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권의 한나라 이야기 3 - 여씨와 유씨 - 건설과 숙청 김태권의 한나라 이야기 3
김태권 글.그림 / 비아북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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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그냥 나는 작가에게 묻고 싶다. 초한쟁패를 다룬 한나라 이야기 3편 이후의 이야기는 도대체 언제나 볼 수 있느냐고 말이다. 물론 충분히 이해한다. 출판사와 저자가 땅파서 먹고 사는 사람도 아닐진대, 흥행이 안되는 영화에 계속해서 투자할 수는 없는 노릇이겠다. 하지만, 열심히 한나라 이야기 시리즈를 기다리고 있는 독자로서 한마디만 하고 싶다. 한나라 이야기 3권이 나오고 나서 4년이 지났다. 나머지 시리즈를 도대체 언제 볼 수 있는 건가.

 

김태권 작가는 <한나라 이야기>의 초반 이야기의 태반을 태사공의 <사기>를 원전 텍스트로 삼아 그리고 있는데, 이번 3부에서 주인공으로 삼은 캐릭터는 전반부의 유막둥이의 아내 여후(본명은 여치)와 후반부의 승상 진평이다. 여후는 유방 사후, 절대권력을 행사하며 자신이 낳은 효혜를 황제의 자리 위에 올리는데 성공하지만, 그 과정에서 숙청을 주도하며 수많은 공신들과 유씨 일족의 원성을 사게 된다. 저자는 태사공 선생의 여성 비하도 한몫하고 있다고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지배계급에 한해서는 냉혹한 면을 보여 주었지만 일반 백성에게는 선정을 베푼 지도자였다는 평도 잊지 않는다. 물론 그것도 태사공의 균형 있는 비평의 일부다.

 

다시 <한나라 이야기>로 돌아가서 1권과 2권에서 유방과 항우의 초한쟁패 끝에 결국 저자가 유막둥이라 부르는 유방이 대권을 잡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4백년 역사의 한나라 건국 이야기가 끝난 건 절대 아니다. 토사구팽이라는 말처럼, 항우와의 처절한 전투 끝에 대권을 잡는데 썼던 사냥개들이 이제는 정권의 위협이 된 것이다. 태사공 사마천이 그 선두주자로 꼽은 인물이 바로 한초삼걸, 그 중에서도 뛰어난 군사전략으로 항우 격멸에 지대한 공을 세운 제왕, 초왕을 거쳐 회음후로 강등되어 비운에 살해당한 한신이다.

 

오래전 김팔봉 선생의 <초한지>를 읽으면서 왜 한신은 제갈공명이 유비에게 올린 것처럼 모사 괴철이 일찍이 자신에게 진상한 유막둥이, 항우와 함께 천하를 삼분하는 계획을 저버렸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결국 항우 사냥에 성공한 유막둥이는 천하제패의 가장 큰 공을 세운 공신 한신을 역모 혐의를 씌워 죽이지 않았는가. 물론, 한신에게도 어느 정도 책임은 있다. 유막둥이가 항우의 공격으로 궁지에 몰렸을 때, 신속한 출병으로 돕지 않고 오히려 제나라 왕위를 요구하는 등 배신의 아이콘 유막둥이에게 소위 찍히고 말았다. 간난신고의 시절, 자신을 돕지 않은 한신에게 유막둥이가 좋지 않은 감정을 품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한신의 오판이 결국 멸문의 화를 불러온 셈이다.

 

건국공신 한신마저 그렇게 숙청당하는 마당에, 한 때 항우의 부장으로 유막둥이 편에 선 양왕 팽월과 구강왕 영포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도둑 출신의 팽월은 유격전으로 항우의 병참선을 교란시키고, 한때 항왕의 오른판이었지만 유막둥이가 보낸 수하의 계책으로 유막둥이 라인이 된 영포 역시 건국의 지대한 공을 세웠지만 신생국가 한나라의 위협이 되는 군벌이라는 이유로 제거된다. 하긴 한신과 더불어 한초삼걸로 꼽히는 소하 역시 유막둥이의 의심을 받아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기도 했으니까.

 

군벌집단으로 천하를 제패한 유막둥이 일당들은 제왕와 제후의 구분이 없어 궁궐 잔치에서 칼부림도 자주 있었다고 한다. 역시 진평 같은 처세의 달인 유학자 숙손통이 나서서 고대 예법을 부활시켜 군주와 신하의 관계를 엄격하게 다스리는 유가적 통치규범을 내세우면서 이후 유교식 통치국가의 기틀을 잡기 시작한다.

 

영포 정벌에서 입은 부상 때문에 결국 유막둥이는 죽고, 오랫동안 불안한 황위 계승자였던 후계자 유영이 비로소 즉위하면서 여후의 시대가 열린다. 태사공 선생은 고조본기, 항우본기에 이어 여후본기로까지 다룰 정도로 여걸인 여후에 대해 비중 있는 서술을 했다. 유막둥이가 살아 있을 때부터 건국 공신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숙청을 감행했던 여후는 유막둥이 사후 정말 눈에 보이는게 없었던 모양이다. 유막둥이의 총애를 받았던 척부인은 물론이고 척부인의 소생으로 조왕 유여의와 유막둥이의 다른 아들들마저 모조리 숙청하는 일대 피바람을 일으킨다. 2대 황제 혜제 유영이 죽은 뒤에는 친위 쿠데타로 대신들마저 모두 죽이겠다는 엄청난 계획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렇게 한나라 이야기 3권 전반을 여후가 맡았다면, 처세의 달인으로 승상의 자리에까지 오른 진평 역시 매력적인 캐릭터로 등장한다. 진평은 전형적인 음지에서 일하는 모사로, 막대한 자금을 동원해서 항우 진영의 내분을 조장하고 항왕과 범아부(범증)의 관계를 파탄시켰으며, 한신에게 제왕 자리를 주어 달래고 훗날 그를 숙청하는데 앞장섰으며, 유막둥이가 흉노 정벌 과정에서 흉노의 대군에게 포위되었을 때 기지를 발휘해서 탈출하는 공을 세웠다. 진평은 유막둥이처럼 난세에 살아남기 위해 피아를 오가는 진영 변경은 물론이고, 기회주의적인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유막둥이의 처남 번쾌 체포사건, 유씨와 여씨를 오가는 위험한 줄다리기에서도 대국을 읽는 탁월한 능력으로 숙청당하지 않고 살아남는데 성공했다.

 

저자는 태사공 선생이 그랬던 것처럼 대권 쟁취에 성공한 인물보다는 항왕이나 한신처럼 이러저러한 이유 때문에 성공에 도달하지 못한 역사의 패배자들에게 애정 어린 시선을 담뿍 담아 보낸다. 사마천이나 사마광 같은 역사의 기록자들은 하나 같이 그들을 패배자로 기록하고 있지만, 그들 역시 매순간에 자신의 기준에서 최선을 다한 인물들이 아니던가. 항왕은 마지막 순간에 하늘을 우러러 하늘이 자신을 버렸다고 외쳤다고 하는데, 자신의 오판과 실수, 인재등용에서 저지른 치명적인 오류 등에 대해 끝까지 반성하지 않았다. 특히 인재 문제에 있어서는 한신, 팽월, 영포는 물론이고 진평 같이 유방 진영에 투항한 상당수 인사들이 원래는 항왕의 진영 사람들이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한나라 이야기 3권의 또다른 교훈은 성공까지 과정에서 고난을 함께 할 수 있지만, 부귀영화는 함께 할 수 없다는 비정한 권력의 생리에 대해 리얼하게 그려냈다. 여후의 제거 목록에 올랐지만, 모든 부귀영화를 버리고 정계에서 은퇴한 장량의 뒤를 따르지 않는 이상 초한대전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여준 공신일수록 한제국의 위협일 수밖에 없었다.

 

어쨌거나 여씨 일족을 제압하고 다시 한제국의 중흥을 이룬 문경지치 그리고 오초칠국의 난 이야기는 도대체 언제쯤에나 보게 될 수 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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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
천명관 지음 / 창비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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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명관이 돌아왔다. 단언컨대 한국문학 최고의 데뷔작으로 꼽는 <고래>의 작가이니 그의 책을 사지 않고 배길 방법이 없다. 재까닥 그의 책을 주문했다. 두말할 것 없이 단박에 읽었다. 제목이 야릇했다,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라니. 왜 육체노동자는 달려야 하고, 그의 손에는 칠면조가 들려 있어야 했을까.

 

2차 세계대전 후, 유래 없는 경제호황을 누린 세계는 두 차례의 오일쇼크와 자본주의 시스템 아래서 불가피하게 순환되는 경제 불황과 호황을 번갈아 겪으면서 어느새 1980년대에 도달했다. 그리고 다운사이징이니 아웃소싱, 정리해고니 하는 근원을 알 수 없는 경제용어들이 낯설지 않게 되었다. 1997년 IMF와 2008년 유동성위기는 신자유주의 경제론자들에게 날개를 달아 주었다. 만인에 대한 투쟁을 외치는 효율과 경쟁만능주의 시대가 도래가 한 것이다. 이런 구호들은 경제 분야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을 휩쓸기 시작했다. 소위 시카고학파라는 불리는 신경제주의 전도사들이 한국 경제를 주무르면서, 우리 사회는 가파르게 신자유주의 시스템에 편입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의 주인공인 육체노동자 경구가 생뚱맞게 이방인들의 명절 식탁에나 오르는 칠면조를 들고 거리를 달리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연결이 조금은 무리수라는 걸 알면서도 문득 그렇게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고 싶었다. 교회에 열심인 아내와 자신을 외면하는 자식들에게 소외되고, 잘 나가던 운짱 시절 그놈의 노름 때문에 차마저 날려 먹은 경구에게 그나마 돈벌이를 할 수 있던 막노동마저 소외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전지전능한 능력을 과시한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있듯, 마지막 정의의 수호를 자처해야할 사법적 경계마저 허무는 막강한 능력을 지닌 돈/금전이 없다면 금전만능 자본주의 소비사회에 발붙일 여지가 없는 법이다.

 

이어지는 <전원교향곡>은 각박한 도시에서의 삶을 버리고 귀농을 택한 어느 남자의 실패기를 적나라하게 그리고 있다. 열의 아홉은 실패한다는 귀농에 대해, 철저한 준비 없이 무작정 귀농해서 농사를 짓다가 농사지을 품목에 대한 실패 그리고 인근에 들어선 돼지농장 때문에 한여름에도 악취 때문에 문을 열 수 없게 된 삶의 열악한 환경 등이 줄지어 열거된다. 문득, 성공과 실패가 모두 개인의 책임으로 귀결되는 경쟁만을 요구하는 사회의 생얼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주인공 정환의 실패에 사회는 아무런 책임도 없단 말인가. 그의 아들이 방치해둔 셰퍼드에게 물리는 대사고도 무책임하게 아이를 내버려둔 아이 아빠의 잘못이란 말인가? 지난 4월 진도 앞바다에서 무고하게 생명을 잃은 아이들도 모두 유가족들의 책임이란 말인가. 사건 사고에 사회적 책임 대신 개인의 잘못된 선택 때문이라고 떠들어 대는 사이비언론의 선전선동이 이제 낯설지도 않게 되어버렸다.

 

소설집의 맨 마지막을 장식하는 <우이동의 봄>은 손자와 할아버지 간의 관계에 방점을 찍는다. 작가는 왜 아버지를 세대를 건너뛰었을까? 조국 근대화와 민주화에 있어 가장 자랑스러워야 해야 할 세대를 아예 삭제해 버린 게 못내 찜찜하다. 내 나름대로의 해석을 붙이자면, 세상의 모든 것에는 빛과 그림자가 함께 하는 법, 나름의 공로도 있는가 하면 작금의 벌어지는 정의롭지 못한 사건의 근원에 자리한 총체적 문제에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지 않은가. 아버지와 아들이 일자리 경쟁에 나서야 하고, 그놈의 다양한 스펙을 갖추지 못해 일자리 경쟁에서 밀려난 청춘들은 비정규직을 연연해야 하는 현실을 누가 만들어냈단 말인가. 할아버지는 작고한 대통령을 실명으로 비난하면서도, 실제 투표에서는 그이가 불쌍해서 찍었단 말로 손자와 화해를 시도한다. 서툴지만, 해빙의 기운이 느껴지는 나름 따뜻한 느낌이 들어 좋았다고 말하고 싶다.

 

결말을 알고 나면 약간 섬뜩해지는 <핑크>에서도 우리의 육체노동자가 등장한다. 이번 소설집에서 유일하게 장르적 특성인 미스터리를 차용한 작품으로, 역시나 정상적인 노동에서 소외된 대리운전기사 나는 영하 십도의 날씨에 추위에 떨며 자신의 수중에 몇 만원을 쥐어쥘 콜을 애타게 기다린다. 그렇게 기다린 끝에 만난 손님은 엄청 뚱뚱한 자태에 핑크색 옷으로 감싼 여인이었다. 핑크 여성과 히터도 틀지 않은 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주인공은 자신의 과거를 들추기 시작한다. 늦게 와이프를 만나, 그녀의 욕망을 채워주기 위해 무리를 하다가 그만 파산했다는 말에 핑크 여성은 남자에게 위로의 말을 건넨다. 남자가 그런 경제적 이유 때문에 소외를 당했다면, 핑크 여성은 순전히 자신이 가진 피지컬한 이미지 때문에 소외당했다는 느낌을 받는다. 도대체 예상하지 못한 지점에서 불쑥불쑥 고개를 드미는 소외란 불청객이 왜 이렇게 짜증이 나는지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이번 천명관 작가의 소설집에서 최고로 꼽은 싶은 작품은 바로 <동백꽃>이다. 문학적 클리셰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동백꽃>에는 유자, 동엽 그리고 경숙으로 이어지는 삼각관계가 축이다. 고깃배 몇 척을 부리는 구 회장네 아들인 동엽을 꼬셔 팔자를 펴보겠다는 일념으로 유자는 자신의 유일한 무기인 엉덩이를 밑천 삼아 육탄공세에 나선다. 하지만, 자신의 절친인 경숙의 늘씬한 몸매와 교태를 이길 수 없었던 그녀는 어느 날, 경숙이 동엽의 아이를 가졌단 소식에 절망의 한탄을 늘어놓는다. 그렇게 경숙의 완승으로 끝날 것처럼 두 여자의 임신 레이스는 동엽과 경숙이 ‘사교병’에 걸려 약을 복용 중이라는 소식에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고, 오히려 유자의 입덧이 시작되면서 극적인 반전드라마에 도달한다. 이것저것 다 귀찮아진 동엽이 서울로 올라간다는 말에, 유자는 배를 타고 떠나는 동엽에게 수신호를 보내는 장면은 가히 천명관식 해학의 정수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막장 드라마식 재미와 염통을 쫄깃하게 하는 반전 그리고 블랙유머 삼종세트가 환희의 축포를 쏘아 올린다.

 

사회구조가 고착화되면서 점점 신분상승의 길이 좁아져 가는 가운데, 양질의 일자리 획득 다시 말해 취업을 통한 사회참여는 난망한 주제가 되고 있다. 이러저러한 이유 때문에 왜곡된 우리네 삶의 양태가 로또당첨 같은 획기적인 전환이 아니고서야 삶의 어느 순간에 마주하게 되는 불가피하는 노동으로부터의 소외는 이제 피할 수 없는 대세가 된 게 아닌가 싶다. 천명관 작가는 이번 소설집을 통해, 그런 운명에 대처하는 각각의 삶을 모습을 그리려고 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지금은 그 순간이 아니라고 안도할지 몰라도, 마주하고 싶지 않은 미래를 책을 통해 만나본 소감이라고나 할까.

 

<고래> 이후 기대감에 부풀어 천명관 작가의 책을 꾸준히 읽고 있지만, 그의 모든 작품이 다 나의 기대를 충족시켜 준 건 아니었다. 물론 그의 작품을 전작읽기한 것도 아니니 전반에 걸친 품평은 지나치다 싶고, 후속작들이 데뷔작만 못하지 않나 짚고 싶다. 앞으로 새털 같은 시간들이 많으니, 계속해서 그가 그리는 정직한 세월의 흔적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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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식 세탁소 - 정미경 소설집
정미경 지음 / 창비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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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언제쯤인가 한국 문학 중에서 정미경 작가의 소설집 <프랑스식 세탁소>와 한유주 작가의 <불가능한 동화>에 대한 신문 기사를 봤다. 사실 이전까지만 해도 두 작가의 글은 한 번도 읽어 보지 않은 지라, 호기심이 동했고 일단 습관처럼 정미경 작가의 <프랑스식 세탁소>를 샀다. 그리고 바로 읽기 시작했는데, 첫 번째로 수록된 <남쪽 절>을 읽고 나서 두 번째 <파견 근무>를 읽다가 접었다. 그리고 1년이란 시간이 지나갔다. 2주 전에 책장 정리를 하다가 미처 다 읽지 못한 정미경 작가의 이 책이 생각났고, 다시 집어 들어 부지런히 다 읽을 수가 있었다. 처음 읽기 시작할 때만 해도 금세 다 읽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그간에 무슨 사연 때문인지 다 읽는데 1년이 걸린 셈이다.

 

1년 전에 읽기 시작할 땐, 순서대로 읽자였는데, 다시 읽기 시작하니 마음이 바뀌어서 맨 끝에 실린 표제작 <프랑스식 세탁소>부터 읽기 시작했다. 수완은 있지만, 비리 사건에 연루된 사회재단 이사장의 이야기와 사보에 실린 어느 요리사에 대한 글이 묘한 대조를 이루며 전개된다. 어디가 닮았다고 꼭 집어서 말하기엔 그렇지만 왠지 정미경 작가의 글에서는 미국 작가 제임스 설터의 그것과 비슷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두 작가 모두, 아직까지 한 작품 밖에 읽지 않아서 구체적 비교가 불가하지만 말이다. 엄마를 위해 요리를 만들던 절대 미각의 소유자 마르셀 르와조의 요리를 통한 성공기가 자못 흥미진진하다. 유일하게 사랑했던 애인마저도 르와조의 요리에 대한 열정을 대신할 순 없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이 이야기가 화자인 이사장의 횡령 그리고 비서 민미란과의 일탈로 이어지게 되는 걸까? 그냥 모든 것이 벌어질 수 있다는 우리네 삶과 비슷하다는 점 때문일까. 르와조가 자신이 경영하는 레스토랑 <프랑스식 세탁소>가 박한 별점을 받았다고 엽총을 꺼내드는 장면이 섬뜩했다.

 

 

 

그런 점에서 다시 되돌아가 마저 읽은 <파견 근무>에 나오는 주인공 판사의 일탈도 일상의 한 부분일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당연히 사회적 존경을 받는 자리에 앉은 인물이, 사실은 카지노에 빠진 상습 도박꾼이라니. 어쩌다 어울리는 지방 유지들과의 술자리에서 무언가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자신이 맡은 사건 사고들에 대한 각색도 마다하지 않는다. 수하의 검찰조사관이 흘린 재판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정보와 노름판의 판돈을 마련하기 위한 주식 내부거래 정보의 교환에 대해 고민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면모를 볼 수도 있다. 그건 그들이 즐기는 생선 횟집에서 제 살을 허리에 접시에 놓여나온 생선과 같은 신세가 아닐까. 도대체 이런 표현은 어떻게 창조해낸 걸까. 우리가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생선회에서도 요렇게 멋진 문구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솔직히 부러웠다. 이제 기존의 클리셰이가 되었으니, 누구라도 다시 써먹을 순 없겠지.

 

소설에 곳곳에서 그런 일상의 비루함이 눈에 띈다. 첫 번째 글인 <남쪽 절>에서도 기세 좋게 독립해서 출판사를 차렸지만, 기획력과 자금 부족 그리고 출판계의 단골타령인 단군 이래 최악의 독서시장 불황 덕분에 어쩔 수 없이 대박내고 싶은 욕심에 표절 작가에게 갖은 아양을 떨어야 하는 출판사 사장의 비루함이 그대로 드러난다. 주인공이 표절 작가와 어렵게 성사된 자리에 가기 위해 나선 길에는 용산 참사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누구는 절박한 생존을 위해 투쟁하고 있다는, 그런데 어떻게 보면 출판사 사장 역시 절박하기는 마찬가지 아닌가. 다만 자신이 처해 있는 삶의 조건이 다를 뿐.

 

<소년처럼>에서는 만족할 수 없는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이돌 그룹의 <소원을 말해봐>라는 노래에 빠져 사는 중년 남성의 이야기다. 진실이 아닌 만들어진 이미지가 소비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음악 산업 역시 예외는 아니다. 청춘을 잃어버린 이들에게는 그들이 바라 마지않는 풋풋한 젊음을, 스타가 되고 싶어하는 청춘들에게는 노력하면 너희들도 이렇게 될 수 있다는 판타지를 불어 넣는 아이돌 산업의 실체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우연히 만난 은희라는 소녀로부터 자신이 가진 소년같은 판타지를 충족시키고 싶어하는 중년남자의 욕망을 날 것으로 그대로 드러낸다. 물론 작가는 자신의 딸보다도 어린 소녀로부터 그저 ‘옵빠’라고 불리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는 선에서 그의 자칫 위험해질 수도 있는 욕망을 제지시킨다.

 

이젠 낯설지도 않은 탈북자 출신 피아니스트, 아니 새터민이라는 명칭이 있었던가? 사지에서 벗어나 대한민국에 정착했지만 여전히 이방인일 수밖에 없는 청년의 이야기, 멀쩡하게 의사 수업을 받고 있던 남자가 모르핀 중독 때문에 스님이 되겠다는 출가 선언으로 여자친구의 복장을 뒤집어 놓질 않나, 강아지도 안 먹는다는 돈의 부재 탓인 가난과 사랑의 비동시성 때문에 고민하는 청춘들의 이야기가 다소곳하게 이어진다. 나의 삶이 소설 속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의 그것처럼 버라이어티했다면, 과연 내가 이 소설을 읽었을까? 아마 그렇지 않겠지. 내가 체험하지 못한 타인의 이야기를 이렇게 열심히 읽는 건 아마도 일정 정도의 간접체험에서 오는 정신적 오르가즘 때문이 아닐까. 내가 알지 못하는 각각의 삶의 면면이 이렇게 다양할 수도 있겠다는 자조 섞인 감정이 슬쩍 스치고 간다. 물론 소설가는 그것들을 절묘하게 잡아내서 이렇게 글로 쓰는 것일테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이렇게 선구자가 남긴 글귀들을 쫓아갈 뿐.

 

어쨌거나 소설이라는 명명, 창작이라는 시뮬라시옹의 단계를 거쳐 삶의 진실을 반영하는 시뮬라크르에 도달하기란 난망한 것 같다. 작가라는 타인에 의해 창작된 현실의 복제물인 소설을 소비하는 독자로서 이렇게 책을 읽다가는 결국 불가지론(不可知論)에 도달하게 되는 게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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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의 역사
최민석 지음 / 민음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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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석 작가의 ‘바람의 사나이’ 허풍의 불타는 연대기를 읽어 가며, 나는 어쩔 수 없이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으 <포레스트 검프>, 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탐 행크스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지난 세기 모든 미국 역사의 중요한 변곡점에 등장해서 관객들을 놀래켰던 포레스트 검프가 영화를 무대로 했다면,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사건에 개입한 유려한 인물로 최민석 작가는 이풍(아니 허풍이 더 어울리겠다)을 등장시킨다. 어마어마한 인원이 희생된 오키나와 전투에서도, 그리고 민족상잔의 비극이었던 한국전쟁에서도 살아남은 불세출의 영웅 허풍 말이다. 문득 이 매력적인 소설을 영화로 만든다면 주인공 허풍 역을 누구에게 맡겨야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최민석의 작가가 후기에서 남긴 글대로, 이 충성된 독자는 그의 신간이 나오는 대로 꼬박꼬박 사서 보게 됐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의 가열찬 구라와 뻥의 세계에 매료되었다고나 할까. 난 이 작가의 뻔뻔함을 사랑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오로지 사랑하는 여인 밤의 이름을 외쳤을 뿐인데, 공격군이었던 미군 사령관의 마음을 움직여 대일본 전쟁을 마무리하는 원자폭탄(atomic bomb)을 투여하게 만들었다는 설정에서는 정말, 작가라면 이 정도 스케일의 서사도 해야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전에 읽은 이기호 작가의 <차남들의 세계사>에서도 희화화를 통한 한국 현대사 조망이 돋보였는데, 최민석 작가는 한술 더 떠서 좀 더 스케일이 큰 희화화에 도전한다. 무대도 한국만이 아니라 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 그리고 베트남전 등 동아시아를 움직인 굵직굵직한 사건에 자신이 애써 창조한 캐릭터들을 연달아 투입시킨다. 그 핵심에는 작가가 지속적으로 언급한 대로, 무언가 역사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 이들이 아닌 그저 생(生)이라는 종잡을 수 없는 미스터리를 버텨내기 위해 하루하루를 낸 우리네 삶의 근원을 예리하게 짚어내는데 방점을 찍는다.

 

우리의 주인공 허풍의 운발은 억세게 세다. 엄청난 인원이 희생된 오키나와 전투에서도, 한국전쟁의 와중에서도 국군과 인민군을 오가며 그리고 포로수용소 생활까지 거치면서 끈질기게 살아남는다. 그것뿐이던가, 도리짓고땡으로 가산을 홀딱 날리고 월남에서 돌아온 오 중사를 따라 결국 월남에까지 흘러간다. 대단한 생명력이 아닐 수 없다. 아, 우리의 뻔뻔한 작가는 이런 불세출의 영웅의 활약상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안티히어로를 배치하는 세밀함도 잊지 않는다. 그가 바로 앞잡이(꼴라보?)로 고향 중도에서 허풍의 일격에 남성성을 잃고 절치부심 복수를 꿈꾼다. 이름도 없는 앞잡이가 영웅탄생을 일조하기 위해, 위태로운 역사의 순간마다 등장해서 주인공 허풍에게 깊숙한 태클을 걸어댄다. 도대체 어떻게 그곳에 흘러가 있을까 하는 일말의 의문은 작가의 친절하기 짝이 없는 설명에 일사천리로 해결된다.

 

허풍 허구 부자의 월남행까지는 그래도 어느 정도 들어줄 만하다. 하지만, 오 중사와 홍콩 여가수 만옥까지 낀 허풍 부자가 밴드를 결성해서 독재자의 마지막 대연회 행사에 참석해서 사건의 알파와 오메가를 목격했다는 이야기는 정말 이만저만한 허풍이 아니다. 적당한 허풍은 서사에 힘을 실어 주지만, 이 정도 레벨의 허풍은 독자가 감당할 수준이 아닌 것 같다. 그렇게 한창 달리던 서사의 힘이 꺾이면서 순간 맥이 풀려 버렸다. 한국 소설의 귀환이라는 타이틀 때문에 최민석 작가의 <풍의 역사>에 대한 나의 기대가 너무 컸던 걸까. 한국현대사라는 좋은 (서사의) 요리 재료를 가지고, 셰프급 요리가 아니라 짬뽕을 만들어냈다고나 할까.

 

물론 무성영화 시대 변사를 연상시키는 최민석 작가의 이야기 풀어내는 스타일은 확실히 재밌다. 그것은 이미 전작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와 <능력자>에서 확인하지 않았던가. 문제는 약간 과하다 싶은 희화화와 가벼움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고 해서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급의 진중함은 아니겠지만, 그저 참을만한 가벼움이면 좋겠다. 연달아 읽은 최제훈의 작가의 소설처럼 엘리트 코스 소설가가 아닌, 다양한 경험을 가진 늦깎이 작가의 등장을 반가워하면서도 <풍의 역사>를 다 읽고 난 뒤의 헛헛함을 어찌 해야 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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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잠
최제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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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단에 늦깎이로 데뷔한 최제훈의 작가의 팬이다. 책은 작년에 출간되자마자 샀지만, 그동안 미처 읽지 못한 게으른 독자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이 가진 빼어난 가독성을 알고 있기에 서두르지 않았다고 한다면, 좀 변명이 되려나. 거의 일 년을 묵혀 두었다가 지난 주말에 서가에서 신작 <나비잠>을 빼들었다. 역시나 기대 이상의 재미가 있었고, 놀라운 속도로 다 읽어냈다. 아무래도 짧은 단편보다는 긴 호흡의 장편을 더 선호하는 편인데, 최제훈 작가의 <나비잠>은 전혀 길이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후반부로 갈수록 아쉬웠다고 해야 할까.

 

원래 다른 일을 하다가 문학 수업을 받고 문단에 뛰어든 때문인지, 엘리트 코스를 밟고 등단한 다른 작가와는 다른 스타일이 마음에 든다. 최제훈 작가의 서사에는 장르적 특성이 추리가 담뿍 배어있다. 약간 누아르적이기도 하다고 말해야 할까. 우리의 주인공은 40대 중년의 최요섭 변호사다. 나이와 직업이 일단 그의 특질을 말해준다. 잘 나가는 대형로펌 <사해> 출신의 최요섭은 최근 들어 이상야릇한 악몽에 시달린다. 최제훈 작가는 그렇게 현실계에서 주인공에게 벌어지는 일단의 연쇄적 사건과 꿈을 등치시킨다. 꿈에서 총 맞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것부터 벌써 범상치 않다.

 

웹진에서 연재할 적에는 제목이 <몰락>이었다고 하던데, 그 제목이 어쩔 수 없이 장자의 호접몽을 떠올리게 하는 <나비잠>보다 훨씬 더 현실감 있게 다가오는 것 같다. 집에 꼬맹이가 있어서 그런지 어린 아이가 두 팔을 위로 올리고 자는 잠이라는 뜻의 제목이 귀에 쏙 들어오기는 한다. 소설 <나비잠>은 지방 소도시 출신 목사의 아들로 한양공대를 나와, 사법고시를 패스해서 로펌에서 승승장구하며 서울숲 고급아파트에 둥지를 틀고, 음대 출신의 미모의 아내에, 야구선수를 꿈꾸는 아들까지 무엇 하나 부러운 게 없는 우리 시대 성공방정식을 풀어낸 주인공의 몰락에 관한 이야기다. 자신이 라이벌이라고 생각하는 오소리 변호사라면 도저히 꿈꾸지 않을 억울하게 감옥소 신세를 지게 된 대리기사의 무료 변론을 맡게 되면서부터 잘 나가던 삶의 톱니바퀴가 어긋나기 시작한다.

 

작가는 작가 세대 소년들이라면 누구나 즐겨 보던 <은하철도 999>의 서사부터 시작해서 <빨간 두건>, <돈키호테>, <피노키오>, <몬테크리스토 백작> 그리고 영화 <빠삐용>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서사 시스템을 소설 속에 투입시킨다. 특히 <빨간 두건> 일화의 금기(터부)에 대한 작가의 분석은 인상적이었다. 법이 허용하는 테두리 안에서 가능한 금기는 모두 깨고 있으면서, 타인에게 적용하는 최요섭의 이중잣대를 통박하는 빨간 두건의 퉁바리는 통쾌했다.

 

이렇게 작가가 투입시킨 이야기들은 꿈속에서 혹은 현실계에서 도주하면서 유년 시절의 잊고 싶었던 트라우마를 해결하라는 지상명령을 수행하는 털곰(털 많은 곰)이라는 캐릭터와 멋진 조화를 이루면서 서사의 긴장감을 촉발시킨다. 한술 더 떠서, 목사였던 아버지를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이자 동시에 신의 저주를 받아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는 프로메테우스로 배치하기도 하고, 막장드라마 단골메뉴인 출생의 비밀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현존하는 모든 서사 얼개는 차용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덧붙이자면, 유년 시절 트라우마는 현란한 로드무비 같은 대모험을 거쳐 최 변호사가 31년이 지나서도 여전히 선택적 기억상실을 통해 지키고자 했던 원죄에까지 도달한 느낌이다.

 

주인공이 겪는 몰락의 서사는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되는 꿈의 서사의 기이한 변용의 과정을 거쳐 현실계에서 반복된다. 길을 잃고 산속에서 헤매던 중, 가까스로 찾아들어간 외딴 민가에서 묘령의 여인에게 진수성찬이 차려진 음식을 대접 받다 불륜에 휘말려 갑자기 들이닥친 그녀의 우락부락한 사냥꾼 남편에게 봉변을 당하는 설정은 무간지옥의 다름 아니다. 최요섭의 무료 변론이라는 일탈과 유학생 사건 협잡으로 비롯된 그를 옥죄는 보이지 않는 세력의 개입으로 시작된 그의 몰락은 상상초월의 속도로 신속하다. 아내는 아들 과외 선생과 바람이 났고, 아들의 야구 특기생 진학을 위해 바친 뇌물 수수 혐의로 잘나가던 직장에서 짤리고 집행유예로 자격 정지 먹는 상황이 그야말로 전광석화처럼 펼쳐진다.

 

바로 이 지점에서 최제훈 작가의 장기 중의 하나인 추리적 요소가 개입한다. 도대체 누가 우리의 주인공 털곰을 이렇게 혹독하게 몰아붙인단 말인가? 그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첩보영화를 방불케 하는 긴장감에 책장을 넘기는 속도에 가속이 붙기 시작한다. 주의하시라, 작가는 미스터리를 짜내는 데도 능수능란하지만 또 한편으로 두 가지 서사의 축을 다루고 있다는 점도. 게다가 이미 여기저기서 차용해온 다양한 서사적 장치들을 그야말로 마리오네뜨 인형처럼 적재적소에 배치한다. 현란한 이야기의 시전 속에서 과연 작가가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게 된다. 빠삐용처럼 삶이 감옥이란 말이었을까. 무언가 기발한 문구를 기대했지만, 작가는 끝까지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

 

변호사 최요섭은 물질적 성공을 위해 헌신하는 21세기 남자로,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치르는 비용은 모두 소소할 뿐이라고 자위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키기 위해 투입된 정의감에 불타는 이정우 변호사의 실존적 고민도 일축할 수 있다. 하지만, 정작 그토록 믿었던 조직에서 내몰리고, 재기의 물질적 토대라고 생각한 재산마저 날리면서 극한의 코너에 몰리자 예의 자신감을 사라져 버리고 오로지 남은 분노 게이지를 상승시키면서 자신을 파멸시킨 원흉을 찾겠다고 동분서주한다. 냉철한 이성으로 무장한 변호사로 사적 이익추구에 여념이 없던 최요섭 변호사의 처참한 몰락은 그래서 더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도대체 뫼비우스 띠처럼 얽힌 현실과 꿈이 만들어내는 변주곡의 코다는 어디일까.

 

이미지가 진실을 지배하는 소비사회에서 과연 최요섭 변호사가 쫓던 꿈은 무엇이었을까? 모든 게 신기루 같은 허상이었을까? 남부럽지 않은 직업과 연봉, 모델 같은 미모의 아내 그리고 야구선수의 꿈을 꾸는 아들, 모든 것을 갖춘 이상향에 근접해 있었지만, 조직의 규율을 어긴 이탈자를 기다리는 건 휘황찬란한 비상이 아닌 날개 없는 추락이었다. 작가가 보내는 중첩된 메시지 중에서 무엇을 골라잡아야할지 책을 읽으면서 내내 고민했다. 어쩌면 그런 복잡다단한 우리네 인생의 답없음이야말로 최제훈 작가가 소설 <나비잠>에서 전달하고자 했던 진정한 메시지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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