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도살장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50
커트 보니것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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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만이다. 자그마치 8년 만에 커트 보니것의 <제5도살장>을 다시 읽었다. 빌리 필그림, 엘리엇 로즈워터 그리고 킬고어 트라우트까지. 이후에도 보니것 작품들에 등장하게 될 익숙한 이름들이 줄 지어 등장할 때, 짜릿한 전율까지 느낄 수가 있었다. 그래 그렇게 가는 거지. 뒤늦게 보니것 바람이 분 모양이다. 그의 미발표 유작도 곧 도착할 예정이니 보니것 풍년이 아닐 수 없다.


커트 보니것은 이 소설을 발표하기 전까지 몇몇 장르소설을 발표하면서 인지도를 쌓아 왔지만, 요즘은 한국 드라마에서조차 클리셰이가 된 시공을 오가는 타임슬립이라는 기발한 아이디어에 뉴욕주 일리엄 출신 검안사이자, 분명 자신의 페르소나가 분명한 빌리 필그림이라는 전쟁터에서 정말 어릿광대 뺨치는 ‘소년병사’의 좌충우돌 체험을 바탕으로 시대의 걸작 소설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커트 보니것이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바로 반전 메시지다. 이미 13세기 성직자들의 선동으로 시작되어 기독교 세계와 이슬람 세계의 뿌리 깊은 반목의 원인이 되었던 십자군 원정에도 등장한 어린이 십자군이 현대에도 모습을 바꾸어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단적 나치 파시즘을 박멸하는 정의로운 전쟁에 동원된 미국 젊은이들의 현실은 우스꽝스러운 토가를 걸침 빌리 필그림의 이미지로 정확하게 치환된다.


군종병으로 독일군의 마지막 공세에서 전쟁에 숙련된 독일군 베테랑에게 포로가 된 일단의 미군들은 독일 영내의 포로수용소로 이송된다. 그리고 히로시마 원폭 이상의 끔찍한 희생자를 낸 1945년 2월 13일에서부터 15일까지 3일간 계속된 공중폭격으로 ‘엘베 강의 피렌체’라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고도 드레스덴은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었다. 과연 이 폭격이 의미가 있었을까? 자크 파월은 800여대의 폭격기가 동원된 드레스덴 대폭격의 진정한 목적은 동쪽으로 베를린을 향해 맹렬하게 진격해 오고 있던 스탈린의 적군에 대한 미영의 강력한 무력 시위였다고 하는데, 상당히 일리가 있는 주장이다. 20만명에서 25만명의 희생자를 인류 역사상 최악의 폭격이자 ‘인간 도살’이었다고 그는 규정하고 있다.


소설의 주인공 빌리 필그림이 수용되었던 <제5도살장>은 단순하게 드레스덴 폭격만을 주된 소재로 사용하지 않고 있다. 육체파 여배우 몬태나 와일드핵과 함께 가공의 행성 트랄파마도어의 동물원에 수용되어 손에 눈이 달린 외계인들의 구경거리가 된 자신의 모습을 오가는 시간여행 그리고 못생긴 아내 발렌시아와의 결혼생활, 아내가 죽은 뒤 외계인과의 접촉사실을 사방에 알리다 정신병원에 수용되는 그야말로 어디로 튈지 모르는 1968년 현재의 모습 등이 뒤죽박죽으로 전개된다. 필라델피아에 사는 드레스덴 시절 전우를 찾아가는 장면 등 그야말로 백화점 같은 이야기를 죽 전시하는 가운데, 진짜로 전쟁을 체험한 베테랑 병사의 강력한 메시지를 훗날 자신의 트레이드마크가 되는 블랙유머로 잘 포장해서 독자에게 전달하는 솜씨가 그야말로 압권이다. 과거 전우의 아내가 자신을 환대하지 않는 이유를 알게 된 후 그녀와 반전을 공감대로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고 했던가.


무기를 팔아먹는 군산복합체 말고는 그 어느 누구에게도 좋지 않은 전쟁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됐다. 애국심에 호소해서 전쟁을 부추기는 정치인, 우리의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몰며 본질을 왜곡하는 전쟁상인 그리고 이미 전쟁을 겪은 세대의 선동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한다고 저자는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들의 현실에서 벗어난 선전선동이 트랄파마도어 행성과 지구별을 오가며 다양한 체험을 했다는 빌리 필그림의 허무맹랑한 주장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빌리 필그림이 열렬하게 추종하는 SF 소설가 킬고어 트라우트에 대한 빌리의 딸이 가진 적개심은 보니것 특유의 블랙유머가 돋보이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개인적으로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의 하나는 거의 어릿광대 같은 모습을 한 미군 전쟁포로 빌리 필그림에게 독일군이 던진 한 마디다. 전쟁이 장난인 줄 아냐고. 피와 살이 튀는 그야말로 끔찍한 전쟁을 빌리 필그림 같이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한 병사들이 수행했다는 것이야말로 희비극이 교차하는 전쟁의 실체가 아니었을까. 추위와 굶주림에 지친 다수의 미군 포로들을 호송하는 독일 병사들 역시 어린이 십자군과 퇴역한 노병이 아니었던가. 엄청난 물자가 약탈당한 전시에 고작 드레스덴 폭격 후에 교사 출신 노병 에드가 더비가 찻주전자를 훔쳤다는 이유로 총살당한 장면도 어처구니가 없긴 마찬가지다.


보니것의 전작 <마더 나이트>의 주인공이자 이번에는 카메오로 출연한 하워드 W. 캠벨 2세에 대한 에피소드도 빼놓을 수 없다. 나치의 부역자 캠벨 씨(사실은 이중스파이)가 미군 포로들의 행태에 대한 논문이라는 형식의 글을 한 번 살펴보자. 미국이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지만, 그 나라 국민들은 누구라도 부자가 될 수 있다는 파괴적인 망상에 사로잡힌 가난뱅이들이며 포로로 잡힌 병사들에게서는 어떤 연대나 형제애도 기대할 수 없노라는 냉소 섞인 분석을 시도한다. 한 다미로 말해 ‘인간다운 존엄성을 상실한 대량의 빈곤층’이란다. 저자가 구사하는 씁쓸한 진실에 입맛이 쓰다. 너무나 리얼해서 트랄파마도어 외계인도 믿어 버릴 정도로 말이다.


시간여행, 지구별과 트랄파마도어라는 외계 행성을 오가는 어떻게 보면 허무맹랑하기 짝이 없는 설정과 어릿광대에 견주어도 조금도 손색이 없는 빌리 필그림이라는 인물을 통해 커트 보니것은 전쟁국가 미국의 실체를 고발한다. 2차 세계대전의 진짜 목적은 독일 파시스트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미국식 자본주의 시스템의 전세계화 그리고 미국 기업이 추구하는 이윤의 극대화였다는 것을 최근에야 알게 됐다. 그 와중에 작가가 직접 체험한 드레스덴 폭격은 미영의 동유럽을 집어 삼키려는 스탈린에 대한 냉혹한 경고장이었고, 어린이와 여성을 포함한 수많은 독일 시민들이 도살된 것이다. <제5도살장>이 발표된 즈음, 미국은 아픈 상처로 기억될 베트남 전쟁의 진창 속으로 뛰어 들고 있는 중이었다. 21세기에도 전쟁국가 미국은 여전히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공포의 일상화 그리고 ‘상상된 위험’으로 수지맞는 장사가 성업 중이다. 미국 문단의 이단아 혹은 현자 커트 보니것이 다룬 전쟁에 대한 우화가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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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철의 유럽인 이야기 1 - 중세에서 근대의 별을 본 사람들 주경철의 유럽인 이야기 1
주경철 지음 / 휴머니스트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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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부터 네이버 파워라이터 코너를 통해 소개되어 오던 주경철 교수님의 <유럽인 이야기> 그 첫 번째 이야기가 드디어 책으로 엮어 나왔다. 모바일 시대가 드디어 코덱스(책)이라는 구세계의 체험을 능가해 버린 마당에, 요즘 청년들에게 역사 지식도 재밌을 수 있다는 발상에서 글을 쓰셨다고 했던가. 나도 저자의 근대세계를 연 유럽인들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군더더기를 빼고 핵심적인 내용을 저술한 내용이 아주 섹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저자의 다른 책들도 읽어 왔지만, 이번 책은 정말 재밌게 느껴졌다. 앞으로 주경철 교수님의 역사저술 항해가 순조롭게 진행되길 바란다.

 

저자의 역사평설에 등장하는 첫 번째 주자는 잔다르크다. 아쉽게도 밀라 요보비치가 주연을 맡은 지난 밀레니엄 시절의 블록버스터는 물론이고, 고전 칼 드레이어의 <잔다르크의 수난>도 보지 못한 무지한 독자에게 신의 목소리를 듣고 풍전등화에 놓인 조국 프랑스를 구하기 위해 느닷없이 나타난 시골처녀의 무용담은 중세에서 근대로의 시대전환기를 상징하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잔다르크가 무용을 떨친 백년전쟁은 영국과 프랑스 두 국가 모두 중세에서 벗어나 민족국가로 나아가는 결정적 계기였다. 잉글랜드군의 파상공세에 밀리던 프랑스 샤를 7세는 잔다르크의 등장으로 전세를 역전시키고 마침내 대륙에서 잉글랜드군을 소탕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그렇게 샤를 7세는 자신과 자신의 왕국을 회복하는데 헌신적이었던 남장 소녀 잔다르크가 잉글랜드군의 포로가 되어 화형에 처할 위기에 처했어도 소용가치가 떨어졌다고 판단했던 모양이다. 다시 한 번 정치의 세계가 얼마나 냉혹하다는 사실을 잔다르크의 수난을 통해 체험할 수 있었다.

 

프랑스 방계 가문으로 플랑드르에서 지금의 룩셈부르크 그리고 부르고뉴에 이르는 방대한 영토를 자랑했던 4대에 걸친 부르고뉴 공작들의 활약을 저자는 무협지에 비유하기도 한다. 프랑스 국왕의 봉신이면서도 독립을 추구하며, 백년전쟁에서는 잉글랜드 편에 서기도 했다는 점이 눈길을 끌었다. 물론 현재 민족국가 개념으로 볼 때, 적군 편에 붙은 민족배신자 개념은 아닐 거라고 저자는 설명을 붙인다. 무수한 정략결혼을 통해 영지를 넓히고, 프랑스 국왕의 섭정도 경험했으며 정적을 암살하는 등의 모습은 격동의 시절을 보는 듯한 기시감을 보여 주기도 했다. 마지막 공작이었던 담대공 샤를이 영지 통합을 위해 로렌공략에 나섰다가 전투에서 패배해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며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는 장면은 비장하기까지 했다.

 

힐러리 맨틀의 <울프홀>에 등장하는 잉글랜드 국왕이자 6명의 왕비를 들인 호색한 헨리 8세에 대한 이야기는 또 어떤가. 튜더 가문 출신으로 십대의 나이에 왕위에 올라, 무소불위한 권력을 휘두르며 자신이야말로 최고 권위를 지닌 왕이라는 자부심으로 권력의 힘을 마구 휘두른 철혈독재자의 이미지를 엿볼 수 있었다. 원래 왕위에 오를 자격이 없는 차자였지만 형의 죽음으로 왕세자가 되고, 형수취수까지 하면서 왕이 되어 자신의 왕위를 이을 후사를 기대했건만 왕자 생산에 실패하면서 그야말로 엽기적인 엽색행각을 마다하지 않은 난봉꾼에 가까운 왕이 바로 헨리 8세였다. 순전히 자신의 이혼 문제 때문에 자신의 잉글랜드 교회조직의 수장이라는 수장령을 발표하고, 로마 가톨릭의 통제에서 벗어나 신교개혁에 착수하기도 했다. 물론 그 이면에는 잉글랜드 각지에 산재해 있는 수도원이 보유한 막대한 재산을 국고로 돌리기 위한 음흉한 계책이 숨어 있었다. 자신이 총애하던 신하들도 하루아침에 대역죄인 신세가 되어 참수되기도 했다. 하긴 왕비도 대역죄인이 되어 참수 되는 마당에 무얼 더 바라겠는가. 어쨌든 그의 통치 시간을 거쳐 유럽의 이류국가에서 훗날 제국주의 최강국으로 발돋움하게 되는 전기를 마련했다는 저자의 평가가 마음에 들었다.

 

우연이 겹치는 상속으로 유럽대륙 서쪽의 스페인 국왕이자 동쪽의 합스부르크 가 출신으로 거대한 제국이 카를 5세에 수중에 들어갔다. 어마어마한 영지를 상속받은 카를 5세의 치세는 격동과 난제의 연속이었다. 광녀 후아나의 아들로 태어난 제국의 상속자는 그야말로 동분서주하면서 제국 통치에 여념이 없었다. 광활한 제국의 곳곳에서 일어난 반란진압과 전쟁에 충당할 비용을 마련해야 했으며, 무엇보다 신구교의 대립이라는 심각한 문제도 해결해야만 했다. 고귀한 귀족혈통 보존을 위한 근친결혼의 유전자 폭발이라는 부정적 면도 있었다는 점을 꼬집은 점이 인상적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은 재벌도 피곤할 수 있다는 역사의 방증이라고 해야 할까나. 한편, 저자는 중국식 제국이 아닌 느슨한 유럽식 제국의 분열과 경쟁이야말로 오히려 유럽사 발전의 원동력이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카를 5세의 방대한 제국도 결국 서로 이질적인 스페인과 신성로마제국으로 갈라지지 않았던가.

 

지난 3월에 읽은 <그해, 역사가 바뀌다>에서도 소개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이야기는 이제 익숙하기까지 하다. 카스티야 이사벨라 여왕의 후원을 받아 서쪽 아시아로 가는 대서양항로를 개발하겠다고 나섰다가 우연히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가 목숨을 건 모험에 나서게 된 이유를 경제적 이익이나 신분 상승 같은 성공보다는 종교적 신념으로 풀어낸 저자의 해석이 인상적이었다. 종교계에서는 인정할 수 없었지만 지구구형설은 이미 당대 지식인들에겐 상식이었고, 독학으로 학문을 접한 이들이 흔히 그렇듯 콜럼버스 역시 아집에 사로 잡혀 있었다고 한다. 정작 아메리카 대륙 식민지 개척에서는 소외되고, 스페인 왕실에 외면을 받은 그가 말년을 점성술이나 이슬람 세력이 특정 시기에 멸망할 것이라는 허황된 망상에 사로잡혀 보낸 점도 특이할 만하다. 같은 맥락에서 콜럼버스에 이어 후발 식민주의자로 아즈텍 제국 정복에 나선 코르테스와 그의 통역사 말린체의 협력이 신세계에서 벌어진 폭력적 방식의 결합이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지금 시대의 기준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아즈텍 인들의 인신공희가 그들만의 우주관에 입각한 종교 철학이었다고 한다. 인신공희에 필요한 전쟁 포로와 노예를 마련하기 위한 “꽃 전쟁”을 유럽 기독교인들이 야만적이라고 생각했으리라. 그런 점에서 말린체는 수많은 인간의 피를 접수한 케찰코아틀 신보다 에스파냐인들의 신이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라이벌 미켈란젤로와 더불어 진정한 의미에서 르네상스 지식인의 전형을 보여준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롭다. 우리에게는 <최후의 만찬>과 <모나리자>를 그린 화가로 유명한 다빈치가 사실은 문화 및 예술은 물론이고 군사기술과 교량건축에도 뛰어난 재능을 가진 천재였다고 저자는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경건한 결혼생활이 아닌 자유로운 연애에서 태어난 사생아 출신이라는 점도 그의 천재성을 설명해 주는 한 가지 요인이었을까. 피렌체의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가 운영하는 보테가(공방) 출신 레오나르도는 출중한 데생 실력을 바탕으로 스승보다 뛰어난 실력의 회화기법을 선보이기도 했다. 저자가 <최후의 만찬>에 대해 말했듯이, 우리가 흔히 컴퓨터 화면이나 화보로 보는 것과 웅장한 사이즈의 오리지널 감상은 확실히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 압도적이라고나 할까. 그의 동성애 애인이 그린 짝퉁 <모나리자>의 오리지널리티는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또다른 시대의 천재들이라고 할 수 있는 마키아벨리나 체사레 보르자와의 특이한 인연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그가 남긴 수많은 스케치들을 담은 코덱스들에 대한 가치는 경매장에서 어마어마한 가격으로 팔리고 현실이 잘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그 중에 하나는 빌 게이츠가 소장하고 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피렌체에서 태어나, 스포르차 가문이 지배하는 밀라노에서 활약하고 말년에는 프랑스 국왕인 프랑수와 1세의 초청을 받아 프랑스에서 죽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야말로 르네상스 시대 세계인의 전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경철 교수님이 마지막에 배치한 마르틴 루터야말로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한 올해에 가장 적합한 시대인물이 아닐까 싶다. 가톨릭 수사 출신의 종교개혁가가 처음부터 가톨릭 질서를 위협하는 ‘멧돼지’는 아니었을 것이다. 당시 로마에서 건축되고 있던 거대한 베드로 성당과 독일내 주교들의 짬짜미로 이루어진 면죄부 판매가 시행되면서, 스스로에게 너무나도 엄격했던 수도사는 아무래도 이건 아니다 싶었던 모양이다. 가톨릭 내부개혁을 위한 비판은 1세기 전에도 교황청에 이단으로 화형당한 얀 후스의 전례가 있지 않았던가. 왜 얀후스는 실패했고, 루터의 개혁은 성공할 수 있었는가에 대한 결정적 차이 중의 하나는 바로 인쇄술의 획기적인 발전에 있었다고 저자는 분석하고 있다.

 

구텐베르크 인쇄술의 보급으로 지식인은 물론이고 대중까지도 좀 더 체계적인 방식으로 지식과 정보를 접할 수 있게 되었고, 보름스 제국의회 이후 파문당한 루터가 현명공 프리드리히 3세의 보호 아래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은거하는 동안 독일어로 저술한 성경 그리고 오직 믿음(sola fide)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칭의론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야말로 종교개혁의 분기점이 되었다. 물론 종교개혁에 대한 촉발은 루터가 시작했지만, 나머지 시대적 흐름은 그의 의도와는 다른 방식으로 흘러가게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대다수를 차지하는 독일 농민들에게 루터의 종교개혁은 가톨릭 종교의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했지만, 루터가 주창하는 구원에 도달하기 위한 엄격한 개인의 수양은 또 다른 족쇄에 불과했다. 그 결과 루터는 농민반란에서 귀족 편에 서게 되었고, 반유대정서를 부추기는 저술까지 발표하는 반동적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가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던 건 간에 종교개혁은 시대의 대세가 되었고 근대로의 전환기를 상징하는 일대 사건으로 자리매김에 이르렀다.

 

숨 가쁘게 오늘날의 유럽을 만든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읽었다. 혹자는 신의 계시를 받았다며 전쟁터와 바닷길을 누볐고, 엄청난 규머의 대제국의 상속자는 동분서주하며 통치를 했고, 어떤 공작들은 자신의 영토를 넓히고 왕국으로 승격하기 위해 전쟁을 마다하지 않았다. 무려 6명의 왕비를 둔 국왕은 무자비한 통치를 일삼았지만 궁극적으로 제국의 초석을 닦는데 성공했다. 어떤 르네상스 지식인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범위에서 자신의 천재성을 자랑했다. 자신의 신념에 따라 종교개혁에 나선 수도사가 과연 천국에 갔을까하는 저자의 마지막 질문아 갖는 함의의 무게는 적지 않다. 저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이렇게 다양한 군상들의 총합이 오늘날 세계를 만든 원동력이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오늘의 세계를 만든 또다른 이들의 이야기들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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펭귄철도 분실물센터 펭귄철도 분실물센터
나토리 사와코 지음, 이윤희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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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토리 사와코, 처음 들어보는 작가다. 제목을 보는 순간 안드레이 쿠르코프의 <펭귄의 우울>이 떠올랐고, 책을 읽으면서는 최근에 읽은 루스 호건의 <잃어버린 것들의 수집가>가 떠올랐다. 물론 배경도 내용도 달랐지만, 제목에서 주는 이미지와 분실물을 소재로 잡았다는 점에서 어떤 연관성이 떠오르게 됐다.

 

소설 <펭귄철도 분실물센터>는 네 개의 서로 다른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모든 에피소드에는 투톤 컬러의 귀엽기 짝이 없는 이름 없는 펭귄 한 마리와 야마토기타 여객철도 나미하마선의 종점 우미하자마 역 분실물센터에 근무하는 빨강 머리 훈남 모리야스 소헤이가 등장한다. 매력남 소헤이는 여객들의 잃어버린 물건보다 그들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주는 일을 해주고 있다고 해야 할까. 소헤이 역시 사연을 품고 있는 청년이다. 자, 이제 이야기 속으로 여행을 떠나 보자.

 

첫 번째 에피소드인 <고양이와 운명>에서는 자신이 잘못 돌보고 방치해서 죽은 애묘 후쿠의 유골을 가지고 다니면 렌터카 직원 사소 쿄코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자신이 짝사랑하던 다치나바 선배와 결혼한 미치네 집을 방문하고 돌아가는 길에 자신에게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 버린 교코는 기차에서 우연히 펭귄을 만나게 된다. 뒤뚱거리며 역사를 돌아다니는 펭귄을 만나게 된다면 누구나 처음에는 놀라지 않을까? 정말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우연의 연발로 고양이 유골을 담은 가방이 이와미라는 남자의 것과 바뀌게 되고, 우미하자마 역 부근에 있는 임해공원에서 이와미에게 느닷없는 애정을 느끼기도 하지만 알고 보니, 이와미의 꿍꿍이가 다른 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경악하게 되는 교코. 어쨌거나 빨강 머리 청년 소헤이의 도움으로 훈훈하게 마무리.

 

개인적으로 다음 이야기가 더 재밌었다. <팡파르가 울린다>의 주인공은 현실세계에는 보잘 것 없는 남자지만, 온라인 게임 세계에서는 의리 넘치는 남자 후쿠모리 겐이다. 문득 잘나가는 게임의 군주님이지만 현실에서는 말단직원이라는 현실을 비꼰 광고가 바로 연상됐다. 겐(터스)은 자신과 팀메이트로 게임세계에서 맹활약했던 동료 히사메님의 공식 은퇴를 앞두고 마검을 획득해서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겠다며, 마검을 파는 게임 노점상이 의뢰한 희한한 부탁을 수락한다. 임무수행을 위해 야마토기타 여객철도를 이용하던 중,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정도로 아리따운 소녀 이토 마히로와 만나게 된다. 꿈은 이렇게 이루어지는 건가. 우리의 주인공 겐터스가 잃어버린 건 그가 부적처럼 지니고 다니던 오래전 반장이었던 마히로가 건네준 러브레터. 자연스레 젠투 펭귄 녀석과 빨강 머리 소헤이가 등장한다.

 

결코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우연들이 겹치면서 겐터스와 마히로는 작은 모험에 나선다. 그 와중에 어여뿐 소녀 마히로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는 겐터스. 무엇 하나 부족할 것 없어 보이던 멋진 소녀 마히로 역시 부모님의 불화로 착한 아이가 되기 위해 그동안 노력해 왔다는 애처로운 고백을 듣는다. 세상에 문제가 없는 가정은 없다더니만 그 말이 맞구나, 왜 우리는 선현의 말을 무시하는 걸까. 암튼 그래서 독립을 준비하고 있었다며, ‘인디 아이돌’ 캐스팅 제의를 받았다는 사실을 겐터스에게 알려준다. 마히로에게 고백한 싸나이 순정은 무참하게 박살났지만, 인디 아이돌 마히로의 첫 번째 팬으로 멋진 손글씨로 쓴 팬레터를 날리는 겐터스. 뭐 그렇게 가는 거겠지.

 

위태위태한 결혼생활을 영위해 가던 지에와 미치로가 등장하는 다음 이야기는 더 흥미진진하다. 예의 야마토기타 기차에서 임신부 뱃지를 습득한 지에가 임신했다고 생각한 미치로의 착각을 타고난 거짓말을 이용해서 사실로 만들어 버리는 지에. 왜 처음부터 아니라고 말하지 못했던 걸까? 지에 역시 자신들의 결혼이 백척간두에 걸려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걸 독자들은 그녀의 고백을 통해 알게 된다. 취업과 결혼 그리고 출산에 이르는 모든 과정에 수동적이었던 지에는 야단법석 같은 헛소동을 통해 진정한 자신을 찾게 된다. 그리고 처음으로 미치로를 사랑하고 있고 그를 놓치고 싶지 않다는 솔직한 감정의 표현까지 서슴지 않는다.

 

 

 

자, 이제 대망의 마지막 에피소드 <스위트 메모리스>다. 나토리 사와코 작가는 멋진 결말을 위해 모든 것을 준비해 두었다. 어떻게 해서 젠투 펭귄 녀석이 야마토기타 여객철도를 펭귄철도로 만들었는지, 그 알파와 오메가를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속 시원하게 설명해 준다. 사적 감동 뿐만 아니라, 경제 고도성장기에 오로지 최대한의 경제적 이윤과 성장을 추구해온 전후세대가 노년을 맞은 시기에 겪게 되는 젊은 세대와의 갈등에 대해서도 작가 나름의 화해를 보여준다. 그리하려 등장하게 된 인물이 바로 양성 뇌종양으로 차츰 기억을 잃고 있는 꼰대 후지사키 준페이다. 거의 액션 활극에 가까운 서사를 통해 준페이 어르신은 잊고 싶은 과거와 그보다 더 어려운 현재와의 화해라는 두 마리 토끼사냥에 나선다. 그런 점에서 인디 아이돌 루루탄이 시전하는 마법사 놀이를 등장시킨 작가의 설정에 박수를 보내고 싶을 정도다. 케케묵은 시간의 더께 속에 쌓인 반목과 갈등이 다이치가 준비해온 군침도는 빵들로 당장에 해결될 순 없겠지만, 역시 시간이 해결책이라는 걸까. 아들 세대를 이해할 수 없는 아버지 세대와의 해묵은 갈등해소 또한 미지의 세계이자, 새로운 모험이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소설 <펭귄철도 분실물센터>를 읽으면서 초반에는 좀 시큰둥했지만 역시 결말에 가서 그동안 나왔던 캐릭터들이 모두 등장해서, 한바탕 난장으로 시원하게 마무리하는 장면은 정말 감동이었다. 그렇군 글을 쓰려면 이 정도의 컨셉과 스토리라인 그리고 속이 뻥 뚫리는 것 같이 시원한 결말은 필수구나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나토리 사와코 작가님 한 수 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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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각사 (무선) 웅진지식하우스 일문학선집 시리즈 3
미시마 유키오 지음, 허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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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황제 부활을 외치며 스스로 할복으로 생을 마감한 일본 극우주의자 미시마 유키오의 책을 몇 권 읽었다. 하지만 정작 탐미주의자로서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금각사>는 읽지 않고 미루고 있었다. 전후 일본을 대표하는 작가 중의 하나라고 하는데, 내게는 극우적인 마지막 행적 때문일까 왠지 선뜻 정이 가지 않는 그런 작가였다. 오래 동안 미루어 오던 작가의 책이었는데 이번에 웅직지식하우스에서 리커버링해서 새로 출간된 <금각사>에 도전하게 되었다.

 

초반을 읽자마자 <금각사>는 말더듬이였고 병약한 체질의 사나이였던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라는 것을 대번에 느낄 수가 있었다. 소설 속 화자 미조구치의 아버지는 마이즈루 마을의 대처승이었다. 한창 태평양전쟁 중이던 시절 학창시절을 보낸 그에게 아버지는 교토에 있는 금각에 대한 환상을 심어 주었다. 전화 속에 휩싸인 세상이 악이라면, 속세를 떠난 금각은 상대적으로 선이라는 의미일까. 해군기관학교에 다니는 선배가 미래에 중이 될 거라는 그에게 자신의 앞날(전쟁에서 죽음을 예상했던 것 같다)을 부탁하는 장면은 정말 오래 기억될 것 같다. 사람의 생과 사가 그렇게 가듯이.

 

미조구치에게 또다른 영향을 끼친 장면 하나는 마을에서 새침데기로 명성이 자자하던 우이코가 벌인 일대 사건이다. 미조구치는 우이코에게 망신을 당하는데, 그 후유증은 말더듬이라는 선천적 장애와 더불어 여성에 대한 일종의 트라우마로 작용한다. 그랬던 우이코가 탈영병과 사랑에 빠져 도피행각을 벌이다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는 장면에 대한 이야기는 감수성 여린 소년의 마음속에 영원히 자리하게 된 모양이다. 그것은 마치 이루지 못한, 가질 수 없었던 첫사랑에 대한 애달픔이라고나 할까. 한편 미조구치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금각이야말로 지고지선의 미라는 이미지를 각인시킨다. 그리고 미조구치를 금각이 있는 녹원사(로쿠온지) 주지 다야마 도센 스님에게 의탁한다. 녹원사에서 미조구치는 같은 처지의 도제 쓰루카와와 우정을 쌓으면 역설적으로 속세의 삶을 마주하게 된다. 미조구치가 어둠을 상징하는 음화라면, 쓰루카와는 빛을 의미하는 양화라고 했던가. 어찌해서 화자는 그렇게 어둠 속으로 침몰을 거듭하는 걸까? 자신을 너무 사랑해서 그런 걸까? 타인을 품을 줄 모르는 소년은 자신을 너무 사랑하고, 고독을 이상화한 나르시시즘에 빠져 헤어 나올 수가 없었나 보다.

말더듬이란 장애 아닌 장애를 가진 소년 미조구치에게 죽은 아버지가 심어 준 금각이라는 이미지는 도저히 가질 수 없는 환영이면서 동시에 아름다움으로 각인된 무엇이다. 우여곡절 끝에 대학에 진학해서 안짱다리라는 장애를 가진 가시와기의 독설을 두려워하면서도 동시에 그의 현란한 철학적 기만술을 흠모하는 장면은 이율배반적으로 다가온다. 두 번이나 가시와기가 인도한 동정 잃을 순간마다 금각이 떠오르는 장면은 더 이상 전쟁을 할 수 없게된 나라, 패전국 일본의 불능을 상징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미조구치가 자신의 내면세계에서 이상화시킨 금각은 일본 제국주의가 기승을 부리던 시절에 대한 극우주의자의 미학적 향수가 아닐까. 번역을 맡은 허호 씨의 해설을 읽어 보니, 미시마 유키오가 처음부터 극우주의자는 아니었다고 한다. 소설 <금각사> 역시 그가 극우주의자로 변신하기 전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금각사>195072, 교토의 킨카쿠지(금각사) 방화사건을 모티프로 한 작품이다. 미시마 유키오는 녹원사의 사미승이었던 하야시 쇼켄이 무로마치 바쿠후 이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550년 고찰을 방화해 버린 일대사건을 5년간에 걸친 준비 끝에 발표한 역작이다. 사건 조서에서 방화범 쇼켄은 금각이 가진 미에 대한 질투를 비롯한 피해망상 등으로 범행을 저질렀다고 밝혔다. 이런 사실을 바탕으로 해서 미시마 유키오는 독설가 가시와기가 주장하는 미에 대한 인식, 무력한 자신의 모습을 이겨내기 위한 어떤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방화를 선택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그 중에는 속세에는 저명한 고승으로 알려진 노사에 대한 비위를 알게 된 자신과의 갈등도 빠트릴 수 없다. 어디 그 뿐이던가. 자신을 노사의 후계자로 만들겠다는 어머니의 강박적 집념과 불륜, 결국 방화 직전에 노사가 베푼 은혜를 배신으로 보답하는 과정에서 보인 유곽에서의 동정상실 등 복잡한 사건들의 전개가 이어진다.

 

실제와 소설이 다른 점 중의 하나는 방화범 쇼켄은 다량의 수면제를 복용하고, 할복을 선택했지만(살아났지만, 결국 7년 간의 옥고를 산 뒤 죽는다), 소설의 미조구치는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어쩌면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한낱 부질없는 이미지의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의 어쩔 수밖에 없는 선택이라는 것일까. 훗날 미시마 유키오가 보여준 어이없는 죽음이 어쩔 수 없이 연상됐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교토를 소설의 공간적 배경으로 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일본 문화에 대한 짧은 이해 때문인지 우리에게 있었던 숭례문 방화사건에 대한 분노가 생기지는 않았다. 반세기도 전의 타국의 문화재에 대한 애착이 없어서였을까. 미시마 유키오가 구사하는 내용들에 대한 좀 더 심오한 이해가 뒷받침됐다면 전후 일본문학 최고의 성취 중의 하나로 손꼽히는 <금각사>가 더 친숙하게 다가오지 않았을까 하는 그런 아쉬움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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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고양이를 선물할게요
다빙 지음, 최인애 옮김 / 라이팅하우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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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에 도가 떨어졌도다>에 이어 소위 강호삼부작 중의 한편으로 전작에 이어 이번에도 감성이 물씬 풍기는 다양한 이야기 6편이 수록되어 있다. 사실이 아니면 쓰지 않는다는 작가의 호기찬 일성이 마음에 들었다. 그전에 프랑스 출신 작가 아니 에르노도 비슷한 말을 하지 않았던가. 다빙(大冰) 작가가 시전하는 글들은 내가 보기에 쓰디쓴 탕국보다는 따뜻한 치킨 수프 같은 스타일의 이야기들이지만, 아무려면 어떠랴 재밌고 따뜻한 이야기라면 더 바랄 게 없지 않은가.




전편 강호에서는 아마 책에 사진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번에는 몇 컷의 사진이 실려 있어, 우리에게는 새로운 이 ‘야생작가’의 면모를 엿볼 수가 있었다. 중국 SNS인 웨이보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하는 모양인데 기회가 된다면 웨이보 사이트를 방문해서 작가의 면모를 보고 싶다는 생각도 해봤다. 문제는 내가 중국어를 못한다는 게 큰 맹점.




원래 다른 책들을 잡고 있었으나, 다빙의 재밌는 글들은 내 기대를 훨씬 뛰어 넘었기에 주저하지 않고 책을 받자마자 바로 읽기 시작했다. 첫 꼭지인 타이틀 <당신에게 고양이를 선물할게요>를 읽고 나서, 역시 다빙이로구나 싶었다. 자신을 떠난 어머니가 주고 간 야옹이와의 추억을 되새기며, 기타를 뜯던 왕지양은 다빙의 작은 집 고정멤버로 활동하기에 이르렀다고 했던가. 부모가 부재하던 시절의 그들의 존재를 대신했던 야옹이에 대한 글로 워밍업은 충분했던 것 같다.


<어느 가수의 연애편지>에서는 결혼식날 사회를 보던 다빙이 직접 체험한 이야기를 재구성한 작품이다. 사람이 살면서 자신의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인연을 만나게 되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 이 좋은 날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 저우싼과 결혼에 골인하게 된 쉔쉔은 억센 신부 들러리들을 동원해서 남편에게 100번이나 사랑한다고 외치라고 말하고, 혼전임신을 당당하게 밝힌다. 이 글을 읽다 보니, 최근 뻔히 들어날 거짓말을 해서 누리꾼들의 지탄을 받고 있는 연예인 커플이 생각나서 쓴 웃음이 났다.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왜 거짓말을 했을까? 쉔쉔의 사랑하는 남편 저우싼에 대한 절절한 고백은 운명이라는 확신을 들었을 때, 후회하지 않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내걸었던 여걸의 현현으로 다가왔다.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나체도주 아니 야반도주를 하고 갖은 고생 끝에 결국 결혼하게 되었다는 말에 결혼식을 축하하러 온 하객들의 환호성을 극에 달한다. 그렇지, 모름지기 소설에 등장할 법한 사랑이라면 이 정도 급은 되야지 안 그래? 저우싼이 아내 쉔쉔에게 프로포즈하려고 만든 곡으로 대박이 났으니, 인간사 새옹지마라는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은 것 같다.


<나의 깡패 같은 애인>에 등장하는 사뭇 색다른 러브스토리도 재미에 있어서는 어느 작품에 뒤지지 않는다. 오골계탕을 들고 다빙에게 한 입도 줄 수 없노라고 뻐팅기는 깡패에 버금가는 박력의 주인공 마오가 어떻게 해서 일본 유학까지 하고 패션업계에서 잘 나가는 의류회사 사장이자 절세미녀인 나무 씨와 결혼하게 되었는지 그야말로 영화 <엽기적인 그녀>가 연상될 지경이었다. 옳거니! 닳고 닳은 다빙은 혹시 자신이 직접 들은 이야기에 살을 좀 붙여서 훗날 영화화를 염두에 두고 요런 재밌는 글을 쓴 게 아닐까나. 화류계 인생으로 금목걸이를 걸고 요란한 화장에 짧은 치마를 입은 여자들을 좋아하는 마오에게, 세상 경험 없어 보이고 세상 홀로 순수하게 사는 여자 나무 씨가 마음에 들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나무 씨는 마오가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줬다는 이유로 도시락 공세를 필두로 해서 직접 제작한 옷으로 그의 환심을 사려고 덤벼든다. 목석이 아닌 이상, 그런 나무 씨의 공세를 견딜 수 없게 되었지. 거두절미하고 서로 다른 두 남녀가 만나 행복하게 살 수도 있더라는 그런 이야기. 중국판 <엽기적인 그녀>의 영화화를 기대해 본다.


그 외에도 잘 나가는 직업을 포기하고 자신의 꿈을 쫓다가 잃어버린 사랑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태어나서 교사인 아버지 어머니에게 걱정거리 한 번 안겨 주지 않던 효자 아들이 죽으면서 남긴 유언을 다빙이 들어주는 이야기 그리고 다빙이 차린 주점에 터주대감처럼 들어앉은 대흑천, 다시 말해 검은 하늘 말똥가리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무겁지 않으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심금을 울리는 이야기들이 빼곡하게 독자를 기다린다.




중국 윈난성 리장에 주점 <다빙의 작은 집>을 차린 다빙 작가의 웨이보를 찾아봤다. 과연 그가 <당신에게 고양이를 선물할게요> “검은 하늘” 편에 나온 대로 기이한 동물들(무려 남미의 알파카!) 사진이 실려 있군. 무엇보다 강호의 의리와 싸나이들끼리의 약속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협객이자 야생작가인 다빙은 오늘도 특이한 헤어스타일과 특유의 깡다구로 무장한 채, 대륙을 휘저으며 독자들에게 들려준 진기하면서도 감동으로 가득한 이야기 거리 사냥 중이다. 다빙의 소재사냥을 응원한다. 동시에 소설 초반에 등장한 멋진 표현인 지행합일도 계속해서 유지하시길.


[뱀다리] 좌충우돌 대륙을 누비는 그의 글을 읽다 보니 한 이십년 전 일본 출신으로 그와 비슷한 궤적을 걸었던 다카노 히데유키의 글이 생각났다. 아마 더 이상 그의 글은 우리나라에서 출간되지 않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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