서가 부활된 시절에 가능할진 모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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