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정제 이산의 책 17
미야자키 이치사다 지음, 차혜원 옮김 / 이산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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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출신 중국사의 대가라는 미야자키 이치사다 선생의 <옹정제>를 읽었다. <강희제>는 서구 학자인 조너선 스펜스 교수의 책으로 만나 봤고, <건륭제> 역시 완독은 못했지만 역시 서구 학자의 시선으로 들여다 보았다. 이번에도 역시 모국 사람은 아니지만, 역시 나름대로 객관성을 담보할 수 있는 이방인의 시선으로 아시아 대제국을 호령했던 군주를 조명해 볼 수 있는 기회였다. 분량이 짧아서 부담 없이 도전할 수가 있었다.

 

흔히들 말하는 강희 건륭연간 사이에 낀 청나라 5번째 황제로 긴 제위기간을 자랑하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낀 비운의 인물이라고나 할까. 3대 순치제 시절에 대망의 중원 패권을 차지한 청조는 강희 연간의 대규모 반란과 원정을 통해 안정기로 접어들고 있었다. 노년의 강희제는 후계자 문제로 골머리를 썩고 있었다. 이후에 없을 황태자를 세워, 후계를 도모했지만 이미 조정의 큰 문제가 된 보스 정치의 폐해로 황태자가 낙마하고 결국 자그마치 35명이나 되는 황자들 가운데 사아거 인전이 대권을 차지하게 되었다.

 

45세의 나이에 천자의 자리에 오른 옹정제는 훌륭한 정치로 사해인민을 다스리겠다는 당찬 포부와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청년 천자에게서는 기대할 수 없는 그런 자세가 아니었을까. 일단 만승의 자리인 황제가 된 옹정제는 주변 정리부터 시작한다. 비록 형제이긴 했지만 자신과 황위 계승 경쟁자들이었던 형제들을 숙청하고, 태조 누르하치의 장자 추옝의 후손들인 수누 일족도 순차적으로 정리해 나간다. 물론, 십삽아거 이친왕처럼 자신에게 충성한 형제들에게는 그만큼 합당한 대우를 해주기도 했다. 역시 권력은 부모형제와도 나눌 수 없다는 오랜 격언이 생각나는 순간이었다.

 

미야자키 교수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수누 일족에 대한 기사에서 충성심과 인내 그리고 성실함에서 한족을 압도했던 만주 귀족에 대한 후한 평가를 아끼지 않는다. 고작 인구 100만 정도의 만주족으로 백배나 되는 한족이 사는 중원 대륙을 점령한 성취에 대해 만주족 신인 아부카이 칸의 수호가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으리라는 인식도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소수의 만주족이 다수의 한족을 영원히 지배하기 위해선 기존의 이데올로기만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수누 일족은 소수의 신에서 보편적 신인 기독교로 귀의했던 게 아닐까. 자신의 일족을 핍박하는 천자의 부당한 처사에 수누 노인은 당당하게 맞서는 장면에서는 만주 꼴통의 기개를 엿볼 수도 있었다. 역시 보수라면 이 정도는 되야지 하는 생각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일본 작가의 옹정제 평전에서 흥미로웠던 점 중의 하나는 당대 여론을 주름 잡았던 독서인, 다시 말해 관료들에 대한 평가다. 현대 같은 미디어가 없던 시절 여론을 좌지우지했던 그룹은 역시 관료 지식인 계급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다. 자신들의 이익에 반하는 정책에 대해 그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을 지는 불을 보듯 뻔하지 않은가. 400개 주나 되는 광활한 중국 대륙을 통치하기 위해서 관료제에 대한 천자의 장악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문제는 아무리 옹정제가 만기친람 스타일의 독재군주라 하더라도 모든 것을 다 챙길 수는 없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황제는 주비유지라는 방식으로 순무나 총독 같은 주요 지방관들로부터 기밀 보고를 받았고, 사실여부를 가리기 위해 밀정 정치를 충실하게 활용했다. 천자의 지방관들이 모두 그가 총애한 총독 3인방 리웨이, 텐원징 그리고 오르타이 같은 유능한 행정관료들 같았다면 천명을 대신해서 천조를 다스리는 수월했겠지만, 자본과 결탁한 관료들을 다스리기란 난망한 주제였다.

 

지식인 계급에게 독점된 자본 집중 문제도 결국에 가서는 중국이 근대화로 이행하지 못하게 된 결정적 요인이었다고 저자는 냉철하게 분석한다. 비슷한 시기의 유럽에 비해 청나라의 생산력을 월등했지만, 산업혁명을 거친 유럽에 비해 재생산에 투입되지 못하고 사장된 자본 때문에 결국 아편전쟁으로 이어지는 서구 열강의 침탈이라는 암흑의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개인적으로 조너선 스펜스 교수가 <반역의 책>(사두기만 하고 아직 못 읽었다)에서 다룬 악비의 후손으로 알려진 웨중치에게 모반을 권고한 쩡징과 <대의각미록>에 대한 문자옥에 대해 미야자키 교수는 어떤 평가를 했을 지 궁금했는데, 간략하게 다루고 넘어 가서 좀 아쉬웠다. 대인배 모습을 보이고자 황제는 한낱 서생에 지나지 않는 쩡징과 무려 토론 배틀을 벌여 그를 마침내 굴복시키는데 성공하고 삼족을 멸하는 처벌 대신 석방한다. 그렇게 끝나면 좋았으련만, 아들 건륭제가 즉위한 다음 쩡징은 처벌을 면할 수 없게 된다. 각종 유언비어의 출처였던 <대의각미록>도 역시 시중에서 회수되었다.

 

중년의 나이에 제위에 오른 옹정제는 선제 강희제와 아들 건륭제가 선택한 관용의 정치보다는 수성과 관리의 제왕으로 중국식 독재방식을 선호했다. 문제는 제국에 주어진 모든 문제를 황제가 관리할 수 없다는 현실이었다. 어쩌면 황제의 지나친 자신감이 청나라 다른 황제에 비해 비교적 짧은 제위 기간으로 나타났던 게 아닐까. 아무리 체력이 강한 제왕이라고 하더라도 정신적 스트레스와 관료들을 제압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다 보면 결국 쓰러지기 마련이다. 어쨌든 낭비과 허례허식을 허용하지 않는 현실주의자로 옹정제는 제국의 재정을 견실하게 다졌고, 다음 대의 건륭제 시절의 대원정을 위한 튼튼한 국가재정을 마련해 주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 다만, 강희제나 건륭제처럼 전장에서 특별한 공적을 쌓지 못했다는 점 때문에 후대에 빈약한 평가를 받게 되어 아쉽다는 의견을 저자는 개진한다.

 

마크 C. 엘리엇의 <건륭제>를 읽다 말았는데, 옹정제 평전을 읽고 나니 그 책이 다시 읽고 싶어졌다. 하버드 중국사 시리즈 중에서 윌리엄 T. 로가 쓴 <청 : 중국 최후의 제국>도 중간에 멈춰 서 있다. 앞으로 남은 두 달 동안은 새로운 책들을 읽을 게 아니라 읽다만 책들부터 하나씩 읽어야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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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스트 박사의 오류
김연경 지음 / 강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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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한 김소진 작가 덕분에 강 출판사를 알게 됐다. 그리고 한국 소설이 읽고 싶어지면 강 출판사에서 나온 책들을 뒤적여 보게 된다. 그렇게 탁명주 작가의 <도마뱀이 숨 쉬는 방>과 정광모 작가의 <존슨 기억 판매 회사>(아직까지도 리뷰를 못 쓰고 있다)를 만났다.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보석 같은 글들이 담긴 책들이라 애정할 수밖에 없더라. 지난 4월에 사서 나의 서가에 고이 모셔 두었던 김연경 작가의 <파우스트 박사의 오류>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역시나 재밌었다. 더 바랄 게 없을 정도로.

 

내가 마지막으로 읽은 한국 소설은 지난 8월의 배명훈 작가의 신작 소설이었다. 그 뒤로는 한국 소설을 읽지 못했다. 아니 않았던가? 관심을 가지고 있던 외국 작가들의 새로운 신간들이 쏟아져 나오고, 게다가 가즈오 이시구로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덕분에 한참을 외유하며 보낸 그런 느낌이다. 독자들의 소구력을 끄는 작가들이 이렇게 없단 말인가. 독자들은 특별한 이야기가 아닌 <파우스트 박사의 오류>에 등장하는 일상의 평범한 이들의 범속한 일상을 원한다. 하긴 현실세계에서 워낙 드라마틱한 사건 사고들이 끊이지 않고 발생하니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현실계에서 문학으로 점프할 시간이 있나 그래.

 

사실 김연경 작가는 소설가로 보다 번역가로 더 친숙한 그런 느낌이다. 표제작에서 교수 임용을 두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다 결국 자기 소멸을 선택한 독일 고전철학 연구교수 최승휴 씨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한다. 소위 자본주의 3.0 시대, 사회 전반에 걸친 각자도생의 시절이다. 학문 분야에서도 경쟁은 필요불가결한 요소일 수밖에 없다. 평생 공부만 해서 먹고 살아온 최승휴 씨는 시간강사가 아닌 정규직 교수의 꿈을 키워 보지만, 희망고문일 따름이다. 알코올, 카페인 그리고 니코틴만으로 넘치는 지식인의 자아의식을 달랠 수 없었던 그는 극단적 선택을 하게 된다. 철학이 더 이상 밥먹여 주지 않는 세상, 그것이 바로 21세기 우리가 직면한 살풍경한 모습이다.

 

시작이 좀 어두웠다. 다음 이야기 <>에서는 나의 짧았던 연구소 시절을 생각나게 하는 부산처녀 서울 상경기가 이어진다. 한 때 죽고 못살아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었던 부모 대부터 시작된 한많은 가족사에서는 왜 이렇게 웃음이 나던지. 무능력한 아버지의 모습과 고된 시집살이에 술에 손대기 시작한 어머니의 알코올 연대기, 사해동포주의자 동생의 화려한 방랑기. 어느 소설에서도 빠지지 않을 법한 불행의 삼종세트가 그대로 시전되는 장면 앞에서 덮고 있던 이불을 걷어차며 낄낄댔다. 아무리 문학적 상상력이라고 하지만 타인의 불행에 웃는 내가 과연 비정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범속한 이야기들에 몰입되어 가기 시작했다. 한 때, 요만한 고추를 가진 전혀 로맨틱해 보이지 않는 노총각 상사와 사랑에 빠지는 장면들이 점점히 이어진다.

 

고달픈 육아러의 모습에, 처자식 벌어 먹이겠노라고 천지사방으로 뛰면서 파이프 영업을 하며 시설도 후진 여관방에 피곤한 몸을 누이는 우리네 가장의 고달픈 일상의 모습들이 파노라마처럼 휙휙 지나쳐 가기 시작한다. 뭐 다 그렇게 사는 게 아니겠어, 그렇게 가는 거지. 별 것도 아닌 문장들인 여기가 묵시록이다”, “Welcome to the real world"에서는 왜 이렇게 절절하게 다가오던지. 무엇이 우연이고, 필연인지 그리고 또 인과는 따져서 무엇하리.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리 타령이 절로 나온다.

 

삼십대 후반의 썸타던 동기에게 주워들은 그야말로 바람의 파이터 찜쪄 먹을 만한 스토리를 지닌 강태공이자 심마니를 취재해서 소설 소재로 써먹기 위해 무작정 일본까지 날아가는 소설가의 이야기는 또 어떤가. 자신의 원룸에 당당하게 들어와 아이스크림을 쟁여 놓은 도둑님과의 대화 장면에서도 빵빵 터졌다. 아마 문제의 아이스크림이 호두마루였지. 그거 맛있는데. 별 소득 없이 돌아와 결국 듣게 된 이야기는 너무 진부하기 짝이 없었다. 이혼 후 다시 만난 운명의 여인과 나이 오십에 아이 낳고, 아이 교육을 위해 다시 서울로 가야 한다는. 사교육, 부동산공화국의 민낯을 교묘하게 저격하기도 한다. 구토에 따른 허기 그리고 폭식으로 이어지는 청춘들의 초상이 등장하는 장면도 쓸쓸하기만 하다. 그놈의 인공지능 알파고 타령 때문에 더 이상 개인의 노동이 예전 같이 중요하지 않은 시절에, 실연 때문에 수면제를 삼키는 장면을 과연 감정의 과잉으로 치부하는 게 옳은 것인지 모르겠다.

 

모두 8편이 실린 소설집 <파우스트 박사의 오류>에서 부산 달동네에 훈이복덕방을 운영하시던 부부의 이야기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아무래도 맞벌이 부모 슬하에서 자란 때문인지, 그런 사람 사는 세상의 이야기에 염통이 노곤노곤해지는 느낌이랄까. 돌봐 주는 이 없이 성장하는 가운데 주변에 훈이복덕방 아주머니처럼 통 크게 내가 아닌 타인에게 베풀 줄 아는 분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라는 상념에 젖어 보기도 했다. 옆집 아이들에게 통째로 수박을 갈라 친구들까지 대접하기도 하고, 끼니를 거른 아이에게 계란 후라이를 부쳐 주며 먹성과 인사성 좋다는 말로 퉁치는 장면에서는 살짝 눈가에 염분이 느껴지기도 했다. 어려웠지만 서로 노나먹는 재미로 살던 시절은 저 뒷켠으로 썩 물러나 버리고, 살벌하기 짝이 없는 각자도생의 시기에 그야말로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전설 같은 이야기들.

어린 시절 들었던 전설 같은 고소득 시체 닦는 아르바이트의 추억 혹은 저주로 고생하는 주인공의 이야기가 등장하는 <아지랑이> 그리고 마지막의 <깍두기>로 김연경 작가가 구사하는 대망의 범속한 이야기들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마지막 단편의 주인공 이정애 씨의 깍두기 인생이 어찌나 슬프게 다가 오던지. 뭐 그렇게 가는 거지.

 

소설집 <파우스트 박사의 오류>에 담긴 우리네 일상 어디에서고 찾아볼 수 있는 범속한 이야기들이야말로 작가가 구사하는 최고의 문학적 무기가 아니었을까. 결혼과 출산, 육아 같은 일상의 주제들로부터 이렇게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탄생할 수 있다니 놀랍다. 우리가 늘상 접하는 텔레비전 드라마에 등장하는 황당무계한 막장극이 아니라, 우리네 현실과 아주 가까운 그런 범속한 이야기들이기 때문에 더 설득력과 소구력을 가지게 되는 게 아닐까. 내가 다음에 읽고 싶은 강 출판사의 책은 김가경 작가의 <몰리모를 부는 화요일>이다. 안타깝게도 내가 사는 인근 세 개 도시 도서관에서 강 출판사에서 나온 책들은 아예 소장을 하지 않으려고 작정을 한 모양이다. 사서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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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죄
이언 매큐언 지음, 한정아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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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망의 이언 매큐언 전작 읽기의 화룡점정이었다. 왜 그렇게 다들 <속죄>가 이언 매큐언의 대표작이라고 하는지 직접 읽고서야 알게 되었다. 어느 작가의 최고 작품을 다 읽고 나서 다른 작품을 떠올려 보니 그 이유를 정확하게 알 수가 있었다. 어쩌면 작가는 이런 작품을 쓰기 위해 글쓰기라는 혹독한 고행에 나서는 지도 모르겠다. 장장 5개월이나 걸린 나의 <속죄> 읽기는 그리고 올해 목표로 했던 이언 매큐언 전작읽기는 완료됐다. 최소한 작가의 아직 번역이 안된 작품이 나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 있는 나날>의 그것과 비슷한 시기인 1935년 영국의 서리 지방이다. 소설 <속죄>는 유복한 탈리스 집안의 세실리아와 미래의 작가를 꿈꾸는 공상가 브리오니 그리고 파출부의 아들로 옥스퍼드를 졸업하고 의사 지망생 로비 터너, 이 세 명 주인공의 엇갈린 운명을 촘촘하게 집어내고 있다. 모두 알다시피 전간기에 해당하는 1930년대는 히틀러가 집권한 독일에서 촉발된 전쟁의 암운이 유럽대륙에 퍼지고 있던 시기였다.

 

솔직히 말해서 다소 산만해 보이는 1부에 해당하는 이야기까지 지난 여름에 읽다가 잠시 멈췄었다. 그리고 시작했지만 끝내지 못한 전작 미션을 완수하기 위해 다시 책을 집어 들었다. 그렇게 1부를 지나고 나니 놀랄 만큼 독서에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탈리스 집안의 여러 식구들이 모여 축제 같은 밤이 되었어야 하는 시간에 브리오니의 쌍둥이 사촌동생들인 피에로와 잭슨이 사라지고 그들을 찾아나섰던 누나 15세 소녀 롤라 퀸시가 어둠 속에서 누군가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그리고 세실리아의 비밀연인 로비 터너가 공상가 브리오니에 의해 범인으로 지목된다. 브리오니는 그날 있었던 몇 가지 사건에 근거해서 자신이 직접 사건을 목격한 것도 아니면서 당당하게 로비를 범인이라고 증언한다.

 

그리고 시간은 5년 뒤로 이동한다. 영국원정군의 일원으로 프랑스에 파견된 로비는 그 유명한 덩케르크로 볼썽사납게 퇴각 중이다. 아니 연애소설이라고 생각했던 소설에서 갑자기 전투 씬이 등장하는 건 또 웬 말인가. 아직 영화 <덩케르크>를 보지 못해 아쉽지만,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에서는 당시 상황을 어떻게 그리고 있는지 자못 궁금해졌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3년 6개월의 형을 감옥에서 살던 로비 터너는 자원 입대한다는 조건으로 감형을 받고, 전선으로 파견된 것이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아르덴 숲을 돌파해서 그 유명한 에르빈 롬멜을 선봉으로 한 기갑사단을 중심으로 파죽의 진격 중인 독일군에게 치욕적인 패배를 당하고 본국으로 철수하기 위해 메이스와 네틀 상병과 함께 퇴각 중인 로비 터너. 아무리 생각해도 로비는 자신을 범인으로 지목한 브리오니를 용서할 수 없다.

 

1부에 비해 생사가 순간에 엇갈리는 순간들의 연속이 이어지는 2부는 마치 한 편의 전쟁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삶의 이유인 연인이 기다리는 본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로비는 아비규환 속에서 무조건 살아남아야 한다고 결심한다.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범죄 때문에 한창 나이에 억울한 옥살이를 해야 했던 남자의 심정이 절절하게 들어와 박힌다. 그런데 그 장본인이 사랑하는 연인의 하나 뿐인 여동생이라니. 꼬맹이의 뒤틀린 감정이 한 사람의 운명을 파국으로 인도할 수도 있다는 작가의 설정은 잔혹하기만 하다.

 

게다가 로비가 생존 투쟁을 벌여야 하는 공간은 바로 비참한 패배를 당하고 도주 중인 전쟁터다. 독일군의 째지는 듯한 소리를 내며 슈투카는 패주 중인 병사들에게 총격과 폭탄을 떨어뜨리길 주저하지 않는다. 피와 살이 튀는 현장에 대한 생생한 묘사는 압도적이다. 죽음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다. 아마 그 와중에 로비도 부상을 당한 모양이다. 어찌어찌 해서 마침내 덩케르크 해안에 도착한 로비는 부디 본국으로 무사히 귀환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다시 장면은 영국으로 전환된다. 5년 전에 자신이 저지른 치명적인 잘못을 깨닫게 된 공상전문가이자 문학청년 브리오니는 로비와 세실리아에게 속죄하기 위해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하녀들이나 하는 허드렛일을 하기 위해 자진해서 수련간호사에 지원한다. 공상과 일기 쓰기를 즐기는 브리오니에게 마침내 덩케르크에서 퇴각한 처참한 몰골의 병사들이 도착하기 시작한다. 그 중에 혹시 로비가 있는 지 확인하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을까. 이제 20세가 된 롤라 퀸시가 운명의 그날밤 자신을 폭행한 남자와 결혼식을 치르게 되었다는 사실에 그저 놀랄 따름이다. 그리고 자신과 의절한 언니 세실리아를 찾았다가 함께 있던 로비와 조우하게 되는 브리오니. 마침내 그들에게 속죄하고 싶다는 말을 건넨다.

 

그리고 다시 64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1999년, 77세의 저명한 작가가 된 브리오니는 이제는 호텔로 변신한 탈리스 집안의 영지를 방문한다. 말미에 독자는 세 번째 이야기가 모두 브리오니의 상상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1940년 로비 터너는 독일군의 폭탄 세례가 떨어지던 덩케르크 해변에서 패혈증으로 죽었고, 언니 세실리아 역시 벨엄에서 독일군의 폭탄공격에 사망했다.

 

과연 그것으로 브리오니 탈리스의 속죄가 완성된 것일까라는 작가는 묻는다. 당사자들의 용서가 뒷받침되지 않은 속죄가 무슨 의미란 말인가. 브리오니의 무고가 없었다면 로비 터너는 의사가 되어 비교적 안전한 본국에 남아 전선에서 후방으로 이송되어온 환자들을 치료하며 안전하게 살아 남을 수 있지 않았을까. 언니 세실리아 역시 굳이 집안과 의절하고 간호사의 길을 걷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로비와 세실리아의 삶이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었으리라는 점은 보증할 수 없겠지만 말이다.

 

초기 작가 시절, 조금은 엽기적인 서사로 독자들을 놀라게 만들었던 이언 매큐언은 소설 <속죄>로 영미문화권을 대표하는 작가로 거듭나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다. 촘촘한 구성을 바탕으로 어떻게 해서 공상가 브리오니가 자신이 한 때 사랑한다고 믿었던 청년을 무고해서 억울한 삶을 살게 했고, 언니 세실리아의 사랑도 망가뜨려 버렸는지 독자에게 충실하게 전달한다. 1940년 전쟁과 사회적 계급마저 훌쩍 극복해낸 로비와 세실리아의 운명적 사랑에 안도하기도 했지만, 그것이 브리오니의 소설적 상상이었다는 점에 분노하기도 했다. 아니 어쩌면 동화적이지 않고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더 분노하게 되었던 것일까. 나는 모르겠다.

 

이제 원작소설을 다 읽었으니 구해 놓은 영화 <속죄>를 만나볼 시간이다. 소설을 읽은 여운이 다하기 전에 서둘러서 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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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11-06 17: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드디어 <시멘트 가든>을 샀습니다. 이 책 구입을 계기로 이언 매큐언의 소설을 읽어보려고 해요. ^^

레삭매냐 2017-11-06 17:29   좋아요 0 | URL
그러셨군요 ~ 전 오래 전에 사두기만 하고
읽지 않다가 이번에 신간 <넛셸> 출간을
계기로 완독하게 되었네요.

예전 책들이 절판되는 바람에 중고서점에
서 사냥하는 재미가 있습니다 :>
 
시녀 이야기 (특별판, 양장)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김선형 옮김 / 황금가지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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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드라마 시장에서 마가렛 애트우드 여사의 작품들이 강력한 소구력을 발휘하고 있다. 지난번에는 <시녀 이야기>로 대히트를 치더니, 이번에는 <그레이스>를 만들었다고 한다. 드라마를 다 보고 나서, 원작소설이 궁금해서 알라딘 한정판으로 나온 <시녀 이야기>를 구해서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드라마의 강력한 영향 덕분인지 한 백쪽 남짓 읽다가 접었다. 그리고 이달 들어 다시 읽기 시작했는데 이게 한 번 본궤도에 오르니 멈출 수가 없더라. 새벽까지 달려서 다 읽었다.

 

원작소설을 보면서 드라마가 상당히 원작에 충실했구나 싶었다. 미래의 어느 시점, 미국 땅에 들어선 신정국가 길리아드에 사는 시녀 오프레드가 소설의 주인공이다. 대재앙(정확하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가 없다) 이후, 현직 대통령을 총으로 쏘아 죽이고 정권을 잡은 사령관 일당들은 여성들의 권리를 엄격하게 제한하고 ‘눈’과 수호자 그리고 천사들이 중심이 된 신정국가 건설에 매진한다. 그들이 말하는 기존의 성적 타락과 방탕을 일소하겠다는 신념에 젖어 시민들의 삶을 극도로 억압하고 제한한다. 말로만 신정국가지 사실은 시민들의 모든 것을 감시하는 경찰국가 길리아드에서 정말 악질적인 것은 여성들을 사물로 취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재앙은 길리아드에게도 큰 재앙을 안겨 주었는데 그것은 바로 국가를 존속시키는데 절실하게 필요한 미래 세대를 생산해낼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출산율의 급격한 저하로 국가유지를 위한 아이들이 필요해지자, 아이를 생산해낼 수 있는 가임기의 여성들을 시녀라는 명칭으로 불임가정에 배당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의 주인공 오프레드도 사령관 프레드의 집에 배치되어 아이 생산을 맡게 된다. 의례라는 터무니없는 형식으로 오로지 아이를 생산하기 위해 본처 세레나 조이가 지켜보는 동안 사령관과 오프레드는 재생산에 들어간다.

 

디스토피아적 상상이 실제로 벌어질 수도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현재 미국 최고위직에서 터무니 없는 작태를 보이고 있는 권력자의 모습과 기묘하게 겹쳐졌다. 정말 무서웠던 것은 자유와 민주주주의 본고장이라는 나라가 순식간에 일단의 광신자들이 지배하는 경찰 신정국가로 돌변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왜 시민들은 길리아드의 그런 반동적인 움직임에 저항할 수 없었을까? 오프레드는 사랑하는 남편 루크와 딸을 빼앗기고 리디아 아주머니들의 철저한 재교육 과정을 통해 시녀로 거듭나게 된다. 그녀들의 존재는 게이샤나 매춘부들의 그것과도 현저하게 다르다. 소설에서 나오듯이 두 발 달리 자궁으로 오로지 재생산에 필요한 것 뿐이다. 그것을 거부한다면 열악한 환경의 콜로니에 배치되거나 비여성으로 분류되어 비참한 삶을 마치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시녀 활동 중에 세 번 실패하게 되도 마찬가지 운명이다.

 

넷플릭스 드라마에서는 좀 더 극적인 장면들에 치중했다면, 소설은 자유로웠던 시절을 기억하는 영혼에서 비참한 처지의 시녀로 전락한 오프레드의 내적 갈등에 좀 더 치중한다. 언제나 수동적인 삶을 살았던 오프레드에 비해 그녀의 친구 모이라는 보다 적극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재교육 센터에서 탈출을 시도했다가 잡혀서 엄청난 구타를 당하기도 하지만, 이성보다 동성에 더 끌리는 모이라는 마침내 엘리자베스 아주머니를 인질로 삼아 탈출하는데 성공한다. 그 후, 프레드 사령관을 따라 나섰던 일종의 일탈이었던 이세벨 하우스에서 그녀를 다시 만나는 장면도 드라마와 궤적을 같이 한다. 다만, 각고의 노력 끝에 모이라가 마침내 캐나다로 탈출하는데 성공하는 장면이 나오지만 소설과는 다른 부분이다. 루크 역시 캐나다로 탈출하는 과정에서 죽은 것으로 소설에 나오지만 드라마에서는 탈출에 성공해서 모이라와 재회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소설은 오프레드가 사령관의 집에서 어디론가 끌려 가는 장면으로 끝나는 반면, 드라마에서는 시즌 1을 같은 장면으로 끝내면서 새로운 시즌 2를 예고했다. 어떤 식의 서술이 등장할 지 <시녀 이야기> 두 번째 시즌이 기대된다.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오프레드는 모두 수동적인 여인을 대표하는 모습으로 출발한다. 하지만, 소설에서는 길리아드에서 자신이 체험한 모든 것으로 후대에 기록으로 남기는 그리고 드라마에서는 조금씩 자신만의 방식으로 시스템에 저항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그런 점에서는 드라마에 좀 더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아이를 위험에 빠뜨린 오브워렌 그러니까 재닌을 처벌하라는 리디아 아주머니의 요구를 정면으로 거부한 드라마 에피소드 마지막 장면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주로 홀로 있는 밤에 과거를 회상하며, 복기하는 식의 서술 전개 방식도 탁월했다. 아무도 믿을 수 없고, 모든 것이 감시되는 엄혹한 시절에 대한 서사는 묘한 기시감을 전달해 주기도 했다.

 

다시 소설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물리적 힘으로 시민의 자유를 억압하는 길리아드의 본질은 폭력이다. 그들은 폭력으로 헌정질서를 전복시키고, 자신들이 믿는 신념대로 국가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시민들이 치러야 하는 부당한 대우를 그들은 부차적 피해(collateral damage)라고 미화한다. 누구 좋으라고 이 짓거리를 하느냐며 빈정대는 오프레드의 항의에 대꾸하는 프레드 사령관의 논리는 빈약해 보인다. 그렇다면 시녀들이 좋아서 혹은 국가에 대한 애국심 때문에 자청해서 시녀가 되었단 말인가. 여성들은 오로지 미래 세대 생산을 위한 도구로 생각하는 야만적인 시각이 여과 없이 드러나는 장면에 소름이 돋았다. 하긴 동방예의지국이라는 어느 나라에서는 국가 기관이 예산을 들여 터무니없는 ‘출산지도’를 만들기도 하지 않았던가. 이런 시각이야말로 길리아드를 지배하는 사령관들의 시각과 다를 게 무엇이란 말인가. 또, 일반 시민들에게는 종교적이고 엄숙한 삶을 강요하면서 정작 자신들은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이세벨 하우스에서 쾌락을 만끽하지 않았던가. 마가렛 애트우드는 이런 방식으로 어느 시대에나 등장하는 지배권력의 위선적인 면모를 보기 좋게 저격한다.

 

소설 <시녀 이야기>의 마지막은 오랜 시간이 흘러 길리아드 시대가 끝난 뒤, 연구자들이 오프레드가 남긴 기록을 가지고 논쟁하는 장면이다. 나는 여기에서 다시 한 번 기록이 얼마나 중요한 지에 대해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길리아드의 역사를 논의하는 학회에서 연구자들은 오프레드가 남긴 기록에 대한 신빙성에 대해 제기한다. 자랑할 만하지 못한 일들에 대해 공식적인 기록이 남아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일본도 정신대에 대해 공식적인 기록이 없으니 존재하지 않았다는 식의 말도 되지 않는 논리로 억지를 부리고 있지 않은가. 주제와 상관이 없겠지만 어제 본 <김어준의 블랙하우스>에 등장한 미국사람 타일러 라쉬가 설파한 강대국의 논리인 국가는 일체의 감정이 배제되어야 한다는 방식의 그럴듯한 논리가 불쑥 떠올랐다.

 

처음으로 읽은 마가렛 애트우드 여사의 책이었는데, 지난 초여름에 본 드라마 <시녀 이야기>와 비교하면서 읽는 재미가 대단했다. 드라마는 드라마 대로, 그리고 소설은 소설 대로 훌륭했다고 생각한다. 이제 <그레이스> 차례다. 이번에는 아무래도 소설부터 먼저 읽고 나서 드라마를 시작해야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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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7-11-06 14: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드라마 보고 싶네요.
IP TV에서 하려나요?

책은 왠지 지루하지 않을까 싶기도 해요.
어느 지점에 꽂혀 내달리게 만드는 소설이 또
기가막히죠.^^

레삭매냐 2017-11-07 11:41   좋아요 0 | URL
아마 곧 풀리지 않을까 싶네요 :>

전 드라마를 먼저 보고 나서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일종의 시너지
효과를 느꼈다고나 할까요.

원작소설의 탄탄한 구성과 서사구조
에 다시 한 번 감탄했습니다.

독서괭 2017-11-07 03: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으면서 출산지도 사건이 떠올라 오싹했습니다...

레삭매냐 2017-11-07 09:31   좋아요 0 | URL
자그마치 21세기에도 이런 발상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더 놀랐지
뭡니까 그래...
 
Still Boy - of the still boy, by the still boy, for the still boy
SE OK 지음 / MY(흐름출판) / 2017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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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블랙 호크 다운을 보고 나서 원작 논픽션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검색해 봤다. 그런데 이미 절판된 지 오래되었더군. 그래서 이번엔 도서관을 이용해 보자는 생각해 보니, 관내 도서관에 한 권 있다고 한다. 바로 달려 가서 빌려 왔다. 그리고 빌려오는 길에 재밌어 보이는 남정네, 자칭 프로육아러라고 하는 세옥 씨의 <스틸 보이>와 최민석 작가라고 생각하고 빌린 백민석 작가의 <쿠바여행기>를 빌려 왔다. 내가 하는 일이 다 그렇지 뭐.

 

그리고 오후 낮잠 모드에 들어가기 전에 세옥 씨의 <스틸 보이>를 모조리 읽었다. 230쪽 남짓한 책이었는데, 한 편에는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그린 단상과 그림 그리고 해시태그가 담겨 있었다. 뭐 나도 비슷한 여정을 경험하고 있어서 그런지 어찌나 그렇게 공감이 가는지 몰랐다. 사는 게 다 그런 거지.

 

다들 아기가 태어나기 전에는 뱃속에 있는 것이 천국이라고 했는데, 그땐 미처 몰랐네. 그리고 등짝에 마치 닿으면 큰일이라도 나는 센서가 달려 있는지 도통 누워서 자려고 하지 않았으며, 유모차에서 자는 꼴을 거의 보지 못했다. 비슷하게 치러지는 매 순간마다 격렬하게 공감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렇지. 그리고 아주 아가야 시절에 외출하려고 하면 왜 그렇게 필요한 것들이 많은지. 바바리맨을 연상시키는 옷자락에 매달린 수많은 육아 장비들(!!!)을 보면서 그야말로 빵!!! 터졌다.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하고 가도 항상 빠지는 것들이 수두룩 했으며 그 없는 준비물로 난감했던 적이 어디 한 두 번이었던가.

 


백일의 기적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어느 정도 커서 말귀를 알아 듣게 된 지금은 시어를 입에 달고 사는 꼬맹이를 보면서 울컥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무언가 스스로 하겠다고 나서서 물이며 음료수를 엎지른 적이 어디 한 두 번이던가. 그나마 집에서는 으이구 하면서 치러내지만, 외식해 보겠다고 외출해서 음식점에서 밥알을 날리거나 음식물을 뒤집어 업을 적엔 정말 답없다. 등짝에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혹시나 파충이소리 들을라 열심히 물휴지며 걸레를 동원해서 흔적을 치우고자 노시초사했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흘러간다. 오늘도 한 건 하셔서 환타를 들고 뛰다가 보기 좋게 엎어 버렸다. 뒤처리하느라 등골이 살짝 휘는 그런 느낌.

 

그럼에도 꼬맹이와 같이 보내는 시절이 마냥 싫지만은 않은 것 같다. 응가를 치우면서 방독면 쓴 세옥 씨의 모습은 왜 그리도 공감이 가는지. 응가를 치우면서 이것도 내 새끼니까라는 생각이 공감 백만번이올시다. 입에서 쉬야~’라는 말이 나오기 무섭게 들쳐 메고 화장실 찾아 삼만리하는 장면도 어찌나 그렇게 빼박이던지. 다들 그렇게 사는구나 싶은 마음에 절로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다.

 

현재 육아에 전념 중인 육아러들 그리고 조만간 혹은 가차운 미래에 육아러 등록을 하신 분들은 꼭 한 번 읽어봄직한 그런 육아 그림일기가 아닐 수 없다.


[뱀다리] 어제 급하게 리뷰 쓰느라 빼먹었는데, 프로육아러의 부녀회장 3연임은 대박 쇼킹했다. 문제는 전세 만기로 곧 이사가야 한다는 건 안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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