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전목마의 데드히트 - 개정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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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을 위해 건물에 들어서는 순간 구내식당에서 점심 준비가 한창인지 쌉싸름한 우엉조림 냄새가 코를 찌른다. 계속해서 구내식당 밥이 그냥저냥 하던데, 나가서 사먹을까 아니면 그냥 구내식당에서 먹을까. 전자는 내 돈이 들고, 후자는 공짜다. 그나저나 춘수 씨 정말 이럴 거야?

 

며칠 전부터 서가에서 얌전하게 잠자고 있던(자그마치 6년 동안이나) 춘수 씨의 단편 소설집들을 차례차례 읽고 있는 중이다. <빵가게 재습격>은 어디에 있나. 이 참에 마저 다 읽어야 하는데.

 

춘수 씨가 업계의 고수라는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의 팬이라는 말은 절대 아니다. 그는 자신의 소임을 책을 쓰고, 책쟁이는 그의 소임인 책을 읽을 뿐이다. 게다가 서가에 책이 있는데 읽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말이다.

 

서문에 춘수 씨는 이번 소설집이 사실과 소설의 어중간한 어디라고 선언했던가. 나중에 가서는 다 구라고 또 모두가 소설이라고 하질 않나. 어쨌든 소설은 카무플라주이던 아니던 간에 듣고 쓰기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사실 좀 김이 샜다. 원래는 그래서 소설가들이 그렇게 글을 쓰지 않은 순간에는 산삼을 노리는 심마니처럼 이야기를 채취하기 위해 사람들을 부지런히 만나러 다닌다 뭐 그런 식의 전개를 노렸는데 말이다.

 

삼십대 초반의 춘수 씨는 자신감으로 가득한 그런 느낌이다. 뭐랄까 전형적인 일본 사람의 모습이라고나 할까. 타인의 공간에는 절대로 제 멋대로 침투하지 않는다. 다만, 그가 허용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것은 마치 뱀파이어 같다는 느낌이랄까. 춘수 씨가 만들었는지 아니면 어디서 들었는지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들은 확실히 흥미롭고 짜임새가 있으며 그가 어느 소설지망가 은행원에게 말했던 것처럼 템포까지 두루 갖추고 있다. 이런 요소들이 삼십대의 춘수 씨가 가지고 있던 자신감의 원천이 아니었을까.

 

잘 들은 이야기를 자신만의 이야기로 체화시키는 것도 기술이라면 기술일 것이다. 게다가 그 주체가 소설가라면 더더욱 필요한 기술이지 않을까. 섹스가 산불(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처럼 공짜라고 생각하는 춘수 씨는 우연히 만난 출판사 직원이 직장과 애인을 잃고 낯선 사람들에게 돈을 받고 관계를 맺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우리는 왜 잘 모르는 이들에게 그런 내밀한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걸까. 일상화된 상실과 내재화된 고독이 파편화된 개인을 그렇게 만든 게 아닐까. 상대에게 자신은 얼마면 되겠냐고 대범하게 묻는 춘수 씨의 당돌한 질문 앞에 할 말을 잃는다. 물론 춘수 씨는 그 선을 넘지 않는다 절대로. 선을 넘지 않는 우리의 춘수 씨. 그렇게 얻은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걸까. 그녀의 피스타치오 까는 소리가 좋았더라, 이런 건 도대체... 선밴님!

 

반바지(레더호젠) 때문에 지긋지긋한 결혼생활과 사랑하는 딸마저 인생에서 지워 버린 엄마의 이야기는 또 어떤가. 우리는 모두 어쩌면 삶에서 어떤 획기적인 계기가 필요했는 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함부르크에서 시간을 들여 방문한 레더호젠 장인들의 가게에서 그들이 그런 엄격한 요구를 하지 않았다면, 과연 이혼이라는 결심에까지 도달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짝사랑에 빠진 동아리 청년 대학생은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관찰에 나선다. 물론 그 청년의 이야기는 도를 넘어선다. 그냥 주변에서 어정거리면 좋았을 것을, 보다 적극적인 행동에 나선다. 야구장 근처에 집을 세내고, 아버지에게 빌린 망원카메라 렌즈로 그녀를 훔쳐보기 시작한다. 이놈의 자식, 정말. 그렇게 도를 넘어선 스토킹은 청년의 영혼과 몸을 모두 망쳐 버린다. 자신의 본업인 공부는 뒷전이고, 씻지도 않고 오로지 망원렌즈로 그녀를 훔쳐보기에만 열중인 것이다. 방학이 되었고, 그녀는 떠났으며 대상이 없어진 청년은 다시 정상으로 돌아오게 되었다는 이야기. 그러니까 그런 것들도 모두 한 시절의 충동이 빚어낸 환영 뭐 그런 게 아니었을까. 간단하다, out of sight, out of mind. 다만 모든 일이 그렇 듯 시간이 좀 필요할 뿐. 소설의 어디선가 그런 서로 지워가는 시간에 대한 문구를 읽었던 것 같은데 메모를 하지 않아서인지 어쩐지 못 찾겠다. 그 땐 참 그 부분이 마음에 와 닿았는데 말이지.

 

사람은 뭔가를 지워버릴 수는 없다-지워지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59)

 

춘수 씨 덕에 1980년대 초반 그야말로 끗발 날리던 빌리 조엘의 노래를 다시 찾아서 들어봤다. 폐쇄된 철공소에 대한 이야기를 그린 노래는 <앨린타운>이었고, 베트남 노래는 <굿나잇 사이공>이더라. 모두 1982년에 발표된 그의 LP <나일런 커튼>에 수록된 곡이지. 앨범은 그다지 히트치지 못한 듯. 과연 춘수 씨는 추억을 멋들어지게 소환해내는 이야기의 주술사가 아닌가 싶다.

 

그냥 춘수 씨의 이야기와 조언을 들으니 나도 문득 이야기를 써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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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02 11: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삭매냐 2020-04-02 15:16   좋아요 0 | URL
네 맞습니다.
활자중독자는 외출 할 때, 혹시라도
읽게 될 지 모르니 뭐라도 들고
나서지 않으면 불안증에 시달리게
되죠.

점심 먹고 나서 카페에 가서 <반딧
불이>를 절반이나 읽었네요.

이러다가 노트와 연필로 챙길 판이네요.

서니데이 2020-04-04 15: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무라카미 하루키 책은 계속 개정판이 나와서, 오래 전 책도 신간처럼 느껴져요.
레삭매냐님, 좋은 주말 보내세요.^^

레삭매냐 2020-04-06 13:34   좋아요 0 | URL
말씀해 주신 대로 책들이 원체
다양한 판형으로 계속해서 나오다
보니 다 새롭게 느껴지네요 :>

주말 인사 감사합니다.
 
중국행 슬로보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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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막 베트 미들러가 부른 흥겨운 스타일의 <중국행 슬로보트>를 들었다. 뭐 춘수 씨의 첫 번째 소설집 <중국행 슬로보트>랑 뭔 상관이 있는 진 모르겠지만 아무튼. 어제 <나이트우드>를 다 읽고 나서 후련한 마음에 집에 가려는데, 가방에 읽을 책이 없는 게 아닌가. 그래서 사무실 책장에 쟁여둔 책 중에서 아무 책이나 한 권 집어 들었다. 얍실하니 3월의 대미를 장식하기에 아무런 부담이 없는 그런 책으로. 그리고 춘수 씨의 <중국행 슬로보트>가 당첨!

 

집에 가는 길에 표제작인 <중국행 슬로보트>를 다 읽었다. 긴 거리도 아닌데, 역시 춘수 씨의 가독성 하나는 알아 주어야 한다니깐. 두 편의 장편을 발표하고, 그야말로 풋내기 작가 시절에 여기저기서 청탁을 받아 쓴 7편의 단편들이 오롯하게 수록된 게 바로 <중국행 슬로보트>. 오래 전에 득템해둔 책인데, 6~7년이 지나서야 읽게 되다니. 나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춘수 씨의 팬은 아니라고 하면서 꾸역꾸역 그의 책을 읽는 건 또 무언가. 아마 줄리언 반스의 경우가 비슷한 게 아닐까.

 

1990년대 춘수 씨의 책들이 우리나라에서 거의 센세이션을 일으켰는데 가만 그 이유를 다시 생각해 본다. 참고로 그 시절에는 춘수 씨에 대해 관심도 없었고, 책도 거의 읽지 않았다. 그 땐 뭐하고 지냈는지 모르겠다. 춘수 씨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쿨함에 우선 포인트를 주고 싶다. 주인공은 절대 선을 넘지 않는다. 요즘 한참 대세라는 누구처럼 마구잡이로 들이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시대를 넘어온 세대들이 이제는 사회의 움직이지 않는 꼰대로 자리 잡았지만, 암튼 그 땐 그랬지.

 

자신이 원하지 않은 일은 타인에게도 강요하지 않는다. 잔디 깎는 청년은 물론 어느 사모님과 일탈에 빠지기도 한다. 마지막 일터에서는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면서 고용주가 주는 샌드위치와 맥주를 넙죽넙죽 받아먹는다. , 어디선가 누군가가 제공하는 선의를 잘 받아들이는 것도 능력이라고 했던가. 설렁설렁 일하는 다른 이들과 달리 자신은 일이 재밌어서(그것도 역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보수에 상관없이 열심히 잔디를 깎았다고. 요런 쿨함이 바로 삼십대 초반 춘수 씨의 장점이었나 보다. 소설을 읽다 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들도 다수 등장하지만,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이해할 필요가 있나 하는 마음으로 휙휙 넘긴다. 가난한 아주머니를 등에 업고 지낸다는 설정은 좀 그랬다. 이게 뭐야!

 

표제작에서는 중국인 친구들과의 만남에 대한 춘수 씨의 경험으로 추정되는 이야기들이 등장한다. 시험을 보러 가서 만난 중국인 샘의 이야기는 불과 수십 년 전에 대륙에서 서로 죽이는 그런 관계였던 두 민족 사이에서 화해가 가능한 지, 그 점이 나는 궁금했다. 뭐 아직 영맨이었던 시절 춘수 씨의 천진난만함 아니면 특유의 정치적 무관심 때문이었을까. 전공투 세대라는 사람이 어쩌면 그렇게 무심할 수 있는지도 참.

 

애인과 싸우고 호텔에 지내면서 아마도 피아노 레슨을 하는 젊은 여자와 하는 게임에 대한 이야기가 제일 흥미로웠다. 애인과 한바탕 싸우고 둘이 와야 할 휴가를 홀로 지내는 주인공. 게다가 5일 예약을 숙소에는 연일 비가 내린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아무 일도 없어야 정상이겠지만, 매력남 춘수 씨가 가는 곳에는 언제나 이야깃거리가 넘친다. 한물간 책들로 비수기 호텔 도서관에서 만난 묘령의 여인과 스무고개 게임을 하는 춘수 씨의 젊은 날은 정말 스타일 넘치는 재기로 가득했다. 셜록 홈즈 뺨치는 추리력으로 상대방의 신뢰를 얻고, 지평을 넓혀가는 탁월한 재주란! 게다가 역시나 그는 절대로 선을 넘지 않는다. 절묘한 후퇴 전략으로 상대방을 자신의 영역으로 끌어 들인다. 연애의 고수만이 구사할 수 있는 기막힌 재주가 아닐 수 없다.

 

3월의 마지막 20분을 남겨 두고, 춘수 씨의 <중국행 슬로보트>를 다 읽었다. 개운했다. 가끔은 이런 불량식품 같은 맛의 책을 읽는 것도 독서의 즐거움이 아닌가. 너무 딱딱하고(어제 읽은 <나이트우드>가 그랬다), 읽어야 하는 책이라고 해서 읽는 그런 독서가 아닌 무한의 자유로움이 배어 있는 그런 독서 말이다. 책장을 보니 춘수 씨의 <반딧불이><회전목마의 데드히트>가 더 있더라. 나중의 슬럼프를 대비해서 이 책들은 예비해 두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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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트우드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67
주나 반스 지음, 이예원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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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한다. 주나 반스의 기념비적이라는 모더니즘 소설 <나이트우드>를 읽기 전에 윤조원 교수님의 강의를 듣지 않았다면 가뜩이나 이해가 어려운 이 소설을 포기해 버렸을 것이다. 사실 이번에 세 번째다. 지난달 초에 책을 사서, 세 번만에 다 읽었다. 물론 시도를 거듭할수록 진도는 더 나갔지만, 나의 책에 대한 이해는 더 나아지지 않았다. 그저 <나이트우드>를 다 읽었다는 것 하나만으로 만족하고 싶다. 지금은 적어도.

 

소설 <나이트우드>에는 네 명의 주요 인물들이 등장한다. 첫 번째 선수는 가짜 남작 펠릭스(이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폴크바인, 그의 부인 바로니 로빈 보트, 로빈을 그야말로 죽도록 사랑하는 노라 플러드 그리고 또다른 연인 제니 페더브리지다. , 정말 중요한 선수 한 명을 빼먹었다. 무면허 의사이자 밤의 제왕이라고 할 수 있는 아일랜드계 미국인 매슈 오코너. 그가 없었다면 소설은 아예 진도가 나가지 않았으리라.

 

소설은 사랑과 죽음을 비롯한 삶의 모든 분야를 다룬다. 모더니즘 소설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이며 동시에 아무 것도 아닌 그런 이야기들이 독자의 이해 영역을 마구 헤집어 놓는다. 베를린과 파리, 빈 그리고 뉴욕을 넘나드는 밤의 주인공들은 우리의 고민해결사 돌팔이 의사 매슈 오코너에게 모든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나에게 밤은 어떤 시간인지 묻는다. 나에게 밤은 사유의 시간인 동시에, 책을 읽기에 너무나 좋은 시간이다. 밤에 지펴지는 어둠은 사유를 위한 완벽한 조명이 아닐 수 없다. 밤은 자신을 돌아보게 해주는 그런 시간이며, 내가 맺고 사는 관계에 대해 되짚어 보게 해준다. 밤이 그런 생각의 시간이라면, 낮은 정리된 생각들을 실행하는 그런 시간이라고나 할까.

 

<나이트우드>에서 무언가 액션이 이루어지는 그런 서사는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주인공들 간에 벌어지는 애증의 관계, 집착에 대한 해설과 의미 부여는 우리의 수다꾼 매슈가 도맡아서 해결해 준다. 겉으로는 화려한 시절이지만, 등장인물들은 하나 같이 상실이라는 깊게 베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돌팔이 의사를 찾는다. 밤이라는 시간과 돌팔이 의시가 그야말로 끝없이 늘어놓는 수다의 힘은 상상을 초월한다. 아니 그의 두서없이 펼쳐지는 수다 가운데,이미 우리가 기대한 해결책이 숨어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주나 반스가 구사하는 다이얼로그에 명징한 해답을 기대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굳이 모든 걸 이해하려고 애쓰지 마라, 강의 어디선가 만난 윤조원 교수님의 일갈은 나에게 그야말로 한줄기 빛이었다.

 

내가 읽어 내리는 문장들을 굳이 이해해 보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지? 문장으로 치환된 주나 반스 작가의 내면화된 세계, 혹은 상실감 같은 감정들에 대해 아는 바가 없으니 더욱 갑갑할 수밖에 없다. 아니 이러다 나는 영영 모더니즘 소설과는 담을 쌓고 살 게 되는 게 아닐까? 두려우면서도 아쉬운 마음이 스치고 간다. 또 다른 모더니즘 걸작이라는 <제노의 의식>도 고이 모셔 두었는데, 아예 읽지도 말아야 하나 하는 고민에 휩싸인다.

 

개인이 맺는 관계는 모두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펠릭스보다 더 방황하는 유대인에 가까운 로빈의 심리는 어떻게 파악해야 할까.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오로지 자식을 재생산하기 위해 미국인 로빈을 배우자로 맞은 행운아의 아들은 성직자가 되겠다고 선언한다. 행운아의 아버지는 가짜 귀족행세를 하는데 공을 들인다. 이제는 끝장나 버린 신분제 사회의 끝자락에 대한 미련이라고 할까.

 

솔직히 말해서 로빈과 노라 그리고 제니 사이에 전개된 삼각관계에 대해서는 작가가 구사하는 감정선을 따라가지 못했다. 다만 그들이 중계인으로 등장하는 젠더퀴어 매슈 오코너의 역할은 흥미로웠던 것 같다. 아마 그가 없었더라면 나는 <나이트우드>를 억지로라도 끝까지 읽지 못했으리라. 이해를 하지 못하면서도 끝까지 읽는 건 또 무언가. 매슈 오코너의 지휘 아래, 아무리 공감을 시도해 봐도 명징하지 않은 서사 가운데 내밀한 은유와 상징들을 잡아내기란 나에게 처음부터 불가능한 미션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악전고투 끝에 <나이트우드>를 다 읽는 것으로 3월의 대미를 장식하게 되어 기쁘다. 윤조원 교수님의 <나이트우드> 강의를 다시 한 번 들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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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20-04-01 08: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 좋아하는 지인은 이 책이 재미없다고 했어요. 그래도 퀴어 문학을 논할 때 언급되는 작품이라서 한 번은 읽어야봐야겠어요. ^^

레삭매냐 2020-04-01 09:09   좋아요 0 | URL
솔직히 책은 재미 드럽게~ 없습니다.

모더니즘 소설의 기념비적인 작품
이라는 선전 때문에 읽기는 했는데
영~ 감흥이 없네요.

퀴어 문학에 대한 부분도 그닥...
 
망자들 을유세계문학전집 101
크리스티안 크라흐트 지음, 김태환 옮김 / 을유문화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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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에는 스위스 출신 작가 크리스티안 크라흐트의 신간 <망자들>을 읽었다. 일본 가무극인 노에서 따온 조()-()-()3단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왜 느닷없이 독일어 작가가 일본 가무극 타령이냐고. 그건 소설을 만나 보시면 바로 알 수 있다.

 

1930년대 초, 동서양의 독일과 일본은 제각각 다른 스타일의 파시즘 국가로 변신 중이었다. 전자가 아돌프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즘, 국가사회주의 스타일이었다면, 일본은 만주사변으로 중국 동북부를 침공하고 탈아입구라는 메이지 유신 이래 구호를 들고 아시아의 패자가 되겠다는 군국주의 파시즘이 대세였다.

 

베른 출신 에밀 네겔리는 영화감독이다. 당대를 주름잡던 프리츠 랑이나 무르나우 혹은 에이젠슈타인에 버금가는 그런 영상감각을 가진 유망주로 등장한다. 그리고 독재자였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소설 <망자들>에는 제목처럼 사방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소설의 다른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아마카스 마사히코가 사는 일본에서는 셋푸쿠(할복)하는 사무라이를 몰래 촬영한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었다.

 

극와 극은 항상 서로 어떤 동질감을 느끼기 마련이다. 유년 시절, 천재소년이었던 역사적으로 만주국의 요괴였던 아다마스는 제국의 선전물 제작과 미국의 문화제국주의에 저항하기 위해 다른 영화 선진국이었던 독일에 영화 전문가를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한다. 아다마스는 어쩌면 독일 자본과 기획으로 양성된 파시스트였는지도 모르겠다. 크리스티안 크라흐트는 실존 인물을 기묘하게 비트는 방식으로 소설에 긴장감을 잔뜩 불어 넣는다.

 

우파(UFA, 처음에는 나치 우파 영화사로 잠깐 착각했었다) 영화사의 후겐베르크는 실력 있지만 해외로 파견하는데 전혀 부담이 없는 에밀 네겔리를 선택해서 일본에 보내기로 결정한다. 예나 지금이나 영화 산업에는 막대한 자본이 든다. 한 마디로 영화를 만들기 위한 기술력과 기획은 어떻게 해볼 수 있지만, 그 영화를 실제로 만들기 위해서는 돈이 든다는 현실을 외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본과 예술의 접목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게 셀룰로이드 추축은 착착 현실화되어 간다.

 

물론 후반의 비극적 전개를 위한 부비트랩을 조심스레 설치하는 것도 작가는 잊지 않는다. 우매한 독자는 작가의 그런 세심한 설정보다는 일본 군국주의자들과는 전혀 정서가 맞지 않는 찰스 채플린이 등장하고, 네겔리의 독일 애인 이다가 참석한 자리에서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시베리아 출병을 의미하는 북진론과 남방의 천연자원을 얻기 위한 남진론이 대결하는 대화에 더 관심이 갔다. 당시 일본 제국의 주력이었던 만주의 관동군은 소련을 주적으로 상정해서 전쟁에 대비하다가, 결국 해군이 중심이 된 남방작전으로 수정되면서 동남아 정글에서 연합군을 상대로 전쟁을 치르지 않았던가.

 

사실 노의 1막에 해당하는 조()에서는 지루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이야기가 느릿하게 흘러가는 걸까. 하지만 2막인 하()에서는 비로소 흥미진진한 서사가 등장하고 달리기 시작한다. 찰스 채플린 호위에 나선 무뚝뚝한 표정의 일본 장교가 딸 아이에게 줄 채플린에게 사인을 아다마스에게 요청하는 장면은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엘리트 청년으로 성장한 아다마스가 사소한 복수에 집착했고, 방화범이기도 했다는 점은 그의 천재성을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마지막 규()는 진짜 비극의 재현이자 일본을 방문한 가이진(外人) 네겔리의 부서진 영혼이 어떻게 타격받았는지를 마치 카메라의 필름 롤이 도는 듯한 생생한 현장감으로 중계된다.

 

크라흐트 작가는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그리고 흑백필름에서 컬러필름으로 넘어가는 영화의 역사적 순간을 포착해낸다. <동경 이야기(Tokyo Story)>의 대가 오즈 야스지로는 이미 1930년대에 일본을 대표하는 영화감독이었던 모양이다. 굳이 영화의 미적 아우라를 해치는 사운드트랙이 필요한가라는 시네마틱 질문에 대해서는 그 시절 영화에 대한 지식의 부족으로 더 할 말이 없을 듯 싶다. 흑백 필름으로도 영화의 미적 영상미를 재현해 내는데 전혀 부족함이 없다는 의견에 대해서도. 이런 영화적 난제들까지 크라흐트가 의도적으로 커버했다면, 소설에 둘러져 있던 완벽한 소설이라는 띠지는 전혀 과대광고가 아닐 것이다.

 

우파 영화사의 유일신 후겐베르크는 유대계 지식인 지크프리트 크라카우어와 로테 아이스너에게 포섭된 네겔리에게 일본으로 건너 가 동양적 야만성을 포착하라고 지시한다. 서구 제국주의적 사고의 발로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 재능 있는 감독은 제작자의 의도에 따라 꼭두각시가 되어 하라는 대로 영화를 만들 계획은 눈곱만큼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야말로 아티스트로서 자존감을 지키고 싶어서였을까? 후반으로 갈수록 소설은 사실 대신 죽음이 다양하게 얽힌 변주곡으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크라흐트의 <망자들>은 가이진이 바라 본 정적인 일본 문화에 대한 시선, 독일과 일본 두 제국이 경쟁하듯이 영화를 이용한 선전전에 나서게 되는 일련의 과정 그리고 부유하는 죽음에 대한 사유들로 복잡한 그런 소설이었다. 엔딩에 등장하는 덧없는 죽음 역시 겉보기에 화려한 할리우드의 삶을 좇는 부나방 같은 그런 게 아니었을까. 다른 건 몰라도 엔딩 하나는 정말 화끈했다. 이제 읽다 만 크라흐트의 <제국>을 다시 펼쳐 들어야 할 시간인가.


Vanitas vanitatum et omnia vanit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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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 호텔 대산세계문학총서 145
비키 바움 지음, 박광자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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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오래 읽을 만한 책도 아닌데 수차례나 시도한 끝에 마침내 다 읽을 수가 있었다. 이번에도 중간에 다른 책들을 만나느라 시간이 지체되긴 했지만 한 5일 정도 걸린 것 같다. 그전에 138쪽 정도를 읽다 말았는데, 그 부분부터 소설이 흥미진진해지더라. 후반으로 갈수록 재밌어지는 그런 느낌. 중고로 산 줄 알았는데 새 책으로 샀나 보다. 산 지 2년만에 읽을 거였으면 중고로도 만날 수 있었는데 아까비.

 

오스트리아 빈 출신 유대인이었던 비키 바움은 생전에 수많은 작품들을 발표했지만, 국내에 현재 구할 수 있는 책은 <그랜드 호텔> 뿐이다. 1929년에 발표된 책으로 이미 두 번이나 영화화되기도 했고, 브로드웨이 뮤지컬로도 만들어졌다고 한다.

 

1920년대 경제공황이 닥치기 전, 흥청거리던 호황 시절 베를린의 유명한 <그랜드 호텔>이 소설의 공간적 배경으로 등장한다. 내가 보기에 그랜드 호텔은 갖가지 욕망이 충돌하는 그런 공간이다. 욕망의 공간을 채우는 건, 끓어오르는 다양한 욕망의 주인공들일 수밖에 없다.

 

1차 세계대전에서 수류탄 부상으로 얼굴의 반쪽이 날아간 오터른슐라크 박사는 그랜드 호텔의 터줏대감이다. 그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비용으로 소위 후진 객실에 머물면서 자신을 찾는 사람이나 편지가 없냐고 항상 묻는 버릇을 가지고 있다. 그는 프로이센 제2제국 시절의 영화를 대표하는 선수가 아닐까 싶다.

 

다음 주자는 프레더스도르프 출신 경리 보조 오토 크링엘라인이다. 지난 20년 동안, 장작 비용을 아끼기 위해 아침마다 아내를 위해 장작을 패온 사나이. 그는 이제 죽을 병(위암?)에 걸려, 27년간의 작소니아 방직회사 경리일을 때려치우고, 얼마 안 되는 유산을 가지고 공화국으로 변신한 새로운 국가의 수도 베를린에서 행복한 순간을 만끽하기 위해 달려왔다. 문제는 일만 하는 개미 같은 사나이다 보니, 즐기는 방법을 하나도 모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시라. 비키 바움 작가는 그런 크링엘라인을 위해 몰락한 남작 가문 출신의 한량 가이거른을 준비시켜 놓았으니 말이다. 세상만사가 다 그렇게 흘러가는 거지. 유흥의 순간을 고대하는 크링엘라인에게 오터른슐라크 박사의 진중한 발레 공연 초대나 인생은 결국 모두가 빈 껍질 같다는 현학적인 충고보다 젊은 가이거른 남작이 제안하는 아찔하게 과속으로 달리는 드라이브, 자신의 내면을 강화시켜 준 과소비 그리고 베를린 상공을 질주하는 곡예비행이 더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홍일점으로 배치된 러시아 출신 발레리나 그루진스카야는 자신의 진가를 몰라주는 베를린 공연에 회의를 느낀다. 공연가들은 모름지기 관객들의 박수의 힘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아닌가. 중년의 발레리나는 어느 날 밤, 자신의 방에 침입한 젊고 멋쟁이 남작의 매력에 흠뻑 빠져 삶의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된다. 그리고 불타는 연애 감정에 힘입어 그전보다 훨씬 더 매력적인 퍼포먼스를 보여 주게 된다. 어쩌면 비키 바움 작가는 원효대사의 유심론을 알고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모든 건 내 마음 먹기에 달렸노라는 유심론의 정수를 예리하게 파고든다. 문제는 그루진스카야의 새로운 연인이 된 멋쟁이 가이거른 남작이 사실은 그녀의 50만 마르크짜리 진주를 노리고 그녀의 객실에 숨어든 도둑이라는 점만 빼고는.

 

바로 삶이야말로 이런 아이러니의 연속이라는 걸 저자는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평생 정직하게 살아왔다는 크링엘라인의 직속상사 프라이징 총회장은 또 어떤가. 순전히 마누라 잘 만난 덕에 부르주아 계급으로 수직상승한 졸부는 켐니츠 사와의 합병을 위해 영국 회사와의 협상이 결렬됐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거짓 정보를 흘리면서 계약을 성사시키지 않았던가. 그의 그런 일탈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속기르 위해 고용된 매력적인 여성 플람2와 바람을 피우면서 파멸로 치닫기 시작한다.

 

홀연히 등장해서 프라이징 총회장의 심기를 건드리는 역할을 자처하게 된 미스터 크링엘라인의 활약도 주목할 만하다. 겉보기에는 점잖은 부르주아 신사처럼 보이는 프라이징이 사실은 돈 밖에 모르는 속물이고, 직원들의 안위 따위에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는 악당이라는 사실을 그의 새로운 고용된 애인 플람2에 앞에서 가감 없이 까발리는 쾌거도 선사해준다.

 

개인적으로 이 소설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인물이 바로 크링엘라인일 수밖에 없었다. 시한부 인생이라는 숙명 때문에 절박하게 새로운 삶의 행복을 추구하게 되었지만, 가이거른 남작의 도움으로 하루 동안 자신의 1년치 연봉에 해당하는 돈을 펑펑 써대면서 자존감을 회복하는데 성공한 전직 경리 보조 아저씨는 평소라면 앞에서 굽실거릴 처지의 상사에게 지난 27년 동안 가슴에 담아 두었던 말들을 모조리 포탄으로 쏘아 올린다. 아 진심으로 통쾌하구나. 그리고 총회장은 감방으로, 총회장의 새로운 애인을 가로챈 중년 사나이는 영국으로 출발한다.

 

하나 아쉬운 점은 크링엘라인이 위기의 순간, 자신을 도와준 오터른슐라크 박사에게 고맙다는 말 한 마디 남기지 않고 자신의 새로운 행복을 위해 출발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그런데 그 또한 삶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배은망덕의 한 부분일 수도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수긍할 수 있었다. 너무 깔끔하다면, 그게 또 이상한 점이 아닐까.

 

결말로 갈수록 지나치게 극적이라는 점이 아쉽긴 하지만, 지난 2년을 묵혀서 읽은 책답게 세 번 정도 같은 부분들을 다시 읽다 보니 부드럽게 잘 익혀진 스테이크를 씹는 그런 기분이랄까. 세계적 유명 호텔을 배경으로 해서 벌어지는 인간 욕망의 소용돌이 한마당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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