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두 가지 길을 다 갈 수만 있다면
마일리 멜로이 지음, 강정우 옮김 / 책세상 / 2013년 11월
평점 :
절판



한동안 영국 문학잡지 그랜타가 선정했다는 팔팔하고 전도유망하다는 젊은 미국 작가들의 책을 컬렉션한 적이 있다. 기존 작가들의 글을 읽는 것도 좋지만,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이렇게 새로운 작가들을 발굴해내는 재미가 있다고나 할까. 아쉽게도 널리 알려지지 않은 만큼, 국내에 소개되기도 어렵고 또 소개되었다고 하더라도 잘 팔리지 않아 곧 절판되곤 했다. 절판됐어도 절판본 사냥이라는 재미를 선사해 주니 이 어찌 즐겁지 않은가.


언제나처럼 서설이 길었다. 지난 주말 한겨레 사설에 등장한 켈리 리처드 감독의 <어떤 여자들>을 읽었다. 그 영화가 궁금해서 찾아봤다. 그리고 내 눈을 사로잡은 영화의 한 커트. 그것은 바로 베스 트래비스와 제이미가 말을 타고 거니는 장면이었다. 어라, 이 장면 내가 어디선가 읽은 내용인데. 위키피디아를 통해 그 단서를 찾을 수가 있었다. 바로 그랜타가 선정한 앞으로 기대되는 미국 작가 중의 한 명이 마일리 멜로이의 단편집 <지금 두 가지 길을 다 갈 수만 있다면>(2009)의 첫 번째 에피소드인 <트래비스 B>를 각색해서 모두 세 개의 옴니버스 구성으로 영화 <어떤 여자들>은 이루어져 있다. 나머지 두 편의 이야기는 마일리 멜로이의 첫 번째 소설집인 <Half in Love: Stories>(2002)에서 소환되었다.


지난 3월 13일날 구입해서 읽기 시작했는데, 읽다 말았다가 이번에 이틀 만에 다 읽을 수가 있었다. 하바드 대학 출신 마일리 멜로이는 미국 몬태나 주 출신으로, 이 소설집에 나오는 다수의 이야기들의 공간적 배경은 몬태나 깡촌이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밀레니엄 캐피탈 뉴욕이나 시카고 혹은 로스 앤젤레스 같은 대도시의 화려한 삶이 아니라 어쩌면 진짜 미국 사람들의 평범하지만 삶의 진한 페이소스를 담은 단면을 짚어볼 수 있는 그런 공간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학비 대출 때문에 자그마치 9시간 운전을 해서 글렌다이브로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에게 학교법을 가르치러 오는 풋내기 변호사와 사랑에 빠지는 카우보이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해서, 클라이언트와 함께 떠난 캠핑에서 성추행을 당한 소녀의 이야기, 어쩌면 자신이 애인이 될 뻔한 아리따운 아가씨의 애인이자 자신의 친구가 불의의 사고로 죽고 지긋지긋한 마을을 떠나기 위해 자신을 상품으로 걸고 래플 게임에 나서게 되는 과정이 담담하게 그려진다. 단편소설이 삶의 진실을 담고 있다는 어느 평론가의 말이 바로 연상됐다. 내가 체험하지 못한 다른 이들이 그리는 삶의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는 책을 읽는 게 아닐까. 그런 점에서 마일리 멜로이가 구사하는 이야기들은 확실히 탁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난 의사형과 건들거리며 스키 강사로 사는 에런과 조지 형제가 등장하는 <스파이 대 스파이> 역시 흥미롭다. 한 부모 슬하에서 자랐지만 서로가 각기 다른 상대방의 삶을 전혀 이해하지 않으려고 고군분투하는 장면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그래, 가족의 실체란 어쩌면 그런 건지도 몰라라는 상상을 구체화했다고나 할까. 결국 금지된 코스에 도전했다가 심각한 부상 혹은 죽을 뻔한 사고현장에서 치고 박는 장면으로 형제는 나름대로 방식의 화해에 도달한다. 그래 그렇게 가는 거지. 이 단편도 눈덮인 스키 리조트를 배경으로 해서 영화화한다면 멋진 장면이 연출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에 관한 옴니버스 구성이라면 아마 안성맞춤일 것이다.


<투스텝>에서는 도무지 바람기를 주체할 수 없는 자신의 남편에 대해 지청구하는 여자친구가 모르는 비밀에 대한 이야기가 눈길을 사로 잡는다. 그렇다, 바로 화자가 욕하는 남편이 일하는 병원에서 일하는 간호사 혹은 레지던트 중의 한 명이 바로 청자인 것이다. 과연 화자는 모든 것을 알고, 그녀를 소환해서 이런 희비극 무대를 마련한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화자는 정말 뛰어난 배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감정을 정말 잘 조절할 수 있는. 독자는 화자가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청자의 모놀로그를 통해 파악해낸다. 청자 역시 유부녀란다. 어떻게 해서든 결혼을 유지하려는 여자친구와 자신의 불륜을 알게 된 남편이 도저히 자신을 용서하지 않으리라는 사실 속에서 과연 청자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그 외에도 끔찍하게 살해당한 자신의 딸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살인범의 고스족 여자친구를 상대하는 중년의 아버지 이야기도 등장한다. 비밀을 꼭 알아내야 직성이 풀리는 걸까? 어쩌면 사실을 모르는 것이 현재의 행복해 보이는 현상을 유지하는데 더 도움이 되는 건 아닐까?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는 감당할 수 없는 사실에 휘청거린다. 자신이 어마어마한 상속의 주인공이 될 지도 모른다는, 환상을 심어준 <릴리애너> 할머니의 등장에 적어도 속으로는 환호작약하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단편도 즐겁다. 수많은 남편들을 갈아 치우며, 상상을 초월하는 부를 축적한 할머니가 자신에게는 일전 한 푼 남기지 않고 개를 비롯한 동물들에게 유산을 남겼다는 소식에 분노하지 않을 예비상속자가 어디 있을까 싶다. 하지만 죽었다던 할머니가 멀쩡하게 등장해서 증손녀들에게 강아지 알레르기를 선사하고, 아버지의 실업과 긴축재정 때문에 피자 같은 패스트푸드 조차 마음대로 사먹을 수 없는 가장에게 잠시나마 희망을 펌프질한다. 릴리애너 할머니는 등장할 때처럼, 사라질 때도 아무런 기약 없이 떠나면서 다시 한 번 희망을 좌초시키는 역할을 충실하게 해낸다. 소설의 초반에 혹시 유령이 등장했나 싶어서 잠시 긴장했다는 건 비밀이 아니다.


자기 아이들에게 수영을 가르치던 자신보다 나이가 훨씬 더 어린 수영 코치와 바람이 난 아버지의 갈등을 그린 <아이들>, 딸들의 등쌀에 아내와 사별한 후 자신이 진짜 사랑한 여인과 결혼하지 못한 채 홀로 외롭게 세월을 보낸 아르헨티나 지주 <아구스틴>이 코끼리 잡는 총으로 하마터면 문제의 근원 중의 하나인 둘째딸을 쏠 뻔한 장면에서는 왜 그렇게 통쾌하게 느껴지던지. 모든 것에 마음이 후해질 수밖에 없는 미국식 명절 크리스마스에 보니와 클라이드의 히치하이킹을 받아 들였다가 곤욕을 당하게 되는 가족이 등장하는 <오 타넨바움>도 흥미진진하다. 희대의 강도들처럼 어느 순간 돌변하는 게 아닌가 하는 나의 상상은 다른 방식으로 전개됐다. 딸에게 곤경에 처한 이들을 외면해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가르쳐 주겠다는 선의가 결국 외도로 결말이 나는 장면에서는 후안무치한 남자 에버렛의 뺨을 갈겨 주고 싶었다. 뭐 삶이 다 그렇게 가는 거겠지.


전반기에 읽은 탁명주 작가의 <도마뱀이 숨 쉬는 방>과 함께 마일리 멜로이 작가의 <지금 두 가지 길을 다 갈 수만 있다면>을 감히 올해 내가 만난 최고의 책들로 손꼽고 싶다. 좋은 책이라면 동시대인이 공감할 만한 특별한 무언가를 담고 있어야 한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두 작품 모두 자극적인 MSG를 사용하는 대신, 단백한 소재들을 재료 삼아 정말 타의추종을 불허할 만한 그런 멋진 그리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미묘한 감정선들을 기가 막히게 포착한 이야기들을 담아냈다. 내가 아는 모든 지인들에게 이 책을 소개해 주고 싶다. 왜 마일리 멜로이의 다른 작품들이 아직도 미출간의 늪에 빠져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채 출간된지 한달도 안되는 마일리 멜로이의 신간 <Do Not Become Alarmed?>는 이번 여름을 뜨겁게 달굴 책 중의 한 권이라고 한다. 원서라도 사서 읽어야 하는 걸까, 고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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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떨어진 폴 2 - 인간계 생활 매뉴얼
남지은 지음, 김인호 그림 / 홍익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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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제 2권이다. 두 번째 “인간계 생활 매뉴얼”에서는 옥황상제에게 대들었다가 화과산 아래 수백년 동안 깔려 지내야 했던 손오공처럼 그분에게 반항했다가 인간계로 추락한 넵퍼 폴이 그분과 대면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분명 그분은 폴의 아버지일 텐데, 그런 암시가 조금도 주어지지 않아 궁금증이 폭증했다. 그분은 묘하게 폴을 설득해서 말 잘듣는 착한 학생으로 만들어서 본래 임무에 충실하게 만들었다. 천사도 아닌 넵퍼 쯤이야 그분께서 어련히 다루어 주실까 싶었다. 아, 지금까지 폴은 Paul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제목을 유심히 보니 Paul이 아니라 Fall이었다. 이런 심오한 뜻이 숨어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인간도 천사도 아닌 믹스종 넵퍼 폴은 태생에서부터 숨은 기호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계로 추락한 넵퍼.


천사들의 지상 아지트이자 알 수 없는 능력을 가진 알은 자신의 카페에 등장해서 꼬장을 부리던 연극배우 시내에게 조금씩 끌려 들어간다. 천사도 인간과 사랑을 할 수 있단 말이지. 하긴 폴의 존재가 인간과 천사의 만남이 아니었던가. 그렇게 작가들은 만화의 곳곳에 그런 신화적 기호들을 잘 배열해 두고 있었다. 좌절하려는 시내에게 알은 더할 나위 없는 그런 위로를 안겨 준다. 어쩌면 거친 현실이라는 바다를 항해하는 우리 외로운 인간들에게 진짜로 필요한 것은 알이 선사해주는 그런 진정성이 담긴 위로가 아닐까 싶다. 꿈을 포기하지 말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라는. 물론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말이다.


한편, 어디선가 숨어서 호시탐탐 넵퍼 폴에게 복수할 기회를 노리던 우리의 궁 아저씨는 비밀무기를 만들어서 세상의 악을 부스트업하는 비밀병기를 만들어내는데 마침내 성공한다. 그리고 폴을 꼬드겨서 그를 소멸시키는데 성공하려는 순간, 여주 공서희 양이 짜잔~하고 나타나서 폴을 구해낸다. 서로 은혜를 입고 갚고 하면서 사랑을 맹글어 가려는 클리셰이의 전개가 흐뭇해지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자자 그렇다고 그렇게 마냥 이야기가 공서희 양과 훈남 폴의 연애로 이어지면 곤란하니 이쯤에서 걸출한 라이벌을 한 명 등장시킬 순서다. 그것은 바로 공서희 양이 딱 하루 동아리 활동을 하던 번역동아리 출신의 또다른 훈남 윤희산 군. 누구 못지 않게 달달하고 화끈한 연애를 꿈꾸던 공서희 양에게 윤희산의 등장은 그야말로 금상첨화가 아니던가. 자신도 모르게 자기 운명의 파트너라는 생각이 자꾸만 드는 폴의 심장이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한다. 물론 마냥 스토리가 달달로맨스로 흘러 가면 곤란하니, 이쯤에서 공서희 양과 폴의 관계를 눈치챈 궁 아저씨의 훼방작전이 무르익을 전망이다. 자, 이제 이어질 3권을 기대하시라.


다음 스토리가 궁금해서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니 웹툰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네이버가 운영하는 코미코란 사이트에서 현재 연재 중이다. 이제 무료 콘텐츠의 시대를 갔는지, 연재 만화를 보려면 돈을 내야 한단다. 내가 돈을 내고 온라인 연재 웹툰을 본 적이 있던가. 이렇게 책으로 만나게 된다면 또 몰라도 온라인 연재를 돈내고 보게 되지는 않을 것 같다. 디지털의 아날로그화에는 대찬성이고 기꺼이 돈을 지불할 용의가 있지만, 여전히 구시대 사람인지라 디지털 미디엄에 대해 페이는 좀 꺼려지는 게 사실이다. 뭐 또 시간이 지나고 아날로그를 디지털이 완벽하게 대신하게 된다면 또 생각이 달라질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잠시나마 넵퍼 폴과 고시낭인 공서희 양과 함께 하는 시간들은 즐겁고 유쾌했다.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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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이언 매큐언 작가의 <넛셸>이 출간될 거라는 소식을 들었다. 1년 전엔가 어떤 출판사 이벤트로 이언 매큐언 작가의 책 <이노센트>를 받았다. 물론 당장 읽지 않았다. 아마 위화 작가의 책에 나오는 그의 글 때문이었나. 비교적 신간에 해당하는 <칠드런 액트>의 출간 소식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아, 그리고 보니 오래 전에 그의 부커상 수상작 <암스테르담>을 아마 읽었던 것 같다. 역시나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 시절은 리뷰도 쓰지 않던 시절이라 막연하게 읽었다는 기억 하나 뿐이었다. 그리고 그의 절판된 책 <시멘트 가든>도 일단 구해 놓았다. 사서 조금 읽다가 접어 두었다.

 

어쨌든 신간 출간 소식을 듣고 중고서점에 달려가 <칠드런 액트>를 사서 읽기 시작했다. 첫 선택으로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초로의 판사와 수혈 받지 않으면 당장 죽을 지도 모르는 뛰어난 재능을 가진 소년과의 대화가 인상적인 수작이었다. 사람들이 이래서 이언 매큐언, 이언 매큐언 하는가 싶었다. 올해 BBC 필름 영화로 발표될 전망이라고 하는데, 어떤 식으로 영화화될는지 기대가 된다. 주인공 피오나 메이 판사 역은 노련한 배우 엠마 톰슨이 맡았다. 소설에서 이언 매큐언은 오랜 결혼생활의 종지부를 찍을 지도 모르는 가정의 위기에 봉착한 유능한 판사의 개인적 고민과 한 생명을 살려야 하는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번뇌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과연 타인의 삶에 우리가 어떤 결정을 내릴 수 있는지 그리고 그 영향력 등에 대해 고민하게 하는 수작이었다.

 

지난 달 중순부터 시작된 나의 이언 매큐언 읽기의 두 번째 작품은 <이노센트>였다. 이미 가지고 있던 책이었기 때문에 선택이 수월할 수밖에 없었다. 참혹한 2차세계대전이 끝난 냉전 시대 동서방의 첩보전의 격전지였던 베를린에서 벌어진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이어서 그런지 더 실감나는 이야기들이 인상적이었다. 이 작품 역시 1993년에 영화화된 바 있다. 앤소니 홉킨스 주연이라고 하는데 오래 전 영화라 구하기가 쉽지 않다. 이언 매큐언 작가는 또다른 작품 <스윗 투스>에서 비슷한 변주를 시도한 것 같은데 아쉽게도 국내에는 아직 소개되지 않은 책이다. 원서로라도 구해서 읽어야 하나 고민 중이다. 역시나 첩보원이 등장하고, 냉전 시절 문학가들에 얽힌 플롯이 아주 매력적인 느낌이다. 위키피디아에서 살짝 내용을 살펴보았는데 마구 읽어 보고 싶어졌다.

 

 

나의 세 번째 이언 매큐언 도전작은 <체실 비치에서>. 도버 해협에 위치한 체실 비치로 신혼여행을 떠난 서로 다른 두 계급 남녀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첫날밤이 너무나 두려운 신부, 욕망에 불타는 하류 계급 출신 풋내기 신랑의 감정이 뒤섞인 끝에 결국 파국으로 치닫는 설정에 그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어댔다. 게다가 분량도 부담이 없어서 그랬는진 몰라도 이틀 만에 다 읽을 수가 있었다. 항상 엉뚱한 상상에 체실 비치를 구글맵으로 검색해 읽어 보기도 했다. 당장 가볼 수 있다면, 달려가 봤을 텐데 하는 또다른 공상에 빠져 보기도 했다. 이 작품 역시 BBC 필름에서 영화로 제작해서 내년 1월 경에 공개될 예정이라고 한다. 영국 출신 극장 연출가 도미닉 쿡의 영화 연출 데뷔작이다. 작가의 필력도 대단하지만, 이언 매큐언 선생은 영화복도 타고난 모양이다. 2007년 부커상 후보에 올랐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돌고 돌아 다시 <암스테르담>으로 돌아왔다. 이 책 역시 미디어 2.0에서 나온 책으로 절판된지 오래됐다. 중고서점에서 구해다 읽기 시작했는데 그전에 읽었던 기억이 전혀 나지 않는다. 이렇게 새로울 수가 있나 그래. 내용은 흥미로웠다. 지난 주말 독서모임 동료분이 말해준 대로, 이언 매큐언은 결정적인 사건으로 소설을 시작해서 그에 얽힌 인간사를 고민과 번뇌를 풀어간다는 스타일이 그대로 드러난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잘난 출판업자 부인 몰리 레인의 때이른 죽음, 각기 다른 순간에 고인의 연인이었던 이들의 부침을 그린 스토리로 1998년 부커상을 받았다.

 

그리고 대망의 신작 <넛셸>을 읽었다. 지난달 독서모임에서 아직 출간되지도 않은 이 책을 그렇게 추천했건만, 이언 매큐언의 다른 책들에 비해 내공이 떨어진 느낌이라고나 할까. 영원한 문제작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햄릿>의 변주 그리고 영화 <마이키 이야기>의 오마쥬까지는 좋았는데 주변에 하도 엽기적인 사건사고들이 넘쳐 나다 보니, 엄마 트루디의 뱃속에 있는 태아가 아버지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미는 엄마와 숙부의 계획에 경악하면서도 속수무책인 상황에 대한 묘사가 흥미로웠다. 다만 시각적 정보도 없이 오로지 청각적 정보에만 의존해서 그리고 엄마가 즐겨듣는 팟캐스트와 라디오드라마로만 세상을 배우고 판단하는 것이 부족할 지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어른도 쉽지 않은 와인 테이스트로 산지까지 알아내는 장면에서는 정말 작가의 분신인 듯한 태아의 모습에 무릎을 꿇을까도 싶었다. 너무 멀리 나가셨소이다 이언 매큐언 선생.

 

 

어쨌거나 다시 수집해둔 이언 매큐언의 다른 작품 읽기에 나섰다. <토요일>. 표지갈이를 하고 새롭게 출간됐지만 내 수중에 있던 책은 구간 <토요일>이었다. 아, 왜 국내에 출간된 이언 매큐언의 모든 책들은 번역자들이 다 다른 건지 그것도 궁금하다. 예전에 헤르타 뮐러의 책을 읽으면서 역자들이 모두 달라 하나의 작가가 아니라 다른 작가의 작품을 읽는 게 아닌가 싶었던 경험에 아무래도 가능하면 동일한 번역자가 같은 작가의 작품 번역을 해주는 게 어떨까 싶다는 의견도 독서모임에서 피력했었다.

 

<토요일>은 2003년 두 번째 이라크전쟁을 앞둔 2월 13일 토요일 하루를 그린 작품으로 주인공 헨리 퍼론의 고달픈 하루에 방점을 찍는다. 신경외과 전문의를 주인공으로 삼은 작가는 자그마치 2년 동안이나 뇌수술 하는 장면을 직접 보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으면서 실제 수술 장면을 마치 해부하듯 고스란히 소설에 옮겨 담았다. 개인의 평온한 일상이 언제라도 예상하지 못한 폭력에 의해 부서질 수 있다는 설정이 정말 공포스러웠다. 우리 사회는 아니지만, 이라크전쟁으로 촉발된 기존 중동질서에 혼란이 IS 극단적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의 발호를 부추겨 오늘날 서방세계의 안전을 위협하는 하나의 원인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어쩌면 이언 매큐언의 예언이 담긴 묵시록으로 읽을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한달여에 걸쳐 모두 6권의 이언 매큐언 책들을 섭렵했다. 지금 읽고 있는 책은 역시 영화로도 만들어진 <이런 사랑>이다. 과학 저술가로 활동 중인 47세 중년 남자 조 로즈가 애인 클라리사와 피크닉을 즐기던 화창한 날에 벌어진 풍선 사건에 개입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다룬 소설인데 초반은 좀 지루했지만, 드 클레랑보 신드롬이라는 어려운 이름으로 알려진 도끼병 환자 제드 패리가 등장하면서 소설이 재밌어지기 시작했다. 이래서 소설은 결정적 순간이 있다는 것일까. 초반엔 충격적이었지만 그냥 그렇게 전개되던 소설이 단박에 흥미진진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영화도 구해놨는데, <사랑을 견뎌내기>라는 소설과는 좀 다른 제목이라 흥미로웠다. 36살의 대니얼 크레익이 원작 소설의 주인공보다 열 살이나 어린 역할을 멋지게 해낸 듯 싶어 기대가 된다. 아무리 봐도 미친 사랑에 빠진 제드 패리 역의 리스 이판도. 소설을 다 보고 나서 영화도 봐야지.

 

이언 매큐언과의 나의 마지막 여정은 <시멘트 가든>을 거쳐 <속죄>로 마무리될 전망이다. 아직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솔라>와 <스윗 투스>의 출간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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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6-29 19:0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전작 읽기의 모범을 보여주시는 레삭매냐님. 정말 존경합니다. 저는 전작 읽기를 시도하다가 포기해서 엎어진 일이 많아서 전작 읽기를 결산하는 글을 써본 적이 없습니다. ^^;;

레삭매냐 2017-06-29 23:03   좋아요 2 | URL
아직 전작을 완성한 게 아니라 중간점검
수준인데, 과찬이십니다 :>

세 권 플러스 소설집도 하나 있었네요.
일단 구해야겠네요.

진짜는 로베르토 볼라뇨인데 큰산이네요.

AgalmA 2017-06-29 21: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작 읽기는 ˝이언 매큐언은 결정적인 사건으로 소설을 시작해서 그에 얽힌 인간사를 고민과 번뇌를 풀어간다는 스타일˝... 이런 걸 발견하게 되어 좋은 거 같아요^^
도선생 책 열심히 읽어가며 저도 제 나름의 종합을 하게 되는 게 좋더라고요^^
레삭매냐님의 이언 매큐언 도전 바라만 봐도 흐뭇하네요^--^ 끝이 얼마 안 남았군요. 짝짝짝~

레삭매냐 2017-06-29 23:06   좋아요 2 | URL
지금까지 잘 달려 왔는데 남은 걸
잘 마무리해야지 싶습니다.

최고작이라는 <속죄>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도끼 선생의 책도 도전해 보고 싶은데
원체 대작들인지라 ㅎㄷㄷ 하더라구요.

목나무 2017-06-30 09: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 진짜 대단하시네요. 한 달 새에 이리 많은 작품들을....^^
영화도 챙겨보시기까지...저는 <속죄>를 영화로 만든 <어톤먼트>만 봤네요.
<첫사랑, 마지막 의식>은 이미 읽으신 건가요? 언급이 없는 듯하여...
저는 이 단편집도 무척 좋았거든요.
전작 끝까지 하시기를 응원합니다. ^^ ㅎㅎ

레삭매냐 2017-06-30 09:54   좋아요 2 | URL
지금 <이런 사랑> 읽고 있는데
예전처럼 진도가 쫙쫙 나가지 않네요.
일반적 독서 슬럼프가 아닌가 싶습니다...

말씀하신 소설집은 구할 수가 없어서요 :>
개인이 파는 중고책은 배송료가 비싸서
고민 중이네요. 일단 질를까요?

<첫사랑>까지 더하면 네 권 더 읽어야겠네요.

목나무 2017-06-30 09:58   좋아요 2 | URL
<첫사랑, 마지막 의식>은 단편집이긴 한데... 저는 그 단편들이 조금 충격적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내용들이....... 그래서 제가 매큐언이란 작가를 제대로 인지하고 또 좋아하게 되었다는...ㅎㅎㅎ
레삭매냐님의 취향이 어떤지 몰라서 반드시 구입하라고는 말씀 못드리겠는데 언젠가 기회가 되면 읽어보셔도 좋을 듯해요. 장편과는 또다른 매력이 확실히 있어요. ^^

레삭매냐 2017-06-30 10:22   좋아요 2 | URL
뭐 이왕에 시작한 컬렉션이니 언제고
수중에 넣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6년 전부터 번역 중이라는 <솔라>는
과연 언제 나오는 걸까요.

<Sweet Tooth>가 아주 궁금한데 원서
로라도 살까 고민 중입니다.

단발머리 2017-06-30 12: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 정말 멋지십니다.
저는 딱 두 권 읽었는데, 레삭매냐님 페이퍼 읽으면서 어, 어, 어... 이것도, 이것도, 이것도 읽어야겠다, 하고 있습니다.
사실 도서관에서 대출해서 저희집까지 왔다가 다시 돌아간 책들도 여럿 있습니다. ㅠㅠ
이렇게 한 작가의 책을 주욱 이어서 읽는게 참 좋은데,
전 그게 잘 안 되더라구요. 레삭매냐님 보고 도전받네요.
아하.... 이렇게 하는거구나~~ 하면서요^^
속죄,편 기다립니다.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레삭매냐 2017-06-30 14:12   좋아요 1 | URL
나름 슬럼프여서 완독에 성공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남은 책들 모두 읽는
쾌거를...

저도 도서관에서 빌리기만 하고 반납하기를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이언 매큐언 선생의
<넛셸> 읽고서 햄릿 빌렸다가 펴 보지도 못
하고 반납했네요.
 
한평생
로베르트 제탈러 지음, 오공훈 옮김 / 그러나 / 2016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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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기에 앞서 소설 <한평생>은 구원과 고독 그리고 존엄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에게는 처음으로 번역되어 소개되는 오스트리아 출신 배우이자 시나리오 작가 그리고 소설가인 로베르트 제탈러의 <한평생>은 지난 봄 한강의 <채식주의자>와 함께 맨부커 인터내셔널 최종심에 오른 수작이라는 점만으로도 충분히 일독할 가치가 있는 책이다. 새로운 작가를 만난다는 즐거움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으로 이런 도전에 인색한 편이 아니라 즐거운 마음으로 읽을 수가 있었다. 2015년에 <스토너>의 존 윌리엄스를 만난 해로 기억될 수 있다면, 2016년은 로베르트 제탈러를 발굴해낸 해로 기억될 것 같다.

 

소설 <한평생>은 산사나이 안드레아스 에거의 평범한 일생에 관한 소설이다. 그런 점에서도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를 떠올리게 한다. 에거는 고아 출신으로 오스트리아 티롤 지방의 농부 크란츠슈토커의 포스터 차일드(foster child)로 입양되어 어린 시절부터 매질과 학대에 익숙한 삶을 살게 된다. 어느 날 양부의 심한 매질로 오른쪽 다리가 부러지고 접골사의 처방으로 낫긴 했지만 한쪽 다리를 절게 되었다. 소설의 초반부터 내러티브는 어린 소년 에거가 앞으로 얼마나 험난한 삶을 살게 될지 그 징후를 보여준다. 소년을 세상에서 유일하게 따뜻하게 대해주던 크란츠슈토커의 장모 디아늘이 죽었을 때, 그늘진 장소에 숨어 흐느끼는 장면에서 소년의 고독을 읽을 수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소설의 시작은 에거가 염소지기를 오두막에서 구하는 장면으로 시작되었던가. 말없이 구원에 나선 에거의 노력은 폭설을 헤치고 마을로 향하던 와중에 눈발 속으로 “뿔 달린 하네스”가 도망치면서 수포가 되고 눈 속에서 고생하느라 지친 마음을 ‘황금 영양’ 여관에서 튀긴 도넛과 수제 크라우터러 소주로 달래는 가운데 젊은 여성을 만났고 그 순간을 에거는 평생 돌이켜 회상하게 되었다고 한다. 언제나 그렇듯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는 장면은 그렇지 않던가. 그렇게 인간의 구원 그리고 사랑은 일맥상통하게 된다는 점을 작가는 말하고 싶었던 걸까.

 

학교에서 다니면서 간신히 글을 깨우친 에거는 장성해서 크란츠슈토커의 매질에서 벗어나 비로소 독립된 삶을 꾸려 나가기 시작한다. 해준 건 없고 부려 먹기만 한 양부의 매질에 대한 거부는 한 인간이 지켜야 하는 존엄성에 대한 장엄한 선언이었다. 그리고 ‘비터만 운트 죄네’ 회사가 산중에 케이블카 설치를 시작한 것은 에거에게 하나의 기회였다. 산으로 상징되는 자연을 사랑했던 그에게 말없이 묵묵하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이야말로 금상첨화였다. 세계가 자본주의로 시대로 진입하게 되면서, 오락과 휴식을 즐길 여가시간과 소득이 늘어난 대중에게 힘들이지 않고 산을 오를 수 있게 만들어주는 케이블카 사업이야말로 황금알을 낳은 거위였던 모양이다. 그 당시만 해도 지금과 같은 개발에 따른 필연적인 환경파괴 이슈는 없었던 모양이다.

 

 

특별한 기술도 없고, 다리까지 저는 에거의 고용을 총지배인은 꺼리지만 막일꾼 에거의 가능성을 알아본 그는 즉석에서 고용을 결정한다. 그리고 벌목작업과 쇠기둥을 세우는 일이 투입된 에거는 산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부하는 자신의 능력을 십분 발휘해서 현장에서 뛰어난 성과를 거둔다. 동시에 황금 영양의 종업원 마리와의 사랑도 무르익어 간다. 직장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두둑한 보수와 크라우터러 소주로 매수했다) 산에 불로 만든 기발한 프로포즈를 동원해서 마침내 마리와 결혼에 성공한다. 하지만 에거의 행복은 오래 가지 않고, 어느 날 신혼부부의 오두막을 덮친 산사태로 아내 마리를 잃는다.

 

그리고 누구나 다 알다시피 오스트리아 출신 상병 아돌프 히틀러가 기획한 게르만 민족의 레벤스라움을 위한 정복전쟁이 시작되고, 에거 역시 전시 복무에 지원하기 위해 징병검사위원회에 지원하지만 나이가 많고 다리를 전다는 이유로 깨끗하게 거절당한다. 하지만 승승장구하던 독일이 스탈린그라드 전선에서 코너에 몰리게 되자 4년이 지나지 않은 1942년 11월 에거는 징집 명령을 받고 러시아 코카서스 전선에 투입되어 후방의 보급도 받지 못한 채 산속에 머무르다가 러시아군의 포로가 되고 만다. 혹독한 러시아 포로수용소 시절을 보내고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그에게 달라진 상황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에거의 앞날이 막막하기만 했던 것도 아니었다. 전쟁이 끝나고, 전쟁의 상흔으로부터 회복되면서 대중들이 다시 레저의 시간을 즐기게 되자, 산사나이 에거는 아름다운 티롤 지방의 산을 찾는 사람들에게 가이드가 되어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기 시작한다. 산에서 길을 잃은 노부부를 도왔던 일에 착안해서 에거는 새로운 사업에 나선다. 학교 교사였던 안나 홀러와의 짧은 로맨스도 등장하지만, 산 사람의 사랑이 죽은 사람의 깊은 사랑을 대체할 수 없다는 사실만 깨달은 채 조용한 이별로 마무리되기도 한다.

 

고독했던 어린 시절, 아내를 잃은 슬픔 그리고 전쟁포로가 되어 숱한 사람들이 죽어가는 암혹한 시절을 견뎌낸 에거를 산은 묵묵하게 안아 주었다. 마을이 휴양지로 변신하기 시작하고, 가이드 생활에 염증이 난 에거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은둔생활에 들어간다. 산에서 나고 자란 남자에게 산이야말로 결국 돌아갈 곳이라는 암시였을까. 에거의 삶이 막바지로 치닫는 가운데, 소설 처음에 등장했던 사라졌던 ‘뿔 달린 하네스’의 시신이 발견된다. 삶의 온갖 간난신고를 겪어낸 에거는 그리고 천수를 누리고 생을 조용하게 마감한다.

 

로베르트 제탈러는 마치 솜씨 좋은 피아노 조율사처럼 그렇게 산사나이 안드레아스 에거의 삶을 그림 같이 아름다운 티롤 지방의 자연 속에 형상화시킨다. 고아로써 느낀 외로움, 개발과 전쟁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의 과정 가운데 에거는 성장하고, 사랑하고 그리고 마침내 죽음을 맞이한다. 에거의 삶에 어느 순간 착근한 죽음은 더 이상 어색하지 않은 삶의 동반자 같은 존재였다고 해야 할까. 에거가 참여한 노동에 대한 질적 변신도 눈여겨 볼만 하다. 생의 시작은 농장에서 막일을 도맡아 하는 무보수 농부였다. 그 다음에는 케이블카 회사에 고용된 직원으로 산정상에 케이블카를 설치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추가 노동을 원했고, 그 다음에는 군인으로 대소전쟁에 참여해서 바위를 폭약으로 뚫고 진지를 사수하는 일에 투입됐다. 마지막으로 고향에 돌아와서는 산악 가이드로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에거는 모든 인간처럼 다양한 노동 방식을 통해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해 보인다.

 

 

제탈러의 첫 만남은 기대이상으로 만족스러웠다. 그래서 아직 출간되지 않은 그의 전작 <담배 가게 소년>에 대한 호기심이 증폭됐다. 영어책으로는 나온 모양이던데, 애용하는 북디파지토리를 통해 주문할까 하고 고민 중이다. 독일어를 읽을 수 없으니 영어책을 읽어야겠지 아마도. 최근 제바스티안 하프너의 <어느 독일인 이야기>도 열심히 읽고 있는데, 비슷한 시대의 이야기라 그런지 다양한 부분에서 공명하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2016년 최고의 발견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제현에게 강력하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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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6-29 13: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가끔 권위 있는 문학상 수상 작가보다 최종심사에 오른 후보작을 쓴 작가가 더 크게 알려지는 경우가 있어요. 아폴리네르가 공쿠르상 최종 후보에 오른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다른 작가가 상을 받았습니다. 상을 받은 작가는 지금도 프랑스 내에 인지도가 있지만, 아폴리네르의 명성에 비하면 부족해요.

레삭매냐 2017-06-29 23:01   좋아요 0 | URL
동감하는 바입니다.
수상작보다도 어쩔 땐 경쟁작이 우수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죠.

이창래 선생의 <생존자>도 그런 경우라고
생각합니다.
 


먼저 가즈오 이시구로의 원작이 읽고 싶었으나, 대다수 현대일들처럼 내게는 얌전하게 앉아 책을 읽을 시간이 턱없이, 진심으로 부족했다. 그렇기 때문에 차선으로 영화를 선택해서 보게 됐다. 물론 책도 구해서 나의 책상 위에 잘 모셔 놓았다. 400쪽 가까운 책은 언제 읽으려나.




영화를 보는 내내 어쩔 수 없이 이완 맥그리거와 스칼렛 요한슨 주연의 <아일랜드>가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다만 영화 <아일랜드>가 미래의 세계를 시간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면, 소설/영화 <네버 렛 미 고>는 현재 시점으로 전개된다는 차이점 정도. 그리고 <아일랜드>의 주인공들은 철저하게 복제된 클론으로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진행될 것이라는 모르고 있다면, 가즈오 이시구로의 <네버 렛 미 고>에서는 그들, 기증자들이 순순히 체념하고 자신의 운명에 따른다는 점 정도. 사실 <아일랜드>처럼 자유의지를 가진 클론들의 반란을 예상했다면 그것은 온전하게 관객의 오류다.


마크 로마넥의 <네버 렛 미 고>에서는 소설에서처럼 간병사 캐시 H(캐리 멀리건 분)의 입장에서 관조적 시선으로 영화가 진행된다. 세 번째 기증에 나선 오랜 시절부터 친구이자 연인인 토미 D의 마지막 기증을 지켜보며 영화는 곧바로 플래시백으로 접어든다. 소설과는 다른 각색자가 각본을 맡은 만큼, 이 정도의 각색은 봐줄만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시작된 11살난 캐시와 토미(앤드루 가필드 분) 그리고 루스(키이라 나이틀리 분)가 유년시절을 보낸 1978년의 헤일셤으로 돌아간다.


이 어린아이들이 장래의 기증을 위해 키워지는 장면은 비극이다. 적당한 운동과 균형 잡힌 식사 그리고 갖가지 교육과 예술활동, 그들의 삶에 관련된 모든 것들이 미래의 단 한 가지 목표를 가리키고 있다. 1952년에 시작된 획기적인 발명으로 인류의 수명이 100살까지 늘어났다는 전제 아래 진행되는 국가기증프로그램(National Donor Program:NDP)의 실체가 바로 이 헤일셤에서 소리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정작 영화에서 다루는 무서운 진실은 모두가 NDP에 동의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에 암묵적인 사회적 합의가 완벽하게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란 아이들은 성인이 되었고, 카메라는 관객을 1985년의 코티지로 데려간다. 캐시와 토미 그리고 루스는 묘한 삼각관계를 이루며 서로 간에 긴장이 고조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 역시 기증자로서의 운명을 피할 수는 없다. 다만, 사랑에 빠진 헤일셤 출신의 남녀들에게는 기증 유예가 주어진다는 루머가 떠돌고 있다. 자신의 목숨을 건 굉장히 절박한 이슈임에도 영화에서는 그렇게 묘사가 되지 않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기증자의 운명이 어떻게 진행된다는 것은 캐시가 본격적인 기증자들의 간병사로서 활동하기 시작하는 1994년에서 비로소 본격적으로 다뤄지기 시작한다. 아무리 영화라고는 하지만, 기증자들이 아무런 반항을 하지 않고 숙명을 그대로 받아 들이는 장면을 그대로 받아 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수년 간의 간병사 생활 끝에 캐시는 어린 시절의 친구 루스와 만나게 된다. 루스는 이미 두 번의 기증을 마치고, 가까스로 연명을 하고 있다. 오래 전에 토미와 헤어진 루스는 캐시에게 토미를 만나러 가자는 제안을 한다. 사실 그들의 애증의 관계를 뒤로 한 극적인 해후는 여전히 관객의 관심에서 멀어져 있다. 그들의 최종운명이 어떻게 될 지에 초점에 맞추어져 있을 뿐이다.


갤러리를 운영하는 마담이 그들의 운명을 좌우할 것이라고 믿는 토미는 캐시에게 자신이 수년간 작업한 그림을 보여주고, 캐시와의 진정한 사랑을 입증한다면 기증 유예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한다. 그리고 헤일셤에서의 예술활동은 그들의 영혼을 들여다보기 위한 프로그램 입안자들의 계획이라고 토미는 철썩 같이 믿는다. 과연 그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사실 상상했던 비극적인 장면은 루스의 마지막 기증 장면 외에는 거의 없지만, <네버 렛 미 고>는 최근에 본 가장 슬픈 영화다. 아무리 클론이라고 하지만, 인간의 존재론적이 의미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해주었다. 영화에서는(혹시 소설에서는 어떨지 모르겠다) 어떻게 해서 헤일셤의 아이들이 선정되었는지, 그리고 기증의 구체적인 수혜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나중에 캐시의 독백처럼 기증받는 이들의 삶이 어떤 의미에서 기증자들의 삶보다 낫다고 말할 수 있는지 전적으로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유년 시절부터 철저한 감시와 통제 아래 자란 캐시와 토미 그리고 루스가 처음 세상에 나가 다이너에서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음식을 주문하는 것을 보고 씁쓸한 웃음이 났다. 그 순간 왜 그들의 운명에 대해 알려준 루시 선생님의 상황극이 바로 연상됐다. 어쩌면 그들의 비극적인 운명에 대한 전조는 비오는 날 루시 선생님이 들려준 기증자들의 암울한 미래에 대한 사실에서 시작된 게 아닐까. 그것보다 더 무서운 사실은 내게 주어진 삶을 조금 더 연장시켜 보겠다고 타인(클론)을 태연하게 희생시키는 시스템의 문제가 아니었을까. 이런 근본적인 문제는 절박한 상황에 처해보지 못한 개인의 단상일지도 모르겠다. 과연 나에게 그런 똑같은 상황이 닥쳤을 때, 그들과 다르게 도덕률을 우선할 거라고 단언할 수 있는가.


최근 <위대한 개츠비>에서 멋진 연기를 보여 주었던 영국 출신 배우 캐리 멀리건이 맡은 캐시 H 역에 호감이 갔다. 말로 이래서 좋다라고 꼭 집어서 표현하긴 어렵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그녀의 연기에 몰입되어 가는 자신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오히려 그녀보다 더 뛰어난 스타성을 자랑하는 키이라 나이틀리의 루스보다 낫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새로운 스파이더맨으로 자리 잡은 앤드루 가필드의 토미 D 역할도 나쁘지 않았다. 이렇게 주연을 맡은 세 명의 배우들은 서로 간에 펼쳐지는 사랑과 우정 그리고 갈등이 어우러진 미묘한 드라마를 성공적으로 만들어냈다.




그렇게 슬픈 영화를 보고 나서 허겁지겁 가즈오 이시구로의 원작을 펴들었다. 그리고 단숨에 60여쪽을 읽어내려갔다. 물론 원작소설과 영화는 달랐지만, 같은 뿌리를 가진 ‘클론’답게 공명하는 부분이 많았다. 영화가 감성적이라고 한다면, 소설은 디테일에서 도저히 영화가 추종할 수 없는 부분이 존재했다. 어서 빨리 원작소설 <나를 보내지 마>를 읽어야겠다.


정말 슬픈 영화다. 정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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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17-06-26 10: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 정말 좋아요!!! 꼭 읽으세요!

레삭매냐 2017-06-26 11:02   좋아요 1 | URL
소설도 책 읽고 나서 바로 읽었더라구요 :>
리뷰는 예전에 쓴 거 울궈먹기였습니다.

가즈오 이시구로 책 중에서(제가 지금까지 읽은)
가장 마음에 드는 책이더군요. 슬프고 비극적인.

유부만두 2017-06-26 11: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쵸! 아름다운 비극! 영어문장이 꽤 아름다워요....

잠자냥 2017-07-20 10: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보통 소설을 영화화하면 원작보다 못한 경우가 다반사인데, 이 작품은 소설은 소설대로 영화는 영화대로 다 좋았어요. 캐리 멀리건과 키이라 나이틀리의 조합, 그리고 그 영화의 황량한 분위기 등등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더군요.

레삭매냐 2017-07-20 10:58   좋아요 1 | URL
격하게 공감하는 바입니다.

캐리 멀리건이 덩그러니 남아 거리를 쳐다 보던
마지막 장면이던가요 정말 아름답고 슬펐던 것
같습니다.

말씀 하신 대로, 대부분 소설의 영화화가 기대
만 못한데, 영화는 영화대로 소설은 소설대로
멋진 작품이었습니다.

너무 슬픈 영화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