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난폭
요시다 슈이치 지음, 권남희 옮김 / 은행나무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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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장장 열흘이나 되는 긴 연휴의 끝은 요시다 슈이치의 <사랑의 난폭>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사실 이번 연휴는 가즈오 이시구로 전작에 도전하기가 목표였던 것처럼 지난 주 노벨문학상 발표가 난 뒤 그의 작품을 그야말로 미친 듯이 읽어댔다. 그렇게 어느 작가에 빠져 읽은 적이 있었던가? 아마 그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 같은 그런 느낌이다. 그리고 마지막은 지난 8월부터 잡고 있었지만 마무리를 짓지 못한 요시다 슈이치의 <사랑에 난폭>으로 끝을 맺었다.

 

지난 여름, 절반 가량 읽다만 책의 중간부터 다시 읽기 시작했다. 어쩌면 가장 재미가 있어지는 부분이라고 해야 할까. 소설 <사랑의 난폭>의 실질적인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하세 모모코 씨는 결혼 8년차 위기의 주부로, 결혼 전 성은 다케노우치다. 그녀의 남편은 마모루로, 자그마치 16살이나 어린 연하의 여성과 바람이 났다. 애인의 이름은 미야케 나오, 현재 임신 중이다.

 

결혼과 동시에 전업주부로 변신한 스타일 좋은 미녀 모모코 씨는 비누교실 강사로 소일하며, 병으로 몸져 누운 시아버지의 병간호에도 소홀하지 않고 자신의 일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다. 그러던 어느날, 남편 집안의 비밀에 대해 우연히 알게 된 모모코는 시어머니 데루코가 사시는 안채를 드나들며 비밀을 캐내기 시작한다. 마모루의 중재로 불륜에 얽힌 삼자가 대면헤서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하지만 오히려 문제를 악화시킨다. 호텔에서 모모코 씨가 보여주는 히스테리는 우리네 막장 드라마에 나오는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익숙해서 그런가, 사실 덤덤하게 다가왔다. 어쨌든 간에 마모루는 모모코와의 결혼생활을 끝내고 나오와 새출발을 계획 중이다.

 

마모루와 나오의 일기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이야기들에서 사건의 실체를 바라보기란 쉽지 않은 미션이다. 언제나 그렇지만 자신의 입장에서 사건을 바라보기 때문에 객관적 실체에 도달하기란 요원하기만 하다. 올해부터 요시다 슈이치 작가의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그렇다고 범작은 아닌 <사랑에 난폭>. 한 남자를 두고, 그 남자를 서로 사랑한다고 우기는 두 여성 모모코와 나오의 대결이 어떤 식으로 결말을 이루게 될지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자, 이제부터 스포일러 들어갑니다. 책을 읽으실 분들에게 치명적인 요소이니 감안해서 읽어 주시길.

 

요시다 슈이치가 남성작가라는 점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고 싶다. 하지만, 이 능구렁이 같은 작가는 어쩌며 이렇게 여성의 심리를 탁월하게 묘사하는지 그리고 약간 헷갈리는 일기 구성으로 사실은 모모코가 리츠코와 결혼 생활 중이던 마모루의 결혼을 파탄낸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밝힌다. 게다가 임신이라는 무기로 결혼에까지 골인하는데 성공했지만 계류유산으로 이미 아이는 그녀의 뱃속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니까 독자는 모모코 씨의 현재 일기와 과거 일기가 중첩되는 가운데 마침내 진실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한 번 불륜으로 결혼을 파탄낸 과거가 있는 남자가 두 번이라고 마다할까. 모모코 씨는 한사코 마모루의 이혼해 달라는 요청을 거부하지만, 어쩌면 이미 그녀는 결론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분노, 분함 그리고 비참함이라는 3종 세트의 감정이 그야말로 회오리바람처럼 그렇게 몰아 닥친다.

 

시어머니가 자신이 몰래 파놓은 육첩다다미를 뒤졌다고 분노하지만 막상 자신 역시 시어머니의 본채를 마음대로 드나들지 않았던가? 나는 바로 이 지점에서 ‘사랑에 난폭’이라는 소설의 제목을 격렬하게 공감할 수가 있었다. 그렇구나. 왜 역지사지로 사유해 보지 않았던 걸까? 자신도 이미 비슷한 상황으로 리츠코 씨의 결혼을 파탄낸 장본인이면서 이번에는 나오 씨에게 절대 양보할 수 없노라고 버티는 장면에선 그야말로 코웃음이 절로 나왔다. 뭐 삶이란 그렇게 가는 거지.

 

별채를 찾아온 마모루에게 모모코가 파경의 이유를 찾는 장면은 그래서 더 추해 보였다. 이미 마음이 떠난 남자, 무슨 소리를 하더라도 되돌릴 수 없는 불가역한 상황이라는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미련을 떨치지 못하는 그녀의 모습이 왜 그렇게 안쓰럽게 느껴지던지. 친구 하즈키의 조언대로, 챙길 것은 챙기고 미련 없이 보내 주어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들의 바람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라는 점은 간과한 채, 마모루와 모모코의 부부싸움에서 일방적으로 자신의 아들 편을 드는 시월드의 주인장도 마음에 안 들긴 마찬가지. ‘어이가 없네’라는 말 따위로 자신의 아들의 잘못을 덮을 수 없다는 걸 시어머니는 과연 몰랐을까? 나중에 모모코 씨가 진실을 들려주었을 때 한사코 부인하는 장면에서도 역시나 정이 떨어지는 건 마찬가지.

 

<사랑에 난폭>은 순수한 열정 아니 욕망으로 시작된 격정적인 사랑에 이은 결혼생활이 8년이라는 시간을 거치면서 이제 열정은 없는 사이가 되어 버린 부부에 대한 요시다 슈이치의 흥미로운 리포트가 아닐 수 없다. 역대급 장기간의 연휴를 마무리하는데 이만한 책이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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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나라가 낯설다 국가를 바라보는 젊은 중국 지식인의 인문여행기 1
쉬즈위안 지음, 김태성 옮김 / 이봄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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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핵미사일 개발 때문에 결국 국내 사드 배치가 기정사실이 되고야 말았다. 여전히 사드 배치가 국익을 위한 최선의 방법일까에 대해서는 의문이 들지만, 그에 따른 부작용들이 여기저기서 눈에 띄고 있다. 우선 이웃 중국의 격렬한 반발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보복이 시작됐고 신세계 이마트와 롯데마트가 중국 시장 철수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게다가 그동안 국내 면세점을 싹쓸이하다시피 해온 유커들의 국내여행 제한으로 관광업계가 비명을 지르고 있다고 한다. 현대자동차 역시 보이지 않는 불매의 여파 탓인지 매출이 급락 중이라는 뉴스다. 이런 일련의 사태들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여전히 중국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단순하게 중국을 우리의 상품시장으로만 생각해온 게 아니었던가 하는 착각 말이다. 이런 시점에서 중국의 젊은 지식인 쉬즈위안이 자국을 여행하면서 이런저런 단상들을 기록한 <나는 내 나라가 낯설다>는 우리가 중국에 대한 이해를 돕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와 거래하면서 재미를 본 기업이 있었던가? 내 기억으로는 노동자들을 악랄하게 착취하는 폭스콘 정도가 있지 않나 싶다. 결정적으로 우리는 중국이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을 대신해서 여전히 공산당 일당독재를 유지하는 공산주의 국가라는 사실을 종종 잊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쉬즈위안 역시 아무래도 체제 안에서 생활을 해야 하다 보니, 극도로 조심해서 글을 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여전히 눈에 보이지 않는 검열이 존재하고, 인터넷을 통한 소통조차 국가적 차원에서 막는 나라가 중국이 아니었던가.

 

어쨌든 쉬즈위안이 이 책에서 키워드로 삼은 단어는 바로 단절이다. 문화대혁명이 끝난 시절에 태어난 새로운 세대 사람인 저자는 내가 그동안 만난 작가들인 옌렌커나 위화, 류전윈 혹은 하진이 자신들의 조국 중국을 바라보는 시각과는 다른 시선을 유지한다. 보다 객관적이라고 해야 할까. 그보다 앞선 지식인들이 문화대혁명을 직접 겪은 세대라고 한다면, 쉬즈위안은 중국의 역사를 후퇴시킨 문화대혁명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세대에 해당한다. 오히려 개혁개방의 세대라고 해야 할까. 마오쩌둥이 시작한 어처구니없는 문화대혁명이 어떻게 중국을 과거와 현재라는 이분법적 사고로 분열 단절시켰는지에 대한 하나의 고찰이라고 해야 할까.

 

쉬즈위안은 만주에서부터 시작해서 윈난에 이르는 그리고 아직도 중국이 수복하지 못한 타이완에 이르는 장대한 여정을 선보인다. 우리도 마찬가지지만, 오래된 가치들은 모두 타파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고 오로지 개발에 입각한 도금주의가 판치는 세계가 과연 현재 중국의 지향점인지 저자는 묻는다. 이천 년된 고성을 허물고, 어떤 개성도 보이지 않는 신축 건물들이 치솟아 오르는 중국의 오늘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이어진다.

 

선거를 통해 자신들의 지도자를 뽑을 수 없는 중국 인민들을 과연 그들의 지도자들은 관심을 기울일까? 민주주의라는 정치적 욕구 대신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담보해야 하는 중국 공산당의 지도부의 고민에 대한 부분이 빠져 있는 부분이 아쉬웠다. 덩샤오핑의 시장자본주의 도입 이래 가속화되가는 사회적 불공평과 사회복지 그리고 분배 문제를 이대로 방치할 수 있을 것인지 나는 궁금하다. 벌써 9년이나 되었지만, 아편전쟁 이래 서방 열강들에게 치욕적인 영토할양과 침탈을 당해온 중국이 대국굴기의 기점으로 잡은 베이징 올림픽을 앞둔 쉬즈위안의 스케치는 주목할 만하다. 베이징의 수많은 마천루를 실제로 만들어낸 농민공들이 이러저러한 이유로 평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한 국제적 이벤트에서 배제되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할까.

 

중국 공산당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천두슈에 대한 평가도 그렇다. 중국 공산당의 실질적 설계자이자 이데올로그였던 천두슈를 트로츠키파라고 폄하하고, 제대로 평가하지 않고 있다는 설명을 들으니 우리의 상황과도 비교가 됐다. 우리도 여전히 소모적인 건국절 타령을 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서세동점의 19세기말, 청나라는 입헌군주제를 도입해서 마지막 수명을 연장해 보려고 했지만 거대한 시대의 흐름을 막을 순 없었다. 청말 급진적 지식인의 대명사였던 캉유웨이나 량치치오 같은 인물들고 보황파로 몰리지 않았던가. 좀처럼 무너질 것처럼 보이지 않던 제국의 균열을 위해 오월 열사 같은 인물들이 청나라 관료들에 대한 테러로 혁명의 씨앗이 되고자 했다는 사실도 쉬즈위안의 글을 통해 처음으로 알게 됐다. 어쩌면 쉬즈위안은 시스템 내에서 개혁을 시도하는 작금의 상황을 청나라 말기의 상황에 비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 쑨원이 이끄는 혁명이 그렇게 순식간에 제국을 뒤엎게 될지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물론 그 뒤에 따른 환멸의 과정을 더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만.

 

솔직히 말해서 현대 중국 예술에 대한 지식이 일천하다 보니, 저자가 중원 주유기 후반에서 다룬 자장커나 중국 최고의 현대미술가로 손꼽힌다는 천단칭 같은 인물들에 대해서는 오로지 저자의 저술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자장커의 영화나 천단칭의 그림에 대해 아는 게 있다면 반박이라도 하겠는데 아는 게 없으니 그저 저자가 기술하는 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마지막 꼭지에서 다룬 위화 작가의 경우에는 적잖이 공감하는 바가 있었다. 개인적으로 인상적으로 읽었던 <형제>에 대해 시작은 창대하였으나 후반으로 갈수록 인터넷에 떠도는 이야기들을 엮어낸 것 같다는 지적에 공감했다. 그리고 문제의식은 좋지만, 그렇다면 대안이 있느냐 하면 그건 아닌 것 같다라고 했던가. 작가가 정치지도자가 아닌 바에야 그건 너무 무리한 요구가 아니었을까 싶다.

 

<나는 내 나라가 낯설다>에서 쉬즈위안이 다루는 바에 대해서는 공감하지만, 지나치게 형이상학적이고 고담준론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런 점을 저자가 인식해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다수의 인물들과의 다양한 인터뷰가 게재되어 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아둔한 독자가 무식한 탓도 있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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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글라스 캐슬
저넷 월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북하우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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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출신 저널리스트 저넷 월스의 <더 글라스 캐슬>을 읽었다. 예전에 한 번 <유리 성>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왜 다시 이 책이 출간되었나 싶어서 위키피디아의 도움을 받아 검색해 봤더니 올해 여름 저넷 월스의 이 특별한 원작을 바탕으로 한 동명의 영화가 개봉됐기 때문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브리 라슨, 네이오미 와츠 그리고 우디 해럴슨이 열연한 영화의 트레일러를 보니 한 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책을 읽다 보니 프로스펙터라는 장비로 금을 찾겠다는 허황된 꿈을 좇는 캐릭터로 렉스 월스 역에 우디 해럴슨만한 배우가 없겠구나 싶었다. 적어도 캐스팅은 완벽했다.

성공한 저널리스트로 뉴욕에 거주하는 화자는 이스트빌리지에서 쓰레기통을 뒤지는 어머니 로즈메리를 보고 외면한다. 왜 성공한 딸은 노숙생활을 하는 어머니를 외면하는 걸까? 저자는 모든 것이 시작된 사막에서의 유년 시절로 독자를 인도한다. 세상에 두려울 게 하나 없는 저넷의 아버지 렉스 월스는 와이프 로즈메리와 운명적 만남 끝에 결혼한다. 월스 가족에게 방랑은 천명 같은 것이었을까. 애리조나 피닉스를 필두로 해서, 캘리포니아의 숱한 탄광들, 배틀마운틴(네바다) 그리고 마침내 웨스트버지니아 웰치에까지 이르는 여정이 월스 가족을 기다리고 있다.

 

저넷의 부모는 로리와 저넷, 브라이언 그리고 모린까지 네 명이나 되는 자식들에게 안정된 가정을 제공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그러기에 렉스와 로즈메리에게 세상은 너무 넓고 할 일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던 모양이다.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부유한 로즈메리의 부모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었겠지만, 자존감 하나로 세상과 맞짱 뜨는 아버지 렉스(라틴어로 왕을 뜻한다)는 신명 나는 욕설 배틀을 장모님에게 선사한다. 물론 간단치 않은 성격의 장모님도 불같은 성격으로 배틀에 나선다. 뭐 그렇게 가는 거지.

 

무려 네 명의 아이를 거느린 가장으로 렉스는 정말 무능했다. 아니 천성적으로 타고난 방랑벽 때문일까? 한 직장에 오래 버틸 수가 없는 숙명을 타고난 모양이다. 집에서 자신이 벌어올 일용할 양식을 기다리는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성질을 죽이고, 다달이 월급을 집에 가져다 바치는 일 따위는 관심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 덕분에 로리와 저넷, 브라이언과 갓난 모린은 숱한 날들을 굶주림으로 보내야만 했다. 삶이 모험이고, 자연과 더불어 사는 친환경적인 삶에 대한 적확한 삶의 방식을 아이들에게 가르친 점은 부모로서 높이 평가할 만하지만, 그래도 최소한 아이들이 추위에 떨고, 굶주림에 시달리게는 하지 말아야 하지 않았을까. 렉스가 어디서 가져온 마가린을 그대로 먹는 로리와 저넷의 모습에서, 그리고 이웃집에 먹을 걸 도둑질하러 들어갔다가 1갤런에 해당하는 피클을 강제로 먹고 토하는 브라이언의 모습은 참담하게 다가왔다.

 

또 한편으로 가장 사랑하는 딸 저넷에게 금성을 선물해 주고, 자신을 보호하는 법을 알려 준다며 총쏘기를 가르쳐 주는 아버지 렉스. 자신의 자식들에게 손끝 하나 대면 용서하지 않을 거라던 아버지는 사랑한다고 말하던 딸 저넷을 이용해서, 술집에 가서 내기당구로 돈을 벌기도 한다. 그러다가 큰일이 날 뻔도 하지만, 저넷에게 수영을 가르쳐 줄 때처럼 스스로 환난을 벗어나올 줄 알았다고 했던가. 도대체 오락가락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종잡을 수가 없다. 빌리 딜에게 진짜 총을 쏴서 다시 야반도주에 나서게 되는 월스 가족들. 그나마 안식처로 보이던 애리조나 피닉스를 떠나 안착한 렉스의 부모님이 사는 동네 웨스트버지니아의 웰치에서도 그들의 생활을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안정을 찾나 싶었던 웰치에서 저넷을 비롯한 아이들은 굶기를 그야말로 밥먹듯 하고, 쓰레기통을 뒤져 일용할 양식을 구한다. 미국이 베트남전과 워터게이트의 악몽에서 벗어나 한창 신자유주의에 세례를 받고 있던 시기에도 월스 가족은 이런 극심한 차원의 가난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천장에서는 비가 줄줄 새고, 혹독한 겨울에는 난방을 위해 석탄을 살 돈이 없어서 그대로 추위에 노출되고, 중고할인점에서 산 싸구려 옷들을 입고 지내면서도 주눅 들지 않고 성공을 구가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결국 저넷은 언니 로리와 결탁해서 가난으로 점철된 지긋지긋한 웰치를 떠나 뉴욕으로 갈 계획을 세우기 시작한다. 그들이 돈을 모으는 저금통에 오즈라는 이름을 붙인 사실이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브라이언까지 합세한 돈모으기 운동은 아버지 렉스의 약탈로 종언을 맺는다. 생전 아버지에게 화를 내지 않던 로리 언니조차 분노에 휩싸여 아버지에게 막말을 내뱉지 않았던가. 아버지 렉스와 웰치에서 사는 동안 더 이상의 비전이 없다는 사실을 마침내 깨달은 저넷은 고등학교도 졸업하기 전에 뉴욕으로 가서 새출발을 결심한다. 렉스가 꿈꾸던 유리성 역시 말 그대로 글라스 캐슬처럼 산산조각이 나버린 것이다.

 

로리와 저넷, 브라이언 그리고 모린이 순서대로 뉴욕에 둥지를 틀고, 저넷은 버나드 대학에 진학해서 고등학교 시절부터 꿈꾸어 오던 저널리스트의 꿈을 이어간다. 월스 가족에게 뉴욕은 그야말로 아메리칸 드림이 시작되는 그런 장소였던 모양이다. 물론 모린이 엄마 로즈메리를 칼로 찌르는 그야말로 막장 드라마 같은 상황이 연출되기도 하지만, 월스가의 아이들은 모두 자신의 분야에서 어엿하게 성공을 거둔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귄 잘 나가는 중소기업가 에릭 골드버그와 결혼한 저넷은 엄마와 아빠는 뉴욕에서 노숙자 생활을 하는데 자신만 호화호식하면서 사는 게 아닌지 양심을 가책을 느끼기도 한다. 동시에 엄마가 외할아버지에게 물려받은 텍사스에 100만 달러에 달하는 땅이 있다는 사실에 좌절하기도 한다. 조상으로부터 상속받은 그만한 재산이 있었다면 그동안에 자기 형제들이 가난으로 고통받은 건 다 무엇이었던가. 개인적으로 저넷 월스가 아버지 렉스와 엄마 로즈메리와 의절하지 않고 끝까지 잘 지낸 점이 그저 놀라웠다. 내가 그녀였다면...

 

에릭과의 8년간의 결혼생활을 끝낸 저넷은 자신을 알아주는 소설가 존 테일러와 새출발에 나선다. <폴링>이라는 자신의 첫 번째 결혼생활에 대한 글을 쓴 존 테일러는 미국 문단에서 그렇게 유명한 작가가 아닌 모양이다. 댓글을 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넷 월스의 <더 글라스 캐슬>을 읽고 나서 호기심에 그의 책을 찾아 읽은 모양이다. 그리고 대개가 부정적인 리뷰였다.

 

개인적으로 무책임했던 아버지 렉스보다, 화가이고자 했던 자유인 로즈메리에게 연민이 갔다. 자신의 인생을 추구하고자 했지만, 네 명이나 되는 아이들에 대한 책임감은 그녀로 하여금 화가의 꿈을 쫓는 대신 어머니의 유산으로 취득한 교사자격증을 가지고 렉스를 대신해서 가장이 되어 교사가 되어 돈벌이에 나서야했다. 가톨릭 교도로 뚜렷한 주관과 신념을 가지고 있던 로즈메리는 자식들에게 자신이 추구하는 올바른 가치관을 심어주고자 노력했다. 물론 그녀와 남편 렉스가 좀 더 책임감을 가지고 자식들을 돌보았다면 좋았으련만 그들은 균형을 몰랐던 것 같다. “인생은 비극과 코미디로 점철된 드라마라는 멋진 말도 그녀가 하지 않았던가.

 

저명한 저널리스트이자 칼럼니스트로 성공한 저넷 월스의 솔직담백한 회고록에 대중은 엄청난 반응을 보였다. 그녀의 회고록 <더 글라스 캐슬>은 베스트셀러가 되어 자그마치 260만부나 되는 책이 팔리고, 이어 영화화까지 되었다. 어쩌면 숨기고 싶은 지난날의 과거사를 당당하게 드러내고, 책으로 만들었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높이 평가해야할 것 같다. 자기 내면의 고통들을 문학적으로 승화시킨 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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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루시 바턴 루시 바턴 시리즈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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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고 있던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내 이름은 루시 바턴>이 마침내 도착했고, 기갈한 것 같은 느낌으로 그렇게 읽어 내려갔다. 오늘 받았는데 벌써 다 읽어 버렸다. 그것은 마치 이 책을 다 읽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그런 느낌이라고나 할까. 2016년 맨부커상 롱리스트 후보작으로 선정되었다는 기사를 보고나서부터, 원서라도 주문해서 읽어야 하나 싶었지만 그 정도 실력이 되지 않으니 그저 번역이 돼서 출간될 날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도착했고 난 순식간에 다 읽어 버렸다.

 

소설의 제목으로 나와 있듯이 소설의 화자는 글쓰는 여자 루시 바턴이다. 일리노이 주 앰개시라는 촌동네 출신의 루시는 차고에서 자랐다. 텔레비전 한 대 없이 유년시절을 보낸 그녀는 추운 집에 들어가기 싫어서 따뜻한 학교 교실에 남아 숙제를 하고, 책을 읽으면서 장학금을 받아 대학에 진학하고, 그렇게 진학한 대학에서 현재의 남편 윌리엄을 만나 결혼해서 뉴욕에 정착했다. 크리스티나와 베카라는 어여쁜 딸을 낳은 루시는 맹장수술 때문에 입원한 크라이슬러 빌딩이 보이는 뉴욕 병원의 1인실에서 이 모든 이야기가 시작된다.

 

왜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작가가 병원을 이야기의 출발점으로 삼았을까 생각해 본다. 그것은 바로 병원이라는 장소가 치유와 회복의 장소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수술에 의한 육신의 회복 뿐, 아니라 난생 처음 비행기를 타고 병원에 입원한 딸의 병간호를 위해 뉴욕이라는 대도시에 도착한 루시의 엄마의 모습에서 화해가 분위기가 느껴진다. 어쩌면 그것도 독자의 착각일지 모르겠다.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화해라기보다 어쩌면 갈등의 심화가 벌어질 수 도 있지 않을까.

 

소설은 마치 영화의 시퀀스를 연상시키는 것처럼 한 컷에서는 1980년대 중반 뉴욕의 병원을 무대로 하다가, 또 한 편에서는 화자 루시 바턴이 생각하는 과거의 이야기들에 포커스를 맞춘다. 독일군 포로 출신으로 메인 주의 농장에서 일하다 농부의 아내와 눈이 맞아 자신의 남편 윌리엄을 낳은 돌아가신 시아버지와 시어머니의 기묘한 러브스토리와 뉴욕에서 포닥 과정을 밟게 된 윌리엄이 35살의 나이에 독일에 사는 조부모로부터 상당한 양의 유산을 받게 된 이야기들이 줄지어 등장한다. 뜻하지 않았던 유산은 전쟁 중에 조부모가 번 돈이라고 하는데, 나치의 부정한 축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루시는 자신과 자신의 소중한 딸들이 가스실로 끌려간 상상에 빠지기도 한다. 정치적으로 아주 중립적인 입장이라고 해야 할까.


독자가 대면하게 되는 루시네 집안의 가난은 상상을 초월한다. 겨울에 실내에서도 코트를 입을 정도로 추웠다고 했던가. 너무 추워서 잠이 오지 않는다고 했더니 엄마는 루시에게 핫보틀을 데워줘서 껴안고 잤다고 했지 아마. 루시네 가족이 다니던 교회에서도 차별은 만연했고, 사람이 많아서 바닥에 앉으라고 했다는 주일학교 선생님의 말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추수감사절에 교회에서 나눠 주는 풍족한 음식을 만끽했다는 이야기도. 나도 언젠가 얻어먹은 상상을 초월하는 터키 생각이 났다. 문제는 어떻게 먹는 줄 몰라서 그대로 상온에 방치했다가 그대로 쓰레기통으로 직행했더라는 이야기도. 참고로 미국 추수감사절을 대표하는 음식이라고 할 수 있는 칠면조는 닭고기에 너무 뻑뻑했다.

 

유년 시절 지긋지긋했던 가난에 대한 안 좋은 생각들을 모두 지워 버리고 살 수도 있었을 텐데, 이제 작가로 새출발을 하려는 루시 바턴에게는 그 일화들도 어쩌면 이렇게 소설에 담을 수 있는 좋은 글감들이 아니었을까. 뉴욕의 첼시에서 우연히 만난 세라 페인과의 인연은 글쓰기 워크샵으로까지 이어지고, 하나의 이야기에 집중하라는 그리고 독자들이 저자의 약점을 파악하기 전에 담대하고 결연하게 수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작가로서도 충고도 빠지지 않는다.

 

투펠로 출신의 엘비스 프레슬리를 루시의 어머니가 사랑했다면, 루시는 자신의 이웃에 사는 예술가 제러미를, 병원에서 자신을 담당했던 과묵한 의사를 사랑했다. 신의 형벌이라던 AIDS가 만연하던 1980년대 중반에 대한 기술도 눈길을 끈다. 그리고 보니 루시의 오빠도 게이가 아니었던가. 대학 교육을 받은 루시는 고향을 탈출해서 뉴욕에 거주하는 성공한 작가가 되었지만, 언니 비키와 오빠는 그러지 못했다. 어엿한 도시인이 되었지만, 도시 생활 초기만 하더라도 루시는 도시인의 시골사람들에 대한 차별을 상상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녀도 예술가의 길을 걷기 시작하면서 그리고 엄마의 예언대로 결혼생활에 문제가 생기면서 주변의 관조하게 되고, 그런 민감한 감정들을 표현하기 시작한다. 어린 시절의 가난 때문에 성인이 되어서도, 예술 문화에 대한 상식적인 대화를 나눌 수 없었다는 루시의 고백에서 외로움과 슬픔이 느껴지기도 했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작가가 200쪽 남짓한 짧은 이야기 속에 시대를 관통하는 이렇게 다양한 이야기들을 찬란하게 구사할 수 있다는 점이 정말 인상적이었다. 행운의 번호 추첨으로 베트남전에 가지 않은 오빠 이야기로부터, 엄마가 전해준 고향에 사는 이들에 대한 최신 정보들, 병원과 주변에서 접하게 된 AIDS라는 무서운 질병에 대한 단상들, 대학교육을 통한 일련의 성공과 신분 상승, 시골에서 도시로 이주, 자녀양육과 위기에 빠진 결혼생활 등 대가의 면모가 보이지 않는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가 그동안 작가가 되기 위해 글을 썼다면 이제는 정말 자신이 하고 싶은 하나의 이야기에 집중하는 듯한 인상을 <내 이름은 루시 바턴>을 통해 받았다.

 

이 소설이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어떨까 싶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에밀리 블런트가 루시 바턴 역을 멋드러지게 해낼 수 있지 않을까. 저자는 지금까지 모두 6편의 소설을 발표했는데, 국내에 소개된 책은 <내 이름은 루시 바턴>이 세 번째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세 권이 더 남아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올해 나왔다는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작가 신작의 조속한 국내출간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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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20 18: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9-20 23: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7-09-22 09: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말씀처럼 영화화하기 딱 좋은데 아직 안 만들어진 게 더 이상합니다-.-?

레삭매냐 2017-09-22 09:55   좋아요 1 | URL
아마 한창 시나리오 작업 중에 있지 않을까요?
<올리브 키터리지>는 텔리비전 드라마로 만들
어졌는데, 루시 바턴은 영화화되었으면 하네요.
 
레티시아 - 인간의 종말
이반 자블론카 지음, 김윤진 옮김 / 알마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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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소폭탄, ICBM, SLBM 같은 무시무시한 무기들이 한반도 상공을 날아다니는 가상의 무대를 상정한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어제 독서 모임에서 만난 미국 친구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까 두렵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공포를 안고 50년도 살았다고 대답했지만, 되돌아온 그의 대답은 북한이 무서운 게 아니라 자기네 대통령인 도널드 트럼프 때문에 무섭다고 했다. 할 말이 없었다.

 

독서모임에서 돌아오는 길에 프랑스의 역사사회학자 이반 자블론카가 쓴 <레티시아>를 읽었다. 서두에 말한 폭력이 국가를 상대로 한 거시적 차원의 접근이라고 한다면, 이반 자블론카의 르포르타주 <레티시아>2011118~19일에 벌어진 레티시아 페레라는 개인에게 벌어진 폭력적 비극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저자는 전 프랑스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 넣은 사건의 단면만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왜 이런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는가에 대한 구조적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우리가 사는 인간 세상이 완벽할 순 없겠지만, 저자의 이런 시도로 조금이라도 세상이 나아질 수 있다면 그것 또한 의미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건의 전개는 이렇다. 프랑스 낭트 근처 포르닉이라는 마을에 사는 이제 막 성인이 된 18세 소녀 레티시아 페레가 실종, 납치 그리고 살해되었다. 범인은 곧 잡혔는데 32세의 누범자 토니 멜롱이었다. 문제는 유력한 용의자인 토니 멜롱의 비협조로 시신을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사건의 담당건사 자비에 롱생을 필두로, 프랑스 전역에서 동원된 유능한 헌병대(우리와 달리 헌병대가 사건의 중심에 등장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를 필두로 해서 과학수사팀이 나서서 납치 살해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레티시아를 찾아 나섰다. 그리고 21일 시신의 일부분을 찾아내기에 이른다.

 

저자 이반 자블론카는 교차방식으로 사건의 전개와 등장인물들의 삶의 배경을 동시에 추적한다. 실비 라르셰와 프랑크 페레 사이에서 태어난 제시카와 레티시아는 아버지의 프랑크 페레의 부인 실비에 대한 폭력 문제로 불우한 유년 시절을 겪게 됐다. 아버지는 전과자가 되었고, 엄마 실비는 정신병원에 수용되게 된다. 어쩔 도리 없이 위탁가정에 맡겨진 제시카와 레티시아에게 행복이 드리워졌으면 좋겠지만, 그녀들의 아버지를 대신하게 된 질 파트롱 또한 천사의 가면을 쓴 악마였다.

 

위탁을 맡은 파트롱 씨는 소녀들에게 강력한 지배권을 행사하면서 엄격하게 규칙을 준수할 것을 명령했다. 본색을 드러낸 악마는 손녀벌 되는 소녀들을 성추행했다. 저자는 19세기 이래 공화국 프랑스에서 시행되어온 불우한 가정 출신 청소년들에 대한 정부의 지원 제도가 과연 그들을 가난과 불행에서 구하는데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지 묻는다. 또 한편으론 행복한 삶을 추구하기 위해 필요한 혹은 보다 나은 삶을 살기 위한 엘리트 교육이 그들에게 제공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냉정하게 질문한다. 가난한 가정 출신 아이들에게 가난의 대물림이 되는 건 아닌지, 그들을 미래에 사회 하부 구조 노동을 담담할 그런 노동자로 재생산하는 게 아닌지에 대한 보이지 않는 계급제도에 대한 의문은 저자가 역사사회학자로서 자신의 본분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 같다.

 

다음 타자는 가해자이자 어려서부터 각종 범죄를 섭렵해온 누범자 토니 멜롱이다. 그 역시 불우한 가정 출신으로 절도와 폭행으로 교정시설을 들락거리며 수년간 동네 악당으로서의 이미지를 착실하게 쌓아왔다. 모든 진실을, 오직 진실만을 추적하겠다는 저자의 결심대로 미디어에서 자극적으로 묘사한 대로 냉혈하고 악랄한 살인범으로 그리는 대신 중립적인 입장으로 그를 대하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어떻게 한 명의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그런 악랄한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지 저자가 전개해가는 기술을 도저히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일 수가 없었다 나는. 그리고 엄벌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범죄에 대한 가혹한 형벌과 교정 제도가 사회 도처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형태로 증가하는 범죄를 막을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결국 이것 역시 돈 그러니까 정부 예산 집행의 문제겠지만, 낭트 지역 사법과 교도행정을 맡은 절대 인력의 부족으로 재판을 맡은 판사들과 보호감찰관들의 살인적인 업무과중으로 토니 멜롱 같은 누범자에 대한 감찰이 소홀했던 것도 사실이다. 사회의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했다면 어쩌면 레티시아 같이 억울한 피해자는 발생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은가. 여기에서 중요한 제3의 인물이 등장한다. 그건 바로 대통령 니콜라 사르코지다. 강경 보수주의자로 내무장관 출신 사르코지는 낭트 지역 사법관들에게 레티시아 사건의 책임을 돌렸다. 공화국 프랑스의 가치라고 할 수 있는 관용과 화합 대신 증오와 분열의 씨앗을 국가지도자가 정치적 이유로 뿌린 것이다. 이제 전대미문의 파업으로 사법관들의 저항이 시작됐고, 레티시아 사건은 전국적인 이슈가 되기에 이르렀다.

 

레티시아 사건이 진행되던 와중에 질 파트롱의 파렴치한 범죄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성범죄자들을 가혹하게 응징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이가 알고 보니 불쌍한 소녀들을 오랜 시간 동안 착취해온 포식자였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렇게 여러 가지 상황들이 복잡하게 얽힌 간단치 않은 사건이기에 어쩌면 이반 자블론카가 오랜 시간을 들여 사건의 전모를 밝히는데 뛰었을 지도 모르겠다. 이반 자블론카는 우리 지구별에서 18년이란 짧은 시간을 살다 간 레티시아에게 온갖 종류의 고난을 안겨 준 같은 성()의 남자로 실로 부끄럽다는 기록도 빠트리지 않는다. 불우한 환경을 딛고, 혼자 세상을 날게 되었지만 불행한 사건으로 세상을 떠나게된 소녀의 삶을 애도하며 홀로 남아 열심히 살고 있는 쌍둥이 언니 제시카 페레를 응원한다는 저자의 글에 전적으로 동감할 수밖에 없었다.

 

이반 자블론카가 사건에 연루된 워낙 구체적이고 전문적인 정보들을 다루다 보니, 몇몇 부분에서는 일반독자로서 흥미를 잃기도 했다. 하지만 르포르타주의 후반으로 가면서 저자가 세심하게 다룬 포르닉에서 벌어진 비극적인 사건의 재구성을 통해 감정이 마치 흡입되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이렇게 고통스럽고 방대한 작업을 훌륭하게 마무리한 저자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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