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편안한 죽음 을유세계문학전집 111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강초롱 옮김 / 을유문화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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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두 권의 책을 샀다. 그리고 그 중에 한 권을 오늘 출근길에 집어 들었다. 시몬 드 보부아르의 <아주 편안한 죽음>이었다. 프랑스 작가들이 지닌 공통점일까? 얼마 전에 만난 아니 에르노의 책이 생각났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테니 그에 대한 설명은 패스하자. 때는 1963, 저자의 어머니 프랑수아즈 여사가 대퇴부 골절을 당한다. 다리가 그렇게 부러진 다음, 77세의 할머니는 지인들에게 연락하기 위해 전화기까지 자신의 몸을 끌고 가는데 두 시간이 걸렸다고 했던가. 시작부터 범상지 않다.

 

항상 하는 말이지만,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우리의 삶의 여정은 공평하지 않지만, 종착점에 도달해서는 모두가 평등하다. 필명의 존재인 인간에게 영생은 존재하지 않는다. 프랑수아즈 여사도 그리고 이 글을 쓴 보부아르도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이런 일들을 생각하려니 왠지 모르게 삶이 참 덧없게 느껴진다.

 

젊은 시절, 프랑수아즈 여사를 돌보지 않았던 아버지가 죽었을 때 시몬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서서히 소장에 자리 잡은 악성 종양으로 그렇게 아름다웠던 어머니가 서서히 시들어 아니 죽음의 신이 다가온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위대한 철학자는 어떤 말로도 형용할 수 없는 그런 슬픔과 비애를 느꼈다고 한다.

 

프랑수아즈 여사는 병상에서 죽어가는 자신을 찾아온 젊은 지인들에게 삶을 즐기라는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그런데 왜 시몬과 동생인 푸페트(엘렌)에게는 그 시절에 그런 말을 하지 않았던가. 그 또한 역설이 아닐까. 병상에서 고통에 시달리던 모리스 삼촌은 주변 사람들에게 총으로 자신의 고통을 끝내 달라고 소리쳤다는 기억을 저자는 회상한다. 프랑수아즈 여사도 마찬가지였다. 욕창과 종양 때문에 병상에서의 40여일은 그야말로 끔찍한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모르핀에 의존하다가는 정말 마지막 순간에는 감당할 수 없다는 말도, 현재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 어쩔 수가 없는 그런 선택이 아니었을까. 그런 경험을 해보지 않은 나로서는 저자의 폐부를 찌르는 그런 고통들을 솔직히 가슴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고백해야 할 것 같다.

 

어려서 신과 결별하고 무신론자인 장녀와 달리 마지막까지 투철한 종교적 신념을 고수했던 고인은 기이하게도 병사성사를 하지 못했다. 병원의 전문의들은 자신들은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며, 죽어가는 어머니의 고통을 견딜 수 없었던 딸들의 요청을 제압한다. 그리고 부지불식간에 어머니의 죽음이 도달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 하나의 우주였던 어머니라는 존재는 이제 시신으로 존재 자체가 바뀌었다. 프랑수아즈 여사는 생전에 네모난 상자(아마도 관을 의미하지 않나 싶다)에 들어가길 거부했으나, 우리 인간의 의례에서 관은 불가피했고 그녀의 바람과는 달리 입관 절차가 이루어졌다. 다만, 프랑수아즈 여사의 바람대로 구덩이에 던져지는 것은 면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하나의 우주가 소멸한다는 건 아무래도 슬픈 일이다. 그래도 프랑수아즈 여사는 저명한 저자를 딸로 둔 덕분에 자신에 대한 기록을 세상에 남길 수 있지 않았던가. 오늘도 이름도 없이 그렇게 소멸하는 수많은 우주들에 대해 이 자리를 빌려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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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1-12-21 23: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리뷰 제목이 참 좋아요! 이 책 저도 읽었는데 백자평만 쓰고 리뷰를 못 썼네요 ㅜㅜ 어머니 돌아가시게 되는 훗날 떠오를 듯한 책입니다.

레삭매냐 2021-12-22 01:08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아니 에르노도 그렇고, 프랑스
작가들이 쓴 병상일기를 자주
만나게 되네요.

mini74 2021-12-21 23:3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하나의 우주가 소멸한다는 건 슬픈 일 이라는 매냐님 문구가 참 슬퍼요. 저마다의 우주를 품고 빛을 발하며 살던 이들ㅠㅠ 결혼식보단 장례식이 더 많을 나이라서인지 더 와닿는 글입니다

레삭매냐 2021-12-22 01:10   좋아요 2 | URL
저도 그렇답니다.

아무래도 나이가 있다 보니
경사보다 애사가 더 많아지네요.


라로 2021-12-24 14:0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Thank you, and I wish you a blessed Christmas!!!

레삭매냐 2021-12-24 19:04   좋아요 0 | URL
니에, 라로님도 해삐 베리
메리 크리스마스입니다.
 



우리 책쟁이들은 다른 사람이 어떤 책을 읽고 있는가에 대해서도 궁금해 하지만, 그 못지 않게 그들이 어떤 책을 사는가에 대해서도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나도 물론 마찬가지다.

 

다만 귀차니즘에 매몰되어 잘 정리하지 않을 뿐.

 

나는 이달 들어 모두 3권의 책들을 샀다. 그나마 있는 사진은 달랑 보르헤스 선생님의 <죽음의 모범> 뿐이다. 121빠로 사들인 <체벤구르>는 어디에 두었나 그래.

 

책을 하도 읽다가 실명을 할 정도였다는 대가 앞에서 감히 책쟁이라는 말조차 꺼낼 수가 없을 것 같다. 그런 상태에서 아르헨티나 국립도서관장도 하셨다지 아마. 그야말로 책쟁이 업계의 전설 같은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책들을 읽게 될 진 모르겠지만, 설마 내가 그럴 일은 없겠지만 시력 보호에 신경을 써야할 것 같다. 그런 점에서 간유구라도 먹어야 하나. 사실 아직까지도 난 간유구가 무언지 모른다. 아주 오래 전부터 눈이 좋아지려면 간유구를 먹으라는 말을 들었다. 뭐 그렇다고 한다.

 

<죽음의 모범>은 보르헤스 선생님이 가명으로 발표한 소설들이라고 하는 것 같던데, 동네 중고서점에 떠서 당장 달려 가서 사들였다. 아직 책 표지도 펴보지는 못했다. 그냥 일단 나중에 언제고 읽을 거라는 신념에 사들인다. 산 책은 십년이 지나고 몇 년도 지나도 언젠가는 읽을 거라는 믿음으로 오늘도 책을 사댄다.

 

어제 그놈의 적립금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지른 윌리엄 트레버 샘의 <밀회>가 곧 도착한다는 문자와 알림이 수시로 나의 핸드폰 액정에 뜬다. 오늘 마침 읽을 책을 가지고 오지 않아서, 요건 오는 대로 읽어볼 생각이다.

 

2021년의 마지막 달도 이제 보름 정도 남은 모양이다. 남은 보름 동안 나는 또 어떤 책들을 사게 될지 자못 궁금하다.

 

[뱀다리] 지난 주말에 인천에 갔다가 오래전에 공연이나 야구장에 가던 시절의 티켓들을 모아 놓은 것을 발견했다.



 

그중에서 찾은 게 2003810일 포트 애덤스에서 열린 JVC 재즈 페스티벌 티켓이었다. 당시 내가 일하던 샐러드 바 옆 사진관(그랬다, 그 때는 무려 필름 카메라 시절이었다)에서 일하던 브래들리라는 친구와 함께 멀리 로드 아일랜드의 포트 애덤스 요새까지 차를 타고 달려갔다. 110KM 차로 한 시간 반 정도되는 거리구나 그래.

 

그전날 술을 잔뜩 먹고 취해서 헤롱거리면서 그 뜨거운 여름날에 포트 애덤스로 갔다. 아 그전에 바닷가에 가서 낚시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포트 애덤스에는 도미랑 광어 낚시를 하러 자주 갔었는데... 그날은 바람도 많이 불고해서 한 마리도 잡지 못했던 것 같다.

 

나중에 재즈 페스티벌에서는 숙취 때문에 너무 힘들어서 내내 누워 있었다. 사실 자그마치 54달러나 하는 표도 브래들리가 사주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좀 미안하다. 브래들리는 사진 찍느라 정신이 없었지 싶다. 진짜 대포 사이즈만한 카메라로 무대에 오른 재즈 아티스트들의 사진을 이들이 참 많았다. 브래들리가 찍은 사진도 나한테 주었던 것 같은데,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다. 어딘가에 있겠지 싶다.


그렇게 술과 잠에 취해 비몽사몽 중이어는데 갑자기 익숙한 재즈 넘버 하나가 들리는 게 아닌가. 바로 1959년 데이브 브루벡 쿼텟이 발표한 <Take Five>였다. 세상에나...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서 가능한 무대 곁으로 가서 이 위대한 뮤지션의 라이브 공연을 보고 들을 수가 있었다. 내가 아무리 재즈에 대해 문외한이라지만 이 정도는 알고 있지.

 

데이브 브루벡 아저씨는 지난 2012년에 91살의 나이로 작고하셨다고 한다. 그러니까 9년 전에 돌아가셨구나. 작년에는 탄생 100주년이었다고 하는 것 같던데. <Take Five>는 내가 라이브로 들었을 때, 이미 태어난 지 44년이나 된 그런 노래였구나.

 

그날 얼굴이 온통 화상 수준으로 타서 근 일주일 동안 탄 얼굴이 쩍쩍 갈라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후로 썬크림을 바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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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12-16 11:2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매냐님 작년에 비해 소박한 구매력 ㅎㅎㅎ 12월 쟁여 둔책 독파!!

레삭매냐 2021-12-16 11:39   좋아요 2 | URL
네, 해가 갈수록 책 구매
가 줄어 들고 있습니다.

그래도 책은 어디선가
꾸역꾸역 나와서 집에
쌓여 가고 있더라는 ㅋㅋ

잠자냥 2021-12-16 11:3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아니 뭐예요, 책탑 사진도 없구.. 쳇.

레삭매냐 2021-12-16 11:40   좋아요 4 | URL
삘 받아서 급하게 올리느라
그랬습니다 -

반성하고 있습니다.

집에 가서 책탑을 쌓아 보겠
습니다.

새파랑 2021-12-16 11:4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와 2003년 티켓이라니 멋집니다. 뉴포트가 어딘지는 모르지만 부럽네요 ^^ 레삭매냐님은 그동안 읽은 책이 많으셔서 신작만 사시는거 같아요~!!

레삭매냐 2021-12-16 11:50   좋아요 3 | URL
뉴포트는 미국 로드아일
랜드에 있는 항구도시
랍니다.

무슨 말씀을요...
구간들도 안 읽은 책들이
엄청나답니다.

신간은 매의 눈으로 주시
하고 있습니다 ㅋㅋㅋ

독서괭 2021-12-16 11:4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와 매냐님은 사고 읽고 쓰고 이게 딱 되시는 것 같아요! 전 사는 게 10이면 읽는 게 3..? 쓰는 건 1…? 인 것 같은데요 ㅜㅜ

레삭매냐 2021-12-16 13:21   좋아요 2 | URL
그러기 보다는...
그전에 사두고 읽지 않은
책들이 너무 많아 양심에
걸려서 -

가능한 사고 읽고 쓰고
에 집중하려고 노력 중
입니다.

얄라알라 2021-12-16 11:5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 멋진 페이퍼예요!

아무리 친해도 외국 친구들은 쫌 더치페이 정신이 쎄다 싶었는데, 레삭매냐님의 브래들리님의 통큰 우정. 그런데 아쉽네요^^ 두 분의 우정은 아름답고요^^

레삭매냐 2021-12-16 13:22   좋아요 3 | URL
외쿡인들 사이에서 더치
페이가 일상이긴 해도
다 그런 것 같지 않더라구요.

다시 기억해 봐도 미안하네요.
공짜 티켓에 라이드에...

여담으로 사진도 막 공짜로
뽑아 주고 그랬답니다 ^^

쎄인트 2021-12-16 15:4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2021 ‘서재의 달인’ 축하드립니다~!!

레삭매냐 2021-12-24 19:0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쎄인트님.

mini74 2021-12-16 16: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 필름 카메라에 ㅎㅎ 추억 돋네요. 브레들리라는 분 소개 좀 ㅎㅎㅎ 매냐님 축하드립니다 *^^*

레삭매냐 2021-12-24 19:05   좋아요 1 | URL
게을러서 답글이 늦었네요.
감사합니다. 필카는 레알 사랑
이었습니다.

브래들리에 대한 추억들은
낭중에 한 번 찐하게 -

얄라알라 2021-12-16 17: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가 오늘 레삭매냐님 서재에 여러번 들어오네요^^
축하드립니다!!!!!^^

레삭매냐 2021-12-24 19:05   좋아요 1 | URL
넵, 감사합니다 :>

서니데이 2021-12-16 17: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 올해의 서재의 달인과 북플마니아 축하합니다.
행복한 연말과 좋은 하루 되세요.^^

레삭매냐 2021-12-24 19:05   좋아요 1 | URL
어느새 올 한 해도 딱
일주일 남았네요.

감사합니다.

강나루 2021-12-16 18: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 2021서재의 달인 축하드려요.

레삭매냐 2021-12-24 19:06   좋아요 2 | URL
열심히 쓰다 보니 서달이가
되었네요 ^^ 감사합니다.

새파랑 2021-12-16 18: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 달인달성 축하드립니다~!!

레삭매냐 2021-12-24 19:07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새파랑님 :>

그레이스 2021-12-16 19: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으아!
간유구!
제가 학교 가는 길에다 슬쩍 버렸던 그 간유구 ^^

레삭매냐 2021-12-24 19:07   좋아요 2 | URL
전 아작도 간유구가
무엔지 모른답니다 헷 -

그레이스 2021-12-24 19:40   좋아요 1 | URL
어렸을때 눈에 좋다고 먹었던 영양제예요^^

라로 2021-12-24 15:1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죽음의 모범> 책표지가 쥑입미다!!
그런데 오! 저도 저 오랄 비 치실을 사용했었는데 이젠 안 사용해요.^^;;
너무 얇아서 가끔 아프더라구요.^^;;
지금은 좀 두꺼운 것으로 바꿨어요.

레삭매냐 2021-12-24 19:07   좋아요 2 | URL
오오 저랑 비슷하시네요.
근데 한국에는 두터븐 치실
이 없더라구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
 
패싱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9
넬라 라슨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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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도서로 넬라 라슨의 1929년 작품 <패싱>을 신청했다. 도서관에서 일단 책은 빌렸다. 그리고 읽지 못하고, 아니 더 솔직하게 말하면 책을 펴 보지도 못하고 반납했다.

 

그리고 넷플릭스 <패싱>의 존재를 알게 됐다. 원작 소설에 앞서 영화부터 보기 시작했다. 영화를 절반 정도 보고 나서, 미리보기로 책도 읽기 시작했다.

 

넷플릭스 영화는 정말 매력적이었다. 흑백 화면을 바탕으로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로 영화는 시작된다. 그리고 주인공 아이린(리니) 레드필드가 등장한다. 사실 흑백필름만으로는 그녀의 인종을 구분할 수가 없다. 그녀의 남편인 브라이언과 함께 있으면 그들이 흑인 부부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다. 아들들인 주니어와 테드(시어도어)도 마찬가지다.

 

의사로 일하는 브라이언 그리고 흑인 연맹(Negro League)에서 자원봉사를 하는 리니의 조용하고 평안한 일상에 리니의 옛 친구 클레어 벨류가 등장하면서 긴장감이 조성된다. 시카고의 무더위를 식히기 위해 찾은 드레이튼 호텔 바에서 리니는 우연히 옛 친구 클레어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녀를 바로 알아보지 못한다. 그것은 클레어가 백인 같은 외모에 백인 남편과 함께 있어서가 아닐까.

 

여전히 인종차별이 공공연하게 벌어지던 시절, 리니는 항상 모자의 망사로 자신을 가리고 다니는 듯하다는 그런 느낌을 준다. 감독은 블러리 효과로 주위의 눈에 띄고 싶어하지 않는 리니의 심리를 기가 막히게 포착해낸다. 아니 보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비록 흑인 중산층 가정의 안주인이지만 백인들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검둥이라는 모욕을 받고 싶지 않다는 심리의 발로가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그녀의 대단히 조심스러운 태도는 바로 이해가 된다.

 

반면 패싱으로 가난한 집안의 흑인 처녀에서 부잣집 마나님으로 거듭나는데 성공한 클레어는 언제나 자신감에 넘친다. 클레어의 초대에 마지못해 리니는 그들이 머무는 스윗트룸에 갔다가 지독한 인종차별주의자인 클레어의 남편 존 벨류에게 대놓고 인종차별을 당한다. 대공황이 시작되기 전, 미국사회는 그랬단 말인가. 뒤에서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는 게 아니라 흑인들 바로 앞에서 그들을 싫어하는게 아니라 혐오한다는 말을 어떻게 아무런 표정의 변화 없이 지껄여댈 수 있단 말인가.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이런 지독한 모욕에도 리니는 의연하게 대처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클레어는 편지로 리니에게 자꾸만 들이대지만, 리니는 그런 클레어를 자꾸만 밀어낸다. 아마 나라도 그랬으리라. 남편 브라이언 역시 웃기는 짜장이라고 클레어를 평가한다.

 

그렇게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됐다. 클레어는 계속해서 리니에게 편지를 보내지만, 클레어는 그녀의 편지를 아예 뜯어 보지도 않는다. 결국 리니의 집을 찾아와 비록 백인 행세를 하며 살고 있지만, 외롭고 불행하다는 고백을 하는 클레어. 그런 그녀에게 리니는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한다. 클레어는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주변의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다. 리니의 아들들인 주니어와 테드에게도 그리고 남편 브라이언에게도. 심지어 리니의 집에서 일하는 주와도 친밀함을 형성하기 시작한다.

 

, 영화에서는 재즈 피아노의 선율이 아주 기가 막힌 타이밍마다 등장해서 엇갈리는 주인공들의 심리를 후벼 파낸다. 영화를 보다 보면, 아 이제 재즈 피아노가 등장할 차례가 되었는데 싶을 정도다. 흑인 연맹에서 주최하는 댄스 파티에 자신도 참가하겠다고 나선 클레어. 그곳에서 리니의 남편 브라이언을 필두로 멋쟁이 흑인 남성들과 잇달아 춤을 추며 클레어는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그 장면을 보고 있던 소설가 휴 웬트워스에게 리니는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라는 말로, 클레어의 패싱을 넌지시 알려준다.

 


그리고 웬트워스는 클레어에게 그녀도 패싱할 생각을 해보지 않았느냐고 묻는다. 지금 상태에 만족하는데 그게 과연 필요한 일일까라는 생각이 나는 들었다. 그전에 리니는 클레어와의 대화에서 좀 더 돈이 필요하다는 말로,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항상 필요한 돈의 존재를 알리는데 인색하지 않다. 나는 왠지 클레어가 큰 판돈을 건 도박판에서 위험한 외줄타기를 하고 있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진실이 밝혀졌을 때, 지독한 인종차별주의자인 남편 존의 박대를 과연 감당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녀는 언제까지 자신의 정체성을 감추고 하얀 가면을 쓰고 살아야 하는 걸까. 그녀가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하면서도 결국 외롭고 불행한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지 않나 싶다.

 

백인 행세를 하는 클레어는 삶의 어두운 단면을 대변한다. 반면, 곳곳에서 들려오는 흑인들에 대한 차별과 모욕 그리고 폭행에 치를 떠는 남편 브라이언을 다독이며 의연하게 대처하는 리니는 클레어의 그것과 대척점에 서 있다. 실제로 192754일 아칸소주 리틀록에서 발생한 존 카터 린치 사건을 구구절절하게 자신의 아들들에게 들려주는 브라이언에게 리니는 화를 낸다. 아버지는 인종차별이 공공연하게 시행되고 있는 자신의 모국에 대해 경멸을 감추지 않는다. 아이들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리니는 어떻게든 진실을 가리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클레어가 자신의 가정과 지인들 사이에 깊숙하게 침투할수록 리니는 불안감에 시달린다. 아이들과 살림에만 신경 쓰던 리니는 갑자기 등장한 클레어 때문에 심신이 피로하다. 남편 브라이언과 클레어가 따로 연락하고, 혹시 불륜을 저지르고 있지 않나 하는 그런 심리들을 각색과 연출을 맡은 레베카 홀은 기가 막히게 포착해낸다. 곳곳에 흐르는 재즈 음악의 선율에 리니가 덧없이 피워대는 담배가 타들어가는 소리는 정말...

 

영화는 결국 클레어의 정체를 알게 된 백인 남편 존 벨류의 등장에 이은 비극으로 끝난다. 너무 순식간이라 사건의 경위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다만 이러저러한 정황만 드러날 뿐. 소설은 영화에 비해 좀 더 매운 맛이다. 21세기 PC 시대에 맞춰 레베카 홀은 될 수 있으면 N 워드는 사용하지 않으면서, 원작의 감성을 그대로 전달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오늘 아침에 우연히 커트 보네거트의 임사 체험을 희화한 소설을 다시 읽게 되었는데, 거기서 충격적인 문장을 하나 발견했다. 홀로코스트는 나치 독일에서 합법적이었다. 그리고 흑인 노예제도도 미국의 헌법 내에서 합법적이었다고 쓰여 있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로 존경받는 인물들 가운데 조지 워싱턴 다음으로 존경받고 있다는 토머스 제퍼슨은 말로는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게 태어났다고 하면서도, 흑인 노예를 부렸다고 한다. 내가 존경해 마지않는 커트 보네거트 작가는 다시 자신만의 스타일f로 미국의 제도와 건국의 아버지를 비판했다.


[뱀다리]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이러저러한 생각이 들어서 몇 자 더 적어 보련다.

 

영화에서 리니가 우연히 길을 가다가 클레어의 인종차별주의자 남편인 존 벨류를 만난다. 존은 그녀에게 환하게 웃으며 인사하며 손을 내민다. 하지만 리니는 그의 존재를 아예 무시하고 제 갈 길을 간다. 그리고 같이 있던 지인에게 자신이 백인 행세하던 시절에 아는 사람이라고 했던가.

 

클레어는 차별과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고 새로운 자아를 만들어냈다. 그녀의 삶은 온통 위선의 천국이었다. 그러는 동안 과연 그녀는 행복했을까? 리니를 찾아와 고백하듯이 아마 그러지 않았으리라. 아무리 패싱이라는 절차를 통해 백인 행세를 해도, 그녀의 뿌리는 바뀌지 않았다. 그러니 불행할 수밖에.

 


그런 클레어에 비해 행복해야 했던 리니도 다른 이유로 불행했다. 갑자기 등장한 멋쟁이 친구가 자신의 남편을 빼앗아 가고, 자신의 지인들마저 하나 같이 클레어에게 호감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평안했던 리니의 삶에 미세한 균열이 가기 시작하는 그런 느낌이다. 술에 취해 침대에 누워, 천장에 난 금을 발견하는 장면은 그야말로 압권이었다. , 난 삶에 이런 미세한 균열을 잡아내는데 도가 튼 작가 한 명을 알고 있었지. 그렇다, 제임스 설터만큼 이런 특별한 기술을 가지고 있는 작가도 없는 것 같다. 어쩌면 원작의 각색을 맡은 레베카 홀이 설터 선생의 팬은 아닌지 문득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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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12-15 12:0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 책 영화도 있군요. 재미있을거 같아요~!! 리니와 클레어의 대비가 인상적이네요~ 아무리 감추더라도 본질은 안바뀌니 딜레마 인거 같아요. 책으로 읽어도 흥미진진 할거 같습니다 ^^

이 신작을 희망도서로 빌렸다니 좋으셨을텐데 읽지도 못하고 반납하셨다니 ㅜㅜ

레삭매냐 2021-12-15 13:11   좋아요 3 | URL
사진 퍼 나를 땐 몰랐었는데...
지금 자세히 보니 밑에

Nothing is black and white.

라고 되어 있네요. 멋짐요.
책은 다시 빌려다 보려구요.
어제는 비가 와서 못갔습니다.

청아 2021-12-15 12:2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영화 재밌겠네요!! 커트 보네거트의 작품은 <닥터 키보키언>말씀하신 건가요?

레삭매냐 2021-12-15 13:11   좋아요 3 | URL
그렇습니다 :>

제가 소싯적에 가장 좋아하는 작가
가 누구냐 누군가 묻는다면 지체
하지 않고,

커트 보네거트와 루이스 세풀베다
라고 대답했답니다.

얄라알라 2021-12-15 12:4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넷플릭스 결제 안 했는데, 완전 보고 싶어지는데요^^

레삭매냐 2021-12-15 13:12   좋아요 4 | URL
영화는 무지 재밌습니다 -

어쩜 그리 섬세하게 주인공들의
감정들을 잡아내는지 감탄해 마
지 않았습니다.

흑백 필름 특유의 느낌과 카메라
워크도 대단했습니다. 블러리가
참 인상적이었죠.
그냥 끝장이었습니다.

페넬로페 2021-12-15 13:0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마침 넷플릭스에 이 영화 있으니 일단 영화부터 봐야겠어요~~
책은 언젠가 읽게 되겠지요 ㅎㅎ

레삭매냐 2021-12-15 13:13   좋아요 4 | URL
저도 책을 빌리지 못해서 우선
영화부터 봤는데, 영화가 책보
다 순한 맛인 것 같습니다.

책에서는 N 워드가 남발하는
것 같더라구요.

독서괭 2021-12-15 13:05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이 책 계속 다른 분들 리뷰 보며 재밌겠다 보관함에 담아두고 있었는데, 매냐님 글이 결정타.. 이번에 장바구니에 넣었습니다 ㅠ 영화도 매력적일 것 같아요!

레삭매냐 2021-12-15 14:04   좋아요 4 | URL
영상 음악 그리고 주인공 리니
의 불안한 시선까지 무엇 하나
부족한 게 없는 그런 영화였습니다.

얄라알라 2021-12-15 13:1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꿋꿋하게 넥플릭스 결제 안하고 있는데, 레삭매냐님 저를 흔드시네요 ㅋㅋ˝그냥 끝장˝이라 말씀하시니

레삭매냐 2021-12-15 14:04   좋아요 3 | URL
영화가 나오기 전부터 트레일러
보고 반해서 대기 중이었는데...

역시나 명불허전이었습니다.

얄라알라 2021-12-15 13:16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ㅋㅋ독서괭님께서도 레삭매냐님을 ˝결정타˝ 추천으로 언급하심 ^^ ㅋㅋ

독서괭 2021-12-15 14:31   좋아요 4 | URL
결정타 맞아서 방금 주문했습니다..ㅋㅋ

mini74 2021-12-15 16:0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제가 읽은거랑 표지가 다르네요. 이 표지가 뭔가 더 강렬한 이 책 좋았는데 설터작가님이 한 수 위인가요? ㅎㅎ 제임스 설터 도 1월에 만나봬야겠군요 ㅎㅎ 안그래도 스콧님이 영화가 더 좋다고 해서 보고싶었는데 넷플릭스에 있군요 ~

레삭매냐 2021-12-15 16:39   좋아요 2 | URL
아마 민음사에서 나온 책을 만나
신 것 같습니다 :>

설터는 고저 사랑입네다.
작가들의 작가라고 불리는 양반
이라고 하더라구요.

영화는 꼭 보시길 권해드립니다.

라로 2021-12-16 21:25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영화를 봤는데요, 매냐님께서 아주 멋지게 글을 써주셨군요!!^^
아름다운 영화였어요. 극적인 것을 아주 잘 표현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아무리 백인처럼 보이는 클레어도 발은 흑인의 발이더군요.
주와 뒷정원에서 얘기할 때 리니가 들어와서 자기의 겉옷으로 클레어의 발을
덮어주는 장면에 아주 잠깐 보이는 클레어의 발,,,감독의 의도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올려주신 천장의 균열도 첫 번째 남편이 바라봤을 때보다
두 번째 리니의 눈으로 보게 되는 균열은 더 가지를 뻗은 것처럼 보이고요.
책으로 만나보고 싶은 작품이에요,, 더구나 1929년의 작품이라고 하시니!

레삭매냐 2021-12-24 19:10   좋아요 2 | URL
영화로 먼저 만나고 나서 결국
책으로도 만나 봤습니다.

근데, 영화의 느낌적 느낌이 워
낙에 강렬하다 보니 소설의 이미
지가 잘 잡히지 않았던 것 같습니
다. 레베카 홀 감독이 각색을 기가
막히게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닉을 ‘깜씨‘로 번역하는 패기에
좀 놀랐습니다.

발 스토리는 미처 닿지 못했습니다.
대단하십니다 증맬루.

새파랑 2022-01-07 17: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 당선 축하드립니다. 주말에 독립서점 가셨다가 우주점도 한번 방문하시면 될거 같아요 ^^

mini74 2022-01-07 18: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매냐님 축하드려요 *^^*

서니데이 2022-01-07 20: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즐거운 주말과 기분 좋은 금요일 되세요.^^

thkang1001 2022-01-07 21: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좋은 밤, 행복한 주말과 휴일 보내세요!

하나의책장 2022-01-10 00: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디칸카 근교 마을의 야회 을유세계문학전집 116
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 고골 지음, 이경완 옮김 / 을유문화사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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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국경지대에서 군사적으로 충돌한 위기라는 뉴스를 들었다. 예전에는 하나의 제국이었었는데, 구 소련이 해체되면서 소련 산하에 있던 15개 공화국들이 모두 독립선언을 했다. 언어와 문화가 러시아의 그것과 달랐던 우크라이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7년 전, 우크라이나의 영토였던 크림반도를 러시아가 병탄하면서 양국 간의 긴장이 다시 고조되었다. 공교롭게도 내가 우크라이나 폴타바 부근 소로친치 출신의 니콜라이 고골의 작품을 읽는 동안에도 양국 간의 갈등은 해결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오히려 더 첨예해지고 있는 상황이다.

 

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 고골은 1809년 러시아가 제국이던 시절에 태어났다. 우크라이나의 소지주 출신으로, 고향에서 김나지움을 졸업한 고골은 성공하고 싶어하던 청년들이 그러하듯이 당시 제국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서 많은 일들을 경험했다. 그리고 발표한 시집이 실패하면서 시쓰기에서 소설 쓰기로 전향하기에 이르렀다.

 

그전에 유행하던 낭만주의 사조를 계승한 고골은 당시 러시아 문학계에서 유행하던 우크라이나의 세시풍속에 주목했다. 고향에 있던 어머니와 지인들을 동원해서 악마와 마녀가 등장하는 민담들을 수집해서 자신의 작품에 녹여내기 시작했다. 그 결과 발표된 것이 바로 1831년과 1832년에 발표된 연작 <디칸카 근교 마을의 야회>. 각각 4개씩의 소설들로 이루어진 <디칸카>의 화자는 루디 판코라는 이름의 벌치기다. 그는 고골 자신의 문학적 페르소나다.

 

구전으로 전승되던 우크라이나의 민담을 고골은 어떻게 문학적으로 변용했을까. 21세기 기준으로 보면, 인간사에 무시로 개입하는 악마와 마녀들의 이야기는 분명 판타지다. 소로친치 같은 작은 마을에서 벌어지는 야회는 수도의 무도회에 대척을 이룬다. 단편에 등장해서 주인공들에게 내주는 악마의 과제는 인간의 욕망을 대변하고 있는 그런 느낌이다. 아무래도 18세기적 한계인지 에피소들은 상당히 권선징악적 요소들을 품고 있다.

 

동시에 낭만주의 사조의 영향으로 남녀의 연애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우크라이나 농촌 총각의 마음을 빼앗기 위해서, 여자 주인공은 대개 절색의 미녀로 규정된다. <성탄 전야>에서 마을에서 가장 독실한 대장장이자 칠장이인 바쿨라는 17세 소녀 옥사나의 미모에 반한다. 오로지 미모만이 옥사나에 대한 바쿨라의 사랑을 말해줄 뿐이다. 아름다운 여성은 반드시 변덕장이일 거라는 룰에 따라, 바쿨라는 옥사나의 사랑을 얻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지만 그녀가 제시하는 과제는 말마따나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야 가능한 수준의 그런 것이다. 옥사나는 바쿨라에게 무려 여왕의 구두를 요구한다.

 

아니 아무런 빽도 돈도 없는 가난한 우크라이나 대장장이 청년이 무슨 수로 여왕의 구두를 손에 넣을 수 있단 말인가? 그건 요즘 말로 하면 아마 하늘의 별을 따다 달라는 무리한 요구에 다름 아니다. 사랑하는 여인의 말도 안되는 요구에 절망한 바쿨라는 자포자기한 심정이 된다. 그러다 달을 숨기고, 선량한 사람들을 죄악의 구렁텅이에 몰아넣으려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갈 뻔한 위기도 맞는다. 결론은 그전 에피소드에 등장해서 바사브륙의 유혹하는 페트로의 경우처럼 악마의 과제에 현혹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친모가 아닌 계모들은 모두 마녀라는 확고한 이미지도 이미 이 시대에 굳어진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소로친치 마을에서 천사 같은 처녀를 본 청년 파라스카는 하필이면 그녀의 계모에게 심하다 싶은 말을 했다가 곤경을 치르기도 한다. 그 외에도 고골은 19세기 작가답게, 여성성에 마녀라는 구시대적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런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은 19세기 지식인의 한계라고 해야 할까.

 

한편, 러시아 문학의 사실주의 사조라고 불리는 고골의 소설에 등장하는 사실적 묘사들은 기대 이상이었다. 싱그러운 우크라이나 초원에 대한 그의 묘사는 요즘 표현으로 말하자면 4K 유튜브 동영상 콘텐츠를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바람에 일렁이는 우크라이나 대초원의 풀잎 하나에서부터 인간을 괴롭히는 악마가 달을 감춰 버리는 모습 등이 그렇다.

 

우크라이나 농촌 사회 저변에 침투한 러시아 특유의 관료제가 지닌 고질적 문제점에 대해서도 고골은 냉정한 비판을 마다하지 않는다. 마을의 촌장들은 위원님이라 불리는 관료들의 눈치를 보면서,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바쁘다. 종교의 영역을 담당한 정교회 사제들도 촌장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경쟁을 벌인다. 하나둘씩 솔로하의 집에 숨어들어 들었다가, 체면 때문에 석탄 자루에 몸을 피했다가 곤경에 처하는 장면을 고골식 블랙유머의 절정이 아니었던가.

 

퀴리 부인 전기를 읽으면서 러시아 제국이 폴란드를 지배한 이야기에 분개하곤 했었는데, 폴란드와 리투아니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해서 그들을 괴롭히던 시절도 있었다는 이야기에 조금 놀랐다. 멀쩡한 우크라이나 처녀를 폴란드 귀족에게 시집보내겠다는 말이 갖는 의미가 남다르게 다가오기도 했다.

 

악마와 사탄 그리고 마녀로 형상화되는 우크라이나 민중들의 욕망의 변용은 현재 우리가 매주 사는 로또의 그것과 형식만 다르지 본질은 다를 게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19세기 혹독한 러시아 농노제 시스템에서 우크라이나 농민들에게도 별다른 탈출구는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현재의 고달픈 삶에서 벗어나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얻기 위해서라면 악마의 계약을 맺어 그가 요구하는 과제를 수행하고, 응분의 대가를 요구하겠다는 대장장이 바쿨라 같은 주인공들의 모습이 낯설지 않게 다가왔다.

 

고전에서 현재를 읽어내는 것, 바로 그런 재미로 우리가 고전을 읽는 게 아니겠는가.

 

[뱀다리] 이 작품의 발표 시기가 1831-1832년인데 42쪽과 43쪽에 나오는 플라스틱 병은 아무래도 번역 상의 오기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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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1-12-05 21:0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팝콘이 아주 먹음직 스럽네요ㅎㅎ
4K유튜브 보는 느낌이라니 담아봅니다.

내년초 우크라이나로 공격들어갈것 같다는 뉴스보니 무섭더라구요. 지금 우크라이나 국민들 기분은 어떨지...😔

레삭매냐 2021-12-05 21:41   좋아요 3 | URL
팝콘은 아주 맛있었습니다.

로씨야가 우크라이나가 나토
에 가입하는 걸 막기 위해
무력시위에 나설 거라고 하
네요. 참 깡패 같은 나라네요.

그레이스 2021-12-06 07:39   좋아요 3 | URL
저 그러다 살쪘다는...ㅠ
그릇에 담아먹는것 현명한 선택일듯요
봉지째 들고 먹으면 큰일나요 ㅎㅎ

mini74 2021-12-05 21:31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고전에서 현재를 읽어내는 것이 고전의 재미라는 매냐님 말씀 좋네요. *^^*

레삭매냐 2021-12-05 21:42   좋아요 4 | URL
이탈로 칼비노의 말을 빌자면,
고전은 다시 읽는 것이라고 하더
라구요.

현재가 과거가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해주네요.
감사합니다.

라로 2021-12-08 20: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희 막내의 최애 간식이 저 버터 팝콘이에요. 옥수수는 별로 안 좋은데 팝콘은 영양가가 제법 괜찮은 간식이라고 해서 자주 먹게 했더니 이제는 먹으라는 말 안 해도 영화 볼 때면 으레 팝콘 튀겨다가 먹어요. 근데 매냐님은 책 읽으시며 드시나요?? 와~~. 저건 그럼 버터 팝콘은 아닌거죠??^^;;
매냐님이 올려주시는 리뷰 덕분에 많이 배웁니다. 감사합니다.^^

레삭매냐 2021-12-13 15:40   좋아요 0 | URL
예전에 한창 영화 보러 다닐 적
에 빠께스 빠다 팝콘을 먹었습니다.

지금은 영화도 팝콘도 안 보고 안
먹게 되었네요 ㅋㅋㅋ

꼬맹이가 먹던 팝콘이 남아서 책
사진 찍을 적에 같이 넣어 봤습니다.
 
피버 드림
사만타 슈웨블린 지음, 조혜진 옮김 / 창비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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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근 중고서점에 기대하고 있던 책이 매물로 나왔다는 걸 알게 됐다. 그런데 어제는 너무 바빠서 잠시 짬을 내서 책을 사러 갈 겨를이 없었다. 미리보기로 30쪽을 읽었는데, 다음이 궁금해졌다. 이러면 바로 사다가 보던가 해야 하는데. 집에 돌아와서 검색해 보니 근처 도서관에 마침 있다고 한다. 오늘 두 번 생각할 것 없이 달려가서 빌려서 읽기 시작했다. 이것저것 검색해 보니, 넷플릭스 영화로도 만들어졌다고 한다. 프리뷰를 봤는데, 무서워서 아무래도 영화는 못볼 것 같다.

 

<피버 드림>170여쪽 분량의 금세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예상대로 바로 다 읽었다. 오후에 점심 먹고 돌아다니다 들어와서 누워서 책을 읽다 보니 그만 잠이 들어버렸다. 나중에 일어나서 완독했다. 끄적이다 보니 책 이야기는 도통 시작하지 않고 나의 일상 타령만 하는 그런 느낌이다. 나의 책읽기가 원래 그런 게 아닌가 변명해 본다.

 

도시에 사는 아만다와 그의 딸 니나가 작가의 모국인 아르헨티나의 어느 시골 마을에 휴가차 왔다가 벌어지는 이야기들이 메인이다. 응급실에서 화자인 아만다는 이미 죽어 가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그녀의 대화 상대는 다비드다. 다비드는 아만다가 시골 마을에서 우연히 만난 카를라의 아들이다. 카를라는 자신의 아들인 다비드를 괴물이라고 부른다.

 

사실 대화체로 구성된 <피버 드림>은 쫓아 가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책의 뒤편에 실린 해설의 도움을 받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날것 그대로 내가 읽은 느낌을 조금 적어보고 싶었다.

 


요즘 고골의 연작 소설 <디칸카 근교 마을의 야회>를 열심히 읽고 있는데, 왠지 그 결을 같이 한다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아만다가 떠나온 도시라는 공간은 문명이자 빛의 공간이고, 카를라와 그녀가 괴물이라고 부르는 다비드가 사는 시골은 그 반대의 무엇이라고나 할까. 병상의 아만다와 계속해서 대화를 나누는 다비드는 그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도대체 삶에서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중요하지 않은지 판단은 누가 내리는가. 다비드는 그런 점에서 굉장히 이질적인 존재가 아닐 수 없다.

 

다비드가 말하는 벌레의 그 무엇에 중독되어 말이 죽었고, 다비드 역시 6년 전에 비슷한 처지에 처했다가 시골 사람들이 병원 대신 더 선호하는 녹색의 집에서 이체된 그런 존재다. 이건 판타지 소설인가? 현실은 판타지를 능가하는 그런 일들이 벌어지는 공간이다. 하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코로나 시대와 그에 따른 자발적 억압 등등이 무시로 벌어지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우리는 최대한 욕망을 억누르고, 걸리면 어쩌면 죽을 지도 모르는 그런 전염병 대유행의 시대에 살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지금까지 살면서 이런 판타지스러운 세상은 만나보지 못한 그런 느낌이다.

 

<피버 드림>은 잠재된 나의 상상력을 마구 자극한다. 아니 카를라도 어쩌면 산 사람이 아닌 죽은 영적인 존재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작가가 던지는 메시지들은 대단히 모호하고, 아르헨티나라는 공간에 무지한 독자로서는 그가 전달하고 싶은 그것들을 잡아내기가 쉽지 않다. 그러다 보니 작가가 인도하는 대로 그저 이끌려 간다고나 할까. 슬쩍 본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는 더더욱 현존하는 불안과 공포를 자극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피버 드림>을 다 읽고 난 뒤의 나의 감상은 잘 모르겠다라고 결론지을 수 있을 것 같다. 얼마 전에 만난 마리아나 엔리케스의 작품도 그랬었는데 이번에는 한 수 위라는 느낌이다. 12월의 첫 번째 주말에 나는 그렇게 꾸역꾸역 책을 읽고 있었다. 넷플릭스 영화는 봐야 하나 말아야 하나 여전히 고민 중이다. 무서운 건 싫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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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1-12-05 00: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피버드림. 전 영화로 보기시작했는데 넘 어려워서 원작을 보고 봐야지 생각했어요. 책도 어렵다니 ㅠㅠ

레삭매냐 2021-12-05 08:16   좋아요 1 | URL
뭐랄까, 제가 라틴 아메리카
고어 스타일 문학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우리가 접
근하기 어려운 무언가가 있
지 않나 싶습니

coolcat329 2021-12-05 10: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소설 난해하다는 글을 어디서 본거같아요. 영화도 있군요.

레삭매냐 2021-12-05 11:26   좋아요 1 | URL
달랑 두 명의 대화로 이루어진
소설인데 팔로우업 하기가 어려
웠습니다.

넷플릭스가 요즘 열일 하는 것
같습니다.

새파랑 2021-12-05 11: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이 모르겠다면 다른사람은 더 모르겠네요 ㅜㅜ 라틴 아메리카 고어 스타일이 뭔지는 궁금합니다~!!

레삭매냐 2021-12-05 11:27   좋아요 2 | URL
라틴 아메리카 고어 / 판타지
소설에 담긴 무언의 메시지가
있는 것 같은데...

주술적인 요소들도 일단 가미
가 되어 있구요.

아마 그 동네 여러 가지 상황
에 대해 모르다 보니, 피상적
으로 글을 대하게 되는 게 아
닌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