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부님은 갈수록 유머러스해진다
모옌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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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나는 호들갑쟁이다. 무엇보다 책에 관해서 그렇다. 작년 가을, 중국 출신의 작가 모옌이 2012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는 소식에 일단 그의 책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열세 걸음>, <개구리>, <홍까오량 가족>, <모두 변화한다>, <티엔탕 마을 마늘종 노래> 그리고 오늘 이야기할 <사부님은 갈수록 유머러스해진다>까지. 그런데 지금까지 읽은 책은 <사부님> 뿐이다. 호들갑이 지속적인 책읽기로 이어지지 않으니 큰 일이다.

 

모옌과의 첫 만남은 수년전 책을 다시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할 무렵에 만난 중국 현대 소설선 <만사형통>에 실린 단편 <먹는 일에 관한 이야기 둘>이었다. 사실 오래 전이라 무슨 내용인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그러니 실제적인 첫 만남은 <사부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다. 모두 세 개의 중편이 실린 소설집의 백미는 역시 타이틀인 <사부님은 갈수록 유머러스해진다>가 아닐까 싶다.

 

한 때 잘 나가던 선구적 노동자 딩스커우 사부는 어느날 갑자기 직장에서 강퇴(강제퇴직)을 당한다. 이럴 수가 있나 그래. 중국 노동자의 모범으로 칭송받던 딩 사부 역시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구조 조정이라는 미명 아래 길거리로 내몰린다. 시장님을 비롯해서 높은 분들에게 항의해 보지만, 수억 인구를 자랑하는 중국에서 그런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별무소용이다. 그러던 차에 도제 샤오후의 기발한 제안으로 딩 사부는 새로운 사업을 하나 시작한다. 어찌어찌해서 장만한 고물 버스를 개조해서, 인공호수 부근을 찾는 연인들에게 러브하우스(?)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체면을 앞세워 사양하던 딩 사부도 배고픔 앞에 어쩔 수 없이 승복하고 만다. 문제는 이게 큰 돈벌이가 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각종 연인들의 편의를 위한 제품을 장만하면서 딩 사부의 러브하우스는 상종가를 치기 시작한다. 호사다마라고 좋은 일에는 항사 마가 끼는 법, 과연 딩 사부의 아담한 연인들의 휴게소사업은 어떻게 될까?

 

쇠불알볶음 때문에 이러저러한 에피소드가 끝없이 발생한 두 번 째 이야기 <> 역시 읽을 만하다. 소는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생산을 위해 절대 필요한 존재다. 집단생산의 상징인 인민공사 소속 소들도 귀한 대접을 받는다. 문제는 다른 곳에 한눈 팔지 말고 일만 열심히 하도록 거세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작가 모옌은 소를 거세하면서 벌어지는 에피소드에 다양한 유머 코드를 넣으면서 재밌는 전개를 구사한다. 빼어난 기술을 자랑하는 수의사 동지를 소 잡은 우마왕이라고 표현한 장면에서는 절로 웃음티 터져 나온다. 그런데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지 않을까? 거세된 소처럼 죽어라 일만 하고 자신들의 정치적 목소리는커녕 자신들의 대표조차 마음대로 뽑지 못하는 중국의 인민들이야말로 정치적으로 거세된 존재라고 말이다. 요즘 읽고 있는 샤리아르 만다니푸르의 <이란의 검열과 사랑이야기>에서 이란 정부의 검열관들이 상상을 초월하는 성적 코드 잡아내기에 달인이라면, 중국의 공안들은 이렇게 중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들을 잡아내는데 달인이 아닐까. 소 솽지를 둘러싼 한바탕 소동은 거세를 잘못해서 살모넬라균에 지독하게 중독된 솽지를 잡아먹은 인민공사 지도급 인사들의 집단 식중독으로 끝난다. 사건 처리를 비꼬면서 이거야말로 프롤레타리아 계급 문화대혁명의 위대한 승리라고 떠벌리며 피날레를 장식한다. 멋지다.

 

마지막 에피소드 <삼십 년 전의 어느 장거리 경주>는 모든 일에 있어 거의 전능한 능력을 보여준 우파분자, 그 중에서도 주충런 선생에 대한 오마쥬다. 1960년대 중국 각지에서 대부분의 우파분자들이 혹독한 시절을 보내는 동안에도 글쓴이의 사는 동네로 추방된 우파분자들은 각자 맡은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며, 쾌활하고 낙천적으로 지냈다고 증언한다. 저자가 다닌 다양한 소학교의 노동절 체육대회와 관련된 현란한 이야기가 쏟아져 나온다. 관람대를 만들기 위해 멀리 장백산에서 운반된 홍송 재목을 훔쳐 어머니 관을 짜려던 얼치기 도둑 이야기, 주 선생이 내로라하는 탁구선수를 완패시킨 이야기하며 하나 같이 모옌의 장기인 리얼리즘에 바탕한 이야기들이다. 이 탁월한 우파분자 주 선생이 참가한 장거리 경주 우승으로 화려한 마무리를 맺는다.

 

인민해방군 출신의 작가 모옌은 철저하게 체제 안에서 허용될 수 있는 이야기에 초점을 맞춘다. 그렇다고 미국에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하진처럼 폭넓은 표현의 자유가 허용되는 건 아니다. 리얼리즘에 탁월하지만, 항상 경계에 근접해 있을 따름이다. 왜 경계를 뛰어 넘어 곪아 가고 있는 체제의 급소를 찌르지 않는지 궁금하다. 딩 사부의 휴게소 사업 에피소드도 사회주의 체제 하에서 그런 게 가능할지 의문이 들게 만든다. 아무리 노동 계급의 영웅이라고 하더라도, 구조 조정되어 먹고 살 게 없어진 마당에 국가가 책임지지 않는다면 수치스러운 일이라도 감수해야 한다고 모옌은 냉정하게 그린다.

 

무산계급이야말로 공산주의 국가의 기둥이라고 하지만, 권력화된 무산계급의 위선과 타락을 보여주는 <> 역시 마찬가지다. 냉소적으로 사건을 전개해 가며 선을 넘지 않는 기법 역시 탁월하다. 체제 내에서 작품활동을 계속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타협이었을까? 모옌의 소설에는 과거의 중국이 아닌 현재의 중국 이야기는 왜 없는 것일까. 그가 중국 정부가 환영하는 어용작가라는 비판 역시 다시 한 번 곱씹어 봐야하지 않을까 싶다. 개인적으로 모옌보다 더 높게 평가하는 같은 인민해방군 출신의 옌롄커 작가의 문화혁명과 대약진 운동에 대한 반성 같은 날선 비판을 그에게 기대하는 건 무리일까. 갈수록 고단수가 되는 딩스커우 사부의 유머가 그저 우습게 읽히지만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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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변화한다 - 모옌 자전에세이
모옌 지음, 문현선 옮김 / 생각연구소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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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주 오래전 어느 미술관에서 20세기 현대미술의 아이콘이 된 피카소의 젊은 시절 작품전시회를 관람했다. 솔직하게 말해서 그의 현대미술도 그렇지만, 그가 젊은 시절 그린 습작 같은 그림을 보면서 저게 뭐야, 저건 나라도 그릴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훗날 일가를 이루게 되면 그런 시절도 다 평가를 받는 것이 인지상정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오늘 이야기할 모옌의 경우도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사실 작년 모옌이 노벨문학상을 받기 전까지만 해도 그는 그냥 그런 중국 작가 중의 한 명이었다. 하지만, 스웨덴 한림원에서 그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발표하는 순간 그는 그냥 그런 중국 작가가 아닌 노벨문학상을 받은 대가의 반열에 오르게 됐다. 나도 그의 작품은 그냥 짧은 단편을 하나 만났을 뿐, 본격적으로 그의 작품을 읽기 시작한 건 그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 이후였다. 그리고 이 작가에 대한 생각(다른 표현으로 하자면 편견)은 이전과 영원히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환상적 리얼리즘의 대가라는 모옌의 첫 번째 회상록이라는 거창한 타이틀답지 않게 <모두 변화한다>에는 모옌의 자전적 이야기가 담겨 있다. 마치 작가의 위상 변화를 예언하듯 제목 한 번 멋지다. 그렇지 모든 건 변하기 마련이지. 중국혁명의 상징이었던 마오 주석이 죽고, 세상은 다시 한 번 바뀐다. 작가 모옌은 자신의 회상에서 이전의 문화혁명이 가져온 혼란상 대신 신중국 건설의 이데올로기를 이식하기 위한 적절한 타이밍으로 1979년을 꼽았지만, 어쩔 수 없이 1969년 문화혁명이 한창이던 시절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노라고 고백한다.

 

그 시절 아이들은 한국전쟁에 참가한 고물 트럭 국방색 가즈51의 속도감을 숭배했다. 그리고 회상록의 화자 는 대학을 포기하는 대신 군인이 되기 위해 인민해방군에 입대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여러 귀인의 도움을 받았다고 읊조린다. 어느 국가든 개발 단계에서 군이야말로 최고 엘리트 양성소가 아니었던가. 훗날 대문인이 되는 작가 지망생 역시 군에서 그의 화려한 경력을 출발한다.

 

군복무 기간 동안, 베트남과의 전쟁도 체험한 천재 영웅은 장교로 진급하고 드디어 해방군 예술대학에도 진학하게 되면서 성공가도를 달리게 된다. 연달아 영화 <붉은 수수밭>의 원작인 <홍까오량 가족>을 발표해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기도 했다. 그리고 소설의 성공은 경제적 여유와 드디어 노벨상수상이라는 영예에까지 도달하게 되었다는 그의 소회를 전한다.

 

그 사이사이에 끼어든 허즈우와 루원리, 그러니까 작가의 어린 시절 친구들의 일화에 개혁개방 그리고 이제는 G2의 대국이 된 중국현대사를 적절하게 섞은 작가의 비망록으로 다가온다. 책의 띠지에 실린 대로 이 책이 모옌의 회상록이라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잘 쓰인 한 편의 소설이라는 점에는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과연 어디까지가 소설이고, 어디까지가 자신의 회상일까 그 부분부터 명확하지 않다. 그러기에는 여백이 너무나 많다. 그냥 작가 모옌에 대한 짧은 소개서 정도라고 하면 되지 않을까. 회상록이라고 하기에는 빈 공간이 너무 많고, 그렇다고 소설이라고 부르기엔 서사의 힘이 달린다.

 

모옌의 다른 작품도 그렇지만, 문학이 다루어야 할 핵심 과제에서 작가는 회피신공을 보여주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제는 사회주의도 아닌 그렇다고 자본주의도 아닌 이상한 시스템으로 변질되고 있는 중국식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 대신 자신이 보고 싶은 그리고 국가가 보여 주고 싶은 사회의 단면에 천착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다. 정말 첨예한 빈부의 격차 문제, 중국의 화약고라 불릴 정도로 불만이 팽배해져 가고 있는 수억을 헤아리는 농민공들의 모습, 최근 세기의 재판으로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보시라이 재판 같은 부정부패 이슈를 정면으로 돌파해 볼 요량은 작가에게 묻고 싶다. 이 정도로는 그가 누구인지, 그의 문학세계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판단하기에는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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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시공사 베른하르트 슐링크 작품선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박종대 옮김 / 시공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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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에 읽을 책에 대한 리뷰를 9월에 쓰려니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책을 다시 뒤적거리면서 리뷰를 쓰게 됐다. 책의 제목인 <주말>처럼 주말 동안 벌어진 일을 어느 4월의 주말에 다 읽고 싶었지만 그렇게는 안되었다. 생각보다 시간이 좀 걸리는 독서였다는 기억이 난다.

 

최근 문학동네 팟캐스트 <문학이야기>를 통해 슐링크의 소설집 이야기를 들었고, 올해 4월에 읽은 슐링크의 장편 소설 <주말>을 읽었지만 리뷰를 쓰지 않았다는 기억이 났다. 그리고 책을 다 읽은 후의 의식을 치르지 않았구나 싶었다. 소설 <주말>은 독일 작가 베른하르트 슐링크가 기술한 어두운 독일 현대사의 후일담이다.

 

어느 주말, 전설적인 독일 적군파 테러리스트 외르크의 석방에 즈음해서 그의 석방을 기념하기 위해 11명의 친구들이 모인다. 그 중에는 외르크와 함께 적군파 활동을 했던 동지들도 있으며, 외르크의 친누나로 이 모임을 주최한 크리스티아네가 중심에 있다. 친구들의 직업도 다양하다. 글 쓰는 교사, 전직 조직원이었다가 전향해서 덴탈랩을 운영하며 성공한 사업가가 된 치과기공사, 저널리스트, 외르크의 구명을 위해 노력한 변호사에 이르기까지 작가가 펼치는 흥미로운 서사를 위한 모든 직업이 동원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외르크는 저널리스트이자 동료였던 헤너가 자신을 밀고했다는 생각을 감방에서 지낸 20년간 품고 있다. 이 설정만으로도 초반에는 서로 회피하지만, 가공할만한 폭발력일 가진 이야기라는 사실을 독자는 짐작하게 된다. 사업가 울리히의 딸인 도를레가 외르크를 유혹하는 해프닝은 서사의 전개에 긴장감을 고조한다. 이젠 혁명 따위가 다 뭐냐, 먹고사니즘이 최고다라는 자본주의 계급의 이해를 대변하는 전향자 울리히는 스스로 옹립한 정당성을 웅변한다. 동시대의 동지들은 모두 변신해서 사회의 한 축을 구성하는 일원으로 살고 있지만, 여전히 20년 전 외르크의 이데올로기에 취해 다시 한 번 혁명의 깃발을 치켜 올리기를 기대하는 청년 마르코 한의 등장은 조금 낯설게 다가온다.

 

물론 슐링크가 이 정도로 3일간의 짧지만 강렬한 이야기를 이끌어 가지는 않는다. 배신의 진짜 주인공을 밝히고, 또 외르크의 과거사를 촉발시키는 새로운 등장인물을 투입하면서 이야기는 긴장으로 치닫는다. 외르크를 석방시키는데 공헌을 한 변호사 안드레아스와 열혈청년으로 여전히 혁명을 꿈꾸는 마르코 한의 대립은 소설의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장치로 작동한다. 한편, 주변에서는 자신의 진로를 두고 옥신각신하지만 정작 외르크 자신이 꿈꾸는 삶은 무엇이었을까. 그저 담장 밖의 평범한 삶을 원하지 않았을까? 긴 투옥 끝에 그가 기대한 건, 소설에 나오는 그런 갈등이 아니었으리라. 우리는 상대방을 위한다고 하지만, 정작 그가 원하는 것이 그것이 아니라면 어쩔 것인가. 슐링크가 이 소설을 통해 던지는 질문의 파문은 은근하면서도 헤아릴 수 없는 깊이가 있다.

 

다양한 군상이 등장하는 <주말>을 통해 슐링크가 진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무엇일까. 독일 전전세대와 전후세대의 갈등에서 시작된 대립과 단절의 역사에 대한 고찰이 아니었나 조심스럽게 추정해 본다. W.G. 제발트가 <공중전과 문학>에서도 말했듯이, 비참했던 과거를 집단의 기억에서 배제하고, 조국재건이라는 테제 아래 매진했던 기성세대의 허위와 위선을 공격했던 적군파 집단은 극한 무력투쟁을 주장하며 점차 대중으로부터 고립되어 갔다. 그들의 대의에는 공감하지만 그들의 투쟁방식에 동의할 수 없었던 다수 대중에게 외면 받은 운동은 결국 소멸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문제는 자신들이 옳았다고 생각했던 전후세대도 시간이 지나 아버지 세대가 되면서 반복되는 대립과 단절을 극복하지 못했다는 것이 슐링크의 지적이다. 전전세대를 나치 노인네라고 부르며 살인자라고 비난했지만, 전후세대의 대표 주자인 외르크 역시 4명의 무고한 사람을 살해하고 24년형을 살지 않았느냐는 페르디난트의 비난이야말로 소설 <주말>의 핵심이다.

 

물론 슐링크는 이 모든 문제에 대한 대답을 이 책에서 제시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들에게 당면한 과제인 지하실에 고인 물을 파내는 협업으로 일촉즉발에 대한 갈등을 미봉하고 마무리하는 결말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쩌면 그 방식이야말로 그들에게 최고의 해결책이 아니었을까. 시간이 지나고 그 시절의 사건에 대해 객관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시점이 되면 옳고 그름이 보이지 않을까. 그렇다고 해서 시간이 해결책이다라는 무책임한 말을 하고 싶지는 않다. 나머지 판단은 어디까지나 독자의 주관에 따른 것일 테니까.

 

슐링크가 이 시대 마지막 테러리스트의 삶을 통해 던지는 여러 질문은 깊은 잔상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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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제임스 설터 지음, 박상미 옮김 / 마음산책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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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에 20년 지기 대학 동창들을 만났다. 오늘 아침에도 회사 동료와 말했지만 오랜 친구들과의 어떤 일들은 그렇게 시간이 오래 됐는데도 어제 있었던 일처럼 생생한가 하면, 불과 며칠 전의 일은 까맣게 잊어버리게 되다니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고.

 

제임스 설터라는 이름을 들으면서 참 낯설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전혀 모르는 이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름 책 좀 읽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문학에 대해 내가 모르는 게 아는 것 이상이구나 싶다. 지지난달 문학동네 팟캐스트 <문학이야기>에서 다시 한 번 제임스 설터의 이름을 듣고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된 그의 작품 <어젯밤>을 구입해서 천천히 아주 느린 속도로 읽기 시작했다. 모두 10편의 단편이 실린 그의 소설집 <어젯밤>은 확실히 특이한 소설이다.

 

이 책의 역자 박상미 씨는 배신을 이 책의 코드로 뽑았는데, 책을 다 읽고 나니 수긍이 갔다. 하지만 내가 고른 이 책의 코드는 배신보다는 기억이라고 말하고 싶다. 왕년에 군인이었던 작가 제임스 설터는 자신이 경험한 동료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군인이라면 누구나 죽어서 묻히고 싶어하는 알링턴 국립묘지(아마 우리나라도 치면 현충원이겠다)에 갈 수 없는 어느 군인의 이야기를 잔잔하게 들려준다. 그는 어떤 일 때문에 그럴 수 없게 되었지만, 그에게 더 소중한 것은 야나와 함께 보낸 그 시절에 대한 그리움과 기억이다. 내가 추구하는 가치보다 더 소중한 무엇이라면, 그 군인처럼 생각할 수 있을까? 한 때 군인이었던 작가는 가치와 추억을 동일선상에 두고 독자는 어떤가라고 조용하게 묻는다.

 

제임스 설터의 단편은 묘하게 과거의 좋았던 시절에 대한 회상을 현재에 대입하며, 끊임없이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플라자 호텔>이 그 대표 중의 하나다. 월 스트리트에서 성공한 중년의 아서는 어느 날 예전에 사랑하던 여인 노린에게서 전화를 받는다. 그 시절 누구보다 아름다웠던 여인의 추억은 스멀거리는 욕망을 주술처럼 불러낸다. 전화 받고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이 일이라는 아서와 노린과의 대화는 묘한 기대감을 불러 일으킨다. 게다가 노린은 남편과 헤어져 돌아왔단다. 아주 평범한 그들의 대화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며 많은 것들을 함축한다. 한 때, 여자 때문에 유대교 계율을 어기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던 남자. 결혼하기 전 그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었지만, 자신이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남자는 물러선다. 그리고 다시 재회하게 된 남자는 그녀에게서 세월의 흔적을 보고 다시 한 번 뒤로 물러선다. , 이런 상황에서 당신이라면 어쩔 텐가 하고, 또다시 묻는다. 제임스 설터의 단편은 그의 글을 소비하는 독자의 자아에 대한 끝없는 질문의 연속이다.

 

기억만큼이나 배신도 <어젯밤>을 지배하는 알고리즘의 하나다. <포기>에서는 겉보기에 아내와 지극히 평범한 결혼생활을 영위하는 남자의 이율배반적인 배신을 적확하게 지적한다. 아니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을까. 게다가 이 이야기는 사실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라고 하니 더욱 기가 찰 노릇이다. 예술가들의 행위는 보통의 도덕률마저도 뛰어넘는다는 말인가. 여기서 포기는 어떤 포기를 말하는가? 남편에 대한 아내의 포기인가? 아니면 내 인생의 절반을 포기하는 남자의 심정인가? 이 포기에 대한 시간적 배경 또한 공교롭게도 어젯밤이다.

 

<귀고리> 역시 마찬가지다. 문학 작품에 등장하는 금기는 모두 깨지기 마련이고, 해서는 안되는 행위에 대한 대가는 언제나 치르게 되어 있다. 문제는 그것이 비극을 바탕으로 한다는 점이다. 두 가지를 모두 다 가지고 싶어 하는 남자에게 선택은 그렇게 어려운 것일까. 유복한 가정생활 그리고 정부(너무 평범한 어휘일까) 사이에서 갈등하는 남자 브라이언은 자신의 애인 패밀라가 자신의 장인과 어떤 관계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그만 질투심에 사로 잡힌다. 여기서도 보통 사람이 가지게 될 흔한 도덕은 실종된다. 자신도 그 순간, 매력적인 패밀라에게 차였다는 사실도 모르고. 관계는 중첩된다. 그 중첩되는 관계 속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선택하고, 그 결과에 대해 만족감을 누릴 수도 반대로 비탄에 빠질 수도 있다. 자신의 선택에 당신을 책임질 준비가 되어 있는가? 또다시 제임스 설터는 묻는다.

 

왜 작가가 표제작이자 마지막 이야기 <어젯밤>을 말미에 배치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 정도로 <어젯밤>은 배신의 코드에 적합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자궁에서 시작되어 전신으로 퍼져 가는 병을 매조지하기 위해 마지막 만찬을 준비하는 아내와 남편. 남편은 사랑하는 아내를 먼저 보낸 다음을 대비하기 위해 부부가 알고 지내는 친구 수잔나를 초대한다. 죽음에의 초대. 이 초대는 두 여자 모두에게 끔찍하기 짝이 없는 초대다. 그 죽음을 실행해야 하는 남편 월터는 더하겠지만 말이다. 마지막 만찬에서 남편은 생전 마셔 보지 못한 575달러 슈발 블랑을 주문한다. 그는 35달러가 넘는 와인을 시켜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죽음 앞에서는 비용조차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그 비싼 마지막 와인을 수잔나에게 따라줬다는 사실이다. 이쯤되면 독자는 어느 정도 눈치를 챘어야 했는데. 죽음이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 독자의 이성은 무장해제당했다. 그 다음 전개는 죽음의 실행, 배신 그리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전이다. 도대체 당신이라면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대 독서의 강렬한 즐거움을 느끼고 싶은가? 그렇다면 제임스 설터를 읽을지어다. 수잔 손택의 비평을 빌리지 않더라도, 제임스 설터의 책은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다. 첫 경험이 이럴진대, 그의 대표작이라고 하는 <가벼운 나날>(1975)은 또 어떨까. 단언컨대 2013년 최고의 독서 체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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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 허풍담 2 - 북극의 사파리
요른 릴 지음, 백선희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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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냥꾼 외에는 거의 사람이 살지 않는 북극의 오지에서 16년을 산다고 가정해 보자. 게다가 그곳은 하루종일 해가지지 않거나 반대로 하루종일 해가 안 뜨는 적도 많지 않은가. 우리 같은 보통 사람이 살기에 적합하지 않은 곳이 분명하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곳을 동경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는 건 아닐 것이다. 속세의 번뇌를 피하고자, 악다구니 써야 하는 일상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이들에게 어쩌면 그곳은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 천국이 아닐까.

 

덴마크 출신의 작가 요른 릴은 이런 오지 그린란드에서 자그마치 16년이나 살았다고 한다. 그곳에서 그렇게 오랜 시간을 보냈으니 분명 남들이 보지 못한, 하지 못한 일들을 숱하게 체험했을 것이다. 여기에 글을 쓰겠다는 욕망만 더해지면, 정말 대단한 작품이 나오지 않겠는가 말이다. 요른 릴은 극 중에서 명백하게 자신의 페르소나인 안톤 페데르센으로 분해서 자신의 동료 사냥꾼들과 그린란드 북동부의 오지에서 벌어지는 기상천외한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이제 막 시험을 치른 안톤은 꿈꿔오던 북극의 영웅이 되고자 조국 덴마크를 떠나 바다표범 사냥선인 베슬 마리호를 타고 그린란드에 도착한다. 물론 처음에는 이것 저것 배울 것이 많아 고달픈 시절을 보내기도 하지만, 다람쥐 쳇바퀴 도는 일상과 별 볼 일 없는 북극 생활에 염증을 내기 시작한다. 그러던 차에 중대한 결심(?)을 한 안톤에게 한 마리의 눈멧새가 찾아 오면서 상황은 역전된다. 마치 의상대사가 해골 바가지의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었듯이, 우리의 안톤도 그런 유심론에 도달하게 된다.

 

북극 사나이들의 허풍은 그야말로 끝이 없다. 얼치기 사냥꾼 시워츠는 자기를 밥으로 생각하고 공격해오는 흰곰의 습격을 받고 스트립쇼를 해대며 간신히 위기를 벗어난다. 하지만 엉겁결에 그만 은신처로 사냥총을 가져 오지 못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른다. 그렇다고 마냥 절벽 빌라에 숨어 있을 수만은 없어 부지깽이와 손도끼를 무장하고 사냥총을 회수하러 나섰다가 흰곰과 마주치는 봉변을 당한다. 절체절명의 순간, 흰곰 못지 않은 짐승같은 포효로 위기를 모면하는 시워츠. 얼치기 사냥꾼보다 한수 위인 흰곰은 자기 고기를 놓치지 않기 위해 빌라의 지붕에 올라가 사냥감을 엿본다. 시워츠는 이 위기를 실수 한 방으로 멋지게 해결한다. 그야말로 잊지 못할 신의 한수 같은 허풍이다.

 

배는 부서지고 엉뚱하게 빙산에 올라 바다표범을 잡아먹으며 며칠을 여행한 끝에 구조되는 이야기, 존재하지 않는 상상의 여인인 엠마를 거래하며 기나긴 겨울을 보내는 사냥꾼들의 터무니없는 허풍까지 북극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하나 같이 금시초문이다. 문제는 요른 릴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그 허풍이 재밌다는 점이다. 게다가 어느 정도는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진실성도 담보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북극에 가보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북극 허풍담> 두 번째 인스톨에서 압권은 역시 부제인 <북극의 사파리>였다. 영국에서 오신 저명한 숙녀의 요구대로 북극 사향소를 잡기 위해 동원된 안톤과 그의 동료 원주민. 그들은 행여라도 숙녀의 심기에 불편함을 끼쳐 드릴까봐 고약한 냄새로 얼룩진 자신의 오두막을 청소하고 난리법석을 떨지만, 고명하신 레이디는 북극 사냥을 원한다. 그들처럼 오로지 방한을 위해 되는 대로 걸치고 사냥하는 것이 아니라, 무거운 욕조까지 동원한 사파리 팀이 구성된다. 한편 돈 밖에 모르는 올슨 선장은 북극의 원주민들에게 협잡을 부리려다가 걸려 옴팡지게 댓가를 치른다. 마지막 에피소드에서도 생각지 못한 모자와 고기 요리도 맛보게 되는 장면을 상상하면 정말 유쾌해진다. 그런 그들을 끝까지 북극에 사는 원주민이라고 생각하는 숙녀의 착각은 정말 일품이었다.

 

요른 릴은 허풍이라는 유머를 밑밥으로 해서, 우리가 전혀 들어 보지 못한 세계의 이야기를 전개한다. 우리와 다른 세계에 사는 북극의 사냥꾼들의 모습에서 어떤 감흥이 드는가? 단순하게 우리와 다른 이들의 삶을 보고 듣는 것만으로 즐겁고 재밌는가.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좀 거창하게 말하자면, 작가의 글은 인류사적 측면에서 내가 체험해 보지 못한 다른 공간에 삶에 대한 진실한 르포르타주의 방식으로 삶의 본질을 관통한다. 작가의 그런 정신과 공명하게 된다면, <북극 허풍담>은 더할 나위 없는 보물일 것이다.

 

<북극 허풍 시리즈>는 모두 10권으로 구성되어 있단다. 일단 1권에서 3권까지 세 권이 나왔는데, 생각보다 반응이 시원치 않은가 보다. 이 책의 편집을 맡은 편집자의 말에 따르면 나머지 7권을 출간시키기 위해 사장님에게 출간 압박용 메일을 보내란다. 친절하게도 그 주소는 책의 맨 마지막 장에 뚜렷하게 인쇄되어 있다. 먼저 두 번째 인스톨을 읽고, 지금은 첫 번째 인스톨을 읽고 있는데 목하 사장님에게 이메일을 써야 하나 고민 중이다. 이 시리즈를 계속 만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지만, 여전히 읽어야할 다른 책들이 많으니 어찌 하오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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