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델바이스의 파일럿
얀 지음, 박홍진 옮김, 로맹 위고 그림 / 길찾기 / 2015년 2월
평점 :
절판



메이저리그 야구를 좋아한다. 나에게 스포츠는 오로지 야구뿐이다. 사실 다른 스포츠에는 관심이 없다. 지금 은퇴했지만, 예전에 내가 보스턴 레드삭스의 노마 가르시아파라라는 선수가 있었다. 이 선수의 타격 전 세리머니는 정말 독특했다. 아마 야구 선수들처럼 미신 혹은 징크스에 시달리는 직업군의 사람들도 없을 것 같다. 슬럼프에 빠졌을 때는 더더욱. 그런데 이번에 로맹 위고의 그래픽 노블 시리즈를 읽으면서 야구 선수 못지않게 미신을 숭배하는 이들이 있다는 걸 깨닫게 됐다. 바로 비행기 파일럿들이었다.

 

이번에 시간적 배경은 1차 세계대전이다. 앙리와 알퐁스 카스티약 두 쌍둥이 형제가 주인공이다. 발랑틴을 사랑하는 알퐁스는 오래 전 집시 여인 발부르가의 저주에 가까운 예언으로 물을 두려워하게 됐다. 그래서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발랑틴의 남동생 프랑스와가 세느 강에 빠졌을 때 구하지 못했다. 대신 형 앙리가 뛰어 들어 프랑소와를 구했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흘러 그가 전투기 조종사가 되었을 때는 공중에서도 구하지 못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책을 다 읽은 나의 서술이고, 저자들이 구사하는 내러티브는 뒤죽박죽이다. 어쨌든 여자들을 꾀는데 일가견이 있는 앙리는 공중에서 그리고 역시 같은 전투기 조종사였던 알퐁스는 지상에서 전차병으로 전투에 참가한다. 그가 모는 전차 옆에는 그의 사랑하는 아내 발랑틴의 이름이 적혀 있다.

 

이야기를 좀 복잡하게 꼬아, 여전히 전투기 에이스로 활약하는 앙리에게 에델바이스 문양을 그려 넣은 독일군 조종사 에릭이 도전장을 내민다. 아무래도 자신의 실력이 떨어지는 걸 깨달은 앙리는 첨단 기관포를 조작해서 승리를 거둔다. 다시 도전장을 던진 에델바이스 에릭을 두려워한 앙리는 쌍둥이 동생 알퐁스와 역할 바꾸기에 들어간다. 그러니까 자신이 전차병으로 그리고 알퐁스는 에델바이스를 상대하라는 것이다.

 

운명의 여신은 형제에게 무심했다. 전차를 몰던 앙리가 그만 폭발로 얼굴에 큰 상처를 입게 된 것이다. 자신의 멀쩡한 얼굴을 형처럼 만들 수 없었던 알퐁스는 형의 화실에서 오래 전 사건을 연상케 하는 한 장의 그림을 발견한다. 그건 바로 집시 여인 발부르가의 초상화였다. 살벌하게 해골 위에 올라선 발가벗은 여인의 모습, 그녀가 바로 형제에게 예언을 한 것이었다. 형 앙리는 동생 알퐁스 행세를 하고 그녀를 취했고. 유럽 그래픽 노블, 특히 이번에 만난 로맹 위고의 그림들은 죄다 에로틱한 시퀀스들이 빠지지 않고 등장해서 깜짝 놀랐다. 특히 어제 이발소에서 무심코 책장을 넘기다 그런 장면들이 다수 등장해서 식겁했다네. 암튼 그것도 그들의 스타일이겠지 싶다.

 

뭍 여성들과 염문을 뿌리는 형 앙리는 비행기에서 시도니라는 여성과 관계를 하던 중 독일군의 피습으로 시도니가 죽는 사고를 겪는다. 이에 형 앙리는 알퐁스에게 예전의 빚을 갚으라고 재촉한다. 그게 2년 전인 1916년의 일이었다. 아, 발부르가는 앙리에게 돌심장을 가진 여자에게 죽음을 당할 거라는 예언을 했던가. 모든 불길한 예언은 들어맞는 법이지. 나중에 에릭의 연인으로 등장하는 발부르가는 확실한 팜므 파탈의 이미지를 그대로 드러낸다. 육감적인 몸매의 집시 여인은 앙리에게 성적으로 착취당하고 저주에 가까운 예언을 던진다. 앙리와 알퐁스의 나라 프랑스는 결국 독일에 이기지만, 끝까지 공군이길 원했던 앙리는 지상 퍼레이드 대신 비행기로 객기를 부리다가 그만 예언대로 ‘돌심장’을 지닌 여성과 충돌해 비극적인 최후를 맞게 된다.

 

브라질 출신 “표범” 후아오 가르손 이 소브라도는 황새 비행중대의 일원으로 프랑스군으로 자원한 조종사도 그렇지만 일왕을 추앙하는 일본 출신 시게노 시요타케도 황새 비행중대의 특별한 구성원이다. 실제로 일본 출신 조종사가 연합군의 일원으로 독일과 싸웠는지 궁금해졌다. 그나저나 발부르가는 미국 출신 모델 케이트 업튼의 이미지를 그대로 본뜬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비슷해서 깜짝 놀랐다.

 

어제 읽은 세 편의 로맹 위고가 그림을 맡은 그래픽 노블 중에서 <에델바이스의 파일럿>이 내러티브는 가장 강력했다. 마하의 속도를 주파하는 제트기도 아닌 복엽기 시절에 대한 회상은 마치 중세 시절 결투에 나선 기사들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그 시절의 말이 비행기로 바뀌었고, 일견 무모해 보이는 도전을 남성들의 전유물로 표현한 다시 말해 폭력의 순화 버전인 기사도 말이다. 백중지세로 실력보다는 운이 결투의 결과를 결정지었다는 점도 크게 다를 게 없었다. 국내에 나온 로맹 위고의 작품은 이제 <엔젤 윙스>를 빼고 모두 읽었다. ‘버마 밴시’라는 일본군을 상대로 한 공중전 이야기인 것 같은데 이건 아쉽게도 못 읽었다. 과연 언제 읽게 될 진 모르겠지만. 언제고 기회가 닿는다면 만나게 되겠지.

 

[뱀다리] 참고로 에델바이스는 2차세계대전 당시 독일 최정예부대인 팔쉬름예거 전사들이 달던 기장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로 치면 공수부대 마크 정도라고나 할까. 독일 파일럿들 중 다수는 귀족 가문의 자제들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1차세계대전은 그나마 남아 있던 기사도가 발휘된 마지막 전쟁이라고 해야 할까. 당시 파일럿 싸나이들은 에델바이스를 몰던 에릭처럼 상대편 기사에게 도전장을 던지고 1:1 대결, 속된 표현으로 하면 맞짱뜨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문득 1차세계대전 당시 최고의 에이스라는 ‘붉은 남작’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에 대한 이야기가 궁금해지기도 했다. 그는 삼엽기를 몰고 전투에 나서 무려 80대나 되는 적기를 격추했단다.

 

 

바로 그 리히트호펜을 주인공으로 삼은 <레드 배런>의 트레일러를 유튜브로 지금 막 봤는데, 로맹 위고가 그래픽 노블로 만들려고 했던 장면들이 그대로 실사영화로 만들어진 게 놀라울 따름이다. chase, fight and hunt 라는 표현으로 그를 집약해서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또 한 장면에서는 자신들은 도살자가 아니라 '스포츠맨'이라고 하는데 과연 그랬을까 싶다.

 

극중에서 추락한 비행기 부품을 병사들이약탈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실제로 그런 일이 다수 발생했다고 하니 로맹 위고와 얀의 고증 작업이 얼마나 철저했는지 다시 한 번 알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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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19-02-21 16: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 전 세인트 루이스 부시 스타디움에서 카디널스의 약쟁이 마크 맥과이어가 비 오는 날 홈런 치는 거 직관했습니다. 걔네들 스타디움에서 파는 맥주가 장난이 아니더군요.

레삭매냐 2019-02-21 16:51   좋아요 1 | URL
아 비루 ! 역시 야구장에서 마시는 비루가
최고라고 생각합미다.

산동네에서는 비어 보이가 있던데 ㅋㅋㅋ
너무 부러워 보였습니다.

두 약쟁이 덕분에 파업 이후 비실대던 믈브
가 다시 활기를 되찾게 되었다는 아이러니
가 참...

전 데릭 로우의 노히트를 직관했답니다 ^^

카스피 2019-02-21 23: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쟁이 참혹하긴 한데 사실 요즘 비행기 전투(F-22같은 경우 레이더에 안집히니 슬며시 다가와 미사일을 쏘면 적기는 영문도 모르게 격추되죠)보다는 그래도 레드바론이 활약하던 1차 대전의 공중전의 좀 낭만적인것 같긴합니다.

레삭매냐 2019-02-22 09:46   좋아요 0 | URL
아무리 전자전의 시대라고는 하지만
점점 인간의 능력이 소멸되어 가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1차 세계대전 당시만 하더라도 거의
인간의 감으로 공중전을 했다는 글
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카스피 2019-02-22 10:27   좋아요 1 | URL
1차대전 초기에는 손으로 폭탄을 떨어뜨리고 공중전은 조종사끼리 권총을 쏘았다고 하더군요.그리고 격추될 경우 조종사를 쏘는 것이 아니라(2차대전 당시 일본조종사는 격추된 미군비행사를 기총소사했다고 합니다) 낙하산으로 떨어지는 적 조종사에게 경의를 표했다고 합니다.아무래도 당시에는 조종사들 대부분이 귀족이어서 그랬던 것아 아닌가 싶어요.

카알벨루치 2019-02-22 17: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블루 윙즈>이후로 또 읽어볼 요량입니다 희망도서 주문 넣어놨는데 부디 잘 나오길 기대 고대 ㅎㅎ

레삭매냐 2019-02-22 17:59   좋아요 1 | URL
얏호~ 오늘 드디어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
이 도서관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바로 집에 달려 가서 빌려야겠습니다.

모쪼록 희망도서 겟하실 기원하겠습니다.

카알벨루치 2019-02-22 18:04   좋아요 1 | URL
<익명의 독서중독자들> 잘 읽으시길 바랍니다 너무 기대는 마시고~만화로 그렇게 독서에 대해 이야기하는게 참 대단타 싶어요 전 레삭매냐님이 더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1인! 광독과 탐독의 아우라가 ~주말 잘 보내소서!^^

레삭매냐 2019-02-22 21:55   좋아요 1 | URL
제가 너무 많이 기대를 한 모양입니다 :>
그래도 재밌긴 하네요.

가지고 있는 책들도 등장하고 또 사냥
욕구를 마구 불싸지르는 아이템도 보이
는 것 같구요 -
 
수리부엉이 - 독소전 밤하늘의 사냥꾼
얀 지음, 로맹 위고 그림 / 길찾기 / 2012년 3월
평점 :
품절


 

프랑스 출신 그래픽 노블 작가 얀과 로맹 위고의 <수리부엉이>를 읽었다. 다른 소설이나 그래픽 노블들이 서부전선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면, 로맹 위고는 특이하게도 공산주의 소련과 파시스트 나치 독일이 맞붙은 동부전선을 공간적 배경으로 삼고 있다. 그것도 육전이 아니라 공중전을 하는 전투기 조종사들이 등장한다는 점을 높이 사고 싶다.

 

시간적 배경은 1943년 겨울, 소련에서는 애국전쟁이라고 부르는 독소전쟁이 시작된 지 2년여를 경과하는 시점으로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정점으로 전쟁의 대세가 소련으로 기울기 시작하고 있었다. 주인공 아돌프 불프 중위는 야간전투비행의 달인으로 무수한 소련 전투기 조종사들을 저승으로 보낸 루프트바페의 에이스다. 전설적인 에이스 에리히 하르트만을 모델로 삼은 게 아닐까 싶다. 전쟁의 패색이 짙어지면서 독일군의 야만적인 행태를 분노하는 불프 중위는 그야말로 나치 공군의 특이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심지어 자신의 전투기에 나치 문양을 지우는 패기도 보여준다.

 

그의 맞수로 등장하는 소련군 전투기 조종사는 릴리야 리트바스키 동무다. 자신의 조국을 침략한 모든 파시스트들을 모조리 죽여 없애겠다는 독기로 무장한 릴리야는 구식 복엽기로 여자는 전투기를 조종할 수 없다는 남자 전투기 조종사들의 비웃음을 뒤로 하고 실력으로 그들을 압도한다. 독일군이나 소련군 모두 전투기 조종사들의 목숨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래서 독일 공군 내에서는 출격 5회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 서로 말도 걸지 않았다고 하지 않은가.

 

불프를 감싸주던 슈나이더 단장이 릴리야에게 격추당하고 전사하자, 새로운 단장으로 친나치 성향의 상관이 부임하면서 자신에게 나치식 경례를 하고 불프의 전투기에 나치 문양을 다시 그려 넣으라는 명령을 내린다. 게다가 신출내기 막스라는 신임 전투기 조종사는 진짜 전투기와의 공중전 대신 보급기나 상대적으로 낙후한 비행기들을 상대로 실적을 꾸준하게 쌓는다. 당연히 불프와는 상극으로 치닫는다. 베레나는 홀아비 불프를 끊임없이 유혹하지만 오로지 전투에만 관심을 가진 불프에게 거절당하고 막스에게 돌아선다.

 

짧은 그래픽 노블 <수리부엉이>에서 독일이 동부전선에서 파국을 맞게 되는 과정들이 순차적으로 등장하는 걸 볼 수 있었다. 우선 1944년 6월에 시작된 소련군의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독일 육군은 괴멸적 타격을 입고 후퇴를 거듭하게 되고 결국 독일 영내에까지 몰리게 된다. 이 책을 통해 독일 공군의 마지막 작전이었던 ‘보덴플라테 작전’에 대해서도 알게 됐다. 그리고 불프의 딸 로미는 드레스덴 대공습으로 결국 죽고 말았다. 그 후, 불프는 광적으로 소련기를 격추하는 일에 매달리게 된다. 너무 당연한 귀결이었을까.

 

한편, 릴리야는 두 번이나 독일군에게 격추당하고서도 기지로 돌아갈 수가 있었다. 모두 불프의 도움이 있어 가능했다. 불프 역시 격추되어 적지에 떨어졌지만 구사일생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해서 기지로 복귀한다. 불프의 딸 로미가 건네눈 나무로 조각된 부엉이 부적은 미신에 매달리는 최첨단 병기를 작동하는 병사들의 심리 상태에 대한 보고서라고 해야 할까.

 

불프가 독재가 히틀러를 증오하는 것처럼, 릴리야 역시 스탈린 동지를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실력을 갖춘 에이스들이라면 자고로 그들처럼 조국의 독재자들을 깔아뭉갤 수 있어야 한다는 설정이었을까. 불프와 릴리야 모두 조국을 위해 싸운다는 대의를 가지고 있다. 불프의 딸 로미는 여자들을 죽이냐는 자신의 질문에 머뭇거리는 아빠 불프를 닦달한다. 불프는 과연 히틀러를 위해 싸운 것일까? 아니면 자신의 신념대로 조국을 적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전력을 다해 싸웠던 걸까?

 

드라마처럼 사랑에 빠지게 된 불프와 릴리야의 관계는 다소 비현실적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예 불가능한 것은 또 아니지 않은가. 오히려 야만으로 점철된 전쟁이 더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모두가 알다시피 독일의 패배로 전쟁은 끝나고, 포로가 된 불프와 릴리야는 다시 만나게 된다.

 

오늘 도서관으로 달려가 로맹 위고의 그래픽 노블을 3권이나 빌려왔다. 그리고 가장 궁금했던 <수리부엉이>를 읽었다. 그야말로 전장에 핀 한 떨기 로맨스라고 해야 할까.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쭉 깔고 전개되는 이야기들이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자 다음은 어떤 책을 읽어 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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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 을유세계문학전집 71
알라 알아스와니 지음, 김능우 옮김 / 을유문화사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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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존재에는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책도 마찬가지다.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나라, 작가의 책도 국내에 출간된다면 그에 합당한 이유가 있다. 이집트 출신 알라 알아스와니의 책 <시카고>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에겐 전혀 알려지지 않았지만, 국내에 출간될 정도의 필력 그리고 컨텐츠라면 믿고 한 번 도전해 봐도 좋을 거라는 생각이다. 그리고 나의 예상은 꼭 들어맞았다.

 

전작 <야쿠비얀 빌딩>으로 워밍업을 해서인지 이번에 <시카고>는 한층 더 흥미진진하게 다가왔다. 심지어 재밌기까지 하다. <야쿠비얀 빌딩>에서 후진성, 군부독재에 대한 비판을 이집트 국내 실정을 들어 알아스와니가 비판했다면, 이번에는 무대를 미국의 인디언 말로 ‘강한 향기’라는 뜻을 가진 시카고로 옮겨 특유의 ‘썰’을 푼다.

 

이번 소설에서도 다양한 인물군들이 연달아 등장해서 이야기를 다채롭게 만든다. 9∙11 사태 이후, 보수반동화되어 가고 있던 미국 사회를 저격했다고 해야 할까. 1960년대 자유로운 사회적 분위기에서 자란 이들이 미국 사회의 주류를 형성한 지금, 역설적으로 부르주아 특유의 위선으로 가득한 욕망을 억제하는 분위기가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물론 그런 생각은 상대적이다, 이집트에 비해서. 미국에서 새로운 기회를 찾기 위해 조국을 떠나 유학 혹은 자발적 디아스포라를 선택한 이들의 이야기는 독자의 호기심을 증폭시킨다.

 

전작 <야쿠비얀 빌딩>에서처럼 <시카고>에서도 다양한 군상들이 등장해서 이야기를 풍요롭게 만들어준다. 우선 이집트 유학생 출신으로 일리노이 대학 의대에서 수학하게 된 네 명의 이집트 청년들이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타리크 하십과 샤이마 무함마디는 곧 연인 관계로 발전하게 되고, 이집트 국가 보안국의 끄나풀이자 이집트 유학생 회장 아흐마드 다나나 그리고 반정부 성향으로 똘똘 뭉친 나지 압둘 사마드가 차례로 등장한다.

샤이마는 뛰어난 재원으로 독실한 이슬람 신자로 결혼 대신 유학을 선택했다. 공부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타리크는 유독 연애만큼은 젬병이다. 상대방이 마음에 들면, 애정공세랍시고 공격적인 성향을 보이니 누가 그를 좋아하겠는가. 그런데도 시골처녀 샤이마에게 사랑을 느끼게 되니 인생사 알 도리가 없는 것이다. 너무 연애에 집중하다 결국 성적마저 떨어져 지도교수님에게 경고를 받고, 샤이마는 그에게 임신 소식을 알린다.

 

다른 상극에 있는 인물들로 다나나와 나지가 존재한다. 다나나는 국가 보안국의 끄나풀로 유학생의 동태를 파악해서 정부에 보고하는 파렴치한 행동을 한다. 오로지 출세에 눈이 먼 다나나는 돈을 보고 부유한 집 규수 마르와와 결혼해서 장인의 돈를 갈취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아내에 대한 성적 착취는 말할 것도 없다. 그가 이집트에서 취득한 박사 학위도 자기 실력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보안국의 도움이 있어서 가능했다. 그는 국가 보안국이 만든 괴물이었다. 미국 지도교수인 ‘세포 촬영 기사’ 데니스 베이커에게 날조된 슬라이드를 제출했다가 봉변을 당하고 제적당할 위기에 처하게 된다. 이집트 보안국 소장으로 주미 이집트 대사관 참사관으로 복무 중인 사프와트 샤키르 소장에게 달려가 SOS를 친다. 그런데 이 사프와트라는 자가 어떤 자인가 하면, 반정부 시위를 하던 인사들을 잡아다가 혹독한 고문은 물론이고 파렴치한 방법을 고안해 수감자들이 비밀을 누설하게 만드는 기술자였다. 다나나의 아내 마르와에게 눈독을 들인 사프와트는 “은밀한 유혹”을 다나나에게 던진다. 정말 이집트판 막장 드라마라고 해야 할까? 솔직히 그래서 더 재밌었는 지도 모르겠다. 도저히 다 읽지 않고서는 책을 내려 놓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다음 주자는 나지다. 이미 이집트에서 다나나와 악연으로 얽혔던 나지는 일리노이대 교수들의 호의로 미국 수학의 꿈을 이루게 된다. 문제는 이 청년이 미국에 도착한 날 바로, 매춘부를 학교 기숙사로 들였다는 점이다. 그렇게 짜잔 등장한 흑인 여성 도나는 나지의 상상과는 전혀 다른 여성이었다. 서비스 대가로 약속한 돈 150달러 대신 100달러를 강탈당한시피 뺏긴 나지의 미래가 걱정되기 시작한다. 호색한처럼 보이는 모습과 달리 나지는 조국 이집트를 사랑하는 애국청년이자 시인이다. 미국 유학도 사실 시인이 되고 싶다는 그의 꿈의 일부였다. 조국의 후진성, 무지, 빈곤 그리고 조국의 발전을 가장 저해하는 요소로 군부독재를 꼽는 청년은 자신의 지도교수 존 그레이엄이 마련한 자리에서 만나게 된 콥트교도 카람 도스와 주먹다짐에 가까운 논쟁을 벌인다. 흥미진진한 이야기에 제트엔진을 단 것처럼 소설을 달리기 시작한다.

 

알라 알아스와니의 자전적 소설 <시카고>의 한 축을 이렇게 네 명의 이집트 유학생들이 차지하고 있다면, 다른 한 축에는 그들을 지도하는 교수님들의 애환을 그린다. 가장 먼저 1960년대 자유로웠던 혁명 시절 투사였던 의사 존 그레이엄 교수는 자본주의 굴레라고 생각하는 결혼도 하지 않은 채 혁명과 연구에 매진했다. 그 결과 60대 교수는 노년에 외로움을 벗으로 삼게 됐다. 우연히 만난 매력적인 싱글맘이자 흑인여성 캐럴 맥킨리와 그녀의 아들 마크와 살게 되면서 새로운 삶의 의미를 구가한다. 문제는 경제적 이유에서 시작되었는데, 흑인이라는 이유로 캐럴은 어느 곳에서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다. 그러니까 그녀는 극심한 인종차별이라는 구조적 모순의 희생자였다. 존의 동료 교수 조지 마이클은 그녀에게 모욕을 서슴지 않는다. 그녀가 친구 에밀리의 도움으로 속옷 모델이 되면서 존과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기 시작한다. 어느 가정에나 문제는 있다는 톨스토이의 말이 왜 이렇게 와 닿는 걸까.

 

두 명의 이집트 출신 교수들 가운데 한 명인 라으파트 사비트는 미국인으로 성장한 딸 사라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다. 조국 이집트를 잊고 완벽한 친미주의자로 변신한 라으파트는 사라가 왜 제프 같은 남자를 만나지는 알 수가 없다. 그를 따라 시카고의 악명 높은 우범지대 오클랜드로 가서 살겠다는 딸을 라으파트는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다. 사라는 결국 아버지의 충고를 따르지 않고, 제프의 권유로 ‘행복클럽’에 가입했다가 마약중독으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다.

 

무함마드 살라흐 교수의 삶 역시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미국인 아내 크리스와의 결혼 생활 중 아내를 성적으로 충족시킬 수 없었던 살라흐 박사는 정신과 치료가지 받게 된다. 치료상담 와중에 살라흐는 미국 여권을 얻기 위해 크리스와 결혼했다는 진실을 지적하고 불같은 화를 내뿜는다. 그는 왜 화를 냈을까? 그건 바로 상담의사가 진실을 토로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국 이집트를 떠나 미국 생활을 택한 것을 곧바로 후회하기 시작한다. 아내 크리스와의 별거는 시간문제였다. 아내 크리스는 ‘개량형 산토끼’라는 이름도 야릇한 기구를 이용하기 시작하고, 살라흐는 30년 전 연인이었던 카이로의 자이납에게 연락을 취한다. 카람 도스와 나지에게 설득당한 그는 후스니 무바라크의 미국 방문 중 그의 독재를 규탄하는 성명서를 발표해서 자신의 용기를 만방에 떨치려 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오래된 베레타로 자신의 삶을 마감한다.

 

콥트교도 출신 카람 도스 교수는 역시 자신의 석사 학위 취득을 방해하던 지도교수의 심장수술을 의뢰받는 드라마 같은 상황에 직면한다. 시카고에서 가장 실력이 뛰어난 자신의 손에 원수의 운명이 달린 것이다. 과연 그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자신의 앞길을 번번이 막아선 남자에게 복수를 할 것인가? 아니면 주님의 자비를 그에게 선사할 것인가. 작가가 마련한 이런 장치야말로 소설을 더욱 더 흥미진진하게 만드는 요소다.

 

카람 도스 교수와 격돌했던 나지는 그의 진심을 알게 된 후, 그와 협력해서 이집트 정부를 반대하는 투쟁에 나선다. 한편 매력적인 미국 여성 웬디 쇼어 양을 만나 그야말로 불같은 사랑에 빠진다. 문제는 그녀가 바로 유대인이라는 점이었다. 초반의 러브러브 모드는 좋았지만, 나지와 카람 도스 교수의 반정부 시위 계획을 알게 된 사프와트가 나지를 방문하면서 웬디와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자신 역시 사프와트의 농간으로 테러리스트 혐의자가 되어 미정보기관에게 잡혀 가는 신세가 된다.

 

치과 의사 출신 작가의 본업은 과연 의사인가 작가인지 궁금해졌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모두 문인 출신이었다는데, 손자 대에서 가장 화려하게 그 실력이 발휘된 게 아닌가 싶다. 알라 알아스와니는 냉철한 시선으로 현대 이집트가 처한 상황을 비판한다. 이집트가 직면한 후진성, 무지 그리고 빈곤을 끝내기 위해선 무바라크 정권의 장기 독재를 끝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아랍의 봄’ 이후 민주주의가 아랍에서 꽃을 피웠던가? 사우디에서 적극 지원하는 보수적 와하비즘이 사방으로 수출되어 오히려 민주주의가 고사된 건 아닐까? 조국의 도움을 받아 성공을 이룬 지식인들이 이제는 조국에 보답할 때라는 나지의 주장이 남다르게 들리지 않는다. 우리도 한 때 국가에서 인적 자원을 개발하기 위해 비용을 들여 국비유학생들을 만들지 않았던가? 그들이 과연 국가에 얼마나 공헌을 했는지 우리는 알 수가 없다.

 

미국이라는 공간에 진출한 이집트 사람들이 보통 사람일 수는 없다. 모두가 일단 지식인이라는 계급성을 담보한다. 어떤 이들은 미국 사회를 칭송하면서 아예 조국을 잊고 미국인으로 살아가는 방식을 선택했다. 자이납 같은 인사들은 조국에 남았지만, 달라진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책의 어디선가 읽은 자본주의가 지닌 자구력이 체제의 몰락을 막아냈다는 지적은 상당히 날카로운 분석이었다. 독재정권에 부역하는 이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실제적인 이집트의 지배자라며 전횡을 일삼는다. 그것을 참지 못하는 이들은 결연히 행동에 나서지만, 그것은 마치 부처님 손바닥을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부역자들에게 사전에 감지되고 이집트의 동맹국 미국 정보기관원에게 잡혀간다. 그렇게 모든 것은 원점으로 회귀한다.

 

지금까지 알아스와니 작가는 모두 5편의 소설을 발표했다. 2002년에 발표한 <야쿠비얀 빌딩>이 두 번째 그리고 2007년에 나온 <시카고>가 그의 세 번째 소설이었다. 그 후에도 두 권의 소설을 더 발표했는데, 속히 그의 책들이 한국에 소개되길 바란다. 2013년 발표한 <자동차 클럽>을 기대해 본다. 일단 한 번 읽어 보시라, 알아스와니의 매력에서 빠져 나올 수가 없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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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19-02-19 11: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알아스와니의 매력에 대한 코멘트에 완전 동의합니다!

레삭매냐 2019-02-19 11:17   좋아요 1 | URL
알아스와니의 다른 책들도 출간
되면 얼매나 좋을까요...

이집트 상황도 80년대 한국과
비슷하지 않았나 싶네요.

coolcat329 2019-02-19 12: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스트에 추가 안 할 수가 없네요.

레삭매냐 2019-02-19 13:21   좋아요 1 | URL
후회하시지 않을 거라 믿슙니다 !!!
 
야쿠비얀 빌딩 을유세계문학전집 43
알라 알아스와니 지음, 김능우 옮김 / 을유문화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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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 블로거님이 이 책을 읽었다는 글을 읽고서 부리나케 서가에서 알라 알아스와니의 <야쿠비얀 빌딩>을 찾았다. 4년 전에 5,200원 주고 산 책이었다. 그런데 알아스와니의 <시카고>가 집에 있는지 없는지 도대체 기억이 나지 않는다. 사지 않았다면 당장 도서관에 가서 빌려 오거나 사던가 해야겠다. 그 정도로 재밌게 읽었다는 말씀이다.

 

이집트 카이로 출신의 알라 알아스와니는 미국 유학파 출신 치과의사로 변호사집 아들이다. 이 작가는 이집트가 처해 있는 모든 만악의 근원을 군부독재에 있다고 진단한 모양이다. 1934년 부유한 아르메니아 사람이 파리의 어느 건물을 복사하다시피 해서 직은 야쿠비얀 빌딩에는 이집트의 복잡다단한 현실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가장 먼저 등장하는 프랑스 유학파 출신 자키 베 알두수키는 1952년 가말 압델 나세르의 혁명 이전 시기를 기억하는 서구식 사고방식을 가진 신사다. 그의 관심사는 오로지 여자뿐이다. 어떻게 보면 호색한이라고 볼 정도로. 그렇다고 해서 무지막지한 방식으로 여자들을 취하지는 않는다. 어디까지나 신사다운 방식으로 그녀들에게 접근한다.

 

야쿠비얀 빌딩을 지키는 수위의 아들로 등장하는 타하 알샤들리의 경우는 이집트의 구조적 시스템 때문에 인생을 망친 경우다. 경찰 대학 진학을 꿈꾸던 청년은 자신이 문지기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면접에서 탈락하는 고배를 마신다. 그러니까 이집트 역시 기득권층의 나라였던 것이다. 경영 대학에 진학했지만, 더 이상 인생설계 따위는 그에게 의미가 없어진 지 오래다. 신앙심 깊은 청년은 자연스레 이슬람주의로 경도되고, 때마침 시작된 걸프전에서 이라크의 동료 무슬림들을 핍박하는 데 동원된 이집트 정부를 비판하다가 보안대에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한 뒤, 이제는 아예 지하드 전사가 되어 자신에게 모욕을 가한 이들에게 처절한 복수만을 꿈꾼다. 주인공 중에서 가장 극적으로 변신하게 되는 캐릭터다.

 

타하의 여자친구로 등장하는 부사이나 알사이드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너무 이른 나이에 세상을 알아 버린 신여성이다. 상업학교를 졸업한 부사이나는 순수한 청년 타하와 사랑에 빠지게 되지만, 타하가 그녀의 경제적 곤란을 해결해 주지는 못한다. 그리고 그녀가 취업하는 거의 모든 직장의 상사들을 그녀의 육체를 탐한다. 처음에 그녀는 자신의 순결을 지키려고 노력하지만, 어머니의 공모에 가까운 협박으로 치욕적인 돈벌이에 나서게 된다. 그러다가 만난 자키 베와 진정한 사랑에 빠지게 된다.

 

자키 베의 충실한 비서로 가장한 아바스카룬과 말라크 형제는 또 어떤가. 한 꺼풀만 벗겨 놓고 보면 거의 악당에 가까운 캐릭터가 아닐 수 없다. 상대방의 호의를 이용해서 자신의 사익을 추구하는 전형적인 기회주의자의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성공한 기업가 행세를 하다가 국회의원직을 돈 주고 사는 하즈 무함마드 앗잠도 마찬가지다. 이 파렴치한 노인네는 늘그막에 바람에 들어 넘치는 성욕을 주체하지 못하고 두 번째 장가를 들게 된다. 그렇게 계약결혼한 매력적인 과부 수아드와 혼전 계약서를 작성하는데, 그의 관심은 오로지 자신의 욕구를 채우는 것이다. 그의 실체는 마약 암거래상이었는데, 계속되는 성공에 자신의 본분을 잊고 카이로의 진짜 실력자 어르신에게 도전했다가 봉변을 당한다. 뛰는 자 위에 나는 자가 있다는 사실을 잊은 풋내기 같은 실수였다.

 

마지막 퍼즐로 무슬림에서 엄격하게 금지된 동성애를 즐기는 하팀 라쉬드가 있다. 역시 부유하고 유력한 집안 출신의 중년 남자는 어린 시절 자신을 돌보지 않은 부모 덕분에, 자기 주변에 있던 동성애자 하인의 유혹으로 동성애자가 되었노라고 고백하고 한탄한다. 중앙 보안군 소속 청년 압두 랍부흐의 야성적인 매력에 반해 그를 애인으로 삼고, 경제적 지원을 미끼로 지속적인 쾌락을 추구한다. 멈출 수 없던 하팀의 욕망은 종말에 가서 파국으로 끝이 나게 되는데, 먹물의 속물근성을 알라 알아스와니는 정확하게 짚어낸다.

 

저자는 아랍의 봄시위로 30년 권좌에서 물러난 호스니 무바라크 시절을 관통하는 야만의 시대를 있는 그대로 비판한다.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은 민주주의가 그들의 종교와 상극이라고 선전한다. 현실에 대한 젊은이들의 분노를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한다. 소수 지배계급의 엘리트가 좌지우지하는 이집트 국가의 모습은 우리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헬조선이라는 말 속에는 열심히 일해도 정당한 보상을 기대할 수 없다는 절망이 내재되어 있지 않은가. 부사이나와 타하로 대변되는 이집트 청년들 역시 마찬가지다. 정치가 그들의 욕망을 해결해 주어야 하는데, 반대로 그들을 억압하고 옥죄는 장치로 작동한다. 도무지 가난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이들은 자산가의 후취로 들어가거나 정부가 되고, 동성애자의 애인이 되어 삶을 영위한다. 이것은 비극의 연대기인가 아니면 너무나 리얼한 현실의 기술인가.

 

하팀과 자키 베로 대변되는 서구 문물을 추구하는 지식인 계급의 위선 역시 마찬가지다. 혁명 이전의 호시절을 떠올리며 상류 계층의 커넥션과 자산을 배경으로 오로지 쾌락만을 추구하는 그들의 모습도 야쿠비얀 빌딩에 살면서 따뜻한 음식과 시샤 그리고 섹스를 탐닉하는 소시민들의 그것과 별반 다를 게 없다. 자고로 욕망이란 어느 지점에서 모두 만나기 마련이 아닌가. 그런 세기말적 에피쿠로스적인 쾌락지향주의가 가리키는 종착점은 언제나 허무가 아니었던가.

 

다수의 캐릭터들이 교차로 등장하면서 혼란스럽던 초반의 전개는 캐릭터들에 대한 적응이 끝나면서 흥미를 더해가기 시작한다. 중반을 지나자 걷잡을 수 없는 독서의 쾌락 레이스가 시작된다. 아니 그래서 타하는 과연 순교자의 길을 걷게 되는 걸까? 부사이나는 자키 베를 배신하고 말라크가 원하는 계약서를 수중에 넣을까? 아들을 잃고 상심한 압두는 하팀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자연스레 책장을 넘기는 손길이 분주해진다.

 

생전 처음 만나는 이집트 소설가의 이야기는 21세기 한국의 풍경과 매우 비슷해 보였다. 그래서 더더욱 구미가 동했는지도 모르겠다. 비극마저도 아우르는 소설의 재미와 리얼리티는 과연 압도적이었다. 서가에서 알라 알아스와니의 <시카고>를 찾지 못한다면 아마도 나는 다음 주에 그 책을 주문할 것 같다. 부디 내가 이전에 산 책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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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의 알파벳
시배스천 폭스 지음, 오숙은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12월
평점 :
절판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특별한 시기에 만나게 되는 책이 현재의 삶을 관통하기 마련이다. 나에게 지난주에 사서 읽게 된 시배스천 폭스의 책 <바보의 알파벳>이 그런 책이다. 가히 인생의 책이라 부를 만하지 싶다. 올해 <리옹 도르의 여인>으로 시배스천 폭스를 알게 되었는데 최애하는 작가로 삼아야지 싶다. <새의 노래>와 <초록 돌고래의 거리>도 속히 구해서 읽어야겠다. 다만 문제는 두 책 모두 절판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원서로 폭스의 최신간 <파리 에코>도 주문해야겠다.

 

어찌해서 <바보의 알파벳>을 나의 인생책이라 부를 만한지 썰을 풀어 보도록 하자. 프랑스, 전쟁, 로맨스 그리고 멜로드라마라는 주제에 있어 가히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저널리스트 출신 시배스천 폭스가 1992년에 세 번째로 발표한 소설에는 삶을 망라하는 모든 것이 들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탄생의 과정, 만남, 이별, 죽음, 사랑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주제들이 넘실거린다. 우리의 주인공 피에트로 토마스 러셀은 우선 영원한 이방인일 수밖에 없는 존재다. 그의 아버지 레이먼드 러셀은 2차 세계대전이 종반으로 치닫던 1944년 이탈리아 안치오 해변에 상륙해서 독일군의 치열한 방어전 와중에 부상을 당하고 후방으로 이송된다. 이렇게 폭스의 소설에서 빠지지 않는 전쟁 시퀀스로 소설은 시작된다. 시작부터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시작이 이 정도로 강렬해야지.

 

그렇게 후방에서 만난 19세 이탈리아 소녀 프란체스카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요건 좀 클리셰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전쟁 신부가 되어 러셀을 따라 영국으로 이주한 프란체스카는 아들 피에트로를 낳고 행복한 삶을 영위한다. 문제는 그녀가 암에 걸려 그 행복한 시절이 오래 가지 못했다는 점이다. 아 그리고 또 한 가지 말할 점은 소설 <바보의 알파벳>은 모두 알파벳 자수대로 26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시간과 장소를 오가며 마치 한 편의 퍼즐 게임을 맞추는 듯한 전개가 이어진다. 지금 당장 내가 전혀 모르는 사건이 등장한다고 해서 긴장할 필요는 없다. 작가가 치밀하게 구성한 내러티브가 이어지니 말이다.

 

아버지의 곁을 떠나 엄격한 훈육이 시행되는 기숙학교에서 유년시절을 보내며 평생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 소녀 로라를 만나고, 평생지기 해리 프리먼을 만나기도 한다. 어여쁘고 재능도 출중한 로라와 사랑에 빠지는 건 시간문제였을까? 시간의 더께를 가지고 성장한 사람이 그렇지 못한 벨기에 출신 부르주아 계급의 아가씨 한나와 결혼한 점도 삶의 아이러니를 반영하는 것일 게다.

 

피에트로는 자신의 정체성만큼이나 영원한 이방인일 수밖에 없다. 아버지 러셀이 집착적으로 몰두하는 어원학에서 유래했을 지도 모를 A에서부터 시작해서 Z까지 이어지는 어떤 공간들이 순차적으로 배열되는 목차를 보고 나도 소설에 등장하는 도시들 가운데 몇 군데나 가보았는지 꼽아봤다. 로마, 파리, 뉴욕, 주룽 그리고 잠깐 거쳐 갔던 소렌토까지 하면 5곳이었다. 엑셀로 나도 한 번 소설의 궤적을 기록해보려고 했지만 어차피 다 완성하지 못할 바에야 그게 무슨 의미인가 싶어서 그만둬 버렸다. 난 참 포기도 빠른 인간이다. 여하튼 간에 폭스가 그리는 기억의 연대기는 정말 흥미진진하고 내 삶을 대입해 봐도 유사한 궤적들을 찾을 수가 있어서 더욱 더 애착이 가지 않았나 싶다. 바로 이런 책이야말로 인생책이라 부를 만한 게 아닌가.

 

한국사람 가운데 과연 여행을 떠나면서 책을 챙겨 가는 이들이 몇이나 될지 궁금하다. 서구 작가들의 책을 읽다 보면 어디서고 책이 등장한다. 산책하지 않는 시간에는 여행지에서 책을 읽는 게 너무나 당연한 풍경 중의 하나다. 영국에 가서 찰스 디킨즈의 <데이비드 코퍼필드>를 아마 구입해서 다시 읽었지 싶다. 아니 여기서 또 포인트는 새로 읽은 것이 아니라 다시 읽었다는 점일 것이다. 나같은 책쟁이들이 절대 놓칠 수 없는 지점이 아닐 수 없다. 도무지 평생 갈 일이 없을 것 같은 Q로 시작하는 과테말라의 케찰테낭고에는 왜 갔을까? 로라와 미국 캘리포니아의 어느 해변에서 이별하고 그대로 차를 달려 멕시코 국경을 넘어 케찰테낭고에까지 간 것이다. 그곳에서 이탈리아계 영국인 피에트로는 현지 주민들에게 한낱 부유한 그링고처럼 보이지 않았을까. 어느 궁금증에 대한 호기심을 살살 달래 주는 작가의 실력 역시 감탄할 만하다.

 

누구처럼 강박적인 독서가 아니라 때가 되어 읽고 싶다는 주인공 피에트로의 변명 아닌 변명도 마음에 든다. 교과서에 나오기 때문에 혹은 시험을 잘 치르기 위해 책을 읽는 게 아니라 독서의 진정한 쾌락을 깨달은 이들만이 할 수 있는 지경에 도달했단 말인가. 내가 아마 이 책을 이십대에 읽었더라면 절대 인생책으로 치부할 수 없었으리라. 죽음이나 육아 혹은 친구를 배신하고 물질을 추구해야 하는 갈림길 같은 삶의 어느 지점에서만 고유하게 느낄 수 있는 나이가 되어야만 작가의 의도를 깨달을 수 있다는 걸 나는 알게 됐다. 프랑스 휴가 중에 산악자전거를 타고 가족과 만났지만, 첫째 딸 메리가 없어져서 애타게 찾는 와중에 자신이 상상한 끔찍한 결말이 차라리 빨리 왔으면 하고 생각하는 고뇌를 애를 길러 보지 않은 사람이 도대체 어떻게 공감할 수 있단 말인가. 모든 것에는 때가 있는 법이다.

 

미국 에번스턴에서 만나 사진작가 피에트로에게 옵션으로 많은 돈을 벌 수 있게 해주겠다며 친구를 배신하라고 종용하는 어느새 상사가 된 폴 콜먼의 유혹은 또 어떤가. 아무리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돈이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평생기지를 배신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자신을 유혹하는 맘몬을 밀쳐내고, 사표 받을 준비를 하라는 피에트로의 결기에 통쾌한 느낌이 절로 솟아났다. 해리 가족과 여행에서 마사의 질문에 피에트로가 머뭇거린 건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구나. 참으로 멋진 내러티브의 전개다.

 

분쟁의 코어 예루살렘을 방문한 피에트로와 해리가 현지 유대인들과 벌이는 정치적 대화도 작가의 저널리스트다운 접근 방식을 보여준다. 현지 유대인의 의식을 대표하는 몇몇 이들이 원래 그곳에 거주하던 팔레스타인 사람들과의 공존을 인정하지만, 그들은 요르단이나 시리아 같은 나라의 국적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다. 그리고 그들이 예루살렘과 팔레스타인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자기 유대인들이 그곳을 그렇게 비옥한 곳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라는 기상천외한 주장을 펼친다. 천년 넘게 조상 대대로 살아온 곳을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이방인들이 그 옛날 아브라함이 하나님에게 받은 자신들의 땅이라며 영주권을 주장하는 게 더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까. 다시 한 번 그곳에서는 어떤 해결책도 쌍방에게 받아들여질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콜롬보에서 싱할라족과 타밀족이 겪는 갈등에 대해서는 예전에 송도에서 만난 국제기구에서 일한다는 스리랑카 아저씨와의 대화가 떠오르기도 했다. 타밀 일람 호랑이에 대해 이야기하자 그 아저씨는 무척이나 놀랐었지 아마.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는 데는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피에트로의 할아버지 만한 끈이 없었으리라.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세계대전에 참전한 러셀 가문이라. 유럽의 18세에서 30세에 이르는 청년들의 30%가 전장에서 전몰되었다는 끔찍한 사실에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한 세대의 1/3이 세계대전에서 아무런 의미 없는 보몽이나 티에프발 같은 참호전에서 사라져 갔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왜 우리 세대에 반전이 필요한 지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있을까.

 

그렇다고 시배스천 폭스가 삶이나 죽음 혹은 예루살렘의 정치적 문제 혹은 세계대전 같은 거창한 주제들만 다루는 것도 아니다. 어머니와 함께 한 이탈리아 소렌토 여행길에 식사를 하던 리스토란테에서 “엄청난 양의 밥이 실망스럽게도 일정한 색”을 띠고 있었다느니 “치즈가 거미줄처럼 숟가락에 달라붙어” 있었다는 디테일은 또 어떤가. 콜먼 휘하에서 일하는 각종 풍문과 스캔들이 난무하는 진원지에 대한 이야기나 매점에 팔리는 샌드위치의 푸르스름한 빛이 나는 “다진 정어리와 참치 마요네즈”나 재가공된 햄으로 보이는 푸석푸석한 살코기들을 나사못처럼 보이는 것으로 연결하고 있다는 묘사는 정말 대단했다.

 

소설은 A 이탈리아의 안치오에서 시작해서 Z 이탈리아의 차니카에서 끝난다. 그것은 피에트로 인생의 기원이 되는 알파와 오메가였던 것이다. 처음에서 시작해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끝내는 종결은 작가의 탁월한 선택이었다. 이보다 더 멋진 결말을 기대할 수 있을까.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 같다.

 

나도 이제 소설 속의 피에트로보다 어쩌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 삶에 대한 욕심이 더 많아졌는지도 모르겠다. 책의 어디선가 만난 질문이 계속해서 뇌리를 때린다. 당신은 인생을 즐기고 있는가라는. 좀 더 많은 시배스천 폭스의 책을 읽어야겠다. 결론은 슈퍼그뤠잇!!!


[뱀다리] 너무 급하게 리뷰를 적다 보니 사진작가 피에트로의 사진 이야기를 빼먹었구나. 그의 행적을 쫓다 보니 예전 흑백필름 현상과 인화를 배우던 시절 생각이 문득 났다. 그전에도 무지 사진을 찍었었지만, 언제고 기회가 되면 현상/인화를 배우고 싶다는 욕망을 실현시킬 수가 있었다. 첫 번째 유럽여행에 가서 찍은 흑백사진들을 현상액을 잘못 부어 망친 일들, 암실 대신 암실옷(?)을 입고 캐니스터에 필름을 감다가 그만 빛을 쬐어 날린 경험들이 <바보의 알파벳>을 읽는 동안 오롯이 피어올랐다. , 치열했던 나의 어느 한 시절을 떠올리게 해준 것만으로도 독서한 보람을 느낄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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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나무 2019-02-12 11:4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 리뷰때문에 처음 알게 된 작가인데 의뢰로 번역되어 있는 책들이 좀 되는군요.
슈퍼그뤠잇인 이 소설은 절판이나 품절이 아니라서 정말 다행입니다. ㅎㅎㅎㅎ

레삭매냐 2019-02-12 11:50   좋아요 2 | URL
폭스의 책이 무려 18권이나 되는데...
국내에 번역된 건 꼴랑 5권이랍니다.

그나마 두 권은 절판, 오늘 초록 돌고래
중고서적으로 주문 날렸습니다.
상태가 좋은 녀석으로 와야 할 텐디...

<파리 에코>도 읽어 보고 싶네요.

목나무 2019-02-12 11:57   좋아요 1 | URL
이 작가의 다른 책들에 대한 레삭매냐님 리뷰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서니데이 2019-02-13 20: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있으면 조금 더 책을 읽고 싶을 때가 있어요.
여행을 떠날 때도 그렇고요. 재미있는 책으로 챙겨가지만, 많이 읽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가방속에 넣고 가고 싶은 마음 때문인 것 같아요.
리뷰 잘 읽었습니다.
레삭매냐님, 따뜻한 저녁시간 보내세요.^^

레삭매냐 2019-02-13 21:04   좋아요 1 | URL
저도 2013년 여름 캄보디아/태국 여행 길에
욕심에 책을 한껏 가져 갔었지요.

피피섬으로 가는 배 위에서 그 험한 풍랑이
넘실거리는 데도 눈이 빠져라 책을 읽어서
주변 사람들이 다 놀랐던 기억이...

그 책이 바로 정영문 작가의 <어떤 작위의
세계>였었는데 아직도 못 다 읽었네요...

감사합니다 -

뒷북소녀 2019-02-14 12: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또 절판. 왜 레삭매냐님이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작가들의 책은 모두 절판인거죠?ㅋㅋㅋ

레삭매냐 2019-02-14 13:40   좋아요 0 | URL
그러게나 말입니다. 쉽게 구할 수 있는 책들
이 하나 없네요.

멤포 지아르디넬리의 책은 구할 수가 없어
서 결국 책바다 서비스를 신청했네요. 너무
읽고 싶어서요.

글구 오늘 시배스천 폭스의 <초록 돌고래
의 거리>도 도착했답니다. 물론 바로 읽기
시작했구요...

카알벨루치 2019-02-14 13: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내가 모르는 작가를 넘 많이 아셔서 ㅜㅜ쩝

레삭매냐 2019-02-14 13:41   좋아요 1 | URL
뭐 저도 올해 알게 되어 읽은 작가인
걸요.

<리옹 도르의 여인>, <바보의 알파벳>
그리고 오늘부터 <초록 돌고래의 거리>
를 읽습니다.

기회가 되면 원서로 <파리 에코>도 만
나 보고 싶다는 작은 소망이 있답니다.
열린책들에서 도통 새로운 책 번역을
하지 않고 있네요.

카알벨루치 2019-02-14 13:49   좋아요 1 | URL
원서라....👍👍👍

레삭매냐 2019-02-14 14:03   좋아요 1 | URL
무언가 오해를 하심이...

원서는 모름지기 읽기용이 아니라
소장각으루다가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