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종말 전쟁 1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김현철 옮김 / 새물결 / 200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이제는 우파로 경도된 한 때 좌파 지식인이었던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세상 종말 전쟁> 1권을 읽었다. 19세기말, 브라질 바이아 지방의 카누도스라는 곳에서 벌어진 민중 봉기를 그린 소설이다. 이것은 역사인가 아니면 소설인가. 소설의 기본 골조는 역사적 사실을 따르면서, 디테일은 전적으로 작가의 상상력의 소산으로 보인다. 놀랍다, 어떻게 이런 상상이 가능할지. 선지자 안토니오를 따르는 일단의 가난하고 착취받는 민중들을 브라질 정부와 지주들은 광신자 무리라고 폄하한다. 선하신 예수님의 뜻을 따른다는 일명 야군소의 카누도스는 프루동이나 바쿠닌 같은 무정부주의자들이 서구 사회에서 주창한 이상적 사회주의와 맥을 같이 한다는 점에서 혁명가들을 매혹시킨다. 그 땅의 주인인 지주들에게는 당연히 원수 같은 존재일 테고. 공화주의, 공상적 이상주의, 광신적인 종교 추종자들을 비롯해서 어쩌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각자도생의 시대에 대한 축소판으로 읽을 수가 있을 것 같다. 500페이지나 되는 소설의 전반부를 읽어 내렸다.

1896년부터 이듬해 가을까지 벌어진 카누도스 전쟁의 본질은 과연 무엇일까. 오랜 가뭄과 재앙이 브라질 북동부 바이아 지방을 휩쓸었다. 노예제와 쿠데타에 이은 공화국 수립도 브라질 민중들의 삶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새로운 도량형의 도입, 혼인신고제와 세금 부과 등 근대 국가를 향한 브라질 중앙정부의 정책은 지방자치를 원하는 지주들과 대다수 농민들에게 반감을 불러 일으켰다. 훗날 카누도스 3차 토벌대 보병 제7연대의 지휘를 맡은 모레이라 세사르 대령은 공화국에 반란을 일으킨 세력을 무자비하게 진압하면서 살인마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시국이 이렇게 어수선하면 반드시 혹세무민하는 이들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일명 선지자라 불리는 안토니오는 카톨릭 사제를 비롯해서 그 어느 누구도 거두어 주지 않는 가난한 사람들과 소외 받은 이들 심지어 강도와 살인자 무리까지 ‘선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교화시킨다. 그의 존재를 받아들일 수 없는 지주 계급을 비롯한 기득권층은 그들을 광신자 무리로 부르면서 공화국의 위력을 보여 주기 위해, 카냐브라바 남작의 카누도스 농장에 자리 잡은 야군소들에 대한 토벌에 나선다.

 

그 과정에서 브라질의 강력한 중앙집권을 원하는 연방주의자들과 지방자치를 원하는 세력 간의 충돌을 비롯한 다양한 군상이 적나라하게 전개된다. 에파미논다스 곤살베스라는 정치가는 스코틀랜드 출신 골상학자이자 프랑스와 에스파냐에서 무정부주의 혁명가로 활동한 갈릴레오 갈에게 카누도스 야군소들에게 서구에서 들여온 최첨단 무기를 공급하라는 밀명을 내리고, 다른 부하들을 시켜 외세(영국)가 개입했다는 조작을 꾸민다. 놀랍지 않은가.

이런 정치협잡꾼과 모레이라 세사르 대령 같은 광신적 애국주의로 무장한 이상주의자가 토벌대 측에 서 있다면, 반대측에는 선지자 안토니오를 필두로 해서 브라질 민중계급을 대표하는 선수들이 포진해 있다. 백인 지주를 죽이고 야군소 무리에 들어온 사탄 조앙을 필두로 해서, 외곽에서는 전혀 카톨릭 사제 같지 않은 형상으로 카누도스를 지원하는 조아킴 신부, 온갖 불행과 역경을 딛고 물자관리와 조직에 능수능란한 솜씨를 발휘하는 안토니오 빌라노바 형제, 만인의 어머니로 거듭나게 되는 마리아 쿠아드라도, 서커스단에 팔릴 정도로 기구한 운명이지만 특별한 재능으로 선지자의 서기가 되는 나투바의 레온 그리고 카누도스 방어사령관으로 활동하는 조앙 아바데가 바로 그들이다. 이런 허접한 광신자 무리가 대포와 기관총으로 중무장한 정부군을 상대로 무려 3번의 승리를 거두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그들의 무기는 낫과 활 그리고 조잡한 엽총 정도가 전부가 아니었던가.

카누도스 민중 봉기의 실체를 파악하지 못한 정부군을 대표하는 모레이라 세사르 대령은 야군소 뒤에는 브라질의 값싼 사탕수수를 원하는 영국을 대표로 하는 군국주의자들이 버티고 있다고 판단한다. 그의 정세 판단은 반은 맞았고, 반은 틀렸다. 야군소들은 자생적 반군들이었다. 물론 바이아의 지주 계급을 대표하는 카냐브라바 남작 같은 경우, 반군과 정부군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모습도 보여준다. 구체제의 귀족 칭호를 사용하는 남작은 바이아 지방분권주의자들을 분쇄하기 위해 카누도스 반군을 이용하려는 중앙정부의 획책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모두가 반대하는 모레이라 세사르 대령에게 적극 협력하자는 의견을 밀어 붙인다. 하지만 1권의 말미에서 자신의 칼룸비 농장이 야군소들에게 의해 파괴되고 불타자, 우선 직면한 적인 카누도스의 반군을 일소하기 위해 세사르 대령이 지휘하는 토벌의 성공을 바란다. 과거의 적이 이제는 동지로 변하는 기묘한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스코틀랜드 출신 골상학자 갈릴레오 갈은 소설 <세상 종말 전쟁>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1871년 파리 코뮌에도 참가하고, 에스파냐에서도 혁명운동에 나섰다가 부르주아들에게 부상을 당하고 사형선고까지 받았지만 불사조처럼 살아남아 이번에는 신대륙으로 건너가 자신이 평생 꿈꿔온 이상적 공동체가 카누도스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으로 향한다. 도중에 에파미논다스가 파견한 자객에게 죽을 뻔한 위기도 넘기기도 한다. 그 와중에 길잡이 루피노의 아내를 범했다가, 원한은 산 최고의 추격자에게 추격을 당하기도 한다. 자신이 가장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다가 죽고 싶다는 혁명가의 말에 전율이 일었다.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가 구사하는 차원이 다른 다층적인 이야기의 근원에는 속죄와 구원에 대한 강렬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이들은 자신이 믿는 이상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투사한다. 믿음을 위해서라면 죽음도 불사한다. 그렇게 카누도스의 야군소들은 선한 예수님의 보살핌과 부활의 확신을 가지고 압도적인 적 앞에서 조금도 굴하지 않고 초개 같이 목숨을 내던질 수 있었던 것이다. 칼룸비를 파괴하기 전에 카냐브라바 남작에게 떠나라고 말하는 조앙 아바데의 부관 파헤우에게 전에는 살인자이자 약탈자가 아니었냐는 남작에 말에 다 지나간 일이라며 게릴라 전사는 당당하게 말한다. 구원의 확신을 얻은 자만이 그렇게 말할 수 있으리라. 꿈을 실현시키겠다고 마음 먹은 이상주의자들은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다는 갈과 남작의 대화는 또 어떤가. 우리 주변에 그런 이상주의자들이 아직도 존재하는지 나는 문득 묻고 싶어졌다. 자본의 위력에 순치된 겁먹은 어린양들만 보일 따름이다.

내가 보기에 광신적 쇼비니스트인 모레이라 세사르 대령 역시 마찬가지다. 조국 근대화라는 이상주의를 앞세운 대령은 공화국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을 악으로 규정하고 일소해야 한다는 믿음으로 항복한 포로에게도 일말의 자비도 베풀지 않는다. 그에게는 오로지 독재공화국만이 선일 뿐이다. 선지자 안토니오처럼 그 역시 가난한 민중에게 뜨거운 애정을 느끼고 있다는 점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그렇다면 모든 종류의 광신은 서로 일맥상통하는 게 아닐까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다만 자신이 바라보는 지향점이 다를 뿐.

장장 519쪽에 달하는 <세상 종말 전쟁> 1편은 모레이라 세사르 대령의 3차 토벌을 앞두고 아쉽게도 끝이 난다. 위키피디아와 구글 검색으로 통해 조사한 카누도스 전쟁사에 따르면 세사르 대령의 위풍당당한 3차 토벌 역시 야군소들의 승리로 끝난다고 기록되어 있다. 선지자 안토니오는 이미 네 차례의 토벌이 있을 거라는 예언을 했고, 첫 세 번은 무사히 넘길 수 있다고 말한다. 마지막은 오로지 신의 뜻에 달렸다고 했던가. 역사는 마지막 토벌에 나선 정부군이 최종 승리를 거두고 3만 명에 달하는 카누도스 민중들의 절반에 달하는 15,000명 가량을 학살했다고 전한다. 모든 전쟁 중에 종교전쟁이 가장 잔혹한 형태로 진행되었다는 것을 고려해 볼 때, 전쟁에 참가한 정부군이나 야군소들 모두 어떠한 태도를 가졌을 지 짐작해 볼 수 있다. 어서 2편도 읽어야겠다.


[뱀다리] 그나저나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신간은 왜 더 이상 나오지 않는 건지 궁금할 따름이다. 2010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뒤에도 요사가 책을 세 권이나 더 썼는데도 말이다. 아마 한국 출판시장에서 요사가 그만큼 영향력이 없다는 게 뭐 그런 생각이 들었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Falstaff 2019-06-28 13: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재미있게 읽은 책이라 깊히 공감하게 되네요. ^^

레삭매냐 2019-06-28 21:15   좋아요 0 | URL
다해서 천쪽이나 되는 대작이라
수년 전부터 미루다가 드디어 도전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명불허전입니다.

겨울호랑이 2019-06-28 18: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을 읽지는 않았지만 맹목적인 신념이 얼마나 무서운지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레삭매냐님의 글을 읽으면서 거의 같은 시기의 동학농민혁명이 떠오릅니다...

레삭매냐 2019-06-28 21:18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일찍이 에라스무스가 모든 종류
의 맹신에 대한 경고를 했더랬죠.

겨울호랑이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동시대
의 동학혁명도 있었네요. 문득 외국인이
우리 동학혁명에 대한 글을 쓴다면 어떤
느낌일 지 궁금해졌습니다.
 
카트린느 메디치의 딸
알렉상드르 뒤마 지음, 박미경 옮김 / 레인보우퍼블릭북스 / 2019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번 6월은 나에게 독서 슬럼프의 달인 모양이다. 읽기 시작한 책들은 부지기수인데 마무리를 짓지 못한 너무 많다. 제시 볼의 <센서스>를 필두로 해서, <그해, 여름 손님>, <그리스도는 에볼리에서 멈추었다>, <술꾼>, <악어와 레슬링하기> 그리고 <아일린>까지. 하지만 19세기판 막장 소설의 대가라는 알렉상드르 뒤마 선생의 <카트린느 메디치의 딸>을 읽으면서 슬럼프 탈출을 선언하게 되었다.

 

뒤마가 1845년에 발표한 <카트린느 메디치의 딸>은 1572년 뜨거웠던 8월의 프랑스를 시공의 무대로 한다. 소설을 읽기 시작하면서 파트리스 쉐로 감독이 1994년에 연출한 <여왕 마고>도 같이 보게 되었는데, 영화는 뒤마의 소설을 원작으로 해서 그런지 상당히 디테일까지도 소설의 전개를 따라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39세 이자벨 아자니가 20대 초반의 마고 역할을 무난하게 해냈다는 점이 정말 놀라웠다. 대니얼 오떼이유를 필두로 해서, 장 위그 앙글라드 그리고 벵상 페레 등 당대 한다하는 프랑스 배우들이 총출동해서 16세기 대하 드라마를 연출해냈다는 점이 정말 놀랍지 않은가. 영화의 스케일은 정말 대단했다. 소설의 리뷰인지 아니면 영화 리뷰인지 나도 헷갈릴 정도다.

 

루터의 신교개혁이 시작되고 카톨릭의 나라 프랑스도 종교개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발루아 왕조의 여명이 다해 가던 가운데, 선대 앙리 2세는 스페인 국왕의 왕비로 자신의 딸을 보내며 마상창시합을 하다가 상대방에게 눈을 찔려 황망하게 사망했다. 프랑스 궁정에서는 참 별 일이 다 있구나 싶을 정도다. 메디치 가문 출신으로 ‘검은 왕비’로 알려진 카트린느는 발루아 왕조의 영속을 추구하는 권력의 화신으로 그려진다. 사실인진 모르겠지만, 네이버 파워라이터 주경철 선생에 의하면 뒤마가 지나치게 카트린느 메치디에게 악녀 이미지를 뒤집어 씌운 것 같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카트린느 메디치는 구교도와 신교도의 평화를 도모했지만, 상 바틀레미의 학살로 알려진 신교도 위그노 학살에 국왕 샤를 9세와 카트린느 메디치의 책임은 지울 수가 없을 것 같다.

 

앙리 2세의 뒤를 이은 장남 프랑수아 2세마저 요절하고 차남 샤를 9세는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어머니 카트린느 메디치가 섭정직을 맡게 되었다. 카트린느는 나바르의 왕 앙리(신교도)와 자신의 딸 마르그리트(마고)를 결혼시켜 신교와 구교의 화합을 도모하는 동시에, 결혼식을 축하하기 위해 파리로 찾아온 신교도들을 몰살시킬 계획을 세운다. 뒤마는 구교도 대표로 카트린느와 전쟁영웅이자 그녀가 총애하는 세 번째 아들 앙주공 앙리 그리고 기즈 공작들을 배치하고, 다른 편에는 가스파르 드 꼴리니 제독과 나바르의 앙리 그리고 마고의 애인 라몰 공작을 차례로 등장시킨다.

 

상 바틀레미의 밤, 압도적 다수인 카톨릭 교도들은 국왕 샤를 9세의 묵인 하에 신교도 학살을 시작한다. 화승총과 검 그리고 창 같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무기들로 남녀노소할 것 없이 신교도들을 학살한다. 이미 카트린느가 고용한 자객 모르벨의 총에 맞은 꼴리니 제독은 창 밖으로 내던져지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기즈 공작이 그를 죽인다. 한편, 나바르의 앙리는 자신을 따르는 수하들이 살해당하는 동안 샤를 9세를 비롯한 발루아 앙굴렘 집안의 유력자들에게 호소해서 결국 살아남는데 성공한다. 심지어 그는 카톨릭으로 개종도 마다하지 않는다. 정치적 동맹자가 되기로 결심한 마고는 가족들을 간신히 설득시키는데 성공한다. 이제부터 훗날 살리카 법에 따라 앙리 3세(앙주공 앙리)의 뒤를 이어 부르봉 왕조의 시조가 되는 앙리의 생존기가 시작된다.

 

여느 기독교도와 달리 흑마술이나 주술에 집착하는 카트린느는 자기 가문의 최대 숙적이 나바르의 앙리라는 사실을 깨닫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사위를 죽이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앙리의 애인 샤를로트의 입술에 독이 묻은 제제를 발라 죽이려는 시도부터 시작해서, 라몰의 이름이 적힌 매사냥 책까지 동원해서 앙리를 죽이려는 시도는 번번히 실패한다. 마지막 시도에서는 오히려 자신의 아들 샤를이 희생양이 되는 비극이 벌어지기도 한다.

 

뒤마는 상 바틀레미 학살사건이라는 역사적 사건과 실존 인물들을 바탕으로 <왕비 마고>라는 걸작 소설을 창조해냈다. 소설이 프랑스 궁정에서 벌어지는 추악하기 짝이 없는 음모와 배신의 드라마 그리고 신구교의 갈등이라는 정치적인 면모에 중점을 두었다면 영화는 라몰 백작과 마고의 로맨스에 비중을 두었다. 이제 막 결혼식을 치른 마고가 가면을 쓰고 거리에 나가 하룻밤을 지낼 남자를 찾는 장면은 소설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게 만난 운명적 연인들은 비극으로 치닫게 되지 않던가.

 

영화에서 샤를이 그렇게 좋아하는 사냥에서 멧돼지에게 물려 죽을 지도 모를 상황에, 앙리가 등장해서 단검으로 멧돼지의 숨통을 끊고 샤를을 구해내는 장면은 정말 최고였다. 소설에서는 카트린느가 매사냥 책에 바른 독 때문에 죽어가는 샤를이 자신의 사후 프랑스 섭정권을 앙리에게 넘기겠다는 결정을 카트린느에게 들려주며 갈등하는 장면도 영화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라몰과 코코나의 우정에 대한 개연성이 영화에서는 좀 빈약하다고 생각되는데, 소설에서는 좀 더 진중하게 진행된다는 느낌을 받았다. 구교도 코코나와 신교도 라몰이 서로를 이해하고 결국 나중에 가서는 죽음까지도 함께 한다는 우정에 대한 뒤마식 해석이 구시대적이긴 하지만 매력적이었다. 문제는 이번에 출간된 <카트린느 메디치의 딸>이 완역이 아니라는 점이다. 아무래도 축약본이다 보니, 군더더기 없는 빠른 전개는 일품이었지만 디테일에서는 좀 실망스러웠다고나 할까. 첫 페이지에 나오는 나바르 공화국이란 번역을 보고 식겁하기도 했다. 아니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려면 200년도 더 있어야 하는데 왠 공화국?

 

뒤마의 <카트린느 메디치의 딸>은 상 바틀레미 학살이라는 당대 첨예하게 맞붙었던 신구교의 갈등은 물론이고, 봉건제에서 중앙집권제국가로 변화해 가던 프랑스 시대상을 보여준다. 인간이 종교와 신의 이름으로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소설/영화는 적나라하게 그리고 있다. 권력에 눈이 먼 발루아 가문의 남자들과 카트린느 메디치는 온갖 추악한 방법을 동원해서 매부이자 사위인 앙리를 제거하려고 노력한다. 신교도의 수장 앙리 역시 살기 위해 종교를 바꾸고, 나바르로 탈출해서는 다시 원래 신교로 그리고 다시 프랑스 국왕이 돼서는 국가를 통치하기 위해 카톨릭이 되는 팔색조 같은 변신을 거듭한다. 이렇게 다양한 군상들이 빚어내는 희비극의 드라마가 재미있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하지 않을까.

 

레인보우퍼블릭스에서 출간된 <카트린느 메디치의 딸>의 가격은 매우 착하다. 책의 판형이나 디자인도 나쁘지 않다. 다만 번역에 대한 의구심과 판본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다는 점이 아쉽다. 나중에라도 완역이 나오게 된다면, 다시 한 번 읽어보고 싶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yrus 2019-06-24 17: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90년대에 <마고 왕비>라는 제목으로 두 권짜리 번역본이 나왔어요. 헌책방에서 산 책인데 아직 안 읽어봤어요. 제가 가지고 있는 번역본도 완역인지 아닌지 의심이 드네요.. ^^;;

레삭매냐 2019-06-25 10:16   좋아요 0 | URL
아마 그 책은 완역으로 보입니다.
분량이 적잖으니 말이죠...

초역으로 생각했었는데 그전에 한 번
나온 책이었군요. 역시 싸이러스 브로
파워!!!

2019-06-24 18: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삭매냐 2019-06-25 10:17   좋아요 0 | URL
날도 덥고 하여서 그냥 이번 달에는
무리하지 않고 손 가는 대로 읽기로
했답니다.

권수가 늘어날수록 헛된 욕심을 부
리게 되더라구요...
 


 

오늘 아침, 어느 신문에 실린 통일보다 경제가 우선이라는 글을 읽고 나서 글을 쓰고 싶었는데 어느새 밤이 되어 버렸네 그래.

 

그 칼럼니스트의 말대로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를 줄창 불러대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왜 통일이 소원인 지도 모르고 그냥 그 노래를 부르곤 했었다. 어릴 적 뇌리에 새겨진 멜로디는 여전한 파워를 자랑한다. 지금도 얼핏 가사가 생각나는 걸 보면 말이다.

 

두 번의 보수정권 시절을 지내면서 공동체 의식은 철저하게 파괴되었고, 각자도생의 시대가 바야흐로 도래했다. 어떻게 보면 자신보다 약자인 아파트 경비하시는 분들을 두들겨 패고, 서로 상충하는 이해를 대화보다 물리력을 동원해서 해결하려는 그런 움직임들이 각자도생의 시대가 초래한 부작용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돈이면 안되는 게 없다는 생각들, 언론을 장식하는 각종 대형 범죄들도 돈으로 무마할 수 있다는 의식이 은연 중에 만연된 게 아닌가 뭐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다시 통일 이야기로 돌아가서, 칼럼니스트는 독일의 예를 들면서 서독의 경제가 동독의 그것을 압도하면서 결국 통일에 이르게 되었다는 신자유주의자들의 논리를 맹신하는 스타일의 논리를 전개한다. 하지만 나는 그의 시각이 외눈박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독일 통일의 요건이 오로지 서독의 압도적인 경제력 뿐이었을까? 서독의 우세한 경제력은 통일의 한 요소일 따름이었다. 우선 서독은 1945년 패전 이후, 그 어느 나라보다 강력한 과거사 청산을 이뤄냈다. 우선 국가운영을 맡은 고위 공직에서 나치 전범들이 설 자리가 없었다. 히틀러의 혹독한 국가사회주의 독재를 경험한 국민들은 다시는 극우 세력이 발붙일 수 없도록 국가 시스템을 정비하는데 성공했다. 그렇게 재정비된 독일식 민주주의는 지금까지도 민의를 대변하는 시스템으로 많은 나라들의 지표로 작동하고 있다.

 

동방정책의 선구자 빌리 브란트 총리가 이끄는 서독은 동독 주민들과의 교류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서독 사람들은 자신들이 만들어낸 민주주의 체제의 우월성이 동독의 공산주의를 압도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이런 점들이 45년 분단의 딛고 마침내 통일을 이룩해낸 원동력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를 살펴보자. 36년 일제 지배의 잔재를 청산했던가. 패전국이 아님에도 우린 독일과 같은 과거사 청산을 이루지 못했다. 헌법기관이었던 반민특위의 실패가 단적인 예일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우리는 두 번의 걸친 군사 쿠데타로 혹독한 독재를 경험했다. 독재자들은 당연히 북한과의 체제 경쟁에서 자신이 없었고, 북한 주민과 교류한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었다. 북한과의 적대적 공존이 자신들에게 유리하다는 걸 깨달은 수구 기득권 세력은 분단의 고착화에 매달렸다. 그 결과 분단 74주년을 맞는 올해도 우리에게 통일은 요원하기만 하다.

 

기술력으로 세계를 제패한 최고의 제조강국이라는 독일도 통일 후유증을 극복하는데 어마어마한 재원과 한 세대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민주주의 시스템은 말할 것도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한숨만 나올 따름이다. 함께 사는 세상이라는 소소한 공동체 의식마저 사라져 가는 마당에, 수십 년 떨어져 살아온 같은 민족에 대한 감정이 어느 날 느닷없이 다가온 난민에 대한 거부감과 과연 무엇이 다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뱀다리] 비슷한 시기에 검찰총장 후보자에 대한 카더라 뉴스를 기명 칼럼으로 쓴 소설가 뺨치는 칼럼니스트의 패기에도 다시 한 번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들은 그냥 지인들과의 술자리에나 어울리는 게 아닌가. 깜도 되지 않는 이야기를 공공 대중이 읽는 기명 칼럼으로 발표하다니, 정말 놀랍다. 자신이 아는 부장판사가 없는 이야기를 하지 않을 거라는데, 그보다 훨씬 더 윗급의 전직 대법원장이 상상을 초월하는 사법농단으로 재판을 받고 있는 걸 보면서도 그런 말을 할 수 있나 싶다. 2019년 쉬르리얼리스틱한 대한민국의 한 단면이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2019-06-21 06: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삭매냐 2019-06-25 10:15   좋아요 1 | URL
역발상으로 문제에 접근해야 하는데
항상 돈만 보는 천박한 천민자본주의
식 사고가 문제인 것 같습니다.
 

 








 

 

 

 

 

 

 

이번에 새로 쿳시의 <철의 시대>가 나온 모양이다. 작년 봄, <페테르부르크의 대가>를 필두로 해서 그전에 들녘에서 나오던 쿳시의 책들이 재개정판으로 나오는 중이다.

 

그리고 보니 <페테르부르크의 대가>는 읽다 말았네. 어디 그런 책들이 한둘이던가.

 

마저 다 찾아서 읽어야 하는데, 쫌 귀찮다. 새로운 책들이 계속해서 나오니.

 

작년인가 쿳시의 책들을 좀 읽어 보겠다고 일단 책부터 수집하기 시작했다. 나의 고질병 중의 하나. 뭐 그래도 이언 매큐언의 케이스는 성공했으니. 로쟈 선생이 다음달에 영종하늘도서관에서 매큐언의 <체실 비치에서>와 <칠드런 액트> 강의를 한다고 하던데, 가보고 싶다. 아마 못가게 되겠지. 방법이 없을까나. 그럼 책을 다시 읽어야 하나.

 

<철의 시대>도 그렇게 이미 수집해 놓았던 터라, 오늘 아침에 엉망진창 서가에서 찾아내서 바로 읽기 시작했다. 나는 요즘 나오는 반양장보다 예전 들녘 버전의 양장이 더 좋다. 나는 말이 필요없다 무조건 양장이다. 난 책이 쩍쩍 갈라지는 페이퍼백은 정말 싫다규.

 

새로 나오는 쿳시의 책들은 모두 왕은철 교수가 번역을 맡은 모양이다. 일단 한 역자가 한 작가의 책을 번역하는 건 찬성이다. 다만, 과연 재개정판에서 얼마나 기존 버전과 달라졌는 지는 사실 좀 궁금하다. 이거 울궈먹기 아냐하는 의구심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네. 그렇다고 새로 나온 책과 하나하나 대조해 가면서 볼 그런 로열티는 전혀 없고. 뭐 그렇다고.

 

어젯밤까지 모시페그의 <아일린>을 읽고 있었는데, 쿳시의 <철의 시대>로 다이빙해 버렸다. 사실 후자는 좀 더 땡기니. 게다가 소장하고 있던 책이라 나의 서가파먹기 프로젝트로서도 그만이지 않은가. 중고서점에서 4,000원 그야말로 별다방 아메리카노보다 적은 가격으로 데려온 모양이다. 아마 10% 할인 받아서 더 깎아서 샀겠지. 적립금으로 산 책이라면 공짜인 셈 아닌가.

 

날이 덥다. 모기가 출몰하기 시작했다. 이제 여름이 훌쩍 와 버린 모양이다.

 

[뱀다리] 아침 출근 길에 한 20쪽 정도 읽었는데, 어라 이 책 재밌네. 만사 제쳐두고 이 책부터 읽게 될 것 같다. 아 그리고 아직 사지 못한 쿳시 선생의 책들이 또 뭐가 있나 뒤져 보는 중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목나무 2019-06-13 10: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재밌어요? 저도 저 책을 어디에선가 구해놓고는 잘 모셔만두었는데....ㅋㅋㅋ
중고서점에서 <페테르부르크의 대가>와 <철의 시대>를 잘 데리고는 왔는데 읽지 않는 사이 새단장을 한 책들을 보니 그게 또 욕심이 나고. ㅎㅎㅎㅎ;;;;
리뷰 기다리겠습니다~ ^^

레삭매냐 2019-06-13 11:51   좋아요 1 | URL
작년에 사서 묵혀 두었다가 오늘 아침
에 꺼내서 읽기 시작했는데 흥미진진하네요...

이제 얼핏 쿳시 작가의 스타일이 보이는
그런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우리는 왜 책을 사서 읽지 않고 묵혀 두는
건지 고 점이 궁금해졌습니다...

stella.K 2019-06-13 14: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이 재밌습니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매냐님은 무슨 소설(전문)가의 독법이 느껴집니다.
아마 여느 소설가도 이렇게는 못 읽을 것 같습니다.
이참에 소설에 한 번 도전해 보시죠.
재밌는 책 만나면 신나죠. 사는 게 좀 났고.
그맘 저도 압니다.ㅋㅋ

레삭매냐 2019-06-14 10:57   좋아요 0 | URL
과찬의 말쌈이십...

근데 기분은 무지 좋습니다. 비행기
타는 기분이 이런 걸까요? 핫하

소설 쓰기, 참으로 매력적으로 들리네요.
다만 역량이 부족한 관계로 인하야 -0-
 
아리스토텔레스 - 에게해에서 만난 인류의 스승 클래식 클라우드 9
조대호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가 아는 아리스토텔레스는 누구인가. 위대한 정복자 알렉산더의 스승 그리고 플라톤과 함께 서양 철학의 시조 정도가 전부가 아닐까. 조대호 작가의 <아리스토텔레스>를 만나면서 좀 더 다층적인 위대한 지성의 면면을 접할 수가 있었다.

 

우선 책 표지의 등장하는 돌고래를 보자. 아테네의 플라톤 스쿨 아카데미아에서 근 이십년간을 보낸 아리스토텔레스가 레스보스 섬에 가서는 식물학과 동물학을 중점적으로 연구했다지. 아리스토텔레스 덕분에 레스보스 섬은 서양 생물학의 탄생지가 되었다. 철학자로만 알고 있던 천재적 지성의 알려지지 않은 면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한 컷이 아니었을까.

 

현재 그리스 제2의 도시 테살로니키 근처 스타게이라에서 기원전 384년에 태어난 아리스토텔레스는 마케도니아 궁정의 시의로 활동한 아버지 니코마코스 슬하에서 자랐다. 아테네 시민도, 마케도니아 왕국의 신민도 아니었던 아리스토텔레스 경계인 인생의 출발점이라고 해야 할까. 어린 시절, 아리스토텔레스의 모습에 대해 저자는 책벌레였다는 말로 위대한 지성을 표현한다. 아마 그는 열정적 독서가였던 것 같다. 그 시절에는 동양의 종이가 전래되지 않았으니 아마 파피루스 두루마리를 끼고 산 모양이다. 태생적 배경으로 그는 평생 친마케도니아 인사 취급을 받았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었을까.

 

스승의 플라톤 사망 직전에 아리스토텔레스는 반마케도니아 정서를 넘쳐나던 아테네를 떠났다. 아카데미아에서 학생으로 10년 그리고 강의자로 교육과 연구를 위해 10년을 보낸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처럼 자진 망명길에 오른 것이다. 스승이 그리스 세계의 서쪽 끝으로 갔다면, 제자는 동쪽 끝을 선택했다. 제자 시절부터 플라톤의 이원론적인 이데아를 추구하는 철학적 사변을 비판한 제자는 구체적 자연 현상에 대한 관찰을 주장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아소스의 참주였던 헤르마이오스에게 의탁해서 후원을 받았다. 24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지속적인 학문 연구를 위해서는 자금이 필요한 모양이다. 그런데 과연 아무런 대가 없는 후원이라는 게 가능할까? 그렇다면 자금을 대는 후원자도 연구자 못지 않게 학문을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자본주의 3.0 시대에 후원은 언제나 경제적 이득을 겨냥한 일종의 투자가 아니었던가. 어쨌든 아리스토텔레스는 헤르마이오스의 딸인지 조카인지 모를 퓌티아스와 결혼해서 부인의 이름과 동명의 딸을 낳았다고 한다.

 

사포의 고향으로 유명한 레스보스 섬에 머무르는 동안 500종에 달하는 동물들을 관찰하고, 철새의 이동과 태생 상어 같이 특별한 생물들에 대한 연구를 하면서 생명체의 사다리 모델 같은 현재 생물학과 견줄 만한 기록들을 남겼다. 물론 혼자 힘이 아닌 조력자 테오프라스토스(자신과 같은 거류민)의 도움을 받았다. 저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족적을 추적하는 과정 가운데, 그리스 부도 사태와 시리아 난민 그리고 지진 같은 일단의 사태들을 직접 체험하기도 했다. 특히 우연히 만난 이들에게서 그들 자신도 그리스-터키 전쟁 당시 난민이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는데, 그 점이야말로 세계시민으로서 우리가 난민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론과도 일맥상통하지 않을까.

 

뭐니뭐니 해도 아리스토텔레스 인생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바로 세계의 정복자 알렉산드로스의 가정교사였던 시절이 아닐까 싶다. 격정적 선동가 데모스테네스, 자연 현상의 탐구자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전제주의 국가 마케도니아의 필립포스 삼총사가 빚어내는 정치 드라마는 흥미진진 그 자체였다. 데모스테네스는 어떻게 해서든 아테네의 헬라스 세계의 맹주 자리를 되찾기 위해 전력투구했고, 대척점에 서 있던 필립포스는 마케도니아가 주도권을 행사하는 헬라스 세계를 꿈꿨다. 그 꿈은 아들은 알렉산드로스가 이루게 되는데, 더 나아가 젊은 정복자는 오랜 기간 동안 헬라스 세계를 압박하던 동방의 페르시아 제국을 징벌하기 위한 대원정에 나서게 된다.

 

그전에 앞서 알렉산드로스는 사사건건 마케도니아에 반기를 드는 테베와 아테네를 정벌하고, 스파르타는 고립시키는 작전을 구사해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한다. 한편 스승 플라톤이 추구하던 철인정치는 무력으로 패권장악을 기도하던 당시의 정치상황과는 전혀 맞지가 않았다. 게다가 세계정복자를 꿈꾸던 알렉산드로스에게 그런 여유작작한 이상적 정치론이 받아들여졌을 리가 없다. <호메로스>로 대변되는 그리스 영웅주의 핵심에 매료된 젊은 정복자에게 현명한 스승은 올바른 명예를 추구하는 방향 제시 정도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았을까.

 

결과적으로 알렉산드로스의 동방원정은 실패로 귀결됐다. 끝없는 정복전쟁에 염증을 느낀 그리스 병사들의 항명은 알렉산드로스의 첫 번째 실패였다. 그가 추구한 동화정책 역시 그리스 동포들에게는 먹히지 않는 원대한 이상이었다. 천재적 전략가가 추구한 미래의 원대한 꿈을 보통 사람들이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짧은 기간에 이룩된 제국은 그만큼의 속도로 붕괴됐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명 역시 전도유망했던 제자의 때이른 죽음과 함께 몰락하기 시작했다. 개인적으로 몇 권의 알렉산드로스의 전기 혹은 평전을 읽긴 했지만, 시간이 지나고 다니 기억들이 다 휘발해 버린 느낌이다. 왜 이렇게 새로운 거지.

 

솔직히 말해서 저자가 공들여 다룬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핵심을 이루는 4원인설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좀 더 탐구가 필요하다는 느낌이다. 책 한 권 읽었다고 해서, 타인의 이해가 내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로부터 비롯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천철학에 대해서도 상당히 할 말은 많지만, 나의 일천한 철학적 지식으로 분석하고 소화하기엔 역부족이라는 느낌 뿐이다. 인간 행동의 합목적성을 추구하는 아레테와 그렇게 확립된 목적을 실천하기 위한 실천적 지혜라니... 가까이 하기엔 아직 내겐 너무 먼 당신, 아리스토텔레스여.

 

서양 철학을 필두로 해서 과학과 정치학, 윤리학 거의 모든 학문의 시조로 추앙받는 위대한 지성에 대한 존경의 마음으로 이 책을 저술한 저자의 노고에 감사한다. 이상이다.

 


댓글(5)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yrus 2019-06-10 17: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리스토텔레스가 레스보스 섬에 갔다니 흥미로운 사실인데요. 레스보스 섬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가 고대 그리스 시인 사포가 있던 곳, 레즈비언들의 섬이거든요.. ^^;;

레삭매냐 2019-06-10 17:13   좋아요 0 | URL
저자도 레스보스 섬의 레즈비언 축제에 대해
이야기하더군요.

래스보스 섬이 서양 생물학의 탄생지라는 점
을 조대호 선생은 강조하더군요. 다양한 생물
들을 관찰할 수 있는 곳이 아닌가 싶네요.

뒷북소녀 2019-07-07 20: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 저도 읽어봐야겠어요.
처음에 표지에 돌고래 있어서 어떤 이유인가 했더니.

레삭매냐 2019-07-09 11:33   좋아요 1 | URL
철학 입문서로 아주 좋다는 평을
어디선가 들은 기억이 나네요.

전 철학에는 문외한인지라,,, 인물
위주로 읽었답니다.

뒷북소녀 2019-07-09 12:52   좋아요 1 | URL
우선 맛이나 보려고 도서관에 희망도서로 신청했어요.
읽어보고 괜찮으면 저도 소장해야겠어요.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