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스트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3
알베르 카뮈 지음, 유호식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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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의 시대에 살고 있다. 세월호, 메르스 그리고 얼마 전 발생했던 5.8짜리 강도의 경주 지진까지. 내가 사는 아파트는 24층인데, 그런 강도의 지진을 견딜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도달하니 아찔하기만 하다. 무엇보다 중요시되어야 할 안전보다 빨리빨리 속도전과 천박한 물질만능주의 때문에 소중한 생명이 위협받고 있는 시절에 기가 막힐 노릇이다. 그런데 이미 지금으로부터 69년 전에 이미 이런 사태를 예견이라고 한 듯, 알제리 출신의 프랑스 작가 알베르 카뮈는 소설 <페스트>에서 각자도생의 살풍경한 모습들을 스케치해냈다.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알제리 오랑에 어느 날 쥐들이 죽어 나가기 시작하면서 페스트(흑사병)가 도시 전역을 휩쓸기 시작한다. 누구나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페스트라고 명명된 공포는 시시각각 도시를 그리고 그 도시에 사는 사람들을 위협한다. 서사를 이끌어 가는 서술자는 객관적 시각에서 오랑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연대기처럼 기술한다. 그는 마치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냉정하게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관찰해서 기록한다.

 

여느 소설처럼 <페스트>에도 몇 명의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가장 먼저 죽은 쥐를 발견한 베르나르 리외는 의사다. 처음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리외는 도시에서 페스트라는 공포에 목숨을 걸고 맞서 싸우는 전사다. 리외는 사랑하는 아내를 요양하기 도시 밖으로 내보낸다. 그리고 수위 미셸의 죽음, 도시의 놀라움이 공포로 변하는 순간이 도래한다. 서술자의 기록대로, 유감스럽게도 전쟁만큼이나 많이 발생한 페스트에 대한 대책은 전혀 없었고 속수무책이었다. 어떻게 작년에 많이 본 장면이 아니던가. 메르스가 전국을 강타하는 동안,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저 병마의 위세가 잦아들기만을 기다리던 어느나라의 이야기가 아니였던가. 컨트롤타워의 부재는 말할 것도 없고. 1부의 엔딩을 보자, 페스트 사태를 선언하고 도시를 폐쇄하라.

 

이쯤에서 리외와 주변 인물들을 살펴 보기로 하자. 리외의 늙은 동료의사 카스텔은 혈청을 제조해서 도시를 집어 삼키고 있던 페스트 균에 맞선다. 부유한 집안 출신의 장 타루는 오랑에 휴가 왔다가 도시가 폐쇄되면서 머물게 된 이방인으로 도덕적인 인도주의자다. 그는 리외를 도와 자원보건대를 조직해서, 인간의 생명을 지키는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리외를 돕는다. 코타르는 자살을 시도한 범죄자였지만, 페스트가 초래한 도시의 혼란이 반가운 처지다. 누군가의 불행이 또 어떤 이에게는 행운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대변하는 인물도 등장한다. 조제프 그랑은 시청의 비정규직 보조 직원으로, 페스트에 관련된 통계 업무 자원봉사에 나서면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한다. 레몽 랑베르를 오랑에 갇힌 신문기자로 꼼수를 동원해서 오랑을 탈출하고자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개심해서 보건대에 지원한다. 사랑하는 아들을 페스트에 잃은 오통은 수사검사로 규제보다 처벌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관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파늘루 신부는 열렬한 강론을 통해, 마치 소돔과 고모라처럼 타락한 도시가 죄값을 치르고 있는 중이니 반성하라고 대중에게 통렬하게 외친다. 하지만, 죄없는 오통 검사의 어린 아들이 페스트에 쓰러지는 것을 보며 페스트 사태에 대한 생각이 바뀌는 것을 알 수 있다.

 

소설을 읽으면서 일순간에 모든 것을 앗아가는 무서운 질병이 도시를 휩쓰는 동안에도 복원되는 일상의 놀라운 항상성에 놀랐다. 되돌아보면 작년에 메르스가 전국을 강타했을 적에도 누군가는 아이의 돌잔치를 했고, 커플들은 꾸준히 결혼식을 올렸고 하객들은 그들을 찾아 아낌없이 축하해줬다. 그 즈음에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하셔서 두려운 마음에 손소독을 하고 방명록에 이름을 적으면서 중환자실에 계신 아버지를 찾은 기억이 난다. 그리고 나와서는 아마 뜨거운 육개장을 먹었지 아마. 그렇게 질병과 고통의 시간들을 이겨낸 우리들처럼 오랑 사람들도 식량과 와인의 결핍 속에서도 일상을 즐겼다. 그들은 여느 때처럼 연극 관람을 했고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했다. 어쩌면 페스트가 상징하는 건 파늘루 신부의 강론처럼 일상에 파묻힌 우리들에 대한 경고일지도 모르겠다. 메멘토 모리, 죽음이 일상화되었지만 의도적으로 그 죽음을 무시하고 살아야 하는 인간의 숙명이라고나 할까.

 

리외와 타루 그리고 그랑 그룹은 한 명의 생명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다. 페스트가 휩쓰는 오랑은 나치 독일에게 점령당한 카뮈의 조국 프랑스의 모습으로 비친다. 한때 전 유럽을 휩쓴 나치 독일의 위세에 눌려 협력하던 꼴라보들은 조국의 위기가 오히려 그들에게는 기회인 것 마냥 설쳐댔지만, 조국해방을 위해 그리고 한 명의 생명이라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바쳐 가며 싸운 전사들을 정의는 외면하지 않았다. 계절이 겨울로 접어 들며, 그렇게 위세를 부리던 페스트는 마침내 소멸하기에 이르렀지만 이대로 갈 수 없다는 듯 의사 카스텔, 파늘루 신부 그리고 타루의 생명을 앗아간다. 그것은 마치 마지막 번제물을 요구하는 것처럼 야속하기만 하다.

 

죽음의 공포가 막바지로 치닫는 가운데, 보건대의 용사들인 리외와 타루 사이에 피어나는 인간 우정에 대한 작가의 스케치가 돋보인다. 우정을 위해 함께 해수욕을 하자는 제안이 엉뚱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여기서 다시 한 번 일상의 놀라운 복원력에 대해 감탄하게 된다. 질병이 영원하지는 않으니, 그렇게 질병(페스트)이 물러가면 우리는 또 일상으로 복귀해야 한다는 암시일까. 소설에서 페스트라는 질병은 자유로운 영혼이고 싶어하는 인간의 갈망에 대한 장애물이자 억압을 상징한다. 예의 억압은 우리 주변에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지 않던가. 불의에 의거하는 시위를 막는 억압, 정당한 파업권을 주장하는 금융노동자들의 파업참가를 교묘하게 방해하는 억압, 귀족노조라는 프레임으로 내가 가진 권리를 조롱하는 언론의 억압 같은. 그런 억압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니 순간 숨이 막히는 듯한 느낌이다.

 

지난 경주 지진 때, 죽어도 함께 죽고 살아도 함께 살아야 한다는 노부부의 이야기가 다시 떠올랐다. 억압과 죽음의 공포를 이겨낼 수 있는 힘은 역시 연대 뿐이라는 위기 상황 속의 계시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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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9-27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건물 2층 이상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지진 흔들림에 공포감을 많이 느낀 것 같습니다. 저와 같은 지역에 사는 친구의 집이 아파트 5층에 삽니다.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건물의 흔들림을 경험했다고 합니다. 저는 빌라 1층에 사는데, 건물이 와르르 무너져서 건물 파편에 깔려 죽는 상황이 생길까봐 무서워요. 그래서 건물 밖으로 뛰쳐나오면 안심할 거로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진 대처 매뉴얼에서는 책상 밑에 숨으라고 지시해요. ^^;;
 
이게 다예요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고종석 옮김 / 문학동네 / 199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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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도서관에 갔다가 키란 데사이의 책을 빌리려고 검색해 보니 없더라. 그리고 <바야돌리드 논쟁>도 있으면 빌리려고 했지만 도대체 제목이 생각나지 않더라. 바돌리야르라고 검색하니 나올 리가 있나 그래. 뭐라도 빌릴까 해서 서가 구석구석을 뒤지다가 마침내 만난 책이 바로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이게 다예요>였다. 뭐 시집 같기도 하고, 다음달에 문학동네에서 그녀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죽음에 이르는 병>이 나온다고 하니 준비운동하는 셈 치고 빌려왔다.

 

1차세계대전이 발발하던 해 태어나서 우리 나이로 82세까지 사셨으니 그 정도면 장수하셨다고 해야겠지. 그녀의 작품 연보를 보니 정말 많은 작품들을 썼는데 정작 우리나라에 소개된 책은 얼마 없더라. 죽기 전해인 1995년에 마지막 작품으로 발표된 <이게 다예요>는 마치 그녀의 문학적 유서 같다는 표현이 전혀 손색이 없을 것 같다.

 

그녀의 연인이었던 얀 앙드레아 (슈타이너)와의 대화를 비롯해서 작품 집필을 위한 노트 같은 글들이 백지 위에 이어진다. 사실 저자의 다른 작품들을 읽어 보지 않아 그녀의 문학 세계나 스타일에 대해 정말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노년의 작가가 남긴 노트 만으로 그녀의 작품 세계를 유추해 본다는 게 정말 가능할까 싶다.

 

그것은 마치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있다는 것처럼 다가오는 죽음의 두려움에 대해 그리고 죽기 전까지 사랑하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에 대한 감정의 변전(變轉)처럼 두서없이 나열되고 있다. 작가에게 기록의 잉여라는 게 과연 존재할까? 아무 것도 아닌 문장처럼 보이지만, 그 하나의 문장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대작이 탄생할 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엉뚱한 상상에 젖어 보기도 한다. 작가 말고 그 누가 창대한 시작을 상상할 수 있을까 과연.

 

자신이 문학을 한다고 말할 수 있는 자신감, 그리고 무엇을 쓸까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의 기록이 그저 부러울 따름이다. 아니 이렇게 작가가 남긴 노트 마저도 책의 모습으로 둔갑해서 미지의 독자와 만나 교감을 이루고 무언가 생각할 거리를 만들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는 현실이 그저 놀랍지 않은가.

 

헛되고 헛되도다라는 두 문장이 지상의 문학의 어머니라고 자신감 넘치게 쓸 수 있다니. 그것은 마치 성경 잠언에 나오는 말처럼 독자의 가슴을 후려친다. 아니 문학은 어쩌면 헛된 게 아닐 지도 모른다는 강렬한 부정이 하고 싶은 걸까. 모든 것이 헛되다는 無(무)에서 정(正)과 反(반)의 결합이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낼 지도 모른다는 문학적 변증법을 지칭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상상도 해본다. 거의 죽음에 도달한 작가의 끊이지 않는 텍스트에 대한 갈망이 느껴지는 묘한 순간이었다. 이게 자신이 가진 것의 모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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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9-19 1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분량이 진짜 얇아서 책장 구석에 꽂으면 쉽게 찾지 못했을 거예요. ^^

레삭매냐 2016-09-20 09:25   좋아요 0 | URL
우연히 만난 책인데 나름 흥미로웠습니다.
말씀 대로 눈에 잘 띄지 않는 그런 책이었습니다 :>
 
낮의 목욕탕과 술
구스미 마사유키 지음, 양억관 옮김 / 지식여행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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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도쿄에 처음(그리고 지금까지는 마지막) 갔을 적에 지인과 에비스타운을 찾아 낮술을 즐긴 적이 있다. 주중이었는지 주말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모두가 바쁜 시간에 마시는 낮술 한 잔의 여유는 정말 최고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그 정도는 약과였다. 진짜 고수는 따로 있었다. <고독한 미식가>라는 만화로 유명한 구스미 마사유키라는 양반은 정말 대단했다. 이번에 만난 <낮의 목욕탕과 술>(이하 낮탕술)에서 모두 열 곳의 특색 있는 목욕탕과 시원하게 목욕을 한 후에 마시는 생맥주, 사케 그리고 소주의 향연을 한 권 책에 담아냈다. 두께도 얇아서 읽는데 부담도 없다. 고지식한 위인이라 차례대로 읽었지만, 아무 데나 펼쳐서 읽어도 무방할 것 같다.

 

벌건 대낮에 노렌(포렴)을 걷고, 보무도 당당하게 목욕탕을 향해 진군해 가는 기세가 남다르다. 이 대중목욕탕은 아마 우리나라하고 일본에만 있는 게 아닐까 싶다. 남들이 열심히 일하는 사이, 굳이 무언가 핑계를 대지 않더라도 욕탕에 들어가 여유를 만끽할 수 있는 프리랜서 구스미 선생이 정말 부러웠다. 작가가 서식하는 도쿄는 물론이고 홋카이도를 필두로 해서 일본 방방곡곡을 누빈다. 아마 자신이 갔던 곳 중에서 특색 있거나 혹은 개인적 사연이 있는 목욕탕 열 곳을 선정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른 곳은 몰라도 목욕탕은 모두가 홀딱 벗고 (점잖지 못한 표현이기는 하나 작가의 표현 그대로) 불알을 대놓고 다들 열심히 몸을 씻는데 열중하는 장면을 작가는 그대로 스케치해냈다.

 

욕탕에서 그가 만난 사람들에 대한 묘사도 생생하다. 어떤 이들은 고릴라나 바다사자 도사 혹은 성성이 아님 오랑우탄에까지 비유할 정도다(뒤에 두 표현 내가 지어낸 표현이다). 작가가 표현한 대로 홀딱 벗은 사람들이 바깥 세상에서는 무얼 하나 상상해 보는 것도 낮탕술 기행기의 또다른 재미다. 틀릴 수도 있고, 맞을 수도 있겠지만 어디까지나 유쾌한 작가의 상상력이라고 한다면 그 또한 재밌지 아니한가.

 

내가 진짜로 감명 받은 부분은 만화작가인 자신의 직업을 딴따라, 비렁뱅이 혹은 타인들을 위한 바보라고 부르며 기꺼워 한다는 점이었다. 유쾌한 상상에서부터 시작해서, 자신의 직업에 대한 자기비하적인 패러디 그리고 또 늙은이들만 찾는 목욕탕에도 젊은이들이 많이 와서 젊은 기운이 넘쳤으면 한다는 발상도 참신하게 다가왔다. 그가 찾은 목욕탕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곳은 아무래도 욕탕 위에 뚜껑을 닫고 공연을 한다는 벤텐탕이었다. 목욕탕 록과 놀이정신의 결합이야말로 굳이 요한 하위징아의 어려운 호모 루덴스 개념까지 가지 않더라도 충분히 즐거운 아이디어가 아니던가.

 

또 한편으로는 이제는 점점 사라져 가는 대중목욕탕에 대한 아쉬움도 절절한다. 구스미 선생은 목욕탕에는 페인트화가 제격이고, 신사 지붕 스타일의 정통 도쿄식 목욕탕이야말로 제격이라고 선언하지만 어디 세태가 그러하던가. 손이 많이 가는 페인트화를 타일화가 대체하고, 카운터에서 사람이 손님을 받는 대신 리뉴얼한 자동발권기가 대세인 모양이다. 아, 능구렁이 구스미 선생이 어느 목욕탕에서 만난 성인용 DVD에 대한 일화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도대체 왜 그런 물건이 떡하니 탈의실 로커 위에 있는 걸까. 만약 그게 속을 알 수 없는 최신 마케팅 전략의 하나라면 정말 신의 한수가 아닐 수 없을 것 같다.

 

자자, 목욕탕 이야기도 좋지만 진짜는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그렇게 목욕을 마친 구스미 선생은 치밀한 사전조사 혹은 추체험을 바탕으로 인근에 자리잡은 이자카야나 허름한 술집은 전전한다. 주말에 책을 다 읽고 어제 아침에 출근하는 길에 생각해 보니, 구스미 선생은 보통 이자카야들이 저녁 장사 준비를 하는 3시에서 5시 사이에 목욕을 느긋하게 즐기고 이제 막 영업에 들어간 첫손님으로 가게를 찾는 계획이었던 것 같다. 대단하군!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지인들과 함께 할 때도 있고 홀로 찾을 때가 더 많았지만, 시원한 맥주와 사케 그리고 소주를 연신 특색 있는 돼지볼살구이 같은 음식들로 독자의 흥취를 자극한다. 아니 당장에라도 선생의 뒤를 따르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다.

 

그것은 마치 요즘 유행하는 먹방의 귀재들을 능가하는 문학적 먹방 아니 술방의 다름 아니었다. 왜 빨리 주문한 술을 대령하지 않냐는 투정이 귀엽기만 하다. 시원한 잔에 담겨 나오는 크림색 거품이 살짝 묻혀진 맥주를 그리고 삿포로에서 삿포로 맥주를 마시는 게 당연한 게 아니냐고 묻는 능청스러움에 그만 할 일을 잊어버린다. 원고료를 줄 수 없는 출판사 사장이 젊디젊은 작가를 데리고 목욕탕과 낮술 세계로 인도하는 장면도 압권이다. 어쩌면 그런 시간의 더께들이 쌓여서 낮탕술의 베이스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문득 구스미 선생의 발자취를 쫓아 일본에 건너가 기회가 된다면 그가 전술한 낮탕술 기행에 나서는 상상을 해본다. 문제는 언어다. 일본어를 못하는 위인이 낯선 술집에 들어가 영어로 주문을 날린다고 상상해 보니 다만 웃음이 나올 뿐이다. 메뉴 주문할 때 아는 말이라고는 “코히 비루” 밖에 없으면서 말이다. 내가 또 구스미 선생의 멋진 행동이라고 생각하는 것의 하나는 일찌감치 시원한 술과 다양한 안주거리들을 만끽하고, 본격적으로 퇴근길 단골손님들이 들이닥칠 무렵에는 조용히 자리를 나선다는 점이다. 역시 고수답다.

 

기타모리 고 선생이 상상 속에서 창조한 가나리야바 같은 곳이 부근에 있다면 당장에라도 회사 사무실을 뛰쳐나가 나만의 낮탕술에 도전해 보고 싶은 마음이다. 그러지 못하는 게 그저 원통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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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9-13 2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즐거운 추석 보내세요. ^^

초딩 2016-09-14 1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행복한 추석 연휴되세요~ 레삭매냐님~
 
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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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한국 문학의 부흥을 이끌고 있다는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를 드디어 읽었다. 맨부커상 수상 이후, 치솟는 판매고와 순댓국집에서 점심을 즐기는 할머니들까지 이야기하던 <채식주의자>를 그 열기가 한참 지나고서야 읽게 됐다. 다 읽은 소감은 역시나 독자를 불편하게 하는 그것은 여전하구나 싶었다. 그리고 이 책이 무려 9년 전에 나왔다는 점, 그리고 일련의 연작소설이라는 점 등이 흥미로웠다. 맨부커상 심사위원들이 이 작품의 어떤 점을 그렇게 높이 평가했는지 일개 독자로서 알 수는 없겠지만, <채식주의자>가 촉발시킨 것이 문화애국주의든 아니든 간에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면 그것으로 또 좋은 것이 아니겠는가.

 

모두 3편의 중편으로 구성된 <채식주의자>의 내용은 비교적 간단하다. 모두 세 명의 다른 시선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점이 이채롭다. 소설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영혜가 어느날부터 꿈 때문에 육식을 거부하고 채식만을 고집한다. 첫 번째 이야기의 화자인 영혜의 남편은 그런 그녀를 이해할 수 없다. 일상의 안온함과 지극히 평범함을 사랑하는 남자에게 아내의 변신은 용서 받을 수 없는 그런 죄였던 모양이다. 그런데 아무리 책을 읽어 봐도, 영혜가 육식을 끊고 채식주의자로 변신하는 과정이 모호하기만 하다. 몇 번의 악몽을 꾸었다고 해서 평생 동안 지속해온 습관을 단숨에 바꾸는 것이 가능할지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어쨌든 남편은 극단적 채식에서 장모의 생신과 처형의 집들이날 벌어진 일련의 폭력과 자해, 발광 그리고 정신병원 입원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냉혹하게 결별을 선언하면서 무대에서 사라진다. 그리고 그의 뒤를 이어 등장한 남자는 두 번째 화자 영혜의 형부다. 비디오 아티스트라는 그는 아내에게 들은 처제의 몽고반점(우습지만 나는 몽고반점 타이틀을 보고는 중국집 생각을 했다)이 주는 이미지의 저열한 유혹에 빠져 예술혼을 불사른다는 미명 아래 결국 넘어서는 안될 선을 넘고야 만다. 모든 파국이 그렇듯, 우연히 동생의 자취방을 찾은 인혜는 모든 사실을 알게 된다. 그 순간 그들은 모두 새처럼 비상해서 끝을 냈어야 했던가.

 

 

다시 인혜가 세 번째 화자로서 바통을 이어 받아 달리기 시작한다. 자신이 과연 남편을 사랑했던가? 정신세계가 무너져 가족들도 내친 동생을 돌보고, 지우 때문에 그러지 못할 것 같은 남편과의 관계도 냉정하게 정리한다. 인혜는 축성산 정신병원에 입원한 영혜가 병원을 탈출하기도 하고 육식은 물론 모든 식사를 거부한다는 소식에 동생을 찾아 나선다. 하루가 다르게 여위어 가는 동생을 보며, 동생의 정신이 무너지지 않았다면 가족 중에서 가장 멀쩡한 자신이 무너지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지옥 같은 현실 속에서 냉정하게 이어지는 일상에 대한 고찰은 정말 대단했다. 얼마 전 읽은 편혜영의 <홀>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는데, 다리가 무너지고 배가 가라앉고 건설현장에서 불이 나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되는 일상성의 주기적인 반복이 섬뜩해지는 순간이었다.

 

소설 <채식주의자>를 읽기 전부터 이 소설을 어떻게 읽어야 하나 하는 고민을 했다. 육식으로 상징되는 현실계의 폭력에 대한 페미니즘적인 저항으로 읽어야 하나? 개인적으로 이해할 수 없지만 예술혼에 불타는 어느 중년남성의 일탈로 봐야 할까? 어떤 해석도 적용이 가능할 것이고, 또 역설적으로 어느 해석도 적용되지 못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소설에 등장하는 군상들의 모습이 일반적이지 않다는 점에서부터 시작해서, 그들이 벌이는 행각들이 불가해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아찔한 유혹을 발산한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도대체 영혜의 (채식주의자로) 변신을 촉발한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단순히 그녀가 꾼 꿈으로만은 설명이 턱없이 부족하다. 그리고 그녀가 그 변신을 결심하는 순간, 내친 모든 것들이 주는 상징성을 보라. 가장 먼저 거추장스러운 껍데기에 불과한 남편을 내버렸고, 그 다음에는 자신의 울타리인 가족을 차례로 내려놓았다. 집들이에서 아버지가 행한 폭력에 대한 저항은 극단적 자해로 나타났다. 훗날 인혜가 후회하는 것처럼 과거에 그런 요소들이 제거되었다면 지옥 같은 현실의 아수라판이 재현되지 않았을까? 아마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과거에 누적된 폭력의 잔해들이 영혜의 극단적 저항을 불렀던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황망하게 유탄을 맞은 영혜의 남편이 가장 불쌍한 존재가 아닐까.

 

 

비디오 아티스트를 자처하는 영혜의 형부는 또 어떠한가.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명백한 사실을 그는 과연 알고 있었을까? 자신의 행위가 나중에 어떤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지 않았으리라. 그러기에 모든 책임은 처제의 몽고반점이 격발한 불타오르는 욕망을 자제하지 못한 그에게 있었다. 결국 그가 쫓은 색채와 이미지는 모두 허상이 아니었던가. 현실세계에 적응하지 못하고 겉도는 그를 대신해서 일상과 생계 그리고 자식을 책임진 아내 인혜에게 일말이라도 미안한 감정이 있었다면 이성이 행동을 금지했을 텐데. 그가 남보다 자제력이 부족하다는 말 따위는 하지 말자. 그런 점에서 그의 존재는 한강 특유의 불편함을 상징하는 집대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다.

 

스스로를 나무라고 생각하는 영혜에게 삶은 괘념하고 싶지 않은 무엇이 아니었을까. 일절의 음식을 거부한 그녀를 가족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처절하게 설득하는 언니에게 “왜, 죽으면 안되는 거야”라는 질문이 돌아온다. 그것은 유한한 인간이라면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지 않은가. 더 이상 사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지 못한 존재에게 어떤 대답을 해주어야 할까.

 

결국 <채식주의자>를 읽었지만, 맨부커상 이전의 작품처럼 이 작품 역시 대중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맨부커 인터내셔널 수상작이라는 이유로 이 책이 이 정도의 대중성을 얻었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이후 한강 작가가 쓸 책이 더 기대된다.

 

아, 이제 데보라 스미스가 새로 쓴 <Vegetarian>을 읽어봐야겠다. 마침 미리 사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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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르노빌의 봄 핵없는 세상을 위한 탈핵 만화
엠마뉘엘 르파주 지음, 해바라기 프로젝트 옮김 / 길찾기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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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크라이나 키예프에서 백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체르노빌에서 원전사고가 터진 것이 지금으로부터 딱 30년 전의 일이다. <게릴라들: 총을 든 사제>로 처음 만난 프랑스 출신 일러스트 작가 엠마뉘엘 르파주의 그림을 체르노빌 방문기로 다시 만나게 됐다. 얼마 전부터 계속해서 보고 싶다고 생각만 하다가 오늘 드디어 읽을 수가 있었다.

 

다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2008년 엠마뉘엘 르파주를 비롯한 일단의 예술가 그룹이 2011년 후쿠시마 원전사고 터지기 전, 가장 큰 핵재앙이었던 구 소련의 체르노빌을 방문해서 재앙의 잔재를 기록하는 프로젝트를 가동 중이었다. 데생악퇴르 그룹의 일원으로 체르노빌을 방문할 계획을 세우던 이들은 심각한 고민에 사로잡힌다. 그것은 바로 체르노빌 원전사고가 터진 지 22년이나 지났지만 여전히 방사능 피폭에 대한 위협이 가시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들은 체르노빌을 방문하는 동안 먹을 안전한 먹거리 확보부터 시작한다.

 

아무리 안전을 강조한다 하더라도 방사능이 잔존하는 이상, 방사능 피폭이 초래할 암이나 갑상선 질환 같은 각종 질병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는 현실이 제기된다. 바로 그 지점에서 과연 이런 위험요소들을 무릅쓰고 프로젝트를 가동할 충분한 이유가 되는가라는 점에 대해 묻게 된다. 자라나는 엠마뉘엘의 아이들에게 아버지가 필요하다는 식구들의 조언도 무시할 수 없다. 설상가상으로 평생 그림그리기를 업으로 삼아온 엠마뉘엘은 그림을 그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어쩌면 체르노빌이라는 이름이 가진 잠재적 위협에 대한 방어기제가 작동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고민 끝에 르파주는 일단의 동료들과 체르노빌 행을 감행한다. 비행기를 동원한 신속한 방법보다 서구 유럽에서 폴란드를 거쳐 체르노빌에 도달하는 육로는 물리적 거리감을 확인할 수 있는 계기였다.

 

체르노빌 원전사태가 터진 1980년대는 여전히 냉전의 열기가 뜨거운 상태였다. 어느 정부나 그렇듯 공산주의 종주국이었던 구 소련 역시 최악의 원전사태를 숨기기에 급급했다. 방사능 피폭의 후유증을 예상하지 못했던 용감한 이들은 화염에 휩싸인 원전의 불길을 잡고 사태를 진전시키기 위해 일선에서 최선을 다하던 기술자들과 노동자들은 방사능 피폭으로 모두 사망한다. 방사능을 피하기 위해 수십만의 사람들이 정든 고향을 떠나야 했고, 피폭된 2세에서 4세 수많은 아이들이 숨졌다. 어디 그 뿐이던가? 체르노빌의 최전선에서 싸우던 처리반요원들이 없었다면 서구 사회 역시 안전할 수 없었으리라고 작가는 진단한다.

 

금지된 도시에는 현재에도 고향으로 돌아온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데생악퇴르 그룹은 체르노빌 부근에 거처를 구하고 활동을 개시한다. 예술가 집단들은 이방인들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현지인들과 조금씩 소통하고, 그들의 내면세계에 접근을 시도한다. 식탁에서 음식과 보드카를 나누는 교제야말로 아이스브레이킹의 최고의 방법이었지만, 과연 체르노빌 사람들이 권하는 음식을 먹어도 되는지 프랑스 예술가들은 고민에 빠지지만 곧 주저 하지 않고 음식을 나누기 시작한다.

 

엠마뉘엘 르파주는 체르노빌의 암담한 현재를 그려 서방세계에 진실을 알리겠다는 사명으로 체르노빌을 찾았지만, 체르노빌의 아름다운 이면을 발견하고 고민에 빠진다. 틱 틱 거리며 라돈 수치를 보여주는 방사능 측정기를 따라 움직이는 작가의 손길은 곧 원래의 솜씨를 되찾는다. 술자리의 달아오를 흥취에 젖어, 현지인들을 희화화하는 그림을 그리기도 하지만 곧 예술가 본연의 모습을 되찾아 서방인들이 보길 원하는 암울하고 묵시록적인 그림 대신, 당시 체르노빌의 현실을 그리고 싶다는 자신의 바람에 따라 르파주는 그야말로 붓 가는 대로 그리기 시작한다. 그렇기 바로 그게 장인의 예술혼이 아니었던가.

 

자신들을 덮친 핵 재앙으로부터 달아나는 대신 맞서 싸우는 체르노빌 사람들에게서 작가는 희망을 그린다. 체르노빌에서 인류 스스로를 파괴할 수도 있는 기계문명을 대표하는 방사능 오염 물질은 후크 선장의 한쪽 손목을 뺏어간 악어처럼 사람들을 노리는 이미지로 형상되어 등장한다. 그리고 안전하고 저렴하다는 이유로 곳곳에 지금도 지어지고 있는 원자력 발전소가 어느 순간 재앙으로 돌변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바로 이웃나라 후쿠시마 사태에서도 뻔히 보고서도 각성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체르노빌의 봄>을 통해 되돌아보게 됐다. 조금 불편하고 에너지를 덜 소비하는 한이 있더라도, 기존 17기의 원전을 폐쇄하기로 결정한 독일의 선례대로 그린에너지와 재생에너지를 개발해서 누구도 원하지 않는 재앙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야말로 최선의 원전 대책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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