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세계 - 너의 혼돈을 사랑하라
알베르트 에스피노사 지음, 변선희 옮김 / 연금술사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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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 전, 어둠컴컴한 어느 시데마떼끄에서 장 자끄 베넥스의 <베티 블루> 무삭제판을 자막도 없이 장장 세 시간에 걸쳐 본 기억이 난다. 주인공 베티의 삶이 화려하고 좋았을 적에는 오렌지색이었다가, 그녀의 광기가 폭발하는 후반으로 갈수록 짙은 푸른색으로 바뀌는 장면이 참 인상적이었다. <노란 세계>로 출발한 알베르트 에스피노사의 <푸른 세계>를 읽으면서 그 영화 <베티 블루>의 기억들이 그렇게 소환되었다.

 

어찌 보면 주인공의 이름은 없지만, 편의상 나중에 붙게 되는 이름은 소로야로 부르자. 순전히 얼치기 독자의 편의적 발상이니 이해해 주시길. 어려서 입양된 소로야는 아버지가 죽은 뒤, 얼마 살지 못할 거라는 선고를 받는다. 우리 인간은 모두 죽기 마련이다. 다만 너무나 먼 미래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아니면 애써 외면하면서 살고 있을 뿐. 소멸에 대한 두려움을 잊지 않는다면 일상의 생활이 불가능할 지도 모르겠다. 도대체 이게 다 무슨 의미란 말인가. 모두 죽을 텐데하고 말이다.

 

소설의 주인공으로 나오는 소로야만큼이나 저자 에스피노사의 삶도 그랬던 모양이다. 오래 전 그의 다른 작품을 읽었는데, 희미한 기억으로만 남아 있다. 아마 그 소설에서도 죽음이 주제였던 것 같은데 말이다. <푸른 세계>에서는 좀 더 노골적인 방식으로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러니까 죽음이 사나흘 밖에 남지 않은 소로야는 망자들의 휴식처로 알려진 ‘그랜드호텔’로 향한다.

 

비행기를 타고, 자신을 그랜드호텔로 안내해줄 소년이 모는 자동차를 타고 가다 차가 퍼져서 단봉낙타를 타기도 한다. 작가는 죽음이 어쩌면 그런 경로를 통해 도달하게 된다는 걸 문학적으로 그리고 싶었던 걸까. 우매한 독자는 이게 판타지인지 아니면 리얼리티의 재현인지 도무지 구분할 수가 없다. 그런 점에서 저자가 구상하는 바를 읽지 못한 어쩌면 실패한 독서일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항상 밝고 즐겁게 살고 싶은데 말이다.

 

낙타몰이는 하나의 신고식이었던 모양이다. 사지가 없는 몸통소년을 비롯해서 소로야와 비슷한 상황, 그러니까 죽음을 기다리는 열 명의 이들이 있는 곳에서 남은 시간을 보내게 된다. 다들 얼마 살지 않은 이들이지만, 그곳에 머무는 동안만큼은 충분히 삶에 대한 의지를 엿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죽음이라는 숙명은 그들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 계속해서 죽고 새로운 멤버가 들어오는 동안, 소로야는 그들의 리더가 된다.

 

임신한 여자와 춤을 추기도 하고, 어쩌면 춤이라는 행위 자체가 삶에 대한 강렬한 욕구의 다른 표현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모두가 추정이다. 에스피노사 작가가 구사하는 서사는 모호하기 그지 없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그렇게 열심히 분석해 보고 싶다는 생각도 없다. 왜냐구? 나 역시 죽음이 두렵기 때문이다. 자꾸만 죽음 그리고 소멸에 대해 생각해서 무엇하리라는 생각만 들 뿐이다.

 

자유로운 사람이 행복하다고 한다. 그렇다면 나는 자유로운 영혼인가? 우리 사회에서 자유로운 영혼이라고 하면 대부분 돌+아이를 떠올린다. 일탈을 배격하는 고도로 발달된 자본주의 시스템은 질서와 안정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러니 앞으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죽음을 기다리는 이들에게 여력을 쏟을 여유가 없겠지. 그런 점에서 그랜드호텔로 모여드는 사람들은 그들에게 잉여일 따름이다. 지금은 그런 대로 유용하겠지만, 어느 순간 나도 잉여가 될 수 있다는 게 아닌가.

 

그리고 혼돈에 대해서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던가. 아니 불과 어제 저녁 그리고 오늘 아침에 읽은 내용들인데도 벌써부터 콘텐츠에 대한 기억들이 휘발해 버리고 있다. 아마 죽음이라는 주제를 다루었기 때문에 내가 의도적으로 이 책에 대한 기억들을 지우고 있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

 

그렇게 많은 분량은 아니었지만 훨씬 더 두꺼운 책보다도 많은 사유를 하게 만들어주는 책이 아닌가 싶다. 무지몽매한 독자는 자신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진중한 접근 대신 다른 방식을 택했지만 말이다. 생존율 3%의 기적을 이겨내고 왕성한 필력을 보여주며 다양한 활동을 하는 알베르트 에스피노사의 글쓰기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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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앨리 스미스 계절 4부작 1
앨리 스미스 지음, 김재성 옮김 / 민음사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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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무 기대를 많이 한 탓일까? 아니면 최근 들어 앨리스 먼로와 토바이어스 울프의 책들을 연달아 읽으면서 문학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진 탓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처음으로 만나는 알리 스미스가 소설 <가을>에서 구사하는 내용에 대한 무지 탓일까? 유튜브에서 원어민 리뷰어들이 침이 마르게 칭찬을 해댔지만 위와 같은 이유로 해서 나는 알리 스미스의 사계절 시리즈의 시작에 시작하는 <가을>에 연착륙을 실패한 모양이다.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많은 비밀을 가진 101세의 대니얼 글럭 할아버지의 죽음으로 소설이 시작되었던가. 광고에서 그렇게 떠들어 댔듯이 소설 <가을>은 3년 국민투표로 결정이 난 브렉시트라는 희대의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아니 이 소설은 브렉시트를 제외하고는 도저히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고나 할까.

 

수십년 전부터 야심차게 기획된 유럽연합이라는 이상은 영국의 브렉시트 탈출로 위기국면에 접어들었다. 아직까지도 노딜이니 딜이니, 국민투표를 다시 해야 한다는 등의 이야기들이 진행 중이니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유로 통합이 궁극적으로 독일 경제의 유럽 제패라는 근간이 된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신구세대 간의 갈등이라는 측면에서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대체적으로 젊은 세대는 EU 잔류를 그리고 노년 세대는 브렉시트를 선택했다고 하던데...

 

대니얼 글럭 씨와 엘리자베스 디맨드 양의 69년이라는 나이 차이를 뛰어 넘은 우정의 발단은 이야기였다. 알리 스미스는 대가다운 실력으로 오노레 드 발자크의 <나귀 가죽> 이야기를 필두로 해서 골디락스 스토리까지 도입해서 세대를 아우르는 통합의 희망을 보여준다. 엘리자베스의 어머니는 물론 그에 대한 강력한 걸림돌으로 작용한다. 그만큼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편견이 무섭다는 걸 말해 주고 싶은 걸까. 왜 동성애자 노인이 자신의 딸에게 그런 친절을 베풀고, 자신에게도 하지 않는 오만 이야기를 다 하는지 그녀는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정작 자신은 방송을 통해 만나게 된 조이와 야릇한 관계로 빠지지 않았던가. 그래서 세상사, 알 수 없다는 거겠지만.

 

알리 스미스는 영국 사람들이라면 모두 알겠지만, 나같은 이방인 독자는 인터넷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당최 알 수 없는 그런 인물들을 무시로 등장시킨다. 나는 당혹스럽다. 이들에 대한 사전 정보를 파악하고 읽기를 해야 하는 건가하고 말이다. 귀찮다, 그냥 읽자로 귀결이 된다. 그런데 1963년 영국 내각을 붕괴시킨 크리스틴 킬러의 재판 이야기를 비롯해서, 미술사학도로 영국 팝 아트의 시조새 같은 여인 폴린 보티에 대한 이야기들을 그냥 넘어갈 수가 있을까. 결국 리뷰를 쓰기 전에 두 사람에 대한 정보를 급하게 찾아보았다.

 

엘리자베스의 꼰대 지도교수는 폴린 보티로 자신의 논문 주제를 변경하겠다는 발칙한 제자의 의견을 극력 저지한다. 사료가 없다는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이유로 말이다. 나는 여기서 다시 한 번 뿌리 깊은 편견의 단면을 엿볼 수가 있었다. 브렉시트 이후, 급격하게 달라진 사회 분위기도 한몫 한다고 생각한다. 이민자들이 자신들의 일상을 위협한다고 생각한 보통 사람들이 극우주의자들의 선동에 넘어가 그야말로 혐오와 분노가 넘실거린다. 하긴 우리는 또 그렇지 않은가. 알리 스미스는 브렉시트를 콕 짚어서 말하지 않는 정도의 여유를 보여 주지만, 나는 왠지 많이 불안해졌다. 소수자들에 대한 박해의 모습에서, 1930년대 나치 독일에서 벌어진 일들이 연상되었다.

 



28세의 나이에 암으로 세상을 떠난, 폴린 보티에서도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지금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이야기겠지만, 그녀가 활동하던 1960년대까지만 해도 대단한 미녀가 똑똑해서는 안 되는 모양이었다. 영국에서 여성 팝 아트의 시조라 불릴 만한 경력의 소유자임에도 불구하고, 비운의 삶을 살다가 갔다. 무시, 소실 그리고 재현을 거듭할 거라는 엘리자베스 엄마의 새로운 친구 조이의 지적이야말로 당대 여성 예술가에 대한 정확한 분석이 아닐 수 없다. 그녀의 작품 중에서 특히 엉덩이를 형상화한 <BUM>의 아우라는 정말 압도적이었다. 예술에 문외한이다 보니 좀 더 분석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아쉽게도 여기까지다.

 

영국 보수주의자들이 그야말로 아이돌처럼 떠받드는 마거릿 대처는 영국병을 치료하겠다고 민영화에 나섰다. 과연 정부가 추진한 민영화가 경쟁을 촉진하고, 시민들의 삶에 공언했던가? 대처가 죽었을 때, 국장을 치르면서 경쟁 발주 입찰을 하라는 시민들의 비아냥거림이 난무했던 것을 나는 기억한다. 40년이 지난 지금, 대처가 말하던 영국병은 과연 치유되었을까? 엘리자베스가 만료된 여권을 갱신하기 위해 우체국에서 신속서비스를 신청하는 과정을 보면 그야말로 속이 터질 지경이다.

 

만연한 관료주의는 시민들의 소중한 시간을 마구 잡아먹는다. 나도 예전에 외국에서 여권 갱신을 하면서 사진이 규격에 맞지 않는다는 영사관 직원의 지적을 당한 적이 있어서 그런지 오롯하게 나 자신을 엘리자베스의 상황에 대입해 볼 수가 있었다. 하긴 서구에서 그런 엄격한 관료주의의 적용이 어제 오늘이 일이 아니었으니 할 말이 없긴 하지만 말이다. 서구 사회가 그렇게 자랑하는 법률과 시스템이 시민들에게 봉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들이 만든 기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라는 걸 내가 언제 깨달았던가. 그래서 관료들은 그런 작은 오류 하나도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 사소한 것들이 거대한 붕괴로 이어질 수도 있어서라는 걸 수 차례의 혁명을 통해 깨달아서일까 어쩔까.

 

리뷰를 쓰기 전에 알리 스미스의 <가을>이 나랑 맞지 않는 책이라고 판단하고 팔아 버려야겠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해놓은 메모를 살펴 보니 일단 나머지 다른 계절들을 읽어 보고 나서 실행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다른 알리 스미스의 책을 읽어 보고 나서 하던가. 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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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나무 2019-04-22 11: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계절에 대한 시리즈라 사실 읽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좀 하던 중이었는데....
음~~~~ 일단 레삭매냐님의 나머지 계절들에 대한 리뷰를 보고서 결정하겠습니다! ^^

레삭매냐 2019-04-22 11:44   좋아요 0 | URL
그냥 단순한 책인 줄 알고 달려 들었다가
낭패를 보았습니다.

제가 리뷰에 담지 못하 이야기들이 더 많
다고 생각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럴 수밖에요 ㅠㅠ 역량 부족과 게으름이 -

집에도 알리 스미스의 다른 책도 두 권인가
더 있는데, 어쩌면 그 책들이 더 나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사계절 시리즈가 팍팍 나오지 않으면 아마
읽지 않게 될 지도. 나머지는 도서관에서
빌려다 보는 것으로.
 
거지 소녀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6
앨리스 먼로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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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이런 단편 소설은 없었다. 이것은 단편 소설인가, 아니면 장편 소설인가. 수년 전, 앨리스 먼로가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는 슬리퍼를 꿰고는 헌책방으로 듣도 보도 못한 작가의 책을 사러 달려 나갔다. 그 후로도 앨리스 먼로의 책들을 사 모았다. 하지만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읽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이번에 읽은 <거지 소녀>는 내가 처음으로 읽은 작가의 책이 되겠다.

 

평생 단편 소설만을 썼다는 작가, 앨리스 먼로의 작품 <거지 소녀>에는 10개의 단편이 들어 있다. 굳이 공통점을 꼽자면 모든 이야기마다 주인공 로즈가 등장한다. 작가가 나고 자란 어느 캐나다의 시골 마을 출신의 로즈는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새어머니 플로의 슬하에서 자랐다.

 

전형적이긴 하지만, 사춘기에 접어드는 의붓딸과 새어머니의 갈등에서 비롯된 장엄한 매질(royal beating)’을 보라. 아마 로즈도 자신의 도발이 어떤 후과를 가져올지 모르고서 플로의 권위에 도전했던 게 아닐까. 장엄한 매질의 왕 아버지의 무자비한 폭행으로 로즈는 형용할 수 없을 정도의 모멸감을 느끼지만, 플로가 준비한 먹거리에 그녀의 서툰 보이코트는 그만 눈 녹듯이 무너져 버리고 만다. 아마 그런 의지박약한 모습에 로즈 자신도 놀랐으리라. 지금이야 가정폭력이 용서받을 수 없었겠지만 한 때는 서구 사회에서도 그런 모습이 있었다는 걸 목격할 수 있었다. 로즈가 느낀 혼란스러운 감정의 배신이야말로 일상성의 이면이라는 표현으로 집약된다. 대가다운 솜씨가 아닐 수 없다.

 

저자가 타격하는 일상의 배신에 대한 기술은 남동생 브라이언의 그것과 대비해서 보다 극적인 효과를 연출한다. 꼬마 소년은 미래에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지만, 그의 누이들은 그렇지 못했노라고 앨리스 먼로는 조용하지만 강단 있는 목소리로 주장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홀로 서야만 한다. 일찍이 버지니아 울프가 말했듯이 자신만의 공간을 그리고 현대 여성으로 생존하기 위해 고정 수입이 보장되는 일자리가 필요했다. 한편, 로즈는 아버지의 그늘로부터 벗어나길 원하면서도 그의 생물학적 유전자가 전달해준 품성이라는 DNA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최종적 진실을 받아들이라는 양가적 감정 사이에서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기차여행에서 자신을 목사라고 소개한 남자에게 당한 성추행에 대한 로즈의 경험담은 오싹할 지경이다. 그전에 사제복을 입은 사람을 조심하라는 새어머니 플로의 경고를 로즈는 한쪽귀로 듣고는 무심코 흘려버린다. 사제복이나 목사 차림새는 악당들의 범죄행위로부터 그들을 가려주는 철저한 카무플라쥬의 코드로 사용된 게 아니었을까. 때로는 꼰대들의 조언이 유효한 것으로 판명이 될 수도 있구나 싶다.

 

그렇게 자란 거지 소녀는 어찌어찌해서 대학에 진학했고, 자신의 피를 팔아 번 돈으로 신발을 구입하고, 아이스트림선디를 사먹는다. 로즈를 동의어처럼 따라다니는 가난은 그렇게 궁핍했노라고 증언한다. 미래의 남편 패트릭 블래치퍼드는 로즈를 사랑했단다. 그들은 계급 차이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힘으로 결혼은 했지만, 결혼생활을 영속시킬 수는 없었다. 로즈는 우리가 흔히 텔레비전에서 보는 막장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비상할 수 있었지만, 그녀의 거지소굴 같은 배경과 피를 더 팔아 산 어울리지도 않는 앙고라 스웨터로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니 로즈와 패트릭에게 이혼은 불가피한 선택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로즈는 이혼을 기점으로 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완벽하게 이해한 진정한 자아를 지닌 여성으로 거듭나게 된다. 그렇다면 패트릭과의 이별은 로즈에게 축복이었던 것일까. 일견 위태로워 보이는 모험도 마다하지 않는 투사로서의 이미지가 거지 소녀에게서 솟아나기 시작한다. 아니 도대체 앨리스 먼로는 이런 놀라운 캐릭터를 어떻게 만들었을까?

 

앨리스 먼로는 연작 소설집 <거지 소녀>의 주인공 로즈가 산골 출신 철부지 소녀에서 성숙한 여인으로 성장해 가는 과정을 대가다운 스타일로 잡아낸다. 패트릭과 이혼하고 딸 애나까지 거느린 로즈는 갑자기 내린 폭설로 도로가 봉쇄된 상황에서도 연인 톰과의 밀회를 기대하며 전력투구한다. 아쉽게도 그녀의 시도는 번번이 무산된다. 연애사업에서 로즈의 거듭된 실패는 하나의 연단의 기회로 작용한다. 대학에서 연기를 가르치는 교수가 된 로즈는 어느 파티에서 자신의 텃밭에 관심을 보이는 매력적인 강사 사이먼을 만나기도 한다. 로즈는 주위의 남자사냥꾼이냐는 비아냥거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대범하게 그와 원나이트스탠드로 직행한다. 사이먼과의 재회를 애타게 기다리던 로즈는 아무런 연락도 없이 나타나지 않은 사이먼을 잊기 위해 아예 근거지를 떠나는 모험을 감행한다. 나중에 독자가 알게 되는 최종 진실은 결국 비극이다.

 

자 그렇다면 다음에 로즈를 기다리고 있는 주제는 무엇일까. 그건 바로 죽음이다. 여장부로 한 세대를 군림하면서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살았던 새어머니 플로에게도 어김없이 죽음의 그림자가 찾아왔다. 아마 치매에 걸려 총기가 떨어진 플로를 카운티 홈, 즉 요양원에 보내는 일련의 과정은 참 슬픈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나는 여기서 다시 한 번 메멘토 모리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죽는 다는 걸 알면서도, 애써 외면하고 꾸역꾸역 살아가는 게 아닐까 우리는. 한 때 허영을 삶의 무기로 삼았던 로즈처럼 우리는 행복에 대한 환상 같은 것을 품고 살아가는 게 아닐까. 곧 플로가 직면하게 될 보이는 것도 재미난 일도 없는 일상을 나라면 과연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다. 가끔 생각해 보면, 존재하지 않게 될 두려움보다 존재하지 않았던 것에 대한 두려움의 간극에 대한 삶의 무게가 견딜 수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거지 소녀>를 읽으면서 가늠할 수 없는 거대하고 빛나는 삶의 진실을 과연 내가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하게 됐다. 그것은 아무래도 남의 생의 숙제지 싶다. Life Goes 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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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북소녀 2019-04-28 1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사두기만 했는데 빨리 읽어보고 싶네요.
 
올드 스쿨
토바이어스 울프 지음, 강동혁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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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토바이어스 울프의 책이 출간됐고, 열흘이나 기다린 끝에 받아서 다 읽었다. 아니 영국에 주문한 책도 8-9일이면 도착하는데 이게 웬 일이니 그래. 아마 출판사에서 저자 약력에 대한 치명적인 오류(출생지 표기)를 수정 스티커로 붙이느라 출고를 늦추는 바람에 시간이 걸린 모양이다.

 

내가 어떻게 토바이어스 울프를 알게 되었느냐고? 그건 달궁 독서모임의 옵저버라고 할 수 있는 브랜던 친구를 통해 알게 되었지. 1995년에 발표된 울프의 <Bullet In The Brain>을 가장 좋아하는 단편으로 꼽아서, 원문으로 구해서 읽어 보았다. 원어민이 아니다 보니 이해가 되지 않아 마지막 부분은 나중에 다시 만났을 때 물어 보기도 했다. 그런 다음에 토바이어스 울프 교수님의 팬이 되어 그의 책 수집에 나섰다. 아마 이번에 나온 <올드 스쿨>을 필두로 해서, 단편집 그리고 <디스 보이즈 라이프>도 사 모았지. 물론 미처 다 읽진 못했지만. 어쨌든 토바이어스 울프의 <올드 스쿨>을 필두로 해서 그의 다른 책들도 국내에 소개되길 바란다.

 

항상 그렇지만 서설이 길었다. 자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 시간적 배경은 1960년 가을 공화당 출신 꼰대 닉슨을 민주당 투사 케네디가 대선에서 격파한 시절이다. 그런데 영어로 꼰대가 어떤 단어일지 문득 궁금해졌다. 나중에 찾아봐야겠다. 소설의 화자는 앞으로 미국의 미래를 짊어지고 나갈 명문 기숙사 학교의 6학년 졸업반 친구다. 나중에 밝혀지겠지만, 빼어난 문재로 컬럼비아 대학 4년 전액 장학생으로 선발된 경력의 보유자이기도 하다. 이 학교에서는 다른 건 몰라도 글쓰기를 최고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다들 잘난 집 자제들이건만 자신의 힘으로 이룬 것만 인정한다는 암묵적인 동의가 경쟁력 넘치는 수컷들 사이에 존재했다. 자신들이 다니는 학교 자체가 자신들의 능력으로 이룬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 지점에서 화자가 처음에 지적한 그네들의 ‘속물근성’의 본질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토바이어스 울프의 소설 <올드 스쿨>을 특별하게 만들어 주는 설정은 바로 이 학교에서 초빙작가를 학교로 초대해서 시나 소설 경연에서 뽑힌 미래의 작가와 개인면담을 할 수 있는 시간을 준다는 점이다. 고도로 발달된 미국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타인의 도움을 받지 않은 자신만의 노력으로 이룬 성취야말로 가장 칭송받을 대상이라는 점은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로버트 프로스트, 아인 랜드 그리고 어니스트 헤밍웨이 같이 기라성 같은 작가들이 줄지어 등장한다. 아니 어느 누가 이런 작가들과의 개인 면담을 마다할 수 있단 말인가.

 

성공 아니 성취를 위한 극도의 긴장감과 아드레날린이 무한대로 분출하는 가운데 십대 소년들은 그들만의 글쓰기에 나선다. 내가 즐기는 문학의 본질이 원래 이랬었던가? 그냥 하나의 즐길 거리가 아니었나. 나는 혼란스럽다.

 

화자가 오스트리아 출신 주방장 하르트무트 씨에게 배운 휘파람을 홀로코스트 생존자 게르손 아저씨 앞에서 불었다가 봉변을 당하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그게 나치의 행진곡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한 행동이 아니었기에 충분히 이해가 가는 장면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화자도 역시 유대인이었다는 점이다. 자신의 민족적 정체성을 알면서도 그럴 수 있었을까? 다이아스포라 이후 수천 년을 팔레스타인 외의 모든 곳에서 이방인으로 지내면서 배제된 그들의 유전자는 화자의 몸속에 남아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함구하고 조용한 가톨릭교도로 사는 선택을 한 모양이다.

 

로버트 프로스트 경연은 화자의 라이벌이자 문학잡지 <트루바두르> 편집장 조지 켈로그가 우승했다. 참고로 화자의 직책은 출판국장이었다. 시의 제목은 노골적 아첨에 가까운 ‘첫 서리(First Frost)’였다나. 다음 주자는 아인 랜드였다. 개인적으로 그녀의 책을 읽어 보지 못해 지금 리뷰를 쓰면서 인터넷으로 그녀에 대한 검색을 해보았다. 소설가이자 경제철학자로 현대 자본주의 비판서라고 할 수 있는 <파운틴헤드>와 <아틀라스>를 썼다고 했던가. 화자는 크리스마스 휴가를 받아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사시는 볼티모어로 떠나는 길에 기차역에서 산 <파운틴헤드>에 빠지는 장면을 보자. 그녀의 인기를 시기하면서 못돼 먹은 인간이라는 점을 비웃어 주겠노라는 화자의 시도는 <파운틴헤드>를 펼치는 순간 사라져 버렸다. 그런 다음 거의 숭배에 가까운 모습으로 전향하게 되는 과정은 개심한 이교도의 모습과 동일하다. 썸을 타는 소녀 레인이 책을 빌려달라는 말도 무시하고 빠져들 정도로 말이다.

 

아인 랜드를 숭배하던 소년은 그녀의 강연에서 아인 랜드가 소설 속에서 창조한 인물이 현실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그저 허구의 인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깨닫게 되고는 다시 배교의 길을 걷게 된다. 강연장을 떠나는 아인 랜드에게 누군가 절규하듯 도대체 “존 골트”가 누구냐고 묻는 장면은 정말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소년들은 저자가 쓴 소설도 읽지 않은 채 그곳에 있었던 것이다.

 

자자, 이제 다음 초빙연사로 등장한 헤밍웨이 이벤트에 비하면 그동안 등장한 이야기들은 그저 몸풀기용 가벼운 워밍업 정도로 보면 될 것 같다. 독자들은 그동안 글 쓰는 기숙학교 소년들의 위선과 허영 그리고 속물근성의 본질을 충분히 파악했을 것이다. 화자가 본격적으로 등판할 순서가 되었다. 무도회마저 마다하고, 글쓰기에 전념하던 가운데 <여름 무도회>라는 타학교 여학생 수전 프리드먼이 5년 전 발표한 글을 읽고 전율한 화자는 동명의 제목을 써서 제출하고, 헤밍웨이 경연의 우승자로 선정되는 영예를 얻게 된다. 꿈이 현실이 된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독자는 어 왜 두 소설의 제목이 같을까라는 당연한 질문을 던진다.

 

그 지점에서 파국의 시작되었다. 타인이 쓴 걸작 소설에 몰입된 소년은 자신의 무슨 행동을 하는 지도 모른 채, 표절을 한 것이다. 그동안 소년이 이룬 모든 것들은 단 한 번의 실수로 물거품이 되었다. 퇴학 조치는 물론이고, 컬럼비아 대학 입학도 물 건너갔다. 소년은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 마성의 도시 뉴욕으로 가서 허랑방탕한 탕자의 생활을 이어간다. 그 다음에는 베트남이었고,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DC 인근에 사는 수전 프리드먼과 만나기도 했다.

 

모교에서 꾸준하게 보내 주는 소식지로 한 때 경쟁자였던 친구들의 소식을 듣던 중, 초빙연사로 모교 강단에 서 달라는 요청도 받게 된다. 자신의 학교에 크나큰 모욕을 안겨준 그에게 그게 과연 가당키나 한 일이었을까. 아마 그는 이제 작가로 어느 정도 명성을 얻게 된 모양이다. 그런 연단의 시간이야말로 작가에게 꼭 필요한 요소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토바이어스 울프 작가는 말미에 화자와 비슷한 시기에 모교를 떠난 또 다른 탕자 학생주임 메이크피스(Makepeace; 이름 한 번 기가 막히지 않는가, 우리는 모두 평화를 원한다) 선생님의 비사를 준비한다. 누구에게나 비밀은 있는 법이지.

 

항상 듣는 말이지만, 작가와 작품은 꼭 분리하라지. 하지만 <올드 스쿨>을 읽으면서도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한 때 탕자였던 토바이어스 울프 작가의 그림자가 도처에서 보이니 말이다. 그게 과연 가능할 지에 대해서도 나는 의문이다. 이러니 우리 책쟁이들이 신성시하는 문학의 본질을 밑바닥까지 꿰뚫은 울프 쌤의 <올드 스쿨>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내가 처음 만난 울프 쌤의 <올드 스쿨>은 ‘old school’다운 저저자의 문학에 대한 고해성사다.

 

[뱀다리] 울프 쌤이 하도 헤밍웨이에 대해 절절하게 분석해 주셔서 도저히 그의 책을 다시 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제 다 읽기도 전에 예전에 어디선가 받아서 고이 모셔 두었던 <킬리만자로의 눈>을 찾아서 허겁지겁 읽기 시작했다. 어쩔 수가 없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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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나무 2019-04-16 11: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안그래도 레삭매냐님의 이런 리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ㅎㅎㅎ
존 가드너의 소설창작 책에서 이 작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도 들어서 느므 궁금했었거든요.
저는 작가의 단편집을 기다리고 있긴 한데....
이 책도 문학에 대한 소설이라 넘길 수가 없겠네요.

레삭매냐 2019-04-16 13:28   좋아요 1 | URL
아하~ 설해목님은 다른 루트로 울프 쌤
에 대해 알게 되셨군요.

<파라오의 군대> 그리고 <디스 보이즈
라이프>, 단편소설집 등의 출간을 기다
려 BoA요.

이렇게 출간되어 너무나 좋네요...

뒷북소녀 2019-04-28 12: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스티커 어떻게 붙여져 있는지 궁금하네요.ㅋ 그걸 깨알같이 발견하시다니요.

레삭매냐 2019-05-10 13:52   좋아요 0 | URL
워낙 티가 나서 책을 보면 바로 알 수가
있답니다 ㅋㅋㅋ

앞의 하나 그리고 뒤에 하나씩 있더라구요.
 
이중톈 중국사 10 : 삼국시대 이중톈 중국사 10
이중텐 지음, 김택규 옮김 / 글항아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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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인티드 드럼>을 빌리러 도서관에 갔다. 한 권만 달랑 빌리는 게 좀 아쉬워서 서가를 거닐다가 이중톈 선생의 <삼국시대>를 발견했다. 내가 또 삼국지라면 또 사족을 못 쓰지. 자그마치 36권 중에 1/3 지점 정도를 달린 모양이다. 분량도 적고 해서 하루 만에 다 읽었다.

 

저자는 우리가 삼국시대에 대한 상당 부분이 나관중이 저술한 삼국연의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을 처음부터 주지시킨다. 삼국연의에서 다루는 가장 핵심 코드는 바로 충의다. 중국 민중은 예로부터 성군과 청관을 꿈꾸어왔다. 그런데 그 두 가지는 정말 이루어지기 힘들었다. 그래서 협객의 이미지가 더해지면서 대중의 판타지에 편승했다. 현실이 괴롭다면, 그런 환상이라도 품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중국사를 대변하는 삼국연의가 동아시아 세계 더 나아가서는 전 세계에서 아직까지도 대중적 인기를 끌고 있다는 비결을 엿볼 수 있었다.

 

이중톈 작가는 계급주의적 시선에서 시대의 흐름을 조망한다. 진한시대의 귀족지주의 시대가 저물고, 바야흐로 사족지주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주장이다. 평민계급 중에서 전문 관료 집단으로 상징되는 사족지주 계급은 동한 말, 외척과 환관의 발호로 시작된 천하대란 시절을 맞이한다. 사세삼공 명문가문 출신의 본초 원소는 환관과 외척 세력을 주살했지만, 서량의 동탁이라는 늑대를 도성으로 불러들이는 치명적 실수를 범했다. 어린 황제 유변을 폐위시키고, 진류왕 협을 헌제로 옹립한 동탁은 자신에게 비판적이긴 했지만, 사족계급을 경계하면서 전횡을 휘둘렀다. 이런 동탁과 달리 처음부터 사족계급을 경멸한 난세의 간웅 조조는 처음부터 부상하는 새로운 사족계급과 같은 배를 탈 수가 없는 운명이었던 모양이다.

 

조조는 위공 그리고 위왕을 거치면서 한나라 황제를 능가하는 권력을 추구했지만, 끝까지 찬탈자의 오명은 쓰지 않았다. 다만 후계자 조비가 선양이라는 방식으로 헌제를 폐위시키고 천자의 자리에 올랐다. 동탁에 반대하는 관동 기의의 선봉으로 역사의 무대에 나선 조조는 둔전제라는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방식으로 군사와 농사를 병행하는 제도로 경쟁자들을 압도했다. 전란의 시대, 병사들을 먹이는 문제는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였다. 조조보다 앞서 북방을 제압한 조조와 원소의 경쟁은 관도대전으로 결판이 났다.

 

조조는 한황실을 대신하는 새로운 제국의 건설 대신 법가적 서족정권이라는 웅대한 이상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시대정신에 비해 너무 이른 시도가 문제였을 따름이었다. 서족정권의 시대는 수당 시대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였다. 원소는 조조 같은 이상 대신 시류에 따른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이었다. 이런 집단이 압도적인 무력에도 불구하고, 조조에게 패하는 건 시간문제였을 따름이다.

 

중원에서 조조와 원소가 그렇게 자웅을 겨루었다면, 남방에는 강동의 손권이 있었다. 그리고 나이 오십줄이 되도록 근거지 하나 마련하지 못하고 떠돌아 다니던 유비가 형주자사 유표의 그늘에서 버티고 있었다. 훗날 중원의 위나라, 강동의 오나라 그리고 서촉의 촉나라로 구성되는 삼국시대 정권은 모두 비사족정권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고 저자는 분석한다. 위나라와 촉나라와 달리 오나라는 외래정권임에도 불구하고, 기존 강동의 사족집단을 포용하면서 역설적으로 삼국 중에 가장 오래 정권을 유지할 수가 있었다. 이와는 달리 촉나라는 끝까지 세 개의 집단으로 이루어진 지배계급을 공평하게 대우하지 않으면서 결국 망국의 길을 걷게 된다. 위나라의 침공보다 내부의 기존 익주집단의 분탕질이 망국의 가장 주된 요인이라는 점을 저자는 냉철하게 꼬집는다. 위나라의 침공 앞에서 후주 유선에게 오나라에 나라를 바칠 게 아니라, 대국 위나라에 나라를 넘겨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 초주의 경우를 보라. 나라 따위야 상관없고 오로지 자신들의 계급 유지에 연연한 모습에 기가 막힐 노릇이 아닌가 말이다.

 

촉한 선주 유비와 제갈량의 관계도 삼국연의에서 다루는 것과 상당 부분이 다르다는 점도 이중톈 저자의 주장이다. 적벽대전으로 조조의 남하를 막아내고, 공명이 유비에게 설파한 융중대를 실현한 유비 집단은 형주의 수비를 관우에게 맡기고 파촉정벌에 나선다. 이후 유비의 왼팔과 오른팔은 방통과 법정이었다. 유비가 관우의 무모했던 양번전쟁으로 형주를 상실하고, 복수전인 이릉대전에 나설 때가지 공명의 모습은 역사에서 보이지 않는다. 자신의 후계 문제와 나라까지 통째로 공명에게 맡긴 유비의 선택이야말로 무수한 실책이 난무했던 선주 유비의 인생 최고의 선택이었노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조자룡의 유비에 대한 충절과 신기에 가까운 전장에서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관우-장비-마초-황충과 같은 일등급 예우를 해우지 않았다는 점도 의문이다. 연의에 나오는 오호장군 중에 조운의 자리는 없었다. 촉한은 처음부터 위기의 정권이었기 때문에 내환을 다스리기 위해 공명은 이릉대전 패전 이후, 오나라와 동맹을 맺고 위나라만을 상대로 북벌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다고 저자는 기술한다. 중원에 비해 절대적으로 떨어지는 국력을 가지고, 다섯 차례나 되는 북벌을 시도한 것이 불필요하게 국력을 소모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단합을 위한 어쩔 수 없는 도전이었다는 것이다.

 

망국의 군주 후주 아두 유선이 우리의 생각과 달리 멍청한 군주가 아니라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공명의 사후, 장완과 비위를 중용해서 국가경영을 한 점을 보라. 비록 나라는 망했어도, 항복해서 낙양으로 간 뒤 위나라의 뒤를 이은 진나라 시절까지 살해당하지 않고 천수를 누린 점만으로도 한 때 천자였던 후주의 처세술을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이중톈 작가는 삼국시대의 전반부는 노선 투쟁이었다면, 후반부는 삼국간의 치열한 권력투쟁이었다는 주장을 전개한다. 사실 시대적으로 보면 별 볼 일 없는 시대일 수도 있었지만, 나관중의 연의라는 문학적 첨가제가 듬뿍 뿌려지면서 실제 이상으로 대중에게 읽히게 되었다는 점을 예리하게 짚어냈다. 흥미로운 접근 방식이 아닐 수 없다.

 

도서관에 다음 순서인 11권 위진풍도가 없던데, 희망도서로 신청해서 읽어야 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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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9-04-15 14: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가끔 케이블에서 이중텐작가의 삼국지 강의를 듣는데 새로운 시각으로 삼국지를 조명해서 무척 재미있게 본 기억이 나는데 책이 나왔는지는 몰랐네요.한번 읽어봐야 되겠네요^^

레삭매냐 2019-04-15 17:34   좋아요 0 | URL
이중톈의 <삼국지 강의>가 진짜 강의로도
있는 모양입니다.

한 번 보고 싶군요. 지금 막 유튜브로 찾아
보니 있네요 :> 책하고는 또 다른 느낌이
겠죠.

카스피 2019-04-16 08:01   좋아요 1 | URL
아무래도 TV강의 형식이다보니 책으로 읽는 것보다는 눈과 귀로 보고 듣다보니 머리에 쏙쏙 강의가 들어오는것 같아요^^

겨울호랑이 2019-04-15 15: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반적으로 알려진 삼국지연의의 관점이 아닌 삼국지의 경제적, 정치적 해석이 새롭게 느껴집니다^^:)

레삭매냐 2019-04-15 17:36   좋아요 1 | URL
오함 선생의 <주원장전>처럼 마르크스
주의에 입각해서 원명 교체기를 민족
해방전쟁의 시각으로 보는 그런 느낌
일까요?

말씀해 주신 대로, 색다른 시선에서
접근 방식이 마음에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