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인드 라이터
사미르 판디야 지음, 임재희 옮김 / 나무옆의자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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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블라인드 라이터(Blind Writer)>를 읽으면서 두 가지 궁금증에 사로 잡혔다. 하나는 왜 제목을 맹인작가라고 하지 않고 원제 그대로 블라인드 라이터라고 했을까. 다른 하나는 왜 인도 작가들이 쓰는 소설에 등장하는 작가들의 페르소나는 하나 같이 일류 대학을 졸업한 재원이어야만 하는 걸까 하는 사실 말이다. 두 가지 모두에서 왠지 모를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의 잔재를 느꼈다고 한다면 오버일까?

 

three to tango

 

처음 만나는 작가 사미르 판디야는 인도 출신으로 8살 때 미국으로 이민 가서 데이비스에 소재한 캘리포니아 대학을 졸업하고 소설에 등장하는 세 명의 주인공 가운데 하나인 라케시 메타처럼 스탠퍼드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샌타바버라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문학과 문예창작을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가히 엘리트 코스를 밟은 작가라는 느낌이다.

 

맹인작가로 15권이나 되는 책을 쓴 아닐 트리베디와 힌두 여신을 닮은 그의 아내 미라 그리고 스탠퍼드에서 역사를 전공 중인 대학원생 라케시가 <블라인드 라이터>의 주인공이다. 아닐은 샌프란시스코를 방문 중으로, 인도 취향을 가진 예술애호가의 집 별채에 머물고 있는 중이다. 아닐은 자신을 위해 다양한 종류의 신문/책을 읽어줄 조수를 찾았고, 일주일에 세 번 하루에 세 시간에 15달러를 제공하는 조건으로 라케시와의 인연을 시작한다. 그리고 자연스런 수순대로 라케시는 아닐에게서 부상(father figure)의 이미지를 조각해 나간다. 하긴 어떤 부모 자식이 아닐과 라케시 같은 관계를 가지게 될까 싶다.

 

독자는 처음부터 맹인작가 아닐, 그의 26살이나 어리고 매력적인 아내 미라 그리고 24난 청년 라케시의 조합이 결국 문제가 될 거라는 점을 인식하게 된다. 이제는 예전 같은 필력을 자랑하지 못하지만, 장애를 가졌지만 뛰어난 유머감각을 지닌 아닐은 평생의 인연 미라를 찾았지만, 대가로 글쓰기를 잃어 버린 것일까. 마치 문하생처럼 아닐을 수행하며 작가의 꿈을 키우는 청년 라케시의 모습은 오늘을 사는 문청의 그것과 다를 게 없어 보인다.

 

스토리는 구루 슬립 바바를 떠나 자신의 아버지를 떠난 어머니에 대한 분노와 원망 그리고 첫 키스의 아련한 추억을 남긴 채 크리스마스 명절을 보내기 위해 자신들의 거처로 떠나 버린 미라를 찾아 아버지와 만난다는 변명으로 뉴욕을 찾은 라케시의 행적을 소설은 차분하게 묘사해낸다. 문창과 교수답게 사미르 판디야의 소설 구성과 작법은 무리가 없다. 다만 초반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비록 카스트 제도에 대한 언급은 거의 등장하지 않지만 이민자 특유의 성공에 대한 강박, 세계의 돈을 모두 긁어모을 것 같았던 월스트리트 생활을 떠나 자신만의 행복을 찾아 서부로 떠난 라케시에 대한 응원 같은 감정들이 소설의 곳곳에서 넘쳐 나는 걸 독자는 목격한다. , 그리고 약쟁이 배리 본즈가 한창 활약을 벌이던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경기를 보러 아닐과 라케시가 야구장을 찾았었지. 어쩌면 청년 라케시는 평생 아버지에게 원하던 바를 자신이 사부라고 생각하던 아닐에게서 찾았는지도 모르겠다.

 

치명적 파국 끝에 오락가락하던 데이트 상대 헬렌과 결국 결혼해서 가정을 꾸린 라케시는 아닐이 자동차 사고로 죽은 뒤, 책을 펴낸 미라의 독서낭독회에서 근 이십년만의 재회를 경험한다. 오래 전 행복했던 시절만은 간직한 채, 다시 자신의 돌아가야 하는 남녀의 모습이 왜 그리도 애잔하게 다가왔는지 모르겠다.

 

어제부터 시작한 나의 사미르 판디야와의 만남은 퇴근 길 독서로 마무리되었다. 항상 궁금해 하던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와 무엇보다 좋아하는 야구에 대한 묘사가 담겨 있어서 기대 이상으로 만족했었다. 물론 디아스포라라는 소재를 체험한 이방인의 이야기라 더더욱 좋았던 게 아닐까. 판디야 교수님의 또다른 작품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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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케르크 - 세계사 최대 규모의 철수 작전
에드워드 키블 채터턴 지음, 정탄 옮김, 권성욱 감수 / 교유서가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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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읽고 싶은 책은 바로 옆에 두어야 읽게 되는 법인가 보다. 작년부터 한 번 읽어야지 싶었던 에드워드 키블 채터턴의 <덩케르크>를 연초에 샀는데 이제야 읽게 됐다. 왜 난 이상하게도 소설보다도 역사를 다룬 책을 더 빨리 읽게 되는 걸까. 아무래도 문학적 감상의 소설과 역사서는 결이 달라서겠지. 암튼 후자가 진도 빼기에는 그리고 독서슬럼프에는 제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상 <다이나모 작전>으로 알려진 덩케르크 철수작전의 얼개는 다음과 같다. 1939년 9월 1일 나치 독일의 폴란드 전격전으로 시작된 2차 세계대전은 동부전선에서는 치열한 격전이 이루어졌지만, 이와는 반대로 서부전선은 조용했다. 1940년 5월 10일, 동부전선을 평정한 독일군이 예봉을 서부전선으로 돌리기 전까지 자그마치 7개월이나 되는 시간적 여유가 있었는데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은 대체 무얼 한 것일까? 동맹국 폴란드가 나치 독일의 기갑부대에게 유린되는 것을 그냥 지켜만 보고 있지 않았던가. 독일 군부는 그렇게 피하고자 했던 대로, 동부와 서부 양쪽 전선에서의 전쟁을 회피하는데 성공했다.

 

지난 세계대전에서 엄청난 피해를 겪은 프랑스군은 마지노선을 구축하고, 방어선 뒤에서 독일군을 기다렸다. 독일군 역시 지리한 참호전의 폐해를 몸소 겪었기 때문에 무리한 종심돌파 전략대신 기갑부대를 선봉으로 삼아 아르덴 숲을 돌파하는 연합군을 예상을 뛰어넘는 전략으로 5월 10일 서방공략에 나선다. 맹장 만슈타인과 독일 기갑부대의 아버지라 불리는 구데리안 그리고 훗날 아프리카 전선에서 사막의 여우라는 이름으로 명성을 날린 롬멜이 지휘하단 제7기갑사단이 단 5일만에 연합군의 방어선을 무너뜨리는데 성공했다.

 

주력부대가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받은 연합군은 그나마 믿었던 저지대 국가 중의 하나인 벨기에마저 독일군에게 맥없이 항복해 버리면서(저자 에드워드 키블 채터턴은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3세를 배신자라고 맹렬하게 공격한다) 자그마치 33만 명에 달하는 영불 연합군 병사들은 영불해협의 면한 덩케르크에 내몰리게 된다. 저자가 어떤 변명을 하더라도 그들은 전선에서 이탈한 패잔병일 수밖에 없었다. 다만 히틀러의 치명적 오판으로 인한 진격 중지명령 그리고 한 때 세계의 바다를 제패했던 대영제국의 해군과 그야말로 항해할 수 있는 모든 배들이 동원되어 덩케르크에 고립된 패잔병들을 구하러 나서는 과정을 저자는 세심하면서도 예리하게 그려냈다.

 

이 역사서가 덩케르크 철수작전이 벌어진 1940년에 쓰인 책이라는 점도 놀랍다. 모름지기 역사에서 교훈을 배우지 못하는 민족에게는 희망이 없었다고 했던가. 영국 해군은 1차세계대전 당시 갈리폴리 전투에서 엄청난 피해를 치르면서 촌각을 다투는 신속한 철수야말로 핵심이라는 사실을 배웠던 것일까. 사실 <덩케르크>의 1/3 정도만 읽어도 다이나모 작전의 대략적인 사실은 파악할 수 있다. 나머지 2/3 가량은 철수작전에 동원된 유람선, 연락선, 우편선, 예인선, 바지선 그리고 다양한 종류의 요트와 보트에 이르기까지 절망에 빠진 병사들을 구하는데 동원된 열흘 간의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장면들을 다룬다.

 

작년에 보다 만 영화 <덩케르크>의 나머지 절반도 보았는데, 정부에서 강제 징발하기도 했지만 자원해서 고립된 자국 병사들을 구하러 나서는 민간의 용사들에 대한 면면을 시각적으로 훌륭하게 표현해낸 점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사실 채터턴 작가는 당시 위기에 처한 대영제국을 위기에서 구해 내기 위해 선전에 가까운 찬사를 풀어낸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는 채터턴의 시선보다 객관적이 입장에서 사실에 접근을 시도한다. 전쟁 초기에 전투기 조종사 맏아들을 잃은 요트 주인 아저씨가 아들 같은 병사들을 구하기 위해, 덩케르크로 요트를 몰고 십대 둘째 아들과 그의 친구 조지와 함께 독일 포대의 포격과 루프트바페의 공습에도 불구하고 영불해협을 건넌다. 그들이 구한 패잔병(킬리언 머피 분)은 절대 덩케르크 해변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실랑이를 벌이다가 애꿎은 소년 조지를 죽게 만든다. 프랑스 병사를 “개구리”라고 부르면서 조롱하며 자신들만 살겠다고 소년병 토미와 깁슨을 매몰차게 내쫓는 영국 패잔병들의 모습은 또 어떠한가. 넌픽션보다 픽션 영화가 더 현실적이라는 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

 

저자가 강조하는 애국주의 때문에 좀 마음에 불편하긴 했지만,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것이 단순하게 병사들의 수나 압도적인 화력의 우세 같은 가시적인 요소들 뿐만 아니라 수백 년에 걸쳐 준비된 해안 항해에서 습득한 경험과 민간의 자발적인 도움으로 체임벌린의 뒤를 이어 전시내각의 수반이 된 처칠이 1/10만 구해도 성공이라던 덩케르크 철수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해낸 영국의 저력에 대해서는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비록 전투에서는 패배했지만, 19만 명에 달하는 영국 원정군을 무사히 영국 본토로 데려오지 못했다면 나치 독일을 상대로 전쟁을 수행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나치가 자랑하는 팔쉬름예거 사단을 투입해서 해안교두보를 장악하고, 영불해협을 통해 기갑부대를 투입해서 무주공산에 가까운 본토에서 공방전을 벌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총통의 미스터리한 진격 중지 명령 덕분에 본토로 탈출하는데 성공한 수많은 토미들은 4년 뒤 제2전선을 열고, 마침내 나치 독일군이 장악한 유럽 대륙을 해방시키는데 성공하기에 이른다. 참담하고 수치스러운 패배를 승리의 기초라고 선전하는 장면은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궁극적인 승리는 연합군이 거두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아니던가.

 

전반적 판세를 파악하고 난 뒤에 따라 붙는 2/3나 되는 디테일들은 사족 같아 읽는데 시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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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10 19: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5-10 19: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전쟁의 슬픔 아시아 문학선 1
바오 닌 지음, 하재홍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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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슬픔>은 내가 읽은 첫 번째 베트남 작가의 책이다(남 레의 <보트>도 있지만 논외로 하자). 1975년 4월 30일, 사이공 함락으로 베트남이 통일된 지 43년이 지났다. 일본의 2차세계대전 패망으로 생겨난 아시아 분단국가 중에 하나가 베트남이었다. 1946년부터 시작된 프랑스와의 8년 전쟁 끝에 디엔비엔푸 전투의 승리로 민족해방과 통일이 이루어지는가 싶었지만 프랑스에 이어 세계 초강대국 미국을 상대로 한 새로운 전쟁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베트남 전쟁을 10,000일의 전쟁이라고 했던가. 미국의 우방국으로 참전한 우리나라 병사들도 15,000명에 달하는 전상자를 기록했다. 소설을 쓴 바오닌은 베트남 정규군 소속으로 프랑스와의 해방전쟁 와중에 태어나 무신년 구정공세 다음해인 1969년 미국과의 전쟁에 참전해서 6년 동안에 걸친 격전을 치렀다. 전쟁의 마지막 날 탄손누트 공항을 사수하던 베트남 공수부대와의 사투에서 그의 소대원 중에 살아남은 사람은 단 두 명이었다고 했던가.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항미 전쟁을 치른 바오닌 작가의 소설 <전쟁의 슬픔>에는 내가 예상했던 공산주의 이데올로기 선전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1968년 미국의 지도자들은 베트남 인민을 상대로 한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어마어마한 전비와 병력을 동원해서 베트남의 공산화를 막아 보려는 서방 지도자들의 노력은 민족해방과 자주통일을 원하던 베트남 인민들의 열망을 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전형적인 이데올로기 선전보다 꽃다운 청춘들이 무수히 스러져간 전장의 비애에 대한 문학적 접근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것들을 소설에서 저자는 다루고 있었다.

 

명백히 저자의 페르소나로 보이는 주인공 끼엔은 전쟁이 끝난 뒤, 수개월 동안 통일열차를 타고 전사자의 유해를 수습하기 위해 베트남을 누빈다. 끼엔은 자신보다 더 오래 살아남아 통일 조국의 기쁨을 누려야할 전우들이 기꺼이 자신을 대신해서 죽어간 순간들을 무심하게 진혼한다. 살아남은 자의 비애라고 해야 할까. 죽은 이들처럼 영면을 누리는 것이 차라리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적어낸다. 전후 작가로 변신해서 수많은 글들을 쓴 끼엔의 이야기는 라틴아메리카의 주술적 리얼리즘을 연상시키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끼엔의 추체험들은 시간을 엇갈리며 중첩되면서 17세 소년병이 직접 경험한 전쟁에 대한 비극을 그대로 재현해낸다.

 

지금, 그 모든 것이 어디로 사라져 버렸나? 그때부터 지금까지 어떤 야만적인 바람이 이 세상에 불어 닥쳤나? 끼엔은 책상에 앉았다. 아침이 오래전에 지나갔다. 점심. 오후. 날이 저물었다. 지난날의 어두운 혼돈 시대에 죽어간 영웅들, 친한 동료들에 대해 써 놓은 원고 더미 앞에서 우리 동네의 작가는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괴로움. 무거운 마음. 그럼에도 언제나 눈물과 슬픔은 말 없는 위로의 원천이 되었다. 항상 그랬다. 언제나 그랬다. (280쪽)

 

저자 바오닌은 단선적인 민족해방 이데올로기만으로 베트남전쟁을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바오닌은 끼엔에게 연인 프엉이라는 생존을 위한 또 하나의 목적을 부여한다. 문제는 끼엔과 프엉이 전쟁을 이겨내고 살아남았다고 해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막연한 해피엔딩이 아니라는 점이다. 사랑을 향한 열정과 반복되는 행운의 여신이 부여한 애절한 시그널로 살아남을 수는 있었어도, 전쟁이라는 무지막지한 폭력을 체험한 끼엔과 프엉의 삶은 전쟁 이전의 순수했던 시절로 절대 돌아갈 수 없었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이야말로 바오닌이 그려낸 자전적 소설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끼엔의 동료들이 왜 그를 슬픔의 신이라고 불렀는지 이해가 됐다.

 

한 순간도 긴장을 늦추고 방심할 수 없는 무자비한 전쟁터에서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바오닌의 존재는 기념할 만한 일일 것이다. 작가 바오닌은 거기에서 한 발짝 더 나가, 자신이 직접 체험한 사건들을 갈고 닦아 문학적으로 승화시켰다. 바오닌이 구사하는 한 문장이 한 문장이 그렇게 가슴에 와 닿을 수가 없었다. 개인적으로 한반도 종전 선언을 앞둔 시기에 의미 있는 독서였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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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앞의 한 사람
오소희 지음 / 북하우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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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열심히 활동하던 온라인 카페 정모에 오소희 작가가 참석했었다. 그 때만 하더라도 그가 누구인지 몰랐다. 그냥 작가라는 정보 정도. 나중에 아이를 데리고 여행길에 나선 대단한 작가라는 설명을 들었고, 책도 몇 권 수중에 넣었던 것 같은데 정작 책을 읽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렇게 십년 정도가 흘러 작가의 에세이집을 읽게 됐다. 마침 독서 슬럼프에 빠져 헤매던 차에 이틀만에 가뿐하게 읽고 슬럼프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아, 이 책의 원제는 <사랑바보>였다고 하는데 그 제목이 더 마음에 든다. 7년 전에 나온 책의 재개정판이다.

 

여행은 우리가 사는 곳과는 다른 곳을 여행하는 게 기본이다. 어쩌면 남들이 가보지 않은 비경을 찾는 것도, 파리의 에펠탑처럼 모든 이가 가보고 싶어하는 곳을 찾는 일종의 순례라고 해야 할까. 하긴 나도 처음에 에펠탑을 보러 갔을 때 심장이 다 쿵쾅거리더라. 그보다 더 흥미로운 건 여행길에 만나는 사람들과의 인연이다. 사실 시간부족으로 수박겉핡기식 여행을 하는 나같은 배낭여행족에게 지긋하게 한 곳에 머물면서 그 동네에 사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며 삶의 이모저모를 살펴 보는 건 어쩌면 사치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시간적 여유를 차치하고라도 언어의 장벽은 또 어떻게 할 것인가. 작가가 페루 여행길에 만난 목수와 석공 아저씨와 더불어 스페인어 사전을 더듬으며 나눈 대화는 그래서 더 인상적이었다. 물론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감정이 전달될 수는 있겠지만 미묘한 소통은 어쩔 것인가.

 

작가의 라이프 스타일이기도 하겠지만 나는 왠지 작가가 여행길에서 수집한 타인과의 대화들이, 그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들이 작가의 글쓰기를 위한 질료가 되는 게 아닐까하는 그런 의구심에 사로잡혔다. 바로 그 지점에서 나는 마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자신이 들은 이야기를 출판하겠노라는 허락을 구했을까하고 말이다. 에세이집의 곳곳에서 보이는 감정과잉도 좀 그랬다.

 

베테랑 여행가답게 보통 사람들이라면 그냥 넘어갈 법한 이야기도 멋지게 뽑아내는 실력은 역시나 탁월했다. 에티오피아와 발리에서 만난 제3세계 소녀들에 대한 단상도 주목할 만하다. 작가가 세계의 곳곳에서 만난 그리고 체험한 뒤에 들려주는 사랑타령은 부러웠다. 짧은 만남 긴 여운, 뭐 삶이라는 게 그런게 아니겠는가. 이제는 사랑을 주고 싶어도 거부하는 틴에이저가 되어 버린 제이비에 대한 이야기도 울림 있게 다가 오더라. 수년을 연애하고 20년에 가까운 결혼생활에서 얻은 삶의 지혜 나눔도 멋졌다. 그렇지 나 자신도 변하기 어려운 데, 타인을 내 방식대로 변하게 만들겠다는 생각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게 아니었을까.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려면 우선 계획이 필요한데, 아무리 최소한이라고 하더라도 어떤 방식으로 목적지에 도착할 것이며 어디서 자고 무엇을 먹을 것인지... 한 때는 그런 계획들을 세우는 게 즐거움이었지만 이젠 다 귀찮아져 버렸다. 삶에 지치다 보니 그런 힘들었지만 새로운 것을 만남에 대한 흥분이 주는 즐거움보다, 진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그런 무위의 즐거움이 절실해졌다. 나의 마지막 장거리여행이었던 십년 전의 유럽여행 같은 기회는 이제 당분간 주어지지 않겠지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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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05-08 12: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해외여행을 안 가는 것을 이상하게 보는 사람들이 많아요. 내가 가든 말든 지들이 뭔 상관인지.. 저는 혼자서 가는 여행이 편해요.

레삭매냐 2018-05-08 13:43   좋아요 0 | URL
저도 어려서부터 혼자 여행하다 보니 습관
이 되서 그런지 나홀로 여행이 편하더군요.
누구 눈치 볼 필요도 없고...

무계획의 즐거움이라고나 할까요 ㅋㅋ

2018-05-08 14: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5-08 15: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파친코 2
이민진 지음, 이미정 옮김 / 문학사상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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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을 읽는데 3일이 걸렸는데, 2권은 보름이 걸렸다. 물리적으로 다섯 배가 시간이 걸린 셈이다. 사실 두 번째 권도 금세 읽었다. 다만 그 사이에 다른 책들을 기웃거리느라 더 시간이 필요했을 뿐.

 

전쟁이 끝났어도 재일 자이니치들의 삶은 나아진 게 없었다. 노아는 생부 고한수의 금전적 지원으로 와세다 대학 영문학과에 진학해서 원 없이 공부를 하게 되었고, 모자수는 고로 사장 밑에서 성실한 파친코 매니저가 되었다. 두 형제는 서로 다른 궤적을 그리며 성장했지만 그들의 삶 속에서 가난과 비극은 피할 수 없는 무엇이었다.

 

양진과 순자, 노아와 모자수 그리고 솔로몬으로 이어지는 자이니치 4대에 대한 이야기의 핵심은 바로 차별이었다. 일본에서 나고 자란 이들이었건만 일본인들은 그들을 같은 일본 사람으로 대우해 주지 않았다. 자이니치들에게 가난과 범죄 그리고 냄새라는 오명을 뒤집어 씌우고 차별했다. 이민진 작가는 일본 사람들을 비난하는 캐릭터로 역시 같은 조선인으로 미국에서 진짜배기 미국 사람으로 자란 솔로몬의 여자친구 피비를 통해 자신이 가진 생각들을 조용하게 전파한다. 일본은 여전히 전쟁 중에 벌어진 범죄에 대해 피해자들에게 사과하지 않고 있다고. 어쩌면 그 점이야말로 일본이 아시아 국가이면서도 여전히 아시아 국가들 사이에서 이질적인 존재로 남아 있는 이유가 아닐까.

 

또 한편으로 민단과 조총련으로 나뉘어 수년 마다 지문날인을 하고 외국인 거주자 신분으로 살아야 하는, 원칙적으로 외부세계와 차단되어 살아야 하는 수많은 자이니치들에 대한 고찰이 그대로 소설에 묻어 있다. 모자수로 대변되는 아버지 세대들은 돈을 벌어 그런 차별의 벽을 뛰어 넘고자 하지만, 민족이라는 이름의 낙인은 쉽사리 지워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가난과 범죄는 많은 자이니치들을 파친코(나는 왜 ‘빠찡꼬’라는 표현과 어감이 더 마음에 드는 걸까) 사업에 뛰어들게 했고, 차별의 순환 그리고 대물림은 계속됐다.

 

아무리 신분을 세탁해서 세계 유수의 대학인 컬럼비아 대학을 졸업하고, 외국인 회사에 다닌다고 하더라도 자이니치들은 일본인 지배계급에게 철저하게 이용되는 소모품일 따름이다. 솔로몬과 그의 특별한 상사 가즈와의 관계를 생각해 보라. 그러니까 이 세상에 단순하게 진행되는 건 단 하나도 없었다. 일본에서 나고 자란 솔로몬이 어쩌면 캘리포니아 드리밍을 꿈꾸던 자신의 어머니 유미의 소망대로 일본에서 영원한 이방인으로 사느니, 차라리 그럴 바에야 미국에 건너가서 새로운 출발을 하는 것이 그에게 주어진 최고의 선택지가 아니었을까.

 

그런 점에 대한 이해 불가는 어쩌면 원수의 나라에서 극심한 차별을 견디고 사는 자이니치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국 사람들의 그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일 지도 모르겠다. 결국 같은 조선인의 후예였던 피비도 솔로몬의 곁을 떠날 수밖에 없지 않았던가. 솔로몬의 삶에 느닷없이 개입했던 진짜배기 일본인 하나의 몰락이 보다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자신의 저주 받은 운명을 한탄하던 노아의 죽음은 예상했던 바여서 그런지 충격이 덜했던 것 같다. 다만, 노아가 죽은 다음에 그가 남긴 자녀들에 대한 이야기가 전혀 비치지 않아 좀 아쉬웠다. 그것도 작가가 의도한 것일 지도 모르겠지만.

 

일본에 사는 자이니치들에 대해 아는 바가 일천해서인지 1권에서부터 이어지는 이물감을 떨치기가 쉽지 않았다. 한국어판에 등장하는 순자의 부산 사투리가 과연 영어판에서는 어떻게 구현되었는지도 자못 궁금하다. 한국을 출발해서 일본으로 배경으로 한 미국소설 <파친코>는 흥미로우면서도 동시에 정의할 수 없는 불편함이라는 양가적 감정이 피어오르게 만드는 그런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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