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하는 정신 - 체념과 물러섬의 대가 몽테뉴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안인희 옮김 / 유유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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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부터 미셸 드 몽테뉴의 이름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단지 그의 이름만 알고 있었다. <에세>라는 이름의 자유로운 글쓰기의 전범을 보여 주었다는 점 정도만. 그러다 이달에 홋타 요시에 선생의 저작들을 만나게 됐고 그의 저술을 통해 몽테뉴를 읽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 다만 홋타 요시에 선생의 3권 짜리 몽테뉴 평전은 절판되어 구할 수가 없었다. 꿩 대신 닭이라는 생각으로 상대적으로 쉽게 구할 수 있는 슈테판 츠바이크의 몽테뉴 평전을 사서 읽었다.

 

홋타 요시에 선생의 몽테뉴 평전에는 가톨릭과 위그노가 격렬하게 종교전쟁을 치른 당대 프랑스의 이모저모에 대한 디테일이 담겨 있다고 하는데, 츠바이크의 몽테뉴 전기는 오롯하게 몽테뉴라는 문제적 인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가스코뉴 보르도 출신의 몽테뉴는 1533228일 태어났다. 그의 증조부는 청어를 파는 생선 장수였다. 아버지는 프랑스 군주를 따라 군인으로 전쟁에 참여하면서 비로소 귀족 행세를 하게 됐다. 어머니 가계는 에스파냐의 개종한 유대인 출신의 위그노였다고 한다. 법관과 보르도 시장을 역임한 피에르 에켐은 아들 미셸에게 특별한 교육을 시켰다. 그것은 당대 상류 계층으로 나갈 수 있는 마법의 도구였던 라틴어 교육이었다. 아직 모국어인 프랑스어도 제대로 하지 못하지 아들을 위해 독일에서 프랑스어는 한 마디로 하지 못하는 라틴어 교사들을 초빙해 왔다고 했던가. 샤토 몽테뉴가 왠지 스카이 캐슬처럼 그렇게 내게 다가왔다.

 

아버지 피에르 에켐이 제공한 금수저 덕분에 몽테뉴는 미래의 뛰어난 지성인이자 문필가로서 대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뒤에는 법학 공부를 마치고 법관으로 봉직하기도 했다. 샤를 9세의 시종으로 루앙 포위전에 참가하기도 했다.

 

일평생 가톨릭 신자의 삶을 살았던 몽테뉴가 살았던 16세기는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촉발된 종교전쟁과 내란의 시기였다. 같은 뿌리에서 갈라져 나온 가톨릭과 위그노 사이의 종교적 갈등과 폭력은 프랑스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관용의 정신을 어디에서고 찾아볼 수 없었으며,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아예 시도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저자 츠바이크가 가장 싫어한 집단 광증과 선동이 난무하던 그런 시기였다. 츠바이크는 1940년대 자기 삶의 말년에도 몽테뉴의 시절과 비슷한 체험을 했는데, 그로부터 또 8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터무니없는 음모론과 가짜 뉴스, 전염병(몽테뉴 시절에는 페스트였다) 그리고 집단 광증은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역사는 희극이 아닌 비극으로만 재현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이 위대한 지성인이자 철학자는 집단 광기의 시대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에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게 도움을 주려 해도 그들은 거부했다. 몽테뉴는 강호가 어지러워질수록, 자신의 내면세계에 집중했다. 광신도들과 극단적 종교 이데올로기 투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하나의 자구책이 아니었을까. 몽테뉴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영어로 된 짧은 너튜브 철학 동영상(그렇다 이제 너튜브는 진리까지 독점해 버렸다)을 찾아보니, 르네상스의 후예인 그가 당시 유행하던 고대 철학자들의 책들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자아 탐구에 천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삼십대 후반에 공직에서 은퇴하고 샤토 몽테뉴로 돌아온 철인은 세상과 담을 쌓고 은거에 들어간다. 하지만 우리 속인들처럼 철인 몽테뉴 역시 먹고사니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아마 우리로 치면 선비 같은 인물이라고나 할까. 자신이 직접 노동은 하지 않더라도, 가족과 자그마치 6명이나 되는 딸들(그중에서 성인으로 성장한 자식은 한 명 뿐이었다)을 먹이고, 자신의 영지를 관리하는 일을 소홀히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좋아하는 책을 사기 위해서라도 금전은 반드시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당시 책이 상당히 고가였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가 소장한 천권의 책들이 얼마나 대단한 재산이었을까.

 

대법관으로 승진을 포기하고 자신의 거성에서 <수상록>을 집필하던 시절이야말로 몽테뉴 인생의 최절정기가 아니었을까. 그는 전문적인 문인이나 역사가가 아니었기에, 일체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웠다. 극단과 전란의 시기에 어느 편에 서지 않고 중도 노선을 걸으면서 자신의 지키며 시간을 보내기에 책읽기와 집필만한 것이 또 있었을까. 그때그때 떠오르는 생각들을 아무런 구속이나 속박 없이 쓰고, 자신을 묘사했다. 츠바이크는 젊어서 만난 몽테뉴의 생각들이 얼마나 대단한 사유의 향연이었는지 나중에 알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아쉽게도 아직 나는 그의 <수상록>이나 여행기를 만나 보지 못했기에 그저 대가의 가르침을 얼치기처럼 따를 수밖에 없다.

 

책읽기의 대선배 몽테뉴는 오로지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책을 읽었다. 허무주의에까지 도달하진 않았겠지만,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공부해 가면서 책을 읽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아는 것이 무엇인가? What do I know? 진정한 의미에서 순도 백퍼센트의 자유주의자였던 무슈 몽테뉴는 타인의 자유를 제한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 말은 자신도 타인들로부터 어떠한 자유의 제한도 원하지 않는다는 선언이 아닐까.

 

아울러 그는 에피쿠로스의 영향 아래, 자신이 좋은 것을 하라고 충고한다. 그게 사냥이 공부든 부동산 투자든 뭐든 간에 말이다. 책이 좋은 사람을 책을 읽으란다. 우리 독서인에게 이보다 더 좋은 격려가 존재할 수 있는지 나는 묻고 싶다. 다만, 즐거움의 경계까지는 가되, 그 경계는 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 뒤에 기다리는 것은 고통이니까. 이 위대한 예언자는 미래의 책읽기 동지들이 어떤 위험에 빠지게 될 것인지 이미 알고 있었나. 이 지점이야말로 내가 이 책에서 최고로 꼽는 부분이다. 무슈 몽테뉴가 내게 하는 위로의 정수를 얻었다고나 할까. 아니 츠바이크 선생과의 합작품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샤토 몽테뉴에서 십년간의 은둔 생활을 마친 무슈 몽테뉴는 여행길에 나선다. 2년 동안, 프랑스-스위스-독일-오스트리아 그리고 이탈리아를 위대한 정신은 여행했다. 아무런 목적도 없는 자기 자신을 찾는 여행이었다. 아니 어쩌면 젊었던 시절의 나와 똑같은 여행 스타일인지 깜짝 놀랄 정도다.

 

하지만 세상은 이 위대한 철인이 자유를 만끽하는 걸을 참을 수가 없었다. 고향 사람들은 그에게 아버지 피에르 에켐처럼 시장직을 맡아줄 것을 요청했다. 국왕까지 나서서 명령을 하는 바람에 영원한 자유인이고자 했던 그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6세기 후반, 종교전쟁의 피바람 속에서 프랑스 왕국은 다시 한 번 큰 위기에 휩싸인다. 발루아 왕조의 마지막 왕인 앙리 3세의 후계자로 부르봉 가문의 나바르 공 앙리가 추대되었던 것이다. 살리카 법에 따라 부르봉 가의 앙리가 프랑스 왕국의 대권을 얻게 된 것이다. 유혈사태 없이 왕위계승이라는 권력의 트랜지션을 위해 나바르 공 앙리의 개종을 이끌어 내기 위한 이상적 중재자로 무슈 몽테뉴가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홋타 요시에의 다른 저작 <라 로슈푸코>의 주인공 프랑수아 라 로슈푸코 6세가 자신의 정신적 스승으로 삼을 정도로 무슈 몽테뉴는 정치와 행정 그리고 문학까지 아우르는 다방면에서 빼어난 능력을 보여준 마지막 르네상스인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보르도를 덮친 페스트를 피해 성을 버리고 도망가는 쫄보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라 로슈푸코가 인간에 대한 본질이라고 주장한) 자기애 덩어리로서 무슈 몽테뉴의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변명해 본다. Nobody's perfect. 훗날 나바르 공 앙리가 왕이 되었을 때, 명실상부한 왕의 고문관으로 엄청난 권력을 누릴 수도 있었지만 안분지족을 아는 미덕의 소유자였던 무슈 몽테뉴는 깨끗하게 공직 생활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조용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홋타 요시에 선생의 <몽테뉴 평전>을 대신해서 만난 츠바이크의 <위로하는 정신>은 기대이상의 수확이었다. 위대한 정신과의 만남의 감동과 과정을 부족한 리뷰에 다 담을 수가 없어 그저 아쉬울 따름이다. 구하지 못해 읽지 못하는 책에 대한 갈급함은 어찌 달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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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란공 2021-01-30 10: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시에 선생의 몽테뉴 평전을 구하시면 꼭! 리뷰 부탁드립니다^^ 책세상에서 나온 ‘식인종에 대하여‘도 읽고 아주 좋았어요. 역자가 주석도 세심하게 달아주시고요.

레삭매냐 2021-01-30 21:25   좋아요 0 | URL
20년도 전에 나온 책이라,
구할 수가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

한길사에서 다시 내주면 좋겠으나
아마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coolcat329 2021-01-30 23: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1월 츠바이크를 몰아서 읽고 있는 중입니다. 이 책도 구해야겠네요.독서인생이 너무 짧아 딱히 열광하는 작가가 없는데 츠바이크는 앙뜨와네뜨 전기소설 읽고 단번에 팬이 됐습니다. 레삭님의 리뷰가 제 가슴을 설레이게 하네요☺

레삭매냐 2021-02-01 11:52   좋아요 1 | URL
저도 슈테판 츠바이크의 열렬 팬입니다.
이 책은 정말 대단한 책이 아닐 수 없습
니다. 더 오래 사셔도 인류에게 더 많은
책들을 남겨 주셨어야 했는데 그저 아쉬
울 뿐입니다.

마리 앙투아네트와 메리 스튜어트 책
마저 읽어야 하는디...
 
서재를 떠나보내며 - 상자에 갇힌 책들에게 바치는 비가
알베르토 망겔 지음, 이종인 옮김 / 더난출판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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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얼마나 책을 많이 읽으면 눈이 멀게 될까? 실명한 도서관장(같은 경우로 실명한 네 번째 아르헨티나 국립도서관장이라고 한다) 보르헤스에게 수년간 책을 읽어준 알베르토 망겔의 이야기다. 그는 긴 유목민 생활을 마치고 캐나다에서 살다가 도서관장직 제안을 받아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같은 저주에 걸리지 않게 해달라고 빌었다.

 

하나마나한 이야기지만, 망겔은 위대한 독서가이고 그의 책 <서재를 떠나보내며>는 우리 같은 독서인들에게 참으로 위험한 책이 아닐 수 없다. 한편으로는 아직도 단테의 <신곡>을 읽지 않았느냐는 준엄한 꾸지람 같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같은 대지의 숨을 쉬는 이런 동지가 있구나 하는 마음에 안도감이 들기도 한다.

 

나의 독서 스타일은 일단 꽂히는 작가가 생기면 두 번 생각할 것 없이 그의 책들을 모은다. 그리고 읽는 건 나중의 일이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사서 바로 읽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 그런 경우는 매우 드물다. 이달만 하더라도 홋타 요시에 작가에 꽂혀서 일단 책부터 사들이지 않았던가. 기세 좋게 시작한 <고야>는 아직도 1권을 못 읽었다. 그동안 다른 책들을 읽느라.

 

누가 뭐래도 내가 읽는 이유는 즐거움 때문이다. 책읽기의 즐거움을 다른 무엇에 비유할 수 있을까. 망겔 선생 역시 도서관장으로 부임한 이래, 새로운 독자들을 만들기 위한 작업에 착수한다. 책읽기가 업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열혈독서광인 선생은 단발성 캠페인으로 새로운 독자들을 양성해낼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매일 같이 쏟아져 나오는 모바일 게임에 흥미진진한 넷플릭스 드라마 그리고 너뷰트를 상대로 수천년 동안 종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책이 젊은 세대에게 어필할 건덕지가 1도 없는 게 현실이다. 그렇다면 우리 애서가 혹은 열혈독서광들은 쿨하게 패배를 선언해야 하는 걸까? 그러고 싶지 않다는 게 나의 솔직한 심정이다.

 

망겔 선생은 솔직하게 자신이 탐욕스러운 책의 약탈자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나도 예전에는 책을 아주 소중하게 여긴 적이 있었다. 책에 메모는커녕, 접는 건 물론이고 심지어 비닐로 싸서 보관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런 게 다 무어냐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다음부터는 4B연필로 간단한 메모와 밑줄을 죽죽 그어 가며 망겔 선생에 버금가는 탐욕스러운 약탈자로 변신하게 되었다. 뭐 그렇게 가는 거지.

 

오독일 지도 모르겠으나, 망겔 선생에 따르면 글쓰기라는 문학의 스타일은 모방과 반복의 연속이다. 조금은 신학적 귀결이 될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완벽한 창조물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 밖에 없을 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세상에 인간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들은 불완전하다는 말일까. 저자도 언급한 창세기에 등장하는 아담이 세상의 모든 동식물들에게 명명하는 장면은 지난 수세기 동안 논의되어온 고전적인 주제라고 한다. 원래 그들의 이름이 존재했던 걸까? 아담은 무슨 수로 세상에 존재하는 그 많은 동식물들의 이름을 명명할 수가 있었을까. 무지한 일개 독자로서는 저자가 제기한 질문들에 골이 깨질 지경이다.

 

또한 망겔 선생은 문학은 영원불멸의 골렘이라고도 선언한다. 요 골렘이라는 녀석은 내가 즐겨하는 모바일 게임에 나오는 몸빵 돌멩이 몬스터가 아니라, 유대인의 무슨 설화에 나오는 진흙으로 만들어진 창조물이라나. 우습게도 어리석은 독자는 대가가 만든 명제를 앵무새처럼 반복할 수밖에 없다. 이대로 저자가 만들어낸 보편(이데아)의 질서를 따라가야 하는 걸까? 내가 짐작할 수 없는 무언가를 억지로 이해하려는 노력 자체가 부질없어 보인다. 창작 자체가 불완전한 것일진대, 불완전한 것을 이해하려는 노력 자체가 무의미한 것은 아니고? 오만가지 질문들이 책을 읽는 내내 쏟아져 내린다. 아니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알베르토 망겔 선생이 의도한 것은 아니고? 자신의 책을 읽고 누군가 회의하게 만드는 것, 그리고 새로운 책에 대한 도전정신을 불태우게 만드는 것 말이다. 무언가 알려고 사유의 단계로 유도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독서의 즐거움 중의 하나가 될 테니까.

 

망겔 선생은 사전 예찬가이기도 하다. 그리고 보니 나도 어려서 국어선생님이신 아버지가 집에 비치해 두신 엄청 두꺼운 두 권짜리 국어사전으로 모르는 낱말들을 찾아보곤 했었다. 자전은 또 어떤가? 그나마 사전은 쉽기라도 하지, 부수를 모르면(사실 획수도 아직까지도 헷갈린다) 김찬삼 선생이 세계일주를 구술한 여행기를 읽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횡서가 아닌 종서라 읽다 보면, 줄을 틀리기 일쑤였다. 게다가 정자도 아닌 약자를 왜 그리 쓰셨는지. 세상의 온갖 정의를 담은 사전의 세계에 빠지면 헤어나올 수가 없었던 시절도 있었다. 책을 통해 자신의 무지를 깨닫고, 무지의 벽을 부수기 위해 꼬마 독서전사는 사전에 자신의 계몽을 의탁했었다.

 

문득 어제 오랜 친구와 전화를 하다가 너튜브 콘텐츠의 깊이 없음에 대해 이야기한 기억이 났다. 하긴 짧은 시간 동안에 영상을 통한 정보 전달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콘텐츠 크리에이터에게 무엇이 다룰 것인가부터 시작해서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중요하지 않은지에 대한 전권이 주어지지 않았던가. 아니 어쩌면 밀레니엄 시절에 콘텐츠 제작은 새로운 스타일의 글쓰기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기존의 작가들이 글쓰기라는 전통적 방식으로 책이라는 콘텐츠를 만들었다면, 새로운 시대에는 동영상 제작이라는 방식으로 책을 대체할 콘텐츠가 만들어지고 있는 게 아닐까. 그리고 우리 독자들은 예전에 책을 소비하던 방식대로, 그렇게 생산된 동영상 콘텐츠들을 비판 없이 꾸역꾸역 소화해 내고 있는 중이다. 전통의 책이 지배하던 시절과 달리 댓글이라는 유용하면서도 치명적인 소통의 방식이 더해지면서 콘텐츠의 질 향상에 도움이 되거나, 창작자의 창작 의욕을 깨부수기도 하면서 말이다.

 

어쨌든 책을 대체할 새로운 미디엄으로 너튜브 세계의 확장에 그렇게 비판적일 필요는 없지 않을까 싶다. 너튜브 콘텐츠에서 영감을 얻은 새로운 독자들은 자신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이 다시 책을 찾게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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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1-27 12: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너튜브에서 눈과 손가락을 못떼고 있는 1人 매냐님말에 동감 ㅋㅋㅋ

레삭매냐 2021-01-27 14:36   좋아요 1 | URL
저도 비판적으로 보지만,
어쩔 수 없이 너튜브에 이미
영혼을 털렸네요...

syo 2021-01-27 12: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 아르헨티나 국립도서관이라는 곳에 무슨 문제 있는 게 아닐까요? 석면이라든가..... 헛소리입니다.

레삭매냐 2021-01-27 14:40   좋아요 1 | URL
아 씨오님!
씨게 쳐주시네요... 점심 묵다 보고
는 빵 터져부렀습니다.

석면 때문이었고나.

2021-01-27 13: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삭매냐 2021-01-27 14:46   좋아요 1 | URL
아, 참말로 부끄럽습니다.

대가 망겔 선생이 의도한 바를
과연 제가 얼마나 이해했는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역시나
세상에 허명은 없는가 봅니다.

얼마나 열심으로 책을 읽으시면
그런 지경에까지 도달할까요.
전 아직 그 정도는 아니니... 적당
하게 읽어야지 싶습니다. 아 무셔라.
 
표범 - 어떻게 두꺼비를 삼킬 것인가 동안 더 빅 북 The Big Book
주세페 토마시 디 람페두사 지음, 최명희 옮김 / 동안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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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소설이자 가디언에서 선정한 세계 10대 역사소설이라는 광고가 허명이 아니었다. 그 외에도 이런저런 책에서 이탈리아 출신 작가 주세페 토마시 디 람페두사의 <표범> 혹은 <레오파드>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서 원작 소설이 궁금했다. 그리고 마침 수년 전에 수배해둔 <표범>이 가까이에 있었다. 두 번 생각할 것 없이 바로 책을 펴들었다. 그렇게 잘 읽다가 잠시 휴지기를 거쳐 마침내 다 읽었다.

 

람페두사가 고른 시기는 18605월 그리고 공간은 부르봉 왕조의 지배를 받고 있던 두 개의 시칠리아 왕국 중에 하나였던 시칠리아였다. 우리의 주인공은 50세의 멋쟁이, 살리나 공작 돈 파브리치오다. 북부 피에몬테의 사르디니아 왕국을 중심으로 한 리조르지멘토(Risorgimento:이탈리아 통일운동)가 한창이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귀족들이 세상을 지배하던 시절은 끝장이 났다는 것이다.

 

사회경제적으로 성공한 부르주아 계급이 기존의 지배계급이었던 귀족들을 대신해서 새로운 질서의 주인공으로 부상했다. 수백년 동안, 민중 위에 군림해온 귀족들은 이러저러한 이유로 자신들의 영지를 지키지 못하고 몰락해 가고 있었다. 수대에 걸쳐 교양과 예의범절 그리고 특유의 신중함으로 무장한 돈 파브리치오를 필두로 한 귀족들은 새로운 혁명의 시대에 적응하지 못했다. 다가오는 불온한 혁명의 움직임에 귀족들의 반응은 엉성했다.

 


돈 파브리치오의 젊은 조카 탄크레디 팔코네리 공작 같은 경우, 혁명군의 대열에 서서 부르옹 왕조의 대항에 나선다. 책을 다 읽고 나서, 루키노 비스콘티가 1963년에 만든 동명의 영화도 보게 됐다. 영화는 상당히 소설에 충실한 편이다. 종교와 가정에 충실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난봉꾼 역할을 무난하게 해내는 돈 파브리치오 역의 버트 랭카스터는 안성맞춤의 캐스팅이었다. 시대의 미남자 알랭 들롱이 맡은 탄크레디는 또 어떤가팜므 파탈 같은 매력을 발산하는 앙겔리 역의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도 대단했다.

 

소설에서는 밋밋하게 전개된 팔레르모 시가전이 영화에서는 기대 이상의 규모로 스펙터클하게 재연되었다. 리조르지멘토의 국민 영웅 주세페 가리발디가 이끄는 천인대(붉은 셔츠부대)가 목숨을 내걸고 부르봉 왕군과 싸우는 장면은 대단했다. 총탄과 포탄이 난무하는 가운데, 부르봉 왕군은 포로로 잡은 천인대원들을 현장에서 즉결처분한다. 총살당한 병사들의 가족들은 눈앞에서 벌어진 비극에 울부짖는다. 부르주아로 보이는 왕당파 스파이를 매달라는 시민들의 함성이 거리를 가득 메운다. 이 때, 눈에 들어온 인물이 하나 있으니 내게는 <돌아온 튜니티>로 얼굴이 익은 이탈리아 출신 테렌스 힐이었다. 놀랍군 그래. 마카로니 웨스턴 배우로만 알았던 튜니티가 이런 역사물에도 출연을 했었군.

 

소설 <표범>에 리조르지멘토라는 커다란 역사의 축이 있다면, 또다른 한편에는 젊은 청춘들의 로맨스가 자리 잡고 있다. 무언가 이루어질 것 같았던 사촌지간인 탄크레디와 돈 파브리치오의 영양 콘쳇타의 사이에, 촌장 카로제로의 아름다운 딸 앙겔리가 등장하면서 파문이 인다. 돈 카로제로는 혁명군에게 적극적으로 협력하면서 신흥 부르주아 계급으로 성장하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의 주인이었던 영주들에게서 토지를 사들이고, 자산을 늘리는 방식으로 사회경제적 부를 축적한다. 매력적인 앙겔리의 외모에 반한 탄크레디에게 몰락해가는 살리나 공작의 영양인 콘쳇타 보다 앙겔리와의 결합이 미래의 성공을 보장해 줄 것이라고 냉정한 돈 파브리치오는 판단한다.

 

기존의 귀족계급을 대신할 부르주아 계급의 대두라는 도도한 역사의 흐름 앞에 돈 파브리치오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로서는 전란의 혼란기에 가족들의 생명을 지키고, 얼마 남지 않은 영지를 수호하는 게 고작이었다. 파도처럼 몰려오는 혁명의 물결 앞에 무기력한 돈 파브리치오였지만, 마지막 남은 표범 혹은 사자답게 세파에 대처하는 모습도 보여 주었다. 새로운 통일국가 이탈리아에서 상원의원을 맡아 달라는 부탁에 대해서도 정중하게 거절하고, 아내와 후계자인 장남을 먼저 보내고 임종을 맞는 순간까지 존엄과 자부심을 지키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예수회 출신 피로네 신부도 주목할 만한 캐릭터다. 살리나 공작 가문에 봉사하면서, 그네들의 특성을 꿰뚫은 혜안을 기른 파드레는 너무 빠르게 변하는 시대의 흐름이 마땅치 않은 농민들에게 의전 같은 스타일에 집착하는 귀족들의 속성에 대해 설파하기도 한다. 법적으로 해결하기 까다로운 문제에 있어서는 파드레라는 신분을 빌어 양측의 화해를 도모하기도 한다. 혼전임신을 한 조카 운칠리나를 위해 해결사로 나선 피로네 신부는 자신의 백부 투리가 신부의 여동생 사리나 몫인 아몬드 밭을 탐하는 장면을 통해 귀족이나 농민이나 다를 게 없다는 점을 확인하기도 한다. 혁명군이 가톨릭 교회가 소유하고 있던 토지들을 몰수하자, 그동안 교회가 해오던 빈민구제 같은 사업을 누가 대신할 것인가를 두고 의견을 나누는 장면도 기억에 남는다.

 


폰테레오네 집안에서 벌어진 사교모임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무도회 시퀀스는 압권이었다. 영화에서는 자그마치 45분에 달한다고 하던데, 종언을 앞둔 귀족사회의 마지막 불꽃놀이였다고나 할까. 시칠리아의 한다하는 선남선녀들이 모여, 먹고 마시고 즐기는 그들만의 세상을 연출했다. 좌중의 시선을 한데 모은 인물은 바로 돈 카로제로의 딸이자 미래의 공작부인인 앙겔리였다. 그동안 갈고 닦은 사교계의 기술을 선보일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고, 돈나 앙겔리를 위한 완벽한 사교무대 데뷔전이었다. 앙겔리는 탄크레디의 외삼촌 돈 파브리치오에게 마주르카를 추자는 제안을 던지고, 노쇠한 자신의 스텝을 고려한 살리나 공작은 왈츠를 추는게 어떠냐고 응대한다. 진짜 고수들의 대결이 아닌가. 저녁을 같이 하자는 앙겔리의 제안에 대해서도, 자신의 경험을 유추해서 정중하게 사양하는 절제의 미덕을 선보이기도 한다. 바로 이런 게 귀족 스타일이라는 점을 람페두사 작가는 예리하게 짚어낸다. 고수답지 않은가.

 

가리발디의 마르살라 상륙 후, 반세기가 지난 시점의 엔딩에서는 미혼으로 인생의 황혼을 맞은 콘쳇타가 다시 한 번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자신이 아닌 앙겔리를 선택한 탄크레디에 대한 비밀이 드러나고, 공작가의 영양들이 애지중지하던 초상화와 성물들이 교구 사제의 부적격 판정을 받는 것으로 소설 <표범>은 마무리된다.

 

속세의 인간들이 가장 탐할 만한 주제인 정치, 종교 그리고 사랑을 전면에 내세운 람페두사 작가의 전략은 탁월했다. 소설의 주인공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들이 바라는 욕망을 추구했다. 그리고 필멸의 존재들은 시간 속에서 사위어 갔다. 결국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리는 주체는 우리 인간이라는 점을 그는 <표범>을 통해 보여준다.

 

[뱀다리] 소설은 정말 훌륭하나, 번역은 너무 심했다. 감수를 하지 않은 걸까. 같은 페이지에서도 한 인물의 이름을 오기하다니...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의 본질을 생각한다면, 출간된 것만으로도 감사해야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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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1-01-26 11: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머 책도 영화도 너무 궁금하네요!

레삭매냐 2021-01-26 13:08   좋아요 2 | URL
책을 보고 나서 영화를 보니
무언가 합이 짝짝 들어 맞는
그런 느낌이었답니다.

다만 러닝타임이 186분이라
ㅎㄷㄷ입니다. 야금야금 보고
있습니다.

수이 2021-01-26 12: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탈리아 소설 목록 짜고 있었는데 레삭매냐님이 이렇게 짠 올려주시니 얼른 올려놓아야겠어요.

레삭매냐 2021-01-26 13:19   좋아요 2 | URL
출간될 거라고 했지만 결국
나가리가 난 이탈리아 작가
디노 부차티의 <시칠리아에
곰들이 쳐들어왔어요>와
죽기 전에 꼭 읽어 봐야 한다는
<타타르 황야>도 출간되었으면
합니다.
 
런던, NW
제이디 스미스 지음, 정회성 옮김 / 민음사 / 2019년 11월
평점 :
절판



작년부터 읽던 제이디 스미스의 <런던 NW>를 한달도 넘어서 다 읽었다. 사실 이 책을 읽다 말고 이 책 저 책 집적거리다가 더 이상 묵혀 두었다가는 아예 완독하지 못할 것 같아 서둘러서 읽었다. 그전에는 비슷한 케이스로 람페두사의 <표범>을 읽었다. 지금 영화도 보고 있는데 아주 마음에 든다. 역시 비스콘티다.

 

이번에도 역시나 삼천포로구나. 리뷰를 차례대로 써야 하는데 가장 최근에 읽은 책부터 하려다 보니 쓸데없는 말들이 길어졌다. NW는 런던 북서부를 지칭하는 우편번호라고 한다. 런던에는 가본 적이 없으니, 순전히 런던 토박이라고 볼 수 있는 저자의 인도를 따라가는 수밖에. 해외문학을 접하다 보니, 조금이라도 지명이나 사회적 배경을 안다면 쏙쏙 들어올 법한 이야기들이 예의 지식이 없다면 거의 불가능하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

 

소설 <런던 NW>에는 콜드웰 출신, 네 명의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그 중에서도 진짜 주인공은 첫 주자인 리아 한월과 변호사로 출세한 내털리 블레이크다. 다른 제이디 스미스 작가의 소설들처럼 <런던 NW>에서도 계급 문제와 인종 이슈가 빠지지 않는다. 전형적이 중산계급 출신의 리아는 사회적으로 그다지 성공하지 못한 경우다. 하지만, 그녀의 절친 내털리 아니 원래 이름인 키샤는 어쩌다 보니 구질구질한 동네 콜드웰을 벗어나 변호사로 성공했다. 게다가 남편인 프랭크 드 어쩌구는 잘 나가는 금융업자다.

 

한 마디로 말해, 키샤 블레이크는 비록 중산계급 출신의 흑인이자 여성이라는 사회적 편견을 모조리 부수고 성공의 사다리에 오른 그런 입지전적 인물이다. 문제는 거의 완벽해 보이는 그녀의 사회경제적 레쥬메가 그녀의 행복을 담보해 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니 어쩌면 이런 설정 자체가 하나의 클리셰이라고 해야 할까? 모든 가정마다 소소한 문제들이 있는 것처럼 모두가 추구하는 부촌에서 완벽한 가정을 건설하는데 성공한 내털리 블레이크에게도 채워지지 않는 그런 갈급증이 있다는 것이다. 성공의 정점에서 삐딱하는 순간, 완벽해 보이는 가정의 붕괴는 시간 문제일 뿐이다.

 

샤라는 얼치기 사기꾼에게 피같은 생돈을 뜯기는 리아는 순수하다. 남편 미셸은 내털리네처럼 성공하고 싶다. 아니 한 마디로 말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많은 돈을 벌고 싶다. 하지만, 자본이 부족한 이민자 출신 중산계급이 그런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는 없다는 게 현실이다. 우리네처럼 한 주에 7명씩 뽑히는 로또나 기대하는 수밖에. 그래도 성공의 사다리에 대한 욕심을 저버릴 수 없어, 주식투자에 나서지만 어디 개미들이 소액투자로 그런 막대한 성공을 거둘 수는 없는 법이다. 주식시장이라는 도박판은 결국 돈많은 투자자가 항상 이기는 법이다.

 

리아와 미셸 부부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하나의 강이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아이를 낳는 것이다. 미셸은 무척이나 아이를 가지고 싶어 하지만, 리아는 그런 남편 미셸의 바람을 저버리고 몰래 피임약을 복용한다. 물론 이에 동조자는 내털리다. 후반에 가서 그 사실이 밝혀졌을 때, 미셸은 내털리에게 전화해서 화를 낸다. 뭐 그렇게 가는 거지.

 

이 둘에 비해 부수적인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필릭스 쿠퍼와 네이선 보글의 비중은 상대적으로 빈약하다. 아니 보다 더 솔직하게 말한다면 내털리(키샤)와 나머지들의 이야기라고나 할까. 필릭스나 네이선 모두 약쟁이라는 어두운 과거를 털고 새출발을 원한다. 필릭스는 새로운 애인을 만나 과거를 일거에 청산하려다가 그만 어이없는 사고로 무지개다리를 건넌다. 제이디 스미스는 앞으로 선행을 하겠다고 마음 사람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점을 꼬집고 싶었던 걸까.

 

자신의 일탈이 남편 프랭크에게 드러난 내털리가 무작정 집을 나섰다가 만난 이가 바로 학창 시절 친구였던 네이선이었다. 내가 보기에 필릭스보다 더 문제가 많은 인간이 바로 네이선이었다. 자신이 노숙자라는 사실을 성공한 변호사 내털리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네이선. 그에게 과연 새출발할 의지가 있을까 싶을 정도다.

 

성공이 오롯하게 자신이 가진 것으로 이루어진다고 믿는 신자유주의자들에게 <런던 NW>는 어쩌면 하나의 복음처럼 받아들여질 지도 모르겠다. 뿌린 대로 거두리라는 문구처럼 말이다. 순간의 즐거움 대신, 미래의 성공을 위해 이를 악물고 노력한 내털리 블레이크 같은 변호사야말로 각박한 각자도생의 시대를 상징하는 그런 인물이 아니었던가. 리아와 필릭스(역설적이게도 그 이름의 뜻이 행운아라고 하던가) 그리고 네이선은 모두 그런 경쟁에서 낙오한 인물들이다. 그러니 작금에 그들이 보여 주는 삶의 모습들은 마땅한 것이라고 말할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제이디 스미스는 그런 엄청난 성공을 거둔 내털리/키샤 같은 인물도 실제 삶에서 행복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방점을 찍는다. 오히려 내털리의 남편 프랭크는 리아와 미셸 부부가 자신들보다 더 행복하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행복이란 물질의 유무와 상관없이 상대적이란 말일까? 에이 설마 그럴 리가.

 

키샤 블레이크에게 성공하기 위한 조건 중의 하나는 개명(改名)이었다. 흑인이나 여성이라는 문제는 그녀에게 장애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름은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나중에 콜드웰 사람들을 만났을 때, 그들은 내털리를 키샤로 기억한다. 노력에 의한 신분이나 계급적 상승도 사람들의 기억마저 바꿀 수는 없다는 말일까.

 

<런던 NW>를 다 읽고 나니, 미루던 숙제를 마친 듯한 그런 느낌이 들더라. 제이디 스미스 작가의 에세이 모음이 그렇게 좋다고 하던데 그 책은 나오지 않나. 그리고 아울러 5년 전에 발표된 마지막 소설 <스윙 타임>도 빨리 번역되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게 원서로 453쪽이라고 하니 분량이 상당한 모양이다. 일단 그 때까지 아디오스, 제이디 스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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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이방인의 산책
다니엘 튜더 지음, 김재성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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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은 자고로 외로운 법이다. 오래전 이방인 생활을 하던 시절에 느꼈던 바이다. 아는 사람 하나 없고, 홀로 지내다 보면 참 벼라별 생각이 다 들곤 했다. 그 땐 진짜 시간이 넘쳐흐른다고 생각했었는데 되돌아보면 그 시간을 잘 활용하지 못했던 것 같다. 뭐 그렇게 가는 거지.

 

영국 출신 이방인 다니엘 튜더와의 만남은 오래 전 그의 첫 번째 책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책은 다 읽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왜 다 읽지 못했을까? 궁금했다. 이번에는 다 읽어야지 하는 마음이 우선 들었다. 이방인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한국에 대한 단상 그리고 이런저런 삶의 양태와 사유들이 어디서나 사는 건 다 그렇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세계에서 알아주는 유명대학 옥스퍼드 출신의 이방인은 저널리스트로 한국을 찾은 모양이다. 그리고 한국에서 아주 다양한 경험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기업에 다니던 시절, 주말 7시에 등산가니 나오라는 말에 식겁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는 분명 이기주의와 개인주의는 다른 거라고 분명하게 선을 긋는다. 근대화에 성공한 한국에서 그런 이기주의와 개인주의 구분은 의미가 없다. 직장상사는 무소불위한 권력의 화신이다. 까라면 깐다의 은근한 비판이라고나 할까. 그래도 그는 이방인이니 봐주지, 같은 얼굴을 한 이들에게 자비는 존재하지 않는다.

 

대처리즘의 세례를 받은 글쓴이의 아버지 역시 신자유주의 치하에서 역시 각자도생이 최고라는 프로파간다를 받아 들였지만, 정작 당신이 실직되고 자존감이 떨어지면서 국가 공동체의 혜택을 많이 받은 대표 중의 하나가 되었다고 저자는 증언한다. 이제는 희미해져 가는 공동체 의식의 부활이야말로 삶에 있어 중요한 핵심 중의 하나라는 전도에 그만 항복하게 된다. 초코파이 선전에나 나올 법한 정에 대한 이야기는 또 어떤가. 조금은 지저분하고 불편하지만, 이 있었던 공간들은 죄다 재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삭제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정감 어린 공간들이 철거된 후에 그 곳을 채우는 것은 천편일률적인 맛과 스타일의 프랜차이즈 카페와 식당들이다. 우리의 이방인은 우리에게 그런 게 좋냐고 묻는다. 이방인에게 에 대한 레슨을 받게 될 줄이야. 그가 말한 아현동으로 대표되는 공간의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지만... 다음 기회를 엿보자.

 

이방인의 차별과 모욕에 대해서도 저자는 솔직한 고백을 보여준다. 자신의 고향이 아닌 타지에 가서 정착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기술은 바로 그 동네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의 구사다. 이방인은 솔직하게 고백한다, 자신이 아무리 한국말을 하더라도 자신보다 태생적으로 잘하는 닝겡들이 최소한 5천만 명은 된다고. 문득 그를 포함한 이방인들에게 조금은 따뜻한 시선을 보내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 역시 강대국 출신의 백인들에게 우호적인 시선을 잘 알고 있다. 너무 솔직해서 더 정감이 간다고나 할까. 바로 이거지.

 

좀 더 거시적인 차원에서 우리 인류에게 자연이 왜 필요한지 그리고 점점 타인과의 관계 맺기에 부담스러워 하는 현상에 대해서도 충실한 분석을 보여준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빛처럼 빠른 속도로 반응하는 전자 기기의 메시지를 더 선호하게 됐다. 낯선 이들과의 대화는 기피하게 됐다. 카톡도 좋아하지만, 역시 진정한 관계는 대면에서 비롯된다는 나의 생각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물론 요즘 같은 코시절에는 불가능한 이야기지만 말이다.

 

사실 다니엘 튜더가 지적하는 대로 관계에는 수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사람과 만나기 위해서는 시간과 돈이 필요하다.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만나지 않는다는 건, 불행하게도 그 사람의 우선순위에서 친구나 지인에게 낼 시간이 없다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이 정말 원한다면, 어떻게든 시간을 내서 만날 테니까 말이다. 그러니까 내 말은 의지의 문제라는 것이다. 예전에 유럽 여행에서 만난 동생의 결혼식 초대를 받았는데, 신랑 말고는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예식장에 가려니 그렇게 꺼릴 수가 없더라. 그런데 그 마음을 접고 갔다 오니 어찌나 기분이 좋던지.

 

아 초반에 외로움과 고독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했었는데, 현대인들이 점점 더 관계에서 오는 친근함을 원하지만 또 동시에 그런 관계 설정을 위한 투자에는 인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내가 감정의 일방통행이라고 생각하는 안아주기 같은 서비스들이 창궐하는 게 아닌가 싶다. 얼마 전, 작고한 김광석의 목소리를 샘플링해서 인공지능이 김범수의 <보고 싶다>를 부르는 텔레비전 프로그램 광고를 보았는데 그야말로 소름이 끼치더라. 한편으로는 너무 똑같은 고인의 음색에 신기하면서도 아니 어느새 이렇게 기술이 발전했을까? 앞으로는 또 어떤 방식으로 우리네 삶을 바꿀까하는 노파심이 불쑥 들었다. 지금도 버거킹에 등장한 키오스트 주문대 때문에 연세드신 분들이 주문을 포기하고 발걸음을 돌린다고 하지 않은가 말이다. 누군가의 편리함이 또 누군가의 실직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 다시 한 번 놀라게 된다.

 

우리가 사는 지구별에 언젠가 고별하고 소멸해야 할 존재인 나의 죽음에 대한 자세도 마음에 들었다. 죽음이라는 소멸을 거부하고 영생불사가 과학의 힘으로 아주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현실이 저만치 다가와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아니 영사불사는 아니더라도 수명연장의 꿈은 어느 정도 현실화되지 않았던가. 하지만 글쓴이의 할머니처럼 치매에 걸려 사랑하는 이들을 알아 보지 못하며 빈껍질 같은 그런 삶을 살고 싶지는 않다. 그렇다고 무용을 전공한 다니엘 어머니의 말처럼도 싫고. 그저 적당하게 살다가 가면 좋지 않을까라고 생각한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그렇다면 과연 나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일까라는 생각에 도달한다. 뭐 그것도 어떻게 되겠지, 내가 원한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글쓴이의 말처럼 삶의 어느 부분들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이 아닌가.

 

길게 돌아왔다. 글쓴이가 말하고 싶은 건 우리가 외로움 공장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외로움을 어떻게 달랠까 생각해 본다. 우리 인간이라는 종은 기본적으로 사회적 동물이다. 21세기 문명은 인류 협동의 소산으로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런 인간들이 종래의 공동체 정신을 부인하고, 혼자 사는 게 장땡이라고 생각하는 건 옳지 않다. 노년의 삶을 위해서도 인간관계는 반드시 필요하다. 사회생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직장에서 은퇴 또는 해고되었을 때, 그 빈자리를 어떻게 채운단 말인가. 지금부터 준비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다시 한 번 나에게 묻는다. 외로움을 어떻게 달래느냐고. 외롭거나 심심할 때면 나는 책을 읽는다. 그거면 됐다. 적어도 지금으로서는.




[뱀다리] 홋타 요시에 작가의 <라 로슈푸코> 전기를 읽는 중이라 그런지,

책의 도중에 만난 프랑수아 라 로슈푸코의 <막심>에서 인용한 문장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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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22 16: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삭매냐 2021-01-26 01:00   좋아요 0 | URL
왠지 모르게 공감하게 되네요...

그 ‘정‘은 정말 깨끗하고 훤한
곳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유니콩
같은 것이 아닐까 싶네요.

그동안 팔린 초코파이로 지구를
몇 바퀴는 돌릴 수 있다고 하던데
이제는 정말 사양길인가 봅니다.

겨울호랑이 2021-01-25 21: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영국 출신의 이방인이라고 하시니 sting의 <Englishman in New York>이 생각나네요^^:)

레삭매냐 2021-01-26 01:18   좋아요 1 | URL
말씀 듣고 나니 정말 그렇네요.

스팅의 그 노래는 처음 들었을
때부터 반한 곡이었답니다.

같은 앨범에 들어 있는 <Sister
Moon>도 참 좋습니다.

han22598 2021-01-26 03: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방생활로 그나마 사람다운 생각을 하고 살 수 있는 일인 여기 있습니다. 그 전의 나를 생각하면 끔직합니다.

레삭매냐 2021-01-26 19:21   좋아요 0 | URL
이방인으로서의 외로움이란...
정말 -

지나간 뒤에 생각해 보면 그런
적이 있었나 싶지만, 그 시절에
는 참 그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