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스 87분서 시리즈
에드 맥베인 지음, 이동윤 옮김 / 검은숲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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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한집 사는 사람이 나에게 경고했었다. 너무 추리소설 혹은 형사물에 빠지지 말라고. 그 경고를 사뿐하게 무시했던 나는 요즘 잠이 부족해서 너무 피곤하다. 나를 피곤하게 만드는 주범은 바로 87분서 시리즈의 작가 에드 맥베인이다. 이제 고인이 된 늙다리 작가의 책을 신나게 뒤적여서 뭐하냐고? 한 번이라도 에드 맥베인의 글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그런 말은 하지 않겠지. 50편을 훌쩍 넘는 에드 맥베인의 87분서 시리즈 중에서 이제 꼴랑 두 권을 읽었지만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하다, 그의 매력에 흠뻑 빠지기엔 말이다.

 

지난 주에 읽은 소품 격에 해당하는 <조각맞추기>에 비해 중기 걸작으로 치는 <아이스>는 일단 분량에서부터 내가 읽은 전작을 압도한다. 두툼하다. <조각맞추기>는 피니스 아프리카에라는 신생출판사에서 나왔었는데, <아이스>는 시공사 임프린트에서 나왔다. 아마 판권이 여러 개로 갈린 모양이다. 시리즈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경찰혐오자>는 아마 민음사에서 나왔지. 암튼, 소설 <아이스>의 시작은 아이솔라 시에서 벌어지는 정체 불명의 사건으로부터 비롯된다. 샐리 앤더슨이라는 예쁘장한 무용수 아가씨가 괴한의 총격을 맞고 죽는다.

 

그리고 작가는 무대의 카메라를 바로 온갖 사건 사고로 들끓는 87분서로 돌린다. 스티브 카렐라와 마이어 마이어 콤비를 비롯해서 아서 브라운과 버트 클링 등 시리즈의 주역이라고 할 수 있는 형사들이 줄지어 등장해서 제 각각 임무를 맡고 조무래기 마약상 살해건까지 더해 미스터리를 파헤치기 시작한다. 하드보일드 소설의 전통을 잇는 소설답게,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전개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분명 카렐라 형사가 주인공이지만 에드 맥베인은 치우침 없이 캐릭터에게 균등한 역할을 부여한다. 이걸 균형감이라고 부르던가. 멋지다.

 

일견 단순해 보이던 두 별 건의 사건은 용의자가 같은 총으로 피해자를 쐈다는 점에서 한 방에 훅 달아오르는 긴장감을 조성한다. 한 명의 범인이 저지른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카렐라 형사와 그의 동료 마이어 마이어 형사는 피해자 주변에 대한 탐문 수사를 시작한다. 역시나 정석대로다. 다만, 그 정도로는 쉽게 문제 해결에 도달할 수가 없겠지. 그들이 탐문 수사의 영역을 넓힐수록 용의자들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누가 봐도 빤한 거짓말을 하거나 필요 이상으로 흥분하고, 혹은 자신이 숨기고 싶은 관계가 드러날까봐 두려워하는 인간 군상의 심리를 작가는 예리하게 짚어낸다. 하나 같이 그들이 하는 말 중의 하나는 경미한 범법을 저질렀을 진 몰라도, ‘내가 죽이진 않았다란다. 항상 그렇듯 아둔한 독자는 이게 뭐야, 다 범인들 같은데. 다만 그놈의 동기를 찾을 수가 없다. 작가가 마련해둔 비장의 동기와 사연은 언제나 독자의 예상을 비웃는다.

 

밸런타인 데이 즈음해서 전개되는 미궁에 빠진 사건은 주인공 카렐라 형사가 사랑하는 아내 테디에게 그럴싸한 선물조차 제 때 못사게 만든다. 게다가 분서장인 피트 번즈는 최소한의 인원으로 사건을 해결하라고 형사들을 쉴 새 없이 들볶고, 아이솔라 시를 번잡하게 만드는 사건 사고는 끊일 줄 모른다. 오쟁이진 아내 때문에 동료 형사들의 걱정 근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버트 클링 역시 주목할 캐릭터다. 그와 동료 형사 아일린 버크 사이에 전개되는 달달한 케미는 삭막한 형사물에 생기를 불어 넣어 준다. 그렇지, 강력 범죄에 시달리는 형사들이라고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아닐 것이다. 그들도 우리네처럼 부부싸움과 온갖 잡다한 문제들로 골머리를 앓겠지.

 

500쪽이 넘는 페이지를 차근차근 넘길수록 에드 맥베인은 독자를 한 단계씩 범인의 곁으로 인도해 간다. 뭐 다 알다시피, 소설의 범인인 등장인물 중의 하나다. 맨날 하는 말이지만, 그렇지 않은 추리 범죄물도 있었던가. 빼어난 작가라면 예의 공식 안에서 어떻게 하면 범인이 누굴까라는 호기심과 긴장감을 마지막 페이지가 다 넘어가기 전까지 아슬아슬하게 유지하면서, 독자를 애달프게 만들 줄 아는 사람이 진정한 강호의 고수가 아니겠는가. 그런 점에서도 단언컨대 <아이스>의 저자 에드 맥베인은 상고수라고 말할 수 있겠다.

 

핸드폰이나 컴퓨터 같은 첨단 장비가 없더라도 우리 87분서 소속 경찰들은 출중한 감과 현장에서 익힌 노련미로 잘만 범인을 검거해왔다. 어쩌면 역설적으로 첨단 기술의 발전은 범인 검거에도 도움을 주지만, 그 반대로 완전 범죄의 가능성을 더 높이는데도 기여할 수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세상살이가 다 그렇듯, 빛이 있으면 반대로 어둠도 있는 법이지.

 

단순한 살인사건에서 출발한 <아이스>는 뮤지컬 업계에서 통용되는 <아이스>라는 하우스 시트로 배정된 표빼돌리기 기법에서 마침내 콜롬비아 산 코카인까지 나오는 블록버스터급으로 급성장한다. 아마 당시 미국 사회에 처음 코카인이 처음 소개되고 있던 시기였는지 작가는 콜롬비아 산 코카나무에서 채취한 코카인이 어떻게 희석되어 소비자의 손에 들어오는지 소설에서 비교적 상세하게 그리고 있다. 보너스로 이 마약이 어떤 다양한 별명으로 불리는지까지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형사간의 달달한 로맨스에, 조무래기 마약 딜러를 대체하려는 잡범 그리고 치정에 얽힌 복수극까지 그야말로 보여줄 수 있는 건 총동원돼서 다채로운 재미를 제공한다. 물론 마지막까지 결말을 알 수 없는 예측불허의 사건 전개 또한 일품이다.

 

아무래도 나의 에드 맥베인 탐닉 속도가 그의 다른 87분서 시리즈 출간 속도를 앞지를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이러다가 기존에 출간된 시리즈를 모두 읽게 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 앞선다. 어젯밤에 <아이스>를 다 읽고, 미리 준비해둔 <킹의 몸값>을 벌써 1/3이나 읽었다. 이 가을의 마지막은 에드 맥베인과 함께 하는구나. 쉽고 재밌게 읽히는 책이 선()이라면 에드 맥베인의 <아이스>는 상고수가 시전한 최선의 한 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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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맞추기 87분서 시리즈
에드 맥베인 지음, 홍지로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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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니스 아프리카에에서 나온 <조각맞추기>를 읽었다. 어제 도서관에 가서 에드 맥베인의 87분서 시리즈 중 <아이스>를 빌려 왔는데, 읽기는 오늘 산 <조각맞추기>를 먼저 읽었다. 형사물 장르를 만들어낸 것으로도 유명하다는 고() 에드 맥베인의 자그마치 57편이나 되는 시리즈 물 중 처음으로 만난 책이라 그런지 더 감회가 깊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장르물이 개척한 온갖 시리얼킬러와 흉악범들을 거쳐서 그런지 올드스쿨 스타일의 형사물이 촌스럽게 느껴진다고나 할까. 스토리는 비교적 간단하다. 서로 치고 박다 죽은 것으로 추정되는 살인사건을 시작으로, 6년 전 당시로서는 거금인 75만 달러를 턴 은행강도들이 남긴 보물찾기에 조각난 사진이 필요하다. 우리가 흔히 하는 직소 퍼즐 맞추기처럼 87분서 소속의 유능한 형사들이 퍼즐맞추기에 동원된다.

 

극 중에서 슈퍼스페이드로 등장하는 스티브 카렐라 형사의 파트너인 아서 브라운의 캐릭터에 주목할지어다. 어째 이름부터 흑인이라는 냄새가 물씬 풍기지 않는가. 어쩌면 일가를 이룬 에드 맥베인은 이름에서부터 바로 정면대결을 피하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역자 후기에서도 밝히듯이 이 소설의 진짜 재미는 사진 직소퍼즐 찾기가 아니라, 작가가 의도적으로 곳곳에 배치한 잉여의 순간들을 읽을 때다. 어차피 사건이야 책을 끝까지 다 읽으면 해결될테니까 나같은 게으른 독자들은 그저 그 순간들을 즐기면 그만이다.

 

그 어떤 빈집털이보다 뛰어나다는 형사들은 영장 없이 용의자의 집을 드나들며 증거 확보에 여념이 없다. 유력한 단서를 가진 용의자는 때로는 슈퍼스페이드 형사를 유혹하기도 하고, 정보 제공 대가로 서슴지 않고 금품을 요구하기도 한다. 어떤 형사는 탐문 중에 빼어난 알리바이를 장기로 내세우는 매력적인 용의자의 애인에게 빠져 데이트 신청을 했다가 거절당하기도 한다. 공무수행 중에 알콜 섭취를 안하는 걸 다행으로 생각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소소하지만 소설 곳곳에 보이는 빛나는 유머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그나저나 스마트폰은커녕 구닥다리 핸드폰도 없어, 고장난 다이얼식 공중전화를 찾아 헤매는 형사들의 모습이 애처롭기까지 하다. 아니 도대체 그 시절에는 어떻게 신속하게 연락을 취하고 사건을 해결했단 말인가.

 

 

에드 맥베인은 예나 지금이나 범죄가 일상이 된 가상의 도시 아이솔라(대도시 뉴욕이 배경이 분명한)를 배경으로 형사와 범죄자 간의 게임을 유쾌하게 그려낸다. 소설 도중에 범죄자들이 범죄를 저지르기 위해 노력하는 만큼 보통의 생활에 치중했자면 그 이상의 보상을 얻었으리라는 지적에 얼마나 공감이 갔는지 모른다. 아무런 노력 없이 날로 먹기 위해 범죄를 저지른다는 말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결말에서 범인이 밝혀졌을 때, 일면 싱겁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첫 술에 배부르랴.

 

다시 아서 브라운 형사에 대해 좀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해보면, 에드 맥베인은 인종차별 이슈를 정면에 내세우고 독자에게 그래서 어쩔건대라고 도발한다. 게토 출신의 흑인 형사는 가까스로 탈출한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자신에 대한 인종차별적 발언도 슬쩍 피해가는 융통성도 발휘할 줄 안다. 여전히 존재하는 사회적 편견에 맞서 싸우는 전사 이미지보다 두루뭉술한 그것을 차용한 작가의 전략이라고나 할까. 물론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를 수도 있겠지만.

 

언제나처럼 분주한 독서의 와중에 만난 형사물은 기대한 것 이상으로 담백했다. 치밀한 구성의 긴장감 넘치는 정교한 추리물보다 이런 올드스쿨 스타일의 설렁설렁 읽히는 형사물이 좋은 걸 보면 나도 이제 올드스쿨 인간이 된 모양이다. 피니스 아프리카에에서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에드 맥베인 시리즈가 나올지 궁금하다. 배스킨 라빈스 아이스크림처럼 골라 읽는 재미를 지속적으로 제공해 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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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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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왜 사람들이 그렇게 하루키 타령을 해대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난 그들만큼 하루키를 읽어 보지 않아서일까. 아마 그의 팬들처럼 하루키를 많이 읽다 보면 그들처럼 하루키 매니아가 되어 버릴 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도 책쟁이인지라 지난여름 하루키의 신작 소설이 엄청난 인세 경쟁 끝에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책을 샀다. 그리고 바로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나름 흡인력이 있어, 250쪽까지 빛의 속도로 그렇게 읽었다. 하지만, 곧 급하게 읽어야할 다른 책들이 강력하게 등장했고 독서모임을 이틀 앞둔 오늘에서야 비로소 <다자키 쓰쿠루>를 다 읽었다.

 

그렇게 두 번에 나누어 읽다 보니 서로 다른 두 책을 읽은 기분이다. 무더운 여름에 좀 달뜬 기분으로 베스트셀러 작가의 신작을 대했다면, 만추의 계절에서 겨울로 접어드는 길목에 만난 하루키는 또 달랐다. 석 달 동안 책에 담긴 서사가 성숙한 느낌이랄까.

 

<다자키 쓰쿠루>의 주인공은 말 그대로 다자키 쓰쿠루(). 도쿄의 지하철역을 설계하는 엔지니어이자, 건실한 36세의 중년 남자다. 고만고만한 연애와 이별을 경험하며 보통의 삶을 살고 있는 그에게는 16년 전 지울 수 없는 상처가 있다. 그리고 그는 그 상처를 통해 자신이 어쩌면 우연이었지만 가장 소중했던 우리 시절과 강제적으로 격리됐음을 곱씹는다. 마치 현재 우경화로 치닫는 오늘날의 일본이 버블 경제가 한창 위세를 떨치던 시절을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것처럼 그렇게, 이 남자는 하나하나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 놓는다.

 

독자는 당연히 도대체 16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 한다. 다자키 쓰쿠루는 현재 자신의 애인인 사라를 통해 과거 청산으로 내몰린다. 예의 과정을 통과해야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걸까. 자신이 좋아하는 수영처럼 세상에 역류하지 않고 살아온 남자 쓰쿠루는 이번에도 애인의 요청을 거스르지 않고, 자신의 과거사를 파헤치기 시작한다. 주체는 벼랑 끝에 내몰려야 비로소 주체적으로 행동하게 된다는 강신주 박사의 말이 언뜻 뇌리를 스쳐간다.

 

사실 석 달 전에 읽은 부분에 대해서는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 엄청난 고통을 안겨준 격리로부터 간신히 치유된 쓰쿠루가 어떤 청년과 관계를 시작하지만 그 역시 소리 소문 없이 사라져 버렸다던가. 그조차도 이제 단련된 무색채의 쓰쿠루에게는 별 다른 뉴스거리가 되지 않는다. 이미 큰 상처를 겪었기에. 이제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어떻게 해서 나고야 시절 죽마고우들이 자신을 외면하게 되었는가의 연유를 찾는 것이다.

 

고향 나고야에 들러 지역사회에서 나름 성공한 세일즈맨과 기업 강사를 일하는 친구들을 만난 쓰쿠루는 나머지 친구들에 대한 소식을 전해 듣게 된다. 시로()는 죽었고, 구로()는 핀란드 남자와 만나 일본을 떠났노라고. 죽은 이에게 들을 말이 없는 쓰쿠루는 산 자를 찾아 핀란드로 떠난다. 개인적으로 핀란드로 과거를 찾는 순례를 떠난 그의 여로가 이 소설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문득 왜 하필이면 북구의 나라 핀란드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키가 소설에서 서술한 여러 단서들로 추론해 보지만 쉽지 않다.

 

하루키의 전작 <1Q84>를 읽어보지 않아 상대적 비교가 불가능하지만, 주워들은 바에 의하면 전작이 사회문제에 좀 더 천착했다면 신간 <다자키 쓰쿠루>는 개인사의 영역에 비중을 맞춘 게 아닌가라는 평이다. 문학이 어느 사회의 거울로 작용한다는 가정을 한다면, 그동안 세계에서 무언가 주도적인 역할을 맡기 동분서주하던 국가 일본이 이제는 내실을 다지고 자기 내부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는 반증이 아닐까.

 

신주쿠 역에서 어디로 갈지 모르고, 아니 갈 곳이 없는 상태로 서 있는 다자키 쓰쿠루의 모습에서 오늘날 일본을 읽는다고 한다면 무리일까? 다자키 쓰쿠루가 선친에게 물려받은 집과 유산으로 오늘날 자신을 이룬 것처럼 전후세대에 빚진 일본의 신인류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무한할 것처럼 보였던 국가 일본의 경제번영은 더 이상 그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지 못하고 있다. 신주쿠 역에서 무표정으로 고개 숙인 채 직장으로 향하는 그들을 애써 변명하는 하루키의 모습이 그저 애처롭게 다가올 뿐이다. 그래서일까, 그가 읊조리는 우리는 우리였다라는 표현이 전혀 낯설지 않다. 우리는 우리대로 행복하니 너희들의 잣대로 우리를 판단하지 말란다. 잘난 작가가 보여주는 자신감의 발로일까.

 

역시 소설 <다자키 쓰쿠루>의 하이라이트는 아무런 사전 정보도 없이 마지막 남은 올드 멤버 구로/에리를 찾아 나선 핀란드 여행이다. 그것은 라자르 베르만이 연주하는 피아곡의 선율에 따라 이역만리 낯선 땅에서 진실을 찾는 구도자의 모습으로 순례에 나선 쓰쿠루에게 여행 자체가 주는 치유의 시간이다. 그리고 독자는 어느 순간에서부터인가, 어떻게 해서 쓰쿠루가 모임으로부터 왕따를 당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이유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묵묵하게 받아들인다. 심지어 핀란드 여행에 앞서 자신이 애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라가 중년남자와 함께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에 충격을 받지만, 그것조차 이미 막바지에 달한 소설에서 더 이상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다자키 쓰쿠루는 그동안 고난과 역경을 헤쳐 나오면서 그전보다 더 단련되었기 때문에? 아니면 정신적으로 더 잃을 게 없다는 판단에서일까? 그렇게 소설은 열린 결말로 내달린다.

 

싸구려 힐링과 멘토링이 범람하는 시기에 하루키의 소설에서 어떤 종류의 치유를 기대했다면 그건 어쩌면 난망한 기대였을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베스트셀러 작가답게, 재밌게 잘 읽히는 글쓰기 실력에 대해서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소설의 곳곳에서 보이는 하루키 특유의 섬세한 도회적 스타일 구사는 여전하다. 하지만 여전히 나와 하루키가 통했느냐는 의문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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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가공선 창비세계문학 8
고바야시 다키지 지음, 서은혜 옮김 / 창비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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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에서 일본을 우습게 보는 나라 중의 하나가 바로 우리나라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나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특히 문학 부분에 대해서는 더 그렇다는 느낌이다. 문학상 수상이 그 나라 문학의 척도가 될 순 없겠지만, 우리와 달리 이미 두 명의 노벨문학상까지 배출했단 점을 고려해 볼 때 마냥 백안시하는 것도 아닐 것이다. 창비 팟캐스트에서 황정은 작가의 소개로 언제고 읽어야지 벼르고 있던 코바야시 타끼지의 <게 가공선>을 오늘에서야 작심하고 다 읽을 수가 있었다.

 

<게 가공선>은 일본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걸작이라는 말 그대로, 러시아 캄차카 반도에서 게를 잡는 게 가공선 어부와 선원들이 선장과 감독의 비인간적 처우에 저항해서 연대하고 조직해서 승리를 거둔다는 내용이다. 이 작품이 발표된 1929년은 일본 제국주의/군국주의가 그야말로 기승을 부리던 시기다. 일본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통해 국제사회에 제국주의 열강으로 인정받게 되었고, 우리나라와 타이완을 병탄하면서 그야말로 욱일승천의 기세였다.

 

일본 산업화의 이면에는 소설에 묘사된 대로, 노동자 농민에 대한 상상을 초월하는 가혹한 착취가 자리잡고 있었다. 북양어업을 통해 막대한 이윤을 내는 자본가들은 정치권과 결탁해서 일본의 영역을 사할린을 넘어 러시아 영토 캄차카 반도까지 확장하려는 야욕을 가지고 있었다. 재벌, 군국주의 정부 그리고 군부 연합체는 다양한 방법으로 노동자 빈민을 착취하면서 일본의 군사대국화를 도모했다. 소설에 나오는 내지나 일본 도호쿠 지방의 빈민들은 자신의 고향에서 쫓겨나 홋카이도로 이주해서 부농이 되는 꿈을 꾸지만, 밑천 하나 없이 맨몸뚱이로 황무지를 개간해서 옥토로 만든 그들을 기다리는 건 가혹한 토지수탈 뿐이었다. 그렇게 막장으로 내몰린 농민, 탄광 출신의 광부, 가난한 학생들은 계절노동자로 변신해서 홋카이도 남단의 하코다테에서 출항하는 핫꼬오마루에 승선한다.

 

 

 

 

 

코바야시 타끼지가 묘사하는 게 가공선 핫꼬오마루의 모습은 지옥도 그 자체다. 반항적인 어부를 윈치에 매다는 가혹행위는 다반사고, 게가 한창 잡히는 혹한의 계절에 무리하게 어부들을 폭풍(토끼)이 몰아치는 바다로 내몰고, 그들이 설사 귀환하지 못한다고 해도 선주인 자본가는 배를 보험에 들어놔서 문제가 될 게 없다는 식의 인명경시는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한다. 대나무 채찍과 몽둥이 찜질로 몸이 아프거나 다친 어부들도 예외 없이 게 으깨는 작업과 게 가공 작업에 내모는 비인간적 감독의 모습은 끔찍하다. 마치 한 편의 르포르타주를 보는 것처럼 작가는 그렇게 생생한 비극을 연출한다.

 

얼마 전 들은 다산북스 팟캐스트에서 강신주가 박사가 지적한 대로, 비참한 죽음이라는 벼랑 끝에 내몰린 어부들은 비로소 자각한 주체가 되어 그들을 억압하는 세력에 맞서 저항과 연대를 시작한다. 작가의 서술을 읽으면서, 왜 그렇게 일본 군부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두려워했는지 잘 알 수가 있었다. 배가 난파되어 러시아 령에 상륙한 일본 어부들은 얼치기 중국 통역을 통해 적화선전을 접한다. 그것을 비롯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말더듬이-학생 그리고 까불지마 어부는 본격적인 태업과 파업을 조직한다. 노동자들은 비로소 조직화된 힘이야말로 그들을 자본가의 탄압에서 구해줄 저항 무기라는 점을 깨닫는다. 물론, 자신들에 낸 세금으로 유지되는 군대가 자신들을 지켜줄 수 없다는 사실에 좌절하기도 하지만 궁극적인 승리를 위한 일보후퇴였다.

 

 

 

적은 팜플렛 분량의 소설이지만, 그 울림과 반향은 예상했던 것 이상이다. 어부와 선원의 갈등은 지금도 재현되고 있는 노노갈등의 전형처럼 다가와서 한편 씁쓸하기도 했다. 일종의 이이제이 전술이라고나 할까? 그저 살아남기 위해 치르는 치열한 내전의 모습은 비극의 원형을 담보한다. 장르문학이 판치는 현대 일본문학에 이런 작품이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자본이 노동을 착취하는 현상은 동서고금은 막론하고 상이하지 않다는 점도 확인할 수가 있었다. 작가가 특정한 인물이 주도하는 프롤레타리아 문학이 아니라, 불특정 다수가 각성해서 저항을 이끌게 하는 설정도 마음에 들었다. 과연 우리 편은 누구인지 다시 생각해 보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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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들과 진화하는 적들
김숨 지음 / 현대문학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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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대산문학상을 세 여성작가들이 휩쓸었다는 뉴스를 읽었다. 세 주인공 중의 한 명인 김숨 작가의 <여인들과 진화하는 적들>을 어제 부곡도서관에서 빌려다 읽었다. 어떤 책은 300쪽 남짓해도 읽기가 버겁지만 또 어떤 책은 금세 다 읽을 수가 있다. 물론 작가의 내공과 노력이 한땀한땀 쌓인 책을 이렇게 빨리 읽어도 되나 하는 죄책감이 들기도 하지만.

 

소설은 단수로 시작된다. 그녀(김미선-며느리)와 여자(정순자-시어머니)가 소설 제목에 나오는 여인들이다. 어떻게 요즘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트렌드를 장악한 막장 시월드의 재탕이 아닐까 하는 예감이 든다. 물론 독자의 기대와는 상반된 서사가 펼쳐진다. 지난 5년간 삶을 공유했지만 전혀 살갑지 않은 시어머니와의 이야기를 하는 그녀가 자신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아토피에 걸려 고생하는 자기 아들에 들이는 돈은 아깝지 않지만, 자신이 홈쇼핑 콜센터 직원으로 일하는 동안 육아와 살림을 도맡은 시어머니가 침이 마르는 구강건조증으로 음식을 제대로 드시지 못하게 되자 소용되는 비용이 그녀는 아깝게 느껴진다. 전문대졸의 내세울 게 없는 그녀는 중산층의 평범한 삶을 꿈꾸지만 그녀를 옥죄어 오는 상황은 그녀의 바람대로 진행되지 않는다. 토목회사에 다니는 남편은 부동간 경기 침체로 언제 잘릴지 파리목숨이고, 자신 역시 임신-출산을 억척스럽게 치르며 지켜낸 직장에서 해고된다.

 

그동안 자신의 빈자리를 채워 주던 시어머니의 존재가 이제는 부담스러워진 것이다. 그녀는 진화와 멸종 운운해대며 한바탕 여자에게 설교를 늘어놓지만, 자신 역시 시장에서 도태된 마당에 그녀의 말은 설득력을 가지지 못한다. 항상 주눅 들어 자기주장 대신 말수를 아끼는 여자가 못마땅할 따름이다. 게다가 구강건조증으로 하루가 다르게 여위어 가는 시어머니를 내쫓을 궁리에 여념이 없다. 아들 민수가 어느 자라자 더 이상 여자가 필요없어졌다는 냉혹한 현실분석이 그 뒤에 자리한다.

 

사실 소설 <여인들과 진화하는 적들>은 단 하루 사이에 일어난 일에 방점을 찍는다. 단수라는 결핍 상황에서 며느리는 무능력한 남편, 아토피에 걸려 피부가 짓무른 아들 등의 원인을 여자(시어머니)에게 돌린다. 물론 그것이 터무니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러기에 더 답답할 뿐이다.

 

여인들의 갈등을 주축이 된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다. 그렇다면 그녀들의 진화하는 적들은 누구를 지칭하는 걸까라는 질문에 자연스레 도달하게 된다. 김숨 작가는 그 점에 대해 친절하지 않다. 서사의 개연성을 통해 독자는 적들의 정체를 조심스레 규정해 본다. 혹자는 여자의 가장 큰 적은 여자 자신이라고 했는데, 그녀와 여자의 관계를 보면 이중생물 관계처럼 서로 공생하면서 상호적대적인 관계로 진화하는 건 아닐까? 그런 점에서 여자의 무반응, 무대응은 주목할 만하다. 그녀가 여자에게 손자의 종기에 침을 발랐다는 이유로 모멸과 멸시를 퍼붓지만 그녀의 반응은 역시나 뚱하다. 다만, 여자의 구강건조증과 민수의 아토피 증세 심화가 어떤 연관을 가지지 않나 추측만 가능할 따름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부엌 주도권을 두고 그녀와 여자가 갈등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부엌일 중에 설거지를 가장 싫어하는 그녀보다 월등한 실력을 자랑하는 여자가 자신의 입맛에 맞게 부엌을 변경한 장면에 대한 묘사는 확실히 남자 작가라면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정밀하게 그려냈다. 여자의 장끼인 아귀찜 준비하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어지간한 관찰력이 없다면 쉽지 않을 듯 싶다.

 

지난주에 읽은 김이설 작가의 <환영>에 나오는 아이에 대한 집착/미련은 김숨 작가의 <여인들과 진화하는 적들>에서도 비슷한 형태로 등장한다. 아이를 위해서 굳은 일도 마다하지 않고 벌이에 전념하지만, 실상 아이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소통과 대면의 시간은 부족한 엄마의 빈자리를 할머니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현실 묘사가 특히 그렇다. 언제부터 아이의 육아가 부모가 아니라 조부모의 몫이 된 걸까.

 

여자의 마르는 침 이야기는 소설에서 중요한 모티프를 제공한다. 명백하게 그녀가 제공한 모멸과 멸시 때문에 발생한 스트레스가 결핍을 상징하는 구강건조증으로 연결된다. 어찌 보면 아무 것도 아닌 분비물 침이 부족해서 시간과 비용을 들여야 하는 상황이 가뜩이나 결핍 투성이 가계에 생채기를 냈다는 사실 때문에 그녀는 짜증스럽기만 하다. 자신이 원인제공자라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는 장면에서는 이중생물의 이중성을 드러내는 것만 같다. 그녀와 여자는 같은 종이기에, 공생이 가능하지 않을까하는 일반의 환상에 균열을 제공한다.

 

결말 부분이 조금 황망스럽긴 하지만, 상상력을 가득 담은 개연성 넘치는 서사 구조와 여성작가 특유의 디테일이 참 마음에 들었다. 또 이렇게 멋진 우리 문학 한편을 만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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