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범소설
미겔 데 우나무노 지음, 박수현 옮김 / 아르테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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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우연히 알게 된 에스파냐 출신 우나무노의 작가의 두 번째 책을 읽었다에스파냐의 대문호 세르반테스의 모범소설의 전례를 따른다는 듯이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그리고 나머지 세 개의 이야기들이 주르르 따라 붙는다.

 

서문에서 저자가 밝히는 세르반테스의 내면에서 유익한 모범을 끄집어낼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말에 주목하자언젠가 미래에 자신의 글을 읽게 될 이들에게 자신의 글이 그 어느 누구도 기만하지 않을 거라고 세르반테스는 보증한다그렇다면 자신의 문학적 시조 세르반테스를 신봉하는 지식인 우나무노 역시 에스파냐식 리얼리즘을 따르겠다는 선언인가.

 

또 하나 우나무노는 자신의 소설에서 삶과 현실에 대한 모범을 제시하겠다고도 한다지극히 대중소설의 그것을 따르는 방식이 아니었을까첫 번째 소설 <더도 덜도 아닌 딱 완전한 남자>에 나오는 절세미인이자 레나다 지방의 공식 미인(소설에는 항상 이런 미인이 등장하기 마련이지훌리아 야녜스의 아버지 돈 빅토리노는 그야말로 장사꾼의 전형이다그가 거래하고자 하는 품목은 다른 물건이 아닌 바로 자신의 공식 미인’ 딸이다그리고 훌리아는 자신의 아버지가 자신을 다른 남자에게 팔아먹으려고 벼른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아름다움이 그녀를 파멸시킬 것이라는 서두의 예언이 불길하게 다가온다.

 

애인과의 야반도주는 무산되고갑자기 등장한 아메리카에서 온 벼락부자 홀아비 알레한드로 고메스가 등장하면서 예의 통속 드라마는 질주하기 시작한다자신이 원하는 건 무엇이든 손에 넣는 남자알레한드로에게 훌리아는 썩 어울리는 전리품이었다그리고 한 때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던 에스파냐 최고의 미녀 훌리아는 점점 푸른 수염’ 전설의 주인공 같은 알레한드로에 매인 노예로 전락한다훌리아는 오로지 알레한드로가 자신을 사랑하는가 아닌가에만 관심을 집중시킨다훌리아를 전심으로 유혹하는 남자로 등장하는 보르다비에야 백작의 역할은 알레한드로에게 자신이 가진 영롱한 보석의 가치만 높여줄 뿐이다나라도 이런 식의 완전한 남자와 사는 삶이라면 지옥이 따로 없지 않을까 싶다결국 스토리는 비극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

 

제목을 보자마자 솔로몬 왕의 판결을 연상케 하는 <두 엄마>에는 과부 라켈과 불쌍한 남자 돈 후안이 캐스팅되었다돈 후안은 어쩌다 이런 요부에게 빠지게 되었던가정상적인 방식으로는 자식을 생산할 수 없었던 라켈은 돈 후안에게 베르타와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라고 강요한다이 제안을 듣는 순간과부의 꼭두각시가 된 남자는 지옥 불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베르타의 롤모델은 바로 라켈이었다베르타는 이런 추잡한 시나리오를 알면서도 자신이 충분히 과부를 제압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제안을 수락한다그녀보다 한 수 위였던 라켈은 돈 후안의 모든 재산을 자기 것으로 이전하고돈 후안을 그저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는 그런 재산관리인으로 만들어 버렸다항상 자신이 타인보다 우월하다고 믿는 이들이 흔히 저지르는 그런 실수가 아니었을까결국 라켈의 계획대로 베르타는 아이를 임신했고딸을 낳았다라켈은 돈 후안과 베르타의 딸에게 자신의 이름인 라켈/켈리나를 명명한다이거 진짜 막장 드라마의 연속이로구나결국 두 여자에서 영혼이 파탄난 돈 후안을 자동차를 타고 나갔다가 교통사고로 죽고 만다마녀 같이 돈 후안을 조종해서 모든 것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은 라켈은 자신과 같이 과부 신세가 된 베르타마저 자신의 의지대로 조종하게 된다.

 

소설집의 대미를 장식하는 <룸브리아 후작>은 앞선 두 개의 이야기를 능가하는 그런 막장 스타일의 소설이다룸브리아 후작 돈 로드리고에게는 가문을 이을 아들은 없었고 카롤리나와 루이사 두 딸만 있었다둘째딸 루이사가 트리스탄 이바녜스와 결혼하게 되자언니 카롤리나는 수도원으로 갔다는 소문과 함께 결혼 전에 사라져 버리고 만다데릴사위 트리스탄은 그저 미래의 룸브리아 후작의 생산을 위해 들인 망나니범죄자 혹은 하인 같은 존재일 따름이었다.

 

어쨌든 루이사는 아버지 돈 로드리고의 바람대로 아들 로드리긴을 낳았다돈 로드리고는 손자의 얼굴을 보자마자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고루이사 역시 아버지의 뒤를 따르게 된다그러자 지난 4년 동안 행적을 알 수 없었던 카롤리나가 느닷없이 등장해서 홀아비 트리스탄의 두 번째 아내가 된다그러니까 카롤리나는 로드리긴에게 이모이자 새엄마였던 것이다뭐 이래도 되나 그런 건 묻지 말자아니 이게 서문에서 우나무노 작가가 밝힌 소설에서 모름지기 다뤄야 하는 삶과 현실의 모범이란 말인가나로서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도덕률이야 어떻든 그리스어 교수님이 구사하는 통속적인 스토리라인은 정말 흥미진진했다그리고 룸브리아 후작 가문의 숨겨진 비밀들이 잇달아 밝혀지는데...

 

철학자에 교수 출신 소설가가 겨냥하는 삶의 진실들은 사실 썩 아름답지는 않다하긴 우리네 삶이 항상 그렇게 아름다움만으로 가득했던가그것들은 단지 우리의 희망일 따름이었을 뿐이다내가 돈 후안이었다면내가 트리스탄이었다면 혹은 완전한 남자’ 알레한드로였다면 어떻게 행동해야 했을까라는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소설 속 남자 주인공들의 선택은 하나 같이 부도덕하고 자기파멸적이었다아니 어느 누구라도 그런 상황이었다면 어쩔 수 없었을까삶이 정상궤도에서 이탈했을 때자정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는 과연 없단 말인가아니 처음부터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던 게 아닐까기로에서 그들이 하는 선택들은 어떻게 그렇게 하나 같이 패착으로 귀결되는 걸까어쩌면 우리네 삶은 우리의 뜻과는 무관하게 움직이게 설계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순식간에 읽고 나서 휘발된 기억을 되살리려니 리뷰 쓰기가 쉽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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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땅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들녘 / 2006년 5월
평점 :
절판



세상에 존 맥스웰 쿳시의 책을 오늘 새벽에 다 읽은 <어둠의 땅>까지 해서 모두 12권이나 읽었는데도 아직 더 읽을 책이 4권이나 더 있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그만큼 다작가라는 거겠지. 지난 십년 동안 12권의 쿳시 책을 읽었는데 올해만 6권을 읽었다. 이언 매큐언처럼 전작읽기에 도전 중이다. 그리고 보니 로맹 가리도 있었네.

 

1974년 소설가서로 존 쿳시가 드디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데뷔작 <어둠의 땅>으로. 지난봄에 읽다가 접었었는데, 지난 주말에 다 읽을 수가 있었다. 이보 안드리치의 <드리나강의 다리>를 읽다 말고 책장 정리 중에 발견해서 우선 이 책부터 읽자는 마음이 아마 발동하지 않았나 싶다.

 

미니멀리즘으로 밖에 볼 수 없는 쿳시의 책처럼 200쪽 남짓한 분량이라 주말에 읽기에 전혀 부담이 없었다. <어둠의 땅>은 두 개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는데 전자는 유진 돈이라는 <베트남 프로젝트>라는 이름의 베트남전 심리전에 투입된 미국인 유진 돈이 서서히 정신적으로 파괴되어 가는 모습을 그린 <베트남 프로젝트>이고, 후자는 1760년 남아프리카 오렌지 강 탐험에 나선 <야코부스 쿳시의 이야기>.

 

유진 돈은 신화서술이라는 이름으로 소설이 발표되던 당시 진행 중이던 베트남전에 대한 심리전에 투입된 정부 요원이다. 런던에 살던 시절, 이 소설을 구상했다는 쿳시는 1960년대 후반 미국 텍사스로 이주한 뒤, 소설을 위한 자료조사에 나섰다고 한다. 통킹만 사건을 조작해서 디엔비엔푸에서 패퇴한 프랑스를 대신해서, 베트남에 본격적으로 개입한 미국은 도무지 포기를 모르는 베트남 민중과의 전쟁에 막대한 전비와 물자 그리고 인력을 투입했다. 그 결과 한 때 팍스 아메리카나를 구축했던 미국은 몰락하고 말았다. B-52 전략폭격기에서 떨어뜨리는 네이팜탄으로 베트남 민중을 굴복시킬 수 없었던 미국은 좀 더 비용이 덜 들고, 효과적인 방법으로 심리전을 구사하지 않았을까.

 

압도적인 무력을 제압하는 것은 하책이다. 대신 고도로 계산된 심리전을 통해 적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궁극적인 승리를 가져 오는 것이야말로 고대 중국의 손자가 자신의 병법에서 일찍이 설파하지 않았던가. 문제는 베트남에서 진행되는 현실을 직시한 유진 돈의 정신세계가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아내 매럴린이 불륜을 피우는 걸 기대하며, 자신의 아내가 여전히 타인에게 매력적이라는 사실에 집요하게 매달리는 유진. 직장 상사 쿳시와의 불화도 그의 정신세계가 피폐해지는 이유 중의 하나로 등장한다.

 

유진 돈이 베트남에 전력을 다했던 것은 불필요한 싸움을 끝내기 위해서라고 주장한다. 싸움과 반란이 끝나면, 우리(?)는 미국과 화해할 수 있을 거라는 그의 망상은 도대체 어디에서 발원한 것일까. 적의 본질을 연구하던 유진은 적과 자신을 동일시하게 된 건가. 베트남 민중이 원하는 완전한 자주독립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전쟁을 끝낼 수 없다는 걸 미국은 과연 몰랐던 걸까. 결국 망상에 사로잡힌 유진은 아들 마틴을 볼모로 데리고 파국을 향해 치닫는다.

 

야코부스 쿳시의 나마콰 원정기는 좀 더 흥미롭다. 부유한 농장주 야코부스 쿳시는 케이프 총독의 허가를 받아 어느 백인도 탐험에 나서지 않았던 남아프리카 내륙으로 코끼리 사냥을 원한 원정대를 조직한다. 6명의 호텐토트 원주민들을 하인으로 삼아 야심찬 원정대를 발족시킨 야코부스 쿳시는 초반부터 호텐토트 원주민들의 내분으로 골치를 썩어야했다. , 그전에 초원의 부시먼을 상대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전형적인 서구인의 시선으로 본 제국주의 아이디어가 상당히 불편하게 다가왔다. 백인들이 건설한 농장들의 규모가 커지면서 생계의 위협을 받은 부시먼들이 농장의 경계를 침범하면서 촉발된 갈등은 결국 폭력적인 방식으로 전개된다. 부시먼들은 전형적인 게릴라 전술과 독화살로 백인들의 가축을 공격하고, 이에 대한 반발로 백인들은 말과 총으로 대변되는 기동력과 압도적인 화력으로 부시먼들에게 대응한다.

 

다시 나마콰 원정대 이야기로 돌아가, 사막을 가로지르는 간난신고 끝에 나마콰 부족을 만난 야코부스 일행은 소를 탄 추장에게 자신들은 단지 코끼리 사냥과 (상대적으로 백인들에게 유리한) 물물교환을 원할 뿐이라며 나마콰 족들을 현혹시킨다. 추장의 허락 아래, 나마콰 마을에 체류하게 된 야코부스 쿳시가 열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게 되자 그동안 그의 명령에 복속해 오던 호텐토트 하인들이 반항하기 시작한다.

 

아이들과의 장난에서 비롯된 오해로 시작된 폭력 사태로 그야말로 흠씬 두들겨 맞은 야코부스 쿳시는 유일하게 자신을 따르는 하인 얀 클라버와 함께 원시적인 장비를 갖추고 500KM에 달하는 귀환길에 오른다. 도중에 클라버를 잃고 홀로 자신의 농장에 돌아오는데 성공한 야코부스 쿳시는 1년 뒤, 보복을 위한 원정대를 조직해서 유혈이 낭자한 학살극을 감행한다.

 

소설가로서 첫 출발을 시작한 쿳시가 왜 서로 다른 시간대의 상이한 이야기 둘을 가지고 <어둠의 땅>을 기록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베트남 프로젝트>는 아무래도 당시 현재진행형이었던 불의한 베트남전에 대한 양심적인 지식인으로서 자신의 모습을 투영했던 게 아닐까 싶다. 실제로 쿳시는 미국에 거주하는 동안, 반전 시위에 나섰던 경력으로 영주권 신청이 각하되어 고국 남아프리카로 돌아와야 했다. 어쩌면 그런 실패가 훗날 작가로서 성공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작가라면 적어도 그 정도의 스토리는 갖추고 있어야 하니 말이다.

 

18세기 서구 열강의 전 세계를 상대로 한 제국주의적 식민지 침탈이 본격화되었을 시기, 야코부스 쿠시가 단행한 그레이트 나마콰 원정의 목적은 상아 획득이었다. 원주민들에게는 담배와 브랜디 혹은 다른 허접쓰레기를 제공하고, 그들이 백인보다 열등하다는 선민의식에 사로 잡혀 호텐토트 원주민들의 노동력과 그들의 자원을 착취했다. 초원에서 평화롭게 살던 부시먼과 나마콰족의 세계에 침투해서, 아이들의 장난을 이해하지 못하고 실컷 두들겨 맞은 것에 대한 보복으로 학살극을 자행하는 모습에서 과연 그것이 베트남전의 그것과 무엇이 다른 지 작가는 묻고 싶었던 게 아닐까. 200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도 폭력적 방식의 침탈의 역사가 비극적으로 반복된다는 걸 쿳시는 자신의 데뷔작에서 신랄하게 비판한다.

 

이렇게 나의 쿳시와의 열두 번 째 만남은 마무리되었다. 앞으로 <청년 시절>, <엘리자베스 코스텔로>, <동물로 산다는 것> 그리고 <디어폴, 디어존>만 읽으면 나의 쿳시 전작읽기는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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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9-11-18 12: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쿳시 12권....아!!! 할말을 잃고 갑니다....ㅋ

레삭매냐 2019-11-18 13:18   좋아요 1 | URL
올해 안으로 모두 읽었으면 싶지만,
가능할 것 같지 않네요. 구할 수 없는
책들이 있어서 말이죠.

cyrus 2019-11-18 22: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번 달 중순에 토니 모리슨 전작 읽기를 도전했어요. 그런데 지난달에는 레삭매냐님 서재에 한트케 전작 읽기를 도전해보겠다는 식으로 제가 댓글을 남긴 것 같은데 데자뷰가 될 가능성이 99%네요... ㅎㅎㅎㅎ 일단 토니 모리슨의 첫 번째 소설은 읽었고요, 이제 <술라>를 읽을 차례입니다. ^^

레삭매냐 2019-11-19 11:06   좋아요 0 | URL
오호라 그러시군요.

전 <술라>로 가장 먼저 토니 모리슨
작가를 만나지 않았나 싶네요.

<재즈>는 읽다 잠시 접어 두었는데
장난 아니더군요...

<빌러비드>는 리커버 버전으로 샀
는데 언제 읽게 될 지 모르겠네요.

목나무 2019-11-19 15: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진짜 레삭매냐님 엄지척!!! 입니다.
우찌 이렇게 끈기있게 읽어내시는지.,
올 한해 마무리로 존 쿳시 전작 기대해볼게요. ^^

레삭매냐 2019-11-19 17:13   좋아요 0 | URL
문제는 쿳시의 책 두 권이 모두
절판 상태라는 점이랍니다.

게다가 도서관에도 비치가 되어
있지 않더라구요...

아무래도 올해 안으로는 어렵지
않을까 싶네요.

coolcat329 2019-11-19 17: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말이 필요 없습니다. 레삭님의 열정독서는 늘 즐겁게 지켜보고 있네요.

레삭매냐 2019-11-19 17:58   좋아요 0 | URL
무슨 말쌈을요... 마구잡이 근본 없는 독서의 신봉자인 걸요 ㅋㅋㅋ
 
안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21
미겔 데 우나무노 지음, 조민현 옮김 / 민음사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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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현 작가의 신간 소설을 통해 스페인 출신 지성인 작가라는 타이틀의 미겔 데 우나무노를 알게 됐다. 바로 중고서점에 달려가 그의 책을 샀다. 1914년에 발표된 그의 대표작 <안개>. 아 왜 진작 나는 이런 작가를 알지 못했을까. 그리스어 교수, 소설가, 시인 그리고 철학자가 쓴 소설이라고 해서 조금 겁을 집어 먹었다. 책을 펴보니 전혀 그런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지극히 대중적이 소설이었다. 게다가 막장적인 요소까지 겸비하고 있어서 내 입맛에 딱 들어맞는 그런 작품이라고나 할까. 참고로 그의 다른 작품들인 <모범소설><사랑과 교육>도 사들였다. 일단 어느 작가에 빠지게 되면 컬렉션부터 하는 나의 습성이 발동된 것이다.

 

왠지 모르게 에라스무스를 연상시키는 이름의 우나무노 작가는 처음부터 주인공 아우구스토 페레스의 비극적 죽음에 대해 선빵을 날린다. 그렇다, 주인공은 죽었다. 그렇다면 그는 도대체 왜 죽었을까? 부유한 집안의 상속자에 법대 출신의 무엇 하나 빠지지 않는 남자 아우구스토는 어느 날 길에서 우연히 피아노 선생 에우헤니아 도밍고 데 아르코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렇기 그렇게 가는 거지.

 

문제는 에우헤니아에게는 사랑하는 남자친구 마우리시오란 놈팽이가 있다는 것이다. 고아 처녀 에우헤니아를 데리고 있는 그녀의 고모는 당연히 예의 놈팽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무정부주의자인 고모부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에게 에우헤니아의 당연한 선택은 바로 아우구스토다. 정해진 정답이 있는데, 왜 굳이 인생의 가시밭을 가려는 것인가. 칡과 등나무가 얽힌 갈등구조의 기원은 바로 이런 어처구니없는 에우헤니아의 선택에 있다.

 

설상가상으로 에우헤니아의 집은 부채 때문에 저당이 잡혀 빚쟁이들에게 넘어갈 판이다. 짜잔 이런 상황에서 등장한 부잣집 도련님 아우구스토가 사랑하는 에우헤니아의 빚을 다 갚아준다. 1910년 전투적 페미니스트 같은 에우헤니아는 나쁜 남자의 매력이 듬뿍 빠져 자신에게 행복을 보장해 줄 것처럼 보이는 남자 아우구스토 대신 상건달 마우리시오를 선택한다. 그러니까 자신의 후견인들이 자신을 아우구스토에게 팔아먹으려 한다며 폭언도 마다하지 않는다. 본질적으로 그게 사실이기 때문에 고모나 고모부 역시 아무런 할 말이 없었다.

 

그 와중에 등장하는 세탁소 19세 처녀 로사리오에 대한 아우구스토의 불같은 연정은 또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꿩 대신 닭이라고 했던가. 자신이 손에 넣을 수 없는, 무슨 수단을 동원하더라도 정복할 수 없는 에우헤니아 대신 순박한 로사리오에게 눈을 돌린 아우구스토의 행위는 참 비겁해 보인다. 심지어 짝을 맞추기 위해 충직한 하인의 아내에까지 흑심을 품는 아우구스토. 너란 인간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이냐.

 

개인적으로 보았을 때, 아우구스토는 에우헤니아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게 아니라 그녀를 사랑하는 자신의 감정에 충실했던 것 같다. 그런 감정을 부풀려서 고통의 불구덩이 속으로 따려드는 주인공의 모습은 참 애처롭다. 결국 아우구스토는 마녀 같은 에우헤니아와 그녀의 놈팽이 마우리시오가 준비한 덫에 걸려 세간의 조롱거리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이렇게 끝이냐고? 절대 아니다. 이미 카지노에서 절친 빅토르와의 대화를 통해 벨에포크 시대 끝판에 등장하는 숱한 스페인식 막장 드라마의 전형들이 무대에 올랐다가 내려가길 반복한다. 그리고 놀라운 지성의 소유자라는 우나무노가 전개하는 스타일에 그만 반해 버렸다. 주로 대화를 통해 구사되는 서사의 속도감 넘치는 진행은 일품이다. 이게 진정 철학자 출신 소설가의 작법이란 말인가하고 자신에게 되물을 정도의 재미가 넘쳐흐른다.

 

제목으로 저자가 점지한 <안개>는 정말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불확실한 미래를 상징하는 것으로도, 도대체 그 속을 알 수 없는 남녀관계의 오묘함에 대한 미스터리로도, 궁극적으로 작가가 창조한 황망한 허구와 지독한 현실을 오가는 서사의 고갱이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비록 한 권 밖에 읽지 못했지만(우나무노가 두 번째로 발표한 <모범소설>을 바로 뒤이어 읽기 시작했다) 이런 작가야말로 나의 문학 세계의 전당에 오를 만한 충분한 자격을 갖춘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철학자 소설가는 고상한 철학적 용어나 개념으로 독자의 두개골에 심한 압박을 주는 대신, 평범하고 일상적인 삶 아니 일견 통속적으로 보이는 삶을 관통하는 본질에 천착하는 깨달음이 바로 저기에 있지 않느냐고 지그시 알려준다. 정말 멋지지 않은가. 이러니 내가 어찌 우나무노의 작품을 애정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올해의 발견이라고 할 수 밖에 없을 정도의 그런 작품이자 작가다.


[뱀다리] 마구 흥분해서 지껄이다 보니, 진짜는 쓰지 않았다.

그러니 직접 읽어 보시라. 놀랄 만큼 뻔뻔한 작가의 노골적

개입에 두 손 두 발 모두 들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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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9-11-15 19: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함 읽어보고싶네요 레삭매냐님 두 손 두 발 다 든 이 작품 ㅋㅋㅋ

레삭매냐 2019-11-19 11:02   좋아요 2 | URL
두번째로 읽은 <모범소설>도 정말
에스파냐식 막장 소설이더라구요...

대중소설의 재미에 흠뻑 빠지게 되네요.
 
당신과 다른 나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19
임현 지음 / 현대문학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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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망증 : 험한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거나 어느 시기 동안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거나 또는 드문드문 기억하기도 하는 기억 장애.

 

건망증에 대한 사전적 정의다. 그러니까 건망증은 하나의 장애라는 것이다. 임현 작가의 <당신과 다른 나>는 바로 그 건망증에 대한 염려로부터 시작된다. 우리 현대인은 오만 질병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산다. 그 중에서도 건망증은 주변에서 볼 수 있는 흔한 증상이 아니던가.

 

나의 아내 미양은 제약회사 연구원으로 근무하는 남편이 심각한 건망증 증상을 보인다고 의심한다. 소설 속의 소설에 대한 이야기던가. 어느 순간부터 이야기는 꼬이기 시작한다. 미양의 남편 는 제약회사 연구원인가 아니면 소설가인가. 어디서부터 이야기가 그렇게 휘말려 버린 거지.

 

그런데 사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나는 미양과 도플갱어 같은 화자가 빚어내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이야기가 더 궁금했다. 소화 장애에 시달리면서도 밀가루 음식을 끊지 못하는 남편. 나도 지금 막 밀크티스콘 하나를 먹어치웠다. 뻑뻑했지만 입은 즐거웠다. 천연세제를 고집해서 거품이 많이 일지 않는 게 문제라고? 설거지는 음식을 먹은 이가 하는 게 당연한 게 아닌가. 물론 세제를 많이 사용하라는 잔소리는 듣기 싫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자신이 하면 된다. 내가 세제를 많이 쓰든 말든 관심을 꺼 주시길.

 

<사랑과 전쟁>에서 모름지기 전쟁은 항상 사소한 문제에서 발단이 되기 마련이다. 큰 문제 가지고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더라. 그리고 그 순간을 넘기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니더라. 한 순간을 넘기지 못하는 게 문제지.

 

어차피 소설의 내러티브야 종잡을 수 없으니 자꾸만 주변부에 시선이 간다. 소설 <당신과 다른 나>는 확실히 재밌다. 독서 슬럼프 탈출용으로 그만이다. 서사의 디테일에 대해 너무 밝히면 또 누군가는 거북할 것이니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 지어야지 싶다. 소설가가 자기 가족의 이야기를 쓰지 않으면 뭘 쓸 것인가? 그리고 술자리를 그렇게 기웃거리는 것도 다 소재를 사냥하기 위함이라는 가설도 아주 마음에 들었다. 호기심을 유발하는 소재를 가지고 어떻게 이야기를 만들 것인가는 바로 소설가의 능력일 것이다. 어느 순간, 제약회사 연구원에서 소설가로 변신한 의 모습이 아주 유쾌해 보인다. 나라면 제약회사 연구원보다 소설가이기를 원하지 않았을까.

 

중고서점을 들락거리는 소설가의 모습도 마음에 들었다. 마음을 안정시키는 유일한 장소였다고 했던가. 읽은 책이 없는 게 아니지만 꾸역꾸역 책을 사는 모습도 어쩌면 진짜 나와 닮았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현실 속의 나도 주인공의 도플갱어 중의 하나일 지도 모르겠다.

 

소설가가 몰래 읽는 소설의 저자로 추정되는 스페인 작가 미겔 데 우나무노의 대표작 <안개>를 중고서점에 득달같이 달려가서 샀다. 절판된 우나무노의 다른 두 책도 바로 온라인으로 주문했다. 예전에는 절판된 책을 구하려면 기약도 없이 헌책방을 순례해야 했는데 택배비 2,000원으로 발품을 대신할 수 있게 되었다. 헌책 사러 대전까지 가는 건 아무래도 무리겠지. 부디 우나무노가 소설에 등장한 예의 스페인 작가가 맞길 바랄 뿐이다. 뭐 아니어도 할 수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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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9-11-14 14: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국소설도 선점하시고 ....넘 달리시네욧 ㅎ

레삭매냐 2019-11-14 18:51   좋아요 1 | URL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우나무노에게
반해 바로 작가의 책들을 컬렉션하고
읽고 있네요.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
 
타네 씨, 농담하지 마세요
장폴 뒤부아 지음, 김민정 옮김 / 밝은세상 / 2006년 4월
평점 :
품절



 

빛이 있으라가 나는 요한복음에 나오는 구절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창세기 13절이었구나. 프랑스 작가 장폴 뒤부아가 공쿠르 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는 중고서점에 가서 그의 책 두 권을 샀다. 요즘 나름 독서 슬럼프라 재밌게 읽을 만한 그런 책이 필요했고, 뒤부아의 <타네씨, 농담하지 마세요>는 아주 적절한 책이었다.

 

프랑스 툴루즈에 사는 동물 다큐멘터리 PD 폴 타네 씨는 어느날, 숙부가 돌아가셨다는 공증인의 전언과 함께 대저택을 유산으로 물려 받게 된다. 문제는 동성애자였던 숙부가 남긴 대저택이 향후 1년 간 그의 가장 큰 골칫거리가 될 거라는 전망이었다. 습기가 지배하던 대저택을 방문하는 그 순간까지도 아마 타네 씨는 그 사실을 몰랐으리라.

 

잘 살던 안락한 집을 팔아 치우고 공사 자금을 마련한 타네 씨는 공사 견적서 적힌 금액을 보고는 경기를 일으킬 지경이다. 하지만 걱정 마시라. 지금까지는 모두 예고편에 불과하니 말이다. 처음부터 비싼 가격에 제대로 된 인력을 사용했으면 모르겠지만, 어디 싼 비용으로 대공사를 치르려다가 타네 씨는 비싼 교훈을 얻게 된다. 한국이나 프랑스 모두 해외에서 유입된 인력들이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는 상황은 국경 없는 자본시대, 다시 말해 신자유주의 시절에 낯익은 상황이 되어 버렸다. 오래 전, 포장이사를 하는데 한국말을 너무 잘하는 몽골 청년의 등장에 좀 놀라지 않았던가.

 

첫 번째 난관은 바로 피에르와 페드로 두 해적 악당들이었다. 사실 이 두 악당들이 초반 공사의 대부분을 망쳐 먹은 주범들이었다. 농땡이는 기본이고 대들보 세우는 일이며, 폭풍우가 몰려오는데 공사 현장에 방수포를 씌우지 않아 대홍수를 일으킨 장본인이 되시겠다. 게다가 가장 기본적인 보험도 들지 않아 발주자인 타네 씨의 뚜껑을 열리게 만들기 일쑤다. 아 참 타네 씨는 그들의 개에게 발모가지를 물리기도 했다.

 

그 뒤에 줄지어 등장하는 이들도 사실 타네 씨를 홀라당 벗겨 먹으려는 해적 악당 2인조와 다를 바가 없었다. 대참사 이후 뒷수습을 위해 제대로 된 긴급 인력을 수급받았지만, 비용 청구서를 보고 타네 씨는 입이 딱 벌어진다. 끝이 보이지 않는 난관, 그리고 그에 대한 타네 씨의 투쟁이 <타네 씨, 농담하지 마세요>의 기본 골격을 이루는 요소들이다. 게다가 탁탁 끊어지는 장 구성이 아주 흥미진진하고 재밌기까지 하다.

 

나는 내가 못하는 일은 외주를 주자는 입장이다. 비용을 들여서라도 더 잘하는 사람에게 일을 맡기는 게 훨씬 낫지 않을까. 벽에 못 하나 박는 일도 버거워 하는 나로서는 어쩌면 그게 더 맞는 일이 아닐까 싶다. 대저택의 바닥 공사를 친 노인장은 경사를 잘못 잡아서 물이 건물로 밀려들자, 타네 씨에게 버럭하고 화를 내지 않던가! 그러니 아무리 공사를 발주한 전주라고 하더라도 어느 정도 일은 알고 있어야 한다는 그의 지론을 슬쩍 엿볼 수도 있다.

 

타네 씨에게 해고당한 악당 2인조가 앙심을 품고, 타네 씨가 애지중지하는 공구들을 훔쳐 갔을 때는 또 어떤가. 하지만 아무리 타네 씨가 그들에게 협박을 하더라도, 명백한 물증 없이는 그들을 심증적으로 범인으로 규정할 뿐 다른 대처 방안이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악당들은 심지어 자신들이 범죄를 저질렀다면 어떻게 할 거냐고 뻔뻔하게 대들기까지 하지 않은가 말이다. 대저택의 전기 배전공사를 맡은 루스키 씨는 퓨즈를 홀라당 태워 먹었다. 그것은 마치 하나의 불꽃놀이, 하나비 같다고 했던가. 잇달아 벌어지는 대참사를 유머러스하게 넘기는 뒤부아 작가의 능수능란한 솜씨에 좀 반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이들이 타네 씨를 벗겨 먹으려고만 한 것은 아니었다. 세찬 폭풍우가 지나간 다음, 들판에 고개를 쑥 내미는 들꽃처럼 수도 배관공 아랑그 영감도 있었다. 아랑그 영감이야말로 자신의 작업에 대해 자부심을 가진 마지막 기사도를 상징하는 그런 인물이었다. 물론 그 역시도 실수로 타네 씨의 참사 연대기를 화려하게 장식했지만, 그것을 자신의 치욕이라고 생각하고 공사비를 받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공사비 청구도 뒤로 미룰 뿐이었다. 공사판을 누비는 고문관들과 미치광이들도 많지만, 아랑그 영감처럼 진정한 장인도 있다는 말을 뒤부아 작가는 하고 싶었던 걸까.

 

<타네씨, 농담하지 마세요>를 읽으면서 행여라도 미래에 집을 짓는다 뭐 그런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주변에서 그렇게 자기 집을 지었다가 애착을 버리지 못하고 수십년 째 생고생을 하고 있는 사람을 잘 알고 있으니 말이다. 그냥 주어진 운명에 만족하며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교훈을 절절하게 느낄 수가 있었다. 그리고 유쾌하고 즐거웠다 뭘 더 바라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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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굽는건축가 2019-11-13 16: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 제가 타네씨 책을 꼭 읽어볼께요. 엄청 재미나고 공감할 것 같은 책이네요. ^^ 방금 중고책 구입 했어요.

레삭매냐 2019-11-13 16:55   좋아요 1 | URL
걸작이나 명작 수준은 아니고
기분 전환용으로 읽기에 그만
인 책이더군요 :>

자목련 2019-11-15 15: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주 오래전에 읽었던 기억이 떠올라요. 다시 읽으면 어떤 기분일까 싶다가 책이 없다는 게 생각났어요. ㅎ

레삭매냐 2019-11-15 19:13   좋아요 0 | URL
정말 오래 전이라 책들이 다 절판됐더라구요.

나중에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 다시 읽으면
기분이 어떨지 궁금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