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독일인 이야기 - 회상 1914~1933
제바스티안 하프너 지음, 이유림 옮김 / 돌베개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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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기다림 끝에 결국 중고서점에서 만난 책이다. 기다리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제바스티안 하프너의 <어느 독일인 이야기>. 내가 지금까지 만난 저자의 책 중(4)에 최고였노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참고로 올해 만난 26권의 책 중에서도 단연 최고였다. 연간 베스트로 꼽아도 좋을 듯 싶다.

 

7세 소년 하프너에게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이었던 1차 세계대전은 하나의 놀이였다. 여름 휴가를 지내던 소년의 가족은 서둘러서 베를린으로 돌아와야 했다. 전쟁 초기, 연전연승하며 프랑스군을 거세게 몰아붙이던 시절 소년과 또래들 누구나 할 것 없이 전쟁 전문가가 되었다. 피와 살이 튀는 전쟁의 실체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도 못한 채 말이다. 매일 후방에 게시되는 전황보고서가 전하는 환상에 젖어 있던 독일 시민들은 4년 뒤에 전쟁에 패한 것도 아닌데 진 사실을 갑자기 강요받는다.

 

반란과 혁명으로 이어지는 대혼란기 속에서 카이저는 퇴위하고, 바이마르 공화국이 들어섰다. 지리한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도래했지만, 이미 다음 전쟁을 위한 불온한 움직임들이 포착되고 있었다. 15년 뒤, 합법적으로 국가 권력을 장악하게 되는 국가사회주의자 다시 말해 나치들은 이미 우파 테러조직으로 그 전신을 드러냈다. 하프너는 초반에도 언급했다시피 거시적인 차원에서의 역사가 아닌, 비극의 시대를 체험한 한 소시민의 자격으로 자신의 시대를 증언한다. 바로 그 점이 <어느 독일인 이야기>의 귀중한 가치를 역설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전후 혼란한 시기에 어쩌면 독일이야말로 붉은 혁명이 일어날 만한 가장 적합한 조건의 나라가 아니었을까? 하지만 대다수 시민들은 그런 혁명을 원하지 않았고, 위정자들은 폭력을 동원해서 일체의 불온한 움직임들을 분쇄하기에 이르렀다. 그 와중에 그 유명한 로자 룩셈부르크가 살해당했으며, 혁명 조직들은 우파 폭력조직의 잔혹한 테러 앞에 와해되었다.

 

그 다음에는 1923년 하이퍼인플레이션에 앞선 흥청거리던 시절이 있었다. 한 마디로 말해 투기가 난무하던 그런 시절이었다. 일개 고등학생들도 주식 시장에 뛰어 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왠지 최근 과열된 우리 주식시장이 연상되었다. 이십대 초반의 은행장이 등장하는 등 그야말로 기존의 가치와 질서들이 한 번에 무너지는 그런 아노미적 시대의 전형이라고나 할까.

 

프로이센 고위 관료인 저자의 아버지는 저자가 얌전하게 제도 교육권 아래 교육을 받은 다음, 사법시험을 치르고 판사나 변호사가 되길 희망했다. 아버지는 자유주의자로 일체의 혁명적 움직임을 혐오했다. 청년 하프너 역시 그의 영향 때문이었을까, 청년다운 패기 없이 아니면 독일 민족성을 따라 체제에 순응하는 모습을 보인다. 어쩌면 하프너와 아버지의 관계에서 나치가 소리 없이 부상하고, 권력을 잡게 되는 과정에 대한 알레고리가 담겨 있는 지도 모르겠다.

 

사실 아돌프 히틀러가 1923년 뮌헨의 맥주홀 폭동으로 국가권력 전복을 시도했을 때만 하더라도, 나치는 허접한 지역 조직이었을 뿐이었다. 그로부터 십년이 지나 갖은 간계로 그들이 권력을 잡고 궁극적으로 독일 민족을 패망으로 몰고 가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바로 그런 독일 제국 내부의 실상에 대한 하프너의 상세한 리포트야말로 역사적 가치를 가진 기록이다. 우선 정치가들이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 위정자들의 무책임한 방임이 무주공산이 되어 버린 정치무대에 나치의 부상을 도왔던 것이다.

 

프랑스 사람들이나 영국 사람들과 달리 특별한 취미 생활이 독일 사람들에게는 없었다는 점도 저자는 예리하게 짚어낸다. 물론 철학이나 사유 혹은 다른 예술 방면에서도 게르만 민족은 특출난 재능을 보였었다. 하지만 개인의 취미생활보다는 프리데리쿠스 이래 형성된 집단주의적 성향은 체제에 순응하는 시민들을 양성하게 되었다. 급격한 산업화와 보불전쟁의 승리로 유럽의 신흥강국의 자리에 오른 다음, 판단 착오로 영국-프랑스를 상대로 한 전쟁에서 패배하고 막대한 전쟁 배상금까지 지불하게 된 수모를 당하게 독일 사람들은 민족적 수치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누구라도 내재된 불만에 불만 당겨준다면 총화된 에너지를 바탕으로 다시 한 번 부흥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그들 내부에 존재하지 않았을까.

 

흥청거리던 1920년 초반은 예상하지 못한 하이퍼인플레이션으로 파산이라는 청구서를 받아들었다. 세상에 알려진 것과 달리 이런 하이퍼인플레이션으로 인한 시기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는 게 저자의 진단이다. 같은 해 10월 렌텐마르크의 등장으로 일단 급한 불은 끌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사회경제적 현상으로 하프너의 아버지 같이 가장 성실하게 국가와 사회에 봉사해온 이들이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대신 이번에도 막대한 빚을 내어 투기에 나선 이들만 배를 불리게 되었다. 계속되는 이런 일련의 사회적 부조리는 나치라는 괴물이 등판할 수 있는 최선의 무대를 마련해 준 것이다.

 

독일인 특유의 근면성실함이 가장 큰 문제였다. 히틀러와 나치가 연달아 승리를 거두면서, 초반에 나치 혁명에 의구심을 가지고 있던 이들조차 그들의 체제 선전에 넘어가 버렸다. 그들의 조직적 기만 전술과 심리전에 독일 국가 전체가 넘어가 버린 것이다. 국가의 올바른 대의에도 독일 시민들은 맹렬하게 돌진했지만, 반대로 국가가 잘못된 길로 가고 있을 때에도 그들은 방향을 바꾸지 않고 레밍 떼처럼 지도자의 영도를 따랐던 게 가장 큰 실책이었다. 그것도 아주 효과적이고 성실하게 말이다. 그 결과, 히틀러 일당이 최종해결책이라는 미명 아래 유대인 절멸정책을 수행할 때조차 그들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반인류적인 범죄에 그야말로 무엇에 홀린 듯 기계적으로 동참했던 것이다.

 

양심적인 지식인이었던 하프너는 당연히 그런 나치에 동조할 수 없었다. 사법시험을 앞둔 사법 연수생이었던 그는 자신의 눈앞에서 엄정한 프로이센의 법 체제가 조용하게 붕괴되는 것을 목격한다. 히틀러가 국회의사당 방화사건을 빌미로 제국 총리에 임명되면서 1933년 봄과 여름에 유대인들을 차별하는 일련의 가공할 범죄들이 잇따라 벌어진다. 유능한 유대인 대법관을 필두로, 체제에 찬성하지 않는 이들이 강제수용소로 끌려간다. 그 외에도 다양한 불평불만자들이 소리 소문 없이 주위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저자는 만약 이런 일들이 대놓고 공개적으로 처리되었다면 분명 거센 반발을 유발했을 거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런 방식의 공포를 유포하는 방식을 이미 나치 선전기계들은 잘 알고 있었다. 은밀하고 조용하게, 소곤거리는 방식이야말로 가장 효과적이라는 점을 그들을 기가 막히게 이용했다. 나치 제3제국은 이런 식으로 비밀경찰(게슈타포)이 암약하는 경찰국가로 변해갔다. 물론 나치 혁명 초반 돌격대(SA)는 날것 그대로의 폭력을 행사하는 역할을 맡았다. 나중에 보다 세련된 방식의 친위대(SS)가 그 역할을 이어 받았다.

 

히틀러와 나치의 집권으로 위기감을 느낀 현명한 유대인들은 조국을 등지기 시작했다. 하프너의 절친이었던 프랭크 란다우가 대표적인 인물로 등장한다. 문명국가에서 폭력이 횡행하는 야만국가로 변하기 시작한 독일 제국에 더는 남아 있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어떤 이들은 맹렬하게 돌진해 오는 폭력 앞에 자살이라는 방식으로 저항했고, 또 다른 이들은 망명을 선택했다. 하지만, 그동안 자신이 나고 자란 고향을 등지고 아무 것도 보장되지 않은 타국으로 떠난다는 것은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청년 하프너 역시 기괴한 형태로 변해가는 조국의 현실 앞에 좌절하고 정치적 망명을 꿈꾸 시작한다. 같이 스터디 모임을 하던 인물들 중에서도 나치의 주장에 동조하는 이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나름대로 개화된 지식인들이 아니었던가? 히틀러 일당이 날조한 인종주의 이데올로기에 물든 이들은 어떤 말로도 토론이 되지 않았다. 요즘 말로 표현하자면 답정너라고나 할까. 한 때 점잖게 지식과 문화, 예술을 토론하고 향유하던 이들이 적대자로 변하는 과정을 하프너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독자에게 전달한다. 스터디 모임의 몇몇 지인들은 결국 나치 부역자로 변신했다. 그나마 하프너 자신을 비밀경찰에게 고발하지 않을 걸 다행으로 여겨야 했을 정도였다.

 

제바스티안 하프너는 <어느 독일인 이야기>의 수고를 망명지 영국에서 1939년경에 작성했다고 한다. 아직 전쟁이 발발하기 전으로, 여전히 서방 세계를 대표하던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 유화정책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외교정책이나 부분적 영토 할양으로 미치광이 독재자를 달랠 길은 없다는 점을 서방의 지도자들은 몰랐다. 하지만 하프너는 히틀러가 권력을 얻기 전부터 바이마르의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들어줄 수 없는 요구들을 해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한 마디로 독일 민족의 명운을 걸고 도박판에 나선 독재자를 과소평가했던 게 문제가 아니었을까.

 

대부분의 합리적인 독일 시민들은 히틀러와 나치 일당이 헌법의 기능을 정지시키고,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박탈하는 과정에서 어떤 조직적 저항도 보여주지 않았다. 1차 세계대전에서 이루지 못한 최종승리를 위해서라면 어떤 개인의 희생도 감수할 수 있다는 의식이 독일 시민들 사이에 갑자기 팽배하기 시작했던 걸까? 무엇이 잘못되었다고 판단하고 되돌리려고 했을 적에는 이미 늦었던 것이다. 하프너처럼 그런 야만적 시스템 아래서 왜 그들은 자신이 모욕 받고 수치스럽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다수의 그런 이들이 등장해서 저항에 나섰더라면 역사의 수레바퀴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르게 굴러갔을까.

 

제바스티안 하프너가 육성으로 들려주는 그 시절에 대한 이야기는 나에게 많은 생각할 거리들을 던져 주었다. 여전히 미스터리한 아돌프 히틀러의 부상과 권력 장악 그리고 최종 파멸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에 있어 하프너가 저술한 <어느 독일인 이야기>는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하나의 해답을 제시해 준다. 아직 2월이지만, 올해 만난 최고의 책으로 꼽을 만한 저술이다. 책을 읽으면서 기대를 충족시키는 책들이 그다지 많지 않은데, 이 책이 이룬 성취는 대단했다. 책을 그렇게 많이 읽어도 마음에 쏙 드는 책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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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1-02-15 14: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우, 올해라야 이제 2개월 반 밖에 안 지났는데
벌써 26권이라굽쇼? 대단하네요.
연말이 되면 몇권을 만나시게 되나요?
암튼 홧팅입니다!^^

레삭매냐 2021-02-15 15:40   좋아요 1 | URL
아무래도 굽시니스트 선생의 만화와
이러저러한 그래픽 노블로 꼼수를
부른 덕분이지효 핫하 ~!

한참 달릴 적에는 300권도 돌파했었
는데 이제는 노쇠하야 -

일단 연초의 목표는 120권이었습니다.

scott 2021-02-15 15: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2021년 매냐님 독서 이력 26권 0=260권! 홧팅!

레삭매냐 2021-02-15 15:41   좋아요 1 | URL
욕심 내지 않고 달리기로 했습니다.

일다가 꼭 연말에 가서 무리하게
되더라구요. 그게 무슨 의미라고 말이죠.

그냥 마음 가는 대로 독서할랍니다.
 
맹인 악사 대산세계문학총서 164
블라디미르 갈락티오노비치 코롤렌코 지음, 오원교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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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들은 영혼을 두들겨 대는 그런 느낌을 주는 책들이 있다. 또 어떤 책들은 내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충격적인 그런 정보를 전달해 주는 책들도 있다. 그렇다면 이번 연휴에 작정하고 만난 블라디미르 코롤렌코의 <맹인 악사>는 어떤 범주에 들어가는 책일까 물어본다. 두 가지 경우에 다 해당하지 않지만, 소설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광대한 우크라이나의 대자연과 삶에서 비극을 만난 이들이 겪는 일상이 잔향을 남기는 그런 작품이다. 읽을 때보다 오히려 다 읽고 나서 더 생각할 거리들을 만드는 그런 책이라고나 할까.

 

블라디미르 코볼렌코, 역시나 처음 들어보는 러시아 작가다. 아니 우크라이나 작가라고 해야 할까. 제정 러시아 시대 사람이니 아무래도 러시아 사람으로 분류해야지 싶다. 우크라이나 서부의 지토미르 출신으로 수도 모스크바의 페트로프 농림업 아카데미 출신이라고 하니, 아무래도 지식인 그룹이 아닐까 싶다.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인민주의 운동에 투신해서 시베리아에 유형을 두 번이나 살았다지. 나중에 복귀해서 작품 활동을 전개했고, <맹인 악사>는 저자의 인도주의 스타일을 반영하는 대표작이라고 한다.

 

<맹인 악사>에서는 모두 4편의 중단편들이 실려 있다. 첫 작품은 <마카르의 꿈>이다. 타이가 지역 찰란에 사는 시골 농부 마카르가 소설의 주인공이다. 그는 거짓말쟁이에 보드카가 없으면 못사는 주정뱅이다. 왠지 그의 삶에서 신산한 러시아 농민들의 삶의 흔적이 엿보인다. 성탄절 전야에 그 좋아하는 보드카도 한 병 살 돈이 없는 마카르는 장작 다섯수레를 담보로 1루블을 땡겨서 보드카를 사서 질탕 퍼마신다.

 

원래 그 보드카는 아내하고 같이 마셔야 하는 술이었는데. 그 결과, 아내에게 내쫓겨 사냥을 위해 놓은 덫에 걸린 여우라고 잡을 속셈으로 타이가로 향한다. 호기로운 타이가행이 우리의 주인공 마카르의 마지막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나. 죽기 전에 친하게 지내던 이반 신부의 안내로 대심판관 토이온 앞에 선 거짓말쟁이이자 주정뱅이 마카르는 심판의 저울대 앞에 선다. 누가 봐도 마카르의 운명은 빤해 보였지만, 예상과 달리 토이온 앞에서 조목조목 자신을 변론하는 마카르. 저자 코롤렌코는 마카르를 통해 러시아 인민들에게도 자신들만의 목소리가 있다는 사실을 지식인 계급에게 알리고자 했던 모양이다. 오히려 부자들이 더 천국에 들어가기 힘들다는 성경의 구절도 있지 않은가.

 

저자의 자전적인 스토리가 담긴 것으로 추정되는 <나쁜 패거리>에는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상실감에 시달리던 주인공 소년이 마을에서 추방된 소위 나쁜 패거리와 어울리게 되는 과정을 담겼다. 19세기 러시아 역사에 대해 일천한 관계로 당시 러시아 민중들의 사회경제적 삶에 대해 잘 모르지만, 저자가 인도하는 방향을 따라가 보면 기득권 계급에 의해 배척된 일명 노숙자나 부랑자들은 당장의 끼니조차 해결할 수가 없었다. 섬의 폐허가 된 성에 주거하던 일단의 무리들은 빌런 야누슈의 소탕 작전으로 쫓겨나고, 지역 사회의 안정을 위협하는 세력으로 변신하기에 이른다. 소외와 배척이 어떤 사회적 문제들을 야기하는지 저자는 지적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주인공 바샤는 무리들의 리더 격인 귀족 틔부르치 드랍의 아이들은 발렉 그리고 마루샤와 어울리게 된다. 기묘하게 구성된 사회적 계급제도 때문에 어른들 간의 교류가 이루어질 수 없다면, 새로운 세대인 아이들 간의 교류를 통한 신분제 타파의 메시지까지 간다면 내가 너무 나간 걸까? 바샤는 자신에게 씌워진 부랑아, 나쁜 패거리의 일원이라는 오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소한 방종과 자잘한 악덕 그리고 부패를 지닌 틔부르치 집단과의 교류를 마다하지 않는다. 동생 소냐의 인형 소동에 이은, 소녀 마루샤의 죽음으로 갱스터 활동은 중단된다.

 

다시 한 번 우크라이나의 울창한 타이가를 연상시키는 <숲이 술렁거린다>는 폴레시예 지방의 전설이라는 타이틀로 독자를 숲으로 인도한다. 남부 우크라이나와 폴란드 지방의 지주/귀족이라는 판은 로만에게 옥사나를 아내로 얻어 주려고 부단한 노력을 한다. 어째 설계부터 파국을 향한 무언가가 슬쩍 비치는 느낌이다. 거친 대자연에 사는 이들은 어쩌면 난폭할 수밖에 없도록 창조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명확하게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대강의 윤곽선으로 살펴 볼 때 판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일단의 사건에서 훗날 러시아 혁명으로 이어지는 반역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 이제 표제작인 <맹인 악사>를 만날 차례가 되었다. 어쩌면 앞선 세 개의 이야기들은 본 프로를 위한 사전 준비작업이었는지 모르겠다. 지주의 아들 표트르 포펠스키는 날 때부터 저주 받은 아이였다. 이유는 그가 맹인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시각적 심상을 느껴 보지 못한 맹인은 꿈을 꿀 수 없다는 사실도 이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됐다. 제목을 다시 한 번 살펴 본다. ‘맹인 악사. 그렇다면 좀 클리셰이 같긴 하지만, 우리의 표트르가 맹인 답게 타고난 청력을 바탕으로 악사가 된다는 말일 게다.

 

코롤렌코 작가는 표트르가 아이에서부터 청년으로 성장하는 과정에 막심 야첸코라는 한 때 열렬한 갈리발디주의자로 이탈리아 혁명운동에 참여했다가 불구가 된 소년의 외삼촌을 전진 배치한다. 항상 목발을 짚고 다니는 한 시절 혁명가는 소년의 성장기에 있어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소년 표트르에게 진짜 영향을 미친 사람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바로 마무 출신 이오힘이었다. 우크라이나 스타일의 나무 피리 연주의 대가였던 이오힘은 어린 표트르에게 음악으로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다. 이에 소년의 어머니 안나는 마치 배틀이라도 하듯, 물 건너 오스트리아에서 피아노를 공수해온다. 그리고 젊어서 배운 현란한 피아노 기술을 동원해서 이오힘에게 도전장을 던졌다. 초반 승부는 소년이 더불어 자라는 우크라이나의 대자연의 모습을 담은 이오힘에게 기울었으나, 장애를 가진 자녀의 어머니였던 안나 역시 만만치 않은 맞수였다.

 

작가는 소설의 상당 부분을 소년에서 청년으로 성장해 가며, 자신의 존재 의미에 회의하는 표트르의 내면 묘사에 할애한다. 보통의 청소년들도 성장 과정에서 숱한 존재론적 질문과 마주하게 되는데, 가뜩이나 예민한 성격의 보유자인 표트르 포펠스키는 오죽했을까. 그나마 그에게 다행이었던 점은 지주 출신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스승을 자처하는 외삼촌 막심의 후원이었다. 이웃 소녀인 에벨리나가 합류하면서 표트르가 느끼는 지평의 세계는 확장에 들어간다.

 

어느새 청년이 표트르의 고민은 실존적이다. 나는 왜 존재하는 것일까? 자신의 시력 장애가 저주 받은 것이며, 악의적일 지도 모른다는 유추에 도달하기도 한다. 결국 인간은 자신이 접하는 세계로부터 자신의 존재를 규정하기 마련이다. 제 아무리 주변사람들이 표트르가 사랑받는 존재라고 말해 봐야, 자신의 각성 이전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말잔치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물질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교활한 수도원 종지기 예고르가 반면교사가 아닐까 싶다.

 

보이지 않는 저주를 받은 자신보다 거리에서 구걸하는 걸인들이 더 행복하다는 그의 생각은 결국 상대적인 게 아니었을까? 가난이 얼마나 사람을 비참하게 만들 수 있는지 추체험하지 못한 청년 표트르는 결국 외삼촌 막심과 짜고 키에프로 피아노 유학 간다는 핑계로 대고, 걸인 패거리에 합류해서 거리의 삶에 도전한다. 훗날 이 사실을 알게 된 표트르의 엄마 안나는 길길이 날뛰지만, 마침내 길고 회의적이었던 어둠의 터널을 지나 빛의 세계에 진입할 준비를 마친 표트르의 모습에 안도하기도 한다.

 

결국 인도주의 작가답게 코롤렌코는 <맹인 악사>의 엔딩을 해피엔딩으로 마무리짓는다. 에벨리나와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순간 그는 빛을 본 것이다. 그것은 사나이에게 구원이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피아노 연주로 구원의 메시지 전파에 나선다.

 

후반으로 갈수록 동어 반복과 주인공 표트르 포펠스키 내면세계의 쟁투가 좀 짜증이 나기는 했지만, 19세기 역동적인 역사의 움직임이 꿈틀대던 러시아-우크라이나로 떠난 여행은 만족스러웠다. 계획대로 이번 명절 연휴 동안에 책도 다 읽고, 리뷰도 쓸 수 있었다. 그것으로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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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1-02-14 22:3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연휴에 읽으려고 샀지만...! 못 읽었습니다. ㅎㅎ

레삭매냐 2021-02-15 09:05   좋아요 3 | URL
염통을 쫄깃하게 만들 정도의
수작은 아니지만, 잔잔바리로
삶과 존재 이유에 대해 자꾸만
생각해 보게 해주는 그런 책이었습니다.

고.고.씽.

scott 2021-03-05 15: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매냐님 이달의 당선 ! 추카!추카!
맹인 악사 주섬 주섬 장바구니속으로~@@
 
그림으로 보는 십자군 이야기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
시오노 나나미 지음, 송태욱 옮김, 귀스타브 도레 그림, 차용구 감수 / 문학동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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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이라 본가에 갔다가 여러 권들을 만났다. 여담으로 올해가 도끼 선생 탄생 200주년이라고 하는데 사서 쟁여둔 도끼 전집 가운데 <노름꾼들><가난한 사람들>도 데려왔다. 아직 올 한 해가 많이 남아 있으니 천천히 읽어볼 계획이다.

 

저자의 극우 본색이 드러난 이후, 애써 피하고 있었는데 결국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었다. 한 시절에는 참 열심히도 읽었던 작가였는데... 하긴 어떤 작가하고도 그렇게 손절을 했었지. 왠지 작가의 주석보다도 귀스타브 도레의 에칭 판화에 더 눈길이 가더라. 그냥 도레의 판화들을 보고 싶어서 이 책을 다시 읽은 것으로 하자.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의 첫 번째 충돌이었던 200여년에 달하는 십자군 전쟁을 도레 선생의 판화로 요약한 책이라고나 할까. 제목에 들어가 있는 보는은 시각적 이미지를 상징하는 것일 테고, 후자의 이야기는 보통 청각의 그것이 아닌가. 한 마디로 시각과 청각을 모두 잡겠다는 저자의 계획이 아니었는지.

 

중세 십자군 전쟁은 교황와 은자 피에르라는 희대의 선동꾼들의 프로파간다로 시작되었다. 우선 셀주크투르크가 점령한 성지 예루살렘에 대한 소문들이 옥시덴트로 퍼지면서, 통신과 정보가 취약했던 서방 사람들이 오리엔트 사람들이 성지 순례에 나선 자기네 그리스도교인들을 핍박한다고 생각하고, 신이 원한다는 프로파간다와 성지탈환 이데올로기에 매몰되어 분연히 무장하고 동방으로 향했다.

 

기사와 제후들로 구성된 정예 십자군들도 있었으나. 그렇지 않은 민중 십자군들도 다수 있었던 모양이다. 전쟁을 치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 병참과 보급인데, 그들은 그런 준비 하나 없이 동방으로 향했다. 그 와중에 동유럽에 사는 그리스도교인들과 충돌을 빚기도 했다. 생전 알지도 못하는 민중 십자군들이 들이 닥쳐서 자신들의 식량과 재산을 요구한다면 누가 선뜻 그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것을 내준단 말인가. 처음부터 예고된 충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브라티슬라바 공방전은 바로 그런 역사의 단면을 예리하게 짚어낸다.

 

어찌어찌해서 동방에 도착한 십자군 부대들은 다마스쿠스 공략을 필두로 해서 결국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8차례에 걸친 십자군 원정 가운데 가장 성공적인 키에스가 바로 1차 십자군 원정이었다. 여러 제후 가운데 보에몽의 활약이 가장 독보적이었다.

 

십자군들의 성공 배후에는 모래알처럼 흩어진 이슬람 세력의 내부 문제도 한몫했다. 하지만, 쿠르드인이자 위대한 살라흐 앗 딘(살라딘)이 등장하면서 지하드의 깃발 아래 하나로 뭉친 이슬람 세력은 마침내 오리엔트의 십자군 국가들을 상대로 매서운 반격에 나서게 된다.

 

하틴 전투에서 십자군을 상대로 결정적 승리를 거둔 살라딘은 88년 만에 그리스도교도들에게 빼앗긴 무방비 상태의 예루살렘을 탈환하는데 성공한다. 이에 위기를 느낀 옥시덴트에서는 다시 한 번 십자군을 편성하기에 이른다. 흐지부지 끝난 2차 십자군 원정에 이어 3번째 원정에서는 드디어 살라딘의 맞수 잉글랜드의 사자심왕 리처드가 역사의 무대에 등판한다.

 

극강의 전투력을 자랑하던 리처드는 살라딘의 대군을 상대로 각지에서 분전했다. 십자군 원정에 참가한 다른 왕들과는 달리, 삼십대의 최전성기에 리처드는 최전선에서 이슬람군을 상대로 예의 용맹함을 과시했다. 애를 먹이던 아코 공방전에서도 뛰어난 실력을 과시하면서 결국 아코를 정복했다. 그전에 독일 황제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가 터키의 살레프강을 건너던 중에 익사하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아무리 전쟁 중이라고 하지만 어이 없는 이들이 수시로 벌어진 모양이다. 리처드는 아코 공방전에서 이슬람 수비대에게 투항하면 살려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그의 약속을 믿고 이슬람 병사들을 투항한 뒤 모두 처형했다. 서방이 자랑하는 기사도의 본질이 고작 그런 거였단 말이지. 결국 자신도 귀국길에 같은 그리스도교 제후에게 포로로 잡혀 고생을 하는 봉변을 겪기도 했다. 그래서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했던가.

 

베네치아 측의 농간으로 네 번째 십자군은 성지탈환이 아닌 콘스탄티노플을 목적지로 삼았다. 내분에 휩싸였던 비잔틴 제국은 결국 십자군의 공격에 항복하고 말았다. 소년십자군 만큼이나 어처구니 없는 일이 아니었다. 옥시덴트 국가가 참여하지 않은 순수한 오리엔트 영주들과 헝가리와 폴란드 그리고 노르웨이 출신 기사들만 참가한 5번째 십자군 운동도 별 다른 성과 없이 끝났다.

 

독일의 프리드리히 2세가 주력으로 참가했던 6번째 십자군 원정은 비교적 괜찮은 성과를 올렸다. 하지만 여전히 교황권의 위력을 떨치던 시절이라 교황의 승인을 받지 못한 십자군 원정으로 인정을 받지 못했다. 프랑스의 루이 9세가 중심이 되어 실행된 7-8번째 십자군 원정은 그야말로 재난의 연속이었다. 살라딘의 아이유브 왕조에 이어 이슬람 세계의 실권자가 된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의 술탄을 상대로 한 전략적 목표는 옳았지만, 카이로로 가는 다미에타를 공략한 뒤 현지의 나일강의 지형을 고려하지 못한 십자군들은 만수라에서 대패하면서 루이 왕이 포로로 잡히는 불상사가 벌어지기도 했다.

 

결국 모든 그리스도교들을 지중해로 몰아넣겠다는 이슬람 측의 공언은 현실화가 되었다. 서방의 지원이 끊긴 상태에서 해안의 몇몇 도시들만 가지고 사방의 이슬람 세력에 둘러쌓인 상태에서 그리스도교인들의 생존은 불가능했다. 그리고 그들은 생존을 위해서라도 계속해서 싸울 수밖에 없는 그런 운명이었다. 서방의 십자군들처럼 서방에 그들을 위한 토지나 땅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책의 말미에 흥미로운 역사적 사건들을 나열한다. 1453년 오스만투르크의 젊은 술탄 메메드 2세의 콘스탄티노플 공략전으로 두 세계는 다시 한 번 맞붙게 되었다. 1471년의 레판토 해전에서 옥시덴트는 서진하는 이슬람 세력에게 바다에서 타격을 가하고 그들을 저지하는데 성공했다. 1492년에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마지막 남은 이슬람 세력을 축출했다. 이렇게 수백 년을 아우르는 서방과 동방의 격렬한 대결이 달랑 200여쪽으로 갈무리됐다.

 

독서가 지지부진할 때는 이렇게 가벼운 책들을 읽으면서 슬럼프 탈출을 하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뱀다리] 예전 리뷰를 추적해 보니 10년 전에도 내가 리뷰를 썼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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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교본
베르톨트 브레히트 지음, 배수아 옮김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11년 2월
평점 :
절판




결국 한 번 산 책을 언제고 다시 읽게 된다. 팔거나 누구에게 주지 않고 가지고 있다면 말이다. 신축년 설날에는 그런 책 두 권을 만났다. 하나는 알베르토 모랄레스 아후벨의 재창종한 대니얼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 그리고 다른 하나는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전쟁교본>이다. 두 책 모두 그래픽이 주를 이룬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좌파 지식인이었던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전쟁교본>이 세상의 빛을 보기까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그가 조국으로 선택한 사회주의 동독에서도 수차례 우여곡절이 있었던 모양이다. 자본주의 시스템은 물론이고, 사회주의에 대해서도 신랄한 비판을 마다하지 않는 브레히트의 존재감이 아마 신생 동독 정부 입장에선 그야말로 계륵 같은 존재가 아니었을까 싶다.


 



우선 독일 패망의 단초를 제공한 아돌프 히틀러와 그 일당에 대해 신랄한 4행시로 응수하다. 3제국의 총통은 물론이고, 1차 세계대전의 전쟁영웅이자 제국의 2인자였던 괴링을 도살광대라는 별명으로 부른다. 그에 버금가는 악당으로 프로파간다의 명수 선전상 괴벨스도 마찬가지다. 나치스의 핵심이었던 이 세 명 모두 자신들이 인류에 저지른 죄악에 대한 정당한 처벌을 받지 않고 자살이라는 간악한 방식으로 피해 나갔다. 사진 28에 등장하는 세 악당들의 종말은 정말 말 그대로 바그너적이었다.

 

히틀러가 자랑하는 다섯 명의 원수들과 기갑총감 하인츠 구데리안의 사진은 또 어떤가. 페도르 폰 보크, 후고 슈페를레, 칼 폰 룬트슈테트, 에르빈 롬멜, 지그문트 리스트와 하인츠 구데리안이 30번 사진에 등장한다. 전후 조작되어 서방 세계에 널리 알려진 것처럼, 독일 국방군은 민간인 학살 같은 전쟁범죄와는 상관 없이 오직 명령에 따라 전투에만 충실했다는 신화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이들은 히틀러의 수하로, 총통의 명령을 충실하게 수행했다. 각처에서 발생한 전쟁범죄는 부수적인 피해가 아닌, 처음부터 계획된 플랜이었다. 그래서 브레히트는 자신의 독설이 담긴 4행시로 이들을 여섯 명의 살인자들이라고 간단하게 박제해 버렸다. 대단한 패기가 아닌가.

 

그렇다면 히틀러의 파시즘에 대항하는 서방 세계 지도자들에서는 어떨까? 좌파 지식인의 날선 비판은 독일을 꺾은 제국주의자 처칠마저도 저격한다. 우리가 아는 것과 달리 링컨이 연방의 현상 유지를 위해서라면 노예제 존속도 고려했던 것처럼, 몰락해 가는 대영제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히틀러에 이은 숙적 스탈린과의 거래도 마다하지 않았다. 동유럽을 스탈린에게 전리품으로 넘겨준 장본인이 처칠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고집불통 몽고메리가 주창한 마켓가든 작전으로 종전이 길어진 것은 누구 탓을 하리오.

 

히틀러의 전쟁 기도가 완전히 분쇄된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만신창이가 되어 살아남은 독일군 병사들의 초췌한 모습에서 세계대전 초기, 서방에 블리츠크리크(전격전)’로 알려진 질풍노도 같이 폴란드와 프랑스를 석권한 무패신화의 베어마흐트의 위풍당당함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바로 전 해인 194112, 적도 모스크바가 독일군의 침공으로 함락 위기에 처했을 때 소련의 모든 인민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방어전에 돌입했다. 소련군의 매서운 반격으로 독일 전쟁기계들은 첫 패배를 기록했고 400KM나 서쪽으로 후퇴해야 했다. 독일군 170개 사단이 동원되어의 소련의 철과 밀 그리고 석유를 빼앗아 독일 민족의 새로운 레벤스라움을 세우겠다는 총통의 망상은 그렇게 소멸되어 갔다.

 

철저한 약탈 전쟁답게 소련 점령지의 독일군들은 소련 민중들을 수탈하는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소련 아낙에게서 말을 징발하는 장면의 사진을 들여다 보라. 독소전쟁에서 독일군 보급부대는 차량이 아닌 말의 수송력에 의존했다. 그러니 피점령지에서 말을 징발하는 일은 전장에 나간 동료들의 보급을 위해 반드시 필요했다. 반면, 러시아의 광활한 농토를 일구기 위해서 소련 농부들도 밭을 갈 말이 필요했다. 말을 뺏긴 그들이 가만 있을 리가 있나. 이건 생존의 문제였다. 독일 점령군에게 환멸을 느낀 러시아 농부들은 곧 빨치산으로 변신해서 독일군의 후방을 교란하게 될 것이다. 별 것 아닌 사진처럼 보이지만, 이 한 장의 사진에서 이런 다양한 사례들을 유추해 내는 것이 브레히트가 독자들에게 주문한 게 아닐까 싶다.

 

부록인가 해설에 실린 전쟁 후, 미국에서 서유럽으로 유입된 식품에 대한 설명도 짠했다. 수년 간의 전쟁으로 당장 먹을 게 없어진 서유럽 각국들은 미국의 과잉생산된 식품들의 소비처로 전락하게 된다. 먹고사니즘의 으뜸은 바로 먹거리가 아니었던가. 어쩌면 이때부터 미국의 카길 같은 다국적 식품회사들의 다른 차원의 세계 정복이 시작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의 배고픔을 원동력으로 삼아서. 미국에서 실시한 원조 프로그램 덕분으로 카길은 실제로 급성장하게 되었다고 한다.

 

13번 사진의 주인공은 리온 포이히트방어다. 독일계 유대인이었던 포이히트방어는 프랑스 정부의 모든 독일인들은 수용소에 감금되어야 한다는 명령에 의해 님므의 수용소에 갇혔다. 지인들의 도움으로 아내 마르타와 함께 마르세이유에서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거쳐 미국으로 정치적 망명을 시도했다. 그가 만약 수용소에서 죽었더라면 우리에게 소개된 <고야, 혹은 인식의 혹독한 길> 같은 작품도 없었으리라. 그가 저술한 프랑스에서 수용소 생활을 다룬 <프랑스의 악마>라는 책도 있다고 하던데, 그 책 역시 궁금하다.

 

브레히트의 <전쟁교본>에서 가장 충격적인 사진은 아무래도 89번의 수용소에서 죽은 이들의 신발 사진이 아닐까 싶다. 심지어 브레히트가 열심히 달던 4행시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이미지로 받아 들이라는 말일 것이다.

 

진짜 오랜 만에 다시 만난 책이었는데 감동의 여진은 여전했다. 뭐 그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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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2-13 01:3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오오~~~ 레샥메냐님 글 보자마자 이 책 너무 보고싶어서 클릭해 들어갔더니 절판!
우리동네 도서관 가서 보니 없네요.
중고서점 클릭하니 3권이 떠있네요. 주저없이 주문!
설 연휴 끝나면 저에게도 이 책이 옵니다. ^^

레삭매냐 2021-02-13 09:44   좋아요 2 | URL
이 책이 여러 판본이 있는데 워크룸프레스에서
나온 책인 절판이 되었네요.
도서관에도 비치되어 있지 않나 보네요.

정말 오래 전에 사서 읽은 책인데 다시 읽으니
또 새로웠습니다.

원하던 책을 얻게 되면 또 그보다 좋은 일도
없을 것 같습니다.

붕붕툐툐 2021-02-13 11: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보고 그 감동을 느껴보고 싶네용!!(주섬주섬 검색시작!ㅎㅎ)

레삭매냐 2021-02-13 12:12   좋아요 1 | URL
도이치 스타일의 4행시가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브레히트 이 양반, 정말 대단한 것
같습니다.
 
그리스인 조르바 열린책들 세계문학 21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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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이고 읽겠다고 시도했지만 실패한 책들이 있다. 그 중에서 로맹 가리의 <새벽의 약속>은 결국 몇 차례 시도 끝에 다 읽을 수가 있었다. 에릭 홉스봄의 <혁명의 시대>도 마찬가지다.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는 한 번 집어 들었다가 나가 떨어졌다. 그러다가 우연히 너튜브에서 유시민 선생의 <알릴레오북> 짤을 만나게 되었고, 선생이 다룬 책인 <그리스인 조르바>를 다시 펼쳐 들게 되었다. 사실 나는 이윤기 역자의 번역부터 시작해서 숱한 버전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보유 중이다. 이번에도 선택은 역시나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이윤기 역자의 중역을 골랐다. 예전에 빨간책방의 영향 탓이라고나 할까. 이번에 알릴레오에서 정본으로 삼은 책은 이윤기 역자의 책이 아니더라.

 

책에 대한 나의 감상이 중요하기 때문에 알릴레오북을 참조만 하고 건성으로 넘겼다. 주인공 알렉시스 조르바가 모름지기 절대 자유인이라고 하는데, 타인의 생각에 속박되고 싶지 않은 독서인의 기개라고나 할까. 그래도 조금의 정보 정도는 얻어도 되지 않나 자신을 합리화시켜 본다. 이 책이 발표된 것은 1946년이다. 그리고 소설의 배경은 출판으로부터 30년 정도 전인 1916년 정도라고 한다.

 

카프카즈의 그리스인 동포들을 구하러 가자는 절친의 호소를 뒤로 하고 크레타 섬의 갈탄광 경영을 위해 아테네의 외항인 피레우스에서 배에 오르는 35세의 화자. 그는 그곳에서 65세의 알렉시스 조르바와 운명적 만남을 하게 된다. 화자가 니코스 카잔차키스를 투영한 그리스 지식인/먹물의 표상이라면, 뱃사람으로 세상 안해본 일이 없는 남자 조르바는 그야말로 동물 아니 짐승에 가까운 날것 그대로의 이미지를 지닌 남자다. 전자가 실천력이 떨어지는 이상주의자라면, 후자는 오직 현재만 사는 그런 철저한 현실주의 화신 같은 남자다. 시작부터 저자가 준비한 주인공 콤비는 공간을 크레타 섬으로 옮겨 숱한 이야기를 만들어낼 준비를 마친다.

 

단테의 <신곡>을 여행 중에도 손에서 내려놓지 않는 먹물 화자에 비해 소설의 실질적인 주인공인 조르바는 좌충우돌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실천력을 보여준다. 뻔뻔하게 카바레 출신 가수 마담 오르탕스에게 저돌적으로 돌진하는 모습을 보라. 그가 뜯어 먹는 닭고기와 위장에 때려 붓는 포도주는 바로 그런 행동을 위한 연료다. 그가 부불리나라고 부르는 마담 오르탕스를 사랑하는 그 순간만큼은 최선을 다하지 않는가. 왠지 그런 조르바에게서 카사노바의 향기가 느껴지지 않는가.

 

유럽을 주유하며 추억을 쌓은 젊은 지식인이 오지 않은 과거에 집착하는 동안, 우리의 주인공 조르바 씨는 쉴 새 없이 자신의 과거 무용담을 자랑하고 보스를 대신해서 실질적으로 갈탄광의 모든 업무를 해치운다. 자신의 아들 뻘인 보스를 위해 요리도 마다하지 않는다. 신들의 나라인 그리스인이면서도 독신(瀆神)도 두려워하지 않는 면모를 보여주기도 한다. 보스의 서술이 진행될수록 그 어느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자신감 넘치는 조르바가 모습이 현현된다.

 

알릴레오북의 진행자들에 따르면, 진정으로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그 어느 것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고 한다. 근심과 걱정이 바로 우리를 자유롭지 못하게 만드는 핵심 요소들이다. 아마 그 중에서도 최고는 물질적 결핍이 아닐까? 그놈의 먹고사니즘과 일용한 양식을 위해서 우리는 물질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그런 속박된 존재들이다. 게다가 소비만능주의 시대에, 굳이 필요하지도 않는 물건들이 우리네 삶을 풍족하기 위해 꼭 필요하다고 모든 미디어를 동원해서 사방에서 압박을 가하지 않는가. 진정으로 자유를 원하다면 그런 기대와 욕망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하는데 미스터 조르바 같은 배포가 없다면 그건 정말 불가능에 가까운 미션이리라.

 


(문지 원서 버전에서는 "용 아저씨"로 번역이 되어 있다. 난 오그레가 사람 이름인 줄 알았네 그래.)


몇 번이나 초반부를 읽은 덕분에 기시감 때문인지 진도가 쑥쑥 나간다. 화자 오그레에게 조르바는 냉정한 현실주의자인 동시에 연애지상주의자이기도 하다. 동네 청년들을 들썩이게 하는 젊은 과부를 맺어 주려는 그의 시도는 젊은 스토아주의자에게 걸맞지 않는 옷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한 마디로 말해, 사랑을 원하는 이들에게는 그들이 원하는 사랑을 주어야 한다는 게 낡은 에피쿠로스주의자의 신념이었다. 젊은 시절, 터키인들이나 불가리아인들과 격렬한 투쟁을 벌인 자신의 경험을 셰에라자드처럼 오그레에게 들려주며, 모두가 헛된 일이었다고 고백한다. 젊은 시절 발칸 반도는 물론이고 러시아까지 종횡무진 누비며 사랑의 전도사였던 늙은 전사의 회고는 마치, 오스만 터키에 대항하는 그리스 민족주의의 거센 물결을 목격한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목소리처럼 들린다.

 

그 다음부터는 실패의 연속이다. 고가 케이블을 설치해서 수도원 부근의 목재까지 팔아먹겠다는 계획을 세운 조르바는 고가 케이블 제작에 필요한 물품 구매를 위해 칸디아로 간다. 그곳에서 만난 롤라라는 젊은 카바레 가수에게 화자의 피 같은 돈을 탕진한다. 이 얼마나 뻔뻔한 행동이던가. 자하리아라는 반미치광이 수도사를 만나 수도원에 불을 지르라고 사주를 하지 않나... 이성보다 그때 그때 자기 감성에 충실한 인간 조르바의 모습에 다시 한 번 혀를 내두르게 된다. 동네 젊은 과부를 사모하던 청년의 죽음에 이어(비극의 전주곡이다) 조르바의 끝없는 부추김에 힘입어 결국 용단을 내린 화자는 과부를 찾는다. 이 장면에서는 그놈의 오렌지물이 기억에 남는다.

 

과부의 죽음으로 시작된 재난은 결국 화자와 조르바의 갈탄광 사업까지 모조리 말아 먹게 된다. 그리고 아무 것도 남지 않은 무존재와 거덜의 순간, 화자는 지고의 행복감을 느낀다. 한 마디로 말해 나의 모든 것을 비워야 비로소 자유롭게 될 수 있다는 걸까. 오로지 그전부터 준비해오던 붓다에 대한 원고 하나를 마무리한 뒤, 결국 화자는 조르바와 영원히 이별한다. 그리고 세상을 주유하던 화자는 희대의 영걸 알렉시스 조르바에 대한 연대기를 남기기로 결심한다. 아무리 오디세우스의 활약이 대단하다고 하더라도, 호메로스 같은 시인이 없다면 그의 영웅적 활약은 후대에 존재하지 않았으리라. 그런 점에서 화자는 호메로스와 오디세우스가 세운 그리스적 전통을 그대로 따른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그리스인 조르바>를 다 읽으면서 나는 지난 수년 동안 옥죄어 오던 조르바 읽기로부터 해방되었다. 아거야말로 조르바가 그렇게 목청 높여 주창하던 자유가 아니던가. 물론 그런 작은 성취 뒤에 찾아오는 허무는 또 어쩔 것인가. 내가 이 소설에서 가장 재밌게 읽었던 부분은 마담 오르탕스가 죽고 나서 곡쟁이들과 마을 사람들이 얼마 되지 않는 그녀의 재산을 탈취하기 위해 벌이는 치열한 경쟁에 대한 서술 장면이었다. 사람이 죽지도 않았는데 다른 사람에게 뒤지면 안된다는 급한 마음에 곡을 하지 않나, 고열로 죽어가는 사람 앞에서 닭과 토끼들을 삶아 잔치를 벌이는 그들의 모습 앞에 그야말로 웃픈 심정이 들었다.

 

녹로 돌리는데 귀찮다는 이유로 손가락 하나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게 절단하는 조르바가 들려주는 자신의 과거 이야기는 천일야화처럼 매력적이다. 젊은 시절에는 애국자로 터키인과 불가리아인들을 마구 죽이는 게릴라 전사였다고 고백하지 않던가. 누가 이런 영웅담을 마다할 것인가. 카프카즈의 50만 그리스 동포들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나선 친구 스타브리다키와 달리 화자는 언제나 말과 지식만 앞세우는 그런 펜대 운전사였을 뿐이다.

 

조르바는 자신의 보스에게 지난 35년 동안, 한 번이라도 치열하게 산 적이 있었느냐고 묻는 것처럼 들린다. 화자는 그렇기 못했기에 자신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야생의 짐승 같은 조르바의 매력에 흠뻑 취해 버린 것이다. 언제나 주저하다가 모든 기회를 날려 버린 자신의 과거와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에 대한 걱정과 근심 때문이지 않았을까. 그리고 조르바는 크레타 섬에서의 이별 이후에도 화자가 계속해서 바보짓을 멈출 수 없다는 점도 잘 알고 있었다. 지식인들이 무언가 터무니없는 짓을 하기에는 너무 영리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무학의 조르바는 잘 알고 있었다. 그게 바로 자유를 속박하는 억압의 본질이다.

 

내가 만약 젊은 날에 조르바를 읽었다면 아마 장대한 경험을 한 꼰대의 잔소리 정도로 치부하지 않았을까. 화자보다는 언제나 에너지 넘치는 조르바에 가까운 나이가 되자, 죽음조차도 두려워하지 않는 늙다리 조르바의 배짱에 감탄하게 된다. 누구는 이 책을 3, 4독했다고 하던데 나는 앞으로 살면서 몇 번이나 조르바를 다시 만나게 될지 궁금하다. 다른 버전의 책들이 많으니, 그 때마다 새로운 책들을 만나는 그런 느낌이 들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그나저나 나도 마냥 자유롭고 싶구나, 조르바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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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2-08 10: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매냐님 조르바는 영화도 좋았음요 ㅋㅋ홋타 요시에 책 읽으면 에릭 홉스봄의 <혁명의 시대>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 읽게 됩니다 ^0^

레삭매냐 2021-02-08 10:52   좋아요 3 | URL
네이!~ 그렇지 않아도 영화는 수해배
두었답니다 :> 아직 자막을 구하지
못해서리 못보고 있네요.

홉스봄 선생의 <혁명의 시대>는 작년
말에 시작했는데... 반짝 읽고는 잠시
휴지 중이네요.

일단 레비-스트로스 책은 어디에 있는
지부터 ㅋㅋㅋ 감사합니다, 스캇트님.

막시무스 2021-02-08 13:2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조르바를 첨부터 다시 읽은듯한 감동적인 리뷰 감사드립니다! 조르바는 어떤 형태의 글을 읽어도 사랑인것 같아요! 조르바 에너지로 뜨끈뜨끈한 하루되십시요!ㅎ

레삭매냐 2021-02-08 13:34   좋아요 2 | URL
제가 이 책에 네다섯번이나 도전했다가
실패해서, 내 이번엔 반다시 완독하리라
작정하고 덤벼서 3일 만에 다 읽었네요.

점심으로 때려 넣은 뼈해장국처럼 뜨끈
뜨끈 졸바의 에너지, 만빵입니다 !!!

bookholic 2021-02-08 17: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렵게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어렵게 읽었다는 것은 그만큼 자유인이 되는 것이 어렵다는 뚯?^^

레삭매냐 2021-02-08 17:56   좋아요 2 | URL
종교나 이데올로기 그리고 무엇보다
먹고사니즘에서 자유로워져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현실이 조르바처럼 살지
못하게 만드는 게 아닐까요.

적어주신 바에 격렬하게 공감합니다.
이미 머리는 자유를 희구하려는 시도에
차단막을 치는 거죠.

얄븐독자 2021-02-08 20:2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조르바라는 인간을 부정적으로 보는 제 입장에선 만약 세상 모든 인간이 조르바와 같은 자유인이라면... 하고 가정해볼때 과연 그 세상은 유토피아 같을까? 저는 아닌것 같습니다. 천하의 난봉꾼 같은 조르바라는 마초적 남자를 너무 자유인 프레임으로 포장한게 아닐까 싶어 저는 조르바라는 작품을 불편케만 읽은 기억입니다 ㅋ

막시무스 2021-02-08 21:31   좋아요 2 | URL
저도 얄븐독자님이 지적하신 마초 이미지에 공감합니다. 문학적 캐릭터나 레토릭임을 감안하더라도 조르바(작가)의 여성관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작가가 제시하는 자유라는것이 보편성을 가장한 국가, 사회, 계층, 종교 등이 강요하는 왜곡된 가치관, 부당한 도덕관, 폭력적인 편견 등에서 얼마나 당당할수 있는가의 관점에서 보면 조르바의 자유가 방종이 아니라 쉽게 실행에 옮길수 있는 그런 자유인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2021년에 맞게 재해석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그럴수록 자유인의 의미는 더욱 더 진정한 자유인으로 나타날 수 있지 않을까?하고 생각해봅니다.

레삭매냐 2021-02-09 10:41   좋아요 1 | URL
상마초 난봉꾼 조르바 같은 닝겡만
있다면 세상이 얼마나 팍팍할까요.

소설의 시간적 배경이 1916년,
그리고 알렉시스 조르바가 나이가
65세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가
전근대적 사고의 소유자일 것 같습
니다.

지지부진했던 독서가 독자와는 맞지
않는 너무 강렬한 캐릭터 때문이
아니었나 싶기도 합니다.

붕붕툐툐 2021-02-08 21: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캬~ 조르바는 자유죵~ 완독 축하드려요~👏👏👏

레삭매냐 2021-02-09 17:04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수년간 저의 애물 덩어리였던
책을 마침내 읽게 되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