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경찰의 밤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하빌리스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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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보 운전을 하던 시절, 접촉사고를 냈었다. 전적으로 내 책임이었다. 멀쩡하게 서 있는 차를 부주의로 들이 받았으니. 다행히 인사사고는 없었고, 100% 나의 과실로 처리했다. 그 다음에는 사고 난 기억이 나지 않는다. 큰 사고가 날 뻔 했으나 정말 종잇장 한 장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빗겨간 적도 있다. 모든 건 순간의 판단이 빚어낸 실수에서 비롯된다.

 

1991년에 발표된 추리소설의 대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교통경찰의 밤>을 만났다. 모두 6건의 교통사고와 연루된 사건들이 차례대로 등장한다. 내가 여섯 편의 단편에서 뽑아낸 핵심 주제는 사소한 실수에서 발화된 교통사고 그리고 정당한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아 사적 응징에 나선다는 점이다.

 

<천사의 귀>에는 교통사고로 오빠를 잃은 앞을 볼 수 없는 소녀가 맹인 특유의 기억력과 청각을 이용해서 사건 해결에 나선다는 설정이다. 놀랍다. 초 단위의 기억력을 자랑하는 소녀 앞에 교통경찰들은 무너진다. 여기에 단점은 우리의 기억이 정확하지 않다는 점을 작가는 파고든다. 가해자도 그리고 피해자도. 소녀 나호의 도움으로 사건이 해결되는가 싶지만, 후반에는 상상을 뛰어넘는 반전이 대기하고 있다.

 

나의 경우처럼 정지 상태의 차를 들이 받아 100% 과실이 인정되는 경우는 거의 드물다. 가해자의 경우, 어떻게든 자신의 책임을 덜기 위해 발뺌을 하기 마련이다. <중앙분리대>에서도 그렇게 법망을 빠져 나가려는 가해자에게 사적 응징을 가하는 설정이 등장한다. 실제 현실세계에서도 수년 전에 일가족이 노상주차 때문에 큰 사고로 이어진 경우가 있지 않은가. 길 위에서 벌어지는 대응 불가한 상황들은 정말 답이 없어 보인다. 법과 원칙을 잘 아는 이들일수록, 법망의 빈틈을 이용해서 빠져 나가는 수가 많다는 걸 우리는 현실에서 잘 목격하고 있는 중이다. 선택적 정의는 더더욱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위험한 초보운전><건너가세요>에서 히가시노 게이고가 이 책에서 줄기차게 제기하는 자신이 저지른 실수에 대해 응당한 책임을 지지 않는 이들에게 내려지는 사적 응징을 전면에 내세운다. 사실 가해자의 양심에 호소하지 않는 이상, 아마도 소설 속의 그들처럼 반성하지 않을 것이다. 기억상실을 교묘하게 이용한 피해자의 복수도, 유지를 자신의 별장으로 유인해서 똑같은 상황을 만들어서 너도 한 번 당해봐라는 식의 보복을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한편으로 통쾌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말아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버리지 말아 줘>는 교통사고와 관계된 살인사건이 등장한다. 하루미와의 불륜을 아내에게 걸린 사이토는 아내를 죽이기 위해 내연녀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그리고 마신 커피 캔을 고속도로를 달리던 중 아무 생각 없이 내던진다. 문제는 그 캔에 맞아 뒤따라 달리던 차에 탔던 여성이 왼쪽 눈을 실명하게 됐다. 이것도 하나의 교통사고일까. 인사사고라면 몰라도 교통경찰들의 반응은 어디서나 뜨뜨미지근할 따름이다. 사이토가 마련한 범죄계획은 엉뚱한 피해자에게 적용되고, 피해자 커플은 범인 추적을 포기하지만 역시 우연의 작용으로 사이토의 범죄가 발각되고 처벌을 받게 된다. 반전과 결국 죄를 저지른 사람에 대한 단죄에까지 거의 완벽한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역시 타인에게 엄청난 불행을 초래할 수도 있는 일은 아예 하지도 말아야 한다는 작가의 경고가 그대로 드러나는 수작이다.

 

마지막 <거울 속에서>. 야무진 예비신부 야스코와 하와이 신혼여행을 앞두고 있는 오다 형사는 교통사고로 스쿠터 운전을 하던 19세 청년이 죽는 인사사고를 맡게 된다. 평범해 보이는 사건에서 무언가 의심쩍은 상황을 접한 오다는 적당하게 마무리된 사건을 파헤쳐 결국 진실을 찾아내는데 성공한다. 단서는 우측통행이라는 한 단어였다. 추리에 살을 붙이고, 가설에 대입해서 마침내 완벽 범죄로 위장될 뻔한 사건을 명쾌하게 밝혀내는 장면에서는 속이 다 시원했다. 마지막에 하와이에 가서 렌터카는 그만 두자는 제의로 마무리하는 장면이 얼마나 멋지던지.

 

소설을 읽으면서 다시 한 번 정의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됐다. 우리는 모두를 불편하게 만드는 선택적 정의를 원하지 않는다.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그런 공평무사한 정의를 원한다. 과연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현실은 그러할까. 나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교통경찰의 밤>의 피해자들처럼 사적 응징에 나서야 한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문명인에게는 시스템이 필요한 게 아닐까. 다만 그것은 운영하는 이들의 생각이 그러지 못하다는 것이 문제일 뿐. 그래서 집행자들이 가진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그렇지 못하다면 정의의 집행자 행세를 그만 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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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19-12-06 17: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 십년전에 당했던 사고가 다시 떠올라 보글보글 끓었네요^^; 외제차 모는 싸모님이었는데 본인 잘못은 인정 않고 다짜고짜 제 차의 남루함을 지적-_-

레삭매냐 2019-12-06 19:13   좋아요 0 | URL
일단 차사고 시 목소리를 우렁차게
울려 퍼지게 하라는 속설을 맹신하
신 게 아닐까 조심스레 추정해 봅니다.

자신의 허물을 인정하는 게 쉽지
않겠죠 아무래도. 엔딩은 싸모님이
너무 하셨네요...

단발머리 2019-12-07 12: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 드디어!
레삭매냐님 방에서 제가 아는 작가를 만났습니다 ㅎㅎㅎㅎㅎㅎㅎ 전 히가시노 게이고는 안 읽어봤는데 남자2인이 몰아서 읽었던 터라 왠지 가깝게 느껴지네요.
소설 속에서 사적 응징은 항상 독자를 통쾌하게 해주는 것 같아요. 현실은 그럴수 없고 그래선 안 되니까 그런것 같기도 하구요.

레삭매냐 2019-12-07 22:38   좋아요 0 | URL
격렬하게 공감하는 바입니다.

현실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사적 응징
이나마 소설이 다뤄주는 맛에 추리
소설을 읽는 게 아닌가 뭐 그런 생각
을 해봤습니다.

transient-guest 2019-12-12 01: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확실히 차종으로 기선제압하는 이상한 짓은 한국에서 많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이건 좀 이상한데 사실 자동차사고 뿐 아니라 사회 곳곳의 사건들 속에서 보면 자신의 직업이나 가족 중 누군가의 직위/직업을 내세우기도 하고 사는 곳을 내세우기도 하고, 좀 이상해요.

레삭매냐 2019-12-12 07:20   좋아요 1 | URL
지난 두 번의 보수정권 동안 사람
들의 의식구조가 그전과 완전히
달라져 버렸습니다.

아무런 의식 없는 천박한 자본주의
가 만개하여 모두가 물질만능주의
바이러스에 감염된 게 아닌가 싶습
니다.
 


 

추위를 뚫고 아침에 출근했다.

왜 이렇게 추운 건가 그래. 사무실은 히터가 빵빵하게 돌아가서 여긴 다른나란가 싶을 정도다. 발밑에 놓인 히터까지 가동하니 온 몸에 뜨뜻한 기운이 샘솟는 그런 기분이다.

 

설레발리스트 경비대장님이 업된 목소리로 나에게 무언가 도착했다고 관리실에서 찾아 가라신다. 뭐지? 나한테 올 책들은 이미 어제 다 도착했는데...

아하, 북디파지터리에서 주문한 원서가 도착한 모양이다.

한 웅큼의 잡다한 서류들과 책택배를 끌어안고 계단을 오른다.

동료가 막판 연차를 쓰는 바람에 업무가 더블업이 되어 버렸다. 아 지겨워라...

부디 빨리 돌아오시길.

 

책은 케빈 배리의 <탠지어행 야간 보트>였다. 반가운지고.

이번 부커상 수상작으로 내가 밀던 책이었는데 아쉽게도 롱리스트에서 전진을 멈추었다.

이번엔 두 작가가 공동수상을 했다는데. 아무래도 노벨문학상보다 레베루가 떨어지다 보니 출간은 하세월이 되겠지. 노벨문학상 작가들의 책들은 밤새워 번역과 출간 작업에 나선 모양이던데...

 

외국이나 우리나라나 출판계의 마케팅 스트래티지는 별다를 게 없는 모양이다.

<탠지어행 야간 보트>에도 부커상 롱리스트라는 딱지가 떡 하니 붙어있다. 우리가 책띠지를 두른다면 외국에서는 요런 스타일로 가는가 보다.

 

난 하드커버 매니아다. 무조건 하드커버를 애정한다. 딱딱한 재질의 책이 아주 마음에 든다.

외국책에는 후기니 설명이니 하는 게 전혀 없다. 214쪽으로 딱 떨어진다. 다른 요소들은 모두 제외하고 책의 본질로만 승부하겠다는 걸까.

소설은 모두 14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는데 요 정도 분량이라면 소장각으로 모시기 보다는 도전해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한글 소설이라면 한 나절이면 끝장날 텐데 아무래도 외국어다 보니 오래 걸리겠지.

, 사은품은 북디파지터리에서 주는 종이 북마크 하나 덜렁. 수년전에 샀지만 단 한 번도 써보지 않은 코팅기를 돌려서 코팅이나 해볼까. 아서라, 할 줄도 모르면서 망치지나 말자.

 

연인은 떠나 버렸고,

딸래미는 실종되었다.

그들의 세계는 그야말로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탠지어로 향하는 스페인의 알헤시라스에서 아프리카 탕헤르로 가는

야간 보트를 기다리는

두 명의 아일랜드 갱스터들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궁금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덤벼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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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내년부터 도끼를 읽겠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계획이 변경되어 오늘부터 읽을 예정이다.

 

내가 유일하게 읽은 도끼의 작품이 <죄와 벌>이다. 아주 오래전 유시민 선생의 책을 보고 분발해서 읽었다.

하지만 리뷰를 남기지 않았기에 무언가 찝찝한 느낌이랄까.

 

하지만 이번에 나의 선택은 <지하로부터의 수기>.

작년엔가 헌책방에 가서 산 푸른색 도끼전집 시리즈다. 예전에 파주 열화당에 가서 주욱 늘어서 있는 도끼 전집을 보고 전율을 했던 기억이 난다.

책쟁이라 책을 읽는 것보다도 수집에 열을 올렸었는데.

 

그후 어디에서도 보지 못했던 도끼 전집의 낱권을 만났을 때의 환희란.

나중에 가서 다시 픽업해 오리라 다짐했지만 아직까지도 뭉개고 있는 중이다.

다른 낱권으로 나온 전집도 쓸어 와야 하는데. 아직까지 있다는 보장도 없고 뭐 그렇다.

 

사실 지난번에 존 맥스웰 쿳시의 <페테르부르크의 대가>를 읽으면서 전범이 된 <악령들>을 읽고 싶어서 검색도 했더랬지. 그리고 보니 아직 <페테르부르크의 대가> 리뷰를 쓰지 않았네. 역시나 숙제로 남아 있는 것.

 

이미 열린책들에서 나온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열린책들 버전으로 가지고 있으면서도 문동에서 나온 걸 또 사는 건 무언가. 그렇다고 읽지도 않으면서.

 

어쨌든 자기 전에 조금이라도 읽어야지. 나는 도끼를 읽기 시작했다.


근데 웃기는 건, 책부터 읽을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책을 좀 사서 모아야 하나 뭐 그런 고민을 하고 있더라는. 어제 세 권 덜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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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분량으로 가장 만만해 보이는 <지하로부터의 수기(1864)>를 간택해서 읽기 시작했다.

 

옛날에는 책을 소중하게 여기는 차원에서 밑줄 긋기는 상상도 할 수 없었는데 이제는 4B 연필로 좍좍 긋는다. 그리고 메모도 하고.

 

도끼 선생의 책을 새로운 눈으로 보려니 왜 이렇게 그을 밑줄이 많은지 모르겠다.

고전 읽기의 즐거움에 빠져드는 순간인가 보다.


, 그리고 산 책은 언젠가는 읽고 만다는 실천에 옮기는 중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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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9-12-03 22: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까라마조프 열린책들 책이 제꺼랑 똑같네요. ㅎㅎㅎㅎ 도끼 읽기를 인생 숙제로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레삭매냐님 도끼 읽기에 큰 박수와 환호와 화이팅을 보내드립니다!!!

레삭매냐 2019-12-03 23:05   좋아요 0 | URL
저에게도 하나의 숙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여적 도끼도 안 읽고 뭘했는지 그것 참.

얄븐독자 2019-12-03 22: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페이퍼백 판형 도선생 전집 몇권과 빨간 양장 지하로부터... 가 너무 오래 꽂혀있어서 부식이 될 지경인 한 사람으로써 뭔가 뜨끔하네요 --; 그나마 카라마조프 ... 유일하게 읽어봤습니다 ㅋ

레삭매냐 2019-12-03 23:07   좋아요 0 | URL
카라마조프가 그렇게 좋다던데...
그리하야 도전장을 드밀게 -

이렇게 선언이라도 해야 읽지 않을까
싶어서리.

그나저나 ‘부식‘ 언급하신 시퀀스에선
저도 식겁했습니다. 원죄이지요.

북프리쿠키 2019-12-03 23: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도끼읽기 응원합니다.
다 읽진 못했지만 도끼의 모든 글을 사랑합니다^^; 전 빨강색 전집으로 들고 있어요~~

레삭매냐 2019-12-04 08:53   좋아요 1 | URL
저도 워낙 도끼 샘의 책들의 분량이
후덜덜한지라 전작하겠다는 말을
차마... 다만 힘 닿는 데까지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페넬로페 2019-12-03 23: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목만 보고 ‘도끼‘ 가 뭔가 했어요^^
그렇게 쉽게 부를 수 있었네요~~
레삭매냐님은 항상 제가 처음 들어보는 작가에 대해 글을 쓰셨는데
이제야 제가 아는 도끼책이 나와서
반가워요~~

2019-12-04 00: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삭매냐 2019-12-04 09:01   좋아요 1 | URL
ㅇㅇ 도스토옙스키 너무 길어요 ~
러시아 작가와 주인공들이 다 그렇지만.

오늘 세어 보니 단편 제외하고 도끼 샘
소설이 16개더군요. 그 중에 유일하게
완독한 건 <죄와 벌> 뿐.

하나하나 읽어 보렵니다.

120퍼센트 2019-12-04 10: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기대됩니다 ㅎㅎ 저는 죄와벌과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었는데 몹시 힘들게 읽었어요, 두번 읽으면 나아질까요? 가난한사람들은 쉬이 읽었고요 ㅋ도끼 선생 다른 책들도 구비해뒀는데 지하로부터의 수기 빼먹었네요, ㅋㅋ 레삭님 리뷰보고 질러야겠습니다

레삭매냐 2019-12-05 09:19   좋아요 1 | URL
말은 거창하게 늘어 놓았지만...
과연 도끼 샘들의 책들을 읽을 수 있을
지는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좀 엉뚱하지만 도끼 샘 이야기를 하다
보니...

문득 예전에 어느 책모임에서 한글로
글쓰는 분이신데, 도끼 샘을 칭송하면
서 자기는 한국 작가들이 쓴 책은 읽
지 않는다고 자랑스럽게 떠벌이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뒷북소녀 2019-12-23 14: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톨스토이 올해 정복해서 내년부터 도끼를 전작해 볼 예정인데...
기대됩니다. 매냐님. 리뷰^^

레삭매냐 2019-12-23 15:01   좋아요 0 | URL
말은 그럴싸 하게 해 놓구설라무네
다른 책에 정신이 팔려서리...

과연 도끼샘 책들을 정독할 수 있을
지 어떨지 모르갔습니다 지금으로선.
 
대리석 절벽 위에서 대산세계문학총서 121
에른스트 윙거 지음, 노선정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12월
평점 :
절판



도대체 언제 산지도 기억할 수 없는 에른스트 윙거의 <대리석 절벽 위에서>를 세 달에 걸쳐 읽었다. 분량은 정말 적은 데 왜 이렇게 오래 시간이 걸렸을까. 푸르르메리트 훈장에 빛나는 전쟁 영웅 윙거의 이번 저술은 아돌프 히틀러의 독일 지배에 대한 상징을 모호하게 다루고 있어서 더더욱 그랬던 게 아닐까.

 

아무리 봐도 윙거는 자신이 구사할 수 있는 모호함의 극단을 추구한 것으로 보인다. 주인공과 오토 형제가 거주하는 평화로운 마리나는 세계대전 이전의 평화로웠던 시절에 대한 윙거의 회상이다. 소설의 첫 문장인 행복했던 시절이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총아들이던 산업가들이 득세하게 되면서, 무지막지한 이윤의 추구를 위해 획기적인 전기가 필요했다. 특히나 자본주의 후발주자였던 독일은 경쟁자인 영국이나 프랑스 같은 세계를 아우르는 거대한 식민지가 없었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전쟁뿐이었다. 전쟁이 다수의 민중에게는 불행의 근원이었지만 극소수의 거대 자본가들에게는 축복이었다.

 

최근 읽고 있는 수정주의 시각에서 독일의 역사를 다룬 책에서 히틀러는 산업자본가들의 고용인이었다는 주장이 눈길을 끈다. 주인공과 대척점에 서 있는 불한당들의 우두머리 산림감독원장은 총통 히틀러나 그의 숙적이었던 스탈린 혹은 제3제국의 2인자였던 헤르만 괴링으로 봐도 무방하다.

 

독일을 상징하는 슈바르츠발트라고 명명하고 싶은 캄파냐의 지배자인 산림감독원장 일당과의 대결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다. 그것은 마치 다가오는 2차 세계대전의 전운과도 같았다고 할까. 곤충과 식물을 사랑하고, 그것들의 표본과 색인을 다는 것을 삶의 낙으로 여기던 이들에게 어느 날 느닷없이 등장한 인간의 박피 헛간은 그야말로 야만과 폭력의 상징이었다.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산림감독원장의 압도적인 무력 앞에 나와 동맹군들은 무참하게 짓밟히고 만다.

 

마리나의 동맹군이자 용감한 전사였던 벨로바르 노인의 최후는 죽은 전사들이 간다는 발할라의 제단을 떠올리게 했다. 윙거가 반전을 주장하는 작가였다면, 이런 피비린내 나는 전투 대신 협상이나 대화를 통해 평화를 추구해야겠지만 5년간의 대전쟁을 몸소 겪은 전사는 반대로 그런 영웅적인 죽음을 찬양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명징한 사유의 저변에 깔린 저자의 본질을 슬며시 엿본 듯한 느낌이랄까.

 

결말 부분에 야만적인 산림감독원장 일당의 추격으로 죽음의 순간을 맞이한 주인공이 구사일생으로 살아나는 장면은 독일 민족의 뇌리에 각인된 붉은 수염의 전설, 절체절명의 위기로부터의 기사회생한다는 기적적인 행운을 문학적으로 재현해내지 않았나 싶다. 화염에 싸인 수도원과 마리나에 대한 묘사는 책이 발표된 후 6년 뒤에 총통이 약속했던 천년제국 게르마니아의 수도 베를린이 불과 집권 12년 만에 적군의 손에 화염에 휩싸이게 되는 장면을 예언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해를 넘기지 않고 <대리석 절벽 위에서>를 다 읽게 되어 다행이다. 결국 못 읽을 책은 없다는 건가. 문득 나의 서가 한 쪽을 차지하고 있는 도끼 선생들의 책들이 눈에 밟힌다. 아무래도 내년은 도끼 읽기의 해로 삼아야지 싶다. 첫 도전은 내가 유일하게 읽었다고(리뷰는 쓰지 못했다) 자부할 수 있는 <죄와 벌>로 시작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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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19-12-03 13: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 저도 이 책 읽은 줄 알았는데 아닌 거 같은데요. <강철폭풍 속으로>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 패스했었나, 아리송.... ㅎㅎㅎ

레삭매냐 2019-12-03 16:06   좋아요 0 | URL
<강철 폭풍 속으로> 굉장히 기대를 하고 도전
했었는데 무려 세 번이나 도전한 끝에 다 읽었
네요.

이 책도 쉽지 않더라구요.

북프리쿠키 2019-12-03 15: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뒤에 한길그레이트북스 책은 몬가요??ㅎ

레삭매냐 2019-12-03 16:06   좋아요 1 | URL
어제부터 다시 읽기 시작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랍니다.

북프리쿠키 2019-12-03 16:13   좋아요 1 | URL
ㅠ 아~저도 아렌트 누부야 글 앞에서 좌절하고 반틈 읽다가 덮어두었답니다.^^
 

2019년 기해년에도 부지런히 달렸다.

오늘까지 해서 모두 160권을 읽었다.

원래는 10권을 뽑고 싶었는데, 쉽지 않더라. 그리하여 올초부터 정리해둔 책 중에서 가장 인상에 남을 만한 책들 7권을 골라 봤다.




1. 바보의 알파벳 - 시베스천 폭스


가히 인생책이라 부를 만하다. 내년에 다시 한 번 읽어볼 생각이다.

A부터 시작해서 Z에 이르는 삶의 여정 그리고 내 삶의 근원을 찾아 가는 구도의 과정에서 구원 비스무레한 무엇인가가 느껴졌다. 무언가 거창하게 표현하고 싶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나의 능력 밖이지 싶다. 이 책으로 단박에 시배스턴 폭스 작가의 팬이 되어 버렸다.

 

<파리 에코> 원서도 샀지만, 어디선가 먼지를 조용하게 뒤집어 쓰고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읽지도 않을 책은 왜 샀냐고 묻지 마라.


2. 보라색 히비스커스 -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한 시절 인도가 세계 문학을 이끌어 나가리라는 전망이 있었다. 다음 주자는 검은 대륙의 나이지리가가 될 모양이다. 그런데 조국을 떠나 미국에 둥지를 튼 아디치에 작가를 나이지리아 작가로 칭해야 할지 아니면 미국 작가로 불러야 할지 고민이다.

 

먼저 소개된 <아메리카나>는 읽다 말았는데, 데뷔작 <보라색 히비스커스>는 놀라운 흡입력으로 단숨에 읽어 버렸다. 아마 폭스의 <바보의 알바벳>이 아니었다면 올해 내가 만난 최고의 책으로 꼽아도 무방하지 않았을까 싶다.

 

포스트콜로니얼 시대 전통과 현대의 충돌, 예의 갈등을 그대로 받아내야 하는 가정 문제가 어우러지면서 빚어내는 서사에 그만 반해 버렸다. 정녕 이게 데뷔작이란 말인가. 그저 놀랄 뿐이었다.


3. 빅 브러더 - 라이오넬 슈라이버


이제 연락이 안되는 내 동창 친구는 술자리에서 가족이 원쑤라며 한탄을 했다. 그녀의 가족사에 얽힌 이야기를 나중에 전해 듣고 이해가 됐다. 가족이 진짜 원쑤였다. 하지만 직접 체험해 보지 않은 상태에서 아직 원쑤까지는 된 것 같지 않다. 어쨌든.

 

나의 피붙이가 나에게 빌붙으려 한다면 나는 과연 어떻게 반응할까. 타인에게 민폐를 끼치지 말고 살자가 나의 삶의 모토 중의 하나인데. 재즈 피아니스트 오빠가 엄청나게 살이 찐 상태로 나를 찾아온다. 오빠 때문에 나의 결혼 생활이 위기에 빠져든다. 나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일까.

 

모든 사회적 출발의 원점에 해당하는 가족 문제를 예리하게 해부한 라이오넬 슈라이버의 탁월한 분석에 그리고 매 고비마다 등장하는 새로운 유형의 갈등이 새콤달콤 쌉싸름하기까지 하다. 오래 동안 묵혀 두었다가 읽은 보람이 있었다. 그전에 읽다만 슈라이버의 <내 아내에 대하여>도 읽어야 하는데.


4. 그리스도는 에볼리에 머물렀다 - 카를로 레비


말이 필요 없다. 우리에게는 정말 알려지지 않은 이탈리아에서 무솔리니의 파시즘이 기승을 부리던 시절, 반파시스트 운동에 나섰다가 시골 마을로 유배된 청년 지식인의 값진 기록이다.

 

모든 민중을 사랑하는 그리스도 마저 에볼리에서 멈출 정도라는 표현이 심금을 울린다. 신마저 민중을 외면한다면 그들의 희망은 도대체 어디에서 찾아야 한단 말인가.

 

중앙 정부에서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던 진짜배기 이탈리아 민중 사이에서 지내며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것들을 취합해서 펴낸 레비의 글이 국내에 소개된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이다. 나탈리아 긴츠부르그의 <가족어 사전>과 함께 읽어볼 것을 권한다.


5. 가재가 노래하는 곳 - 델리아 오언스


사람들이 애정하는 책이라면 다 이유가 있는가 보다.

인스타에 끝도 없이 올라는 피드에 떠밀리다시피 해서 읽게 된 책인데 놀라웠다.

천조국의 자연과학자는 소설도 잘쓰는가 싶었다.

 

바닷가에 아무도 없이 홀로 살게 된 카야의 고독하고 외로운 삶에 공감이 갈 수 있도록 델리아 오언스 작가는 정교하게 짜인 플롯으로 독자를 유혹한다. 삶은 그렇게 무지갯빛으로 오색찬란하게 비추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너무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게 아닌가 싶지만 어쩌겠는가 그게 진실인 것을 말이다. 진실은 정말 아프고 고통스럽기 마련이다. 그것이 인정하고 싶진 않은 진실의 이면이라는 걸 이 책을 통해 깨닫게 된다.

 

어떤 종류의 깨달음이든지 제공해 주는 책이라면 책쟁이가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6.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 - 리처드 플래니건


모든 것은 시절인연이다. 책도 마찬가지다. 어떤 책을 기를 쓰고 읽으려고 해도 안되고 또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지 않은가.

 

리처드 플래니건의 <먼 북>은 세 번의 도전 끝에 다 읽을 수가 있었다. 책의 어딘가에 나오는 인간 존재의 한없음이야말로 작가가 소설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사랑한다고 해서 사랑하는 사람과 백년해로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같이 사는 부대낌이 사랑의 감정을 휘발시켜 버릴 지도 모를 노릇이 아닌가. 그러기에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이 더 애절하고 뭐 그런 것이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는 재료에 전쟁포로로 시암에서 버마로 가는 철도 부설공사에 내몰린 오스트레일리아 전쟁포로에 대한 고통의 연대기 한 자락을 깐다. 기아, 고문, 학대 같은 폭력에 시달리면서도 인간의 존엄성을 포기하지 않은 불굴의 정신을 저자는 예리하게 짚어낸다.

 

하이쿠를 사랑하는 민족인 일본인들이 가해자인 전쟁에서 자신들도 피해자라며 악을 쓰며 대드는 장면을 대표적인 피해자 민중들은 도대체 어떻게 받아 들이란 말인가. 이것 역시 하나의 폭력이 아니던가. 역사학을 전공한 작가답게 플래니건의 서사는 강렬한 진실의 힘으로 때로는 논쟁적 주제를 피하지 않는 당당함으로 독자에게 어필한다. 대단한 책이다.



7. 작은 불씨는 어디에나 - 실레스트 잉


좋은 책은 어떻게든 만나게 된다. 지난봄에 만났다가 <타임>이 도와줘서 지난달에 결국 읽게 됐다.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기시감 아니 기독감은 레알이었더라. 그리고 반가웠다.

 

이제 더 이상 하나의 나라가 아닌 민주당을 지지하는 이들과 공화당을 지지하는 이들로 갈려 버린 미국 사회의 오늘에 대한 정밀보고서가 아닌가 싶다.

 

1997년에서 1998년으로 넘어가는 미국 사회는 그 유명한 클린턴 스캔들로 몸살을 앓았다.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성추문, 케네스 스타 리포트에 등장하는 포르노소설을 능가하는 슈퍼리얼리티는 진짜 끝장이었지. 당시 신문 지상에 나온 케네스 스타 리포트 전문이 실린 신문을 어디에 보관해 두었을 텐데.

 

또 한편에서는 생산수단 유무에 따라 초래된 부의 불평등은 양극화의 본질을 그대로 드러낸다. 미아 워런과 펄이 한 편이라면, 리처드슨 가족은 상위 그룹을 형성한다. 태생부터 다른 이방인인 펄과 미아가 차례로 리처드슨 가족의 삶에 개입하면서 빚어지는 인생 드라마는 정말 압권이었다.

 

21세기 미국사회가 가지고 있는 부의 분배문제, 인종주의, 입양문제, 십대의 섹스 이슈 등등 거의 전반을 소설 <작은 불씨는 어디에나>는 정면에 대고 선전포고를 날린다. 그 어떤 주제도 피해갈 의도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실레스트 잉 작가가 대단하다는 평가를 받는 게 아닐까. 작은 불씨치만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면, 큰 불로 번질 수 있다는 게 <작은 불씨는 어디에나>의 알파와 오메가를 장식하는 그 무언가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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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외편] 까비 3


1.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 - 치누아 아체베


나이지리아 출신 대가의 작품이 내뿜는 아우라는 대단했다.

대선배의 뒤를 딸 신예 치고지에 오비오마도 아마 그의 작품에서 타령을 한다지.

미지의 대륙에서 연이어 터지는 젊은 선수들의 선전을 기대해 본다.


2. 광대 샬리마르 - 살만 루슈디


이 한 편으로 집에 있는 살만 루슈디의 책들을 찾아 나서게 됐다.

여러 권 있지만 제대로 읽은 책이 없다는 게 함정.

대표작 <한 밤의 아이들>은 읽다 말았다.

카슈미르를 배경으로 전개되는 샬리마르의 슬픈 서사.


3. 올드 스쿨 - 토바이어스 울프


오랫동안 고대해 마지않던 토바이어스 울프 쌤의 책이 드디어 출간됐다.

말이 필요 없다. 부디 계속해서 울프 쌤의 작품들을 뽑아내 주시길.

파라오와 그의 특기라는 <단편집>을 속히 만날 수 있길 비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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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9-11-30 13: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너무 빨리 뽑으신 것 아닙니까?
아직 한 달이 남았는데...
그래도 책 많이 읽으시는 매냐님께서 이렇게
7권을 뽑으신 걸 보면 꽤 실하고 좋은 책인가 봅니다.
참고하겠습니다.^^

레삭매냐 2019-12-01 19:22   좋아요 0 | URL
이런 걸 선빵이라고 부른다고 하더군요 ㅋㅋ

다른 분들의 베스트와 차별성을 강조하고나
좀 이른 시점에서 쓰게 되었네요.

참고, 감사합니다.

coolcat329 2019-11-30 16: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7권 중 2권 읽었네요. 근데 160 권! 대단하세요. 저는 앞에 1을 빼야하는데... 다른 책들도 기억해두겠습니다. 남은 한 달 12월 책도 기대할게요.

레삭매냐 2019-12-01 19:23   좋아요 1 | URL
이달에는 그전에 벌려두고 미처
읽지 못한 책들을 정리하는 것으로...

그렇게 일년이 또 지나가 버렸네요.

120퍼센트 2019-11-30 19: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다 읽어보고싶습니다

레삭매냐 2019-12-01 19:24   좋아요 1 | URL
지극히 주관적인 독서라 다른
독자들도 저와 비슷한 경험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카알벨루치 2019-12-07 20: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진만 올리시면 책추가가 어렵습니다 ㅜㅜ상품추가가 안되서~레삭매냐님 스탈^^오홋!

레삭매냐 2019-12-07 22:39   좋아요 1 | URL
아 그렇군요.

사진만 떨렁 걸 게 아니라 링크가
필요했군요.
사진에 링크를 거는 법은 없을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