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마뱀이 숨 쉬는 방
탁명주 지음 / 강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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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권 책의 존재를 알게 되고 지난 주부터 읽고 있다. 두 권은 샀고, 다른 한 권은 샀는데 산 책이 바로 탁명주 작가의 <도마뱀이 숨 쉬는 방>으로 강 출판사에서 나온 책이다. 김소진 작가에 대한 추억으로 주저 없이 강 출판사에서 나온 책을 골랐다. 책을 다 읽은 작은 소회는 기대 이상이었다. 작년과 올해 읽은 한국소설 중에 가히 최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다. 별 열 개를 주어도 전혀 아쉽지 않을 정도로 아우라를 <도마뱀>은 품고 있었다.


처음 등장하는 <컨테이너>의 결말은 참으로 슬프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인생들이 그래도 살아 보고자, 강둑 매립지 부근에 버려진 컨테이너를 거처로 삼아 새출발을 시도해 보지만 그들에겐 세컨드 챈스(second chance)는 주어지지 않는다. 어쩌면 탁명주 작가는 사회에서 도태된 이들에게 패자부활이 주어지지 않는 우리 사회의 냉정한 면을 강조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요즘에도 밀린 집세 때문에 야반도주를 한다는 상황에 이물감이 스물스물 피어오른다. 하긴 수도 서울의 복판에서 먹을 게 없어서 굶어 죽는 사람도 나오는 마당에. 무언가 씹고 싶어하는 큰딸을 위해 산후조리를 못해 허리가 아픈 아내를 대신해서 달달한 고기볶음을 하는 아빠의 모습에 눈에 땀이 차오른다. 자신은 공복을 달래기 위해 수돗물을 삼키면서도 자식들을 위해서는 그렇게 헌신적이었던 가장의 최후는 그래서 더더욱 비장미를 자아낸다. 아, 답답한 현실을 어쩌란 말이냐.


잘 나가던 강남 사모님이었지만 남편의 판단착오로 아파트를 날리고 변두리로 주저 앉았지만 시장에서 장보고 낑낑 대며 물건을 사나르는 건 죽어도 못하겠다는 일말의 자존심을 내세우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부업>. 어쩌면 주인공 역시 인지부조화 상태에 빠진 것일 지도 모르겠다. 이웃한 개아짐이 개가 좋아서 수많은 개들을 거느리고 있는 게 아니라 먹고살기 위해 개를 길러 판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리고 통장에 생활비가 꽂히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마침내 그녀는 자신이 하찮게 생각하던 부업 여성들처럼 자신도 부업 전선에 나설 결심을 한다.


<부업>은 비슷한 처지에 내몰린 주인공이 등장하는 <소독>과도 일맥상통한다. 비정규직이 정규직 직원들에게 차별당하는 현실이 리얼하게 그려진 학교 급식소가 소설의 공간적 배경이다. 생리 때문에 몸이 아프고 컨디션이 좋지 않아도,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말처럼 취업전선에 내몰려야 하는 이들에 대한 이야기는 소설이 아니라 르포르타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다. 정규직 직원들은 자신이 하고 싶지 않은 힘든 일들을 모두 하루살이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는 비정규직 직원들에게 미룬다. 그들을 관리감독하는 일이야말로 정규직인 자신들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네 삶 속 곳곳에 그렇게 일상화된 차별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에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양심이 씀벅거린다. 바버리 사모님이 한 때 자신을 모욕한 인물이라는 사실에 화자는 놀라면서도, 소심한 복수를 통해 상처 받은 상처를 표백 소독하고, 가슴에 맺힌 응어리를 하수구로 흘려보낸다. 이런 카타르시스라도 없다면 어떻게 세상을 살 수 있을까. 잘나가던 이들도 언제라도 인생역전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은 보너스다.


동창 수화의 남편인 형기 씨와 동업자이자 불륜 관계에 있는 이유빈 씨가 등장하는 <전염>도 삶의 아이러니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그런 작품이다. 단편 소설들을 읽다 보니 삶이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되는 가운데 드러내는 부작용이나 파편들을 잡아내는 데 탁명주 작가는 정말 탁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물에 대한 세심한 관찰과 인과관계에 대한 추적의 하모니라고나 할까. 다시 <전염>으로 돌아가, 불륜남이 던진 남모를 메시지를 음미하면서, 거의 사기에 가까운 말에 속아 넘어간 다단계 판매 ‘라인’을 운영하며 동창회에서 새로운 라인을 구축하려던 이유빈 씨는 결국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는 것을 다른 동창의 전언을 통해 전해 듣게 된다. 더 놀라운 것은 자신이 수화보다 한 수 위라고 생각했었는데, 어쩌면 수화가 이유빈 씨를 가지고 놀았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오래 전에 돌아가신 부모님의 뒤를 따를 결심으로 시속 180km로 달려가다가 어머니가 남긴 머플러 생각에 자신이 정상궤도를 이탈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런 배신의 코드는 표제작인 <도마뱀이 숨 쉬는 방>에서 다시 반복 변주된다. 악착 같이 번 돈으로 필리핀에서 외동딸을 유학보내고 뒷바라지하러 나선 화자는 굳게 믿었던 최사장에게 사기를 당하고 만다. 해외 한인 사회에서 벌어지는 요지경 같은 일상, 가사를 위해 고용한 현지인들에 대한 편견 등 다양한 층위의 이야기들을 작가는 능수능란한 솜씨로 직조해낸다. 동생이 필리핀에 살고 있어서 그런지 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마치 현지 리포트처럼 들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생생했다. 놀랍군 놀라워. 엔딩에서 자신 뿐만 아니라 공장을 경영하던 남편도 최사장에게 골프장 회원권 사기를 당했다는 말에 화자는 할 말을 잃는다. 도대체 이 세상에는 믿을 놈 하나 없다는 말의 반증이려나. 화자는 파리나 모기 같은 날벌레들을 잡아먹는 도마뱀을 포식자로 등장시키고 있는데, 현실계에 반영해 본다면 자신과 남편은 날벌레 그리고 자신들에게 사기를 친 최사장이 상위 포식자인 도마뱀으로 치환시켜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먹고 먹히는 먹이사슬이라는 미로에 갇힌 고단한 삶의 진실을 날것 그대로 노출시킨다.


<공생>에서는 이주민노동자에 대한 노골적인 편견과 차별을 등장시킨다. 작가가 소설 속에 등장시키는 주제들이 하나 같이 민감하면서도 모두가 알고 있기에 부정할 수 없는 현실 같은 이야기들이 아니던가. 존 버저 작가도 자신의 저서 <제 7의 인간>에서 언급했듯이, 이주민노동자의 존재는 고용주와 피고용주 모두에게 윈윈관계가 아니다. 전적으로 고용주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형성된 관계다. 제3세계에서 그러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우리보다 못사는 나라에서 차출된 외국인 산업전사들은 헬조선 사람들이 기피하는 그런 제조업 작업장에 투입된다. 물건이 없어져도, 도둑이 들거나 불편한 사건이 벌어져도 모두 그들의 책임으로 간주되는 현실을 작가는 소설에서 정확하게 지적한다. 도대체 어쩌란 말이지? 같은 직장에서 일하는 동료라기 보다, 잠정적 범죄자라는 의식부터 바꿔야 하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나와 다름이 무조건 나쁘다는 편견부터 교정해야겠지만 말이다.


다른 이야기들이 우리 사회 전반을 아우르는 민감한 이슈들을 한 개씩 품고 있다면 후반의 <닻>과 <택배>는 지극히 사적인 감정을 타겟으로 한다. 디자이너 출신 엄마의 인형처럼 살아온 주인공이 체험한 성형의 역사는 솔직히 남자로서 잘 이해하지 못하겠다. 그냥 생긴 대로 살면 안되나 하는 생각에서부터, 주체적 사고 없이 부모가 조종하는 대로 살아온 인생에 대한 후회 그리고 복원수술까지 결심한 주인공의 감정에 ‘닻’을 내리기가 사실 쉽지 않은 미션이었다. 마지막 이야기인 <택배>는 쫌 신파조이긴 했지만, 가슴 훈훈한 결말로 이 멋진 소설집의 대미를 장식한다. 그리고 마지막 소설인 <택배>에서도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편리라는 이름으로 받는 택배에 택배노동자 아저씨들의 눈물이 배어 있을 거라고는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점을 반성해야겠다. 최소한 내가 그분들에게 갑질하는 진상고객은 아니라는 점에 위로를 받아야 하나. 오늘도 알라딘에 주문한 존 버저 작가의 신간을 택배로 받았는데 잘 배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새벽에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느라 쉬 잠이 오지 않았다. 예전에 교회에서 만난 한국말은 거의 못하던 스리랑카 청년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기억들부터 시작해서, 필리핀에 사는 동생이 경험한 가사도우미들과의 일화들이 그야말로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또 한편으로 편견과 차별은 내가 아닌 타인의 삶에 대한 이해부족이 원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까지 도달했다. 상대방이 처한 상황에 대해 보다 잘 안다면 적어도 인간이라면 그럴 수 없을 텐데 하는 생각 말이다. 소설 <도마뱀이 숨 쉬는 방>을 읽으면서, 나와 다른 이들이 가진 삶의 주파수, 생각 혹은 사유에 동조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한 가지 이유 때문에라도 이 책은 충분히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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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nsun09 2017-06-02 13: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읽어보니 꼭 읽어봐야겠네요.^^

레삭매냐 2017-06-02 13:55   좋아요 1 | URL
후회하시지 않으실 겁니다.

개인적으로 최근에 읽은 소설집 중에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저스티스맨 - 2017년 제13회 세계문학상 대상 수상작
도선우 지음 / 나무옆의자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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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워블로거에서 소설가로 변신하는데 성공한 작가의 <저스티스맨>을 읽었다. 전작 <스파링>은 1/3 가량 읽다 말았다. 그 책도 마저 다 읽어야 하는데. 너무 오래 전의 인연이라 이제는 다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작가가 어떤 사람이었더라. 하는 수 없다, 책을 읽어서 그의 캐릭터를 떠올릴 수밖에. 작가 후기를 읽고 놀랐다. 지난 8년 동안 꾸준히 소설가가 되기 위해 노력해 왔구나. 그리고 작가가 그동안 준비해온 소설들이 등단의 힘으로 새롭게 단장해서 세상의 빛을 보겠구나 싶었다. 축하할 일이다.


다년간의 다독으로 다져진 작가의 서사 내공은 역시나 탁월했다. 하긴 누구나 책을 읽는다고 해서 탄탄한 서사 구조를 선보일 수는 없는 거니까. 실력을 인정한다. 누군가에게는 연쇄살인마 또 누군가에게 불의한 세상에서 정의 구현에 나선 우리들의 영웅으로 명명되는 킬러의 궤적을 쫓는 것이 소설의 얼개다. 정교하면서도 힘찬 서사는 하드보일드 스타일의 추리소설은 리 차일드가 등장하는 소설들을 연상시킨다. 바로 이 점이 소설의 가독성을 높여준 것이 분명하다. 소설의 실제적인 주인공인 킬러는 나름의 연관성을 가진 방식으로 연쇄살인을 저지른다. 킬러는 총기소지가 불가능한 동방예의지국의 질서를 교란시킨다. 깔끔하게 이마에 두 방의 스티그마다로 자신의 초현실적으로 보이는 행위를 마무리한다. 어떤 이의도 존재할 수 없다는 듯이.


그리고 소설의 또다른 한축에는 키보드 워리어들이 장악하고 있다. 그들은 중추신경에 연결된 뇌파의 활동과 신경이 조작하는 대로 움직이는 손가락으로 킬러의 행위를 분석하고, 추종한다. 자신의 의견과 다른 빠가사리 무리에는 처절하게 욕설 섞인 댓글로 응징한다. 작가는 이견을 허용하지 않는 우리 사회의 단면을 소설에 담고 싶었던 걸까. 어떤 특정한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인터넷 카페의 운영자들이 권력을 사유화해 가는 과정, 사회의 밑바닥 인생에서부터 시작해서 국회의원에 이르기까지 비정상이 넘실대는 세상에 킬러는 군더더기 없이 딱 두발씩의 탄환을 발사한다.


누구를 위한 정의인가


소설의 2/3 지점까지 도대체 누가 범인인지 적정한 선의 긴장을 유지하고, 미드 <왕좌의 게임>을 연상시키는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캐릭터마저 킬러의 희생양으로 삼는 기법에 감탄해 마지 않았다. 문제는 마지막 희생자를 계기로 인터넷 카페 회원들이 대거 탈퇴하는 장면을 기점으로 소설의 힘이 빠지기 시작한다. 후반부에서는 그야말로 김빠진 콜라를 마시는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소설에서 다루고 있는 정의론도 혼란스럽다. 사회에서 제거되야 할 악당들을 처리하는 킬러의 살인에 환호작약하는 장면도, 소수의견이지만 그래도 킬러가 자행하는 폭력적 해결방식은 안된다는 이성적 판단을 가진 이들과의 대결구도도 무언가 연결고리가 부족하다. 게다가 소설에서는 다루고 있는 자극적인 동영상, 집나온 청소년들이 겪게 되는 비행의 악순환 카테고리, 전작 <스파링>에서도 등장했던 셔틀로 대변되는 각종 청소년들 문제들. 자신만만하고 직선적으로 다루고 있는 소재들이 주는 불편함은 최근에 읽은 이언 매큐언의 <이노센트>의 그것과 필적할 정도였다. 어쩌면 작가가 다루는 소재들이 너무 현실적이어서 무의식 중에 그만 초현실의 경계로 넘어가 버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강렬한 서사 구조에 비해 상대적으로 촘촘함이 좀 아쉬웠다. 아무래도 작가가 밝힌 대로 단편에서 출발해서 장편으로 살을 붙였기 때문일까.


전작 <스파링>을 읽으면서 다음에는 또 어떤 이야기를 들고 찾아올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저스티스맨>을 읽고 나니, 전작의 연장선에 추리소설이라는 변주에 21세기 한국의 인터넷 문화 비판이라는 곁들인 연타석 안타를 날렸다. 개인적으로 작가의 소설이 여성 독자에게 어떤 반응을 얻을지 자못 궁금해졌다. 어쨌든 서포머 징크스는 이제 털었으니, 스코어링을 기대하겠소 비토 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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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5-30 19: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스파링》도 그렇고, 도선우 작가의 소설 주제는 흥미롭군요. 이번에 나온 신작은 현실적인 사회문제를 다룬 거라서 기대됩니다. 《스파링》 후반부도 전반부에 비해 느슨한 느낌이 들었어요.

레삭매냐 2017-05-30 23:08   좋아요 0 | URL
<스파링>은 1/3 가량 밖에 읽지
않아서 후반 전개가 어떻게 되는지
파악이 되지 않았습니다.

남성 스타일의 탄탄한 서사 구조는
일품인데, 상대적으로 디테일이나
비유에서 촘촘하지 못한 점이 눈에
띕니다.

생각보다 후속작이 빨리 나왔네요.
다음 작품에서는 어떤 스타일의 서사
를 보여줄 지 궁금합니다.

2017-06-02 16: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6-02 16: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르웨이의 숲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10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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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하게 텅 빈 상태로

 

지난 주말 독서 모임을 위해 출간된지 자그마치 30년이나 된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을 읽었다. 모임에서 우리 동지 마욤님은 다양한 버전의 <상실의 시대>(기존의 제목)를 보여 주셨었다. 그리고 번역에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까지. 내가 읽은 민음사 판에서는 특공대라고 번역된 부분이, 원서에서는 아마 돌격대라고 되어 있다는 말도. 예전 판형에서는 “와타나베 형”이라고 번역되었다는 점도 흥미로웠다. 국내에 하루키가 소개된 것이 90년대 초반, 소위 운동권 세대가 쇠퇴되고 X세대라 불리던(이제 그들도 중년이 되었다) 새로운 인간형의 출현과 그동안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었던 하루키가 만들어낸 와타나베 도루라는 스타일 넘치는 인간형에 대한 의견들이 속출했다.

 

게다가 소설의 배경이 된 1968년, 69년 일본은 그후로도 영영 없을 전설적 전공투 시절이 아니었던가. 트란 안 훙이 연출을 맡은 영화 <상실의 시대>에서 전공투 학생들이 강의실에 난입해서 교수님에게 토론을 해야 하니 시간을 내달라는 반협박조 요구를 하는 장면이 특히나 인상적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트란 안 훙의 연출장면을 제대로 감상할 틈도 없었는데 먼저 영화를 보신 분들의 반응은 “쓰레기”였다. 그 정도였던가? 나야 하루키의 팬이 아니라 그의 책에 대해 잘 몰라서 그랬을 수도 있었겠지만. 소설에서는 간략하게 등장한 사회적 이뷰 부분에 대해 분석하는 놀라운 실력의 헤르메스님의 분석에 다시 한 번 감탄했다. 문제는 하루키라는 인간이 그런 사회적 이슈에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하는 작가가 아니라는 점.

 

책을 완독하기 전에 유투브에 뜬 미국 독자들의 리뷰를 들어 보았는데, 아마 젊은 세대라 그런지 그런 깊숙한 분석에까지 도달하지 못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아마 소설의 엔딩에 아주 실망했다고 한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하루키의 소설들이 세계적인 반응을 보일 수 있는 점 중의 하나는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전형적인 일본인 캐릭터가 아니라는 점이다. 주인공이자 화자인 와타나베 도루만 하더라도, 자신은 지극히 평범한 인물이라고 내내 강조하지만 그렇지 않아 보인다. 그가 소설에서 어울리는 나가사와 선배와는 또다른 형태로 자신만을 위해 사는 사람이다. 그리고 전자가 오만함을 무기로 거느리고 있다면, 와타나베 씨는 친절함과 상대방에 대한 지극한 배려를 장기로 삼고 있다. 그러니 어떤 여자들이 그를 거절하겠는가. 시크하면서도 상대방을 지극정성으로 모시는데. 물론 그런 와타나베의 인성에는 17세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친구 기즈키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음을 독자는 알아야 할 것이다. 그가 도쿄에 있는 대학에 진학해서 사귀게 되는 나오코 역시 기즈키의 전 여자친구가 아니었던가. 어쩌면 이런 기묘한 관계가 지니고 있는 파국은 이미 정해져 있던 게 아닐까.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겠지만 일정한 가정 배정을 알아야 상대방에게 접속할 수 있는게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오코의 언니도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기즈키 역시 어떤 징후도 없이 와타나베와 기분 좋게 당구를 치고 나서 죽음을 선택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죽은 이들이야 어떨지 모르겠지만 살아남은 이들은 죽은 이가 남기고 간 잔존 기억 속에서 평생을 살아야하지 않을까. 문득 노무현 대통령은 운명에서 해방됐지만, 문재인 대통령은 친구가 남긴 숙제에서 꼼짝 못하게 되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개인적으로 그런 경험이 없기에 잘 모르겠지만, <노르웨이의 숲>을 읽으면서 나라면 과연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물론 어떤 특정한 답은 없었지만. “친구의 죽음에서 삶의 대극에 죽음이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라는 문장도 삶과 죽음에 대해 숙고하게 해주었다.

 

그런데 소설에 나오는 와타나베라는 인물이 현실적일까라는 질문에 대해 토론해 보기도 했다. 중론은 도저히 그럴 수 없다였다. 기존 연공질서를 우선시하는 일본 사회에서 와타나베 같은 인물은 이단아 취급을 받았을 것이다. 전공투 세대라 불리던 시절처럼 혼란스러운 시기에 정치투쟁에 휩싸이지 않고, 자신의 삶에 충실하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와타나베는 평범한 캐릭터일 수가 없다. 독일어 시험을 치르기 위해 아주 매력적인 아가씨 미도리가 수업을 땡땡이치자는 제안도 거절하고, 엄격하게 신주쿠에 있는 레코드점 아르바이트 엄수를 하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내가 학교 다닐 때 그랬던가? 수업을 그야말로 밥 먹듯이 빠지고 낮술에 절어 살지 않았던가. 강의실보다 바깥의 잔디밭을 더 동경하면서 말이다.

 

책읽기에 전념하는 장면도 빼놓을 수 없다. 미도리네 고바야시 서점에 가서 잠이 오지 않는다고 이미 읽은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를 밤을 세워 가며 완독하는 장면, 아미 사에서 요양 중인 나오코를 찾아가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을 읽는 장면이란. 요즘 대학생들 중에서 소설 속의 와타나베처럼 그렇게 책을 읽는 이가 몇 명이나 될까. 그리고 자신이 자고 나란 일본 문학보다 해외 문학에 대한 동경심 같은 것도 곳곳에서 엿볼 수가 있었다.

 

그리고 뇌종양으로 죽음을 앞둔 미도리 아버지를 찾아가 간병하면서 그리스의 희곡작가 에우리피데스 그리고 데우스 엑스 마키나에 대해 설명하는 장면은 또 어떤가. 이 정도되는 스타일을 가졌기에 그렇게 많은 하루니 팬들이 그의 작품에 매력을 느끼고 열광했던 게 아닐까. 그렇게 30년이란 세월이 지난 뒤에 읽는 하루키 책은 조금 더 냉정하게 다가설 수가 있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난 하루키의 팬은 아니니까. 그러면서도 꾸준하게 그의 책을 읽는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우리말로 번역된 어떤 문장들을 영어로 어떻게 번역이 되었는가 궁금해서 제이 루빈 씨가 번역한 영문판과 대조해 보기도 했다. 그런데 우리말 번역의 압승이다. 도저히 영어 번역에서는 원서의 참맛을 살리지 못한 게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작년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 번역 논쟁에서처럼 말이다. 두 문장의 영어 번역을 소개해 본다.

 

120쪽 : 개수대 위의 창으로 파고드는 밝은 햇빛이 그녀의 몸 테두리에 뽀얀 선을 덧그려 넣었다.

The light pouring in from the kitchen window gave her figure a kind of vague outline.

 

140쪽 : 나는 초가을 오후 한순간의 마력이 벌써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음을 알았다.

And then I realized that the brief spell of the early autumn afternoon had vanished.

 

영어 문장들이 훨씬 더 밋밋하지 않은가. 의미에는 충실할지 모르겠지만, 뉘앙스에서는 정말 엄청난 차이가 느껴진다. 그리고 주인공의 이름만 찰스나 존 혹은 티파니로 바꾼다면 전 세계 어디에 가져다 놔도 충분히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스타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만큼 일본 작품으로서는 부족할 수 있어도, 세계인이 함께 읽기에는 그만이라는 말일까.

 

소설의 어디선가 글이라는 불완전한 그릇에 담는 기억도 완전할 수 없지 않은가라고 말했는데, 결말로 갈수록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소설을 읽으면서 알게 된 비틀즈의 동명의 음악과 빌 에번스의 <Waltz for Debby>가 듣고 싶어졌다. 소설을 다 읽고 나니, 왜 처음에 소개되었을 때 <노르웨이의 숲>이 아니라 <상실의 시대>였는지 제목 한 번 잘 뽑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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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5-29 14: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상실의 시대’로 제목이 선정된 것이 ‘순실의 시대’로 패러디하기 위해 만든 큰 그림이었습니다.

레삭매냐 2017-05-29 14:22   좋아요 0 | URL
최고네요 ~
역시나 순실의 시대, 그나마 짧게 끝나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AgalmA 2017-05-29 15: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국에서도 학생운동 물결이 지나고 난 뒤<상실의 시대> 같은 후일담 소설이 많이 등장했지요. 제 기억엔 <상실의 시대>만큼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작품이 있었나 싶어요. 한국의 후일담 소설은 뭐랄까. 제겐 자폭형 글이라 생각되더군요. 이해받기 어려운 나만의 고통... 그런 느낌으로 중무장되어 있어 시대적 흐름을 잘 모르는 사람에겐 ‘과잉‘으로 읽히기 딱이죠. 그리고 내용이 내용이다 보니 자칫 계몽주의, 애국팔이가 될 여지도 있고요.
김연수 작가가 좀더 가볍게 글을 썼다면 하루키랑 가장 비슷할 수도 있었겠다 싶어요.
이 댓글은 지극히 제 주관적 견해라 동의를 구하는 1도 없습니다ㅎ

레삭매냐 2017-05-29 15:38   좋아요 1 | URL
저희 독서모임에서 AgalmA님의 의견과
비슷한 의견이 개진되었습니다.

학생운동의 퇴조와 더불어 기가 막힌
타이밍에 하루키가 도착했고, 새로운
세대에게 열렬하게 환영 받았다고요.

타인에게 이해받기 어려운 나만의 고통...
어쩌면 그렇게 꼭 짚어 주시는지.

아무래도 아류작은 오리지널의 아우라를
넘어설 수 없다는 한계가 있지 않나 싶
습니다.
 
마이클 무어의 대통령 길들이기 - 삼류정치에 우아하게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마이클 무어 지음, 최지향 옮김 / 걷는나무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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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 전 옛날, 미국이라는 나라에 마이클 무어라는 이름의 현자가 살았다. 그의 무기는 카메라와 선동질이었다. 미국이라는 자본주의 천국에서 벌어지는 전혀 천국스럽지 않은 일들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진실에 거침없이 카메라 렌즈를 들이댔고, 그 결과물들을 다큐멘터리라는 형식으로 세상에 알렸다. 그가 알리는 진실이 불편한 이들은 그의 작품들을 진실을 취사선택한 선전선동물이라고 폄하하면서, 극장 앞에서 시위도 마다하지 않았다. 미국이나 우리나라나 그런 시위에는 항상 국기가 등장했다.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는가 보다. 어젯밤 서가를 정리하고 이불 깔고 자려다 문득 3년 전에 샀지만 미처 다 읽지 못한 <마이클 무어의 대통령 길들이기>를 발견했고, 단숨에 읽어내렸다. 마침 이언 매큐언의 부커상 수상작 <암스테르담>을 읽기 시작했지만, 걸작보다도 더 재밌어서 손에서 뗄 수가 없었다.

 

이 책이 나온 건 2008년, 그러니까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미국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이자 정치인으로 손꼽히던 조지 W. 부시가 집권해 있던 시절인 모양이다. 한편 민주당에서는 누가 후보로 나와도, 공화당 후보인 매케인을 압도하고 정권교체를 이루리라는 희망에 민주당 후보경선이 본선보다 빡센 그런 상황이었다. 우리나라의 십년 전 상황과 아주 유사하지 않은가. 역사는 언제나 그렇게 반복되는 모양이다. 다른 공간에서 다른 차원으로. 오바마와 힐러리 모두 어마어마한 정치자금을 모으면서, 자본주의 천국답게 돈이 지배하는 선거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물론 이 모든 사실이 나중에 마이클 무어가 신랄하게 비판하는 대상이다.

 

질의응답 형식으로 이어지는 초반부에 볼링 한 게임 제대로 치는 못하는 오바마에게 국정운영을 맡겨도 되느냐는 어이없는 질문이 등장하기도 한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우파인 공화당이 정책 대결보다는 후보에 대한 인신공격(우리나라에서는 네거티브 전략이라는 고상한 이름으로 불린다, 이번 대선에서 이 전략에 올인했다가 낭패한 후보를 생각해 보라)에 유능하고, 뻔뻔하며 거짓말에 능하다고 마이클 무어는 진단한다. 그래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런 공화당 후보에게 투표를 한다는 것이다. 일례로 민주당의 듀카키스와 공화당의 아버지 부시가 붙은 1988년 대선에서도 선거전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듀카키스의 승리가 예상됐지만, 선거 도중 듀카키스의 연이은 실책으로 수많은 유권자들이 마음을 돌렸다고 하지 않았던가. 미국이나 동방예의지국에서나 안보장사는 수지맞는 장사라는 점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가 있었다. 유능한 진보보다, 이미지로 무능한 보수의 탈을 가린 공화당이 사람들에게 국정 운영을 잘할 것이라는 환상을 심어준다는 지적은 예사롭지 않다.

 

오바마의 첫 번째 상대였던 존 매케인 상원의원에 대한 신랄한 비판도 눈여겨 볼만하다. 베트남전 참전용사로 하노이와 하이퐁에 대한 맹렬한 북폭에 참가했다가 대공포에 격추되어 5년간 공산 베트남의 포로가 되어 혹독한 고문을 겪은 베테랑은 퇴역 후에도 자신의 행동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고 공언하고 돌아다녔다. 엄연히 전쟁 상황에서도, 폭격은 군사적 목표물에만 해당해야 하지만 그런 상식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수많은 민간인들에게 폭탄 세례를 퍼붓고도 전혀 반성이나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다니. 동료 의원들조차 오만불손하고 안하무인, 고집불통인 매케인에 대해 비판했다고 하지 않던가. 물론 대선을 앞두고 이미지 세탁을 하는 도중에 자신의 발언을 철회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미디어가 너무 발달한 시대라 그전에 자기가 했던 말들을 온 세상이 다 알고 있기 때문에 어쩔 도리가 없을 것 같다. 모름지기 미래에 정치인이 되려고 하는 이들이라면 언행을 조심해야 할 지어다.

 

비주류 이단아(maverick) 다큐멘터리 감독 마이클 무어는 특이한 10가지 대선 공약으로 독자들의 감성을 사로잡는다. 무료교육, 무료의료 시스템 그리고 극장에서 제공하는 음료수와 팝콘 가격은 무조건 3달러 미만으로! 뭐 이 정도면 지상낙원이 따로 없지 않을까. 이상한 대통령에 이어 아주 정상적인 대통령이 집권했다가, 그 뒤에는 그야말로 전무후무할 희한한 대통령이 등장해서 백악관의 주인이 된 상태에서 오바마 대통령이 사력을 다해 만든 전 국민 의료보험 시스템이 붕괴할 지경에 도달했다는 뉴스에 정말 경악할 지경이었다. 시민들이 낸 세금으로 신약 개발에 엄청난 자금이 투여되지만, 막상 그 열매는 거대 제약회사들이 모조리 쓸어가고 있지 않은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이익을 내는 다국적기업들이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조세회피를 하는 동안, 가난한 사람들은 세금도 내고 개인 의료보험에도 엄청난 비용을, 또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서도 전적으로 개인 부담을 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한 예로 마이클 무어는 미국과 프랑스를 비교하고 있는데 엇비슷한 세금을 내고 있으면서도 훨씬 더 많은 혜택을 국가로부터 받고 있는 프랑스에 비해 미국 시민들은 그렇지 못하나는 사실을 아주 냉철하게 꼬집고 있다. 그렇다면 미국인들은 모두 프랑스나 이웃 캐나다로 이민이라도 가야 한단 말인가?


 



그것은 해결책이 아니다. 문제는 바로 시스템에 있다는 것이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설계한 투표 시스템부터 개선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식인들이 세운 나라다 보니, 건국의 아버지들은 무지몽매한 시민들을 위해 간접선거제도라는 아주 기발한 제도를 만들어내셨다. 그게 건국 시기인 18세기 후반에는 유용한 제도였을 진 몰라도 이제 21세기 미국에서는 쓸모가 없는 시스템이라는 마이클 무어의 지적이다. 그 결과, 2004년 앨 고어와 2016년 힐러리는 시민들의 더 많은 표를 얻고도 선거에 지는 심각한 모순에 빠지게 되었다. 게다가 투표일도 11월 첫째 주 화요일이 아니라, 보다 많은 사람들이 투표를 하게끔 일요일에 하자는 의견도 제안한다. 우리처럼 주민증 하나만 있으면 어디서고 투표할 수 있는 시스템이 아니라 유권자 등록제도라는 비합리적인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는 점도 사람들의 투표의욕을 싹 사라지게 만드는 요인 중의 하나란다. 미국 시민들 중에 투표를 하지 않은 사람들이 자그마치 1억 명이나 된다는 사실을 눈여거 보아야 할 것 같다. 누구에게 투표를 하든, 시민들로 하여금 투표장으로 오게 만드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닐까. 물론 개표 관리도 철저하게 해서, 2004년 플로리다에서 벌어진 천공밥 개표논란 같은 것도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갱생한 마약중독자 대통령을 탄핵해야 할 35가지 사유를 들면서 마이클 무어는 이 멋진 권력자 길들이기 에세이를 마무리 짓는다. 우리는 이미 지난 겨울을 거치면서 한 번 추체험한 사실이라 그런지 아주 익숙한 느낌이었다. 지나간 일이라고 해서 무작정 덮어둘 게 아니라, 잘못되었다면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고쳐야 할 게 아닌가. 그런 점에서 달님정부에서 착수한 사대강, 자원비리, 방산비리 등에 대한 의심도 말끔하게 정리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과거에 대한 처벌이 아니라, 앞으로 다시는 이런 해괴한 일들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는 데 의의가 있는 것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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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실 비치에서
이언 매큐언 지음, 우달임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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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작가에 빠지게 되면, 만사 제쳐 두고 그 작가의 책들을 찾아서 읽게 된다. 가장 좋은 방법은 사서 컬렉션으로 삼아 읽는 거지만, 여건이 되지 않는다면 도서관에 가서 빌려다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이언 매큐언 선생을 좇는 나의 독서 여정은 <칠드런 액트>로 시작해서, <이노센트>를 거쳐 <체실 비치에서>에 도달했다. 아직도 읽을 수 있는 시중에 나와 있는 매큐언 선생의 책들이 많다는 점이 아주 만족스럽다. 다음에 대기하고 있는 책들은 <암스테르담>과 <토요일>이다. 그의 최고작이라는 <속죄>는 잠시 미루어놨다. 가장 맛있는 건 나중에 먹어야 제 맛이니까 말이다.

 

구글맵으로 도대체 체실 비치가 어디에 붙어 있는지 찾아 봤다. 영불해협 그러니까 프랑스의 셰르부르 항구 맞은편에 있는 바닷가였다. 책에도 나온 것처럼 동쪽에는 포틀랜드 섬이 있었다. 매큐언 선생의 책이 아니었다면 평생 관심이 없었을 그런 지명이, 이제 막 결혼한 커플인 플로렌스 폰팅과 에드워드 메이휴의 이야기로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칠턴 힐스 출신의 청년 에드워드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한 전도유망한 청년이다. 대학 시절 그가 관심을 보인 주제가 천년왕국운동이었다고 했던가. 어머니 마조리가 뇌 손상을 당한, 그저 그런 집안 출신의 이 청년은 폰팅 전자 사장인 제프리의 딸인 플로렌스 폰팅과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지고 결혼에 골인했다. 원래 청년의 꿈은 200쪽 남짓한 역사서적 시리즈를 저술하는 것이었지만, 폰팅 가문의 데릴사위가 되어 가업을 물려 되었다. 아무려면 어떤가, 바이얼린 연주자로 클래식 음악을 전공한 플로렌스의 남편이자 바람직한 집안의 사위가 되어 이제 남은 평생 동안 행복할 일만 남았는데. 아, 에드워드가 플로렌스에게 청혼하게 된 계기를 설명했던가. 이 청년은 참을 수 없는 성욕 때문에 청혼을 하게 됐다고 한다. 신성한 결혼을 폄훼하는 게 아니냐고? 독자제현은 좀 더 참고 매큐언 선생이 전개하는 이야기를 따라가 볼 지어다.

 

플로렌스와 에드워드의 관계는 고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아폴론과 다프네의 전설을 연상시킨다. 거친 욕망에 불타는 청년은 무언가 좀 더 진도를 나가려고 애쓰고, 성에 무지한 처녀는 사랑하는 남자와 같이 행복한 나날을 살 것을 꿈꾸면서도 동시에 섹스에 대한 두려움을 한가득 가지고 있다. 시절은 1960년대 초반 영국, 68세대로 대변되는 그전 세대와는 다른 획기적인 성개방 풍조의 도래를 앞두고 있던 시기다. 매큐언 선생은 어떻게 보면 평범한 남녀관계에 대한 고찰에서 좀 더 나아가 세대 간의 갈등도 빠뜨리지 않고 저술한다. 어떻게 보면 소설에 나오는 모든 이야기들은 하나의 길항관계로 분류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가령 예를 들어, 전전세대들은 스스로 히틀러라는 희대의 악당이 일으킨 세계대전에서 백척간두의 위기에서 조국을 구한 영웅으로 생각한다. 그러니 노동당 수상이 들어서고, 노동조합 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의 명성이 전 세계에 산재해 있던 식민지들이 하나둘씩 독립하면서 추락해 가는 사실을 그들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반면 버디 홀리와 척 베리로 대변되는 신세대 로큰롤이라는 유행음악을 들으며 성장한 베이비부머들은 고리타분한 기존질서를 배격하면서 개혁과 혁신을 꿈꾼다. 사회정치적인 이슈를 플로렌스와 에드워드의 개인관계 속으로 풀어 보면, 고전음악을 신봉하는 플로렌스와 로큰롤 음악을 사랑하는 에드워드, 그 둘 모두 서로의 음악 취향을 잘 알기 때문에 서로 조심하면서 굳이 강요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이런 서로 다름이야 말로 소설 <체실 비치에서>가 다루고 있는 중요한 주제 중의 하나가 아닐까. 문제는 서로 다름을 해소하기 위한 서로에 대한 배려와 오해가 발생했을 때 효과적으로 처신하지 못한 결과가 초래한 파국일 것이다.

 

두 남녀는 파반느 같이 완만한 곡선을 그리는 결혼생활을 꿈꾸었지만, 신혼 초야부터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템포는 “알레그로 아사이(allegro assai)”의 속도로 진행된다. 요즘 같으면 다양한 채널을 통해 첫날밤에 대한 정보들을 얻을 수 있었겠지만, 당시는 불가능했던 모양이다. 플로렌스의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자신의 넘치는 에너지를 주체할 수 없었던 에드워드를 궁지에 몰아넣은 플로렌스는 당황한 나머지 한밤중에 바닷가로 도망쳐 버린다. 그리고 뒤따라온 새신랑에게 그녀는 자신의 심각한 성적 불능을 고백하고, 에드워드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을 던진다. 그렇게 가장 행복해야 할 순간에서 사랑하는 두 남녀의 관계는 급전직하한다.

 

에드워드는 그 나이 또래 대개의 청년들처럼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다. 가족들과 하객들이 모인 결혼식을 통해 신부에 대한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획득했다고 생각한 그는 우직하게 자신의 감상적 욕망을 채우기 위해 전진한다. 문제는 플로렌스가 충분히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플로렌스가 느끼는 원치 않는 그것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은 구세대와 신세대의 갈등, 정의할 수 없는 새로운 시대에 대한 두려움으로 치환된다. 두 사람 모두 역사와 음악이라는 형태의 과거를 다루면서도 또다른 차이를 보여준다. 역사학도 에드워드가 과거에 대한 재해석으로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데 전력한다면, 반대로 플로렌스는 아마도 과거 에 작곡된 곡해석 대로 정격연주를 통한 혼란을 배격한 질서의 확립에 방점을 찍는다. 이렇게 서로 다름의 매력은 지남철처럼 상대를 끌어 들이면서도 동시에 밀어내는 이중성을 보인다.

 

왜 진작 에드워드와 플로렌스는 서로 다름을, 성에 대한 인식 차이를 고백하지 못했을까? 어쩌면 두 사람의 태생과 성장배경 그리고 계급적 차이가 너무나 확연하게 달랐기 때문이었을까? 중편 정도 분량에 이렇게 다양한 이야기를 넣을 수 있는 매큐언 선생의 내공에 다시 한 번 감탄했다. 현재에서 출발해서, 과거에 어떻게 둘이 만나게 되었는지에 대한 플래시백 그리고 분노와 모멸감에 사로 잡혀 넘어서는 안될 선을 넘게 되는 신혼부부의 격정적 말싸움으로 치환되는 리얼리티의 재현에 이르기까지 무엇 하나 부족한 게 없는 그런 작품이었다. 마지막 장에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절망적으로 사랑했노라는 부분을 읽으면서, 정말 경추를 짜르르하게 훑는 듯한 극한의 감정적 동조를 체험하기도 했다. 그래 연애소설이라면 이 정도는 써야지 싶을 정도로. 아,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에로틱한 점에서도 작년에 만난 필립 로스의 <죽어가는 짐승>에 버금갈 만한 수준이었노라고 덧붙이고 싶다.

 

[뱀다리] 기회가 된다면, 원서로도 다시 한 번 만나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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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17-05-25 21: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앗, 체실비치도 아껴만 두고 있는 책이네요;;;; 그런 책들이 너무 많아요. ^^
전 ‘이런 사랑‘으로 이언 매큐언을 처음 만났어요. 그 강렬함이라니요! 그리고 얼마나 세련됐는지!

레삭매냐 2017-05-26 09:01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아주 강렬하더라구요.
아껴 두지 마시고 바로 읽으세요... 한 번
잡으시면 정말 아~ 하고 감탄하시리라고
믿습니다.

왜 이제서야 만나게 되었는지 후회가 될
정도였답니다.

목나무 2017-05-26 17:04   좋아요 1 | URL
아끼지만 말고 우리 모두 이언 매큐언을 읽읍시다. ㅋㅋ
여기서 막 이렇게 팬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제가...^^;;

목나무 2017-05-26 17: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은 지 좀 되는 데 덕분에 다시 읽어보고싶어졌어요.
그럼 이제 다음은 <토요일>인건가요? 아님 <암스테르담> 저는 뭐든 좋습니다. ㅎㅎㅎ

레삭매냐 2017-05-26 17:11   좋아요 1 | URL
역시나 팬 다우십니다...
왜 다들 애정하는 소설이라고 하시는지
책을 읽고 나니 적확하게 이해가 가더군요.

매큐언 선생 정말 대가시군요.

빨랑 <넛셸>도 만나 보고 싶고 또다른 책들
도 읽어야 한다는 그런 부담감이랄까요.

다음에 읽을 책은 오늘 사무실 책무덤에서
찾애는 <시멘트가든>입니다. 이언 매큐언
선생의 첫 소설이죠. 작년엔가 사서 초반에
조금 읽고 다른 책 읽어야 해서 못 읽었다
는 부담감에 시작해 보려구요.

레삭매냐 2017-05-26 17:12   좋아요 1 | URL
아 그리고 <체실 비치에서>는 내일
독서모임 하러 가기 전에 중고원서로
살라구요 :>

목나무 2017-05-26 17:14   좋아요 0 | URL
<시멘트가든> 좋죠. 매큐언 소설의 스산함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그런 소설. . ^^ 내일 꼭 득템하셔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