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가 아니면 어디라도
이다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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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예전에는 장기 여행을 홀로 갔었다. 그런 여행을 하다 보니 내 뜻대로 모든 일정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40일짜리 첫 번째 호주과 홍콩 해외여행에서 절절하게 경험했다. 그 다음부터는 일정에 연연하지 않는 그런 초연한 여행자가 됐다. 그러다가 나중에 가서는 아예 스케줄도 잡지 않고, 구름 가는 대로 발 가는 대로 가는 구도의 길에 올랐다. 내게는 떠나는 것이 중요했지, 어디에 가서 무얼 보고 먹고 자고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다혜 씨의 <여기가 아니면 어디라도>는 나의 그런 숨겨둔 여행본색을 펌프질하는 책이었다.

 

그동안 내가 낭만의 정점은 며칠씩 걸리는 긴 버스여행 중 어느 휴게소에서 산 프렌치프라이를 먹으며(아마 맥주도 함께였겠지) 해지는 저녁 노을을 바라보던 순간이었다. 참으로 영화 <베티 블루>의 어느 장면같구나 싶었다. 어쩌면 그 때 쓴 일기를 뒤져 보면, 아니면 그 때 모아둔 영수증을 찾아 보면 어디쯤이었는지 가늠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당시 난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여행 중에 읽겠다고 문고본 책을 소중하게 들고 다녔다. 물론 여행 중에 다 읽지 못했다. 너무 재밌는 일들이 많아서라고 말하고 싶다.

 

그나저나 된장 맞을, 왠 놈의 책 이야기가 여행에세이에 이렇게 많은 걸까. 책 구매를 자극하는 솜씨가 북칼럼니스트답다. 에세이집에 등장하는 책들을 검색해 보느라 책읽는 속도가 거북이 걸음이다. 순간, 여행에세이를 빙자한 책 소개 에세이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스물스물 피어오를 정도다. 최근에 나왔다는 하야시 후미코의 <삼등여행기> 그리고 <방랑기>가 궁금해졌다. 이 정도라면 선수로군.

 

나도 여행 좀 했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이다혜 작가에겐 당하지 못할 듯 싶다. 게다가 나이가 드니 예전에 하던 식의 자유여행은 아무래도 무리라는 생각이 든다. 몇 년 전에 철들고 나서 처음 해본 패키지 여행은 몸은 편안할지 몰라도 심적으로는 영 마땅치 않았다. 왠 놈의 라텍스 가게와 선물샵에 그렇게 가는지. 결국 나도 라텍스 베개를 하나 사고야 말았다. 안사면 왠지 눈치가 보여서? 모르겠다. 지금도 베개는 잘 쓰고 있다. 자유여행과 현지 패키지를 겸한 여행이 최고의 조합이 아닐까 싶다. 문제는 현지어, 작가처럼 일본어까지 능통할 순 없어도 국제공용어라는 영어 정도는 구사할 수 있어야 그나마도 가능한 이야기겠지만.

 

책을 바리바리 싸가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아무래도 해외여행에 나서게 되면 자투리로 멍 때리면서 보내는 시간이 많게 되니 그 때 책을 펼치면 아주 유용하겠지 싶지만, 동행이라도 있다면 그와 같이 이야기를 해야 하니 책 보는 것도 그렇고. 그래서 작가 양반은 홀로 하는 여행을 즐긴다는 것일까? 충분히 공감이 가는 이야기였다.

 

원래 여행의 즐거움 중의 하나는 현지 음식 맛보기라고 하는데, 개인적으로 길 바쁜 여행자에게 현지 맛집을 찾아가는 건 곤욕스러운 일일 따름이었다. 지금은 모바일이 워낙에 발달해서 즉석에서 바로 바로 찾아갈 수 있지만 나의 마지막 장거리 여행이었던 비엔나 여행길에서는 민박집 주인장에게 뫄뫄해서 슈니첼 맛집을 찾아간 것 정도가 고작이었다. 수십년 동안 허름한 슈니첼 하우스에서 비엔나 돈까스를 튀겨온 오스트리아 아줌마의 손님 접대는 융숭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시원한 맥주까지 한 잔 곁들이니 사방을 돌아다니느라 고달팠던 심신의 피로가 쫙 풀리는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함께 했던 이들도 모두 만족했던 것 같다.

 

로마에서 만난 어느 건축을 공부하던 커플은 하루에 쓸 비용을 50유로로 정하고 두달에 걸친 유럽 일주를 하고 있었다. 아침과 저녁을 제공하던 숙박비 20유로를 빼고 나면 30유로로 버텨야 한다는 건데, 곳곳에서 물어야 하는 박물관 입장료나 교통비, 점심값 그리고 저녁에 즐기는 맥줏값 등등은 어떻게 해서 만들어냈는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장거리 여행에서는 숙박비 부담이 많기 때문에 주로 한인민박이나 게스트하우스를 이용했는데, 니스에서는 이도저도 귀찮아서 그냥 하룻밤 인포메이션 센터에서 알려 주는 나름 저렴한 호텔을 이용했던 것 같다. 돈이 없어서 적은 비용으로 하는 여행이나,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어서 현지 맛집을 섭렵하고 좋은 호텔에서 지내는 여행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하지 말지어다라고 쿨하게 정의하는 작가의 모습도 마음에 들었다. 제각각 여행에 나서는 목적과 이유가 다른 만큼, 여행의 방식에 대해서도 어떤게 옳고 그르다는 없지 않을까 싶다.

 

현지 빈대붙기에 대해서도 경험이 있다. 첫 번째 유럽여행에서 로마에서는 신부로 유학 중이던 사촌형이 살던 이탈리아 수도원에 가서 점심을 얻어먹기도 했다. 주방에서 일하시던 아주머니는 내 턱을 부여잡고, 신부 사촌형과 턱이 닮았다며 애정을 과시해 주시기도 했다. 뭐 그렇게 가는 거지. 그날 저녁에 사촌형에게 공짜 맥주를 실컷 얻어 마셔서 참 좋았다. 그 다음에는 밀라노에서 성악 유학 중이던 사촌 동생네 집에 가서 밀린 빨래도 하고 덕분에 스위스 루가노 호수 구경도 했다. 녀석의 음식 솜씨가 좋았는지 처음 알았다. 그 때 잠시 들린 스위스 아웃렛에서 사촌 제수에게 뭐라도 좀 사주었어야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나도 그 땐 돈이 없어서. 물론 나도 지인에게 부탁받은 이를 거둔 적도 있다. 어학연수 시절 알던 지인의 남자 후배가 내가 살던 도시에 들렀는데, 이성이라 같이 자기가 그래서 나한테 부탁을 했다. 일면식도 없는 타인을 나는 흔쾌히 거둬줬다. 뭐 그런 게 인지상정 아닌가.

 

언제나처럼 한 권의 여행 에세이를 다 읽고 나니 나도 그냥 떠나고 싶어져 버렸다. 목적지도 없이 여권과 비행기표 그리고 어느 정도의 돈만 있으면 어디라도 갈 자신이 있다. 여행을 하다 보니 말이 통하지 않아도 손짓발짓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첫 장거리여행을 홀로 해서 그런지 간이 많이 부었나 보다. 물론 여행하면서 기차를 놓쳐 경찰서 앞에서 노숙도 하고 그런 고생 경험이 없는 건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나의 여행들은 좋았다. 그 여행길에서 만난 이들과의 인연도 좋았고. 예전에는 돈이 없고 시간만 많아서 고민이었는데 이젠 둘 다 없어져 버렸다. 지금으로선 어느 리조트에 가서 하염 없이 책이나 읽으면서 멍이나 때렸으면 하는 바람이다. 참, 책은 재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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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7-08-23 12: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예전에는 돈이 없고 시간만 많아서 고민이었는데 이젠 둘 다 없어져 버렸다.‘ 이 구절 반전입니다. ㅋㅋㅋ 지금은 ‘돈은 있고 시간이 없어서‘가 될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하하하. 저도 그렇습니다. 돈도 시간도 없습니다. 뭐 그렇게 가는 거죠. ㅎㅎ

레삭매냐 2017-08-23 14:09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맞고요...

원래 말쌈 대로 돈은 있고, 시간은 없다라고
쓰려고 했으나 생각해 보니 둘 다 없더군요.
그래서 솔직하게 썼답니다.

 
이토록 달콤한 고통 버티고 시리즈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김미정 옮김 / 오픈하우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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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 리플리 후에 데이비드 켈시가 있었다. 우리에게는 리플리 시리즈로 유명한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이토록 달콤한 고통>을 읽었다. 아마 하이스미스는 리플리가 가진 두 개의 자아, 진짜 나와 내가 되고 싶어하는 자아라는 익명성을 가진 나에 대한 문학적 탐구를 이 작품 <이토록 달콤한 고통>에서 변주 반복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초반에는 몰입이 좀 쉽지 않았지만, 주인공 데이비드 켈시의 악마성이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중후반으로 갈수록 소설의 속도감은 더해져 갔다. 말미에서는 후한 점수를 주고 싶었다.

 

소설의 시공간적 배경은 1950년대 후반, 미국 뉴욕 주의 가상의 공간 프로스버그다. 능력있고 호감 가는 우리의 주인공 데이비드 켈시 씨는 체스윅 섬유공장의 화학 관련 학위를 세 개나 가진 수석 엔지니어다. 하숙집에 살면서 주말마다 차를 몰고는 어머니가 계신 요양원을 찾는 아주 바람직한 청년이다. 서부 캘리포니아 라호이아 출신의 켈시 씨는 또래의 청년들처럼 술을 퍼마시고, 여자들과 어울려 허랑방탕한 삶을 보내는 대신 여가 시간에는 책을 즐겨 읽는다. 자, 여기서 독자는 작가가 야심차게 준비한 반전과 조우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데이비드의 어머니가 14년 전에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아니 그렇다면 데이비드는 주말마다 어디에 가서 무엇을 한단 말인가.

 

그걸 알려면 데이비드의 연애사를 독자는 파악해야 한다. 그는 2년 전에 만난 애나벨을 사랑한 나머지, 발라드라는 곳에 아무도 몰래 윌리엄 뉴마이스터라는 가명으로 모기지로 집을 샀다. 정성을 들여 애나벨과의 공간을 준비한 것이다. 자, 이제 두 번째 반전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시라. 그 애나벨은 다른 남자 하트퍼드에 사는 제럴드 딜러니와 결혼했다. 소설의 제목에서 가르키는 달콤한 고통은 바로 데이비드의 애나벨에 대한 열렬한 짝사랑의 고통이다. 이 지점에서 데이비드가 아무런 액션도 취하지 않았다면 좋으련만 그는 애나벨에게 수시로 편지를 하고, 전화를 해서 현재의 고통스러운 결혼생활을 끝내고 자신과 새출발하자고 이루어질 수 없는 제안을 한다.

 

문제는 애나벨은 데이비드를 친구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니 두 남녀의 접점은 이루어질 수 없다. 게다가 데이비드 주변에는 그를 열렬하게 사랑해 마지않는 에피 브레넌이라는 젊은 아가씨가 있다. 데이비드를 사모한 나머지 그의 초상화까지 그리는 에피, 알다시피 이 초상화가 나중에 한 몫 단단히 할 것이다. 위성처럼 자신의 주변을 빙빙 돌며 자존심을 무릅쓰고 구애하지만, 애나벨과의 상상의 사랑에 빠진 데이비드에게 그녀의 존재는 그저 유령일 따름이다.

 

짝사랑 정도라면 누구에게 해가 될까 싶었지만, 상대방에 대한 편집증적 사랑과 망상은 결국 파국을 잉태한다. 에피에게 물어 데이비드 켈시, 아니 윌리엄 뉴마이스터의 거처를 알아낸 애나벨의 무능력한 남편 제럴드 딜러니는 총을 들고 자기 아내 주변에서 얼쩡거리지 말라는 경고를 하기 위해 데이비드를 찾아나선다. 데이비드와 제럴드는 옥신각신하던 와중에 불의의 사고로 그만 제럴드가 죽고 만다. 자신의 진짜 이름 대신 윌리엄 뉴마이스터라는 가명으로 경찰에 출두한 데이비드는 자신을 감추고, 뉴마이스터의 정당방위였다고 경찰에게 진술한다. 그렇게 한 번 어긋나기 시작한 자아의 이중성은 이어질 더 큰 비극의 전주곡이다.

 

책을 읽는 동안, 데이비드 켈시의 심리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켈시의 애나벨에 대한 감정은 지극히 일방적이다. 그녀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사실 데이비드 켈시는 애나벨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다. 그녀가 무슨 색깔을 좋아하는지,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그저 그녀를 사랑하는 자신의 감정을 극대화시키고 자신의 사랑을 애나벨에게 강요할 따름이다. 그러니 남편을 잃은 애나벨이 데이비드에게 갈 리가 없지 않은가. 자신은 장애물이 사라졌으니 애나벨과 결혼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하지만 결정적 오산이었다.

 

사랑은 타이밍이라고 했던가. 애나벨과 결혼하기 위해 돈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데이비드 켈시는 애나벨의 주변에서 그녀를 마크하기 보다 돈을 벌기 위해 동부에 위치한 체스윅 섬유공장을 선택했다. 사실 그전에 그녀에게 사랑한다는 고백도 하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애나벨은 다른 남자와 만나 신속하게 결혼했다. 잘못된 결정이 만들어낸 후과를 뒤집기에 데이비드는 너무나 부족한 남자였다. 시간에 쫓기는 내린 결정들은 모두 잘못된 것이었고, 에피 브레넌이나 자신의 작은 아버지의 충고는 전혀 듣지 않았다. 이미 이성적 판단을 내릴 수 없는 상황에 도달한 남자의 연이은 악수(惡手)에 한숨만 나왔다.

 

거짓말로 주변의 호감을 산 데이비드 켈시 씨의 위선이 밝혀지자, 호의적 감정들은 바로 인출된다. 그나마 에피 브레넌만이 그의 편을 들지만, 그녀 역시 비극적 희생양이 되고 만다. 어떻게 보면 자신을 사랑해 달라고 데이비드에게 매달리는 에피 브레넌이나 애나벨 넌 꼭 나랑 결혼해야 돼라고 주장하는 데이비드 켈시 씨가 보여주는 일방적 감정의 표출은 동일했다.

 

1950년대라는 점을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데이비드 켈시와 윌리엄 뉴마이스터가 동일한 인물이라는 점을 깨닫지 못하고 허둥대는 경찰 대처에 대한 묘사는 좀 아쉬웠다. 가공의 인물을 내세워 대출을 받고 집을 사는 게 그 정도로 쉽단 말인가. 아마 지금 같으면 어림도 없겠지만, 반세기도 전의 일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지 않을까.

 

애나벨이 좀 더 세련된 방식으로 데이비드의 감정을 거절했더라면 파국적 결말은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어차피 그래봐야 소설에 대한 내용이겠지만 말이다. 이런 일이 현실에서 발생한다면 아마 대응하기가 쉽지 않겠지. 재밌게 읽었고, 그것으로 만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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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의 무게
에리 데 루카 지음, 윤병언 옮김 / 문예중앙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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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에리 데 루카의 <나비의 무게>란 책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내 기억의 창고 속에 책 제목을 넣어 두었다. 그러다가 지난주에 중고서점에서 만날 수가 있었다. 두 번 생각할 필요 없이 장바구니에 담았다. 그리고 급한 불을 어느 정도 끄고 나서 엊저녁부터 읽기 시작했다. 책을 다 읽고 난 뒤의 내 감상은 참으로 아름다운 책이구나라는 것이었다. 고대 히브리 어를 연구하는 성서학자이자 등반가이기도 하다는 이탈리아 나폴리 출신 에리 데 루카는 이탈리아의 국민 작가라고 하는데 의외로 우리에게는 널리 알려지지 않은 그런 작가다. 그래서 더 마음에 들었다고나 할까. 새로운 작가와의 만남, 언제나 대환영이다.

 

위대한 산양 왕과 그를 추격하는 사냥꾼, 스스로는 비루한 산짐승도둑이라고 부르는 사냥꾼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연년에 읽은 니콜라이 바이코프의 <위대한 왕>이 떠올랐다. 호랑이와 인간의 대결이 <위대한 왕>의 내용이라면, 산양의 뿔과 등갈기 가죽을 탐하는 인간 사냥꾼에게 어미와 수많은 자식들을 잃은 산양왕의 대결이 <나비의 무게>의 근간을 이룬다.

 

자연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도저히 다룰 수 없는 세심한 부분들을 읽으면서 한 작가의 지극한 자연사랑이 이렇게 문학적 승화라는 결과물로 이어질 수 있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사냥꾼의 총에 어미를 잃고, 허공을 나는 독수리에게 누이를 잃은 산양왕은 때가 되매 무리의 왕에게 도전장을 내고 당당하게 결투를 통해 자신의 예리한 뿔로 상대방의 배를 가르고 승리를 쟁취해서 위대한 왕이 되었다. 도전과 응전이라는 과정을 통한 대자연의 섭리를 작가는 담담한 필치로 그리고 있다.

 

20년 간 그렇게 무리의 위대한 왕으로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묘기에 가까운 절벽타기를 선보이며, 자신의 뒤를 추격하던 사냥꾼을 농락해 왔던 산양 왕은 자신의 시간이 다했음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마치 만물이 변화하는 계절의 순환과 맞아 떨어지는 그런 오묘한 이치였던가. 아, 그전에 산양 왕은 자신의 누이를 잡아 갔던 배부른 독수리에게 한 차례 통쾌한 복수를 선보여 주기도 했다.

 

자연을 벗삼아 사는 산양 왕의 이야기가 <나비의 무게>의 한 트랙이라면, 그런 산양 왕에게 도전장을 들이민 사냥꾼의 이야기가 나머지 한 축이다. 예순의 나이에 가까운 밀렵전문가 사냥꾼은 자신을 붙잡기 위해 혈안이 단속반을 비웃으며 산골짜기를 산양 왕 못지않은 날랜 솜씨로 누비며 수백 마리의 산양을 총으로 사냥해 왔다. 자신의 사냥감인 산양에게 접급하기 위해 인간의 냄새를 감출 줄 아는 능력까지 겸비해서 자그마치 300마리에 가까운 산양들을 사냥했다. 소설에서 이 선수는 마치 인간의 탐욕을 빗댄 그런 캐릭터로 형상화되었는데, 수십년간의 산생활을 통해 산양 왕처럼 산에 적응된 인간으로 그려진다. 산양 왕과 사냥꾼 모두 언젠가는 시간에 굴복하게 된 유한한 존재라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동일한 존재라는 점을 작가는 냉철하게 지적한다. 자신에게 철두철미한 유신론을 신봉하는 성서학자다운 전개가 아닐 수 없다.

 

어느 순간 독자는 니콜라이 바이코프의 <위대한 왕>처럼 <나비의 무게>의 두 주인공 역시 결말을 함께 공유하리라는 예상을 하게 된다. 그 둘을 이어주는 매개체는 사건의 곳곳에 등장해서 산양 왕의 뿔 위에 사뿐히 앉거나 혹은 사냥꾼의 총구를 노니는 한 마리의 나비다. 종이처럼 가벼울 나비의 무게는 60여년에 가까운 한 남자의 삶을 그리고 위대한 리더로 20년 넘게 산양 무리를 이끌어 온 산양 왕의 육신을 창조주에게 재인도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사냥꾼은 한 때 혁명가들과 함께 하기도 했다. 정의란 것이 사라진 시대에 밀렵이 무어 대수란 말인가. 받은 만큼 정직하게 돌려주는 자연과 달리 인간세계는 배신과 협잡으로 점철되어 있다. 사냥꾼의 배에 난 칼에 찔린 흉터가 그 증거이리라. 자신에게 접근해 오는 여성에게서도 마치 깊숙한 산속에서 산양을 대하듯이 그렇게 바투 선 긴장감을 표현하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자신에 대한 기사를 쓰겠다고 나선 여성 기자와의 마지막 인터뷰는 결국 성사되지 않았다.

 

그리고 보니 사냥꾼이 겨울의 추위를 이겨 내기 위해 가을에 장작을 패면서 남겨둔 나무꼭대기의 이파리들은 산양 왕이 즐기던 별미가 아니었던가. 서로 적대적인 모습의 존재들이 어떤 의미에서 상호의존적이라는 점이 눈길을 끌었다. 무한한 자연의 순환을 우리 미약한 인간이 어찌 다 알 수가 있겠는가.

 

최근 벌어진 살충제 계란 사태를 보면서, 자연과 인간이 조화로운 삶을 살 수는 없는 걸까라는 점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됐다. 동물의 생존 공간인 자연을 수탈과 착취의 대상으로 볼 게 아니라, 같은 공간에서 상대방에게 최대한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은 과연 없는 걸까하고 말이다. 조금 덜 소비하고, 조금 더 지불하고, 조금 더 기다릴 줄 아는 미덕을 갖춘 사회였다면 우리가 겪고 있는 살충제 계란 사태는 없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다.

 

말미에 실린 <나무를 보다>에서는 에델바이스의 이탈리아 이름 알프스 별, 혹은 스텔라 알피나를 하나 배웠다.

 

자연소설 <나비의 무게>는 정말 아름다웠다. 이 정도 내공을 담은 글을 쓰려면 얼마만큼의 자기수련 그리고 자연에 대한 사랑과 관찰이 필요한 걸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에리 데 루카 작가의 다른 책들을 한 번 읽어봐야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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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멸세계
무라타 사야카 지음, 최고은 옮김 / 살림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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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부터 ‘아들 딸 구별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라는 표어에 익숙한 세대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가 되었고 그 뒤에는 사실 잘 모르겠다. 이제 젊은 세대들은 애도 낳지 않게 된 모양이다. 그래서 정부는 인구절벽이 가까워져 온다며 호들갑을 떨며 엄청난 규모의 예산을 저출산 대책을 세운답시고 쏟아 부었지만, 출생인구는 점점 더 줄어들고 있는 중이다. 언제는 인구폭발 때문에 철저하게 산아제한을 해야 한다며 난리를 칠 적은 언제고 지금은 ‘다둥이 출산이 애국이다’라며 출산을 장려하는 쪽으로 전환됐다. 그런다고 해서 저출산 문제가 해결될 리가 없는데, 정부는 근본적인 문제에 관심이 전혀 없어 보인다.

 

그보다 먼저 아이를 낳기 위한 최적의 환경이 마련되어 있는지 묻고 싶다. 살인적인 주거비, 점점 인간의 노동력이 필요 없어지는 세상, 천문학적 사교육비 그리고 어린이집과 유치원 보내기 같은 보육문제 등등. 살기 좋은 사회라면 애를 낳지 말라고 뜯어 말려도 애를 낳으려고 하지 않을까. 저출산 이슈는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문제의 축소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다.

 

언제나처럼 사설이 길었다. <편의점 인간>(아직 읽지 못했다)으로 이름을 알린 일본 출신 작가 무라야 사야카의 <소멸세계>를 읽으면서 우리 사회에 대해 사유할 수가 있었다. 소설의 주인공 사카구치 아마네는 부모가 ‘교미’해서 태어난 별종인간이다. 미래 가상의 공간 일본에서는 전통적 가족 개념이 붕괴된지 오래다. 결혼해서 섹스하고, 임신과 출산의 과정을 거쳐 아이가 태어난다는 전통은 이제 부부관계를 근친상간이라며 비하하는 그런 시대가 되었다. 아이들은 죄다 인공수정을 통해 ‘생산’된다. 사랑과 성욕은 가족 바깥에서 해결해야 한다. 그래서 남편과 아내는 모두 각각의 애인들을 가지고 있다. 어때 상상이 가는가?

 

이미 태생부터 인공수정이 아닌 교미를 통해 태어난 아마네는 첫 번째 결혼에서 실패하고 단체 미팅을 통해 두 번째 남편과 만나 행복한 결혼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물리적 관계라고 수 있는 섹스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는 신인류와 달리 아마네는 만나는 애인들과 반드시 관계를 해야 직성이 풀리는 모양이다. 예전 가족제도에 대한 신념을 가지고 있는 아마네의 엄마는 그것을 아마네에 대한 저주라고 명명한다.

 

연인의 자살시도에 충격을 받은 남편 아마미야 사쿠와 역시 같은 아파트에 사는 인연으로 만나게 되어 육체관계까지 맺게 연인 미즈토와의 관계가 붕괴되면서 아마네와 사쿠 부부는 신인류에 대한 실험이 시행되고 있는 지바로 이주를 결심한다. 인공수정으로 ‘생산’된 아가들이 보편 인류의 모습이라는 실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남편 사쿠의 생각과는 달리, 아마네는 그렇게 태어난 아가들이 인공사육되는 애완동물들과 무엇이 다르냐며 경악한다. 자궁이 없는 남자도 아이를 낳을 수 있게 인공자궁을 매달고 무사히 출산에 성공한 사쿠에 대한 이야기를 전개하며 작가는 과연 우리 인류는 어떤 식으로 앞으로 진화하게 되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묻고 있었다.

 

우리에게 주어진 현재 일부일처제의 가족 시스템은 현대 자본주의의 부산물이라는 글을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현재 노동을 제공하는 역할을 가장에게 맡기고, 미래의 노동력을 제공하기 위한 일꾼인 아이들의 육아부담과 가사노동을 여성에게 지우는 가장 효율적인 방식이 바로 지금의 결혼제도라는 것이다. 자본주의 시스템 아래 자본이 자본을 낳는 무한 잉여가치를 생산하기 위해, 가장은 쉼 없이 돈벌이에 매진해야 하며, 아이를 낳고 기르는 일 다시 말해 재생산은 모두 개인에게 떠넘기는 작금의 결혼제도야말로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최고의 발명품이라는 주장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런 구태의연한 결혼제도에 무라야 사야카 작가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다. 남녀 간의 사적 결합인 결혼제도를 정면으로 부정하고, 기존 가족제도의 해체를 통해 도대체 무엇이 정상이고, 무엇이 비정상이냐는 가치판단 기준을 허문다. 모든 이들이 비슷한 시기에 고통 없이 인공수정으로 아이를 가지고, 비슷한 시기에 출산해서 공동육아에 나서는 모습은 마치 붕어빵틀에서 붕어빵을 찍어내는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물론 모든 아이들을 자신의 아이 나아가 인류의 아이라고 생각하며 공동육아하는 장면은 조금 이해가 됐지만, 그런 반방식으로 몰개성한 아이들을 생산해내는 것은 두렵기까지 했다. 하긴 우리의 오랜 선조가 우리가 시행하고 있는 현재의 결혼제도를 보면 또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니 소설 <소멸세계>에서 무라야 사야카 작가가 그리는 대로 우리 인류가 앞으로 진화하지 않는다는 그리고 남자가 애를 낳는 시대가 오지 말란 법도 없지 않은가.

 

문득 소설의 어디선가 읽은 과연 ‘사랑이 고통이라는 발작의 공유’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공 아마네는 ‘바깥 세상’에 존재하는 라피스 같은 인간이 아닌 존재와도 사랑에 빠지곤 한다. 아마네는 인간을 포함한 40여명에 달하는 무생물 애인들을 파우치에 넣어 다니며 상호간에 이루어지는 사랑이 아닌 일방통행식 사랑 그리고 신도시 지바로 이사해서는 ‘클린 룸’에서 욕망을 해소하곤 했다. 사랑이라는 감정마저 일회용이 되어 버리는 마당에 그 다음 단계에 이루어지는 결혼과 출산 같은 가치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지 않을까. 난 여전히 다가올 미래가 디스토피아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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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17-08-21 20: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덕분에 <편의점 인간>까지 섭렵하며, 도대체 작가는 어떻게 이런 비타협적인 전복을 상상해낼까 신기했어요

레삭매냐 2017-08-22 08:56   좋아요 0 | URL
전 아직 <편의점인간> 읽어 보지 않았는데
이번 가을에 한 번 도전해 봐야겠습니다 :>

어떤 전복이 또 담겨 있을지 궁금하네요.

2017-08-21 22: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8-22 08: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고양이가 사는 집
정정화 지음 / 연암서가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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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도 그리고 소설도 우리는 너무 서울 중심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소설에 등장하는 일단의 공간들은 익숙하다. 인문서적을 중심으로 출판하는 연암서가에서 나온 소설집 <고양이가 사는 집>의 정정화 작가는 공간의 중심을 서울에서 지방으로 이전한다. 그래서 언양이니 태화강, 희락공원, 작괘천 그리고 자수정동굴 같은 실존하는 지명들은 외국 소설을 읽는 것처럼 낯설기까지 하다. 내가 만약에 소설을 쓰게 된다면 관심을 지방으로 돌려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그런 점에서 <고양이가 사는 집>은 포인트 하나.

 

모두 10개의 단편소설로 이루어진 <고양이가 사는 집>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하나 같이 일상밀착형이다. 러시아 여행을 떠나 만난 사람 듬직해 보이는 가이드가 사실은 여행객의 돈을 훔친 범인이었고, 그 사실을 알게 된 화자가 추궁하지만 오히려 자신의 신산했던 삶에 대해 넋두리를 늘어놓질 않나, 어린 나이에 결혼해서 모두가 반대하는 결혼을 골인해서 아이를 낳고 작은 행복이나마 이어가고 싶어했던 주인공 엄마의 바람은 가장으로서 책임보다는 게임에 중독되어 결국 비극적인 결말로 이어진다. 그야말로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까 싶은 이야기들의 모체는 이미 소설이 아닌 현실에서 목격하지 않았던가. 그런 점에서 대중에게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이야기들이 펼쳐지는 자극적 현실이 쉬르리얼리즘의 영역을 훨씬 뛰어 넘은 모양이다.

 

<불맛>에서는 오갈 데 없는 자신을 거둬준 은인 아저씨의 젊은 부인 수진을 은근히 사모하는 청년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묘목 납품 경쟁에서 자신보다 젊고 능력 있는 석규에게 진 아저씨는 엉뚱하게 수진에게 화풀이를 하고, 낫을 들고 석규의 묘목들이 심겨진 밭으로 가 화풀이를 한다. 그 장면에서는 경영을 잘못해서 기울어진 사업탓을 타인에게 전가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새정부 들어 교정에 들어간 갑질제거 작전의 대상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데 정작 균열과 붕괴는 외부의 화마가 아니라 자기 내부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모두가 아는 사실을 아저씨만 모르고 있다는 게 문제로 보인다 내게는.

 

흑색 토마토라고도 불리는 <쿠마토>는 도망간 엄마의 자리를 대신한 외국 출신 새엄마에 대한 미묘한 감정을 중학생 딸이 기술한 이야기다. 쿠마토 농장으로 먹고 사는 아버지에게 잰 솜씨로 수분작업을 하고 익숙하지 않지만 한국음식을 만들어 주려고 노력하고, 한국어 배우기에도 열심인 새아내는 과분할 따름이다. 문제는 그놈의 의처증과 딸내미의 음모로 시작된 가정폭력의 수준이다. 폭력의 단초를 제공한 딸은 불길이 자신에게 닥치는 걸 원하지 않으면서도, 잘못된 것을 교정하려는 적극적인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불의가 만연했던 지난 9년의 세월 동안 당신을 도대체 무얼 했냐는 작가의 힐난처럼 다가왔다. 더 큰 비극이 발생하기 전에 새엄마의 새출발을 응원했고, 결말은 그렇게 됐다.

 

<뻥튀기 먹는 남자>도 재밌게 읽었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은 춘복은 미꾸리와 메뚜기를 잡아 팔아다가 가족을 봉양하고, 동생들을 교육시켰다. 어린 나이의 가장 노릇을 하게 된 춘복은 어쩌다 보니 마흔을 훨씬 넘긴 노총각이 되었다. 그런 그에게 어머니는 외국 며느리라도 들이라고 성화인데, 그것이 매매혼이라는 건 누구나 다 알고 있지 않은가. 정식으로 결혼할 수도, 그리고 아무리 열심히 뒷바라지를 해봐야 남 좋은 일 시키는 거라며 어머니의 지청구 따위는 잔소리일 뿐이다. 그렇게 열심히 뒷바라지한 동생들이 우연히 만나 살림을 차린 수희보다 나은 게 무엇이란 말인가. 춘복의 속마음을 작가는 한 편의 르포처럼 추적한다. 모든 일에는 타이밍이 중요한 법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이 안돼 할아버지의 가업인 뻥튀기 장수로 나선 성수는 저마다 튀기는 시간이 다른 곡류를 다루는 노하우를 몰라 태워 먹기가 일쑤다. 작가는 사카린을 넣어 튀기는 달달한 뻥튀기 만들기와 춘복이 원하는 사랑의 궤적을 투트랙으로 추적한다. 개인적으로 열 개의 소설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이야기였다.

 

이 소설을 읽기 전에 두 편의 외국소설을 읽었는데, 나는 이렇게 정감이 넘치는 우리 소설을 읽고 싶었던 모양이다. 제대로 씹지도 않은 채, 맛난 꿀떡을 삼키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외식을 오래 하다 보면, 구수한 된장국이 먹고 싶어지는 그런 심정이려나.

 

희락공원의 건강음료 파는 아줌마에게 속아 죽은 아내의 기일날 금가락지 해줄 돈 40만원을 털린 김 노인의 스토리는 또 어찌나 애잔하던지. 그러게 살아 있을 적에 잘할 것이지. 아내의 죽음이 아버지 탓이라는 아들의 말에 김 노인은 제대로 대거리도 못한다. 사실이니까. 김 노인의 처지를 동정해 주던 멋쟁이가 알고 보니 사기꾼 아줌마와 한통속이었다는 사실은 아예 놀랍지도 않다. 하긴 그녀의 사정도 들어 보면 그럴 만하구나 싶을 정도니 말이다. 울산에서 부산에 둥지를 튼 오빠네 집에 놀러 갔다가 멋진 드레스 한 벌 얻어 입고, 못볼 꼴을 보고 결국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동생의 사연은 또 어떤가. 임신까지 한 동거녀를 제자라고 소개하는 품새도 그렇지만, 우유부단한 오빠에게 아버지가 마음에 들어하는 초등학교 교사 올케가 있다는 건 반전이었다. 오빠의 신세는 동생이 잡으려고 놓은 쥐 끈끈이에 잡혀 허덕이는 신세와 묘하게 오버랩이 된다.

 

농부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담장>에서는 어디선가 읽은 구제역에 걸린 동물들을 산 채로 파묻는 장면이 그래도 떠올랐다. 그나마 소는 죽여서 묻었는데 돼지들은 산 채로 묻었다고 했던가. 수입쇠고기 때문에 솟값은 하루가 다르게 떨어지는데 왜 우리 소비자들은 여전히 떨어진 쇠고기값을 체감할 수가 없는 걸까? 도대체 중간 유통에서 챙기는 우리의 이익이 얼마란 말인가 따위은 소소한 질문은 대처에서 들어온 이웃집 형의 아내가 기왓집을 허물고 새로 집을 지으면서 땅문제로 유발된 갈등에 파묻힌다. 그렇지 언제나 땅이, 내가 가진 알량한 재산이 문제로구나. 사료값도 되지 않는 소를 위해 녀석의 분뇨를 치우며 1시간이면 할 수 있는 일을 4시간 걸려 하니, 짜증이 나지 않고 배길 재간이 없었겠지. 엉성한 봉합으로 땅문제는 해결되고 막걸리로 대동단결한 불콰해진 얼굴들을 생각해 보니 절로 웃음이 났다. 뭐 그렇게 가는 거겠지.

 

표제작 <고양이가 사는 집>에서는 실직한 가장이 등장한다. 지난 주말 도널드 웨스트레이크가 쓴 <액스>에서는 실직한 가장이 냉혹한 연쇄살인마로 변신하는 과정에 대해 열띤 토론을 가졌었는데 대한민국의 실직한 가장은 신자유주의의 세련된 세뇌를 받아, 구조적 사회모순에 대해 조목조목 따지는 대신 모든 성공과 실패를 내 탓으로 돌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조금이나마 가사에 보태겠다고 고무 패킹 끼우는 부업을 하는 아내에게 차마 실직했다는 말이 떨어지지 않는 우리의 가장.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모든 것을 집어 삼킨 엄혹한 시절, 실업이 곧 가정의 파탄선고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 나도 내 일자리를 잘 지켜야겠구나하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아주 만족스러운 독서였다. 문학계의 변방에서도 독자에게 호소할 수 있는 내러티브를 가진 소설가가 열심히 글을 짓고 있다는 사실에 아주 기분이 좋았다. 때로는 나 자신을 이야기에 투영시켜 비교해 보기도 하고, 나만의 고민이 아닌 우리 모두의 고민이 될 수도 있는 문제에 대해 진지한 사유도 해볼 수가 있었다. 앞으로도 건필하시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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