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나 - 세계를 바꾼 과일의 운명
댄 쾨펠 지음, 김세진 옮김 / 이마고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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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온라인 기사로 우리가 현재 즐겨 먹는 바나나 캐번디시가 곧 멸종될 지도 모른다는 내용을 읽었다. 사실 어려서 바나나는 정말 귀한 과일이었다. 씨도 없고, 한 입 가득 베어 먹었을 때 풍기는 과육의 느낌이란! 한 개(finger)에 한 500원 정도 했던 것 같은데 당시로서는 굉장히 비싼 가격이었다. 그래서 일년 봄가을에 가는 소풍날 두 개를 사서 하나는 그 전날 그리고 다른 하나는 소풍 당일날 한 개씩 소중하게 먹은 기억이 난다. 그런데 지금은 하도 흔해 빠져서 트럭에서 파는 과일장수 아저씨는 한 다발(hand)에 단돈 5천원에 파는 장면을 보기도 했다. 격세지감을 느꼈다.

 

미국 저널리스트 출신 댄 쾨펠은 전 세계를 매료시킨 이 열대 과일 바나나에 대한 보다 생생하고 현실적인 이야기들을 르포르타주 <바나나>에서 다룬다. 인도가 원산지로 추정되는 바나나의 기원으로 시작해서, 성경에도 등장하는 선악과가 아니라 바나나였을 거라는 합리적 추정도 내놓는다. 물론 성경학자들이 듣는다면 이단으로 몰리겠지만. 기원전 5천년부터 파푸아 뉴기니에서 재배되었다는 흔적이 있는 바나나는 동남아에서 출발해서 지구를 한바퀴 도는데 거의 7천년 정도가 걸렸다. 전 세계에서 쌀, 밀, 옥수수에 이어 네 번째 생산량을 자랑하는 이 열대과일은 누구에게는 기호식품이겠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식량자원으로도 소중하게 작동하고 있다. 아프리카에서 기근발생은 다반사로 알려져 있는데, 우간다를 비롯한 자신의 텃밭에서 바나나를 길러 식량으로 삼는 나라에서는 대량 기근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점도 저자는 날카롭게 지적한다.

 

한편, UFC과 스탠더드 프루츠 같은 다국적 바나네로스(바나나 기업)들은 현대문명 기술발전의 세례를 톡톡히 받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물론 그 이면에는 바나나 생산을 담당한 일명 바나나 공화국(과테말라과 온두라스) 독재자들과의 단단한 정경유착도 한몫했다. 바나나를 수확해서 소비처(북미대륙)까지 운송하는 단계에서 냉장시설이 개발되기 전까지 바나나의 갈변을 막는 건 바나나 산업 초창기의 최대 고민이었다. 원래 미국에서 가장 가까운 바나나 산지는 자메이카였다고 한다. 미국의 탐욕적인 사업가들은 바나나 무역이 돈벌이가 될 거라는 점에 주목하고, 현란한 마케팅과 열대과일의 매력을 한껏 강조하면서 미국인들의 식탁에 바나나 올리기 작전을 시작했다.

 

종자로 번식하는 식물이 아닌 바나나는 단일품종으로 대단위 재배에 적합했다. 그 결과 과테말라와 온두라스로 대변되는 중앙아메리카 일대에 엄청난 규모의 바나나 플랜테이션이 세워졌고, 바나나 기업들은 저임금 노동자들을 고용해서 저렴한 비용으로 바나나 생산에 나섰다. 코카콜라처럼 박리다매 전략이야말로 수익을 창출하는데 가장 효과적이라는 점을 바나나 기업의 소유주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지방 정부를 압박해서 거의 헐값에 가까운 비용으로 농지를 인수하고 세금까지 절감받으면서 UFC와 스탠더드 프루츠 그리고 델몬트로 대변되는 바나나 기업들은 승승장구했다.

 

바나나 기업의 호황은 오래 가지 않았다. 바나나 대단위 재배를 가능하게 한 단일품종 그로 미셸을 습격한 파나마병(푸사리움 곰팡이에서 유래한 잎마름병)이 그야말로 바나나 농장을 초토화시킨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흙과 토양이 아닌 공기 중으로 전염되는 싱가토카병까지 발명하면서 기존의 그로 미셸 종은 지구상에서 멸종되었다. 대신 파나마병에 상대적으로 내성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 캐번디시 바나나가 우리가 요즘 즐겨 먹는 바나나의 대세가 되었다. 저자는 필리핀에서 생산되는 라카탄 바나나도 역시 파나마병에 시달리는 캐번디시의 대체종으로 추천하고 있지만, 반세기 전 그로 미셸에서 캐번디시로 갈아탈 때 소비자들의 저항만큼이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할 지도 모른다는 경고장을 발부한다.

 

그런데 호황기를 누리던 시절, 파나마병이 발병하자 바나나 대기업들은 야생종 바나나와의 변종을 개발해서 파나마병이나 싱가토카병에 대한 내성을 갖춘 품종을 개발하지 않고 대신 손쉬운 방법으로 농약을 살포하는 방법을 채택했다. 물론 전자가 지리한 연구와 시간을 요구한다는 건 불문가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후자의 방식을 채택함으로써 바나나 기업들이 지불해야할 기회비용이 치솟기 시작했다. 우선 파나마병으로부터 안전한 오염되지 않은 새로운 농지를 개발하기 위해 열대우림을 파괴해야 했고, 바나나 산업의 최전선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농약 때문에 직접적으로 불임이나 갖가지 질병에 시달리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저임금 노동을 유지하기 위해 UFC 같은 기업은 불법적으로 과테말라나 콜롬비아 정부에 자금을 지원하면서 노조의 결성과 파업분쇄를 사주했다. 실제로 미국 CIA의 지원으로 합법적으로 집권한 과테말라의 하코보 아르벤스 정권을 전복시켰다. 이 때 과테말라에 있던 젊은 의사 에르네스토 게바라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혁명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지 않았을가. 5년 뒤 그는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에서 혁명을 성공시키고, 미국 바나나 기업들이 쿠바에서 소유하고 있던 농장들을 모두 국유화했다. 이에 대한 복수로 UFC는 다시 한 번 CIA와 결탁해서 쿠바 혁명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해 자신들의 ‘백색대함대’로 피그스만 침공을 지원하기도 했다고 한다. 1929년 콜롬비아에서 벌어진 바나나산업 노동자들에 대한 학살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 년 동안의 고독>에도 등장할 정도로 가히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댄 쾨펠은 우리가 마트나 시장에서 아무 생각 없이 사서 소비하는 바나나라는 열대과일에 대한 리포트를 하기 위해 그야말로 전세계를 누비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2001년에 설립된 벨기에의 루뱅 연구소가 바나나의 멸종을 막기 위해 싸우는 장소라는 점도 특이하다. 대개 표본을 구하기 쉬운 라틴 아메리카 최대 바나나 생산지인 에콰도르나 또다른 바나나 공화국인 과테말라나 온두라스에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여하튼 바나나의 멸종을 막기 위해는 기업이나 국가를 초월한 협력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과연 저자인 댄 쾨펠이 제시하는 유전공학 바나나가 최선의 선택인지에 대해서는 조금 회의적이다.

 

특히 우리나라 같이 GMO 표시를 하자는 주장조차 받아들여지지 않는 상태에서는 더더욱 그렇다고 생각한다. 아마 기업들 입장에서는 GMO 표기를 하는 순간, 차례로 해당 식품(책에서는 프랑켄푸드라고 꼬집어서 말하고 있다)에 대한 갖가지 정보들을 제공하게 될 거라는 우려 때문이 아닐까. 그런데 소비자 입장에서는 최소한 내가 먹는 음식이 어떤 경로로 해서 유통되고, 만들어졌는지에 대해 알 권리가 있는 게 아닌가. 바나나의 멸종을 막기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육종을 개량하고, 잎마름병에 대한 내성을 가진 품종을 개발하자는 저자의 주장에는 기본적으로 찬성하지만 유전자공학적으로 설계된 바나나가 정답이라는 주장에는 공감할 수가 없다. 최근 마다가스카르에서 파나마병에 내성을 가진 야생종 바나나가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속히 DNA 분석에 나서고 다섯 그루 밖에 남지 않았다는 녀석을 구출해서 캐번디시 바나나를 계속해서 먹게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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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8-08-20 10: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진짜 옛날엔 금나나였죠.
근데 그땐 어려서였는지 아니면 지금은 흔해져서인지
저는 생각 보다 잘 안 먹게되더라구요.
너무 달아서인 것 같습니다. 육즙없이 퍽퍽하기도 하고.
그걸 못 먹어 한이었던 때도 있었다니
그 시절엔 먹는 게 흔하지 않아서인 것도 같습니다.

레삭매냐 2018-08-20 11:29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예전에 울나라에서 바나나
드럽게 비쌌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지금은 저렴이의 대명사가 되었죠...

너무 흔해지니 예전처럼 잘 안찾게
되더라구요. 사람이 참...

목나무 2018-08-20 14: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얼마전에 우리나라 남쪽지방에서도 바나나 재배에 성공했다는 뉴스를 봤어요.
그때는 그저 드디어 우리나라도 아열대기후가 되어가는 건가... 그 생각뿐이었는데..
우리나라산 바나나는 어떤 상태의 바나나일지지 문득 궁금해집니다.

레삭매냐 2018-08-20 16:33   좋아요 1 | URL
우리나라의 저널리스트들도 댄 쾨펠 아저씨
처럼 한 가지에 몰두해서 깊이 있는 기사를
좀 써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누구는 책을 쓸 정도로 자료를 수집하고
글을 쓰는데 말이죠.

한국의 바나나, 기후 변화와 관련되어 흥미
로운 주제 아닌가요?

목나무 2018-08-20 16:40   좋아요 1 | URL
그래서 저는 오늘 이런 책을 질렀습니다. ㅎㅎㅎ
<우리는 다르게 살기로 했다>
원래도 관심 있던 주제인데 한 기자가 3년에 걸친 탐사 취재를 하고 직접 살아보고 오지까지 찾아가보고 했다고 하니 저자의 노력을 봐서라도 정말 이런 책은 읽어줘야하는 거 아닌가 해서 냉큼 질렀습니다. ㅋㅋ

한국의 바나나의 앞으로의 전망... 이런 것에 관심갖는 저널리스트가 있을지....음~~~

카스피 2018-08-21 22: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님글을 읽으니 바나나 공화국이란 말이 생각나네요.20세기 초에 중앙 아메리카에서 유나이티드 프루츠사 등의 미국 농업 기업이 커다란 농장을 여러 나라에 건설하여 그 자금력으로 여러 나라의 정치를 좌지우지한데서 나온 말인데 냉전 시절 미국의 안마당처럼 휘둘리던 엘살바도르, 벨리즈, 온두라스, 과테말라, 그레나다를 비롯하여 중앙 아메리카의 여러 나라에 쓰였다고 하더군요

레삭매냐 2018-08-21 22:57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책에서는 바나나 공화국의 대표적인
예로 과테말라와 온두라스가 등장합니다.

UFC(유나이티드 프루츠), 스탠더드 프루츠 그리
고 델몬트를 바나네로스(바나나 기업) 혹은
엘 풀포(문어)라는 표현으로 지칭하더군요.
 
나는 떠난다
장 에슈노즈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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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크리스마스 즈음해서 퀘벡 여행에 나선 적이 있었다. 그 때 나의 꿈 중의 하나는 개썰매를 타는 것이었다. 물론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실행에 옮기진 못했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이 육중한 몸을 개들이 끄는 썰매에 올려 달리는 건 아무래도 학대가 아닐까 싶었다. 고작 기념사진 하나 찍자고 비용과 시간을 들이는 건 아무래도 아니었지 싶다. 소설 <나는 떠난다>의 주인공이 북극의 빙원을 누비는 장면에서 문득 옛 생각이 나서 끼적여 보았다.

 

에밀 자토펙의 일대기를 그린 <달리기>로 미니멀리스트 작가 장 에슈노즈를 처음 알게 됐다. 그런데 에슈노즈 작가가 무려 공쿠르상을 받았다고 한다. 게다가 1980년대를 주름 잡았던 작가라고. 나는 그를 통해 과거를 여행한 셈이었던가 그럼. 에슈노즈 작가에게 세계적 명성을 안겨 준 출세작이라고 할 수 있는 <나는 떠난다>를 빌려다 읽었다. 사서 읽고 싶었으나 절판된 책이라 구할 수가 없었다.

 

어느 새해의 두 번째 날, 50대 화랑 주인 펠릭스 페레는 이틀에 한 번 꼴로 사랑과 전쟁을 치르던 아내 쉬잔을 곁을 영영 떠난다. 태생이 바람둥이인 페레는 여자 없이는 살 수 없는 그런 남자로 보인다. 그도 한 때는 예술가였던가 본데, 이제는 타인이 만들어낸 예술품을 거래하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그런데 예술가들은 왜 그렇게 창조라는 행위에 몰두하는 걸까. 그렇게 열정을 쏟은 창조행위가 돈으로 연결이 되면 좋겠지만 대다수의 창작가들이 돈벌이와는 별개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게 현실이 아니었던가. 그들의 창조 행위는 높이 평가하지만, 배고픈 삶은 동경하지 않는 모순적 감정이 불쑥 튀어 나왔다.

 

어쨌든 프랑스 화랑 경기도 썩 좋지 않았던 모양이다. 복잡한 회계 문제, 신진 작가들을 꾸준히 발굴해서 시장에 소개해야 하는 역할, 자신이 관리하는 예술가들이 창조해낸 작품들을 전시하기 위한 준비, 에이전트 수수료를 지나치게 많이 가져가는 게 아니냐며 불평을 쏟아내는 예술가들과 그야말로 전쟁을 치러야 하는 스트레스는 페레에게 일상이 된지 오래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여성이라는 존재로부터 위안을 얻고 싶었던 게 아닐까.

 

소설 <나는 떠난다>에는 정말 많은 캐릭터들이 쉴 새 없이 등장한다. 주인공 페레를 필두로 해서, 그가 이런저런 관계를 맺는 여성들에, 심장 문제로 그에게 건강을 조심하라는 경고를 끊이지 않고 해대는 전문의 펠드만, 화랑의 정보원으로 유용하게 써먹고 있는 들라에와 그의 애인 빅투아르, 나중에 페레가 곤경에 처하게 되었을 때 도움을 주었던 쉬펭 형사 등등 수많은 캐릭터들이 등장과 퇴장을 거듭한다. 이렇게 많은 캐릭터들이 과연 필요했을까 싶을 정도다.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는 작가의 스타일과는 좀 차이가 있는 걸.

 

프랑스 파리가 페레가 활동하는 하나의 공간이라면, 다른 장소는 북극이다. 거지발싸개 같은 복장을 하고 다니는 들라에가 1950년대 북극의 모처에서 희귀 골동품을 잔뜩 싣고 난파한 이른바 보물선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고, 우리의 주인공 페레는 위기에 몰린 사업의 타개책으로 또 한편으로는 새로운 모험을 찾아 북극행에 나섰다. 바로 이 지점에서 나는 얼마 전에 읽은 이언 매큐언의 <솔라>와 이언 맥과이어의 <얼어붙은 바다>가 연상됐다. 북극탐험이라는 남들은 평생 해볼 수 없는 그런 모험에 나서게 된 이들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페레는 생각보다 쉽게 보물선을 찾는데 성공했다. 보물선 하니 최근에 언론매체를 통해 뜨거운 반응을 얻어내는 러시아 보물선 돈스코이 호에 대한 스캔들 생각이 나는구나. 후자가 뜬구름을 쫓는 이들의 허상이었다면, 전자는 그야말로 대박이었다. 문제는 페레가 어렵사리 구해온 희귀 골동품을 노리는 정체불명의 바움가르트너라는 사내가 있었다는 점이다. 심심한 로맨스 타령으로 시작된 소설은 이 지점을 통과하면서 스릴 넘치는 탐정물로 변신하는데 성공한다. 왜 페레는 당장 보험에 들라는 감정평가사의 의견을 듣지 않았던 걸까. 정체불명의 사나이에게 자신의 전리품을 모두 털린 뒤에야 후회하는 모습에서 왠지 꼬소하다는 느낌이 다 들었다.

 

생각보다 용의주도한 바움가르트너는 자신의 사주를 받아 정작 절도에 나선 플레탕을 가볍게 제압하고, 남프랑스를 주유하며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으로 도주하는데 성공한다. 아니 그 자신만 그렇게 생각했는 지도 모르겠다. 이미 국제적 공조로 바움가르트너는 추격을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스페인의 생 세바스티안에서 자신을 쫓아온 원래 전리품의 주인 페레와 바움가르트너는 운명적 만남을 갖게 된다. 자, 과연 바움가르트너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리고 페레는 잃어버린 자신의 전리품들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인가?

 

내가 그동안 접한 다른 공쿠르 수상작과 달리 장 에슈노즈의 <나는 떠난다>는 상대적으로 읽기 쉽고 흥미진진한 스타일이라는 점은 인정한다. 그런데 이 책을 공쿠르상을 받을 정도인가에 대해서는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어쩌면 내가 이 책을 너무 읽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당시에는 파격적일 수도 있는 그런 스타일들이 지금은 그냥 심드렁한 이야기란 말인가. 가장이 모든 것을 내팽겨치고 떠나는 설정도 그렇지 않은가. 하긴 페레 씨가 무작정 떠난 것도 아니긴 하지만 말이다. 그의 프랑스 파리를 떠난 이유는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떠난 것이었다.

 

차라리 여자라면 그야말로 사족을 못 쓰는 페레 씨가 어찌하여 자신에게 굴러 들어온 행운의 여신으로 보이는 엘렌을 그대로 놓아 버렸는지 모르겠다. 같은 해 2월 의학적 사망에 가까운 심장폐색을 경험한 탓일까. 자신에게 그렇게 헌신적인 모습을 보여준 매력적인 엘렌에게 끌리지 못했다는 점은 페레 씨의 바람기가 마침내 잡혔다고 봐도 무방할 걸까. 꼬박 1년이 걸린 펠릭스 페레 씨(이름이 무려 ‘행운아’라니 대단하다)의 모험은 흥미진진했다. 그나저나 여전히 <나는 떠난다>가 공쿠르상을 받을 정도의 수작인지에 대해서는 좀 더 생각을 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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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북소녀 2018-08-17 17: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달리기는 다른 사람의 일대기를 그린 소설이니, 장 슈에노즈의 작가적인 면모를 보러면 이 책을 읽어야겠어요. 공쿠르상이라뇨!

레삭매냐 2018-08-17 17:58   좋아요 0 | URL
그렇죠 ! 타인의 일대기는 아무래도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싶네요.

이것도 절판된 책이긴 한데 <금발의
여인들>이라는 책이 궁금하네요.
 
국수 1
김성동 지음 / 솔출판사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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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는 월초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다 읽는데 무려 보름이나 걸렸다. 그런데 시작부터 프로 불편러의 모습을 보여야 하나. 고민이다. 솔직히 말해서 어지간한 외국 소설을 읽는 것만큼이나 어려웠다. 이유는 6권 세트로 구성된 <국수>의 마지막 권 국수사전이 이유가 돼지 않을까 싶다. 어려서는 참 모르는 말들을 찾기 위해 두터운 국어사전 찾기를 마다하지 않았는데 김성동 작가가 구사하는 구한말 단어들은 생소하고 어렵고 또 그 의미를 찾기가 귀찮았다. 프로 불편러는 내러티브에 집중하는 편이지 그런 세세한 의미까지 눈여겨보고 싶지 않았던 걸까.

 

외적으로는 문재인 대통령이 이번 여름휴가 때, 이 책을 읽었다는 말에 그야말로 날개 돋친 책 판매고가 뛰었다고 한다. 출판사 관계자는 마치 로또 맞은 것 같다고 했던가. 좋은 일이다. 평소에 책을 읽지 않는 이들이 책을 읽게 되는 동력을 맞는다는 건. 그런데 낱권으로는 (알라딘 지수로) 나도 마찬가지겠지만 1권에 비해 나머지 책들은 1/3 토막이다. 판매의 비대칭성이라고 해야 하나.

 

조선 최고의 국수(國手)를 꿈꾸는 유가의 꼬맹이 김석균은 적적암에 기거하는 백산노장에게 기세 좋게 도전장을 던졌다가 일패도지하게 된다. 그런데 프로 불편러는 이 장면부터 벌써 불편해지는 걸까. 그러니까 작가는 전통적이고 가부장적 사고로부터 이야기의 출발을 예고하는 걸까. 기존 질서를 뒤집어 엎을 수 없었던 동학운동의 운명을 예고라도 하듯이, 꼰대정신은 빛을 발한다. 완고하게 구축된 기존 질서에 대한 석균의 도전은, 기존 자동차 업계에 일대 도전장을 던진 경세가 일론 머스크의 그것이 연상됐다. 가솔린 오토메이커들은 일론 머스크가 구상한 테슬라 전기자동차가 망하길 학수고대하고 있다. 일이 되는 방향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망해라를 연호하는 모습. 석균과 백산노장의 대결이 그렇게 나에게는 불편하게 다가왔다.

 

솔직하게 말해서 국수 1편만으로는 앞으로 어떤 일들이 벌어지게 되는지 가늠할 수가 없다. 대원군처럼 무작정 조선의 대문을 걸어 잠그고, 세상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우리 고유의 시스템(그것도 중국에서 유래한 성리학적 질서에 다름 아니다)과 악랄한 신분제를 고수하겠다는 방식이 더 이상 허용되지 않는다는 걸 애써 부인하는 위정자들의 사고방식도 이해할 수 없긴 매한가지다.

 

임오군란, 갑신정변 그리고 갑오농민운동으로 이어질 이야기들의 밑밥이 깔리는 것 정도로 만족해야 하나. 한편으로는 내러티브의 전개가 궁금하기도 하면서 각주가 없다면 알아먹을 수 없는 조선말 찾기가 귀찮고 버겁다. 단어들을 읽다 보면 문맥을 뚝뚝 끊어지니 말이다. 아마 그래서 분량은(285쪽) 얼마 되지 않는 읽느라 시간이 곱절은 더 걸린 느낌이다.

 

백산노장이 유가의 막둥이에게 유불이 다루는 진리가 다름이 아니다라는 식의 이야기도 쌩뚱맞다. 애시당초 조선 설계자들의 국시가 간단하게 말해서 숭유억불이 아니었던가. 국가적 차원에서 유교 질서의 지배자들은 불교를 억압하고 탄압하는데 전력을 다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대척점에 서 있는 노승이 말하는 대로 두 상이한 집단이 화해할 수 있단 말인가. 모를 일이다.

 

김사과 댁 영재이자 석균의 아버지 김병윤 역시 과거에 급제하여 공맹의 가르침을 현장에서 실천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공정한 인재선발이라는 명목 하에 시행되어온 과거라는 시스템 자체가 중앙집권적 군주를 위한 제도가 아니었던가. 아산현감이 되어 기존의 적폐들을 일소하고, 백성들을 위한 어진 목민관이 되겠다는 김병윤의 시도는 처음부터 성공할 수가 없었다. 일찍이 정조의 개혁정치도 영명한 군주가 추구하는 개혁을 뒷받침할 때묻지 않은 신진 사대부들이 절실하게 필요했지만, 개혁이 정상궤도에 오를 절대적 시간과 지속적 추구를 위한 제도적 뒷받침이 없었기에 실패하지 않았던가. 하물며 일개 목민관이 수세대에 걸쳐 누적된 병폐를 일소한다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시도였다.

 

아산이라는 작은 고을에서도 현실이 이럴진대, 국가적 차원에야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민비를 중심으로 한 외척 민씨들이 조선 팔도를 주무르면서 온갖 부정부패를 일삼고 백성들의 고혈을 착취하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관직매매는 기본이었고, 민서들은 기껏 농사를 지어도 대동세 같은 세금과 지주 몫으로 내정된 곡식을 내고 나면 그야말로 남는 게 없었다. 어째 상황이 날이 갈수록 보수 언론에서 그렇게 목놓아 외쳐 대던 트리클 이펙트는 어디로 다 가버리고, 빈부의 격차가 심해져 가는 21세기 대한민국의 모습과 다를 게 없는지 궁금해졌다.

 

그런 마당에 아버지 김병윤처럼 입신해서 무언가 해보려는 노력 대신 조선 팔도에서 제일 가는 국수 김시 씨를 이겨 보겠다는 유가의 막둥이 석균의 꿈이 한편으로는 어리석어 보이기도 하면서(뭣이 중헌디 시방!) 또 한편으로는 마치 스타크래프트 세계대회에 출전해서 세계 킹왕짱이 되어 보겠다는 21세기 소년의 꿈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어 조금은 애잔해지기도 했다.

 

외세의 대결과 국가의 근본이 흔들리는 격변의 시기를 맞아 한가롭게 바둑 타령이나 할 수 없다는(석균이 지주 김사과댁 맞손주가 아니었다면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정언명령에 주인공들이 어떤 식으로 대답을 하게 될지에 대해서는 후속편들을 읽어봐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래도 난 여전히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마음이 불편하다. 21세기에 순수한 조선말을 지켜야 한다는 저자의 말에도 도무지 공감할 수가 없고. 그렇다면 아예 한글이 창제된 15세기 국어 표기를 하자고 주장할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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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8-08-16 18: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기대가 많았는데
의외로 평은 그다지 않좋아 일단
보류중입니다.
그런데 레님은 완독은 안하실 건가요?
갈수록 좋은 느낌이라면 저도 고려는 해 보겠는데...ㅋ

레삭매냐 2018-08-16 20:00   좋아요 1 | URL
전 아무래도 완독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우선 읽어야 할 다른 책들이 너무
많구요... 시간 들여서 나머지 책을
읽어야 할 필요가 있나 싶네요.
 
어떤 핑팡퐁
이고 지음 / 송송책방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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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도착하기 전에 기다리지 못하고 결국 인터넷으로 <어떤 핑팡퐁>을 몇 편 읽었다. 다음이었던가, 네이버였던가. 연재는 이미 끝나 있었다. 오늘 책이 도착해서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역시나 알고 있는 에피소드들은 재밌었고, 내가 모르고 있던 이야기들과 주인공들에 얽힌 이야기를 알고 나자 마음이 푸근해졌다. 아, 만화 핑팡퐁에는 동물 가면을 쓴 이들이 등장하는데 저자 이고 씨에 의하면 어쩌면 우리 모두는 가면을 쓰고 살아가고 있다 뭐 그런 뜻인가 보다.

 

아마도 3년 전, 고양이 핑이 씨와 사자 레드 씨의 연애가 시작되는 시점에서 <어던 핑팡퐁>도 같이 출발하지 않았나 싶다. 핑이 팡이 그리고 퐁이 씨가 테드 할배에게 두 장(설마 이억?)을 뜯어내어 카페를 시작했다. 핑팡퐁은 카페 피파포를 아지트로 삼은 바리스타 게릴라들이다. 그냥 저냥 우리네 일상에서 볼 듯한 그런 이야기들이 이어진다. 그렇다, <핑팡퐁>의 이야기들에는 극적인 요소들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편안하다. 자극적인 조미료 스타일의 내러티브에 중독된 어떤 이들은 싱겁다고 할도 모르겠지만, 사실 그런 이야기들은 팟캐며 방송 그리고 소설에 이르기까지 지천이지 않은가. 이고 작가는 어쩌면 이런 담백한 이야기로 승부수를 띄운 건지도 모르겠다. 남들과 달리.

 

혼밥이 어느새 시대의 대세가 된 지도 오래지만, 주변에는 의외로 혼자 밥을 먹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내가 아는 어떤 형도 그랬다. 아니 보통 점심은 혼자서 먹어야 할 텐데 그럼 매 끼니 굶었단 말인가. 난 그 시절부터 이미 홀러 부가킹 햄버거 먹기에 익숙해져서 그런지 혼밥이 전혀 문제가 없었는데. 그럴 때 내가 그 형의 밥친구라도 되어 주었어야 하나 그런 생각이 불쑥 들었다. 아, 그리고 이고 작가는 타인의 시선이 매우, 몹시 부담스러운 모양이다. 특히나 상대방이 나를 판단하려고 든다면 더더욱. 퐁이의 시선에서 제발 나를 판단해 주지 마세요라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내가 혼자서 밥을 먹고 있는 걸 목격하더라도 제발 참견하지 마시고 못 본 척하고 가주셨으면 참 고맙겠다. 그런데 나라면 같이 먹자고 하는데 매몰차게 내 시간이니 넘어 주지 마세요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그러지 못하겠지.

 

나의 주장을 강력하게 펴지 못하는 장면도 공감이 갔다. 딱히 뭘 먹어야겠다는 생각도 없지만 그건 아니라면 아니라고 말해야 하는 게 아닐까. 오늘 점심 때, 회사에서 단체로 나가 밥을 먹게 됐다. 사실 어제 먹고 싶었던 순댓국을 먹어서 오늘은 아무거나 먹어도 문제가 없었지. 오늘은 파스타를 먹으러 가자고 하대. 그래서 쭐래쭐래 선두를 따라갔다. 13명이나 되다 보니 주문이 밀려서 가장 늦게 주문한 우리 테이블에 음식이 늦게 나왔다. 아유 정말, 해물 누룽지 파스타 먹다가 입을 델 뻔 했네. 이미 다 먹은 이들이 기다리고 있고. 그냥 먼저 가실 것이지 뭘 참. 상대방을 배려해 준다는 게 항상 미덕은 아니지 싶었다.

 

자신보다 먼저 입사한 후미고 씨를 제치고 남성 발렌타인 씨가 먼저 승진하는 장면에서는 여전히 우리 사회에 뿌리 깊은 남성우월주의랄까 뭐 그런 점에 대한 불편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핑팡퐁 친구들이 모여 눈 내리는 가운데 망년회에 참석한 후미고 씨에게 재규어 사장 소키 씨가 카드인지 연하장으로 그녀의 마음을 달래 주려고 하지만, 난 마음에 들지 않더라. 그러니까 승진과 그에 따른 봉급인상 등등의 혜택 대신에 연하장 하나로 그냥 때우려는 거였나 싶기도 하고. 누구처럼 프로 불편러까지는 아니겠지만 마음에 쫌 불편했다고 말하고 싶다.

 



엔딩에서는 연애의 끝은 이별 아니면 결혼이더라는 오래 전부터 결혼하지 않겠다고 떠들어 대던 선배의 애인(지금은 그의 부인이 되었다 그리고 애도 둘이나 있다)이 말해주던 명언이 생각났다. 뭐 그렇게 가는 거지. 듣자 하니 기존에 발표된 에피소들 중에서 선택해서 책으로 나왔다고 하던데, 그럼 책에 없는 에피소드들도 웹툰으로 볼 수 있다는 말일까. 그나저나 핑팡퐁들의 삶을 관통하는 고고한 유영은 계속되는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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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 블루 컬렉션
장 에슈노즈 지음, 이재룡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10월
평점 :
절판


 


뜻하지 않던 문화상품권이 넉넉하게 생겼다, 그래서 바로 중고서점에 달려가 세 권의 책들을 집어왔다. 그 중의 한 권이 바로 공쿠르 상에 빛나는 미니멀리스트 작가 장 에슈노즈의 <달리기>였다. 열린책들에서 나온 블루 시리즈라고 하는데, 솔직히 말해서 그전에 나온 표지가 더 마음에 들었다. 결국 올디 벗 구디(olide but goodie란 말인가.

 

 

프랑스에서 한 자락하는 작가라고 하는데 나로서는 생소한 작가다. 역시나 세상은 넓고 읽을 책들은 하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장 에슈노즈는 소설 <달리기>의 주인공 ‘인간 기관차’ 에밀 자토펙의 일대기를 쓰려고 한 걸까라는 생각에 도달했다. 나도 그의 이름을 어느 올림픽 육상을 다룬 다큐멘터리에선가 슬쩍 본 적이 있었다. 핀란드의 국민영웅 파보 누르미에 뒤를 이어 육상 중장거리에서 한 때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실력을 보유자였다는 점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작가가 소개하는 자토펙의 이야기는 보다 흥미진진하게 다가왔다.

 

1922년생 체코슬로바키아 모라비아 출신이었던 소년 에밀은 원래 화학자가 꿈이었다. 하지만 가난한 집안사정 때문에 십대에 이미 공장에 취업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즐린이라는 곳에서 신발을 만드는 바타 공장에서 일하게 된 에밀은 원래 스포츠에 관심이 없었지만, 어느 날 달리기에 취미를 붙이기 시작한다. 참, 소설의 시작은 체코에 진주한 독일군에 대한 묘사로 시작된다. 어느 시절에 점령군이 원주민들의 호감을 산 적이 있었던가. 독일계 주민이 다수 사는 주데텐란트 병합과 체코 합병은 차원이 달랐다. 참고로 2차 세계대전 동안 공업이 발달한 체코는 나치 독일의 병기공장으로 작동했다.

 

연합군의 압도적인 공격 앞에 무너져 내려가던 독일군은 체코를 쉽게 포기하지 못하고, 단발마적인 저항을 계속한다. 독일군을 추격하는 소련군을 돕기 위해 무엇이라도 하겠다는 일념으로 삽을 들고 나선 청년 에밀의 모습에서 훗날 프라하의 봄에 이제는 해방군에서 점령군으로 변한 소련군에 저항하던 위대한 스포츠 영웅의 면모가 드러나기도 했다. 역시 사람은 변하지 않는 법. 전쟁 말기, 징병된 에밀은 장교로 임관되어 자신의 주특기인 달리기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조국은 미래의 국민적 영웅에게 제대로 된 유니폼은 물론이고, 국제대회에 출전하기 위한 차편도 제대로 마련해 주지 못한다. 요즘 같으면 트레이너며, 코치 그리고 컨디션 조절을 위한 담당 요리사까지 딸려서 그야말로 국가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을 텐데 전후 체코에는 그럴 겨를이 없었나 보다. 그럼에도 에밀 자토펙은 국내 대회를 비롯해서 국제대회 특히 1948년 런던올림픽과 1952년 헬싱키 올림픽에서 자신의 진가를 드러낸다.

 

중장거리를 달리기 위해서는 특히나 체력 조절과 효과적인 신체 기관의 활동을 최소화하는 달리기 방식을 통한 훈련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 당시 전문가들의 견해였다. 하지만 에밀 자토펙 아저씨는 그런 전문가들의 견해를 비웃으면서 자신만의 스타일로 세계 육상계를 제패하는데 성공했다. 머리를 좌우로 흔들고, 손발을 제멋대로 움직이는 기괴한 스타일을 처음 본 이들은 어디 모라비아 시골구석에서 올라온 선수의 촌극인가 싶었겠지만, 체코의 국민영웅은 그런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만의 스타일로 세계를 놀라게 만드는데 성공했다. 특히 지금까지도 마라톤 종목 우승자가 다른 육상 경기에서 우승한 기록은 없다고 하는데, 에밀 자토펙은 헬싱키 올림픽에서 마라톤과 5000m 그리고 10,000m에서 연달아 우승하는 기염을 토해냈다. 참고로 그의 투창선수 아내 다나도 같은 올림픽에서 우승을 하면서 올림픽 역사상 부부가 한 대회에서 우승하는 진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한편 그의 빛나는 모습 뒤에는 그림자도 존재했다. 체코 공산당 간부들은 그들의 국민적 영웅 자토펙이 행여나 서방으로 망명하지 않을까 염려했다. 1950년대는 냉전이 한창이던 시절이었다. 수많은 동유럽 공산주의 국가의 인재들의 서방 이탈이 이어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스운 체제경쟁이 이루어지던 가운데, 체코의 위대한 스포츠 영웅이 혹시라도 서방 망명을 하지 않을까 싶어 체코 정보부는 에밀 자토펙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지원은 해주지 못할망정, 불의에 앞서 싸운 조국의 영웅에게 조국이 해준 고작 사찰이라니. 하긴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개봉한 영화 <공작>의 흑금성 박채서 씨도 비슷한 대접을 받지 않았던가. 서방 언론과의 인터뷰를 갖은 핑계를 대면서 막으려는 체코 정보부의 공작은 귀여울 정도의 수준이었다. 물론 기레기라는 말을 들어도 전혀 아깝지 않을 정도로, 에밀의 말을 왜곡해서 자극적인 방식으로 전달하는 서방 언론도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그들 덕분에 에밀의 프랑스와 브라질 비자 신청이 거부되지 않았던가.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언론 왜곡을 장 에슈노즈는 유머스럽게 꼬집는다.

 

개인적으로 진정한 영웅 에밀 자토펙의 진가는 그가 정상에서 기량이 쇠퇴하여 은퇴한 뒤에 드러났다고 생각한다. 멜버른 올림픽 마라톤이 열리기 2주 전에 탈장 수술을 하고 최악의 컨디션으로 출전해서 6위에 그친 모습, 후진 양성을 위해 기꺼이 연습 상대가 되어 주는 모습 그리고 마지막 1968년 체코의 국경에서 대기하던 50만 바르샤바 조약군이 프라하에 기갑부대를 앞세워 진주했을 당시 소신발언을 했다가 모든 명예를 박탈당하고 우라늄 광산에 끌려가 고초를 겪어야 했던 점은 에밀 자토펙이 과연 무엇을 위해 달렸는가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해보게 만들어 주었다. 자유를 외치며 거리에 나선 체코 민중들을 공수부대와 탱크를 동원해서 무자비하게 진압한 공산주의 독재자들의 편에서 자신의 안위를 구가할 수도 있었겠지만 에밀 자토펙은 청년 시절에도 그랬던 것처럼 절대 불의의 편에 서지 않았다. 그가 선이라고 믿었던 소련군이 불의의 동조자로 바뀌자 가차 없이 자신들을 나치 독일에게서 해방시켜 준 소련군에 저항했다.

 

사람들은 올림픽에서 정치를 배제시켜야 한다고 노래를 부르지만, 사실상 올림픽만큼 스포츠를 가장한 정치적 행사가 또 있을까 싶다. 치열한 경쟁으로 순위를 매기고, 다시 그렇게 획득한 메달 색깔로 순위를 매기는 시스템으로 우리 조국이 다른 나라보다 낫다는 선정의 장이 올림픽의 진짜 모습이 아니었던가. 어쩌면 에밀 자토펙도 순수하게 달리고 이기고 싶다는 마음으로 올림픽과 각종 국제경기에 참가해서 세계신기록을 작성하고 우수한 성적을 냈겠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정치적 프로파간다의 일원이었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쩌면 프랑스 출신 작가 장 에슈노즈도 그런 점을 파악하고, 달리는 인간 기관차 에밀 자토펙의 일대기를 소설화한게 아닐까 뭐 그런 생각이 들었다.

 

미니멀리즘을 강조하는 작가답게 장 에슈노즈의 <달리기>는 내 취향에 맞으면서도 다양한 사유들을 하게 해주는 그런 작품이었다. 갑자기 에슈노즈의 다른 작품들이 더 읽어 보고 싶어졌다. 문제는 거의 다 절판되어 구할 수가 없다는 게 맹점이다. 천상 도서관을 이용해야지 싶다. 이런 책은 그야말로 연필로 밑줄 좍좍 그어 가면서 읽어야 제 맛인데 말이다. 고게 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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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8-08-16 11: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연필로 밑줄 좍좍~너무 좋아요 표현이 살아있어요 홍홍

레삭매냐 2018-08-16 11:05   좋아요 1 | URL
아마 이래서 책은 사서 읽어야 하는게
아닌가 스스로 위로한답니다 :>

카알벨루치 2018-08-16 11:06   좋아요 1 | URL
작가들은 책쓴다고 얼마나 고생했을까요 ㅎ금전적인 여유가 되면 다 사주고 싶다는 ㅎ

카알벨루치 2018-08-16 11:41   좋아요 1 | URL
근데 무선제본은 읽기가 훨씬 편한가요? 양장보다?

레삭매냐 2018-08-16 11:46   좋아요 1 | URL
전 무조건 양장팬이라 양장을 샀겠지만
무선은 초이스가 없으니...

뭐 원체 페이지 수가 적어서 아주 부담
이 없더라구요(본문 146쪽).

카알벨루치 2018-08-16 12:00   좋아요 1 | URL
책은 무조건 양장!!!!

목나무 2018-08-16 11: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 취향에 맞는 작품이라 하시니 저도 우선 찜부터...ㅎㅎㅎ
절판된 책들 꼭 구하시길 바랄게요! :)

레삭매냐 2018-08-16 11:47   좋아요 1 | URL
분량이 적어서 날로 먹은 느낌입니다 :>

다른 책들은 오늘 도서관으로 빌리러
가려구요. 그놈의 공쿠르 상 수상작도
재밌을 지 궁금하네요.

뒷북소녀 2018-08-16 11: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다른 표지로 읽었었는데 또 리커버 됐네요^^

레삭매냐 2018-08-16 11:48   좋아요 1 | URL
그리고 보니 표지가 자그마치 세 종류
나 되는 것 같아요.

자토펙 아저씨가 나오는 것 하나
신발짝 그림 하나 그리고 이번에 무선
제본으로 나온 것.

아주 열책에서 징하게 우려 드시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