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의 하늘의 전사들 - 제2차 세계대전 독일 공수부대 팔쉬름얘거의 신화 KODEF 안보총서 4
크리스토퍼 아일스비 지음, 이동훈 옮김 / 플래닛미디어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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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유명한 HBO 전쟁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서 노르망디 상륙작전 직전, 101공수사단의 가너리아는 자신의 형이 이탈리아 몬테카지노 전선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분기탱천해서 프랑스 주둔 독일군을 마치 자기 형의 원수처럼 대하는 장면이 나온다. 예전에 컬렉션에 나섰던 한국일보사에서 나온 <WWII>의 이탈리아 전선 편에서도 몬테카지노 전투는 2차세계대전 사상 격전 중의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방어를 맡은 독일군 주력부대가 바로 크리스토퍼 아일스비가 기록한 <히틀러의 하늘의 전사들>의 주인공 독일공수부대, 팔쉬름예거다.

 

20세기 초, 잠수함과 동력 항공기의 등장은 전쟁의 모습을 바꿀 정도의 충격을 유럽에 전해줬다. 구식 전쟁만 경험해 왔던 구세대 장성들에게 전선을 돌파하는 전차를 필두로 한 기갑부대의 진용도 수용할 수가 없었겠지만, 공간에 수직이라는 개념을 추가한 항공전 그리고 항공기에 병사들을 탑승시켜서 전쟁에 사용한다는 방식은 아예 듣도 보도 못한 그런 새로운 형태의 전술이 아니었을까.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이탈리아와 붉은 군대가 가장 능동적으로 공수부대의 효용성을 깨닫고 도입하기 시작했지만, 정작 실전에 배치하고 놀라운 전과를 거두게 된 주체는 후발주자였던 독일이었다.

 

베르사유 조약으로 엄격하게 재무장에 금지된 독일이었지만 루프트한자라는 민간항공사에 조종사를 배치하는 방식으로 훗날 전선에서 활약할 항공기 조종사들을 양산하는데 전력했다. 물론 제3제국의 2인자인 공군원수 헤르만 괴링의 전폭적인 지원도 독일 공군 양성에 한몫했던 사실이다. 처음에는 육군에서 공수부대의 중요성을 깨닫고 공수대대 편제를 시도했지만, 괴링의 개입으로 육군 소속으로 맹훈련을 받아 오던 독일공수대대는 공군에 통합되어 편입되기에 이른다. 폴란드 침공으로 전쟁이 시작될 때까지만 해도 완편 사단은 없었지만, 전쟁이 진행되면서 지원병으로 구성된 공수사단이 확장되기에 이르렀다. 지상에서 4주, 공수훈련으로 4주 합해서 모두 8주간의 훈련과정을 거쳐 6번의 낙하훈련을 완수하면 공수휘장이 지급되었다.

 

독일 공수부대 팔쉬름예거는 처음부터 전술적으로 두 가지 임무를 축으로 삼았다. 첫째, 소수정예 낙하산부대로 적진 후방에 깊숙이 침투해서 통신선을 교란하고, 다리 같은 중요한 거점을 점령하고 보급을 저지하는 임무다. 문제는 기습적으로 이루어지는 군사행동이기 때문에 대포나 전차 같은 중화기를 보유할 수 없다는 맹점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경무장한 채 아군의 주력 부대가 정해진 기간 내에 작전을 완수할 때까지 적진에서 거점을 사수해야 하는 문제가 있었다. 여차하면 적의 대규모 부대에 포위되어 전멸할 수도 있다는 문제점이 지적되었다. 철저한 작전의 보안 유지와 신속한 후속부대의 진출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전쟁 중에는 주로 7공수사단이 이런 임무를 맡았다.

 

두 번째로는 강습병으로 구성된 완편 보병사단을 글라이더를 이용한 대규모 전개를 하는 작전이다. 22사단이 주축이 되어 비행장에 착륙해서 신속하게 화포와 같은 중화기를 산개시키는 훈련을 반복 숙달했다고 한다. 낙하산부대에 비해 기습능력은 떨어지지만, 적의 후방에서 대등한 화력으로 싸울 수 있다는 점이 강점이었다. 전자에 공군이 매료되었다는 후자는 육군이 선호하는 작전이었다. 그리고 정예 팔쉬름예거는 두 가지 모두 가능하다는 점을 실전에서 증명해 보였다.

 

육군 기갑부대 중심의 폴란드 전격전(블리츠크리크)에서는 공수부대의 활약이 거의 필요 없을 정도로 쾌속의 진격으로 폴란드 전역은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다음해 덴마크와 노르웨이 전역에서 비로소 공수사단의 활약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으며, 서부전역을 전세를 판가름한 1940년 5월 10일 시작된 프랑스 전투에서 발터 코흐 대위가 소속된 공수부대가 벨기에 에벵 에마엘 요새를 순식간에 장악하면서 연합군 기동부대의 시선을 벨기에쪽으로 돌리는데 성공하면서 독일군의 주공인 아르덴 공세를 성공하게 만드는데 혁혁한 공훈을 세웠다. 지난 주에 개봉해서 한창 인기몰이 중인 <덩케르크> 바로 전의 역사를 팔쉬름예거가 만들어낸 것이다.

 

도이치 팔쉬름예거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쿠르트 슈투덴트 장군은 여세를 몰아 대소전쟁에 앞서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 침공을 성공적으로 완수한 다음, 영국 해군의 준동을 막고 루마니아 플로이예슈티 유전을 연합군 폭격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팔쉬름예거에 의한 크레타 침공, 메르쿠르 작전을 시도한다. 작전은 결과적으로 성공하긴 했지만, 방어군의 격렬한 저항과 작전상의 여러 가지 오류 때문에 막대한 인원 피해가 발생하면서 제국총통 히틀러는 향후 다시는 이런 대규모 공수부대 작전을 기피하게 된다.

 

크레타 작전 이후 공수부대는 러시아전선과 북아프리카 전선에 투입되어 맹위를 떨치기는 했지만, 본연의 임무인 낙하산부대원으로서의 임무보다 정예 소방수이자 방어임무를 수행하기에 이르렀다. 북아프리카 전역의 튀니스 전투에서 람케 여단은 거의 전원이 생포되기도 했다. 영국이 주축이 된 연합군은 북아프리카 승전의 여세를 몰아 시실리에 상륙하면서 추축국의 일원인 이탈리아 침공에 나선다. 이탈리아 전선을 책임진 알베르트 케셀링 원수는 공간을 내주고 시간을 버는 방식으로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로마를 향해 북쪽으로 진격하는 연합군을 가로 막는 도상에 바로 몬테카지노가 있었다.

 

결국 연합군의 막대한 물량공세와 노르망디에서 시작된 제2전선으로 이탈리아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긴 했지만, 유럽의 ‘부드러운 아랫배’를 막아내는데 몬테카지노 전선에 투입된 도이치 팔쉬름예거 부대의 활약은 눈부셨다. 막강한 공중지원을 받는 영국군, 뉴질랜드, 인도군, 폴란드군과 미군으로 구성된 엄청난 부대를 상대로 몬테카지노의 폐허 속에서 팔쉬름예거 정예사단들은 그동안 실전과 훈련을 통해 단련된 초급장교들의 창의적인 작전으로 효율적으로 막아내는데 성공했다. 그렇게 시간을 번 케셀링 원수는 후방에 좀 더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할 수가 있었다. 팔쉬름예거 부대는 크레타에서 벌어진 실수를 바탕으로 실전에서 보다 막강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을 배양한 셈이다.

 

전역을 이동해서 노르망디 상륙 이래 북프랑스 특유의 산울타리 빌라 보카쥬 지형에서도 팔쉬름예거 부대원들은 탁월한 전투 능력을 보여 주었다. 도처에 산개한 독일군 부대들이 쏘아대는 총탄에 연합군의 전진 속도는 지지부진했다. 성공적인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유럽에서의 전쟁이 곧 끝나리라는 전망은 엄청난 상륙작전 뒤에 카랑탱과 캉에서 독일군의 강력한 반격이 시작되면서 무산되었다. 연합군 역시 전쟁을 이른 시기에 끝내기 위해 네덜란드를 해방시키고 독일 본토로 진입하겠다는 영국 몽고메리 원수의 원안을 바탕으로 한 마켓가든 작전을 시행하지만, 아른헴 인근에서 재편 중이던 독일 기갑부대의 활약으로 처참한 실패를 맛보게 된다. 1944년말 전개된 벌지 전투에서 최후의 공수작전을 시도해 보지만, 이미 전쟁의 귀추가 결정된 마당에 의미없는 작전이었다고 저자는 기술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팔쉬름예거가 투입된 가장 성공한 특수 작전의 하나는 무장친위대(Waffen SS) 소속 오토 스코르체니가 지휘한 그란삿소에 유폐된 무솔리니 구출작전이었다. 추축 동맹국인 이탈리아의 이탈을 막기 위해 총통은 정예 특공대를 투입해서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작전을 성공시켰다. 한 때 ‘유럽에서 가장 위험한 사나이’라는 별명으로 불린 스코르체니를 전설로 만든 구출작전이었다. 유고슬라비아의 요시프 티토 원수를 체포 혹은 사살하기 위한 제500친위공수대대의 <나이트 무브>는 거의 무모해 보이는 그런 작전이었다. 600명 남짓한 공수부대원들이 1만 2,000명 이상의 빨치산 부대가 집결한 드르바르 소읍을 공략한다는 거의 자살공격에 가까운 작전으로 공수부대의 손실은 막심했고, 고작 건진 거라고 티토의 원수 정복이 전부가 아니었던가.

 

독일군 전문가 크리스토퍼 아일스비 작가는 도이치 팔쉬름예거의 유래와 발전 그리고 종결에 이르는 전 과정을 담담하게 기술하고 있다. 그동안 볼 수 없었던 공수부대원들의 활약상을 담은 사진부터 시작해서, 팔쉬름예거의 명암을 그리는데 조금도 인색하지 않다. 있는 그대로의 역사 저술 그리고 판단은 독자에게 맡긴다는 저널리즘의 원칙에 충실한 저작이라는 느낌이다. 오랜만에 다시 만난 팔쉬름예거 신화는 또 새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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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2017-08-01 10: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

레삭매냐 2017-08-01 14:09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
 
보고 싶어서, 가고 싶어서 - 내게 왜 여행하느냐 묻는다면
박세열 글.그림.사진 / 수오서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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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먹고 나서 회사 동료들하고 이야기하는 도중에 지인이 여행작가인데 돈을 엄청 많이 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무엇이 부러웠을까? 돈을 많이 벌어서? 아니면 여행을 많이 다닐 수 있어서? 글쎄 대신 나는 내가 하는 여행 대신 타인의 여행기록을 읽으면서 내가 추구하는 방랑을 타인의 추체험을 대신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잠시 했던 것 같다. 이제 고생하는 여행은 그만이라는 생각도 잠시 들었노라고 고백하고 싶다.

 

여기 또다른 여행작가의 책을 읽었다. 박세열이라는 건축을 전공한 청년(?)의 여행 기록을 마주했다. 여행책에 빠질 수 없는 사진이 그리고 감수성 넘치는 문장으로 단장한 글들이 나의 눈길을 사로 잡는다. 문득 어떻게 하면 정말 다양한 스타일의 여행책들로 넘실대는 출판계에서 독보적인 컨텐츠로 승부를 내야 할까 하는 현실적인 문제에 도달하기도 했다. 이미 오기사 양반이 스케치 여행기를 선보이지 않았던가. 어느 출판사 모임에서 오기사 양반의 여행기록에 대한 강의를 들었던 생각이 절로 피어오른다.

 

박세열 작가의 글은 어떤 차별성을 가질까. 그것은 아마도 사람과 함께 한 추억에 대한 기록이 아닐까 싶다. 여행지에서 만난 이들을 단순히 사진찍기를 위한 피사체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지구별에 사는 동종의 호모 사피엔스로서 느끼는 연대감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작가는 부러 시간을 내서 그들의 이미지를 그려 나눠 주기도 하고, 즉석사진을 찍기도 하고 휴대용 인화기로 그들의 사진을 뽑아 주기도 한다. 당연히 그에 따른 상호반응이 따라오기 마련이다. 그 모든 것이 작가의 글감으로 훌륭한 소재가 된다. 스토리와 관계가 있는 여행의 기록이야말로 <보고 싶어서, 가고 싶어서>의 강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또 하나 흥미로운 지점은 작가가 벽화도 그린다는 점이다. 장기 여행자라면 누구나 하게 되는 고민이 바로 숙박과 비용의 문제다. 단기 여행자라면 상대적으로 비용 면에서 걱정할 필요가 없을 지도 모르겠지만, 장기 여행의 경우 오늘밤 어디에서 묵어야 하나가 큰 걱정거리 중의 하나가 아니던가. 행여라도 어떤 마음에 드는 곳이 생겨 오래 묵을 경우가 생긴다면 그만큼의 비용을 치러야 하지 않은가. 그런 점에서 호스텔이나 민박 벽에 멋진 벽화를 그려 주고, 그 대가로 무료 숙박하는 방법도 나쁘지 않을 듯 싶다. 물론 그러기 위해선 좀 뻔뻔하기도 해야겠고, 작가만큼 실력도 갖추어야 하겠지. 그런 기술이 없는 보통의 여행자는 꿈도 꿀 수 없다는 것이 맹점이겠지. 또 한편으론 돈 때문에 자신의 자유로운 여행에 족쇄를 채우는 것이 과연 옳은가하고 고민하는 지점도 마음에 들었다.

왜 우리는 여행을 떠나는 걸까? 일상을 함께 하는 주변인들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할 여유도 없이 지내면서, 모든 것이 낯선 여행길에서 만난 이방인들에게는 상대적으로 후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 걸까. 그건 아마도 같은 여행을 한다는 일종의 동질감 때문이 아닐까. 그것도 아니라면 나그네로서의 사물을 대하는 감정의 전이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흘러서일까. 나는 모르겠다. 여행길의 나그네는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한 장소에서 어떤 경험을 하느냐에 따라 그 장소가 지옥이 될 수도 천국이 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호주 케언즈에서 꽤 오래 머문 적이 있는데, 케언즈 야시장에서 두 번이나 강도를 당한 일본 친구에게 케언즈는 정말 끔찍한 장소였다. 같은 곳에서 지냈지만 그런 경험이 없는 나로서는 케언즈는 남국의 환상적인 도시가 아니었던가. 앙코르와트를 보기 위해 찾았던 캄보디아 씨엠립에서 가이드분은 버스에 올라탄 우리에게 여러분은 앞으로 며칠 동안 “원달러”의 환청에 시달리게 될 것입이다라는 경고를 해주셨고, 캄보디아는 처음인 우리는 그게 무슨 소리인지 몰랐다. 같은 체험을 했지만 박세열 작가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정작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소녀를 찾아다니는 장면에서는 왜 이렇게 찡하던지. 인도에서 만난 솜사탕 파는 소년과의 에피소드도 마음에 들었다.

 

장시간에 걸친 여행이 그대를 지치고 힘들게 만들더라도, 여행길에 나서면서 작심한 별 것도 아닌 일에 웃고 떠들고 장난치리라는 초심은 부디 잊지 마시길. 그리고 여행을 마치고 일상에 돌아와서도 여행길에 다른 나그네들과 함께 만들었던 소중한 추억을 그리며, 평상시에도 그런 너그러운 마음으로 다른 이들을 품을 수 있었으면 좋을 것 같다. 그러면 다시 나서게 될 다른 여행길도 한층 더 기대가 되고, 넉넉한 마음으로 준비할 수 있지 않을까. 여행책을 읽고 나면 언제나 그런 것처럼 그런 여행에 나서고 싶다. 여전히 세상은 넓고, 아직 만나 보지 못한 이들과의 인연이 기대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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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 제1회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수상작, 3판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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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책은 사서 읽는 게 아니라 가지고 있는 책 중에서 읽는 법이지. 소설가 김영하 씨가 인문 예능프로그램을 표방하는 <알쓸신잡>에서 한 말쌈이다. 게다가 그가 프로그램 중에서 언급한 프랑수아 사강의 케이스를 들며 말한 자신의 소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를 내가 마침 서가에 가지고 있어서 집어 들었다. 그게 딱 한 달 전이었다. 백쪽 조금 넘는 분량이라 금방 읽겠지 하는 얄팍한 계산으로 달려들었는데, 조금 읽다 말고 완독에는 실패해서 어제 새벽에 요시다 슈이치의 <퍼레이드>를 읽고 나서 재도전에 나섰다. 읽은 지점부터 읽지 않고,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그래봐야 처음부터 읽은 분량이 얼마 되지 않아 부담이 적어 다행이었다.

 

소설의 스토리보다 나는 소설 속에 들어 있는 이야기들에 관심이 갔다. 다비드가 그린 <마라의 죽음>, 클림트의 <유디트> 그리고 백제 의자왕 혹은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와 비슷한 경로를 겪은 바빌로니아 왕 사르다나팔의 이야기에서 작가는 죽음의 페이소스를 뽑아낸다. 소설 속 화자는 죽음의 안내자다. 오독이어도 상관 없다면 읽은 책을 다시 펴보지 않고 리뷰를 써보련다. 항상 하는 말처럼 책은 작가의 손을 떠나 독자에게 읽히는 순간, 또다른 항해를 하기 마련이니 말이다.

 

소설 속 화자는 자신을 파괴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 의뢰인들을 찾아 이런저런 이유로 실행하지 못하는 그들을 돕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그는 킬러인가? 직접 행위에 나서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를 킬러라고 부르는 것은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 그런 다음 그는 의뢰인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여행을 떠난다고 했던가. 탄생이 내 의지는 아니지만, 그 반대인 소멸 다시 말해 죽음은 얼마든지 선택가능하다는 점에서 김영하 작가가 소설의 제목으로 삼은 “나”의 파괴할 권리에 대해 어느 정도 수긍이 가기도 했다. 물론 전적으로 공감하는 바는 아니지만. 죽음에 대한 일종의 도전으로 받아 들여야 할까.

 

비디오 아티스트로, 그리고 총알택시 운전사로 일하는 형제의 갈등에 끼어든 한 명의 여자 유디트(세연)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요란한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유미미 모두 정체를 알 수 없는 화자에게 의뢰를 맡긴다. 내게도 익숙한 과천-의왕 고속도로를 바람을 나는 듯이 달려가는 트랙의 레이서를 능가하는 실력의 총알택시 운전사의 고독과 회한 그리고 잘난 형에 대한 시기와 질투 등 다양한 감정이 날것 그대로 숨쉬는 것을 나는 느끼기도 했다. 형이 소중하게 여기는 나비 컬렉션을 태우다가 집에 불을 낸 것도 동생이었다. 형은 동생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을 생각 없이 앗아간다. 형제에게 팜므파탈처럼 보이는 유디트, 세연 역시 마찬가지다.

 

생일날 폭설이 쏟아지는 고속도로를 달려 주문진으로 향하는 길에 나선 형과 유디트의 이야기는 그야말로 짐 자무시의 <천국보다 낯선>을 능가하는 낯설음을 독자에게 선사한다. 소설에 등장하는 개별 캐릭터들은 모두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다. 극한의 속력까지 내달리는 총알택시를 운전하는 동생, 형제라는 관계를 아랑곳하지 않고 무시하고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는 유디트, 섬망 같은 이미지를 좇는 비디오 아티스트 형, 도발적인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유미미 그리고 의뢰를 마치고 나선 비엔나 여행길에서 우연히 만난 홍콩에서 온 여성과 하룻밤을 보내는 화자에 이르기까지. 삶도, 죽음도 그들에게는 단지 선택의 문제였을까. 화자의 비엔나 에피소드는 영화 <비포어 선라이즈>를 연상시키기도 했다. 또 어느 장면에서는 최근에 읽고 있는 춘수 씨 장편소설이 떠오르기도 했고. 적어 놓았어야 했는데 미처 그러지 못해 망각 속으로 휘발해 버렸다.

 

엉뚱하게도 내가 아는 누군가가 자신을 파괴할 혹은 소멸시킬 권리가 자신에게 있다고 말한다면 난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까? 그의 선택을 존중해 주어야 할까? 아니면 그건 아니라며 결사반대에 나서야 할까? 나는 잘 모르겠다. 짧지만 강렬한 반향을 일으키는 그런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한 번 읽게 된다면 또 다른 차원에서 접근하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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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7-31 18: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설 속에 마라, 유디트, 백제 의자왕 그리고 사르다나팔루스까지 언급되는 걸 보면 역시 김영하 작가가 ‘알쓸신잡‘에 캐스팅된 이유가 있군요. 김영하 작가는 낯선 주제에 새로운 이야기를 창출하는 능력이 뛰어난 것 같습니다.

레삭매냐 2017-08-01 10:08   좋아요 0 | URL
전 사실 책 팔러 나온 줄 알았어요 :>
뭐 어느 정도는 사실이지 않을까요 ㅋㅋ

의자왕 이야기는 제가 넣은 거랍니다.
그림에서 소설 하나를 뽑아내는 실력이란
정말 대단하네요.
 
첫사랑 온천
요시다 슈이치 지음, 민경욱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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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급날이었는데 어제 나에게 작은 선물을 하나 해줬다. 알라딘 중고서점에 가서 줌파 라히리의 소설집 하나와 요시다 슈이치의 <첫사랑 온천>을 샀다. 여기저거시 많이 들어봤지만 요시다 슈이치의 소설은 처음으로 읽었다. 원래는 <일요일들>을 사러 갔었는데, 새로 나온 개정판 표지가 없어서 사지 않고 대신 절판된 <첫사랑 온천>을 샀다. 단돈 3,300원 그것도 15% 할인 받아서 2,800원에 데려왔다. 제법 괜춘한 책이 커피 한잔 값도 되지 않는다니. 물론 책의 가치를 단순하게 돈으로 매길 순 없겠지만 말이다.

 

퇴근 무렵부터 읽기 시작해서 자정을 조금 지나서 다 읽을 수가 있었다. 모두 다섯 개의 단편으로 구성된 소설집인데 배경은 모두 온셴(온천)이다. 엉뚱하지만 온천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를 읽다 보니 나도 일본 온셴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온천은 겨울 노천탕이 제 맛이 아닐까. 바깥에서는 흰눈이 펑펑 내리고 계곡 아래 자리 잡은 노천탕에서 피어오르는 김을 쐬며 ‘코히 비루’를 한 잔 마시면 세상사 다 잊을 수 있을 것 같지? 천만 요시다 슈이치는 세상사가 그렇게 만만치 않다고 소설에서 피력한다.

 

고등학교 시절 첫사랑을 잊지 못해 사력을 다해 성공의 정점에 섰다고 생각하는 순간, 시게타의 아내 아야코는 둘이 찾은 온천에서 이혼을 요구한다. 어쩌면 시게타의 모든 노력은 바로 아내의 이혼 요구를 듣기 전까지의 성취를 위한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리라. 아내는 왜 나한테 이혼을 요구하는 거지? 물론 도쿄 명문대를 나온 아내가 자신에게 과분한 여자라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게타는 다른 사람들보다 갑절을 노력으로 분위기 괜찮은 서민주점을 연달아 내며 성공가도를 달려오지 않았던가. 하지만 아내의 이혼 요구로 시게타의 모든 노력은 물거품이 되어 버린 것이다. 왜 이혼하고 싶은지에 대한설명은 여백으로 남긴다. 그래 인생은 그런 거지. 내가 아무리 열심히 한다고 해서 그에 대한 명백한 보상이 이루어지는 건 아니니까. 시게타의 스토리가 안타깝긴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기도 했다.

 

다음에 이어지는 수다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쓰지노와 와카나의 <흰 눈 온천> 스토리야말로 한겨울 온천 여행의 백미를 그대로 잡아준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다. 분위기 띄우는 거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두 사람이 만났으니 그 다음에 전개될 이야기는 명약관화하다. 쓰지노가 한 마디하면, 와카나도 열 마디로 대꾸하는 방식으로 둘의 만남은 그야말로 찰떡궁합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그런 어색한 분위기가 싫어서 의도적으로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적극적이었다는 고백이 이어진다. 그리고 타인의 이야기가 듣고 싶어서 그랬더고 했던가. 그렇지 침묵보다는 그런 게 차라리 낫지 않으려나. 한 겨울의 온천 별채에서 낯선 커플과 장지문 하나 사이로 묵게 된 쓰지노는 한밤 중에 찾은 온천탕에서 옆방 남자와 마주하게 되고 무언가 대화를 시작하려는 자신의 의도가 옆방 남자의 묵언 때문에 침묵에 빠지게 되며 소설은 끝을 맺는다.

 

동창 가즈미와 교토로 불륜 여행을 떠난 남자 유지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망설임의 온천>도 흥미롭다. 아내에게는 업무 차 출장 때문에 교토에 간다고 하고서는 최근에 만난 가즈미와 밀월여행에 나서는 남자. 무엇 하나 스스로 해내지 못하고 미루던 남자가 어떻게 불륜이라는 일탈을 과감하게 시도했는지 궁금하다. 가즈미와 택시 안에서 교토 여행을 기획하면서 내내 택시 기사 아저씨의 눈치를 보는 장면이 주는 스릴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어찌어찌해서 결국 교토에 도착하고 때마침 걸려온 아내의 전화 대화에 담겨 있던 ‘도쿄, 기록적인 폭염 40도’라는 단어가 자신보다 먼저 도착한 가즈미의 메모에 있는 것을 본 유지의 감정은 소용돌이치기 시작한다. 자신이 감행한 화려한 일탈이 어쩌면 아내와 가즈미가 친 덫이었을까.

 

보통 커플이 찾는 온천에 아내 마치코 없이 교스케는 보험회사의 일급 세일즈맨이다. 나같은 사람이 보면 정말 민폐 친구라고 할 수 있을 만한 캐릭터지만, 각자도생의 정글 같은 시절에 이보다 더 적합한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저돌적인 세일즈를 감행하는 사나이다. 교스케는 아내 마치코에게 좋은 집과 멋진 옷 그리고 맛있는 음식을 사주기 위해 마시고 싶지도 않은 술을 마시고, 고객들과 스키 여행을 갔다가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며 자신의 ‘노오력’을 적극적으로 어필해 보지만, 아내 마치코는 그가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순간 교스케의 아내 마치코는 정말 현인 같아 보인다. 보험 가입에 성공하면 그동안 공들인 교스케는 월급명세서에 찍힌 성취감을 누릴 지도 모르겠지만, 이후의 인간관계는 파탄의 수순을 걷게 된다. 처제의 신랑감을 만나는 자리에서도 오로지 보험을 판매할 생각만 하는 남자의 삶에 저절로 혀를 차게 된다. 나홀로 나선 온천 여행에서 만난 화장품 회사 사장 가오리를 설득시켜 보험판매에 거의 성공한 교스케가 들려주는 비밀은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마지막 고등학생 겐지와 마키 커플이 등장하는 에피소드는 거의 발칙하기까지 하다. 알바를 뛰어서 번 돈 3만엔으로 겁도 없이 온천 여행을 기획하는 겐지 군. 자신의 방에서 마키와 관계를 하다가 아버지에게 발각이 되는 장면 그리고 평생 마키 만을 사랑하겠다는 결심을 환상적인 섹스를 기대하며 찾은 온천에서 하게 되는 겐지의 천진난만한 생각에 그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어린 친구, 삶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게 아니라네. 어쩌면 이야기는 소설의 첫머리에 등장한 첫사랑에 성공했지만, 이별하게 되는 시게타 아야코 커플로 순환하게 된다.

 

200쪽 남짓한 <첫사랑 온천>으로 요시다 슈이치를 읽기 시작했다. 분량도 적당하고 온천을 공간적 배경으로 했다는 점에서 무리 없는 독서였다고 생각한다. 복잡한 책 읽기에 독서 슬럼프에 빠졋다면 슬럼프 탈출하는데 안성맞춤인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시다 슈이치의 책들은 그렇게 아껴 두었다가 책읽기가 지겨워졌을 때, 공명이 준 비단주머니처럼 하나씩 꺼내서 읽어야 하나 하는 즐거운 상상에 빠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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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26 14: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7-28 20: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우리의 남극 탐험기
김근우 지음 / 나무옆의자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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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요즘 모바일 세대는 20년 전, 최대 유행이었던 피씨통신의 하이텔이니 나우누리니 하는 말들이 낯설지도 모르겠다. 하긴 그 시절에 태어나지도 않았으니 알 수가 없겠지. 그 시절에 장르소설을 쓰던 이가 그렇게 시간이 흘러 이제 등단 소설가로 우리 곁에 다시 찾아왔다. 어쩌면 김근우 작가의 귀환은 소설 <우리의 남극 탐험기>에 주인공 ‘나’와 묘하게 등치되는 장면들로 시각화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뭐 그렇게 가는 거지.

 

대중소설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순수문학이고 싶은 ‘경계문학’의 작가라는 타이틀을 달아 드려야 하나. 동시에 아무도 찾지 않는 잊혀진 작가가 되는 두려움을 ‘나무야 미안해’라는 자학적 풍자와 해학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이 흥미로우면서 애잔하게 다가온다. 독자는 도대체 남극 탐험 이야기는 언제나 등장하는 거야 하면서 소설의 절반을 흥미진진하게 소화한다.

 

그렇다. 소설에는 언제나 운명적 만남이 있기 마련이다. 야구 선수를 꿈꾸는 소년이 7:0 콜드게임으로 질 운명의 게임에서 어떤 계시를 받아 미래가 촉망받는 선동현이라는 유망주 투수의 공을 담장으로 넘긴다고 하더라도 숙명은 바뀌지 않는다는 거. 그리고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 도전해야 한다는 언어유희의 소용돌이 속으로 작가는 독자를 쉴새 없이 재촉한다. 그런 작가의 ‘드라이브’가 솔직히 마음에 들었다. 공무원 아버지를 둔 흙수저 아들은 결국 느즈막히 공부를 시작해서 수포 영포 국포 등등을 거치면서 삼류 무광대학 경제학과에 진학한다. 그곳에서 A폭격기라는 별명으로 명명된 국문과 강지진 교수의 스포츠 용병이 되어 맹활약을 벌이기도 한다. 뭐 그 정도는 애교겠지. 그리고 운명의 사랑 강혜진을 만나 반년 가량 뜨거운 사랑 끝에 금수저 애인을 걷어차 버리는 기백을 보여 주기도 한다.

 

어찌어찌해서 소설가가 된 나의 이야기가 소설의 반쪽이라면, 다른 반쪽은 나의 남극 탐험을 가능하게 줄 광야의 초인, 아니 영국의 초인 어니 헨리 섀클턴 교수가 등장할 차례다. 모두 다 아는 인듀어런스 호의 기적을 만들어낸 바로 그 섀클턴 경 말이다. 이름도 똑같다. 그러니 백여년 전 결국 남극점을 밟는데 실패하고 채 오십이 되지 못한 채, 남극 부근의 사우스 조지아 섬에서 지구별을 떠난 섀클턴 경의 분신이 어느 순간 등장하리라는 건 명약관화한 사실일 수밖에 없다.

 

시각장애를 가지고 영국의 귀족집안에서 출생한 교수가 23세에 옥스퍼드 대학 박사 학위를 가지고, 케인즈주의 좌파연구의 한 획을 긋게 되는 것 또한 흥미로운 설정이 아닐 수 없다. 어린 시절의 학대와 차별 따위는 문제도 아니다. 김근우 작가는 섀클턴 교수의 신자유주의가 언젠가는 붕괴할 것이라는 계시와 헬조선의 밑바닥을 차근차근 긁고 있는 한때 경제학 전공자 ‘나’의 상황을 묘하게 연결시킨다. 만나야 할 사람들은 만날 수밖에 없다는 소설적 공식을 충실하게 따르면서.

 

시장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리라는 일명 시카고 학파 신자유주의 전도사들과 대처리즘의 기수 마거릿 대처 수상에 대한 신랄한 섀클턴 교수의 비판은 영국병을 치유한 것으로 오도된 대처리즘이 기승을 부리던 시절에는 목소리를 들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1997년 동아시아를 비롯해 우리나라를 강타한 IMF 위기와 월스트리트의 금융전문가들이 설계한 금융 파생상품에서 비롯된 2008년 외환위기는 섀클턴 교수를 21세기 경제 노스트라다무스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다시 어찌어찌해서 한국에 초빙된 교수는 찜질방과 식혜 그리고 화투에 매료되어 한국에 정착하게 되었고 운명적으로 출발은 장대하였으나, 슬슬 경계문학이라는 이도 저도 않은 글을 매일같이 생산해 내며 잊혀져 가고 있던 작가 나와 조우하게 되었다. 그래 그렇게 가는 거지.

 

작가가 구사하는 상당히 날카로운 현실비판에 이 놀라운 전개는 또 뭐지 하며 이 작가가 과연 그전에 고양이 잡아먹은 오리 타령하던 이가 맞나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자기 스스로 헛소리의 대가를 자처하는 그답게 독자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것을 나는 굳게 믿었고, 그것은 현실화되었다. 한국에서 섀클턴 박사와 나는 치열한 승부근성과 판돈이 난무하는 고도리 게임으로 일치단결해서 남극행에 나서게 된다. 일전에 읽은 마리아 셈플의 <어디 갔어, 버나뎃>에 등장하는 버나뎃처럼 진짜 남극 탐험에 나서게 됐다. 후유, 소설의 절반도 지나서 비로소 본 궤도에 접어든 기분이라고나 할까.

 

아직 영화 <인터스텔라>를 보지 못했지만 영화관람을 유도하는 현란한 소개와 더불어 나와 섀클턴 경의 무모한 남극 탐험 도전은 계속된다. 그리고 소설은 드디어 SF 계열로 점프를 시도한다. 말하는 북극곰 치피가 등장해서 탐험대의 일원이 되어, 썰매를 끌기도 하고 나와 박사를 업어 나르기도 한다. 북극에 살다 지구 반대편까지 찾아온 치피가 없었다면, 스노모빌이며 식량마저 바닥이 나 절망적인 순간에 하늘을 나는 펭귄들이 등장해서 펭귄 밀크를 제공하지 않았다면 그들의 무도한 도전은 그야말로 시작도 하기 전에 끝이 났을 지도 모르겠다. 남극신과 오래 전에 작고한 섀클턴 경이 보우하사, 나는 무사히 남극 탐험을 마치게 됐다. 동상으로 손가락 두 개 정도 잃은 건 아무 것도 아니라며 자신을 위로하면서 말이다.

 

그럴 가능성이 거의 제로지만, 과연 <우리의 남극 탐험기>가 영화화된다면 재밌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상상을 해봤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장르에 편입시켜야 할까? SF 공상과학? 탐험물? 좌충우돌 횡설수설 성장영화? 그 모든 카테고리에 다 들어갈 수 있다는 게 장점이면서 동시에 영화화에 장애물이 될 수 있겠지 싶다. 문학적 가치 따위일랑은 말 좋아하는 평론가 양반들에게 넘기고, 주말 동안 너무 재밌게 읽은 것만으로도 대만족이다. 왜 책 표지에 설산 위에서 춤추는 북금곰과 손잡은 펭귄이 있을까 싶었는데 책을 다 읽고 나니 바로 이해가 됐다. 김근우 작가가 앞으로 만들어낼 새롭고 멋진 횡설수설 퍼레이드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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