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경계를 지나면 당신의 승차권은 유효하지 않다
로맹 가리 지음, 이선희 옮김 / 마음산책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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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맹 가리 전작읽기를 선언한 이래, 집에 있는 로맹 가리의 책들을 모두 찾아서 읽지도 않을 거면서(아직 차례가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가방에 넣어 가지고 다니는 버릇이 생겼다. <이 경계를 지나면 당신의 승차권은 유효하지 않다>도 사실 <새페죽>을 다 읽고 나서 보려고 했다. 그냥 몇 쪽만 읽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재밌더라. 그래서 <새페죽>도 다음으로 미루고 계속 읽었다. 이번 7월은 가히 로맹 가리의 달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열심히 읽고 있는 중이다.

 

소설의 화자는 저자 로맹 가리처럼 좋은 시절을 다 보내고 이제 초로의 나이(59세)가 된 자크 레니에다. 자신이 운영하는 출판회사는 사업이 지지부진해서 좋은 가격에 회사 매각을 고민 중이다. 자크는 미국인 갑부이자 호색한 짐 둘리 소유의 은행에 호의를 기대해야 하는 불쌍한 처지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둘리보다 애인 로라 수자(22세)와의 관계에서 우위에 서 있다는 점 정도. 그것도 최근 발생한 전립선의 위기로 자존심이 상해 있다. 브라질 출신 젊은 애인을 성적으로 만족시켜 주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자크는 ‘전립선 변호사’의 권고도 무시한다. 그들의 사랑 이야기를 지켜 보다 보니 문득 영화 <광란의 사랑>이 연상된다. 아무 이유 없이 그냥 영화의 제목이 떠올랐다.

 

이 책이 나온 해는 1975년, 그러니까 로맹 가리 61세가 되던 해였다. 프랑스 문단에서는 한 때 프랑스 문학의 대표주자라고 할 수 있었던 대가의 몰락이라고 신랄한 비평을 날렸다. 그가 <자기 앞의 생>으로 두 번째 공쿠르상을 수상한 에밀 아자르라는 걸 모른 채 말이다. 소설 속의 페르소나 자크 레니에처럼 확실히 노년의 로맹 가리는 오십대의 자신과 견주어도 노쇠했다는 느낌이 든다. 전에 읽은 <레이디 L>과 지금 읽고 있는 <흰 개>와 비교해 봐도 그렇다.

 

주인공 자크는 오일쇼크의 여파 탓인지 계속해서 서구 사회에 없는 에너지 자원에 대한 갈구를 서구의 몰락으로 연결시키고 있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자신의 성적 무능함과 다국적 기업에서 자신의 출판사를 넘길 수밖에 없는 경제적 위기를 동일선상에 올려 놓고 냉정한 시선으로 현실을 직시하라는 주문한다. 생로병사라는 자연의 흐름을 외면하고 싶은 무신론자의 발악이라고 해야 하나. 다른 책에서는 잘 볼 수 없었던 파격적인 에로티시즘의 적나라한 전개에 깜짝 놀랐다. 그래서 아마 프랑스 문단에서 그를 불편하게 생각했는 지도 모르겠다.

 

젊은 애인 로라를 만족시켜 주어야 한다는 노년의 자크가 가진 강박은 어느 날 둘이 거주하는 호텔에 침입한 강도이자 ‘안달루시아 야수’ 몬토야(자크는 그를 루이스라고 명명한다)를 고용해서 자신의 성적 대리인으로 삼겠다는 판타지에 젖는다. 자신은 인종주의자가 아니라고 말하지만, 라틴 사람들이나 흑인 혹은 아랍인에 대한 성적 콤플렉스 때문에 그들을 이용하는 건 누가 봐도 명백한 인종주의의 흔적이 아닌가 말이다.

 

그런 와중에 자크는 오랜 레지스탕스 동지이자 지금은 포주로 활약하고 있는 릴리 마를렌을 찾는다. 자신의 생명보험금 4억 프랑을 아들 장피에르에게 물려주고 싶은 마음에서 모종의 계획을 세우지만 현명한 여인 릴리의 조언으로 계획은 무산된다. 그리고 성적으로 노쇠했건 그렇지 않건 여전히 자신을 사랑한다는 말하는 애인 로라와 터키건 이란이건 어디론가 먼 곳으로 떠나겠다고 말한다.

 

확실히 <이 경계를 지나면 당신의 승차권은 유효하지 않다>는 기존의 로맹 가리가 구사한 희망과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숭배라는 그의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들과 거리가 있어 보인다. 이제는 더 이상 남성으로 누구에게도 매력적이지 않은, 오래된 레지스탕스 전사의 광휘와 문학가에 대한 일정한 존경심 정도 밖에는 남지 않는 한물간 작가라는 혹평에도 불구하고 로맹 가리는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프랑스 문단에 묵직한 어퍼컷을 날리지 않았던가.

 

전성기가 지난 인간이라면 누구나 노쇠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주변의 관심은 관계의 소멸과 더불어 자연스럽게 진행된다. 특히 잘 나가던 시절을 경험한 로맹 가리 같은 작가라면 더더욱 그런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 같다. 지방 밤무대 혹은 미사리 라이브카페에 등장하는 예전 스타 연예인들의 심정이 그랬을까. 난 아직 죽지 않았는데 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당신의 승차권>이 <자기 앞의 생>보다 리얼한 로맹 가리의 본모습에 가깝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흥미롭긴 했지만, 노작가의 넋두리 같다고나 할까. 동정은 하지만 공감까지는 아직 부족한 것 같다. 무려 4년 전에 사서 아직 읽지 않은 책이라니 놀랍다. 읽지도 않았지만 작가의 책을 컬렉션한 것으로도 로맹 가리의 팬이라고 불릴 만하지 않은가. 좀 억지스럽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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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급자족한다
오한기 지음 / 현대문학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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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코드명은 프란츠 카프카. 프리랜서 작가로 스토리텔링으로 돈되는 일이라면 가리지 않고 한다. 유명인이나 재벌들의 자서전 대필은 물론이고, 영화비평 광고문구 제작, 사보만들기 그리고 정치성향은 진보지만 우파 댓글알바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런 일을 하다가 결국 CIA요원으로까지 발탁이 되었다. 이제부터 나의 스파이 활동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아 쫌 황당하다. 최소한 CIA 요원으로 활동하려면 원어민 수준의 유창한 영어와 비범한 재능은 기본이 아닐까 싶지만, 오한기 작가는 그런 것 따위쯤은 카프카 아저씨의 스토리텔링 능력으로 가볍게 제압해 버리신다. 게다가 CIA가 적으로 규정하고 때려잡고 소탕하기 위해 자금과 요원 그리고 시간까지 소모해 가며 타겟으로 삼은 집단은 바로 자급자족단(SSM:Self Sufficiency Members)이라고 한다. 대량생산에 끊임없이 소비하는 존재(아마도 노동자들)가 있어야 굴러갈 수 밖에 없는 자본주의 3.0 시대에 자급자족단이야말로 자본주의 질서를 위협하는 최고의 사악한 무리일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 왜 이렇게 낯설게 들리는지 모르겠다. 소설이 구사하는 핍진성 따위는 가볍게 무시하면 나처럼 소설 <나는 자급자족한다>를 재밌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주인공 카프카는 확실히 위기의 남자다. 그놈의 텃밭 소송으로 가산을 탕진하게 생긴 남자는 글밥을 먹고 살아야 하는데 그것조차 시원치 않다. 대기업 마케팅 부서에서 일하는 아내 해인만이 그의 유일한 희망이자 구원일진대 그녀마저 회사를 그만 두고 지독한 미니멀리즘에 빠져 점점 그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이 소설은 미래로 훨훨 날아가 버리려는 아내를 지키기 위한 보통남자의 고군분투기 정도로 생각하면 아주 마음이 편하고 재밌을 것이다. 자꾸 따지기 시작하면 어쩌면 속이 부대끼실 지도 모른다.

 

카프카를 스카웃하고 훈련시킨 사람은 한국계 미국인 미아 모닝스타라는 전설적 요원이다. 보다 체계적인 훈련 과정이 아닌 미아가 발표한 저서를 통해 스파이가 되어 가는 과정을 착착 카프카 요원, 흥미롭다. 그 와중에 천재해커 비비양도 등장하고, 그녀를 사랑하는 볼셰비키(볼키) 그리고 카프카의 전임자이자 알고 보니 베스트셀러 작가기도 한 헤밍웨이 요원이 등장하기도 한다. 고철에서 만든 수제권총 막스 브로트의 총구에서 불이 뿜고, 롯데월드타워에서 재벌 총수 인질극이 벌어지는 등 다양한 사건 사고가 무시로 발생한다. 이거 뭐 스케일에서는 탐 크루즈 형님이 등장하시는 <미션 임파서블> 뺨치는데. 헛된 공상이겠지만 <나는 자급자족한다>를 영화화하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잠시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티베트의 어느 오아시스에서 평화롭게 지내는 자급자족단의 일상과 인도양 섬에서 한 마리에 1달러 하는 랍스터를 배터지게 먹는 장면은 제발 꼭 넣어 주시길.

 

아쉽게도 재밌게 잘 나가던 내러티브는 종언을 100쪽 정도 남겨 두고 주인공 카프카의 지독한 해인에 대한 사랑 신파 덕분인지 어쩐지 바람 빠진 타이어마냥 피시시 주저앉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좀 더 강력한 한 방이 아쉬웠다. 차라리 모두가 비극으로 치닫는 엔딩은 어땠을까 뭐 그런 생각을 해보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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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8-07-19 11: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내용만 보면 외국작가의 작품같은데 국내 작가가 지으셨네요.그나저나 랍스터가 1달러라면 저역시 배터지게 먹고 싶습니당^^

레삭매냐 2018-07-19 11:26   좋아요 0 | URL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시고 그냥
부담 없이 읽으신다면 재밌습니다.

랍스터 한 마리에 1달러, 당장 달려 가고
싶습니다.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의 잔향이 다만...

2018-07-19 15: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삭매냐 2018-07-19 16:11   좋아요 1 | URL
작가 분의 내러티브 설정이 아주 참신했습니다.

겨울호랑이 2018-07-19 16: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코드명이 프란츠 카프카라면 멋지네요^^:) 지나가는 말입니다만, 누구의 코드명 ‘길라임‘이 갑자기 떠오르네요. 이제는 큰 의미없지만 생각나 적어봅니다^^:)

레삭매냐 2018-07-19 17:11   좋아요 1 | URL
으응 코드명 길라임?
하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빵 터져 버렸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인가 마지막 어린이날이라며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동생과 함께 서울대공원을 찾았다. 인산인해가 따로 없었다. 그 시절에는 차도 없어서 아마 대중교통 수단으로 과천까지 갔었는데 그중에서 돌고래 쇼가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 같다. 그 때만 해도 아이였으니까.

 

그리고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내가 이렇게 자주 동물원을 찾게 될 줄 누가 알았으랴. 꼬맹이는 만날 동물원 타령을 한다. 지금은 제돌이가 고향 바다로 돌아가는 바람에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지만 5년 전만 하더라도 서울대공원 최고의 쇼는 바로 제돌이와 친구들이 등장하는 돌고래 쇼였다.

 

제돌이와 친구들이 사는 풀장을 보면서, 저렇게 갇혀 있으면 참 답답할 텐데라고 혼자 생각했다. 그 넓디 넓은 바다에서 살다가 저렇게 좁은 우리가 갇혀 있으면 답답하겠지 싶었다. 하긴 어디 그게 제돌이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겠는가. 19세기 제국주의 시절의 유물이라는 동물원은 21세기 대한민국에서도 성행 중이다. 오로지 인간의 편의를 위해서 세계 각처에 사는 진귀한 동물들을 잡아다가 기후나 여러 가지 조건이 맞지 않는 친구들을 가두어 놓는 게 아닌가 말이다. 우리는 어쩌다가 한 번 가서 일별하면 되지만, 그 친구들은 평생을 그렇게 갇혀서 살아야 하니 얼마나 답답할까.

 

오늘 어느 신문기사를 통해 제돌이 귀환 5주년에 대한 글을 읽었다. 세계 어느 나라도 하지 못했던 일을 용감하게 중단한 서울시와 서울동물원 그리고 그 과정에 여론형성을 도운 단체와 이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꼬맹이는 지금도 묻곤 한다. 항상 보던 남방돌고래 제돌이 친구가 어디에 갔는지. 그러면 몇 년 전 제주도 앞바다에서 배를 타고 고등어 낚시를 할 때, 바로 옆에서 뛰돌던 야생 돌고래 친구들이 생각난다. 그래 제돌이 친구들은 자기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살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갔노라고 설명해주곤 한다. 아직 어려서 잘 이해하지 못하는 꼬맹이는 왜 고향으로 돌아갔는데라며 질문 시리즈를 늘어 놓는다. 많은 시간이 걸리고 귀찮더라도 그 이유에 대해 조근조근 설명해 줘야지.

 

사실 종의 다양성을 위해서 아니 우리 인간을 위해 동물 보존을 해야 한다는 식의 어려운 이야기들은 잘 모르겠다. 동물원에 갇혀 사는 동물들이 그저 자연 상태에서 행복하게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꼬맹이 등쌀에 지금도 동물원을 찾지만, 모쪼록 그런 동물 친구들이 불쌍한 게 나홀로 만의 생각은 아니길 바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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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07-18 15: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 ‘애견카페’처럼 동물을 구경할 수 있는 카페가 늘어나고 있어요. 저는 이게 ‘동물을 쉽게 만질 수 있는 동물원’ 같다고 생각해요.

레삭매냐 2018-07-18 15:54   좋아요 0 | URL
공감합니다 -

아이들에게 체험을 제공해 준다는 긍정
적인 면도 있을 수 있겠지만, 동물들이
받는 스트레스가 어마어마하다고 하더라구요.

서로에게 윈윈하는 방법은 없는지 모르겠네요.

stella.K 2018-07-18 16: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그렇지 않아도 언젠가 제돌이 방류 과정을 TV에서 본 것 같은데
그게 벌써 5년이나 됐나요?
작년인가. 재작년에 봤던 것 같은데...
그 다큐 보면서 정말 마음이 찡했습니다.
잘 살고 있겠죠?

레삭매냐 2018-07-18 17:10   좋아요 1 | URL
텔리비전 다큐멘터리로도 제돌이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나 보네요 :>

제주도 푸른 바다에서 새끼 고등어들을 잘
잡아 먹으면서 건강하게 지내고 있길 바랍니다.

카스피 2018-07-18 21: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벌써 5년이란 시간이 흘렀네요

레삭매냐 2018-07-19 10:07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시간 참 빠른 것 같습니다.
 
레이디 L
로맹 가리 지음, 백선희 옮김 / 마음산책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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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내가 가지고 있는 로맹 가리의 책이 몇 권이지? 서가에서 속속 튀어 나오는 로맹 가리의 책에 놀라고 있는 중이다. 사실 지지난주엔가 중고서점에서 산 <별을 먹는 사람들>도 서가에 찾아 보니 있더라. 어제 <하늘의 뿌리>도 찾았고, 지난 이틀 동안 부지런히 읽은 <레이디 L>도 5년 전에 이미 샀더라. 앞으로 중고서점에서 책을 살 적에는 좀 알아 보고 사야할 것 같다.

 

<레이디 L>은 로맹 가리 전작읽기의 7번째 책으로, 그동안 내가 읽은 저자의 책 중의 최고의 책이라고 생각한다. 이건 뭐 그야말로 책에서 손을 뗄 수가 없었다. 나이 여든의 레이디 디안은 영국의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의 그야말로 훌륭한 숙녀로 작고한 남편은 물론이고 증손자까지 본 무엇 하나 부러울 게 없는 여성이다. 아니 그런데 소설의 어디선가 테러리스트라는 말이 불쑥 튀어 나온다. 테러리스트라니...

 

레이디는 자신을 숭배하는 계관시인 퍼시 로다이너 경에게 자신이 지난 60년 동안 고이 숨겨 왔던 정말 충격적인 비밀을 털어 놓기 시작한다. 크레시 전투 이래 고귀하게 이어져온 마드무아젤 드 부아제리니에 혹은 고귀한 혈통의 카모엥 백작 부인이 아니라 파리의 아나키스트 아버지를 둔 평민 출신이었다는 사실이 하나씩 드러난다. 우리의 레이디는 심지어 남자들에게 쾌락을 안겨 주는 직업도 한 때 가졌었다. 그렇다면 혁명의 시절이었던 19세기말 레이디는 어떤 성공의 사다리를 타고 모두의 추앙을 받는 대공 부인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던가. 로맹 가리는 미스터리적 구성으로 레이디의 과거에 대한 독자의 호기심을 유발하는데 성공한다.

 

자, 이제 레이디의 인생을 극적으로 바뀌게 만들 또 하나의 신화적 인물이 소환된다.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인 아르망 드니가 등장한다. 이 남자는 뼈속 깊숙한 아나키스트로 테러로 일찍이 에릭 홉스봄이 주창한 이중혁명(프랑스혁명과 산업혁명)으로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고 인민을 착취하게 된 부르주아지와 권력층을 암살하고,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겠노라는 야심찬 이데올로그다. 그를 돕는 두 명의 선수들이 더 있는데, 파리 홍등가의 유명한 깡패 르쾨르와 목이 부러진 기수 사퍼다. 혁명가에게는 언제나 조력자들이 필요한 법이지. 오래전 대학 시절, 원서강독 시간에 접한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인 프루동이니 생시몽 같은 이름들이 떠올랐다.

 

폭력적 방식으로 역사의 거대한 물줄기를 바꿔 보겠다는 공상에 가까운 발상들은 유사 이래 존재해 오지 않았던가. 최근 잇달아 영화화되어 관객을 찾고 있는 우리의 암울했던 식민지 시절의 이야기들은 또 어떤가. 암살이나 폭탄 테러 같은 활동으로 점철되어 있지 않았던가. 물론 그에 맞서 식민제국주의자들도 보다 폭압적인 방식으로 피지배계급들을 억눌렀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혁명적 아나키스트들의 자금 조달 방식은 우리의 주인공 아네트 부댕을 고귀한 귀부인으로 탈바꿈시켜(18개월 간의 가혹한 훈련을 통해) 귀족 나으리들의 부를 탈취하는 방식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홀딱 반한 오십 줄의 디키 글렌데일의 등장 또한 예사롭지 않다.

 


영국 귀족가문 출신의 쾌락주의자이자 태생적 이단아 글렌데일은 집시 여인과 결혼하기도 하고, 당시 대영제국을 지배하던 빅토리아 여왕의 마음에 들자 않을 법한 짓들만 골라하면서 눈총을 산다. 이런 남자가 젊고 매력적인 카모엥 부인의 후원자가 되야, 소설의 전개가 멋지게 굴러가지 않겠는가. 개인적으로 보았을 때는 인민의 자유를 위해 싸운다는 열렬 아나키스트가 여성을 도구로 이용해서, 부유한 유한계급으로부터 활동자금을 마련하는 장면은 그들이 그렇게 목놓아 외치는 대의에 적합한 방식인지에 대해 묻게 된다. 스위스 경찰에 추격을 받는 그들을 구하기 위해, 글렌데인에게 도움을 요청한 아네트의 후의로 아나키스트 일행은 무사히 국경을 넘는데 성공한다. 글렌데일의 전용열차 칸에서 벌이는 아르망과 디키의 아나키즘의 이상주의에 대한 대화야말로 어쩌면 이 소설의 핵심이 아닐까 싶다. 역사 교과서에서나 볼 법한 대화를 중년의 쾌락주의자와 젊고 전투적 이상주의자 이데올로그 간의 치열한 대화로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소설을 읽는 재미 중의 하나가 아닐까 싶다.

 


노회한 글렌데일 공은 미몽에 빠진 아네트/레이디에게 끊임없이 현실감각을 갖추라는 충고를 아끼지 않는다. 그리고 허구헌 날 “끝까지 가야 한다”라는 주장을 입에 달고 살면서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아나키스트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리고 아네트가 진정한 아나키즘의 세례를 받았다면, 그녀에게 포주 같은 존재인 아르망의 집착과 착취에 폭탄을 던져야 한다는 고언을 전달하기도 한다. 기묘한 궤변같기도 하지만, 글렌데일의 논리에 빠져 드는 느낌을 독자는 지울 수가 없다. 과연 우리의 아네트 양은 스승을 능가하는 제자가 될 것인가.

 

레이디의 놀라운 과거를 듣는 역이 배당된 계관시인 퍼시 경의 반응도 아주 경이롭다. 레이디가 자신이 그동안 스캔들을 두려워 하며 꼭꼭 숨겨온 비밀을 털어 놓는 방식으로 전개되는 소설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덧 계관시인의 감정에 동조된 자신과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로맹 가리가 준비한 한 방은 무엇을 기대하든 그 이상이었다. 아, 이래서 작고한 드골 대통령도 이 책을 로맹 가리 최고의 작품으로 꼽았던가.

 

슬픈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꿈꾼 혁명의 이상이 이루어진 적이 있었던가. 그 추운 겨울 수많은 이들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촛불혁명의 후광이 우리 사회에 공고하게 구축된 기득권층과 언론의 연합 그리고 적폐세력의 격렬한 반격으로 한 발짝 씩 후퇴하는 모습을 보며 한 때 아르망과 아네트/레이디 그리고 수많은 아나키스트들이 자신들의 소중한 목숨을 바쳐 가며 싸웠던 인류(humanite)에 대한 지극한 사랑의 정신에 대해 되돌아 보게 만든다. 지금까지 읽은 7권의 로맹 가리 책 중에 가히 최고의 책이다.

 


[뱀다뤼] 이 소설은 정말 오래 전에 영화로도 만들어졌다고 한다. 소피아 로렌, 폴 뉴먼 그리고 데이빗 니븐이 주연으로 나온다나.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니 1965년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감독은 무려 피터 유스니노프. 한 번 구해서 보고 싶네. 소피아 로렌은 올해로 연세가 83세라고 한다. 언제까지나 나에게는 영화 <해바라기>의 주인공으로 기억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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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달다. 어제는 지랄맞았지만,
달다 지음 / 21세기북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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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랄까 달다 씨의 그림톤과 이야기들은 요즘 인스타그램에서 유행하는 그런 스타일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부랴부랴 인스타 주소를 찾아 보았지만(리뷰 쓸 적에 담을 사진이라도 하나 건질까 싶어서) 다행인지 불행인지 인스타에는 아직 서식지를 만들지 않은 모양이다. 있다고 해도 내가 찾지 못했으니 그만이지 뭐.

 

우리와 비슷한 삶의 궤적을 그리고 살아온 모양이다. 그런 이야기들이 달다 씨의 그림에는 잔뜩 배어 있다. 그건 마치 아직 먹어 보지 못한 눈꽃삼겹살 같은 맛이려나. 그림과 생전 연이 살다 미대에 가기 위해 재수까지 했다지 아마. 그 다음에는 광고에 또 미쳐 살았고. 취준생으로 수년 보낸 뒤에는 아트 디렉터로 취업하는 등 다양한 직업군에 종사하신 모양이다. 그런 이야기들의 궤적을 나는 쫓게 된다.

 

꽃다운 나이 열여덟에 아버지를 여읜 이야기는 참말로 슬펐다.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를, 나의 첫사랑이었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려내기란 쉽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해 본다. 우리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공짜로 되는 게 아무 것도 없더라는 말에도 격하게 공감하는 바이다. 누구는 아무렇지도 않게 따는 운전면허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도로연수에서 세 번인가 떨어진 뒤 딴 면허는 한동안 장롱면허가 되었다가, 수년 뒤에 부활해서 지금은 차가 없으면 외출도 안하려고 하는 그런 인간이 된 사람도 있다네. 물론 버스를 타야 할 때는 또 그렇게 가게 되는 거겠지만.

 

세상은 내 잘난 맛에 사는 기다. 기죽을 필요도 없지. 아무리 인스타나 페북에 갖가지 미용술과 맛집 출입으로 도배된 사진들이 넘쳐흐른다 하더라도 절대 기죽지 말지어다. 전혀 그럴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 요즘 소확행이라는 표현이 유행이라지. 그래 살면서 우린 모든 걸 다 가질 순 없는 것이야. 그러니 무엇이라도 확실하게 챙길 수 있는 게 있다면 그걸 챙기는 것만으로도 나는 족하다. 물론 나에게는 우리집 꼬맹이도 나는 그게 바로 책이지. 오늘 아침에만도 로맹 가리의 <레이디 L>을 읽으면 얼마나 즐거웠던가. 출근 길에 챙겨온 책들을 아름다운 가게에 기부하는 아주 약간의 선행도 베풀었지. 물론 그 이면에는 나의 혹독한 책 다이어트 프로젝트 의도가 숨어 있긴 했지만 말이야.

 

다시 한 번 소소한 행복에 대해 말하고 싶어. 어린 시절, 어른들과 버스 안에서 시달리는 대신 나와 친구들을 안전하게 승합차에 실어 등교시켜 주시던 빵빵이 아저씨에 대한 감사한 마음. 미처 그 때 하지 못한 감사의 말을 전하다니, 기특하기도 하여라. 필리핀 여행길에 파란 불가사리로 바다 밑 하얀 모래를 수놓던 추억에 대한 이야기는 또 어떨까. 누군가에게는 그렇게 나만의 고유한 이야깃거리들이 있는 법이지. 지금은 잘 기억이 나지 않겠지만 아마 나에게도 그런 게 있겠지. 별안간 예전에 전주 한옥 마을에 놀러 갔을 적에 동행했던 동생이 사준 머그컵이 생각나네 그래. 어디선가 읽으니 누구는 동물에 더 이상 애정을 줄 수가 없게 되어 사물을 애착하게 되었다고 하던데. 뭐 이러다가 나도 그런 과가 되는 게 아닌가 조금 걱정이 앞선다.

 

지난 주에는 지랄맞았는데, 이번 주는 참으로 달구나. 그렇게 우리네 인생이 흘러가는 법이지. 대체적으로 나는 만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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