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은, - 빔 벤더스의 사진 그리고 이야기들
빔 벤더스 지음, 이동준 옮김 / 이봄 / 2011년 7월
평점 :
절판


 

말만 들어도 설레는 영화가 있다. 그 영화를 봤든 보지 않았든 말이다. <파리, 텍사스> 그리고 <베를린 천사의 시>. 전자는 아무래도 보지 않은 것 같고, 후자는 오래 전 하바드 스퀘어의 브래틀 시어터에서 봤다. 그런데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는다. 외국에서 우리말도 아닌 영어 자막으로 봐서 그래서였을까, 그냥 고단하고 피로한 일상에 젖어서였을까. 그래도 그 시절에는 그렇게 영화를 찾아 보러 다니곤 했던 것 같다. 아마 어쩌면 나의 예술영화 순례는 빔 벤더스의 <베를린 천사의 시>로 종말을 맞았는지도 모르겠다. 그 후에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투항했다.

 

빔 벤더스는 이미 나이 40세에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가 찍은 사진들 중에는 내가 한 때 좋아하던 마틴 스코시지와 이사벨라 로셀리니, 구로사와 아키라 그리고 레드삭스와 양키즈를 보러 간 니콜라스 레이 감독이 등장한다. 그들과 친분이 없다면 그들이 카메라를 들고 덤비는 벰더스에게 기꺼이 피사체가 되려고 했을까. 가뜩이나 자신의 프라이버시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서양인들에게는 아마 어림도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벤더스에게는 그런 셀럽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그리고 그들의 사진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벤더스는 자신에게 주어진 그런 기회를 낭비하지 않았다. 오래 전 랑콤 화장품 모델이었던 이사벨라 로셀리니만한 품격과 고혹한 아우라를 보여준 모델이 또 있었던가. 난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미국 영화의 전설들이 차례로 그의 카메라에 제물이 되어 등장한다. 제임스 딘 주연의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했다는 데니스 호퍼는 또 어떤가. 니콜라스 레이 감독과 뉴욕에서 당구를 치는 장면도 멋지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필름 카메라 시절의 일이겠지. 디지털 사진에는 왜 그렇게 정감이 가지 않는지 모르겠다. 나는 천상 구닥다리 아날로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올드스쿨 스타일인가 보다. 베니스 극장에서 구로사와 아키라와 마이클 포웰의 뒷모습을 찍으면서 그들의 머리에는 그들이 만든 영화보다 더 많은 이미지와 아이디어들로 가득할 거라고 추측했던가. 긴 글보다 순착을 포착해낸 사진에 붙이는 이런 아포리즘 같은 글들이 때로는 더 인상적이라는 느낌이다. 그리고 울림도 상대적으로 길다.

 

뉴욕에서는 자신의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의 각본을 맡은 친구 페터 한트케를 만났다지. 몬태나 주 뷰트에서는 절망에 가득차서 자신들의 집에 불을 지르는 이들에 대한 이야기도 읽었다. 어느 소설에선가 뷰트라는 도시 이름을 들었던 것 같은데. 정말 천국보다 낯선 도시의 이름이 아닐 수 없다. 그 옆에 있는 도시의 이름은 아나콘다라고 한다. 이렇게 공교로울 수가.

 

나도 가봤던 호주의 에어즈락과 울룰루에 대한 사진들을 보니 반가웠다. 그래 그 때 에어즈락에 오를 적에는 흰색 페인트가 칠해진 길을 따라 올라갔더랬지. 그런데 어떤 할아버지는 평생 소원이었던 에어즈락에 오르다가 그만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지. 슬프면서도 이야기였었는데, 이십대의 한창 팔팔했던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몸이 불편하시면 산에 오르시지 마시지... 어쩌면 그 어르신의 버킷 리스트 중의 하나였을 지도. 아, 내가 이 책에 실린 사진 중에 가장 흥미로운 사진도 호주에서 벤더스 감독이 찍은 사진이었다. 나무에 맥주병을 잔뜩 걸어 놓은. 그야말로 행위예술의 극치가 아니던가. 인생과 술을 소비하고 남은 잔재로 만든 행위예술의 정수, 상상만 해도 멋지지 않나.

 

서퍼들의 천국이 된 발리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롭다. 발리의 중심이라는 덴파사르에서 그가 연작처럼 찍은 비 내리는 동안의 소녀에 대한 사진은 왠지 모를 서구인의 시선으로 본 신비롭고 영험한 오리엔탈리즘의 기운이 솟아나는 느낌이다. 확실히 사진을 찍는 사람의 시선에 따라 같은 피사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가 다르게 포착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커스 구경을 하고 싶지만, 500루피 750루피가 없어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지 못하게 쇠철판으로 두른 틈새로 구경하는 아이들의 시선을 벤더스는 추적한다. 또 어떨 때는 피사체를 사로잡는 사진가를 찍기도, 그리고 그가 카메라 뷰파인더에 잡으려고 했던 피사체를 그대로 따라 찍기도 한다.

 

 

<한번은>에서 가장 매력적인 사진 찍기 포인트는 아무래도 텍사스가 아닐까. 뉴욕 한복판에서 만난 <파리, 텍사스>의 주인공 해리 딘 스탠턴은 여전히 영화 속 텍사스의 황무지를 방황하는 주인공 트래비스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정장과 리무진으로 무장했어도, 떠돌이 역할을 맡은 트래비스의 이미지가 그대로 시선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왔다. 짐 자무시의 시네마틱 페르소나 존 루리의 격정적인 키쓰 씬은 또 어떤가. 이제는 공룡처럼 멸종해 가는 나이든 카우보이 모자를 쓴 텍사스 노인장에 대한 벤더스의 묘사도 일품이다. 그리고 슬퍼 보인다고 했던가. 내가 어려서 본 미국 영화 속에 등장하는 카우보이는 홍길동 같은 의적에 가까웠는데, 나이 들고 다시 보니 불한당이나 깡패의 그것에 더 가깝지 않았나 싶다.

 

론 코빅이라는 작가가 탐 크루즈 주연의 영화 <7월 4일생>의 원작자라는 사실도 벤더스의 사진집을 통해 처음 알게 됐다. 그리고 영화 속의 탐 크루즈처럼 베트남전에서 부상당한 해병으로 휠체어를 타고 다녔다는 사실도. 그런데 당구 실력은 사지가 멀쩡한 벤더스보다 훨씬 뛰어났던 모양이다. 그들은 내기 당구를 쳤고, 벤더스 감독은 많은 돈을 잃었단다. 뭐 세상은 그렇게 가는 거지.

 

 

광활한 호주땅에서 로드킬한 왈라비의 사진은 48시간 이상을 그레이하운드 버스로 달려 애들레이드에서 에어즈락을 가던 길에 익숙하게 본 모습이었지. 그 시절이 좀 그립군.

 

[뱀다리] 이번 주말에는 벤더스의 <베를린 천사의 시>를 다시 한 번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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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그만 메모수첩 2018-09-15 04: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실연당하고.. 소극장에서(멀티플렉스가 들어오기 전 제가 사는 도시엔 재개봉 혹은 예술영화를 상영해주는 소극장들이 몇 있었어요) 혼자 봤던 기억이 나네요. 요즘 말로 정말 힐링되었던 영화였어요. 아이가 아이였을 때.. 그 뒤가 기억이 안나니 저도 한번 더 봐야겠습니다 ㅎㅎ

레삭매냐 2018-09-15 14:42   좋아요 1 | URL
아~ 그런 사연이 있는 영화였군요...

전 보기는 했는데(확실히!!!) 흑백영화
라는 점 그리고 두 명의 천사 +
형사 콜롬보 아저씨가 나온다는 것
밖에는 도저히 생각이 나지 않네요.

나중에 할리우드에서 시티 오브 에인절
인가하는 영화로 리메이크되었는데
희대의 망작이 되었노라는.
 

감상일 : 2018년 9월 13일 목요일

 

스타워즈 팬이다. 나온 시리즈들을 망작이라는 <라스트 제다이> 빼고는 모두 봤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오리지널 만한 작품이 없는 것 같다. 나머지 외전들까지 포함해서 봐도. 조지 루카스의 마법이 40년이 흘러 기존 팬들 외에 새로운 팬들을 영입하지 못하는 걸가. 블로그에 올라온 리뷰들을 검색해 보니, 그저그런 SF영화로 보는 시선들이 다수라는 걸 체감할 수 있었다. 그렇지 시간은 흘렀고, 스타워즈 새가에 대해 생소한 이들은 오리지널 시리즈부터 다 봐야 하는지 묻고 있다는 점만 봐도 그런 것 같다. 소설가가 자신의 작품을 발표하면서 성장해 나가는 것처럼, 스타워즈 새가의 팬들도 영화가 발표되면서 성장하고 진화하게 된 게 아닐까. 아무래도 앞으로의 전망은 비관적일 수밖에 없다. 오리지널이 다루던 시절과 지금은 너무도 달라졌으니 말이다.

 

루카스필름을 인수한 디즈니에서는 어쨌든 과거의 영광을 발판 삼아 향수에 젖은 팬들의 호주머니를 털기 위해 계속해서 영화를 찍어내고 있는 중이다. 스핀오프 <로그 원>에 이어 이번에는 스타워즈 새가 최고의 영웅이라고 할 수 있는 헌 솔로의 기원을 찾아 나선다. <로그 원>에서 막판 깡패 다스 베이더의 등장으로 모든 게 한 방에 해결이 되었다면 이번에는 오래 전 해리슨 포드가 맡았던 헌 솔로 솔로로 영화를 이끌어 가야 하는 문제가 있긴 하지만 말이다.

 

스핀오프에서는 왜 스타워즈 새가 갤럭시 화 화 어웨이~ 흐르는 자막이 등장하지 않는 거지. 오리지널에 대한 예우일까? 궁금했다. 임페리얼 아미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이전의 시대 젊은 날의 헌이 주인공이다. 식량과 의약품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하이퍼퓨엘의 원료 코악시움이 중요한 시대다. 돈 대신 크레딧이라는 개념이 있었고. 근데 난 왜 갑자기 뜬금없이 가상화폐와 유러가 생각나는 거지. 전 세계를 아우르는 화폐라는 개념에서는 크레딧, 그리고 통합화폐라는 점에서는 유러화가 생각났다.

 

코렐리아 행성에 살면서 미래의 파일럿의 꿈을 꾸며 사는 헌과 여자친구 키라(그렇다 오리지널 시리즈의 애인 레이아 공주 이전에 첫사랑 키라가 있었다!)는 소년 갱단의 일원으로 코악시움을 탈취해서 지긋지긋한 행성을 떠날 궁리를 한다. 헌은 가까스로 손에 넣은 코악시움을 가지고 키라와 함께 탈출을 시도하지만 추격자들에게 키라가 잡히고 자신만 떠나게 된다. 추격을 피하기 위해 제국군에 입대하게 되는데, 이 때 솔로라는 성을 얻게 된다. 가족도 친구도 없는 떠돌이 모험가의 일생이 시작된 것이다.

 

원래 제국군 해군 비행사를 지행했지만 아카데미에서 쫓겨나고 땅개로 전쟁에 참전해서 치열한 전투를 치른다. 언젠가 제국군에서 탈출해서 코렐리아의 키라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혹독한 전장을 전전한다. 우연히 만난 미래의 멘터이자 우주불한당 토비아스 베킷단의 일원으로 전장을 탈출하는데 성공한다. 이 때 먹잇감으로 던져진 우리에서 친구이자 전우 우키족 츄바카(츄이)를 만난다. 그러니까 이 스핀오프에서는 헌 솔로의 기원과 그가 맺게 되는 관계에 대한 설명이 등장한다.

 

베킷 일당은 드라이덴 보스의 명령으로 밴더원 행성에서 코악시움을 수송하는 열차를 습격할 계획을 세운다. 어때? 예전에 미국의 대서부를 가로 지르는 금괴수송 열차를 탈취하려는 무장강도단이 연상되지 않나. 미국 문화의 이런 단면에서는 기존 문화의 복제와 재생산이라는 이데올로기적인 단면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는 걸 다시 한 번 깨닫게 됐다. 하지만 이때 보안관도 아닌 엔피스 네스트라는 그룹이 등장해서 베킷 일당의 코악시움 탈취는 실패한다. 크루 리오 듀란트와 여전사 밸이 습격 중에 장렬하게 죽는다.

 

우주악당 드라이덴 보스(폴 베타니 분)를 찾아간 베킷과 헌 그리고 츄이는 새로운 제안을 제시한다. 아, 그전에 헌이 꿈에 그리던 애인 키라를 드라이덴 보스의 기지에서 기적적으로 재회하는 장면도 있었지. 도대체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한데, 결국 영화를 알려주지 않는다. 어쩌면 헌 솔로의 행적보다도 더 궁금한 게 그녀의 지난 3년에 대한 이야기였다. 혹시 이 이야기도 나중에 스핀오프로 써먹으려고 준비해 두었나.

 

드라이덴 보스에게 죽지 않기 위해서라도 새로운 코악시움을 만들어서라도 보스에게 진상해야 했다. 케셀 행성에서 채굴 중인 정제되지 않은 형태의 코악시움을 탈취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그전에 베킷과 헌, 키라 그리고 츄이는 새로운 건달 랜도 칼리시언을 만나 미래에 헌 솔로의 애마가 될 밀레니엄 팰콘을 타고 케셀 행성으로 출발한다. 그전에 랜도 수하의 안드로이드 L3로 크루에 합류하는데, 랜도와 모종의 썸을 타는 관계라고 해야 하나. 갤럭시 최고의 내비게이터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을 정도로 멋진 활약을 보여준다. 아울러 “Equal rights"를 주장하며 인간에게 착취당하는 안드로이드 해방을 꿈꾼다.

 

케셀 행성에서 코악시움을 캐내기 위해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반노예 상태 인간을 비롯한 다양한 외계종족들의 모습이 왜 그리 익숙한 거지. 자본주의 경제를 돌리기 위해 꼭 필요한 노동력의 원천이 결국 인간이라는 점을 디즈니가 꼭 집어서 말하고 싶었던 걸까? 에이 설마 그럴 리가... 천하의 디즈니가 그럴 리가 없겠지 싶다. 아니 그렇게 기술이 발전한 미래라고 한다면 힘센 안드로이드들을 잔뜩 만들어서 광산에 투입하면 간단하게 문제가 해결될 게 아닌가. 아마 미래에도 그건 불가능한 모양이다.

 

11개의 코악시움 캐니스터를 싣고 케셀 행성을 탈출하던 제국군 모함을 만난 솔로 일행은 자신들의 뒤를 쫓는 타이 파이터와 괴물 그리고 중력장을 피해 이제 실전을 통해 유능한 파일럿으로 변신한 솔로의 진두지휘 아래 도주에 성공한다. 만신창이가 된 팰콘을 타고 도착한 곳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엔피스 네스트와 무장한 클라우드 라이더들이었다. 자, 이야기는 어떻게 끝이날 것인가. 배신의 드라마가 반복되는 가운데, 시퀄을 위한 떡밥들이 다량 투척되고 무엇보다 베일에 쌓인 신디케이트 크림슨 돈의 두목이 그 유명한 다스 몰이라는 점에 짜릿한 전율이 일었다. 정작 에피소드 원에서는 그냥 그렇지 않았던가. 검 스타일의 라이트세이버가 아니라, 창 같이 양쪽에서 광선검이 나오는 아이디어는 정말 멋졌었는데.

 


헌 솔로는 엔피스 네스트로부터 반란군과 함께 제국에 싸우자는 제안을 받는다. 헌은 처음부터 좋은 선수가 아니었다. 결국 시스라는 거악과 싸우기 위해 오리지널 시리즈에서 반군에 합류하기는 하지만. 헌 솔로만큼이나 매력적인 캐릭터가 바로 <This is America>로 이름을 날린 도널드 글로버/차일디시 갬비노다. 개인적으로 스타워즈 새가 시리즈 중에 최고라고 생각하는 <제국의 역습>에서 친구이자 경쟁자인 헌을 제국군에게 팔아 넘기는 랜도 칼리시언 연기를 도널드 글로버는 매력적으로 해냈다. 도박 일차전에서 랜도의 속임수에 헌이 넘어갔다면, 2차전에서는 그의 속임수를 간파한 헌의 승리로 결국 팰콘의 주인이 되었다. 그러니까 갤럭시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는 아무도 믿어서는 안되고(희대의 깡패 토비아스 베킷의 충고다)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걸어야 한다. 한 마디로 판돈이 클수록, 얻는 것도 크다는 말인가. 죽을 고비를 수도 없이 넘기면서 헌은 그렇게 멋진 우주 건달로 커가는 모양이다.

 

어쩌면 <헌 솔로 스타워즈 스토리>는 에피소드 4로 이어지는 오리지널을 위한 가교 역할을 하는 게 아닐까. 크림슨 돈의 일원으로 활약하는 키라의 미스터리, 베킷의 말을 믿고 태투인 행성(루크 스카이워커의 고향!)으로 향하는 헌 솔로와 츄이에게 또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시퀄에서 부디 기대하시라. 일단 <헌 솔로 스타워즈 스토리>에서 결정적이 한 방은 없었지만, 무언가 기대를 하는 떡밥들을 사방에 투척해 두었으니 론 하워드 감독이 어떤 식으로 시퀄에서 이야기를 풀어갈지 궁금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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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14 11: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삭매냐 2018-09-14 11:40   좋아요 0 | URL
무언가 강력한 MSG가 필요한데
론 하워드가 너무 약하게 친 모양입니다 :>

아님...
각본을 맡은 로렌스 캐스단이 문제였을까요.
 

 

 

다른 이에게 무언가 줘서 기뻐할 줄 아는 사람이 되길.

 

우리 어머니가 나에게 항상 하시던 말씀이시다. 지난 주말에 정말 오랜만에 캠핑을 갔다. 안성에 있는 별밤 캠핑장. 아니 이런 곳에 캠핑장에 있단 말인가 싶은 곳에 고즈넉한 분위기의 캠핑장이 있었다. 집에서 출발해서 가는 데 자그마치 두시간 하고도 반이 걸렸다. 밤중에 올 땐 딱 한 시간이 걸렸다. 날이 좋아 모두들 집 밖으로 뛰쳐나온 모양이었다. 영동 고속도로에 정말 더럽게 차가 많았다. 거리는 얼마 되지 않는데.

 

어려서는 캠핑 다니는 걸 참 좋아했었는데. 중학교 때, 갔던 캠핑에서는 갑자기 폭우가 쏟아진 바람에 다들 기겁해서 철수했던 기억이 난다. 진짜 엉망이었지. 대학교 때는 절친과 함께 둘이서 격에 맞지도 않는 6인용 텐트를 들고 정선 아우라지로 여행을 떠났었지. 그 때 아마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지. 다음날 식육점에 갔다가 뉴스를 보고 기겁한 기억이 난다. 준비한 쏘주가 다 떨어지는 바람에 이웃 텐트에 있는 모르는 분들에게 쏘주를 좀 파시면 안되냐고 했더니만 맘대로 갖다 마시라 해서 입이 쩍 벌어졌던 기억도. 만취한 친구가 안경을 그 넓다란 풀밭 어딘가에 잊어 버려서 한참을 걸려서 바윗돌에 잘 올려 안경을 찾은 기억도 난다.

 

 

캠핑장에서 서로 처음 만난 꼬맹이들이 그렇게 친하게 지내는 걸 보고는 깜짝 놀랐다. 우리가 꼬챙이에 쏘시지를 구워 주니, 그 집에서 맛난 그리고 그 비싼 복숭아를 세 개나 들려 보내 주셨다. 아이 고마워라. 그렇지 이게 오가는 정이지. 같이 갔던 회사 동료네 딸내미가 삼촌 삼촌 메뚜기 잡아 주세요 그래서 아이들과 미친 듯이 뛰면서 전공을 발휘해서 지천에 널린 메뚜기와 잠자리를 잡았다. 아랫녘에 있는 캠핑장에는 누군가 지난 여름에 먹고 뱉은 수박씨가 자라서 자그마한 수박이 열리기도 했더라. 청개구리도 봤다. 밤에 캠프화이어를 하면서 ‘불멍’하던 순간의 추억은 잊을 수가 없을 것 같다. 아마 태고적 인간도 밤에 불을 피우고 이렇게 멍을 때렸겠지 싶더라.

 

사연이 길었다. 학교 후배 녀석에게 책 보낸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이사를 앞두고 있어서 한참 책 정리를 하고 있다. 인스타에서 에세이를 부지런히 쓰고 있는 후배에게 책을 보내 준다고 했다. 녀석은 책을 다시 돌려 보낸다고 하고, 착불로 보내라고 한다. 됐다, 착불은 됐고 책도 다 너 가져라. 사무실에서 급하게 챙겨 보내느라 미처 보내지 못한 책들이 있는데 그것도 나중에 보내 준다고 했다.

 

인스타에서 끗발 날리는 녀석이 받은 책의 사진을 인스타에 올렸길래 훔쳐왔다. 난 알라딘에 포스팅을 하려고. 그렇게 세상은 돌고 돌아가는 모양이구나.

 

지금 한창 아리엘 도르프만의 <도널드 덕, 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읽고 있는 중이다. 아니 이렇게 미키 마우스와 도널드 덕으로 대변되는 미국 문화제국주의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있었던가. 알라딘에서는 살 수가 없어서 교보로 주문했더니 어디 지방에 있는 책을 수급해서 출고 준비 중이라고 한다. 어딘가에 내가 구하는 책이 있다는 게 신기하기만 하다.

 

그리고 보니 지난달 독서 모임 때도 책을 몇 권 가져가서 동생들에게 나눠 주었지. 이달에도 갖다 주어야 하는데 그럴려면 추석 때 부지런히 읽어야겠다. 알라딘 중고서점에 왕창 책 사러 가야 하는데, 언제 가나. 무려 7권이나 된다. 아리엘 도르프만의 책은 많이 없다. 있으면 쟁여 오려고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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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8-09-13 15: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만큼 읽는 건 쉬운 일은 아니겠으나, 그래도 어쨌든 읽는 것은 누구나 할 수는 있는 일이지요. 하지만 나누는 건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잖아요. 경지에 오르셨어요 ㅎㅎㅎ 부럽습니다.

레삭매냐 2018-09-13 16:10   좋아요 1 | URL
저도 다른 좋은 분들에게 책을 받았으니
또 순환시킨다는 의미에서 다른 이들
에게 돌려 주어야 하는 게 아닐까 싶
습니다.

덜고 또 채워야죠 ㅋㅋㅋ

목나무 2018-09-13 15: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메뚜기와 잠자리를 잡는 전공이라.. 뭔지 왜이리 궁금할까요. ㅋㅋ
곧 이사하시는군요. 이럴 때 책정리 한번 거하게 해주면 새집에서 또 새책을 살 수 있어 기쁨이 두배인 것 같아요. ^^
책받은 후배님은 덕분에 좋은 에세이 쓰실 겁니다 분명!
캠핑은 아니지만 저도 이번 추석에 고향가서 자연과 벗하며 느긋하게 보내다 와야겠어요.:)

레삭매냐 2018-09-13 16:13   좋아요 1 | URL
아~ 여기서 전공이라 하믄 잘 잡는다는
뜻이었어요. 메뚜기랑 잠자리를 연구하지는
않았죠 ㅋㅋㅋ

책 다이어트를 진짜 빡시게 해야겠습니다.
안 읽은 책들이 문제죠... 누구에게 주기도
또 그냥 기부하기도 그렇고 죽갔습니다 -

명절 때 고향에 가셔서 또 긍정적인 에너지
듬뿍 리필하시길 바라겠습니다 :>

moonnight 2018-09-13 16: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후배분 기쁘시겠어요@_@;; 저는 책을 팔긴 해도 아는 사람에게 주는 건 못하겠더라구요. 뭔가 내밀한 부분을 보여주는 느낌-_-;;;

레삭매냐 2018-09-13 16:32   좋아요 1 | URL
보내기 전에 포스트잇이랑 메모 다 지우느라
고생했습니다. 미처 못하고 보낸 책들도 있구요...
공감합니다.

택배 마감 치기 전에 급박하게 진행 바람에
말이죠 ㅋㅋ

세상틈에 2018-09-13 16: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시!! 레삭님 경지에 오르셨군요.^^ 전 여전히 욕심만 가득한....ㅋ 아리엘 도르프만의 책이 무척 구미가 당깁니다.

레삭매냐 2018-09-13 16:33   좋아요 1 | URL
비우고 새로 채워 넣기를 시행해 보려고
마음~만 먹었습니다.

과연 가능할 진 모르겠습니다만.

아리엘 도르프만, 주문한 책들이 드디어
출발했다고 하네요 !!! 못 기다리고 결국
도서관에 가서 몇 권 빌려 왔습니다.

카알벨루치 2018-09-13 21: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쉬 우리 레샥매냐님👍👍👍

레삭매냐 2018-09-14 08:13   좋아요 1 | URL
별 말씀을요... 제게 필요 없는 책들을
보낸 것인데요 ~

그 친구가 좋아해서 다행입니다.
 

 


부제 : 아옌데의 45주기를 기념하며

 

우연한 기회에 아리엘 도르프만이라는 작가에 대해 알게 됐다. 지금으로부터 45년 전, 피노체트의 쿠데타로 칠레의 사회민주주의는 종언을 고했다. 그 중심에 서 있던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은 조국의 민주주의를 지키다가 장렬하게 전사했다. 카스트로가 선물로 칼라슈니코프를 들고 있었다지. 피델에게 체가 있었다면, 그에게는 문화 전사 아르헨티나 출신 아리엘 도르프만이 있었다. 공교롭게도 두 혁명가들의 조국이 같구나. 31살의 도르프만은 그 때 아옌데와 함께 죽었어야 했다고 했던가. 지금은 도르프만이 자신의 두 번째 조국이었던 칠레를 그렇게 엉망으로 만든 미국 시민이 된 것도 역시나 아이러니라고나 해야 할까.

 

개인적으로 가장 존경하는 정치인 아옌데 사망 45주기를 기념해서 이달에는 아리엘 도르프만을 읽기로 했다. 책이 당장 수급이 되지 않는지 며칠 있다 배송이 된다 해서, 당장 도서관에 달려가 그의 책들을 빌려다 읽어야지 싶다.

 

이하 아리엘 도르프만의 바이오는 영문 위키를 내 마음대로 번역한 내용이다.

 

아리엘 도르프만은 1942년 5월 6일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태어났다. 러시아 제국 시절 오데사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아리엘의 아버지 아돌프는 아르헨티나 경제학 교수였다. 어머니는 베사라비아 키시네프 유대인 후손이었다. 아리엘은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아 미국으로 이사했고, 다시 1954년에는 칠레로 이주했다. 그는 칠레 대학에서 수학했고 그곳에서 교수로 활동했다. 1966년에는 앤젤리카 말리나리치와 결혼했고, 1967년에는 칠레 시민이 되었다. 1968년에서 1969년까지 미국 UC 버클리 대학원에서 수학하다가 칠레로 더돌아갔다.




1970년에서부터 1973년까지 도르프만은 살바도르 아옌데 칠레 대통령의 문화 고문으로 일했다. 그동안 미국의 문화제국주의를 비판한 <도널드 덕, 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벨기에 출신 아르망 마테라르와 함께 발표하기도 했다(1971년). 도르프만은 피노체트의 쿠데타가 발발하기 전날에 모네다 궁 야간근무를 하게 되어 있었으나 친구 클라우디오 히메뇨와 바꿨다. 피노체트의 쿠데타 이후, 도르프만은 칠레를 떠나도록 강요 받았고 망명해서 파리와 암스테르담 그리고 워싱턴DC에서 지냈다. 1985년부터는 미국 듀크대학에서 문학과 라틴 아메리카 연구를 가르치고 있다.


도르프만은 자신의 작품을 통해 피노체트 독재의 공포에 대해 자주 다룬다. 그는 인터뷰에서 세상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지인들이 사라져 버리고 고문당한 사실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에 대해 이야기한다. 자신의 대표작 희곡인 <죽음과 소녀>에서는 오래 전 자신을 고문했던 의사라고 믿는 고문 희생자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주인공 파울리나 살라스는 의사 미란다를 죽음의 벼랑 끝까지 밀어 붙이지만, 그녀가 원하는 것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식의 복수가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과다. 1994년에 시고니 위버와 벤 킹슬리를 캐스팅해서 로만 폴란스키가 연출을 맡아 <진실>이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기도 했다. 도르프만은 ‘삭막하면서도 고통스러웠던 칠레식 민주주의로의 전환’이 자신의 대표적 희곡의 중심 주제였다고 밝혔다.


1990년 칠레에서 민주주의가 회복된 뒤에 아리엘 도르프만과 그의 아내는 산티아고와 미국에서 거주하고 있다.

 

 

 

 

 

 

 

요즘 즐겨하는 인스타그램에서 아리엘 도르프만을 검색해 보니, 그의 저작에 대한 포스팅보다는 희극/연극에 대한 포스팅이 압도적이었다. 그가 쓴 저작보다 아마 국내에서는 연극으로 더 유명한 기분이다. 문득 그의 연극도 기회가 되면 한 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리엘 도르프만의 대표작은 희곡 <죽음과 소녀>다. 1994년에는 로만 폴란스키 감독이 도르프만의 희곡을 바탕으로 시고니 위버를 주인공으로 한 <진실>이란 영화를 만들었다고 한다. 오래 전에 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느낌이다. 부랴부랴 네이버 검색으로 영화의 줄거리를 훑어 본다. 그리고 슈베르트가 작곡한 동명의 <죽음과 소녀>도 찾아서 들어 봐야지. 영문판에는 총은 든 여전사 시고니 위버가 자신을 고문한 의사 미란다의 턱을 움켜 쥐고 총을 든 모습이 그려져 있다. 멋진 포스터가 아닐 수 없다.

 

 

 

 

 

 

 

 

 

 

 

 

 

 

그 외에도 몇 권의 책들이 번역되어 국내에 소개되었다. 원제와는 사뭇 다른 <체 게바라의 빙산>, 원제는 <유모와 빙산> 정도. 그런데 구글링해 보니 원래 표지는 무척이나 야했다. 아니 작가의 홈피에서 본 것이었던가. 1992년 칠레가 피노체트의 야만적인 독재에서 벗어나 민주주의로 고통스러운 전진을 하던 시절, 세비야 엑스포에 실제로 출품한 빙산에 대한 이야기를 아리엘 도르프만이 소설화한 거라고 한다. 오늘 도서관에 가서 냉큼 빌려다 읽기 시작했다. 24세 청년 가브리엘 매켄지의 이메일 유서로 아마 시작됐지.

 

다른 두 권도 빌려 왔는데 아르망 마텔라르와 공저한 <도널드 덕, 어떻게 읽을 것인가>와 <블레이크 씨의 특별한 심리치료법>이다. 전자의 부제는 무려 “디즈니 만화로 가장한 미 제국주의의 야만"이다. 놀랍군, 미국 듀크 대학에서 라틴 아메리카 문화강의를 하면서 이런 도발적인 제목을 발표하다니 말이다. 월트 디즈니가 개발한 착취 시스템은 유명하지. 국제법에 따라 지적재산권 시효가 끝난 미키마우스 캐릭터를 지들 맘대로 20년 더 늘려서 해먹질 않나, 그들에게 상호간의 규칙 따위는 지킬 필요가 없는 그런 것이다. <블레이크 테라피> 역시 매력적인 책으로 보인다. 지금으로서는 정보 부족으로 패스.

 

 

 

 

 

 

 

 

 

 

 

 

 

 

칠레 시민들에게 9월 11일이 잊을 수 없는 그런 날이 되었던 것처럼, 칠레 시민들이 합법적으로 세운 사회주의 정부를 구박하던 미국인들에게 9월 11일은 똑같은 의미를 가지지 않을까. 압도적 군사력으로 모네다 궁을 압박해 오던 쿠데타군에게 항복하고 망명하라는 군인들의 협상조건을 거부하고, 별이 된 아옌데 대통령을 추모하며 부족한 글을 맺는다.

 


Rest in peace, Dr. Allende. #NeverForget as the other meaning in the Sta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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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8-09-13 11: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앞으로 아리엘 도르프만, 이란 작가가 제 눈에 띄면 레삭매냐 님이 생각날 것 같군요.

이 글 읽으며 많이 배워 갑니다. 유익한 글로 추천합니다!!!!!

레삭매냐 2018-09-13 11:40   좋아요 2 | URL
저도 신문 기사를 통해 알게 되었답니다 -

그리하야 <체 게바라의 빙산>과 <도널드 덕>을
동시다발적으로 읽고 있습니다.

아마 후자부터 읽게 될 것 같습니다, 추천 감사합니다.
 
디 마이너스
손아람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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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절, 어느 수업 시간에 교수님에게 왜 그렇게 청년들이 혁명에 목숨을 거냐고 질문했던 기억이 난다. 참으로 그 시절에는 혁명에, 그리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던 시절이었나 보다. 군대라는 철저하게 보수적인 사회 적응 시스템을 거치고서도 나는 여전히 그런 허튼 꿈을 꾸고 있었다.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여전히 기득권의 철옹성은 강고하고 적폐와의 싸움은 계속되고 있다. 내가 부재한 시절을 손아람 작가가 소설로 쓴 <디 마이너스>를 통해 살펴볼 수 있었다. 요즘 나름의 독서 슬럼프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정말 재밌게 읽었다. 나에게는 귄터 발라프와 만남에 버금갈 만한 그런 발견이라고 해야 할까. 그동안 손아람 작가의 짧은 칼럼들은 많이 읽었는데 소설로는 처음 만났다.

 


서울대 미학과 출신이라는 작가의 체험담 그리고 비둘기학번 혹은 00학번 불린 학생운동이 종언을 고하던 시절(모든 학생운동가들은 그들이 운동의 마지막 세대였다고 말했다지)의 전설들이 소설 <디 마이너스>에는 버무려져 있다. 1980년대에도 1990년대에도 마르크스는 청년들의 연구대상이었다. 그런데 무려 2000년도에도 여전히 독일 출신의 불세출의 사회과학자가 한국의 청년들에게 숭앙받고 있는지는 미처 몰랐다. 물론 이제 대안은 아니고, 자본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보조재 정도의 역할이긴 하지만 말이다.

 

시작은 소설의 화자 서울대 미학과 출신으로 한때 그들이 그렇게 타도하고 싶었던 대한민국 자본의 맹주 삼성전자 홍보부에 다니는 박태의다. 그와 운동 동지였던 양진우의 청첩장이 잊힌 기억의 저편에서 가열찬 운동시절을 소환한다. 그래 그 땐 그랬지 아마. 작가는 스스로 모두가 가고 싶어하지만 그럴 수 없는 대학 출신이라는 사실을 애써 부인하지 않는다. 아마 그동안의 삶을 통해 그 사실을 부인하면 할수록 오히려 역효과가 난다는 걸 깨닫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아예 소설의 공간적 무대를 서울대로 잡았다.

 

예전에는 사회과학 써클이라는 이름으로 새내기들을 모집하곤 했었지. 그동안 고등학교에서 공부만 하느라 사회 경험만 일천한 스무살 청년들이 그 어려운 마르크스와 레닌의 저작을 읽고 사회모순에 격분해서 운동에 투신(투쟁 정신)하는지 그 때나 지금이나 이해할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튀는 놈들을 선배들은 될 성 싶은 떡잎이자 미래의 재목으로 보고 점지해서 키웠다. 당시 서울대에만 NL, 연대회의, 전학협의 세 개의 정파가 있었다고 했던가. 그중에 주인공은 가운데 조직인 연대회의 소속이었고. 나의 학생운동에 대한 기억은 전대협 혹은 한총련에서 끝나는 지라 IMF 이후 대우자동차 부평공장 투쟁 같은 이야기들은 정말 생소했다. 사수이자 훗날 연인이 되는 강남좌파 미쥬의 손길에 이끌려 세미나(명백하게 의식화 교육의 다른 표현이었다)에 참가하고, 사시를 패스하고 검찰이 되는 운동권 선배에 손에 이끌려 사수대 소속으로 차출되어 가열찬 투쟁의 최전선에 나섰다.

 

모든 일에는 인과관계가 있는 법. 그런 이유로 해서 사진 채증이 되고 대공분실에 끌려가 공범으로 화염병 투척조였던 동료 진우를 불게 된다. 그전의 농활 에피소드도 인상적이었다. 학문의 전당이라기 보다 이제는 보다 나은 직장과 미래의 아파트 한 채를 얻기 위한 직업훈련소로 전락해 버린 대학의 모습이 왠지 서글프게 느껴졌다. 이럴 바에야 대학을 만들 게 아니라, 유명직업훈련소로 개명하는 게 낫지 않을까. 프랑크푸르트 학파 출신이라는 점을 공개적으로 천명하면서 음대 출신으로 아름다움에 대해 무언가 더 알아 보겠다는 조교에게 성적 수치심을 안긴 교수의 작태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까. 지금 같으면 미투운동으로 당장에 옷을 벗길 인간의 모습이 아니던가.

 

일찍이 미셸 투르니에가 <외면 일기>에서 시간은 모든 것을 파괴한다고 선언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소설 <디 마이너스>의 시간은 동지 간의 우정도, 사랑도, 정파간의 증오도, 심지어 그들이 그렇게 투쟁의 전면에 나서게 되는 동력이 되었던 사회 모순에 대한 격렬한 분노와 대의명분도 모두 파괴해 버렸다. 그러니 이제 남은 건, 어떤 명분을 가지고 가열찬 투쟁의 전선에서 명예롭게 퇴진하는가의 문제가 달렸다. 순차적으로 영웅들이 무대에서 퇴장을 시작한다. 사수대의 무시무시한 전사 대석 형이, 뛰어난 조직가이자 자본의 굴레를 뚫고 약자의 편에 서려고 했던 미쥬가, 연대회의 정파의 불모지 공대에서 마침내 회장에 당선된 진우가 그리고 마지막 태의가 학생운동이라는 무대를 떠난다. 그야말로 사랑도 명예도 부질없어진 선수들이 떠난 무대를 또 누군가는 채우게 되겠지.

 


이러저러한 이야기들로 구성된 154편의 짧은 이야기를 읽는 동안 행복했다. 결정적으로 부재한 시간들을 메꿀 수가 있어서 그랬던 것 같다. 젊은 시절 그렇게 사랑에, 운동에 매진했던 이들이 다시 한 자리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면 어떤 후일담이 등장할까. 손아람 작가가 들려주는 훗날의 에피소드들은 하나 같이 아쉬움 그 자체였다. 한 때 무엇보다 소중했던 자신의 신념을 지금 일상의 안위의 가치와 교환한 데서 오는 비루함이 원인이 아니었을까. 그렇다고 해서 마냥 칙칙한 운동권 스토리만 등장하는 것도 아니다. 미래의 좌파 이론가로 촉망받던 수리가 학교 축제에서 번쩍이는 횟칼을 들고 47마리의 광어를 해체하면서 일약 스타가 된 이야기, 선봉대장을 따라 학교를 휴학하고 투쟁선봉대원이 되어 전국을 순회하면서 노동현장에서 가진 자각의 순간들, 평생 보수로 살아 왔지만 정작 자신의 일자리에서 내몰리게 되자 얼결에 닥터 이블 김정일에게 핵폭탄 한 방을 떨궈 달라는 요청을 한 경상도 아지매의 일화 등 손아람 작가의 번쩍이는 유머들이 돋보이는 순간들도 빼놓으면 안될 것 같다.

 

우리 때는 이런저런 사회적 모순을 견딜 수 없게 된 양심으로 나름대로 치열하게 산 것 같은데 요즘 젊은이들은 또 어떤 고민을 가지고 사는지 궁금해졌다. 그들의 고민의 실체를 모르면서 그들을 이해한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가 아닐까. 그 때의 동지들은 모두 다 어디로 갔는지도 또 궁금하다. 같은 하늘 아래 어디선가 잘 먹고 잘 살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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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10 12: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삭매냐 2018-09-10 13:13   좋아요 1 | URL
오늘 어느 기사를 보니 국민연금 그리고 부동산
으로 촉발된 세대 간의 (계급)투쟁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고 하는군요.

성장의 과실을 독점해 버린 기성세대와 그렇지
못한 청년세대의 괴리...

길항하는 공적 이익과 사적 이익을 어떻게 다스
려야 할지 걱정입니다.

카알벨루치 2018-09-10 19: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또 나에게 추천해주시네요 ㅎㅎ

레삭매냐 2018-09-10 20:01   좋아요 1 | URL
오래 전 사두고 읽지 못하던 책이었는데
어젯밤에 새벽까지 손에서 책을 뗄 수가
없더라구요 :> 재미 하난 기똥찹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