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떠나온 상태에서 떠나오기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지음, 이다희 옮김 / 바다출판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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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데이빗 포스터 월리스의 책을 하나 읽었다. 그동안 계속해서 그의 책들을 사 모았지만 읽다 말다 그리고 실패하기를 반복하고 있는 중이다. 심지어 원서로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무한한 재미>도 샀다. 물론 읽지는 않고 잘 보관만 하고 있는 중이다. 과연 국내에서 <무한한 재미>가 나올 수 있을까? 우리 브랜던 친구의 말마따나 글에 관심 있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는 있지만 모두가 읽지 않은 그런 책이 될 지도 모르니 말이다.

 

<거의 떠나온 상태에서 떠나오기>에는 모두 다섯 편의 에세이들이 실려 있다. 순서를 좀 뒤바꿔서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책의 두 번째 꼭지에 해당하는 데이빗 린치의 <로스트 하이웨이> 촬영장을 찾은 월리스가 <프리미어>에 기고한 글을 읽는다.

 

고백하건대 보다 원활한 글의 이해를 위해 나는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는 린치의 <로스트 하이웨이>를 구해서 영화로 봤다. 오 마이 갓! 그야말로 크리피한 작가주의 정신이 배어 있는 그런 작품이 아닐 수 없다. 이럴 수가 있나 그래. 내친 김에 <이레이저헤드>도 구했지만 도저히 볼 자신이 나지 않더라. 아마 오래 전에 <로스트 하이웨이>는 시사회로 본 것 같은데 너무 오래 전이라 기억이 나지 않아 하는 수 없이 다시 영화를 봐야했다.

 

미국의 저주 받은 감독이라는 린치는 1980년대 미국 최고의 영화라는 <블루 벨벳>TV시리즈 <트윅 픽스>의 연출자였다. 월리스에 따르면 그의 작품들은 상업영화과 예술영화의 그 어딘가에 서 있다고 했던가. 영화표를 사고 극장에 들어가는 이들에게 감독과 영화판 사람들이 제공하는 판타지에 대한 작가의 분석이 마음에 들었다. 다시 글로 표현하려니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말이다.

 

항상 선량한 이미지만 연기하던 빌 풀먼의 연기 변신도 특이하게 다가왔다. 다이어트와 감독의 연출 역량 때문일까. 그냥저냥의 연기력을 구사하는 퍼트리샤 아케트는 묘하긴 하지만 에로틱한 장면들에서는 너무나 무감각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할리우드를 배경으로 해서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전개되는 설정과 서사가 기괴하다는 말로 밖에는 표현할 수가 없을 것 같다.

 

한 때 할리우드 상업영화의 기대주였던 린치가 이번에 다시 영화로 만들어진다는 블록버스터 <>의 대대적인 실패로 그야말로 나락으로 떨어졌다고 했던가. 그 경험에서 린치가 느낀 건, 영화에 대한 최종편집권을 놓으면 안 된다는 거였다고. 그래서 결국 영화는 죽도 밥도 아닌, 할리우드 대망작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던 것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아무리 글쓰기를 업으로 하는 사람이라고 하지만 월리스 작가가 <로스트 하이웨이> 현장에서 나무에 소변을 누는 린치를 목격한 장면으로부터 시작해서 그의 작가론은 물론이고 할리우드 영화 생태계에 대한 냉정한 분석을 넘어 영화에 출연하는 이들에 대한 냉철한 비판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은 듯한 작법에 그만 매료되어 버렸다.

 

하긴 이번 에세이집의 정수는 <로스트 하이웨이> 분석도 분석이지만, 일리노이 여름축제를 방문한 동부 여피의 체험기가 아닌가 싶다. 그의 유머가 그야말로 곳곳에서 폭발한다. 우선 가축 사육인들과 농부들이 애써 기른 돼지들의 동물권을 같이 방문한 토박이 친구들과 열렬하게 주창하면서도 어제 먹은 베이컨과 곧 먹게 될 콘도그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는 나약한 인간으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내지 않은가 말이다.

 

자신은 절대 탈 일이 없다고 하지만, 지퍼킹 인지 뭔지 하는 빈사 체험 기구에 거리낌 없이 올라탄 토박이 친구의 용맹과 패기에 열렬한 박수를 보내기도 한다. 토박이 친구는 신나게 자신만의 재미를 추구하지만, 빈사 체험 놀이기구 업자는 업자대로 친구를 공중에 매달아 놓고 펄럭이는 치마를 감상하는 장면에서는 눈살을 찌푸리기도 한다. 이게 바로 점잖은 양성평등교육을 받은 동부 신사와 중서부에서 자란 이들의 결정적 차이 때문이라고 해야 할까.

 

정성스레 기른 자신들의 가축들을 맥도널드나 버거킹 같은 프랜차이즈 업체에 넘기기 위해 각종 선발대회에 참가하는 가축업자들의 처지도 그들이 경멸해 마지않는 카니발 일꾼들의 그것과 다르지 않으면서도 그들을 사람 취급하지 않는 역설을 월리스는 포착해낸다. 나도 반해 버렸던 퍼널케이크의 그 기름이 좔좔 흐르는 맛이란! 일리노이 여름 페스티벌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축제인지 그는 묻고 싶었던 모양이다. 각종 먹거리 부스와 빈사 체험 기구 같이 축제를 찾은 이들의 지갑을 터는 동시에, 이런 경험을 같이 공유한 우리는 하나다 뭐 그런 게 아니었나 어쩌나. 동부에서 온 것으로 추정되는 여피 친구가 무려 40달러나 주고 빈사를 체험하겠다고 자발적으로 나선 장면에 대한 묘사는 월리스 유머가 폭발하는 지점 중의 하나다.

 

업다이크 소설에 대한 비평은 솔직히 내가 그의 토끼 시리즈를 만나 보지 못해 특별하게 할 말이 없다. 그리고 이어지는 수학 천재들에 대한 소설도 마찬가지. 다만, 월리스가 정말 다양한 방면에 특출난 소실이 있다는 건 잘 알겠더라. 그래서 그렇게 독자들이 예상보다 우리 곁을 일찍 떠난 작가를 애도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무언가 방명을 날리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무명으로 남겠다는 수학자의 말이 던지는 화두는 참...

 

미국 최고의 에세이집 편집자로 나선 월리스가 독자에게 던지는 21세기 문학론은 문학 애호가라면 한 번은 꼭 읽어봐야할 그런 명문이다. 먼저 우리는 결정자(decider)인가. 미국의 곳곳에서 발표된 104편의 잘 쓰인 글 중에서 또 특출한 작품을 발굴해내는 일이 어디 보통 일이었던가. 일단 하청에 이은 재하청업자라고 월리스는 자신을 소개한다.

 

픽션과 논픽션 모두 심연과 소음을 상대로 싸우는 거라고 했던가. 그리고 그 구분조차 무슨 의미가 있냐고 물었던가. 글쓰기란 모름지기 픽션이고 논픽션이건 간에 어려운 법이다. 특히 논픽션 에세이의 경우에는 그가 서문에 쓴 것처럼 다량의 정보, 서사, 해석과 맥락을 담고 있어야 한다고. 그리고 그것이 완전한 소음(Total noise)이라는 미국 문화의 본질로 이어지는 게 당연하다고나 할까. 과연 내가 제대로 읽은 건지도 모르겠다, 이런 내 마음 대로의 오독 또한 독서의 한 가지 즐거움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역시나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과문한 독자다운 핑계가 아닐 수 없다.

 

재하청업자 편집자는 우선 포스트트루스 시대에 걸맞지 않은 회고록을 죄다 발라내 버렸다. 그리고 편파성에 대해서도. 아 그가 어떤 태도를 취했더라. 기본적으로 언론사가 영리업체라는 점을 잊지 말라고 주문했던가. 문학의 예술성을 추구하면서도 정치적으로도 올바른 형식을 갖추고 있어야 하며, 도덕적 가치도 담고 있어야 한다고? 그럼 재미는 어쩌구? 이게 도대체 말이 되는 이야기인가. 이런 완벽함이 존재할 수 있는지에 대해 묻고 싶다.

 

그런 숭고한 문학의 본보기를 추구하는 게 바로 우리네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게 뭐 그의 주장이 아닐까 싶다. 이것도 어디까지나 그의 주장을 비빔밥으로 만든 나의 미천한 사유가 도달한 어느 지점일 것이다. 신나게 내달렸더니만 진이 다 빠진 느낌이다.

 

월리스 작가의 책을 마침내 읽는데 성공했으니 이제 집에 쟁여둔 다른 책들도 한 개씩 읽어봐야지 싶다. 물론 그전에 지난주에 시작만 하고 끝내지 못한 책부터 읽어야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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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한당들의 세계사 보르헤스 전집 1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 민음사 / 199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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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언제 샀는지도 모를 그런 보르헤스 전집 시리즈 첫 번째를 읽기 시작했다.

 

그는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낸 게 아니다. 기존에 있던 이야기들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창조해냈다. 제목에 등장한 불한당이란, 땀을 흘리지 않는 건달을 말한다. 그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캐릭터들은 바로 서부 개척시대를 장식했던 빌리 더 키드 그리고 일본에서 지난 삼백년 간 줄창 우려먹었다는 <주신구라> 스토리를 제공한 기라 고즈케노스케다. , 한센병에 걸린 무슬림 이단자도 있었는데 원체 잘 알려지지 않은 캐릭터라 보르헤스의 저술만으로는 평가하기가 좀 그렇더라.

 

십대 시절부터 살인 저지르기를 밥 먹듯이 했다고 하는 전설의 총잡이 빌리 더 키드. 뉴욕 출신으로 모두가 꿈꾸던 서부로 갔던 모양이다. 미국 건국 후, 모두가 자리를 잡고 자본가 계급이 귀족층이 되어 가던 시절 서부 개척은 가지지 않고 없는 자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는 그런 엘도라도였다. 게다가 캘리포니아와 네바다에서 금이 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나도 그런 기회를 놓칠 수 없지 하고 서부로 달려간 것이다. 문제는 그 서부에는 인디언들이 살고 있었고 그들과의 분쟁은 시간문제였다.

 

마침 어제 에리크 뷔야르의 <대지의 슬픔>을 읽어서 그런 진 몰라도 희대의 불한당 빌리 더 키드, 혹은 빌리 해리건의 이야기가 귀에 쏙쏙 들어오는 그런 느낌이랄까. 14살 때부터 살인을 시작한 카우보이는 멕시코인들은 제외하고 공식적으로 21명이나 죽였다던가. 아무리 무법천지의 서부라고 하지만 빌리 더 키드의 운명 역시 교수대행이었으리라. 결국 보안관 팻 개릿에게 체포되어 교수형을 선고 받았지만, 탈출에 성공했다. 그의 행운은 거기까지였다. 뉴멕시코의 포트 섬너에서 매복 중이던 팻 개릿의 총에 한 시대를 주름잡은 불한당은 고작 21세의 나이에 저승길에 올랐으니 말이다.

 

빌리 더 키드의 경우에는 그나마 서구 문명권이라 그렇지만, <주신구라>의 경우에는 좀 엉망인 게 사실이다. 1701년부터 3년에 걸쳐 겐로쿠 아코 사건으로 알려진 아코번의 젊은 다이묘 아사노 다쿠미노카미의 할복 사건과 그를 따르던 가신들이 사건의 원흉이자 보르헤스가 불한당으로 꼽은 기라 고즈케노스케를 살해한 사건을 철저하게 이방인의 시선으로 해석해낸다. 게다가 보르헤스가 원전으로 삼은 텍스트도 미트포드라는 영국 출신 작가의 저술이었다. 정말 포스트모더니즘다운 설정이 아닌가.

 

역자는 일부러 원서(?)에 나온 대로 표기를 한 것인지 사쓰마를 사수마로, 고즈케노스케를 고수께 노 수께로 표기하는 패기를 보여준다. 복수극의 중심인물인 아사노의 가로 오이시 구라노스케의 이름에 통일을 기하지 않는 건 차라리 애교에 가까울 지경이다. 개인적으로 <주신구라>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문치주의를 표방하면서도 여전히 무를 숭상하는 사무라이들이 사회의 지배계급이었던 에도 막부의 이중성이 배후에 자리하고 있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그놈의 기리[義理]를 지키기 위해 자신과 다른 사무라이들의 모든 것을 판돈으로 건 오이시 구라노스케가 구상한 주군에 대한 복수극이 아사노를 죽음으로 이끈 막부에 대한 외통수였다는 설이 가장 흥미로웠다. 아무래도 <주신구라>에 대한 책을 한 번 구해서 읽거나 드라마를 보거나 해야지 싶다. 직접 봐야 실체를 알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자기 동네에서는 한다하는 칼잡이로 소문난 로센도를 찾은 일명 새장수에피소드도 흥미롭다. 그들의 세계에서 그런 허명은 때려잡아야 한다는 걸까. 새장수는 로센도가 활약하는 동네에 들러 한판 대결을 신청한다. 그런데 로센도는 비겁하게도 대결을 피하고, 칼잡이로서 명예와 자신의 여자까지도 빼앗긴다. 그리고 조용히 사라져 버린다. 그런데 의기양양하게 자신의 전리품을 챙겨 떠난 새장수는 누군가의 칼에 맞아 비명횡사한다. 위세 등등하던 시절에는 끽소리 못하던 이들이 죽은 새장수를 약탈하는 장면이다. 난 왜 이 장면에서 역발산기개세를 자랑하던 초패왕 항우의 마지막이 생각났는지 모르겠다.

 

<기타 등등>에 나오는 멜란히톤은 아마도 루터와 비슷한 시기에 활동하던 신학자로 보이는데 독자가 과문한 탓에 감흥이 별로 오지 않더라. 톰 카스트로 같은 캐릭터도 마찬가지였다. 자꾸만 마틴 스코시즈의 <갱스 오브 뉴욕> 생각이 나던데,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인지도 모르겠다. 예전 같은 열정이라면 리서치도 해보고 그럴 텐데 이제는 다 귀찮다. 아마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겠지.

 

<불한당들의 세계사>가 작가가 30대에 쓴 책이라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아직 작가적 원숙미에 오르지 않은 시절의 작품이 아닐까 싶다. 보르헤스가 다루고 있는 이야기들이 전혀 새로운 게 아니다. 예전에 어디선가 한 번 쯤은 들어본 혹은 기존에 있었던 일들을 자신만의 스타일로 다시 쓴 것이다. 하긴 언제 세상 아래 새로운 것들이 있었던가.

 

오랫동안 보관만 하다가 결국 읽게 된 보르헤스의 책이었는데 기대를 많이 해서 그런지 어쩐지 좀 실망스러웠다. 최근에 다시 나오고 있는 새로운 책들을 읽어야 하나 어쩌나 싶기도 하고. 번역도 그렇고, 오탈자가 어찌나 많은지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다들 대가라고 칭송하는데, 한 번에 실망해서 읽지 않거나 그런 것도 좀 그런데... 어째야 하나 고민 중이다. 어쨌든 나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로, 도서관에서 <주신구라>나 빌려다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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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0-05-18 11: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보르헤스는 두번 도전 두 번 실패의... ㅠㅠ 그 책은 아마 <픽션들>이었죠. 레삭매냐님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 기대됩니다. 제목에서부터 왠지 흥미로운 ㅋㅋㅋㅋ <주신구라>

레삭매냐 2020-05-18 10:59   좋아요 0 | URL
저는 이 책 이전에 시집 <창조자>를
읽었는데 당최... 모르겠더라구요.

이러니 섣불리 도전을 못하겠네요~

<주신구라>는 민음사 판이 있던데
절판돼서 천상 도서관에서 빌려다
봐야할 것 같습니다.
 
대지의 슬픔
에리크 뷔야르 지음, 이재룡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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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쇼 비즈니스의 신세계를 창출했던 보드빌 스타 버펄로 빌코디의 일대기를 그린 <대지의 슬픔>을 읽으면서 나는 일제에 협력했던 안중근 의사의 아들 생각이 났다. 리틀 빅혼 전투의 영웅 시팅 불(타탕가 이요탕가)이 쇼단의 일원으로 역사적 재건을 재현한 얼치기 쇼에 출연했다는 점에서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았나 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역사에서 재현이란 존재할 수 없다. 어떤 형식의 텍스트로도 반복될 수 없는 것이 바로 역사의 재현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대중은 선과 악으로 구분된 지지난 세기말부터 원했다. 그리고 정확하게 시대의 흐름을 짚어낸 버펄로 빌은 미국 기병대로 상징되는 선이 백인들의 머리 가죽을 벗기는 악의 무리 인디언들을 전투에서 물리치는 리얼리티 쇼를 창조해내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는 달러를 삽으로 퍼낼 정도의 부를 쌓는데 성공했다. 물론 그의 그런 성공도 오래 가진 않았지만.

 

솔직히 말해서 프랑스 작가가 오욕과 거짓 선전으로 점철된 미국의 서부개척사를 후벼 파낸다는 점이 역설이 아닐까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리크 뷔야르는 미국보다 훨씬 더 오랜 제국주의 역사를 가진 조국의 알제리나 베트남 전쟁의 진실을 먼저 다뤘어야 하지 않을까. 그의 다른 작품들인 콩고, 레콩키스타 그리고 종교개혁을 기대하고 있지만 왜 곁다리만 훑고 있냐는 그런 비판을 하고 싶어졌다.

 

다시 누구보다 먼저 대중이 원하는 스펙터클을 만들어낸 버펄로 빌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영화 시대에 앞서 버펄로 빌은 대중이 원하는 환상적 욕구를 재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포착해냈다. 그렇다면 대중이 원하는 스펙터클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걸까? 또다른 쇼비즈 사업가 존 버크는 캐스팅에 주목했다. 리틀 빅혼 전투에서 미국 기병대를 몰살시킨 위대한 시팅 불 추장을 캐스팅해서 자신의 <와일드 웨스트 쇼>에 출연시키는데 성공했다. 지금도 은판에 기록되어 남아 있는 시팅 불과 존 버크의 사진을 보라.

 

<와일드 웨스트 쇼>에 캐스팅된 시팅 불과 인디언 전사들은 전 미국은 물론이고, 유럽 대륙에도 건너가 대중들에게 쇼의 진수를 선보였다. 다시 한 번 자존심은 물론이고, 부족의 영혼마저도 삼켜 버리는 무서운 자본의 속성을 엿볼 수 있었다. 어찌어찌해서 쇼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시팅 불 추장은 평화로운 말년을 기대했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던 운명은 너무나 가혹했다. 훗날 <운디드니> 사건으로 알려진 미 기병대의 공격으로 문자 그대로 위대한 영웅과 부족은 비참하게 학살당했다.

 

아메리카 대륙의 인디언들에게는 지울 수 없는 비극이었던 <운디드니> 사건 역시 쇼로 만들어져 무대에 오르게 된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던가? 미국의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상업적으로 이용하기에 이르렀다. 미국이 건국된 이래, 처음으로 패배한 전쟁이었던 베트남 전쟁마저 진 전쟁이 아니고, 아무런 명분도 없이 참가한 전쟁에서 활약한 영웅들의 이야기를 픽업하면서 과연 미국이 전쟁에서 진 걸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가 되었다. 인디언 전쟁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버펄로 빌이 무대에서 연기를 거듭하면서 자신이 진짜 현장에 있었다고 착각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가짜가 진짜를 대신하게 되는 그런 기묘한 과정에 대한 설명은 시뮬라크르 정도로 퉁칠 수 있는 지도 모르겠다.

 

버펄로 빌의 흥행 신화는 그렇게 오래 가지 못했다. 세상의 모든 쇼들이 그렇듯, 버펄로 빌의 <와일드 웨스트 쇼> 역시 영화의 등장으로 역사의 뒷길로 밀려나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버펄로 빌이 순순히 왕좌를 내주진 않았지만, 새로운 시대의 총아 영화 산업에서 버펄로 빌은 재미를 보지 못했다. 자신의 이름을 딴 도시 코디도 만들었지만 서부 개척시대를 그리워하는 이들에게는 성지가 되었을지 모르겠지만, 도시로서의 순기능이 없었기에 쇠락의 길을 걷게 됐다. 쓸데없이 나이 어린 여성에게 당시로서는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 연극무대에 데뷔시키기 위해 투자에 나섰다가 낭패를 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솔직히 말해서 말미에 실린 눈송이 이야기는 왜 들어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그거와 버펄로 빌의 스펙터클 쇼가 무슨 상관이란 말이지.

 

이전에 소개된 <그날의 비밀>에서도 그랬지만, 저자 에리크 뷔야르는 상당히 흥미로운 소재를 잘 다루고 있다. 짧고 강렬한 서사는 마음에 들지만, 아무래도 분량 때문인지 깊이 면에서 떨어진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면 더 할 말이 없던가. 어쨌든 콩고, 종교개혁 그리고 레콩키스타 이야기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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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의 연쇄 독서 - 꼬리에 꼬리를 무는 책들의 연쇄
김이경 지음 / 후마니타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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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8년 전에 책을 받아 읽기 시작하면서도 위험하다는 생각을 했다. 왜냐구? 내가 모르는 미지의 책들이 우수수 소개될 것임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연쇄 독서의 위험을 잘 알고 있으니 더더욱 그랬겠지. 그 시절에는 지금보다 훨씬 더 시간이나 금전적으로 여유가 있었으니 오죽했을까. 지금도 그 시절에 산 책들을 야금야금 읽고 있는 중이다. 사거나 받은 책은 아무리 시간이 오래 걸려도 언젠가는 읽는다는 신념으로.

 

그 때 본 책은 다 읽지도 못했으면서도 <마녀의 연쇄 독서>에 소개된 책은 하나 산 기억이 난다. 토니 주니퍼의 <스픽스의 앵무새>. 이미 그 때도 절판된 책이었다. 신기하게도 페미니즘, 환경을 주제로 한 책들의 수명은 너무 짧은 것 같다. 거의 초판만 나오고 그 후에는 다시 찍지 않는 모양이다. 남아메리카 열대 우림에 서식한다는 스픽스금강앵무에 대한 이야기는 하루가 다르게 멸종되어 가는 지구별의 생물들이 처해 있는 비참한 상황을 다시 한 번 환기시켜 준다. 밀거래 시장에서 한 마리에 자그마치 4만 달러나 하는 금강앵무 잡이에 혈안이 된 밀렵꾼 그리고 그들의 밀렵을 사주하는 부유한 희귀새 수집가들의 악랄함에 그저 치를 떨 뿐이다. 아름다운 금강앵무들이 그냥 원래 살던 곳에 살게 해주면 안 되는 걸까.

 

우리가 사는 지구별의 모든 것은 순환이라는 카테고리에 들어가 있다. 오로지 생산과 이윤만 추구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은 환경파괴를 사주하고, 은폐하는데 전력투구한다. 보다 나은 생산성이라는 이름으로 환경이 파괴되니 금강앵무들이 살 터전이 사라지는 것이다. 더 나아가 우리의 식탁에 오르는 먹거리에 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생명공학이 언제부터인가 미래의 먹거리 산업으로 등장하면서 다국적 기업들이 세계의 종자시장에 침투해서 돈벌이에 나섰다. 그 결과 농부들이 수천 년 동안 애써 지켜온 종자의 다양성들은 사라져 버리고, 오로지 이익을 내는 효율적 단일경작만이 살 길이라는 모토가 시장을 지배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단일경작의 폐해는 정말 심각했다. 병충해나 기근이나 이제는 일상이 되어 버린 물 부족으로 실험실에서 만들어진 종자들은 극심한 기후변화에 전혀 대처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지금도 우리 지구별의 수많은 이들이 기아에 시달리고 있다는 현실이 무엇을 말해 주는가. 또 한편으로 영양과잉으로 비만이나 당뇨 같은 선진국형 병으로 고생하는 이들도 수두룩하지 않은가.

 

반세기도 전에 독일군이 포위한 레닌그라드에서 미래의 인류를 가난과 기아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전 세계를 돌며 수집한 씨종자를 나치의 폭탄과 극심한 기아와 싸우다 죽은 영웅들의 이야기에서는 정말 진한 감동을 먹기도 했다. 내가 <마녀의 연쇄 독서>에서 꼽은 최고의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니콜라이 바빌로프, 결국 그의 일대기를 다루고, 식물종 다양성이 우리 인류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 번 일깨워 주는 책인 <지상의 모든 음식은 어디에서 오는가>를 읽기 시작했다. 마침 그놈의 코로나 사태로 휴관 중이던 도서관이 문을 열어서 두 달이나 대출했던 책을 반납하러 갔다가 냉큼 빌려다 바로 읽기 시작했다. 아니 이런 책은 사야 하는 게 아닐까? 걱정하시지 마라. 언제고 살 테니.

 

내가 처음에 이 책이 상당히 위험한 책이라고 말했던가? 아 제목으로 뽑았구나. 출판사 편집자이자 <스픽스의 앵무새>를 국내에 소개하기도 한 눈 밝은 독자이기도 한 저자처럼 어떤 카테고리를 정해서 달려가는 그런 연쇄 독서가라기보다 아무렇게나 내키는 대로 닥치는 대로 읽어제끼는 연쇄독서마에 가까운 나는 당분한 이 책의 영향으로 연쇄 독서에 시달릴 경향이 농후하다. 벌써 나의 장바구니를 채운 책들이 몇 권이던가.

 

여담으로 우리가 즐겨 먹는 청양고추도 해외 식물기업이 특허권을 가지고 있어서 우리가 즐겨 먹을 때마다 그 기업에 돈을 내야 한다는 사실을 최근에 알고는 좀 충격을 먹었었다. 별 게 다 돈으로 환산되는 세상이구나 하고 말이다.

 

토크빌이 민주주의 사회의 모델로 삼았던 미국의 현재 모습을 보았다면 과연 프랑스 출신 정치학자는 어떤 생각을 했을지 궁금했다. 최고 정치지도자가 확인도 되지 않은 사실을 국민들에게 무차별 살포하고, 오로지 자신의 재선이라는 잿밥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다. 전대미문의 코로나 사태로 베트남전에서 죽은 미군 수보다 더 많은 국민들이 질병으로 죽어 나가도 하나 깜짝하지 않는 사회를 과연 건강한 사회라고 부를 수 있을까? 어쩌면 미국식 민주주의의 조종이 울리고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반민주의자 베르나르 앙리 레비의 <아메리칸 버티고>도 한 번 읽어 보고 싶어졌다. 바로 이게 문제다, 끝없이 연쇄 작동하는 독서와 책에 욕심이 결국 화근이 될 판이다.

 

책을 읽을 적에는 참 할 말이 많았는데 막상 리뷰로 담아내려니 한계가 느껴진다. 기운도 없고... 결국 저자가 인도하는 연쇄 독서는 어디까지나 독서인에게 참고 사항일 뿐이고, 진짜는 자신이 직접 원전을 읽어 보는 것이다. 그리고 한 때, 이런 종류의 책들이 유행을 했던 적도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사람들이 더더욱 책을 읽지 않게 된 시절에 타인의 독서를 읽는다는 건 더 의미가 없어진 게 아닌가 싶다.

 

<마녀의 연쇄 독서>를 읽으면서 절판된 많은 책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다행히 내가 이미 가지고 있는 책들도 있더라. 그런 책들은 다시 한 번 읽어 보고 싶어졌고 그렇지 않은 책들에 대해서는 예의 소유욕이 발동했다. 이제 다시 책사냥에 나설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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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
크리스티안 크라흐트 지음, 배수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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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독일령 뉴기니의 카바콘 섬이 뉴기니 본토 근처에 있는 줄 알았다. 구글 맵으로 카바콘 섬을 검색해 보니 카바콘 섬은 뉴기니보다 뉴브리튼 그리고 라바울 근처의 섬이었다. 놀랍군. 헤르베르트쇠헤(현지명은 코코포) 역시 뉴브리튼 부근이었다. 이래서 지도에서 위치를 파악하는 게 중요하구나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랫동안 서가에서 잠자고 있던 크리스티안 크라흐트의 <제국>을 꺼내든 유일한 이유는 작가 양반이 내가 인스타에 올린 두 개의 포스팅(무려 한글이다!)에 좋아요를 누른 덕분이었다. 나는 널리 알려지지 않은 작가의 책에 도전하는 걸 마다하지 않는다. 이번에 새로 나온 <망자들>을 흥미진진하게 읽은 여운이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제국>에 도전했다.

 

20세기에 태어난 독일 프랑켄 출신 기인 아우구스트 엥겔하르트가 소설 <제국>의 주인공이다. 그를 다음의 표현들로 규정할 수 있을 것 같다. 나체주의자, 극단적 채식주의자 그리고 코코야자주의자 또라이. 독일에서 <근심 없는 미래>라는 해괴한 서적을 쓴 엥겔하르트는 자본주의 생태계에 회의를 느끼고, 최근에 개척된 남태평양의 독일 식민지 노이포메른의 코코야자에 매혹되어 모든 것을 뒤로 하고 19027월 미지의 세계로 가는 배에 오른다.

 

소설은 마냥 실존 인물인 아우구스트 엥겔하르트가 그리는 삶의 궤적만을 그리지 않는다. 아니 어떻게 보면 또라이 같은 삶은 산 엥겔하르트라는 인물이 남긴 빈 공간을 작가의 상상력이 마구 침범한다. 독일령 뉴기니로 가는 도중에 들른 실론(오늘의 스리랑카)에서 희대의 사기를 당해 가진 돈을 거의 다 털리기도 한다. 현지에서는 모든 무역을 독점한 에마 포사이스 여사에게 농락당해 거의 거저나 다름없는 카바콘 섬의 코코야자 농장을 사들인다.

 

이미 그 당시에도 산업화에 지친 인민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카바콘이 지상낙원이라는 선전하는 엥겔하르트의 감언이설에 넘어가 독일 각지의 청년들이 헤르베르트쇠헤에 몰려들어 각종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이미 그전에 엥겔하르트와 비슷한 성향의 또라이 하나가 섬을 찾았다가 살해당하기도 했다(이건 어디까지나 소설적 구성이다). 베를린 출신의 유명한 피아노 연주자 막스 뤼트초프가 카누에 헤르베르트쇠헤에서 수배한 고물 피아노를 싣고 카바콘 섬에 상륙하는 장면은 정말 압권이었다.

 

심각한 영양 불균형으로 오로지 코코야자만 먹고 살겠다는 태양교주 엥겔하르트의 건강은 하루가 다르게 나빠진다. 게다가 독단적인 성향까지 내비치면서 자신과 합류하기 위해 찾아온 청년 노숙자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결정을 내린다. 물론 뤼트초프는 그에 반대하지만.

 

독일령 뉴기니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현재형이라면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플래시백처럼 중간에 삽입된 그의 행적들을 알려주는 사건들은 과거형이다. 뉴기니로 오는 도중에 실론에서 발생한 거액 송금환 절도사건은 애교에 가깝다. 소설을 더 흥미롭게 만드는 요소 가운데 하나는 당대를 주름잡던 저명한 인물들의 카메오 출연이다. 헤르만 헤세를 필두로 해서, 동프로이센 메멜의 바닷가에서 자신의 신념대로 나체로 있던 엥겔하르트를 경찰에 신고해서 치도곤을 먹인 당사자는 토마스 만으로 추정된다. 그 외에도 베른의 특허청에서 일하던 시간의 재해석자 아인슈타인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뤼트초프가 사소한 히스테리로 정신 상담을 받은 빈의 프로이트 등 마치 크라흐트 작가가 곳곳에 마련한 기대하지 않았던 에피소드들과 만나는 재미도 쏠쏠하다.

 

소설 <제국>에는 기본적으로 독일식 엄숙주의 덕분인지 요절복통의 서사보다는 점잖은 스타일의 유머가 넘실거린다. , 정말 좋아할 수밖에 없는 그런 작가다. 엥겔하르트의 동지였다가 독재자 교주와 사이가 틀어져서 섬을 탈출한 막스 뤼트초프가 남태평양의 여왕 에마와 선상 결혼식을 마치고 흥에 넘쳐 샴페인 잔을 쥐고 다른 배로 건너가려다가 미끄러진 뒤, 두 배 사이에 끼어서 으스러져 버리는 장면은 정말 압권이었다. 소설 <제국>의 핵심 주제로 뽑을 수 있는 한 시절을 풍미했던 제국의 몰락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생의 정점에서 무너져 버린 한 사나이의 기괴한 운명으로 도치된 몰락한 식민제국의 운명 말이다.

 

독일 보호령인 뉴기니에 터를 잡은 프로이센 출신 작물 재배인 혹은 부르주아들은 하나같이 본국에서 밀려난 신세다. 새로운 시대의 주역으로 떠오른 독일 제국의 잘 나가는 인사들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그런 깡촌에 와 있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말이다. 제국 수도 출신으로 그게 건강염려증으로 무언가 새로운 활력을 찾아 나선 뤼트초프가 베를린과 다를 게 없는 헤르베르트쇠헤의 분위기에 지친 이유다. 물론 코코야자주의자를 천명하며 카바콘에 둥지를 튼 엥겔하르트도 크게 다를 게 없지만 말이다. 위대해지고 싶지만 그러지 못한 인간의 처절한 자신의 본모습에서 그를 코코넛섬의 돈키호테로 부르고 싶다.

 

독일의 식민주의자들에게 남태평양의 뉴기니는 그저 착취의 대상일 뿐이다. 알베르트 할 총독으로 대표되는 지배계급의 뇌리에는 오로지 작물 재배, 노동, 이주, 개발, 그리고 소득 창출이라는 생각만 가득하니 말이다. 예전 수업시간에 배운 생시몽과 푸리에 그리고 프루동 같은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의 이름을 만나니 어찌나 반가웠는지 모르겠다. 독일 사회민주당(SPD)이 제국의 식민지 정책에 반대했다는 사실도 하나의 지적 획득이었다.

 

소설의 결말은 포스트트루스(post-truth) 시대에 걸맞는 그런 엔딩이 아니었나 싶다. 진실이 더 이상 사실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시대에, 아우구스트 엥겔하르트의 삶은 소설 속에서 굴절되어 반영된다. 크리스티안 크라흐트 작가가 내린 그런 결정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개인적으로 <제국>은 지금까지 만난 네 편의 크리스티안 크라흐트 작가의 작품들 중에 최고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에는 이슬람 혁명 시절의 이란과 문화혁명기의 중국을 다뤘다는 <1979> 그리고 김정일 시대의 북한 여행을 다룬 사진집도 한 번 읽어 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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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09 00: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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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09 09:4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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