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루토에서 아침을 : 일반판
닐 조단 감독, 킬리언 머피 출연 / (주)다우리 엔터테인먼트 / 2007년 11월
평점 :
품절


 


 

감상일자 : 2017년 12월 1일 ~ 2일

 

패트릭 맥케이브가 쓴 동명의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한 킬리언 머피의 주연의 영화 <플루토에서 아침을>을 봤다. 소설도 출간이 되었으면 좋으련만 아쉽게도 책은 출간되지 않았다. 그래도 전작 <푸줏간 소년>은 나와 있어서 도서관에서 빌려다 보면서 영화도 보고 있는 중이다. 책이나 영화 모두 시작했지만 미처 끝내지는 못했다. 영화와 소설의 전개가 상당히 비슷해서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읽는 재미가 있더라.

 

아일랜드 출신 퍼트리샤 “키튼” 브래던이 소설/영화의 주인공이다. 그의 생부는 교구를 책임진 리암 신부(리암 니슨 분)로 사제 관저에서 일하던 아일리 버긴과 사이에서 키튼을 낳게 된다. 거 참 출발부터 거창하기 짝이 없구만. 우리의 관찰자 귀여운 울새 녀석들이 전달해 주는 정보만으로도 충분하다고나 할까. 출생의 비밀을 한가득 안고 태어난 키튼은 위탁가정에 보내져, 어려서부터 트랜스젠더의 끼를 활짝 펼쳐 보이기 시작한다. 의붓 누나의 옷을 입고 다니는 것으로 바를 운영하는 양모를 놀래키는 건 기본이었지 아마. 작문 수업 시간에는 자신의 출생에 대한 원색적인 글로 선생님들을 경악시키기에 충분했다.

 

호모라는 이유 때문에 그리고 같이 어울려 다니던 그다지 세련되지 못한 찰리, 어윈 그리고 로렌스 패거리는 댄스 클럽에서 퇴짜를 맞고 오토바이 폭주족들과 함께 어울리며 플루토에서 아침식사를 꿈꾸기도 한다. 태생적으로 사랑이 부족했던 키튼 양은 그놈의 진실한 사랑(true love)을 찾아서 그리고 유령 아가씨(phantom lady)인 어머니 아일리를 찾아 잠들지 않는 도시 런던으로 떠난다. 그 때 글램 록 밴드의 리더 빌리 햇처 야릇한 사랑에 빠지기도 하는데, 문제는 그가 아일랜드 공화군(IRA)의 일원이었다는 점이다. 자신의 거처가 IRA 전사들의 무기 은닉고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키튼은 절벽 밑으로 숨겨둔 총들을 모두 던져 버린다. 그 때 등장해서 키튼을 총으로 쏘고 파묻겠다고 협박한 IRA 전사 중의 한 명이 <푸줏간 소년>이었다는 점이 주목할 만했다. 수백년된 그놈의 지긋지긋한 종교분쟁 이슈가 어김없이 등장한다. 그리고 친구 로렌스가 IRA의 소행으로 추정되는 폭탄 테러로 죽는 사건이 발생했다.

 

어찌어찌해서 런던까지 흘러 들어간 키튼은 팬텀 레이디를 찾는데 여념이 없다. 키튼이 비가 내리는 잉글랜드 아니 대영제국을 대표하는 도시 런던을 누비는 장면은 처량하기만 하다. 탈바가지를 쓴 알바를 뛰기도 하고, 거리의 여인이 되어 변태(브라이언 페리 분)를 만나 교살당할 뻔 위기를 맞기도 하지만 샤넬 넘버 5로 위기를 모면한 키튼은 그럭저럭 도시에 적응한 삶을 살게 된다. 마술사 버티 본(스테판 리 분)을 만나 그의 조수로 두 번째로 연예계에 종사하기도 하면서, 그놈의 진실한 타령이 이어지기도 한다. 버티가 키튼에게 사랑을 고백하자, 안타깝게도 자신은 여자가 아니라고 키튼은 버티에게 고백한다. 버티는 그것도 이미 알고 있다고 했던가. 마릴린 먼로가 등장하는 그 유명한 영화 <뜨거운 것이 좋아>의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Nobody's perfect."라는 대사가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그렇지 아무도 완벽하진 않지.

 


그렇게 달달하게 진행될 것 같았던 이야기는 느닷없이 고향 찰리가 등장하고, 점점 IRA 활동에 개입하게 되는 어윈이 결국 총에 맞아 죽는 비극이 벌어진다. 기억을 더듬다 보니 시간의 흐름에 따른 전개의 순서가 어떤지 잘 모르겠다. 어윈의 아이를 지우기 위해 낙태시술소에 갔던 찰리는 결국 발걸음을 돌린다. 영국 병사들이 자주 들르는 댄스홀에 들렀다가 폭탄 테러라는 날벼락을 맞고 영국 경찰들에게 체포되어 두들겨 맞으면서도 헛소리를 늘어 놓는 장면은 정말 최고였다. 경찰들을 가지고 놀다시피 하던 키튼의 구금 기간이 끝나고 결국 그가 무고하다는 걸 알게 된 경찰들은, 갈 곳 없는 키튼이 계속해서 유치장 신세를 지겠다고 하자, 끌어내서 거리에 내동댕이 친다. 그래도 아주 인정머리가 없는 경찰은 아니었는지 대머리 경찰 아저씨는 키튼에게 갱생한 거리의 여인들과 함께 일할 새로운 일자리(핍쇼걸)를 소개해 준다. 아 정겨워라.

 


비교적 조용한 나날들을 보내던 키튼에게 리암 신부가 찾아와, 마침내 팬텀 레이디의 소재를 알려 준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파드레 리암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도 이 영화에서 손을 꼽고 싶은 장면 중의 하나였다. 소설에서는 모두 56개의 챕터로 구성이 되어 있었는데 영화에서는 아마 36개로 축약되어 있었지 싶다. 소설의 구성을 충실히 따르는 면면이 인상적이었다. 결국 텔레폰 레이디를 변장해서 자신이 그렇게 애타게 찾던 어머니 아일리는 만난 키튼은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고 조용히 떠난다. 어윈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사제 관저에 머물고 있던 찰리를 찾은 키튼은 누군가 던진 화염병에 사제 관저가 전소되면서 죽을 뻔한 위기를 맞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우연히 팬텀 레이디와 조우하는 것으로 영화는 끝을 맺는다.

 

그렇게 영화를 보고 나서 원작 소설이 너무나 궁금해졌다. 북디파지토리에 주문했다가는 해를 넘겨서 책을 받을 것 같았다. 지난 달에 주문한 앨런 홀링허스트의 <라인 오브 뷰티>가 마침내 오늘 도착했다. 아주 두툼했다. 그래서 국내에서 애정하는 하드커버 버전으로 중고책을 주문했고 어제 받았다. 빠르기도 하여라. 언제 다 읽게 될 진 모르겠지만, 거북이 속도로 읽어볼 계획이다. 아무래도 책하고 소설은 또 다른 느낌이겠지.

 

출생의 비밀로부터 시작해서 트랜스젠더로서의 삶, 영국인이 아닌 아일랜드 인으로 뿌리도 없는 본토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하는 키튼의 처지가 왜 그리도 안쓰러워 보이던지. 하도 들어서 이제는 진부해져 버린 ‘트루 러브’(아, 마돈나의 그 시절 노래가 생각나는구나, 쏘리 트루 러브가 아니라 트루 블루였다!) 타령까지 이어지는 엄마 찾아 삼만리 스토리라는 신파에 쓸려 다니다가, 느닷없이 해묵은 갈등인 IRA라는 정치적 이슈까지 넘실대는 <플루토에서 아침을>은 정말 매력적인 영화였다.

 

이제 슬슬 원작 소설을 아주 조금씩 야금야금 그렇게 읽어 보자. 완독이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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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하는 자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8
토마스 베른하르트 지음, 박인원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내가 어떻게 해서 토마스 베른하르트를 알게 되었고 이 책을 읽게 되었더라.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어느 신문에서 장정일 작가의 글을 보고서였던 것 같은데. 당장 도서관으로 달려가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책 세 권을 빌려 왔다. <몰락하는 자>, <비트겐슈타인의 조카> 그리고 <옛 거장들> 이렇게 세 권이었다. 그 중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조카>에 가장 관심이 갔지만, 우선 <몰락하는 자>부터 읽기 시작했다. 사실 읽는 다는 게 중요하지 다른 뭐가 중요하겠냐만.

 

불과 지난 주에 읽은 책이건만 왜 다른 건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고 오직 글렌 굴드만 기억나는 걸까. 1932년 캐나다 터론토에서 태어나 50평생을 불꽃 같이 살고, 우리에게 <골트베르크 변주곡>이라는 역사에 남을 레코딩을 남겨 주고 떠난 기인 피아니스트. 위키피디아를 검색해 보니, 유대인으로 오해 받기도 했다고 한다. 나도 오래 전에 한창 클래식 음악을 듣던 시절에 그가 죽기 전에 녹음을 마친 소니에서 나온 <골트베르크 변주곡>을 샀던 기억이 난다. 그 시절에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했던 CD들이 지금은 어디에 가 있는 지도 모르겠다. 한 때는 그렇게 소중했었는데 말이다. 사실 대위법 같은 전문적인 지식도 없고, 주로 피아노나 바이올린 소품을 즐겨 들어서 굴드의 <골트베르크>에는 그다지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다가 이 책을 읽게 되면서 1955년에 그가 녹음해서 변방의 피아니스트에서 일약 세계적 피아니트스로 발돋움하게 된 녹음도 찾아 들어 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유튜브는 시대의 총아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소설 <몰락하는 자>는 천재 글렌 굴드를 중심으로 소설의 화자인 철학자 “나”와 굴드의 천재성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한 “몰락하는 자” 베르트하이머에 대한 이야기다. 다른 분야는 모르겠지만 특히나 음악 분야에서는 노력으로 천재성을 따라잡을 수가 없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의 진부한 이야기는 굳이 더 할 필요가 없겠지. 소설에서 베르트하이머도 충분히 뛰어난 피아니스트가 될 수 있었지만, 굴드의 연주를 듣는 순간 철학자 나처럼 연주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는 나는 그렇게 아끼는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학교 선생님의 딸에게 그냥 줘버리지 않았던가. 내가 부모에게 반항하는 취지에서 피아노 연주자의 길에 들어섰다고 했던가? 아니면 베르트하이머였던가. 불과 읽은 지 일주일 밖에 안된 책에 대해서도 이렇게 기억을 하지 못하다니. 솔직하게 말해서 오로지 이 책을 읽으면서 의 관심은 글렌 굴드 뿐이었다.

 

 

유튜브로 그의 1955년 <골트베르크 변주곡>을 감상했고, 나아가 바흐의 <푸가의 기법>도 들어봤다. 항상 자신이 애용하는 피아노 의자를 가지고 다니며 뜨거운 수건으로 손을 마사지하고, 자신이 연주하는 멜로디에 허밍을 넣었다지 아마. 아마 어쩌면 정격연주를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 이들에게 현대를 대표하는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는 이단아였으리라. 연주회장의 긴장과 스릴을 무척이나 싫어했던 굴드는 집안에서 아늑한 환경에서 들을 수 있을 레코딩을 더 선호했다고 한다. 실제로 1964년 4월 10일 로스앤젤레스 연주를 마지막으로, 실황연주로 그의 음악을 더 이상 들을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나와 죽은 베르트하이머 그리고 굴드가 빈에서 호로비츠를 사사했다고 하는데, 실제로 굴드가 내가 생각하는 그 피아노의 거장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에게 사사받았는지는 미지수다. 굴드에게 영향을 준 연주자로는 폴란드 출신 미국 피아니스트 조제프 호프만이라고 하는데, 나로서는 생소한 인물이다. 아르투로 슈나벨 정도까지는 알지만 말이다. 한때 마우리치오 폴리니가 공장 노동자들을 위해 피아노를 연주했다고 하지만, 여전히 클래식 음악은 부르주아 계급을 위한 음악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일단 진입장벽부터 쉽지가 않다. 클래식 음악을 들으러 갈 때, 청바지에 편한 복장으로 간다는 소릴 들어 보았는가.


소설에 등장하는 세 명의 피아니스트 역시 집안이 부유해서, 자식의 피아노 공부를 유지할 수 있었다. 다른 예술 장르와는 달리 피아노 같은 경우에는 사적인 레슨비가 절대로 필요하다. 실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자신의 노력과 천재성 그리고 경제적 후원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몰락하는 자 베르트하이머는 가난한 타인에게는 아낌없이 선행을 타인에게 베풀지만 자신과 동생에게는 유독 혹독하다. 마침내 결혼해서 자신의 그늘에서 탈출한 동생에게 복수하기 위해 오스트리아의 안락한 집을 떠나 멀리 스위스에까지 가서 자살한 모습에서는 정말 할 말을 잃었다. 자신은 떠나 갔을 지 모르겠지만, 이승에 남은 이에게는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를 남겨 주지 않았던가.

 

베르트하이머가 피아노 연주의 세계를 떠나 정신과학에 안착했다면, 철학자인 나는 멀리 스페인의 마드리드 프라도 가에서 에세이 작가로 새출발에 나섰다. 다만, 그 주제가 굴드론이라는 문제였지 않았을까. 그만큼 천재성의 스펙트럼이 보여주는 자장은 우리가 생각하는 상상의 범주를 가뿐하게 뛰어넘는다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뭐 그렇게 가는 거겠지.

 

결말이 기억나지 않아, 다시 책을 펼쳐 보니 죽은 베르트하이머의 방에 들어가 마침 레코드 플레이어 위에 놓여 있던 굴드의 <골트베르크 변주곡>을 듣는 장면으로 끝난다. 역시 그랬군. 이번엔 <비트겐슈타인의 조카>를 읽을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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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
산도르 마라이 지음, 김인순 옮김 / 솔출판사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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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독서모임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던 적이 있다. 미국 사람들은 미국 소설만 읽기에도 바쁘다고. 하지만 우리는 미국 소설은 물론이고, 영국 소설, 중국 소설, 일본 소설 그리고 심지어 아프리카 소설까지 읽는다며 즐거운 담론을 나눈 기억이 난다. 그리고 이번에는 헝가리 작가 산도르 마라이가 쓴 <열정>을 읽었다. 우리 독서가들의 스펙트럼이 이 정도라는 말을 하고 문득 하고 싶었다.

 

산도르 마라이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 출신으로 독일어로 작품활동을 했다. 덕분에 루마니아 출신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헤르타 뮐러 생각이 났다. 그리고 보니 노벨문학상 이후로 그녀는 작품활동을 하지 않나. 전혀 소식이 없다. 또 샛길로 샜구나. 조국을 떠나 망명생활 끝에 1989년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권총자살을 했다고 한다.

 

알라딘 이웃인 폴스타프님의 서재에서 보고서 지난 주말에 헌책방에서 사다 읽기 시작했다. 참고로 산도르 마라이 작가의 책을 세 권 샀다. 커피 한 잔 값도 안되는 가격으로. 작고하신 작가에게 조금은 미안한 감정이 일었다. 누군가의 노고가 너무 작게 평가되어서. 어쨌든 금세 다 읽을 줄 알았는데 5일이나 걸렸다. 바로 다 읽기엔 서사의 전개가 조금은 지루했다고나 할까. 소설 <열정>은 1899년에 헤어져 자그마치 41년 만에 다시 나타난 오랜 친구 콘라드의 출현과 그를 기다린 남자이자 장군 헨릭이 풀어내는 ‘진실’에 관한 이야기다.

 

헝가리의 고색창연한 성에서 아버지와 파리 출신 어머니도 세상을 뜨고, 사랑하는 아내 크리스티나 마저 없는 가운데 장군 헨릭은 90세의 유모 니니와 흘러가는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 오래 전 자신의 곁을 떠난 콘라드가 자신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41년 전, 묵은 비밀을 풀기 위해 성대한 준비에 나선다. 헨릭이 추구하는 진실에 얽힌 비밀이야말로 소설의 핵심이기 때문에 더 이상 이야기할 수가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조금 더 들어가 본다면, 자그마치 41년이라는 세월이 지닌 무게가 감당하지 못할 진실이 과연 세상에 존재할까. 75세의 헨릭은 이미 한 번의 세계대전과 두 번째로 시작된 세계대전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렇다 헨릭은 사관학교 출신으로 군대에서 경력을 쌓아 장군이 되었다. 근위장교 출신 아버지 밑에서 자란 헨릭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사랑 뿐이었다. 부와 명예 모두가 이미 주어진 것이었다. 반면에 그의 24년 지기 콘라드는 갈리시아 출신으로 미래의 장교가 되기 위해 빈에서 소용되는 모든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가난한 부모님들은 끼니를 굶거나 극도의 절약을 감수해야 했다. 헨릭의 아버지는 이미 콘라드가 미래에 좋은 군인이 되지 못할 것이라는 것도, 헨릭과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점을 간파했다. 1+1은 그나마 균형을 유지할 수 있지만, 1이 더 추가되면 당연히 관계의 균형이 무너지지 않을까. 소설 후반에 전개되는 진실에 관한 작은 단서 하나를 여기에 심어 둔다.

 

개인적으로 내레이터를 맡은 소설의 주인공 헨릭의 이야기에 매료가 되었다. 수많은 사유와 가능성에 대한 타진을 거듭한 결과 헨릭이 도달한 결론은 씁쓸할 수 밖에 없었다. 다만 후반으로 갈수록 헨릭의 이야기가 조금은 진부해지고 장황해지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어쩌면 전통적 문학 시대에 산도르 마라이 작가가 쓴 글이 모든 휙휙 지나가고 변신을 거듭하는 모바일 시대에 어울리지 못하는 것일 수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독서가 개인이 작가의 시대에 투영해 들어가봐야 하는데, 아쉽게도 지난 세기 귀족들의 세계와 빈의 상황에 그렇게 익숙하지 않으니 부족한 잣대로 판단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저자가 주목한 모든 관계에 대한 수십년 간의 사유를 거친 통찰에 대해서는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신분이나 계급을 초월한 우정이 존재할 수 있을까. 한 명은 자존감으로 똘똘 뭉쳐서, 부유한 친구의 어떠한 금전적 지원도 마다하지 않는가. 어쩌면 그런 관계야말로 상대방에게 종속되리라는 것을 직감한 청년의 냉철한 판단이 아니었을까.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과 다른 세계에 속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다시는 만나 보지 못할 ‘컬렉션’이라는 걸 알면서도 흔쾌하게 놓아줄 컬렉터가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그 모든 것을 다 깨닫게 되었을 적에는 이미 그 무수한 시간들이 다 지나가 버린 것이 아닐까.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그렇다면 우리 삶은 도대체 무슨 의미란 말인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소설 <열정>의 독일어 원제는 <Die Glut>라고 한다. 우리의 친절한 네이버 사전의 도움으로 찾아보니 열정은 비유적인 뜻이고, 작열-열화 혹은 잉걸불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소설과 아무런 상관이 없겠지만 내 삶에 열정은 어디쯤에나 있는지 혹은 존재나 하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아, 산도르 마라이의 다른 소설 <성깔 있는 개>를 바로 읽기 시작했다. 좀 재밌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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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renown 2017-12-05 10: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비회원 댓글 폭격사건은 해결되었는지 모르겠네요.. 요즘은 댓글 달기가 무서워요..ㅎㅎ. 그새 중고서점에서 쓸어오셨군요. 대단한 ‘열정‘입니다. 자신의 열정 유무에 대해 의심하지 마세요. 이것 만으로도 충분히 증명되니까요.^^.

레삭매냐 2017-12-05 14:05   좋아요 1 | URL
그게 비회원들의 댓글 폭격이었군요...

책에 대한 열정! 읽기보다는 컬렉션에 집중
하는 듯하지만 말이죠!!! 쿵야

sprenown 2017-12-05 15: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 그렇다고 자폭까지..

2017-12-07 13: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07 14: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춘추전국이야기 11 - 초한쟁패, 엇갈린 영웅의 꿈 춘추전국이야기 11
공원국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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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2010년부터 시작된 장장 7년에 걸친 공원국 작가의 <춘추전국이야기>가 마침내 종결점에 도달한 모양이다. 보통 춘추전국시대의 끝은 진시황의 전국통일로 보는데, 공원국 작가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진나라의 멸망과 초한쟁패에 이은 한나라의 건국까지 내달렸다. 처음에 저자가 알려 주듯이 주된 사료는 태사공 선생의 <사기>와 반고의 <한서>를 참고하였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아주 오래 전에 만난 김팔봉 선생의 <초한지> 이래 다시 압축본으로 초한쟁패를 만나보게 되어 즐거운 마음이 들었다. 다시 만난 세계와의 조우, 정도로 해두자.

 

진시황이 건설한 거대 제국 진의 균열은 하남 출신 진승과 오광의 작은 반란에서 시작되었다. 변방의 수자리로 동원된 일단 농민들이 큰 비를 만나 정해진 날짜까지 출두하지 못하게 되자, 내친 김에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진나라의 가혹한 형벌이 제국의 번영을 약속하는 대신 붕괴를 가져오게 된 것이다. 여전히 계급사회였던 시절에 진승과 오광은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느냐는 간단하면서도 효과적인 선전선동으로 일약 반란군 스타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특히 진제국의 통치에 가장 불만을 품고 있었던 초나라를 근거로 삼아 수도 함양으로 진격을 개시한다. 진승과 오광의 반란은 사방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한다. 장이와 진여의 조언을 받은 무신은 하북을 정벌한다. 이 때 등장해서 무신에게 진왕 진승을 배신하라는 권고를 한 사람이 바로 훗날 그 유명한 한신에게도 비슷한 권고를 했던 괴철(혹은 괴통)이다. 오합지졸의 진나라 지방군을 상대하던 반란군의 기개도 비록 수인 부대긴 하지만 장함이 이끄는 진나라 정규군과의 대결에서는 별무소용이었다.

 

통일제국 진나라의 무리한 건설사업, 대외원정 그리고 그런 사업비를 감당하긴 위한 관리들의 가혹한 수탈이 결국 관중을 제외한 피지배 지역이었던 산동지방의 군웅할거를 야기했고 진승과 오광의 반란에 이어 유방과 항우로 대변되는 두 스타 반란군에 의해 결국 진나라는 망국의 길을 걷게 되었다. 자, 그렇다면 과연 중원의 지배자는 누가 될 것인가를 두고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존재할 수 없듯이 두 영웅들은 명운을 건 승부에 나서게 된다. 초한쟁패의 초반만 하더라도 압도적인 무력을 자랑하는 항우의 승리가 결정적으로 보였지만, 끊임없는 패배에도 불구하고 전략가라기 보다 정치가다운 면모를 보인 협객 유방이 관중을 틀어쥔 상국 소하의 지원, 최고의 전략가 한신의 지원에 힘입어 마침내 5년여에 걸친 천하쟁패를 마치고 승리하게 된다.

 

물론 간략하게 정리된 초한쟁패 와중에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했지만, 저자에 의하면 관중에 설계했다는 춘추전국 시대를 지나 중국의 원형이 되는 400년 한제국을 건설한 협객 유방만한 걸물은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협객 유방이야말로 진나라 법치주의자들이 가장 두려워한 존재였다. 젊어서부터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유방은 초나라를 대표하는 명문가 출신의 항우와는 출생부터 달랐다. 압도적인 무력을 자랑하는 항우가 서초패왕으로 거록에서 진나라 항병들을 생매장하고, 진나라의 수도 함양에 들어가 아방궁을 불태우고 약탈하고, 초의 의제를 시해하면서 천하의 인심을 잃는 동안, 파촉으로 쫓겨 들어간 유방은 착실하게 내실을 다지면서 중원공략을 준비했다. 가혹한 악법에 시달리던 관중 사람들에게 유방은 약법삼장이라는 유명한 정치선동으로 호소해서 지루하게 이어질 수년간의 전쟁의 기반을 선취하는데 성공했다. 물론 유방 진영의 선동이 주효한 탓도 있겠지만, 항우가 항상 후방에서 자신을 위협하는 제후 반란군의 위협(도둑왕 팽월의 유격대 활약상)에 시달려야 했다. 형양과 성고에서 유방을 포위해서 충분히 최후의 승리를 거둘 수 있었지만, 그러지 못했고 해하에서 단 한 번의 패배로 천하쟁취를 꿈꾸던 역발산기개세를 자랑하던 항우의 꿈을 스러져 버렸다.

 

중원을 차지한 유방은 제국의 안정을 위해 연이은 제후들과 공신들의 반란 진압에 여념이 없었다. 수년 간에 걸친 전쟁 때문에 지배자는 시급하게 민생고를 해결해야 한다는 뛰어난 정치감각을 발휘했다. 비슷한 처지였던 진시황이 전혀 다른 방식으로 민중의 지배에 나섰다면, 민중의 피폐함을 잘 알고 있던 유방은 관용이라는 방식으로 제국의 기초를 다졌다. 그동안 수많은 초한쟁패를 다룬 책들을 읽어 왔지만 저자처럼 법률과 경제적 측면에서 시대상을 분석한 글을 처음으로 접한 것 같다. 신선한 시도였고, 미시적 접근방식이 인상적이었다.

 

수많은 민중의 요역이 필요했던 대역사도 그랬지만, 흉노를 정벌한다는 야망에서 시작된 대외원정 역시 엄청난 비용이 필요했다. 특히 전쟁에 반드시 필요한 마필 확보는 거의 불가능했다. 중원에서 말을 길르기에는 거의 불가능했고, 오랑캐 지배권에서 말을 사들이는 것도 요원했다. 보급은 또 어땠을까? 수송에도 말이 필요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렇기 때문에 대규모 기병전에서 흉노를 이길 수 없는 상황이지 않았을까. 한나라의 영역을 최고로 끌어 올린 정복군주 한무제에 대해서도 저자는 신랄한 비판을 아끼지 않는다. 수많은 비용이 드는 전쟁이 끊이지 않았고, 비용 마련을 위해서인지 어쨌는지 매관매직이 횡행했고 가혹한 혹법이 다시 등장해서 민생경제를 가히 파탄지경으로 이끌어 갔다고 한다. 이런 점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던 한나라 시조 고제 유방은 어쩔 수 없이 수많은 내전을 치르면서도 불필요한 전쟁은 최대한 억제했다.

 

한나라의 지배 이데올로기가 되는 유가사상의 도입에 있어서도, 모든 것이 경제가 잘 돌아가야 나라의 기강이 설 수 있다는 점도 황제는 잘 알고 있었다. 후대 사가들은 사료와 유물로 한 대의 법률 역시 진대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는 혹률이었다고 주장하지만, 진을 계승하면서 법률까지 계승한 한나라의 경우 핵심은 법률을 집행하는 최고권력자의 유연한 태도가 결정적 차이가 아니었을까. 고대 사회에서 현대사회에서와 같은 고도로 발달된 효율적인 행정서비스를 기대하는 건 무리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법가 정신으로 무장된 진나라 관리들은 혹형을 선호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유연한 법 적용을 자랑했던 고조 유방도 국가반역죄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이 최고형으로 다스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다만 전시라는 특별 상황 때문에 그리고 천하에 나는 항우와는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선전을 위해서라도 덕침에 방점을 찍었던 게 아닐까 싶다.

 

행동이 개돼지 같아도 집만 부유하면 세도를 부렸습니다.

 

태사공 선생의 <사기> 가운데 법률 적용에 관해 <공우열전>에 나오는 글이 책에 인용되었는데, 자그마치 2천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도 비슷한 일들이 반복적으로 뉴스에 등장하는 걸 보면 역사 발전의 법칙이 시대가 바뀌어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에 씁쓸해졌다. 마지막 권을 다 읽고, 되돌아 관중이 설계한 춘추전국시대를 다시 한 번 읽어 보고 싶어졌다.

 

[뱀다리] 오탈자와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를 정도로 문법에 어긋난 소유격 부분에 대한 오류들은 상당히 심각한 수준이다. 장이와 진여 중에 장이를 전국시대 장의로 착각했는지 왜 그렇게 장의라고 표기되어 있는 부분이 많은지 모르겠다. 일개 독자도 짚어낼 수 있는 정도의 오류가 너무 많아 실망스럽다. 각각의 이유로 별 한 개씩을 제외했다. 책의 완성도를 해치는 해당 문제를 사전에 왜 조치하지 않았는지, 책이 나오기 전에 꼼꼼한 교정에 다시 한 번 제고해 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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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lmo 2017-12-06 18: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시리즈를 읽다가 초중반 어디에서 ‘일단‘ ‘아주 오래‘ 멈춤입니다.
제가 중국 역사쪽으로 완전 소박하여 못 따라가는게 우선 인것 같고요.
일단 팟캐스트 프로그램으로 워밍업을 하려 하는데,
님의 좋은 리뷰를 읽으니, 완전 자극이 됩니다.
고맙습니다, 꾸벅~(__)

레삭매냐 2017-12-06 18:05   좋아요 0 | URL
어려서부터 사기열전이나 열국지 같은 중국
역사 서적들을 많이 접하다 보니, 사실 새
로운 내용은 그닥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다만 경제적 차원이난 법률을 분석하는 접근
방식은 인상적이었습니다.
 
1517 종교개혁 - 루터의 고요한 개혁은 어떻게 세상을 바꿨는가 지성인의 거울 슈피겔 시리즈
디트마르 피이퍼 외 지음, 박지희 옮김, 박흥식 감수 / 21세기북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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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루터가 독일 변방의 비텐베르크 성당에 95개조의 반박문을 게시하면서 시작된 종교개혁 500주년이다. 그리고 레닌의 러시아 혁명 100주년이기도 하다. 전자가 신 중심의 세계관에서 인간 중심의 세계관으로의 전이라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사회적 변혁을 이루는데 중점적인 역할을 했다면, 후자는 인간해방의 관점에서 또다른 혁명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후자에 대해서는 공산주의 몰락 이후, 종주국 러시아에서조차 예전 같은 대우를 못받고 있는 것 같다.

 

교회는 한국에 와서 대기업이 되었다

 

우스꽝스럽게도 한국 교회는 루터의 종교개혁 정신과는 정확하게 정 반대로 가고 있다. 전세계에서 최고 신도수를 자랑하는 어느 교회의 목사는 130억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금액의 배임죄로 유죄확정이 되었고, 성범죄 전력의 목사가 어떠한 치리도 받지 않고 버젓이 목회활동을 하고 있다. 타락한 중세교회의 전범을 그대로 따라가는 모습은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이라도 하듯이 부자세습을 완료한 대형교회의 양태에서 완료되었다. 루터가 한국에 와서 대기업이 되어 버린 21세기 한국 교회의 모습을 본다면, 분연히 두 번째 종교개혁을 외치지 않겠는가.

 

장 칼뱅의 장로교가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우리나라에서 루터의 종교개혁은 큰 의미로 다가 오지 않는 모양이다. 동아시아 최고의 개신교 국가라는 명칭이 무색할 정도로 종교개혁 500주년이 조용한 기세다. 독일에서는 국가적 차원에서 10년 전부터 종교개혁에 대한 다양한 연구가 이루어졌다고 하는데, 종교인 과세 같은 맘모니즘 이슈에 대해서는 벌떼 같이 일어서는 종교인들이 중세교회보다 더 중세교회 같은 모습으로 변해 가고 있는 한국 교회에 대해서는 아무런 비판도 하지 않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암울하기 짝이 없는 현실적인 이야기에서 다시 책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이탈리아 북부에서 시작된 15세기 르네상스는 한 세기 뒤에 영방국가 독일에서 종교개혁으로 개화되었다. 로마의 베드로 성당 건축을 위해 시작된 면죄부 발행은 중세 기독교 타락을 상징하는 결정적 장면이었다. 독일 민중들은 교회가 자기들에게 수탈한 돈을 로마로 보내는 것을 도저히 인정할 수가 없었다. 르네상스 시절에 발흥한 인문주의가 민중들에게 영향을 미친 탓이었을까. 신본주의 계급사회에 대한 민중의 불만이 무르익을 무렵, 독일의 변방 작센 주에 자리잡은 비텐베르크의 젊은 수도사가 개혁의 불씨를 당겼다. 로마에 저항하는 수도사라는 더없이 좋을 구호로 무장한 마르틴 루터의 등장이었다. 당시 지배계급이 사용하던 라틴어가 아닌 민중의 언어인 독일어로 때마침 발전하기 시작한 인쇄술의 도움으로 루터의 주장은 독일 전역에서 호응을 얻기 시작했다. 라틴어 불가타 성경의 오역을 지적하고, 가톨릭의 보속을 부정하고, 가톨릭 사제를 부인하는 만인사제설 그리고 믿음과 은총으로 하나님과 소통하겠다는 루터의 주장이야말로 시대정신에 부합했던 것이다.

 

이런 이단적 주장에 로마 교황 레오 10세는 젊은 수도사를 파문하기에 이르렀고, 가톨릭을 신봉하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칼 5세는 1521년 보름스 제국회의에서 그의 안전을 보장하고 그의 주장을 들어 보기에 이른다. 이렇게 이어지는 급박한 사태의 전개에서, 개신교쪽으로 기운 제후들 가운데 특히 루터의 보호자를 자처했던 작센 선제후 현명공 프리드리히와 헤센 백작 등의 제후들이 황제의 통치와 교황의 간섭으로부터 독립하겠다는 정치적 목적 때문에 루터가 주창한 종교개혁에 동참하기에 이른다.

 


주간지 슈피겔에서 엄선한 저널리스트들과 다수의 신학자들은 이런 일련의 사태에 다양한 목소리를 낸 인물들에 대한 목소리도 세세하게 담아냈다. 현명공 프리드리히의 지원으로 독일에서 내로라하는 대학도시가 된 비텐베르크에서 루터를 지원한 신학자 필립 멜란히톤을 비롯해서, 채색삽화로 루터의 독일어 9월성경 제작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루카스 크라나흐는 발군의 실력으로 홍보를 담당했다. 교황을 당나귀에 비유하는 풍자물에서 보듯이 크라나흐는 선전선동의 대가였던 모양이다. 기사가 몰락하기 시작한 시대, 본질은 날강도에 가까웠던 폰 지킹엔은 루터의 호위무사를 자처하기도 했다. 그가 과연 루터의 종교개혁이라는 대의에 대해 얼마나 이해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를 이용한 인쇄술도 종교개혁에 한몫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가 없다. 로마에 저항하는 수도사 루터가 무지막지하게 속도로 써내려간 일단의 팜플렛들은 인쇄업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상품이었다. 종교개혁이라는 시대정신을 담아낸 루터의 글에 대중과 지식인 계급이었던 귀족들은 열광했다. 루터가 글을 발표하는 대로, 대기하고 있던 인쇄업자들이 달려들어 인쇄물을 찍어내기에 바빴을 정도였다고 한다. 16세기 초반, 독일 내에서 유통하던 인쇄물의 1/3에 해당하는 분량이 루터가 쓴 저작물이었다고 하니 요즘으로 치면 베스트셀러 작가로 등극하지 않았을까.

 

1부와 2부에서 종교개혁의 전개, 시대상 그리고 당시 활약하던 인물들을 다뤘다면 3부에서는 반종교개혁 진영의 움직임에 대해서도 비교적 상세하게 그리고 있다. 당시 메디치 가문 출신의 교황이었던 레오 10세나 황제였던 칼 5세 모두 루터가 시작한 종교개혁이 훗날 어떤 결과를 가져올 지 미처 몰랐다. 그 후과를 알았다면, 로마 교황으로부터 파문당한 루터는 1세기 전 보헤미아의 개혁가 얀 후스와 똑같은 운명에 처해졌으리라. 루터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중세를 끝장내고 정치와 종교를 분리시킨 종교개혁 역시 후퇴했을 것이다. 가톨릭 진영에서도 이그나시오 로욜라 같은 인물이 등장해서 반동적 예수회를 조직해서 내부 개혁에 매진하기도 했다. 특히 루터의 맞수로 나선 선수로 슈피겔 저자들은 베드로 가니시오를 꼽았다. 루터를 추종하는 개신교의 등장으로 거의 무너지겐 된 독일 가톨릭의 보루로 등판해서, 가니시오는 보수적 가톨릭 신앙을 부흥시키는데 전력을 다했다. 지난 세기에 가톨릭의 성인으로 시성되기도 했다는 점에서 그의 뛰어난 활약상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슈피겔이 선정한 저널리스트들과 학자들은 1520년대 독일을 휩쓸었던 농민전쟁에서 루터가 보여준 보수적 입장과 반유대주의에 대해서도 냉철한 분석을 선보인다. 루터로부터 영향을 받은 독일 농민들은 각지에서 폭동과 반란을 일으켰고, 독일 제후들은 잘 훈련된 용병들을 동원해서 농민반란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이 와중에 루터는 제후들의 편에 서면서, 신의 은총을 갈구하면서 평등을 주장한 농민들을 저버렸다. 물론 토마스 뮌처 같이 극단적인 주장을 펴면서 농민반란에 적극 가담한 신학자도 있었다. 또한 독일 거주 유대인들에 대해서도 개신교로 개종할 것을 기대했지만, 그렇지 않고 지속적으로 모욕적인 태도로 자신들을 대하는 유대인에게 적대감을 느낀 나머지 마지막 저작에서까지 그들에 대한 적대감을 표현하기도 했다. 훗날 나치들은 루터에게서 반유대주의의 단초를 찾아냈더고 하는데, 모사드에게 비밀리에 납치되어 예루살렘 법정에 선 아이히만이 루터를 인용하면서 자신의 행동이 정당했다고 주장하는 장면에서는 정말 전율할 정도였다. 루터의 반유대주의는 현대의 반유대주의와는 그 결을 달리 한다는 설명이 인상적이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다양한 저작들의 출간이 봇물을 이루고 있는 가운데, 다시 한 번 루터가 주창했던 종교개혁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 본다. 내려놓음과 나눔 그리고 십자가 정신이라는 초대 교회 정신에서 벗어나, 루터가 주장했던 평등주의에 입각한 만인사제설에 어긋난 목사의 권위를 강조하고, 성장지상주의를 목청껏 외치면서 오늘도 맘몬의 곳간을 채우는 데만 여념이 없는, 점점 사회에서 격리되어 게토화 되어 가는 한국 대형교회 대문에 95개조 반박문이 절실하게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물적 인적 자원을 빨아들이는 소수의 대형교회보다 우리는 작고 건강한 다수의 작은교회의 가치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으로 긴 글을 마무리짓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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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11-24 11: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올해 독서 목표 중 두 개가 종교개혁과 러시아 혁명을 이해하는 것이었어요. 하지만 책을 읽을 시도조차 하지 못한 채 2017년을 떠나보내야 할 것 같습니다. ^^;;

레삭매냐 2017-11-24 11:53   좋아요 0 | URL
저도 비슷한 생각을 했지만 의지 대로 되지가
않는군요 :>

그래도 종교개혁 책은 두어권 읽었으니 아쉬
운 대로... 작년에 읽었지만 리뷰로 담아내
지 못한 슈테판 츠바이크의 장 칼뱅 비판 책
을 다시 읽어 볼까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루터교보다 칼뱅을 모시는
장로교가 인기가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
이 상대적으로 저평가 받고 있다는 루터교
목사님의 지적이 인상적이었습니다.

sprenown 2017-11-24 13: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교회를 다니지 않지만, 얼마전 직장 커뮤니티에서 종교인 과세문제로 시끌러웠던 적이 있었어요.. 댓글 수십개가 달리고, 난리법석.. 그 만큼 예민한 문제인가 봅니다. 세금낸 헌금에 대해 또 과세한다면 이중과세가 아니냐 등등... 얼마전 조계종 적폐청산 운동도 있었고...암튼, 종교개혁의 참 뜻과 취지를 되살려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레삭매냐 2017-11-24 13:49   좋아요 1 | URL
전혀 예민하지 않은 문제인데, 개신교계
에서 그렇게 문제를 몰고 가는 게 문제
입니다.

민주공화국에서 개세주의가 기본입니다.
대한민국을 신정국가로 착각하고 있는 일
부 몰지각한 성직자들이 문제입니다.

성직자가 세금을 내지 않거나 세무조사를
받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언급해 주신 이중과세 문제는 전혀 상식
에도 맞지 않는 엉터리 주장일 뿐입니다.
가령 예를 들어 사업자가 각종 세금을 모
두 부담하고 이익을 낸 돈으로 직원들에게
월급을 주면 직원들은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나요? 이상한 논리를 적절하지 않은 상
황에 적용시키려는 작태에 기가 막힐 따름
입니다.

AgalmA 2017-12-01 07: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당나귀인데 뱀가죽에 여성 비하 정서까지...그림이 참 많은 걸 보여주네요^^;

레삭매냐 2017-12-01 09:12   좋아요 1 | URL
아무래도 중세가 걷히기 전이라
여전히 가부장제 시스템에서 벗어 나지
못한 예술가의 한계가 아닐까 싶습니다.

AgalmA 2017-12-01 09:18   좋아요 0 | URL
재밌어요. 인간이 아무리 명석하고 날고 뛰어나다 해도 시대의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기 드보르의 명언을 다시 떠올리게 됩니다.
˝인간은 자기 조상을 닮은 것보다 자신의 시대를 더욱 닮는다.˝

카알벨루치 2018-08-26 15: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 글 우아 좋아요! 기독교인인 저의 심금을 울립니다! 잘 읽었습니다~

레삭매냐 2018-08-26 19:36   좋아요 1 | URL
종교개혁 500주년이었던 작년에 나온
책을 읽고 쓴 리뷰였네요.

한국 기독교에서 벌어지는 작금의 상황
을 보면, 종교개혁 시대만큼이나 암울
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