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 테라스에 펭귄이 산다 - 마젤란펭귄과 철부지 교사의 우연한 동거
톰 미첼 지음, 박여진 옮김 / 21세기북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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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존재를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책 소개 글을 통해 알게 됐다. 네 컷의 동영상을 통해 펼쳐지는 개략적인 소개에 그만 빠져 버렸다. 당장 사거나 빌려서 읽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책은 예약판매 중이고 도서관에는 모두 빌려가서 없더라. 그런데 왜 하필 펭귄이었을까? 우리집 테라스에 멍멍이나 야옹이가 사는 이야기를 썼다면 아마 내가 이 책을 읽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 펭귄이기 때문에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보기 쉬운 동물이 아니기 때문에 관심이 간 거다. 그런 점에서 톰 미첼 작가의 홍보 전략과 타이틀은 정말 탁월했다고 생각한다. 모름지기 잘 모르는 작가라면 독자를 낚을 수 있는 타이틀이 중요한 법이니까.

 

영국 출신 나는 뼛속까지 제국주의자였던 러디어드 키플링의 모험담을 듣고 자라났다. 나의 어머니는 한 때 악어를 키우기도 하셨다고 한다. 젊은 날, 저 멀리 아르헨티나에서 기숙학교 교사를 구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두말할 필요 없이 모험을 향해 떠날 수가 있었다. 군 출신 페론 대통령이 통치하던 당시 아르헨티나의 정정은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거리에서는 폭력 시위가 넘쳐났고, 납치와 유괴가 횡행하던 어지러운 시절이었다. 그 와중에 저자는 친구의 호의로 이웃나라 우루과이 푼타델에스테 아파트에서 휴가를 보내게 되었다. 그 때 바닷가에서 청어 떼를 쫓는 펭귄들을 목격한다. 얼마 뒤, 충격적이고 비통한 장면을 목격한다. 기름 때에 절어 죽은 수천 마리의 펭귄 사체더미가 눈에 들어온 것이다. 그리고 그 북새통에 살아남은 마젤란 펭귄 후안 살바도르를 만나게 된다.

 

타르로 그냥 놔두면 죽을 펭귄을 숙소로 데려와 잘 씻긴 다음, 다시 바닷가로 돌려보내려 하는 작가의 시도는 보기 좋게 실패했다. 결국 녀석을 데리고 아르헨티나로 돌아와야 했다. 저자는 버스에서 만난 가브리엘라에게 오해를 받아 가며(녀석의 실례 때문에), 군사쿠데타로 가뜩이나 예민한 아르헨티나 세관원의 뇌물 공여 요청을 거부해 가면서 후안 살바도르를 무사히 자신이 근무하는 세인트 조지 학교로 데려 오는데 성공한다. 녀석은 청어를 좋아하는 타고난 사냥꾼이자, 사람들의 애정을 한 눈에 앗아가는 너그러운 성직자 같은 모습과 매력으로 만인의 사랑을 받기 시작한다.

 

저자 톰 미첼은 이야기의 다른 한 축에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군부의 실정을 배치한다. 영국인들은 포클랜드로 그리고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말비나스라고 부르며 전쟁까지도 불사한 바 있는 예민한 정치적 주제를 거론했다가 아르헨티나 사람들과 싸우게 된 일화는 물론이고, 가히 살인적인 당시 인플레이션에 대해서도 가감 없이 진술한다. 군부는 정치권력을 장악했을지는 몰라도 역시나 민간 부분인 경제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다.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누군가 손해를 보면, 누군가에는 득을 보지 않았던가. 세인트 조지에서 산타 마리아라 불리는 친절한 세탁 담당 아주머니 같은 대다수 가난한 사람들은 인플레이션으로 고통 받고, 대신 대지주와 자본가들만 값싼 노동력을 착취하면서 번영을 구가했다고 저자는 조용하게 알려준다.

 

이 책에서 개인적으로 후안 살바도르를 자연에 풀어 주기 위해 아르헨티나의 광활한 황무지를 선배 체 게바라처럼 오토바이를 타고 누비다 맞닥뜨리게 되는 장면을 이 소설 최고의 한 컷으로 꼽고 싶다. 초반에 마젤란 펭귄의 수가 급격하게 줄어드는 이유가 환경오염과 무분별한 남획이라고 했던가. 저자는 아르헨티나 동물원에 후안을 데려다 주려던 계획은 인간의 구경거리로 전락한 동물들의 실태를 보고는 그럴 바에야 차라리 세인트 조지에서 후안을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낫다는 판단을 내리기도 한다.

 

여행 중에 볼리비아 포토시를 찾은 경험담도 인상적이다. 소매치기를 당해 하는 수 없이 지역 사람들에게 신세를 지기도 했다지 아마. 돈 몇 푼에 기꺼이 잠자지를 내주는 호의에는 감사했지만, 자신과 그들 그리고 여기저기서 나는 냄새 때문에 도저히 같이 잠을 자지 못하고 한데서 잠을 자려다가 고생을 했다는 이야기는, 언젠가 들은 미국 출신 아프리카 선교사들이 다른 건 몰라도 물 부족으로 마음대로 샤워를 하지 못해 결국 선교에 실패했다는 이야기가 떠오르기도 했다.

 

모든 게 다 해피엔딩으로 끝나면 좋았겠지만, 우리의 핑귀노 후안은 저자가 여행에서 돌아와 보니 그만 죽었다고 한다. 사실 책을 읽기 전에 무언가 끝내주는 특별한 이야기를 기대했었는데, 그런 건 사실 없었다. 23살의 젊은이 눈에 비친 테러와 폭력이 백주대낮에 횡행하는 불안한 아르헨티나 정정에 대한 기술도 깊이는 없었고, 피상적인 관찰이 주를 이룬다. 혹독한 군부독재에 대한 상세한 리포트를 기대했는데 좀 아쉬웠다. 예상한 대로 마젤란 핑귀노 후안 살바도르가 사람들에게 인기를 독차지하게 되었더라는 이야기 블라 블라. 이십대 영국 출신 젊은이가 무언가 새롭고 특별한 경험을 찾아 제3세계를 찾았다가 만난 마젤란 펭귄과의 스토리는 과연 책으로 엮어낼 만한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아무래도 내가 너무 많은 기대를 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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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맥주 여행 - 맥주에 취한 세계사
백경학 지음 / 글항아리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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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맥주를 마셔 왔다. 옥토버훼스트(Oktoberfest)를 운영하는 업자인 저자처럼만큼은 아니겠지만 맥주에 대한 사랑도 대단하다. 역시 최고의 추억은 뮌헨에 가서 호프브로이하우스와 뢰벤브로이에서 실컷 술을 마신 기억이지 싶다. 사실 에일 맥주와 라거 맥주의 차이도 잘 모르고 그냥 마셔댄다. 이유는? 그냥 좋으니까. 집에도 그롤쉬(저자는 ‘흐롤스’라고 부르더라) 500ml 한 캔이 있는데 어제 마시려다가 참았다. 책을 다 읽고 나서 마셔야지 싶었는데, 그전에 사둔 오다리랑 함께, 그만 책을 읽다가 잠이 들어 버렸다. 오늘 집에 가서 마셔야지.

 

고대 이집트까지 기원을 추적할 수 있는 맥주는 정말 서구 문명에서 빠질 수 없는 그런 재화였다. 병사들의 급여로도 지급이 되었고, 고된 노동을 한 노동자들에게는 영원같은 안식을 주기도 했다니 말이다. 지금도 불토면 가끔 거리에서 볼 수 있는 장면을 고대 이집트의 센스 있는 작가들은 그림으로 표현하기도 했단다. 물론 당시의 맥주는 지금의 그것과 같이 깔끔한 것이 아니라 거의 죽 같은 수준이었다나. 중세에는 수도원에서 거의 맥주 생산을 독점하다시피 했다고 하는데, 지금 같은 대량생산이 가능하지 않아 수도원마다 맛이 다 틀렸다고 한다. 지금도 벨기에에서 생상되는 트라피스트 맥주인가는 정말 대단한 맛이라고 하는데, 맥주 애호가로서 한 번 맛을 보고 싶기는 하다.

 

맥주의 초창기에는 보리와 효모 그리고 물로만 빚었다고 한다. 맥주의 쌉쌀한 맛을 내는 홉을 첨가하기 전까지 그루트라는 갖가지 향신료를 맥주에 넣어 빚는 시도를 했다고 한다. 현대 맥주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독일에서는 일찍이 맥주 순수령을 포고하여, 보리와 효모, 홉 그리고 물로만 맥주를 만들라고 했다던가. 그리하여 지금도 독일에서는 위의 네 가지만으로 만든 맥주만을 최고로 친다고 한다. 상면 혹은 하면 제조법도 있다고 하는데, 맥주 애호가라고 하긴 하지만 그런 차이 정도는 가볍게 무시하자. 요즘 우리나라에서도 천편일률적인 오비나 카스 맥주 외에도 소규모 브루어리에서 만드는 수제 맥주가 인기라고 한다. 다만 가격이 일반 대중 맥주와는 좀 차이가 있어서 마음껏 마시지 못한다는 문제가 있긴 하지만 말이다.

 

오래전에는 돈이 없어서 맥주도 마음대로 마실 수 없는 그런 시절이 있었다. 그러다가 버드와이저랑 밀러 라이트가 들어와서 겉멋으로 마셔 보았는데 영 그렇더라. 나의 진짜 맥주 시음기는 IPA(India Pale Ale)의 시발점이 아니었을까. 난 좀 더 쌉쌀한 맛이 좋다. 그러니까 독일에서 출발한 라거보다는 영국식 에일 맥주가 더 마음에 든다.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맥주는 샘 애덤스 IPA다. 인도를 식민지배한 영국 사람들이 고향에서 맛보던 맥주맛이 그리워 아열대지방에서 맥주를 제조하기 위해 홉을 더 첨가해서 쌉싸름한 맛의 맥주를 만든 게 시초였다고 하던가. 아니면 본국에서 만든 맥주통을 배에 싣고 적도를 두어번 오가면서 오크통에서 오묘한 맛이 생겼다는 썰도 있다고 한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

 

 

독일 뮌헨에 가서는 히틀러가 폭동을 선동하다가 체포되어 옥살이를 했다는 호프브로이하우스에도 가서 맥주를 마셨다. 거기서는 기본이 1,000cc였다. 아침에 뮌헨 시장에 가서 보니 아침부터 어떤 아저씨가 맥주통 위에 당당하게 1,000cc 한 조끼를 걸치는 장면에 감탄하기도 했다. 아, 이 동네에서는 이렇게 마시는구나 싶었다. 뮌헨중앙역 부근의 뢰벤브로이에서는 디즈니 캐슬 투어를 함께 한 여행 동료와 거나하게 취하기도 했었지. 나중에 한국에 돌아와서는 홍대 부근에서 다시 만나 필즈너 맥주를 신나게 주고받고 그랬더랬지. 그게 벌써 십년 전 이야기로구나.

 

영국의 펍(pub)과 독일의 켈러(keller)라는 공간이 단순하게 술을 마시는 장소가 아닌 동네 사교의 장이라는 점에 대한 저자의 저술도 마음에 들었다. 도시화는 다수의 익명성을 보장하기도 하지만, 개인주의적 공동화를 부추기는 점도 있지 않은가. 서구 유럽사회의 유구한 지방자치제 역사는 어쩌면 이런 펍과 켈러를 중심으로 한 지역사회의 현안과 갈등해소를 바탕으로 했던 게 아닐까. 상처 받은 영혼들이 힐링을 쫓아 공허한 디지털 공간을 누비는 것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요즘에는 정말 다양한 종류의 맥주들이 마트에 차고 넘친다. 예전에 저장시설이 일천하던 시절에는 오크통으로만 운반이 가능했었다고 하는데, 병맥주와 캔맥주가 차례 대로 개발되면서 전 세계로 맥주의 유통이 가능해지는 신세계가 펼쳐졌다. 이 책을 통해 몰랐던 사실 하나는 편의점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체코 맥주 필즈너 우르켈(오리지널이라는 뜻이라고 한다)이 일본 아사히 맥주에게 팔렸다는 점이다. 아사히 맥주는 전범기업에서 만든 술이라고 그동안 나의 맥주 구매목록에서 제외했었는데, 그럼 이제 필즈너 우르켈도 역시 같은 이유로 배제해야 하나 싶다. 그럼 이제 안녕 필즈너!

 

이번 달이 10월인데, 맥주의 본고장 독일 그중에서도 뮌헨의 옥토버훼스트에 언젠가 꼭 가보고 싶다. 기네스의 고향 아일랜드의 어느 시골 마을에서 저자가 받은 현지 사람들의 환대도 너무 부러웠다. 종교개혁의 기수 마르틴 루터도 ‘마시는 빵’ 맥주를 사랑했다고 하지 않던가. 물론 술 마시는 건 좋지만, 자제의 미덕도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을 종교개혁가는 강조한다. 양조전문가(brew master) 부인이 빚은 맥주를 마음껏 마실 수 있었던 종교인이 할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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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나무 2018-10-05 10: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니.. 아침부터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레삭매냐님...ㅋㅋㅋ
저 얼마전에 읽은 <하루키를 읽다가 술집으로> 읽으면서 맥주 공부좀 했더랬죠.
그냥 일상의 음료로 마시던 맥주에 대해 알면 알수록 더 좋아지더라구요. ㅎㅎ
더 추워지기전에 야외 테이블에 앉아 시원하게 맥주 한잔 하고 싶네요! ^^

레삭매냐 2018-10-05 13:19   좋아요 1 | URL
근데 지금 설해목님은 금주 내기 중이라고
하시지 않았던가요? ㅋㅋㅋ

일상의 음료에서 그만 빵~ 터져 버렸습니다.

맥쥬가 일상의 음료였군요 !!! 아 당장 마시고잡다.

2018-10-05 10: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삭매냐 2018-10-05 10:26   좋아요 1 | URL
말씀해 주시니,,,

역시 술의 최고봉은 낮술이 아니겠습니까.

오래전 선배들의 귀여움을 받고자 까만봉지
에 맥쥬병들을 잔뜩 싣고 짤랑 짤랑 소리를
내며 교정을 누비던 생각이 나네요.

그땐 그랬지하고 말이죠.

syo 2018-10-05 10: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뭐랄까, 내용도 내용이지만 ˝그만 책을 읽다가 잠이 들어 버렸다.˝는 문장에서 어쩐지 오래 멈추게 되었습니다. 뭔가 숭고한 순간이다....

레삭매냐 2018-10-05 10:27   좋아요 0 | URL
마저 다 읽고 싶었으나,
의지가 바디의 욕망을 누르지 못했습니다.

뭐 그랬습니다.

moonnight 2018-10-05 10: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앜 필스너 우르켈이 아사히에 팔렸나요? 몰랐네요. 제일 좋아하는 맥주인데ㅠㅠ; 글을 읽으니 또 맥주 생각이 나네요. 아침의 맥주를 좋아하는데 슬프게도 근무 중 ㅠㅠ

레삭매냐 2018-10-05 13:19   좋아요 0 | URL
어스름한 모닝 맥쥬의 추억 캬하 ~

비내리는 데 술 생각이 절로 나네요.

psyche 2018-10-05 11: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국은 지금 아침이지만 여기는 저녁이라... 저녁 먹으면서 맥주 한잔 하던길에 한 잔 더 하면서 북플을 열었다가 맥주에 대한 글을 보니 반갑네요 ㅎㅎ 아주 오랫동안 라거만 좋아했는데 한번 에일에 맛들이니 에일만 마시게 되네요. 저도 언젠가 유럽에 가서 맥주 투어를 하고 싶어요.

레삭매냐 2018-10-05 13:21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나중에 유럽에 다시 가게 되면
비어 투어에 나서야할까 봅니다 :>

저도 라거만 마시다가 에일 맛을 들으니
라거 맛이 싱겁게 느껴지더라구요.

cyrus 2018-10-05 12: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페미니즘 독서모임에 활동하셨던 분이 일본 라멘 겸 맥주 파는 가게를 차렸어요. 이름이 ‘투찬스’에요. 대구에 오신다면 여기에 꼭 가보셔요. 이 곳 사장님이 전 세계에 돌아다니면서 맥주를 마셔 봤을 정도로 맥주 덕후에요. 좋은 맥주를 소개하고 싶은 마음이 강렬한 분이에요. ^^

레삭매냐 2018-10-05 13:23   좋아요 0 | URL
싸이러스 브로의 소개를 듣고 대구 투찬스
검색해 보았습니다. 멋지네요. 언젠가 대구
에 가게 되면 방문해 보는 것으로...

일본에 갔을 적에 점심 때 사람들이 거의
무조건 식사 주문하고 큰 맥주병 하나씩
비우는 거 보고는 깜딱 놀랐습니다. 일본
은 이렇구나 하고 말이죠.

라멘에 코히비루라, 묘한 조합일 것 같습니다.
 
참 잘했어요 - 거짓일지라도 나에게는 꼭 필요했던 말
박광수 지음 / 메이븐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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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궁금했다. 이십여 년 전, C일보엔가 연재하던 <광수생각>을 즐겨 봐서 그랬던가. 당시 광고업계에서 일하던 친구가 <광수생각>의 광수와 실제 광수와 차이가 있다는 말을 듣고는 연재읽기를 접었던 기억이 난다. 그의 사랑타령은 이혼으로 빛이 바랬고, 불우이웃 돕기 역시나 자기만족적이라는 비판 때문이었을까. 환호가 냉담으로 바뀌는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시간이 많이 지났다. <광수생각>의 광수는 바뀌었을까라는 생각이 이 책을 집어 들게 된 이유 중의 하나였다.

 

언제부턴가 우리 주변에는 힐링과 위로하며 살아야 한다는 문구가, 특히나 인스타그램에는 넘쳐흐르고 있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에 상처를 그렇게 입고 살아가는 건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인생살이가 녹록하지 않다는 건, 이미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닌가. 그러더니 어느 순간부터 남의 눈치 보지 말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란다. 그것도 사회생활 초년기에나 가능한 일이지,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고 부양할 가족이 생기면 전혀 가능하지 않은 선택지가 된다. 어제 읽은 줄리언 반스의 책에도 나오는 말이지만,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가 바로 돈이다. 태어나면서부터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면 몰라도 대개의 사람들은 그놈의 돈 벌다 세월이 갈 판이다.

 

반세기를 살아오며 이런 저런 세상풍파를 체험한 광수 씨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일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었다. 세상살이가 팍팍해졌을 때, 그에게 야구가 탈출구였던 것처럼 마음껏 자신을 소비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지 않을까? 그런데 야구가 스포츠 중에서 제법 비용이 많이 드는 스포츠라는 건 알고 있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려고 해도 돈이 필요한 법이라는 것이다. 아이 또 돈 타령이네...

 

야구하면 나도 한 타령할 수 있는데. 예전에 엠엘비의 보스톤 레드삭스를 열렬하게 응원했었다. 물론 지금도 팬이다. 2004년 우승의 저주를 풀기 전까지 얼마나 혹독한 시련들이 있었던가. 바로 전해인 2003 ALCS 7차전에서 영원한 숙적 양키즈의 애런 분에게 통한의 끝내기 홈런을 맞고 역전패당하던 순간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오늘 2018 와일드카드 결정전에서 오클랜드를 꺾은 양키즈와 다시 ALDS에서 숙명의 라이벌전을 치르게 된다고 한다. 부디 초전에 박살내 주길! 웃기는 건, 예전에 돈키스라며 돈으로 우승을 산다던 보스톤이 엠엘비에서 가장 돈을 많이 쓰는 팀이 되었다는 점이다. 이블 엠파이어(evile empire)란 별명은 이제 양키스보다 레드삭스에게 더 어울리는 별명이 되어 버렸다. 그렇게 시간이 가다 보면, 상황이 역전되는 법이긴 하지.

 

자존감을 상실해 가는 현대인들을 위한 에세이집에서 내가 가장 재밌게 읽은 에피소드는 바로 파타야 코끼리 투어가 아니었을까. 까만 마음으로 푸켓 대신, 여성들이 득시글거릴 것으로 추정되는 파타야로 갔다가 졸지에 아이들 보모 신세로 전락하고 코끼리 트래킹에서 육중한 몸매를 자랑하는 친구와 함께 코끼리들을 힘들게 했던 전과자들의 이야기에서 정말 빵빵 터져 버렸다. 그들을 태우기 위해 맘모스급 코끼리들이 등장하고, 가뿐하게 일어나는 동시에 엉덩이에서 볼링공만한 끙아들이 나왔다는 이야기, 흥겨운 스토리가 아닐 수 없었다.

 

미슐랭 가이드에 나오는 별점 이야기도 흥미롭다. 요즘 어디서고, 가성비가 최고라는 맛집투어를 하고 올라오는 사진들이 인기다. 왠지 그런 곳의 사진을 보거나, 텔레비전 방송 혹은 입소문을 들으면 가보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 아닌가. 그런데 그런 곳들을 찾아가 보면 대부분 실망하기 마련이다. 한 마디로 말해 초심을 잃게 된 곳이다. 사람들이 많이 몰리다 보니 아무래도 줄서기와 불친절한 서비스는 기본이다. 내 돈 주고 가서 그런 곳에 가서 대접을 받는다니, 믿을 수가 없더라. 그래서 나는 그런 곳은 가지 않으련다. 예전에 추운 가을바람을 맞아 가며 군산 짬뽕맛을 보겠다며 기다린 나의 어리석음을 통탄할 따름이다.

 

광수 씨와 더불어 세월을 헤쳐 오다 보니, 그 옛날의 감수성을 자극하는 그런 기분은 들지 않더라. 한 컷의 만화로도 오랜 여운이 가는 그런 느낌이 들곤 했었는데, 이젠 세월과 함께 다 휘발되어 버린 그런 느낌이다. 그동안 어디에서 무얼 하면서 사는지 몰랐었는데 여전히 그림 그리고 책내고 그리고 강연회도 다니는가 보다. 뭐 그렇게 가는 거지. 아, 그리고 이건 여담인데 제발 250만 독자의 사랑을 받았다느니 하는 광고는 자제해 주시길. 사골도 고만 우려 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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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04 17: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삭매냐 2018-10-05 09:19   좋아요 0 | URL
구구절절이 옳은 말씀입니다.

특히나 일관성은 작가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이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대장물방울 2018-10-05 09: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 의외다 했더니 역시나로.

레삭매냐 2018-10-05 09:20   좋아요 0 | URL
the class does not change, though.
 
연애의 기억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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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이 소설은 기본적으로 사랑에 대한 이야기란다. 대가 줄리언 반스의 말씀이다. 근데 나는 줄리언 반스의 팬도 아니라고 하면서 꾸역꾸역 그의 작품을 읽는다. 작년에는 <시대의 소음>을 읽었었지 아마. 이것 또한 기묘한 아이러니가 아닐까. 올해로 만 72세 노익장을 과시하듯 줄리언 반스는 그야말로 무르익은 필력으로 빚은 글밥을 독자에게 선사하듯 내던진다.

 

소설의 주인공은 19세 서식스 대학에 다니는 폴 ‘케이시’ 로버츠다. 첫 번째 여름방학을 맞아 고향 서리에 있는 테니스장에서 수많은 휴고들과 캐럴라인들 사이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는 중이다. 기만과 냉소로 무장한 보수당을 지지하는 이들이 북적이는 공간에서 폴은 자신의 엄마 뻘인 48세 수전 매클라우드 여사와 만나 사랑에 빠진다. 수전에게는 남편도 있고, 폴보다 나이가 많은 두 명의 딸들도 있다고 한다. 그 둘에게 이번 사랑은 모두 두 번째 사랑이라고 한다.

 

29년이라는 나이 차이가 그들의 사랑을 방해할 것인가? 줄리언 반스는 바로 그런 나이라는 위계질서가 주는 위압감에 당당하게 맞서라는 주문을 하는 게 아닐까. 인생의 어느 순간에 한 때 서로를 사랑했음을 기억하라는 대가의 조언은 정말 폐부를 깊숙하게 찌르는 느낌이다. 그렇지, 그렇게 서로 사랑하는 순간이 없었다면 그들이 기만과 냉소적인 결혼생활에 뛰어들진 않았겠지. 당연한 말씀이다. 모든 것을 파괴한다는 그놈의 시간이 사랑과 결혼에 동록이 슬게 만드는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물론 때로는 치유의 방법이기도 했겠지만.

 

도대체 수전 매클라우드가 19세 소년을 사로잡은 매력은 무엇이었을까? 케이시 폴의 자전적 고백을 통해, 비슷한 또래 아가씨들을 사귀는 친구들보다 더 깊숙한 위반감의 즐거움을 만끽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에 사랑에 대한 절대주의적 자신감도 한몫 하지 않았을까. 예상한 대로, 그들의 사랑의 전사에 암운이 끼기 시작하면서 세상경험에 일천한 케이시 폴은 수전의 친구 조운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시작한다. 입이 걸고, 에두르지 않는 성격의 소유자 조운은 사랑의 멘토로서 딱딱 떨어지는 충고를 들려준다. 그런데 진정한 충고를 하려면 자신이 먼저 상처를 입어야 한다고 했던가. 아마 조운에게도 쉽지 않은 일들이었을 것이리라.

 

케이시 폴은 결국 수전이 남편 E.P. 고든 매클라우드에게 학대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결국 사랑의 도주에 나서게 된다. 물론 그전에 테니스 클럽으로부터 석연치 않은 이유로 퇴출당하는 수모도 겪게 된다. 줄리언 반스는 영국 중산층 계급의 가정이 도처에 가지고 있는 모호하면서도 비밀스러운 일상에 대해 소상하게 밝히기 시작한다. 표면적으로 점잖아 보이는 신사 고든이 항시적으로 술에 취해 아내에게 손찌검을 한다는 게 상상이 되는가. 케이시 폴과 수전의 관계만큼이나 사람들이 위선적인 영국의 중산층 사람들이 받아 들이기 쉽지 않은 장면들이 차례로 등장한다.

 

결국 케이시 폴과 수전은 사랑의 도주에 나선다. 수중에 일전 한 푼 없었던 케이시 폴은 수전의 도주 자금에 의존해야 했는데, 조운의 말대로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밥벌이의 지겨움이 그를 전면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소설 <연애의 기억>은 주인공 케이시 폴의 성장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그가 변호사 공부를 하는 동안, 수전은 그를 집에서 기다리면서 그렇게 혐오하던 술 다시 말해 알코올을 탐닉하게 된다. 수전의 알코올 중독 문제가 심각해지면서, 케이시 폴은 능수능란한 거짓말쟁이로 거듭나게 된다. 자신은 항상 사랑에 진실했다고 생각해 왔지만, 돌이켜 보면 케이시 폴은 처음부터 수전과의 관계를 숨기기 위해 사방에 거짓말을 하지 않았던가. 진실한 사랑을 하기 위해 거짓말을 해야 하는 그네들의 상황이 참으로 역설적이었다.

 

소설 같지 않은 소설 <연애의 기억>을 읽으면서, 내가 그동안 생각해온 천편일률적인 사랑에 대한 고정관념을 교정할 수 있었다. 오래 전에 주변에서 모두가 만류하는 사랑을 선택한 동생이 있었다. 한 때 같이 살기도 한 동생이라, 조심스럽게 그 이유를 물었다. 그랬더니 그 동생은 이렇게 대답했다. “다른 이들은 이해할 수 없겠지만, 그런 결정을 내린 이들에게는 오랜 고심 끝에 내린 최선의 선택이었다”라고 말이다. 아마 케이시 폴과 수전의 도주도 그와 같았던 게 아닐까.

 

나이가 들고 세상을 경험하면서 노숙하게 된 케이시 폴이 과거의 사랑에 대해 회고하며 느낀 감정들이야말로 줄리언 반스가 자신의 자전적 소설로 보이는 <연애의 기억>에서 정말 하고 싶었던 그런 이야기가 아닐까. 모든 사랑에는 그들만의 사랑의 이야기가 있고, 실패한 사랑이든 아니면 아예 시작하지도 못한 짝사랑의 경험이든 말해지지 않은 이야기(untold story)의 사연들이 깊숙하게 자리하고 있다는. 반세기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가슴 아린 첫사랑이 정해 버린 삶의 포로가 된 케이시 폴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고혹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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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18-10-04 11: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설이 굉장히 건조하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3분의 1쯤 읽다가 그냥 덮어버렸는데요... 꾸역꾸역 읽었다는 말에 크게 공감이 갔습니다... ㅎㅎ

레삭매냐 2018-10-04 11:49   좋아요 1 | URL
공감합니다 -

저는 요상하게도 대부분의 줄리언 반스의 소설
에서 그런 느낌을 받게 되더라구요.

<시대의 소음>도 아마 그랬던 것 같아요. 참
흥미진진한 도입부와 달리 어느 새 주제가 실종
되었다고나 할까요.

<연애의 기억>도 케이시 폴과 수전의 도주까
지는 흥미로웠는데, 그 다음 순간부터는...

cyrus 2018-10-04 12: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반스의 첫 번째 소설 《메트로랜드》를 읽었을 때 지루하게 느껴졌어요. 한마디로 말하면 재미없었다는.. ㅎㅎㅎ

레삭매냐 2018-10-04 13:13   좋아요 0 | URL
저의 감상도 그렇긴 한데, 줄리언 반스를
좋아하시는 분들이 많은 걸 보면 혹시
제가 책을 읽으면서 낚아 채지 못한 그
무엇인가가 있는 게 아닌지 뭐 그런 생각
을 해보게 됩니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시간이 되면
집에 모아둔 반스 씨의 책을 하나씩 읽
어봐야할 것 같습니다.

Falstaff 2018-10-04 13: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줄리언 반스 좋아하는데요, 그이 책 속에 들어있는.....이라고 오해하시는 건, 대강 반스가 작 중에서 잘난 척을 좀 많이 하기 때문인 거 같습니다.
좋아하고, 안 좋아하고는 전적으로 개인 취향입지요. 지가 기껏해야 소설가밖에 더 됩니까?
이 책도 내년에는 꼭 읽어봐야겠습니다.

레삭매냐 2018-10-04 14:09   좋아요 0 | URL
확실히 그런 게 있는 것 같긴 합니다 -
잘난 척 -
아무래도 원서를 보지 않는 이상 그런 것
에 접속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네요.

˝전사˝라는 표현이 소설에 다수 등장하는
데 영어로는 어떤 말인지 궁금하더라구요.

개인 취향,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 - 우리가 놓치는 민주주의 위기 신호
스티븐 레비츠키.대니얼 지블랫 지음, 박세연 옮김 / 어크로스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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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뉴스가 연일 판을 치고 있다. 드디어 총리가 나서서 가짜뉴스와의 전쟁을 선포할 지경이 되었다. 가짜뉴스의 해악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그런데 이웃 천조국에서는 이런 가짜뉴스를 잘 활용해 대권을 거머쥔 사람도 있단다. 이름하여 도널드 트럼프. 미국 역사상 어떠한 공직도 경험하지 못한 민간인이 최고 권력자가 된 적이 있었던가? 더 심각한 문제는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의 저자들인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이 만든 독재자 리트머스 시험지 평가에서 트럼프는 4점 만점을 받았다는 점이다. 아니 그것만으로 미국의 민주주의가 위험에 처해 있다고 진단할 수 있을까? 바로 그 점이 이 책의 출발점이다.

 

누구나 다 알다시피 미국은 현재 공화당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민주당을 지지하는 이들로 나뉘어져 있다. 전자는 주로 기독교 백인들이 그리고 후자는 유색인종과 이민자 그리고 진보 그룹이다. 사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 정치 당파의 색깔은 그리 다르지 않았다. 별 차이가 없다 보니 민주당과 공화당이 정권을 주고받는 게 낯설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처럼 혹독한 정치보복 수준의 막말이 오가지도 않았다. 건국의 아버지들이 나라를 세운이래, 보이지 않는 규범이 올바르게 작동해온 결과다. 문제는 공화당 티파티 인사들이 대거 하원에 진출하면서부터 암묵적으로 지켜져온 미국 정치 전통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사실 미국 대통령의 임기도 처음에는 정해져 있지 않았다. 또한 대통령의 친인척들의 등용도 알아서 자제해온 전통을 자랑한다. 대통령 행정명령 또한 마찬가지다. 그런데 미국의 45대 대통령은 그런 전통과 규범을 가볍게 무시했다. 워터게이트로 임기 도중에 사임한 닉슨 같은 대통령도 자신에게 적대적 언론을 상대하는데 있어 금도를 지켰다. 하지만, 트럼프는 전혀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자신에게 비판적인 CNN, 뉴욕타임즈, 워싱턴포스트 같은 신문들과 전쟁을 선포했다. 물론 그의 의중에는 어차피 자신에게 지지를 보내지 않는 중도나 진보세력 대신 집토끼만을 상대하겠다는 전략이 밑바탕을 이루고 있다. 이런 판국이니 미국이 분열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게 아닐까.

 

남북전쟁을 치른 후, 남부의 민주당은 대거 선거권을 얻게 된 흑인들을 선거에서 배제시키기 위해 갖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런데 1965년 흑인들의 시민권 운동으로 다시금은 온전한 투표권이 그들에게 부여된 뒤에는 공화당이 백 년 전 수법을 그대로 이식해서 따라하고 있는 중이다. 교묘한 선거구 조정으로 다수 흑인들을 밀집시키는 전형적인 게리맨더링 전술로 민주당 당선이 유력한 선거구를 빼앗는데 성공했다. 선거를 위한 신분확인을 강화하면서 상대적으로 백인들에 비해 운전면허증 같은 신분증이 없는 유색인종의 표를 잠식하고 있다. 트럼프의 가짜뉴스 전략을 본떠서 지난 대선 당시 대규모 부정선거가 이루어졌다는 근거 없는 소식들을 유포시켜, 공화당 지지자들을 강력하게 응집시키는데 성공했다.

 

이 책은 분명히 병들어 가고 있는 세계 민주주의가 아니라 미국식 민주주의의 종언에 대한 분석이다. 세계 민주주의의 롤모델이라고 하는 미국의 민주주의에 얼마나 허점이 많은지 이 책을 읽으면서 알 수가 있었다. 한 가지 불만은 베네수엘라 우고 차베스 정부에 대해 미국 주류 지식인의 비판적 시각이다. 어느 정권도 모든 정책을 성공시킬 수는 없는 게 아닌가. 미국의 정책들이 모두 성공했던가? 지엽적인 이슈들로 베네수엘라 차베스 정부를 포퓰리스트 정권으로 규정하는 것은 조지 W. 부시가 열정적인 민주주의자였다는 주장만큼이나 우습게 들렸다. 믿을 수가 없다, 부시가 열정적 민주주의자였다니.

 

건국의 아버지들이 고안한 대통령 간접선거 제도의 병폐가 부시와 앨 고어 그리고 지난 번 대선에서처럼 국민의 민의를 대변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드러났는데도 개정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문제가 아닐까. 이것이야말로 심각한 민의의 왜곡이 아니던가. 직접선거제였다면 당연히 힐러리 클린턴이 대통령이 되었어야 할 텐데 지금 백악관의 주인은 누구인가 말이다. 독재자의 출현을 막기 위해 엘리트 정당인들이 주축이 된 정당이 앞장 서야 한다고 하지만, 작금의 공화당 인사들이 과연 그렇게 하고 있는가? 그저 선거에 이기기 위해서라면 그야말로 악마와도 손을 잡을 형국이 아닌가. 그렇다고 해서 문제점이 있는 인사가 집권자가 되었을 때, 견제라도 하면 좋으련만 그것도 아니다. 얼마 전 작고한 공화당의 존 매케인 의원이 암투병 중에도 먼 거리를 날아와 트럼프가 야심차게 추진한 오바마케어 무산을 위한 법안에 반대한 장면 하나가 기억났다. 여론에 떠밀려 대통령의 거수기가 된 공화당 의원들의 모습이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저자가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무엇보다 중요하게 강조하는 상호 관용과 제도적 자제(institutional forbearance) 같은 선의에 의한 규범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동의한다. 문제는 그런 제도들은 전혀 물리적 강제성을 지니고 않다는 점이다. 공화당이 게리맨더링 같이 악랄하고 비열한 전술로 민주당의 손발을 묶는데, 그들과 같은 전술로 되받아치면 안 된다는 주장은 공허하게만 들린다. 물론 강경투쟁으로 맞상대하라는 주문이 아니다. 아무리 자당에서 선출된 권력자라고 하더라도, 민주주의를 위협한다는 판단이 든다면 1940년대 연방대법원을 재구성하려고 시도했던 FDR에게 저항했던 민주당 의원들 같은 결기를 보여 달라는 것이다. 물론 현실적으로 그것이 가능한 지는 별개의 문제겠지만 말이다.

 

미국 중간선거(11월 6일)가 다음 달로 다가왔다. 명백하게 트럼프 행정부에 대한 중간 평가 성격을 지니는 이번 선거에서 과연 어떤 결과가 나올지 궁금하다. 지난 대선 당시 동시에 치러진 의원선거에서 상하원 다수당을 차지한 공화당은 상원은 유지하겠지만, 하원에서는 민주당에게 다수 의석을 빼앗길 것으로 전망된다. 그런다고 해서 민주당이 섣불리 러시아 스캔들로 궁지에 몰린 트럼프를 탄핵하는 어리석은 수를 쓰지 말 것을 저자들은 주문한다. 상대 진영에게 반감을 불러일으키고, 경제호황 중에 역풍을 부를 수 있다는 진단이다. 대신 다민족 민주주의 역량 강화와 경제양극화 현상을 해소하기 위한 정책개발의 위대한 전진이야말로 시대적 요청이라고 결말을 짓는다. 과연 미국 공화당이 티파티 극우세력과 결별하고 종래의 정치적 건강성을 회복해서 진정한 민주주의의 보루로 거듭나게 될 지 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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