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 2018926일 수요일

 

기나긴 명절의 끝을 달려가고 있다.

 

명절 때 이런저런 책을 읽어야지 싶었지만, 삶이 언제나 그렇듯 이번에도 목표대로 된 건 하나도 없었다. 그냥 되는 대로 읽었다. 아리엘 도르프만의 책을 좀 읽고 싶었으나, 껌딱지가 달라 붙어서 자신의 재량껏 나의 독서질을 방해했다. 영화도 <베를린 천사의 시>를 절반 정도(다 못봤다, 역시 흥미로웠다) 그리고 <공작>도 절반 정도 보고 말았다. 영화 보기는 마치 나의 책읽기와 비슷한 궤적을 그리는가 싶구나. 보다 말다 보다 말다하기 거듭하기.

 

그나마 도르프만의 <죽음과 소녀> 한 권을 읽어 다행이다. 이달에는 가능한한 아리엘 도르프만의 책을 많이 읽고 싶었지만 그 사이 사이에 이런저런 책들을 읽는 바람에 그러지 못했다. 아니 애초부터 불가능한 목표였던가. 대신 사방을 다니면서 아리엘 도르프만의 책을 컬렉션했다. 책쟁이들에게 무한한 즐거움인 책사냥 말이다. 지난 금요일날 신촌에 가서 <체 게바라의 빙산>을 사들였고, 일요일에는 구월동에 가서 <죽음과 소녀> 그리고 오늘부터 읽기 시작한 도르프만의 회고록 <남을 향하며 북을 바라보다>을 샀다. 전자는 이미 읽어서 리뷰까지 작성했고, 후자는 오늘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재밌어서 진도가 쑥쑥 나가고 있다.

 

그러니까 작가의 아버지 아돌포는 러시아 오데사 출신 레닌주의자/공산주의자였다고 한다. 뮬론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유대인이었고, 그의 어머니의 탁월한 언어능력 덕분에 여러 언어에 능통했다고 한다. 조국인 칠레, 아르헨티나 그리고 미국을 점프하며 사는 바람에 정체성에 문제는 없었을까. 어린 시절 미국으로 건너가 사는 바람에 10년 동안 모국어인 스페인어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깡에 할 말을 잃었다. 하지 못해서 안한 게 아니라 의도적이었던 게 아닌가.

 

1973911, 피노체트의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바로 그 때 죽었어야 했다는 작가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계속해서 곱씹어 보게 된다. 사실 내가 이 작가를 읽게 된 것이 신문에서 접한 이 한 문장 덕분이 아니었던가. 작가가 칠레혁명 당시 아옌데 대통령 휘하에서 문화전사로 활약하던 당시 준비했다는 <도널드 덕, 어떻게 읽을 것인가>도 한 백쪽 가량 남겨 두었는데 이달의 작가로 선언한 만큼 부지런하게 읽어서 마무리지어야 할 것 같다.

 

, 그런데 이번 주말에 달궁 독서모임이 있었지. 대비해서 구해서 읽기 시작한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워터멜론 슈가에서>도 마저 읽어야 하는데. 이 책은 남미 주술적 리얼리즘을 연상케 하는 그런 요소들을 잔뜩 품고 있어서 그런지 선뜻 손이 가지 않는다. 물론 토요일 전에 다 읽긴 하겠지만... 분량이 적지 않는데 왜 이렇게 어렵게 느껴지는 걸까. 느닷없이 등장한 호랑이에게 부모님을 다 잃은 저자의 이야기, 아이디아뜨(I-DEATH)라는 요상한 이름의 마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들을 담고 있는데 쉽지 않다 쉽지 않아. 원래 생각 같아서는 브라우티건의 <빅서에서 온 남부 장군>도 읽을까 했지만 다 글렀다. 뭐 책읽기가 원래 그렇지 않은가.

 

오늘 저녁에는 보다만 영화 <공작>을 마저 볼까 아니면 도르프만의 회고록을 더 읽을까 고민 중이다.


[뱀다리] 어제 저녁 나의 선택은 아리엘 도르프만의 회고록이었다. 지난여름 귄터 발라프의 발견에 이은 두 번째 쾌거라고 과언이 아닐 듯 싶다. 하마터면 밤을 셀 뻔 했다. 긴 연휴 끝의 출근인데 그러면 안 되지 싶어. 애써 잠을 청했다. 대단한 작품이다. 파괴된 칠레혁명에 대한 육성 증언이자, 스페인어와 영어 사이에서 오가는 분열적 이중생활에 대한 작가의 냉철한 분석이 돋보이는 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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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소녀
아리엘 도르프만 지음, 김명환.김엘리사 옮김 / 창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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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에는 아리엘 도르프만을 읽겠다고 선언했지만 지지부진하다. 지난여름 로맹 가리 읽을 당시 좋은 기억만 가지고 덤벼들었다가 낭패를 봤다. 사실 도르프만 교수의 다른 책인 <체 게바라의 빙산>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1/3 가량 읽었나. 피노체트 쿠데타 이후 민주주의로의 이행 과정이었던 1992년 세비야 엑스포 빙산 출품을 소재로 한 작품인데, 확 와 닿지가 않았다. 대신 <죽음과 소녀>는 역시 작가의 대표 희곡 작품답게 대단했다.

 

사실 이 책을 펼치기 전까지 <죽음과 소녀>가 네 편으로 구성된 희곡집이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그래서 서가에서도 소설이 아니라 희곡으로 분류가 되어 있었다. 도르프만이 쓴 네 편의 희곡들을 보면서 정말 희곡으로 만들기에 최적화된 작품들이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었다. <과부들> 외에는 정말 소수의 배우들과 제한된 공간에서 펼쳐지는 이야기가 연극으로 무대에 올리기에 적합하지 않은가. 사실 도르프만은 우리나라에서 소설가라기 보다 희곡가로 더 유명하지 않나 싶다. 요즘 맛을 들인 인스타에서 검색을 해보니, 연극 <죽음과 소녀>가 압도적으로 많은 검색물을 토해냈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연출로 이미 1994년 시거니 위버 주연의 <진실>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바 있는 <죽음과 소녀>부터 읽었다. 라틴아메리카 모처라고 하지만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공간적 배경이 칠레라는 사실을. 피노체트 쿠데타 이후, 모든 반대 세력을 무자비한 폭력으로 제압했던 군부는 의대생 파울리나 살라스를 납치해서 고문하고 강간했다. 십수년의 시간이 지났지만, 파울리나는 여전히 그 고통스러웠던 기억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자신을 고문했던 그 의사는 고문 희생자들의 고통을 덜어 준다는 이유로 슈베르트 현악4중주 <죽음과 소녀>를 틀어 주었다고 했던가. 그 아름다운 선율이 누군가에게는 고통으로 각인되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젊은 시절 민주화 투사였던 파울리나의 남편 헤라르도는 변호사로 대통령의 위촉을 받아 과거 군부독재 정권 저질러진 인권유린에 대한 진상조사 위원회 위원장을 맡게 된다. 그 과정에서 아내의 승인을 받을 거라고 말하지만, 예리한 파울리나는 그가 이미 대통령에게 위원장직을 승낙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미세한 균열이 보이기 시작한다. 진짜 파열음을 외부에서 왔다. 헤라르도의 차가 고장나는 바람에 비치하우스에 사는 닥터 미란다가 그를 집으로 데려다 준 것이다. 닥터 미란다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파울리는 즉시 그가 그 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닥터 미란다를 포로로 잡고 권총으로 무장한 파울리나는 진실에 대한 그의 고백과 사과를 들어야겠다고 선언한다. 영화 트레일러를 보니 좀 더 격렬한 액션이 추가된 것 같은데, 원작은 지극히 놀라울 정도로 냉정하게 침착하게 전개된다. 그만큼 파울리나의 과거의 사건에 대한 고통이 깊다는 반증이 아닐까. 당연히 포로로 잡힌 닥터 미란다는 자신이 무고하다고 주장하고, 변호사 남편 헤라르도 역시 이런 방식으로는 서로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복수를 위해 군부정권이 저지른 폭력적인 방식으로 그들을 대하면 안된다는 주장이다. 일견 합리적으로 보이긴 해도, 비록 선거로 권좌에서 물러나긴 했어도 여전히 칠레 민주주의 정권 하에서도 기소 면책권과 일정 지분의 정치적 권력을 가진 피노체트가 지휘하는 군부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할 수가 있었다. 파울리나의 주장 대로 왜 항상 약자가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 지속되는가에 대해 작가는 처절한 질문을 던진다.

 

한편, 닥터 미란다의 주장 대로 전형적인 정신 분열증 증상을 보이는 파울리나가 과연 다른 사람으로 착각했던 것일까? 우리의 영리한 주인공을 그것을 대비해서 닥터 미란다가 빠져 나갈 수 없는 몇 가지 장치들을 준비해 두었다. 과거에 있었던 사건을 남편에게 들려주면서 사실과 다른 이야기들을 던져 주었더니 닥터 미란다는 미끼를 덥석 물었다. 그러니까 그가 진범이었던 것이다. 작가가 구상에서부터 수년간 들인 공이 전혀 아깝지 않을 정도로 멋진 장치가 아니었던가. 걸작이 걸작으로 칭송받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과부들>도 남자들이 모두 잡혀가 버린 어느 마을의 과부들에 대한 이야기다. 군부를 상징하는 대위와 중위 그리고 군인들은 강가에서 수년 전에 잡혀간 남자들을 기다리고 있던 소피아를 위시한 과부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과부들의 주장은 간단하다. 잡혀간 남자들이 살아 있다면 바로 석방할 것이고, 그렇지 않고 죽었다면 시체를 내주어 장례라도 치르게 해달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조건 모두 군인들은 들어줄 수가 없다.

 

누군가에게는 사랑하는 남편이고, 아들이고 손자 그리고 연인이 아니었던가. 그나마 민주주의 시스템 아래서 정상적인 이성을 발휘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대위마저 과부들의 막무가내 주장에 진저리를 내면서 기존의 폭력적인 방식으로 항의하는 과부들을 해산시키려는 장면에서는 여전히 과거와 화해하지 못하고 있는 현대 칠레의 모습을 엿볼 수가 있었다. 군부정권 아래 호의호식하며 권력을 농단했던 이들이 사회 기득권으로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는 마당에, 어떻게 칠레 민주주의가 꽃을 피울 수가 있단 말인가. 그네들의 상황은 해방 이후 일제 부역자들을 처벌하지 못하고 분단과 전쟁 그리고 독재를 겪어야 했던 우리의 상황과 묘하게 오버랩되었다.

 

한국을 상정하고 발표했던 <경계선 너머> 역시 비극의 재현이라는 점에서 다른 작품과 궤도를 같이 한다. 공간적 배경은 수십 년 째 전쟁을 치르고 있는 국경 도시다. 5천 명에 달하는 전쟁 희생자들의 신원을 파악하고 매장하는 일을 하고 있는 아톰 로마와 러바나 줄렉 그리고 국경 수비대원이 차례로 등장한다. 마침내 전쟁은 끝났지만, 냉정한 군인은 부부의 집을 경계선으로 갈라 버린다. 전쟁 중에도 피아 구분 없이 지내던 부부가 졸지에 이산가족이 될 판이다.

 

모든 것을 소멸시켜 버리는 전쟁의 참혹함 그리고 인도주의적 사고 대신 그저 관료적 방식으로 국경선을 긋고 분단시켜 버리겠다는 군인의 등장에 그저 한숨만 나올 뿐이다. 군인의 존재가 원래 시민의 안전과 재산을 지키는 것이 아니었던가. 현대 사회의 어느 조직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어느 순간부터 원래 존재의 목적 대신 자기 조직을 지키기 위한 존재로 탈바꿈한 역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자고 나면 새로운 사실들이 쏟아지는 지난 정권에서 벌어진 사법농단이 가져올 사법시스템 전체에 대한 불신을 앞으로 어떻게 해소하겠다는 건지 해당 책임자들은 전혀 관심도 없었겠지. 내가 낸 세금으로 그런 이들에게 월급과 연금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을 지경이다.

 

도르프만은 <죽음과 소녀>와 마찬가지로 <경계선 너머>에서도 일종의 미스터리로 내러티브에 감칠맛을 첨가한다. 예의 군인이 오래 전에 부부의 곁을 떠난 아들 요셉이라는 설정이다. 부부는 그와 이야기를 할수록 그가 그들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확신하지만, 다시 전쟁이 시작되면서 군인이 또다른 전쟁의 희생자가 되면서 그 사실을 알 수가 없게 된다. 역시 작가는 열린 결말을 선호하는 모양이다.

 

마지막의 <연옥>은 읽기는 했는데 너무 모호한 이야기여서 좀 헷갈렸다. 아마도 이승이 아닌 저승에서 만난 두 남녀가 나누는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는데, 후기에 실린 <이아손과 메데이야> 전설이 연상되었다. 아무래도 앞에서 읽은 세 이야기와는 결을 달리 하는 그런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리고 보니 나는 칠레 출신 작가들을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모양이다. 루이스 세풀베다를 필두로 해서 로베르토 볼라뇨의 작품들을 제법 많이 읽었다. 이번에는 생소한 작가 아리엘 도르프만도 읽게 되었다. 그전에 읽은 다른 칠레 작가들 덕분인지 조국 칠레와 제2의 조국 미국 사이의 경계선에 서 있는 작가의 저술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게 다가왔다. 중고서점에서 <죽음과 소녀>를 사면서 같이 산 그의 회고록 <남을 향하며 북을 바라보다>도 읽어봐야겠다. 아 그전에 먼저 영화 <진실>부터 봐야 하나. 다시 생각해 봐도, 기억은 어떤 방식으로도 진실과 화해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있었던 일을 없던 일로 하는 것도 불가능하거니와, 모든 문제에 책임 있는 가해자들이 진심으로 피해자들에게 사죄할 리도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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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 제인
개브리얼 제빈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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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신간 <비바, 제인>에 앞서 개브리얼 제인 작가의 <섬에 있는 서점> 이야기부터 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 같다. 수년째 지속되고 달궁 독서모임을 뜨겁게 달군 <섬에 있는 서점>은 재밌으면서도 또 핍진성에서 부족하다는 지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의견을 도출한 그런 책이 아니었던가. 국내에는 아직 소개되지 않은 탐 드루리의 소설과 마찬가지로 뉴욕이나 시카고 같은 미국의 대도시가 아니라 어쩌면 미국 사회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는 소도시를 배경으로 했다는 점에서 가장 미국적인 이야기들을 직조해내는 소설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소설의 출발점은 올해 64세의 레이철 셔피로의 온라인 데이트다. 제빈 작가의 소설적 장치 배치 실력은 확실히 뛰어나다. 그것은 마치 한 편의 추리소설 같은 구성의 전개다.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들이 아무 의미 없이 그냥 등장하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한 자락 하는 스토리의 주인공이 주목 하시라. 심장전문의 닥터 마이크 그로스먼과 이혼한 전직 유대인 학교 교장 선생님은 노년의 싱글 라이프를 아주 여유롭게 즐기고 계신 중이다. 절친 로즈 호로위츠의 유리남 남편이 껄떡일 때도 있지만, 지혜롭게 넘기는 능력도 발휘해 주신다. 그녀의 어머니와 미미 이모는 홀로코스트 생존자다. 어머니는 평생 독일에서 만든 제품은 사지 않는다는 방식으로 홀로코스트의 기억에 저항한다.

 

여기서 문제 돌발, 그녀의 딸 아비바 그로스먼이 출현할 차례다. 다른 사람도 아닌 마이애리 출신 멋쟁이 하원의원 에런 레빈과 바람이 난 것이다. 미래의 정치인 지망생인 아비바는 예전 이웃인 레빈 의원실의 무보수 인턴으로 지원했다가 그만 그런 사단이 나고 말았다. 그냥 조용하게 넘어갈 수도 있었던 일이, 불행은 항상 홀로 오는 법이 없다는 식으로 연쇄반응을 일으킨다. 전도유망하고 미남 하원의원의 섹스 스캔들은 전국적 이슈가 되었고, 아비바가 재미로 쓰던 블로그는 성지가 되고 그야말로 스티그마타가 되어 버린다.

 

소설 <비바, 제인>에는 모두 5개의 시선이 등장하는데 눈치 빠른 독자라면 원제 <Young Jane Young>에서 언급하는 제인 영이 과연 누구일지 벌써 알아챘을 지도 모르겠다. 싱글맘으로 플로리다에서 심리적으로 가장 멀어 보이는 메인 주의 앨리슨 스프링스에서 랍스터 롤을 즐기는 제인 영과 그의 딸 루비가 등판할 순서다. 행사 기획자이자 웨딩 플래너로 활동 중인 제인 영이 바로 자신의 신분을 철저하게 세탁하고 새롭게 거듭난 아비바 그로스먼이었다. 어쩌면 개브리얼 제빈 작가는 가장 페미니스트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페미니즘 전사로서의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싶었던 게 아닐까.

 

홀로코스트 생존자였던 아비바의 할머니, 커리어 우먼으로 조금도 손색이 없는 엄마 레이철 셔피로와 아비바/제인 영 그리고 루비 4대에 걸친 여성들의 세상을 향한 투쟁은 그야말로 부단하기 그지없다. 제인 영이 한 때 자신의 손님이었던 전형적 꼰대 웨스 웨스트의 시장 선출을 저지하고자 지역 유지 모건 부인의 지원 아래 어쩌면 자신의 정체가 들통 날 지도 모를 그런 위험한 시장 선거에 뛰어드는 결정은 참으로 담대했다. 물론 그에 따른 부작용도 있어서, 십대 소녀 루비가 구글링을 통해 자기 엄마의 정체를 알고 자신의 생부라고 믿는 레빈 의원을 찾아가는 장면은 일종의 클리셰라고 해야 할까.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철부지 인턴의 불장난 혹은 실수를 인정하지 않고 잘 나가는 하원의원을 파멸시키려는 꽃뱀으로 모는 시선도 엄연하게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소위 말하는 슬럿 셰이밍이라는 비겁한 방식으로 가족을 제외한 그 어느 누구도 아비바 편에 서지 않았다.

 

그 결과 대학에서 스페인어와 정치학을 전공한 여성의 커리어는 산산조각이 나고,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멀리 메인에서 할머니의 지원을 받아 새로운 삶을 개척해 나가야 했다. 그것도 싱글맘이라는 소수자의 입장에서 말이다. 제인 영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새로 만든 아비바는 세상의 모든 편견과 맞서 싸워야했고, 결말에 이르기까지 진행형이다.

 

이 소설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운 시선과 캐릭터는 바로 에런 레빈의 아내이자 여걸 변호사 엠베스였다. 그녀는 여느 정치인의 아내처럼, 남편의 바람에도 그를 지지한다는 마음에도 없는 연기를 펼쳐야만 했다. 그 결과 정치인 레빈은 자신의 지역구에서 20년 동안 10선 의원이라는 정치적 위업을 달성할 수 있었다. 남편 에런 레빈은 인간적으로는 이제 막 성인이 된 대학생 인턴과 바람난 그로스먼같은 인간이지만, 정치적으로 탁월하고 지역 주민들에게 그만큼 사랑받았다는 점은 인정할 수밖에 없노라고 엠베스는 고백한다. 문제는 그런 어마무시한 스트레스를 안고 살다 보니, 세상에 존재하는 않는 앵무새 엘 메테라는 존재를 통해 자신의 스트레스를 풀었다는 것이다. 엠베스 여사가 갑자기 나타나서 레빈 의원의 선거를 한 방에 날려버릴 지도 모를 루비의 출현에 대처하는 장면은 확실히 지난 미국 대선에 나섰던 민주당 대통령 후보를 연상시켰다. 아니 어쩌면 엠베스 여사의 모델이 바로 그 이가 아니었던가 싶을 정도로. 돌이켜 생각해 보면, 현실이 어쩌면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게 아닐까.

 

원래 <비바, 제인>은 추석 때 읽을 계획이었는데 읽다 보니 추석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다. 뭐 프리-추석용 독서로도 제격이었지 싶다. 그렇게 시간을 번 나는 추석 때는 다른 책을 읽게 됐다. 우리가 언제 읽을 책이 없어서 고민한 적이 있었던가. 읽은 시간이 없어서 문제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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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8-09-22 23: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레샥매냐님 어디십니까? ㅋ 명절 잘 쇠시고 책 보신다고 밤 새지 마시공 ^________^*

레삭매냐 2018-09-23 10:51   좋아요 0 | URL
집에서 얌전히 쉬고 있습니다...

책도 안 땡기고, 그냥 저냥이네요.

이번 추석에는 줄리언 반스의 신작
정도 읽고, 9월의 작가라고 공언하고
한 권도 읽지 못한 아리엘 도르프만
의 책 정도 있으면 만족할 듯 합니다.
 

 

인류 / 로베르 앙텔므

 

오래전부터 중고서점에 나오길 기다리고 있던 책이 하나 있었다. 바로 그린비 출판사에서 나온 로베르 앙텔므의 <인류>.

 

3년 전에 나온 책이었는데, 기다린 끝에 마침내 수중에 넣을 수가 있었다.

 


1937년부터 가동하기 시작한 독일 내 최대 강제수용소였던 튀링겐 주 바이마르 시 외곽에 위치한 부헨발트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프랑스 레지스탕스 로베르 앙텔므의 기록이 바로 그의 유일한 저작 <인류>다.

 

2차세계대전 말엽, 프랑스에서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던 앙텔므는 체포되어 부헨발트로 이송되었다. 다행인지 부헨발트는 폴란드 땅에 있던 아우슈비츠 같은 절멸수용소는 아니었다. 하지만 수용소 내의 인권 상황은 아우슈비츠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나치 친위대는 정치범인 로베르 앙텔므와 동료들을 독일 형사범들과 함께 수용했다. 수용소내에서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는 그들에게 친위대원은 가히 신과 같은 존재였다. 그들의 생사여탈을 마음 대로 정할 수 있는.

 

부헨발트 수용소를 검색하다가 어느 블로그에서 보았는데, 독일을 점령한 연합군이 전쟁 기간 동안 나치 독일이 절멸수용소에서 저지른 끔찍한 범죄를 영화로 보여 주니, 대다수 독일 사람들이 연합군의 조작이라며 관람을 거부했다고 했던가. 결국 부헨발트 수용소로 도보로 걷게 해서 현장을 보여준 뒤에야 비로소 진실을 접할 수가 있었다는 장면에서는 가히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로베르 앙텔므는 <인류> 한 권으로 프리모 레비의 그것과 더불어 증언문학의 기념비적인 작가가 되었다고 한다. 오늘부터 거북이걸음으로 읽어 볼 계획이다. 매일 조금씩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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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틈에 2018-09-18 19: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3년을 기다리신건가요? 대단!! ^^ 제노사이드, 수용소 관련 책들은 두께와 상관없이 정말 느리게 느리게 읽히더라구요.ㅜ.ㅜ 그럼에도 놓을 수 없는... 요 책은 몰랐는데 보관함에 넣어둬야겠습니다.

레삭매냐 2018-09-19 09:22   좋아요 0 | URL
아니 나온 다음에 3년이나 기다린 것은 아니구요...
한 몇 개월된 것 같아요. 기다리고 있었죠 !

네 말씀대로 진도가 잘 나가지 않네요. 사실 그렇게
술술 읽히는 책도 아니구요. 그래도 오래 기다린 책
이라 꾸준히 읽어 보려고 합니다.
 
무질서의 지배자 마오쩌둥 푸른숲 비오스(Prun Soop Bios) 2
조너선 D. 스펜스 지음, 남경태 옮김 / 푸른숲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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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서구 학자 조너선 스펜스의 중국 역사 서술을 좋아한다. 국내에 소개된 저작들을 하나씩 차례로 읽고 있는 중이다. 서구인의 시선으로 본 중국 역사에 대한 호기심이라고나 할까? 아무래도 같은 동양인이 보는 것과는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중국 혁명의 아이콘이라고도 할 수 있는 마오쩌둥에 대한 평전을 읽었다.

 

이미 프랑크 디쾨터가 저술한 중국혁명 삼부작 중 첫 번째 권과 에드거 스노우의 저작을 읽었고 그 외에도 다양한 저작들을 통해 중국 혁명에 대한 개관 정도는 익히 알고 있어 진도가 쉽게 나갔다. 청조 말엽 후난성에서 중농지주의 아들로 태어난 마오쩌둥은 예전 같으면 왕조교체기라 불릴 만한 격변의 시대를 살아야했다. 예전 같으면 명나라에서 청나라로의 이행기였겠지만, 이번에는 성격이 좀 달랐다. 수천년 동안 맥을 이어온 전제군주정치 대신 쑨원이 이끄는 혁명세력에 의해 새로운 민주주의 정부가 들어설 차례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교체는 쉽지 않았다. 위안스카이로 대변되는 막강한 군벌들이 쉽게 민주세력에게 기득권을 내주려 하지 않았다. 청년 시절 마오쩌둥은 혁명의 깃발을 보기 좋게 올렸다가 반동 세력에게 동지들이 참수당하는 허무한 결과를 목도하면서 과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조너선 스펜스는 책에서 마오쩌둥이 결코 지식인이었던 적이 없다고 적고 있다. 글을 읽고 쓸 줄은 알았지만, 기존의 사대부들처럼 과거를 위한 전문적인 지식을 쌓을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고, 다른 혁명 동지들처럼(저우언라이, 덩샤오핑) 해외로 나가 견문을 쌓지도 못했다. 대신 마오쩌둥은 후난성의 중심지 창사에서 중국 인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인민들의 참담한 일상을 보면서, 소련의 볼셰비키들이 교조로 받드는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입각한 노동자 중심의 혁명이 중국에서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간파해냈다.

 

1920년 중국공산당 창당 과정에서도 마오쩌둥이 한 일이 전혀 없다는 것도 훗날 그의 약점 중의 하나가 되기도 했다. 사실상 중국 공산당 창당의 주역은 천두슈와 리다자오 같은 이데올로그들이었다. 그들은 레닌 코민테른의 지시에 충실했다. 사실상 공산당의 자금줄은 러시아 레닌의 볼셰비키들이 도맡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전에 마오쩌둥은 고향을 떠나 스승이 재직 중인 베이징으로 가서 신문물을 접하기도 했는데 사서 보조원이라는 한직에 종사하기도 했다. 수도에서 딱히 할 일이 없었던 미래의 불세출의 공산주의 지도자는 낙향해서 서점을 내고, 지역 교육에 매진했다. 그의 꿈이 한 때는 기자와 교육자였다고 했던가.

 

제국주의 외침과 쑨원의 뒤를 이어 국부군의 지도자가 된 장제스와 대결은 두 개의 태양이 존재할 수 없다는 전제와도 같은 투쟁의 시발점이었다. 코민테른은 공산당 창당 초기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공산당원들에게 국민당에 가입해서 통일전선 전술을 시행하라는 교시를 내린다. 이렇게 이루어진 1차 국공합작으로 장제스의 국민당은 중국을 통일하는데 성공한다. 어쩌면 이 때부터 장제스는 공산당을 정치 파트너가 아닌 숙명의 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토사구팽이라고 중원통일이라는 목적을 이루고 나자, 장제스는 다음의 적으로 중국을 침략한 일본이 아니라 공산당을 지목하고 토벌전에 나선다. 그렇게 국부군의 토벌을 피해 시작된 대장정은 중국 공산당에게 일대 기회가 되었다. 사실상 미국의 지원을 받는 국부군의 압도적인 군사력을 당해 내지 못해 중국 남부 도처에 산재해 있던 장시 소비에트, 루이진 소비에트 등으로부터 퇴출된 공산당들은 옌안에 새로운 거점을 만들고, 토굴 생활을 시작한다.

 

하지만 중국 내부에서는 국부군과 공산당이 합작해서 외세(일본의 침략)에 대항해야 한다는 민족해방 이슈가 급부상 중이었다. 둥베이 군벌 출신 장쉐량이 일으킨 시안사건으로 억류된 장제스는 마침내 공산당과 손을 잡고 항일전에 나서게 된다. 이 사건이야말로 중국 혁명에서 결정적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이에 대한 내용은 에드가 스노우가 자신의 저작 <중국의 붉은 별>에서 자세히 다루지 않았던가. 일개 지방 공산당 지도자였던 마오쩌둥은 대장정 중에 있었던 쭌이회의에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 게릴라전이 중국 혁명에 가장 알맞은 방식이라는 자신의 종래 주장을 관철시키고 마침내 권력의 중앙부에 진압하게 된다.

 

문제는 그전까지만 해도 나름 개혁적 성향을 가진 혁명가였지만, 옌안 시절을 거치면서 새로운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는 것이다. 캉성이 이끄는 보안 조직은 마오쩌둥에 대한 비판 세력을 가차 없이 숙청했다. 소련에서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념으로 무장한 유학파들 역시 더 이상 마오쩌둥의 정적이 될 수 없었다. 십수년에 걸친 전란의 시대를 거치면서 중국 공산당은 비약적인 성장을 하는데 성공했고, 극동에 개입한 소련군은 일본군을 무장해제시키면서 노획한 무기와 전략물자들을 홍군에게 전달했다. 무주공산이 된 만주 지역을 중국 공산당이 선점한 마오쩌둥의 결정은 그야말로 신의 한수였다. 이후의 사태는 모두가 알다시피 승승장구하는 홍군을 막지 못한 장제스 국부군의 참담한 타이완 패퇴였다.

 

그러나 중국 혁명의 영광은 여기까지였다. 마오쩌둥은 성공한 혁명가이긴 했지만, 통치에서는 실패한 정치가였다. 류사오치나 덩샤오핑, 팽더화이 같이 유능한 참모들을 거느리고 있으면서도, 그들을 이용한 개혁에는 실패했다. 독재군주의 자리에 오른 독재자는 일절의 비판과 반대를 허용하지 않았다. 1950년대 대약진운동과 1960년대 문화대혁명은 중국 역사에서 오점이었다. 농촌의 잉여를 도시노동자에게 제공해서 서방 세계를 따라 잡겠다는 마오쩌둥의 정책은 판타지에 지나지 않았다. 한국전쟁에 스탈린의 사주를 받아 개입하면서 세계 패권국가 미국을 상대로 대등하게 전쟁을 치른 자신감을 바탕으로, 소련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카피한 경제정책의 시행에 나선다. 문제는 혁명 시절과 달리 중국 인민들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가 구상한 인민공사의 효율성은 지극히 낮았고, 연달아 중국 대륙을 덮인 기근과 홍수로 농업생산성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서 중국 인민들은 대재앙을 맞게 되었다.

 

전제군주 시절 사회적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분연히 일어선 혁명가는 노회한 정치가가 되어, 오로지 권력투쟁에만 관심을 쏟았다. 자신에게 반기를 든 혁명 동지 펑더화이는 물론이고, 인민일보 편집장이었던 덩퉈는 물론이고 자신에게 충성했던 덩샤오핑도 예외는 아니었다. 해서파관과 조반유리라는 엉성한 이유로 홍위병들에 의한 친위쿠데타가 시작되면서, 중국 대륙은 문화대혁명이라는 광기 속으로 뛰어들게 된다. 이미 스탈린의 죽음으로 시작된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의 스탈린 격하운동은 주석 마오쩌둥에 대한 개인숭배에도 영향을 미친 모양이다. 중국의 지식인들은 마오숭배가 중국 인민들에게는 먹혀들지 몰라도 서구의 경제 문화 파트너들에게는 조롱거리라는 걸 잘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공산주의 체제의 우월성 선전도 마찬가지다. 엄청난 수의 인민들이 기아로 죽고, 십대소년들로 구성된 홍위병들이 기존의 가치들과 질서를 무자비하게 파괴하는 폭력적인 현실을 서구인들이 어떻게 보았을까.

 

그나마 이성이 남아 있던 마오쩌둥은 자신의 후계자로 하방되어 있던 덩샤오핑을 중앙으로 복귀시키면서 자신의 마지막을 준비한다. 혁명 지도자로서 그다지 모범적이지 않았던 사생활에 대해서는 조너선 스펜스 교수가 그다지 비중을 두지 않은 채 진행한 느낌이 들었다. 한편, 한국전쟁에서 미국과 국지전을 치르기도 했던 마오쩌둥은 데탕트를 맞이해서 미국과의 수교를 진행한다. 세계 정치무대에서 영원한 적도, 영원한 맹방도 없다는 걸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일대 사건이었다. 노회한 혁명가를 방문한 닉슨과 키신저가 마오의 저작을 인용하며 최대한 자국의 이익을 도모하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우리 정치 지도자들은 닉슨과 키신저 같은 배포가 과연 있을까? 상대방이 가진 유일한 카드를 무조건 포기하고, 과거에 대해 사과하라는 압박이 최고의 방법이 아니라는 걸 정녕 모르고 있는 걸까.

 

<무질서의 지배자 마오쩌둥>을 읽는 동안, 조너선 스펜스 교수가 준비한 행간이 너무 넓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무래도 중국 혁명이라는 거대한 물결에 중점을 맞추다 보니, 상세한 디테일은 제외하고 진행했다고 해야 할까. 미시적인 역사 서술에서도 상당한 실력을 발휘한 거장의 거시적 접근도 상대적으로 매력적이었다. 역사에 만약이란 존재하지 않지만, 마오쩌둥이 경제개발 정책을 수립하면서 치명적인 실패를 하지 않고 순탄한 경제발전을 이루고 문화대혁명 같이 중국의 발전을 한 세대 이상 역진시킨 어처구니없는 반동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중국은 또 다른 모습이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봐온 지도자의 모습과는 달리 어쩌면 마오쩌둥을 점점 닮아가는 새로운 지도자의 부상이 미래의 중국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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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8-09-16 20: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품절이어서 다시 출간될 수도 있겠지만, 2003년의 책이라서 새로 출간되기 전에는 만나기 어려운 책이 될 수도 있겠네요.
레삭매냐님, 주말 잘 보내셨나요. 편안한 일요일 저녁시간 보내세요.^^

레삭매냐 2018-09-16 21:55   좋아요 1 | URL
주말 내내 비가 추적추적 내려 꿀꿀한
저녁이네요...

<무질서의 지배자>는 오래 전에 절판된
책이라 한동안 찾아 헤맸네요. 도서관에서
빌려다 볼 수도 있지만 왠지 소장각이라.

부담 없이 보기 좋은 개론서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