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 한중일 세계사 19 - 1904 러일전쟁 본격 한중일 세계사 19
굽시니스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잊을만 하면 나오는 굽시니스트 작가의 <본격 한중일 세계사> 시리즈가 이제 대망의 완결을 앞두고 있다고 한다. 시리즈 만화의 근본을 지키기 위해 20권을 마무리할 거라는 단호한 의지를 19편에서 보여 주었다. 그리고 거의 500쪽에 육박하는 방대한 분량을 제공한다. 이거 쉽지 않은데 그래.

 

어제 도서관에 에드나 오브라이언 작가의 책을 빌리러 갔다가 문득 이 시리즈 생각이 났고, 출간된 지 4개월이 지나니 드디어 나에게도 기회가 왔다. 냉큼 빌려다 읽다 잠이 들어 버렸다. 아 달콤한 낮잠이여.

 

일단 중국 청나라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었던 의화단 사태의 마무리로 시작한다. 8개국 연합군의 무력은 청나라의 그것을 압도해 버렸고, 청나라는 당장 멸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의화단 사태로 청나라는 거의 서강 열강의 반식민지 상태로 전락해 버렸다. 막대한 배상금을 물고, 열강이 원하는 조차지들을 내주면서 국가의 위신은 바닥으로 떨어져 버렸다.

 

19세기 내내 전 세계에서 러시아와 그레이트 게임을 벌인 영국의 결정이 청나라의 존속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모양이다. 러시아는 의화단 사태를 계기로 만주에서의 영향력을 증대했고, 철도 부설을 비롯한 막대한 투자로 만주를 거의 자신들의 영향권 아래 두게 됐다. 이에 영국은 극동에서 러시아를 저지할 파트너로 일본을 선택했다. 이빨 빠진 호랑이 같은 존재가 된 청나라는 답이 없어 보였으니,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 아닌가 싶다.

 

차르의 신임을 얻은 사업가 출신의 정치가 베조브라조프는 만주를 넘어 한반도에서 일본을 저지한다는 신박한 플랜을 계획했다. 만주 확보를 위해 만주가 아닌 한반도 북부에서 일본의 대륙 진출을 차단하겠다는 설정이었다. 1901<압록강 목재회사>를 설립해서 한반도 북부의 임업권을 차지한 베조브라조프는 압록강 유역 곳곳에 임업기지를 가장한 군사기지를 세우면서 일본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영일동맹의 압박으로 러시아는 결국 만주에서 철병을 시작하기에 이른다.

 

한편, 당시 미국 공사였던 호러스 뉴턴 알렌은 러시아와 일본이 대결 구도가 이어지는 가운데 양국 간에 전쟁이 발발하게 되면 일본이 승리할 것이라는 점을 예견했고, 미국은 지는 편인 러시아 편에 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는 만주와 한반도를 집어 삼킨 일본은 반드시 가까운 미래에 미국과 싸우게 될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의 예언은 태평양전쟁으로 현실화되었다.

 

일본 헌정회 건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으니 패스. 그리고 제주도에서 벌어진 이재수의 난도 흥미로운 지점이 없지 않지만 나중에 다시 한 번 공부해볼 지점이 있다고는 생각한다. 병인양요 당시와 달리 프랑스인들이 죽거나 그러지 않았고, 본국 프랑스에서 정교분리가 한창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프랑스가 적극적으로 개입할 여지가 없었다는 점 정도. 러일 대결의 막판은 러시아가 용암포를 조차하면서 양국간의 갈등은 최고조로 치닫기 시작했다.

 

제국주의의 최절정기였던 20세기 초, 러시아나 일본 모두 자주국이었던 조선과 청나라의 의사 따위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만환 교환론 같은 철저하게 자신들에게만 유리한 조건으로 치열한 외교전을 펼치고 있었다. 신생 제국 일본의 고민은 자신들에 비해 군사력이나 경제력에서 월등한 러시아와 싸워서 과연 이길 수 있을 것인가였다. 이기지 못할 전쟁이라면 당연히 싸우지 않고, 교섭으로 최선을 도모하는 게 상책이다.

 

여기서 잠깐 간도 관리사로 북간도 지역을 실질적으로 지배해온 이범윤이 등장한다. 오래 전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맺어진 두만강(혹은 토문강)을 양국의 국경으로 한다는 합의는 청나라의 힘이 빠지면서 유명무실하게 되었고, 그 틈을 타서 이용익의 지원을 받는 이범윤의 민병대가 간도 지역을 사실상 장악했다고 한다.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에 앞서 일단 청나라와 조선 양국의 중립을 확인한다. 10년 전의 청일전쟁에서 꿀을 빨았던 일본의 조야는 이번에도 비슷한 방식으로 최소한 비용으로 엄청난 영토할양과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꿈꾸면서 다시 한 번 전쟁이라는 도박판에 뛰어 들게 된다. 얼추 비슷한 실력의 러시아 극동함대를 상대로 일본 연합함대의 기습으로 러일전쟁의 서막은 시작되고, 1904210일 러시아의 선전포고로 정식으로 전쟁이 시작된다.

 

일본은 조선을 자국의 이익선으로 설정하고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았다. 러시아는 만주를 자신들의 영역으로 삼고, 대신 북위 39선을 기준으로 해서 비무장지대를 설정한 것을 주장했다. 한반도를 통째로 삼키려고 했던 일본에게 러시아의 제안은 바로 묵살당했다. 압록강을 DMZ로 삼자는 일본의 주장 역시 러시아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외교로 문제 해결이 되지 않는다면 그 다음에는 당연히 폭력적 방법이 동원될 차례다.

 

개전 13일 뒤인 일본은 대한제국과 <한일의정서>를 체결하면서 조선을 사실상 자신들의 보호국으로 삼았다. 일본은 군대를 동원해서 신속하게 조선을 병참기지로 삼고, 뤼순항과 봉천의 러시아군 주력을 격멸한다는 원대한 포부를 실행에 옮겼다. 서구 열강들은 일본이 러시아의 상대가 되지 않을 거라고 예상했지만, 그들의 예상과 달리 일본군은 유럽에서 단선철도를 통해 병력과 보급을 받아야 하는 러시아 제국군을 상대로 초전부터 승기를 잡아 가기 시작한다.

 

수차례에 걸친 일본 연합함대의 뤼순항 폐색작전이 효과를 보지 못하는 동안, 일본 육군은 압록강을 건너 목표인 봉천의 러시아군 주력을 잡기 위해 쾌속의 진군을 개시했다. 하지만 노기 마레스케 육군 대장이 사령관을 맡은 뤼순 방면 3군은 콘트리트 벙커와 기관총으로 곳곳에 요새화된 러시아군 진지를 상대로 무모한 육탄돌격을 반복하면서 어마어마한 병력 손실을 입기에 이르렀다.

 

일본 연합함대를 상대하기 위해 러시아의 최강 발틱 함대가 마침내 출발했다는 소식과 더불어 전쟁이 장기전이 될수록 일본에게 불리하다는 건 상식이었다. 일본 국가 예산을 초과할 정도의 막대한 전비 부담 때문에라도 일본은 신속하게 뤼순항을 점령하고 봉천의 러시아군을 격멸해야만 했기 때문에, 노기 사령관의 무모한 돌격이 이어지지 않았나 싶다.

 

설상가상으로 극동에서 전쟁을 담당하던 러시아군 수뇌부 간의 비협조적 태도도 심각한 문제를 유발했다. 지상전에서 충분히 유리한 지형을 바탕으로 해서 일본군의 진격을 돈좌시키고 요격할 수 있었지만, 일본군에게 많은 타격을 주었음에도 스스로 전선에서 후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유능한 제독과 장군들이 어이 없이 전장에서 사건 사고로 전사하는 등 사기면에서도 많은 패착을 보여 주었다. 굽시니스트 작가의 만화/글을 보다 보면 러일전쟁은 누가누가 잘 싸우냐의 문제가 아니라, 누가 상대적으로 덜 삽질을 하느냐가 관건이 아니었을까 싶다.

 

교착된 뤼순항 전투와 봉천에서 많은 수의 일본군 전상자들의 수치가 치솟으면서 일본 국내 여론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전선에서 무능력한 모습을 보여준 제독과 특히 노기 마레스케에 대한 비판은 하늘을 찌를 판이었다. 하지만 노기의 장남 노기 가츠스케(남산전투, 복부관통상)와 차남 야스스케(203고지 전투)가 모두 러일전쟁 당시 최전선에서 전사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여론이 잠잠해졌다고 하던가.

 

그렇게 악전고투 끝에 일본군이 1905년 정월에 뤼순항을 점령하는 것으로 19권 대단원의 막이 내린다. 그전인 1904822<1차 한일의정서>가 조인되면서 조선의 망국은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굽시니스트 작가는 러일전쟁에 앞서, 조선이 일본을 배격하고 러시아 편에 붙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라는 상상을 가정해 본다. 그랬더라면 조선의 망국이 좀 더 빨라지지 않았을까. 그리고 전쟁 통에 많은 수의 사람들이 죽게 되지 않았을까. 결론적인 이야기지만, 고종의 중립 선언으로 국가 조선의 수명은 몇 년 더 유예되었을 뿐이었다. 의화단 사태로 청나라는 사실상 멸망한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세계제국 영국의 존속 결정으로 겨우 10년 더 유지되었을 뿐이다. 마치 파이널 데스티네이션처럼 강력한 서구 열강이라는 태풍 앞에 약소국의 운명은 촛불과도 같지 않았나 보다.

 

이번 <본격 한중일 세계사> 19편을 보면서, 예전에 너튜브를 통해 시청한 <러일전쟁> 시리즈와 전쟁을 다룬 일본 영화 리뷰들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203고지를 향해 일본 결사대라는 백의대가 돌격하고, 러시아군 진지에서 기뢰 폭탄을 굴리는 장면이 바로 연상됐다. 태평양전쟁 당시, 과달카날에서 미해병대를 향해 무모한 야습을 감행하던 일본군의 모습이 38년 전과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점이 더 놀라웠다.

 

다음 마지막 20편에서는 1910년까지 6년간의 역사를 다룰 예정이라고 하는데, 600쪽을 훨씬 넘기는 대작이 출현할 지도 모르겠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주시길 바란다. 지난 100년 이래 그 어느 때보다도, 어지럽고 위기에 처한 동아시아 질서가 빚어내는 격랑의 역사가 그 시절과 중첩되어 보이는 건 나만의 생각이려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쇄 위픽
구병모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3월
평점 :
품절



 

12년 만에 구병모 작가의 <파과> 리뷰를 찾아서 읽어봤다. 이유는? 이제 곧 이혜영 배우가 조각으로 분한 영화 <파과>가 개봉할 거라고 해서. 그런데 파과가 무슨 뜻일까. 무려 12년 전에 읽은 책의 기억은 존재하지 않았다. 으깨진 과일 정도로 해석하면 될까. 영화 트레일러는 소설보다 더 흥미진진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12년 전의 내 예언도 맞았다. 영화화될 거라는.

 

그리고 <파과>의 스핀오프에 해당하는 <파쇄>의 존재를 알게 됐고, 한 걸음에 도서관에 가서 빌려서 읽었다. 100쪽이 되지 않는 단편이었다. 오래 전에, 집이 영화관과 도서관 근처에 있으면 참 좋겠다라는 생각을 했었다. 한 시절이지만, 살던 집 근처에 영화관이 들어와서 저녁 시간에 어슬렁거리며 영화를 보러 가던 생각이 난다. 지금은 두 번째 소원인 집 근처 도서관이 있어서 참 좋다.

 

전작 소설 <파과>에서 65세 무려 45년 동안 방역업자(킬러)로 복무해온 조각의 마지막 서사에 방점을 맞추고 있다면, <파쇄>에서는 조각의 빡센 도제 시절을 그리고 있다. 문득 구병모 작가는 어떻게 해서 이렇게 자신이 살면서 한 번도 만나 보지 못했을 무시무시한 킬러에 대한 단상들을 짧지만 강렬한 서사에 녹여냈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이것 또한 작가의 역량이라고 생각해야 할까.

 

숲 속으로 일종의 전지훈련을 떠난 조각과 그의 사부 류(?)는 거의 인간의 극한에서 단련을 시작한다. 언제라도 사부의 등짝을 바닥에 눕히게 한다면 하산해도 좋다라는 단서와 함께 사선에 가까운 그런 수업이 시작된다. 사부의 실전을 방불케 하는 습격은 기본이다. 방심한 틈을 노리고 뒤통수로 날아드는 목봉을 피하지 못하면 즉사할 지도 모른다. 심지어 손발을 결박해서 숲 속에 그대로 방치하기도 한다. 탈출하지 못하면, 언제든 나타날 수 있는 독사에게 당할 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런 실전을 방불케하는 고된 훈련이 조각의 현역 45년을 담보했는지도 모르겠다. 모름지기 방역업자에게 필요한 건, 주변의 모든 것을 의심하고 방심하면 안된다는 아주 간단한 진리일 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구병모 작가가 만들어낸 이 조각이라는 캐릭터는 너무 매력적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말이다. 시작과 끝을 마련해 두고, 중간을 채워가는 작법은 또 어떨까. 그 기간이 무려 45년이나 된다고 한다면, 도대체 조각이 전성기일 때는 어떤 활약을 했단 말인가. 생각만 해도 짜릿해지지 않는가. 시리즈의 탄생을 기대해 볼 수밖에 없다.

 

작가는 마치 자신이 조각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 전지적 시점에서 킬러의 심리를 근원까지 도달해서 디테일을 독자에게 전달한다. 넷플릭스 드라마 <길복순>에서 킬러 복순이 보여준 것처럼 확실히 총이 깔끔하고 신속하긴 하지만, 철저하게 기도비닉을 유지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총보다 칼이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나중에 그녀의 시그니처 도구가 되는 벅나이프를 손에 쥐게 되는 순간, 죽음의 과수원으로의 초대장이 발부된다.

 

그리고 보니 전작 <파과>에서 보여준 것처럼, 으깨진 과일 그러니까 죽음의 과수원의 연료는 희생 제물의 피로 이어지는 무언가가 있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국어사전에서 <파과>의 뜻을 검색해 보니 "흠집이 난 과실"이라는 뜻과 다른 한자로 여자 나이 16세를 뜻한다고 한다. 엉뚱한 상상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면 방역업자 조각이 이 업계에 입문한 나이가 16세라는 설정은 또 어떨까.

 

어쨌든 영화 <파과>는 이달말에 개봉 예정이라고 한다. 스크린에서 정말 이혜영 배우를 오랜만에 보게 될 것 같은데, 이 영화는 극장에 가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울러 바퀴벌레 같은 인간들을 제거한다는 방역업계의 대모 조각이 등장하는 또다른 스핀오프를 기대해 본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3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카스피 2025-04-18 18: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고편 보는데 무척 재미있는 액션 영화 같더군요.근데 소설도 영화만큼 재미있을지 궁금해 집니다.

레삭매냐 2025-04-18 19:38   좋아요 0 | URL
12년 전에 소설 <파과>를 읽으면서
영화로 만들면 재밌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작년에 촬영을 마치고 드
디어 개봉박두라고 하는군요.

아직 영화를 보지 못해서 모르겠지
만, 소설도 상당히 재밌답니다.

그레이스 2025-04-18 20: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구병모 아가미 읽고 오래 여운이 남았던 기억이 있어요.
아직 파과는 못읽었어요

레삭매냐 2025-04-18 20:52   좋아요 1 | URL
<파과> 추천하는 바입니다.

영화 개봉을 맞이하야 다시 한 번
읽어야 하나 어쩌나 고민 중이랍니다.

<아가미> 궁금해지네요.

coolcat329 2025-04-19 10: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이 <파과>의 스핀오프소설이군요!
이혜영 배우 얼굴이 크게 나와있는 영화 포스터를 어디선가 길을 지나가다 보고 ‘아 이혜영!‘ 했는데 그 영화가 또 파과였네요! 저도 이 소설 참 재밌게 읽었고 강렬했어요.
제가 생각한 조각과는 좀 다르지만 이혜영 배우가 보여줄 조각도 기대됩니다.

2025-04-19 10: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세상 끝의 정원 - 바깥의 소설 30
가브리엘 루아 지음,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 2004년 7월
평점 :
품절



 

4월에는 왜 이렇게 책 읽기가 지지부진한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복잡한 시국 탓이 아니었을까. 설상가상으로 트럼프가 촉발한 관세전쟁으로 환율까지 치솟고, 실물경기는 계속해서 추락 중이고 뭐 그렇다. 날씨까지 도와주지 않는다. 여름이 온 것처럼 더웠다가 눈에 우박까지 내리니 말 다했지.

 

그래도 지난주에 중고서점에 들러서 가브리엘 루아라는 처음 들어보는 작가의 책 <세상 끝의 정원>을 구해서 읽었다. 아쉽게도 도서관에도 비치되어 있지 않은 책이라 중고책으로 구할 수밖에 없었다. 예전 책들은 점점 더 만나기가 어렵다. 그래도 중고서점이라도 있으니 다행이려나.

 

가브리엘 루아는 프랑스계 캐나다 작가로 매니토바주 위니펙 부근의 생보니파스 출신이다. 사진을 찍을 때, 턱을 괴는 모습을 반드시 취하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진짜 생전의 사진들을 보니 그런 설정이더라. 놀랍군 그래.

 

<세상 끝의 정원>은 표제작을 포함한 네 편의 단편소설이 담긴 소설집이다. 이민자들의 나라는 이웃한 미국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가브리엘 루아의 소설집을 읽고 나니 캐나다 역시 만만치 않은 이민자들의 나라였다. 첫 번째 작품인 <삼리웡, 그대 이제 어디로 가려는가?>에서는 중국 출신의 쿨리 삼리웡이 캐나다 호라이즌(지평선)에 이민와서 조촐한 식당을 차리고 살아가는 단출한 이야기다.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면 식당은 반드시 필요한 그런 장소일 것이다. 삼리웡은 이민자 지원 협회에서 빌린 돈으로 호라이즌에 테이블 네 개 짜리 식당을 차리고 손님들을 받는다. 그렇게 꽤 오랫동안 지평선 마을에서 살았지만, 그는 마을의 일원으로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이역 만리 캐나다에서 살지만 결국 그는 조상들의 땅에 가서 묻히길 원했던가. 자의반 타의반으로 오랜 세월을 보낸 다음, 삼리웡은 작은 오해(?)에서 비롯된 지평선 마을 사람들의 환송연으로 그곳을 떠나게 된다.

 

아 그리고 석유 시추로 호황을 맞게 된 지평선 마을에서의 삼리웡의 식당 영업을 역효과를 발생시켰다. 결국 당국의 위생검사 직격탄을 맞고, 또 새로운 스타일의 경쟁자가 등장하면서 삼리웡은 정든 지평선 마을을 떠날 수밖에 없게 됐다. 하지만 나그네 길에 다시 나선 삼리웡은 지평선 마을과 비슷한 분위기의 작은 마을에서 새출발을 예고한다. 오래된 유행가 가사에 나오는 대로 인생은 나그네길이란 말이 참 와닿는 그런 사연이었다.

 

<한 나그네가 찾아와 문을 두드린다>는 캐나다 오지 마을에 사촌 행세를 하며 찾아든 어느 남자에 대한 이야기다. 이제는 이웃은 물론이고, 친척들과도 자주 왕래를 하지 않게 핵가족 시대에는 정말 낯설게 들리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잘 모르는 친척이라며 누군가 찾아와 얼마간 숙식을 부탁한다면 얼마나 당황할 것인가. 아니 그전에 철저하게 신원 조회부터 하려고 하지 않을까. 사실 너무 오랫동안 왕래를 하지 않아 누가 누군지 알 수가 없어져 버렸다. 얼마 전, 친척분 장례식에 가서 본 분들이 내게는 그랬다.

 

아버지는 예의 친척을 호의로 수용하지만, 어머니는 경계심을 풀지 않았다. 하지만 나중에 가서는 그의 정체가 드러난 뒤에는 입장이 역전된다. 여기저기서 비슷한 행적을 보인 나그네는 가정의 진짜 실력자에게 환심을 사는 정확한 방법을 알고 있지 않았을까. 가브리엘 루아 작가의 청년기가 대충 100여년 전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그런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우두 골짜기>는 정든 고향 우크라이나를 떠나 캐나다에 정착하기 위해 여기저기 임장을 하러 다니는 일단의 이민자들에 대한 이야기다. 행정관들은 그들에게 정말 좋은 땅을 구해주려고 하지만, 우크라이나 출신 이민자들의 생각은 달랐다. 가능하면 자신들이 살던 곳과 비슷한 그런 곳을 원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이 도착한 곳이 바로 <우두 골짜기>였다. 정부 관리는 결사적으로 그곳을 적합한 땅이 아니니 더 나은 곳을 수배해 주겠다고 하지만, 그들의 굳은 결심을 꺾을 수가 없다.

 

문득 새로운 곳에 정착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우선 고향에서 가져온 관습이나 풍습을 모두 재정비해야 한다. 무엇보다 새로운 세계에서는 언어부터 배워야 한다. 아마 어쩌면 첫 세대는 불가능한 그런 미션일 지도 모르겠다. 우두 골짜기의 척박함이야말로 우크라이나 이민자들에게는 정말 익숙한 그 무엇이 아니었을까. 다시 난민의 시대에 새로운 삶을 개척하는 고단함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1975년에 발표된 <세상 끝의 정원>이 역시 소설집의 백미가 아닐 수 없다. 이미 죽어 무덤에 누은 마르타 여사에 대한 이야기. 마르타와 그녀의 남편 스테판은 폴란드 출신 이민자들이다. 이미 자동차가 굴러 다니는 세상이지만, 그들의 세계에는 여전히 수레가 공존한다. 가뭄을 피해 고향을 떠나왔지만, 새로운 정착지에서도 가뭄은 변수가 아닌 상수로 마르타와 스테판을 괴롭힌다.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장면은 마르타가 노구를 이끌고 가뭄에 그 좋아하는 꽃들에게 물을 주기 위해 물을 퍼 나르는 장면이었다. 사람들은 타인이 절대 이해하지 못하는 그런 행동들을 하기 마련이다. 오랜 세월을 함께 한 남편 스테판도 아내 마르타의 그런 행동을 절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하는 행동 중에 그런 게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 본다.

 

장성해서 마르타와 스테판의 곁을 떠나는 세 자녀들은 완전한 캐나다 사람들로 자신들의 삶을 영위해 가고 있다. 자식들의 부재가 아쉽긴 하지만, 그 또한 이민자들의 어쩔 수 없는 삶의 방식으로 간주하고 마르타와 스테판은 받아들인다. 무료해 보이는 부부의 일상을 관찰하듯이 그대로 전달해 주는 가브리엘 루아 작가의 서사는 심심하면서도 묘한 중독성을 품고 있다.

 

가브리엘 루아의 <세상 끝의 정원>은 무려 21년 전에 현대문학에서 나온 <바깥의 소설> 시리즈였다. 낡은 책의 타인의 장서인까지 찍힌 빛바랜 책을 읽으면서 왠지 20세기 캐나다의 어느 이민자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마을을 거니는 듯한 느낌이 조금 들었다. 그들이 다른 나라에서 느꼈던 삶의 무게는 지금의 그것과 얼마나 다를지 궁금해졌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5-04-14 18: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4-14 19: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레이스 2025-04-18 20: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민자의 삶은 어디에서건 고단하고 외롭고 어려움이 많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레삭매냐 2025-04-18 20:53   좋아요 1 | URL
내가 나고 자란 곳이 아닌
타지에서의 삶은 어쩌면
신산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숙명이 아닐까요.
 
산 자들의 밤 - 제154회 아쿠타가와 상 수상작 마르코폴로의 도서관
다키구치 유쇼 지음, 이승준 옮김 / 마르코폴로 / 202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3월의 마지막 날, 다키구치 유쇼의 <산 자들의 밤>을 읽는다.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지 않아 중고서점에서 지난주에 사서 읽기 시작했다. 분량이 적어서 금방 읽을 줄 알았으나, 서머싯 몸의 <면도날>이라는 변수가 발생해서 좀 늦어졌다.

 

지난 12월에 고모님의 장례를 치러서 그런지 일본의 어느 마을에서 농사꾼으로 살아온 핫토리 할아버지의 장례식에 모인 일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낯설지 않게 다가왔다. 사실 너무 많은 인원들이 등장하다 보니 하나하나 기억할 수조차 없다. 우리 친척들 이름도 모르는 판에, 소설에 나오는 핫토리 5남매 부부 그리고 10명의 손주들과 증손 슈토까지 기억하는 건 아무래도 무리지 싶다.

 

개인적으로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우리가 장례식장에서 육개장을 먹는다면 일본 사람들은 초밥을 먹는다는 점이었다. 식구들이 모여 고인을 추모하고 기억하는 건, 한국이나 일본이 다를 게 없지만. 오래 전에 본 영화 <학생부군신위(1996)>처럼 장례식장을 배경으로 해서 떠들썩한 어떤 사건이 발생하는 것도 아니다. 아주 조용하고 평화롭게 그렇게 이야기들이 넘실거린다.

 

고인의 손주 라인인 중고등학생 녀석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장례식장에 비치된 츄하이(하이볼?)나 맥주를 꺼내 마시는 장면은 아무래도 낯설었다. 우리나라 장례식자에서도 그런가. 최근에 문상을 갔던 장례식장에서는 술을 제공하지 않던데, 그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더라. 항상 술에서부터 문제가 출발하지 않던가.

 

고인의 시신은 집회소에 안치되어 있고, 여기저기 흩어져 살던 핫토리 가족들이 삼삼오오 모여 들기 시작한다. 아무런 문제 없이 잘 사는 이들도 있는가 하면 중학교 때부터 등교거부를 하다가 결국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함께 살던 요시유키 같은 말썽꾼도 등장한다. 아무래도 식구들이 많다 보니 이런 문제아 하나 정도는 있는 게 너무 당연한 일이지 않나 싶다.

 

요시유키의 동생 지카는 자기보다 10살 많은 오빠의 삶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긴 소설에 등장하는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번듯한 일자리를 찾는 것도 아니고, 부모의 곁을 떠나 할머니마저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함께 사는 게 젊은 사람들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을까. 그렇다고 해서 무언가 딱히 하는 일도 없다. 나중에 요시유키가 무슨 음원을 만든다는 것을 동생 지카는 알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거기로부터 극적인 무슨 일이 발생하는 것도 아니다. 소설은 그렇게 아주 조용하고 무덤덤하게 진행된다.

 

미국 위스콘신 출신의 다니엘과 가마쿠라 바닷가에서 자란 사에가 만나 고인의 증손 슈토가 태어났다. 이 또한 아주 기묘한 인연이 아닐까. 초상집에서 경야를 치르던 식구들은 온천랜드로 우르르 몰려가 온천욕을 즐기기도 한다. 이 세상에서 연을 다한 이는 이제 초상이 끝나는 대로 화장하고 신사로 모셔지려나. 그래도 산 사람들은 산 사람들 대로 계속해서 삶을 이어가야 한다.

 

집회소(일본식 장례식장)에서 내가 기대한 건, 고인이 남긴 유산을 두고 한바탕 치르게 될 전쟁(?)이었는데 의외로 또 그런 장면은 아예 등장하지도 않았다. 평생을 농사꾼으로 산 고인에게 돈이 될만한 재산이 없어서였을까. 고인이 살던 집은 근처에 살던 아들 야스오에게 넘겨주는 것으로 원만하게 처리되었다. 대가 한국의 장레식장에서 벌어지는 막장 드라마를 기대했다면, 실망했을 지도 모르겠다. 할아버지와 같이 살던 문제아 요시유키는 그대로 같이 사는 것으로 결정됐다.

 

참 소설에 등장하는 테레사 텐(등려군)<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라는 곡이 궁금해서 너튜브로 찾아서 들어보기도 했다. 애절하기도 하여라. 고인의 평생지기 핫짱은 고인과 함께 떠났던 어느 해의 츠루가 여행을 추억하기도 한다. 그런데 하도 오래 되어 그런진 몰라도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또 어디선가 기억은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고 했던가. 둘이서 여행을 했다고 하더라도, 서로 다른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나는 <산 자들의 밤>을 읽기 전에 무엇을 기대했을까. 아마 우리와는 다른 일본의 장례 문화, 고인을 추모하는 방식 같은 것들을 기대하지 않았나 싶다. 누군가 죽음은 존재 양식의 변화라고 했던가.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는 불변의 진리를 수용할 수 있다면, 그나마 좀 마음의 위안이 되려나. 고인과의 친밀도에 따라 아마 자신이 느끼는 상실감의 강도가 다르지 않을까 싶다. 해외에서는 고인이 사전에 자신의 장례식에 대비해서 눈물바다 대신 유쾌한 축제가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여러 가지 이벤트를 준비하기도 한다고 하는데 역시나 우리네 전통과는 조금 다르지 않나 싶다.

 

책의 말미에 달린 <야곡>에서는 무언가 허무주의적인 그런 느낌이 들었다. 마마가 단골손님들을 상대로 운영하는 주점 이야기였던가. 나는 <산 자들의 밤>에 이어지는 이야기로 착각했었네. 다른 건 모르겠고 석쇠에서 지글지글 익어가는 시샤모구이는 한 번 먹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언제고 이 책은 다시 한 번 읽어야봐야겠다는 생각이 조금 들었다. 계속해서 주변에서 상을 당하는 이들이 있어 그런지, 소설에 등장하는 이야기들이 참 낯설지 않게 다가오더라. 무언가 하고 싶은 말들이 더 있었는데 미처 담지 못한 그런 느낌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면도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4
서머싯 몸 지음, 안진환 옮김 / 민음사 / 200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무슨 이유에서인지 한동안 중고서점에 서머싯 몸의 <면도날>이 뜨길 기다렸다. 심지어 당근도 뒤졌다고 하지. 이 책은 빌려서 읽기보다는 아무래도 왠지 소장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눈과 우박이 쏟아지던 지난 토요일, 드디어 중고서점에 <면도날>이 나왔다는 뉴스를 들고 냉큼 달려가서 사서 바로 읽기 시작했다. 이건 뭐 중고책이 아니라 한 번 넘기지도 않은 새책인 걸 그래. 500쪽 짜리 책이었는데 단 이틀만에 다 읽었다. 재미와 주제,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수작이었다. 이런 맛에 고전을 읽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 <면도날>1919년에 <달과 6펜스>라는 걸작 소설을 발표한 어느 작가(아마 서머싯 몸의 페르소나겠지)가 화자로 등장해서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전후시대를 배경으로 해서 다양한 인물들이 펼치는 삶들을 치밀하게 관찰하고 내용에 대한 기록이다.

 

가장 먼저 등장하는 사람이 바로 오십대 중년 엘리엇 템플턴이다. 미술품과 골동품 거래로 돈을 벌기 시작한 엘리엇은 지독한 속물대장이다. 자신의 재력과 특유의 친화력을 발판으로 삼아 사교계에 진출한다. 그리고 곧이어 사교계의 스타가 되어, 각종 파티를 열어 저명한 인사들과 교류하고 또 그런 배경을 바탕으로 해서 사업과 인맥을 확장하고 구축해 나간다.

 

엘리엇의 조카딸 이사벨 브래들리는 이제 막 유럽의 전장에서 돌아온 고아 출신 래리(로렌스) 더렐을 이 세상 그 누구보다 더 사랑한다. 하지만, 나이를 속이고 육군항공대 소속으로 전장에서 자신을 구하려던 동료 팻시의 죽음을 보고서 심각한 트라우마에 빠진 상태다. 이제 막 전쟁에서 벗어나 세계 제국으로 성장해 가던 시절의 미국 청년에게 주어진 기회는 상상을 초월했다. 하지만, 래리의 생각은 달랐다. 너무 이른 시기에 삶의 고된 맛을 봐서였을까? 아니면 조실부모하고 후견인에 의해 양육되면서 자유주의적인 사고를 가지게 된 탓일까? 당장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자는 이사벨의 제안을 거부하고 유럽 대륙의 파리로 건너가 한동안 공부를 하겠다고 자신의 포부를 밝힌다.

 

어쩌면 바로 이 순간부터 래리와 이사벨의 관계는 파탄을 예고하지 않았나. 게다가 이사벨에게는 백만장자 출신 헨리() 매튜린의 아들 그레이가 열렬하게 구애를 하고 있었다. 사실 모든 조건에서 래리보다 그레이가 월등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레이와 래리는 친구 사이기도 했다. 심지어, 그레이는 아버지 헨리를 설득해서 래리를 아버지 회사에 취직시켜 주겠다는 제안까지 했었다.

 

지독한 현실주의자인 이사벨은 왜 래리가 이런 좋은 제안을 마다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결국 래리는 파리로 떠나 자유로운 보헤미안으로서 2년의 시간을 보낸다. 그곳에서 라틴어를 공부하고, 심지어 그리스어까지 배우는 지식에 대한 열의를 보여준다. 그리고 누구나 그런 것처럼 공부를 하면 할수록, 자신의 무지를 깨닫게 되고 보다 더 많은 배움을 추구하는 과정에 들어서게 된다. 미국 작가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국외자(expatriate)이자 전형적인 몽상가 혹은 이상주의자의 모습이 보여진다.

 

더 이상 래리의 학문과 배움의 외도(?)를 견딜 수 없었던 이사벨은 파리로 건너가 래리와 결혼 문제를 두고 담판을 짓는다. 아니 이 갈등은 시작하기 전부터 예정된 수순이 아니었나. 래리는 학문의 구도자 같은 자신의 배움의 길을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철저한 현실주의자였던 이사벨은 고작 1년에 3,000달러 수입으로 만족하며 사는 래리의 삶을 완전히 부정해 버린다. 고향 시카고로 돌아가게 되면, 안정적 직업과 더 많은 수입으로 평안한 생활을 할 수 있는데 왜 그런 호사를 거부하냐는 주장이다. 여기서 바로 나는 서로 다른 두 세계관의 격렬한 충돌을 볼 수가 있었다. 도무지 타협이 불가능한 두 세계가 맞부딪힌 것이다. 그리고 결말은 예상한 그래도였다. 이사벨은 약혼을 취소하고, 시카고로 돌아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그레이 매튜린과 결혼에 골인한다.

 

이사벨이 시카고에서 부잣집 도련님과 신혼살림을 차린 동안, 우리의 주인공 래리의 방랑은 계속된다. 화자는 소설에서 등장하는 거의 모든 이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전후 이십년 동안의 시절을 오가며 서로를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충실하게 해준다. 이 점 또한 작가가 설계한 그런 부분이 아닐까 싶다. 사실 소설 <면도날>에는 래리와 이사벨의 이야기 뿐 아니라 엘리엇이나 다른 등장인물에 대한 자잘한 이야기들이 숱하게 등장하지만, 나는 적어도 이번 독서에서는 래리와 이사벨의 이야기에 집중하면서 읽었다고 고백한다.

 

래리는 파리를 떠나 이번에는 프랑스의 랑스 지역에 가서 탄광노동자로 변신한다. 골방에서 책만 읽던 샌님이 어떻게 노동이 강하기로 유명한 탄광에 가서 석탄을 캐게 되었을까. 어쩌면 작가 서머싯 몸은 지식인들이 그런 빡센 노동도 한 번 쯤은 경험해 봐야 한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그 다음에는 우연히 만난 폴란드 귀족 출신 코스티를 만나 함께 독일 농장 노동자가 되어 한동안 일하기도 했다.

 

주인공 래리 더렐은 언어를 배우는데 있어 어쩌면 남다른 실력을 가졌던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모국어인 영어는 물론이고, 전쟁 영웅으로 프랑스어도 유창하게 구사할 수가 있었다. 라틴어와 그리스어도 공부했고, 독일 농장 경험을 통해 독일어도 배웠다. 나중에 나오지만, 래리의 유랑은 인도에까지 다다르게 되는데 거기서는 타밀어를 배워 구루들과 교류하는 수준에 도달하기도 했다. 이 정도면 거의 천재적 수준의 존재가 아닌가 싶을 정도다.

 

독일 농가 여주인과의 관계 때문에 코스티와 이별한 래리는 이번에는 철학의 나라 독일 본으로 향한다. 그리고 하숙집에서 우연히 만난 베네딕트 수도회 출신의 엔스하임 사제를 따라 수도원 생활을 경험하기도 한다. 어라, 갑자기 래리가 추구하는 구도의 길을 되짚어 보다 보니 문득 영화 <포레스트 검프>가 연상되기도 했다. 그렇게 소설과 후대의 영화들은 어떤 면에서 그렇게 상호 작용을 했던 걸까.

 

래리의 다음 목적지는 인도였다. 미국으로 가는 배의 간판원으로 변신했던 래리는 인도 봄베이에서 불현듯 하선해서 저명한 인도의 구루를 찾아 나선다. 독일 수도원에서 신과의 조우를 잠시 경험했던 래리는 인도에서 절대자와의 합일까지 경험하는 경지에 도달한다. 이게 과연 가능한 일인가? 포레스트 검프 이전에 이미 래리 더렐이라는 걸출한 진정한 의미에서의 엑스페이트리어트(국외자)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읽으면서 조금 전율하기도 했다.

 

자 그렇다면 다른 주요 인물인 이사벨 브래들리 아니 이제 그레이와 결혼했으니 이사벨 매튜린에게 시선을 돌려 보자. 모두가 다 알다시피 <검은 목요일>로 알려진 19291024일 증시 폭락으로 매튜린네 집안은 폭삭 망해 파산해 버렸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이사벨의 행복은 오래 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에게 구원자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파리 사교계의 이단아 엘리엇 템플턴이었다.

 

엘리엇을 파산의 위기에서 구해준 것은 그전부터 교류하던 바티칸의 뛰어난 정보력이었다. 미국 주식이 폭락할 것이라는 경고를 들은 엘리엇은 밥 매튜린이 관리하던 자신의 주식을 모두 처분하고 안전 자산인 금으로 바꿔, 위기에 철저하게 대비했다. 자신의 충고를 듣지 않은 누이 루이자도 막대한 손해를 입었다. 뼈 속까지 속물이긴 했지만, 사람 좋은 엘리엇은 조카 이사벨네 가족을 외면하지 않고 파리로 불러 들여 새로운 삶을 살게 만들어 준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말이 이사벨 가족에 그대로 적용된 셈이다.

 

한편, 오랜 방랑 끝에 파리로 돌아온 래리는 첫 번째 결혼에 실패한 동향 출신 소피 맥더널드를 만나 결혼을 결심한다. 여전히 래리를 사랑하고 있던 이사벨은 도저히 술과 마약으로 엉망이 된 소피와 자신의 옛 연인이 결혼하는 걸 두 눈 뜨고 봐줄 수가 없었다. 나중에 화자에 의해 드러나게 되지만, 이사벨은 최악의 방법으로 소피와 래리의 결합을 방해하는데 성공한다.

 

서머싯 몸은 <면도날>에서 화자이자 작가로 등장해서 소설에서 벌어지는 거의 모든 사건에 다양한 방식으로 개입하면서, 서사를 주도한다. 아마 그의 존재가 없었더라면 독자들은 서사의 전모를 파악할 수 없었으리라. 살아 있는 모든 이들이 자신의 욕망에 따라, 살아간다는 아주 간단한 진리를 몸은 방대한 서사를 통해 전달한다. 그렇다면 나는 도대체 무엇을 바라며 사는 걸까? 래리가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를 그리스 원어로 읽을 때 너무 기뻤다는 부분을 읽으면서 어쩌면 나는 래리처럼 책에서 그런 위안과 구원을 기대하며 살지 않나 싶었다.

 

이사벨에게서는 타협의 미학에 대해 배웠다. 모두가 그렇겠지만, 내가 원하는 것만 하면서 살 수 없는 게 바로 우리네 인생이다. 래리를 사랑했지만, 래리의 이상을 공유할 수 없었던 또다른 속물이자 철저한 현실주의자였던 이사벨은 래리와 함께 하는 고난의 행군 대신 부유한 가문 출신의 호남자 그레이를 선택해서 결혼이라는 선택을 했다. 물론,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대공황이라는 전대미문의 위기로 집안이 박살나기는 했지만 그레이는 래리와 달리 여전히 재기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험난한 시기를 버텨 나갔다. 그리고 엘리엇 삼촌이 죽고 남긴 유산을 바탕으로 텍사스 댈러스에 가서 석유 사업을 시작한다. 아마 이사벨 가족들은 그곳에서 대대손손 잘 먹고 잘 살았겠지.

 

서머싯 몸의 <면도날>은 고전은 지루하고 재미없을 거라는 통념을 제대로 혁파해준 그런 멋진 작품이었다. 세계대전을 경험하고 고향에 돌아와 트라우마에 시달리던 청년은 모든 것을 버리고 자기 구도의 길에 나섰다. 무언가 확실한 것을 길 위에서 과연 깨우쳤는가에 대해서는 끝까지 알 수가 없지만, 그의 방랑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출발할 때에는 부모가 남긴 유산이 많은 도움이 됐지만, 어느 순간 래리는 그마저도 포기해 버리지 않았던가. 그리고 뉴욕에 가서 택시를 운전하면서 먹고 살면서 자신만의 소중한 시간을 가지겠다는 선언 앞에서는 끝까지 자신의 몽상과 이상을 포기하지 않는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런 래리가 1970년대, 뉴욕의 밤거리를 누비는 "택시 드라이버" 트래비스 리로 변신하지 않았을까라는 상상도 해봤다.

 

왜 이런 걸작을 이제야 만나게 되었는지 그저 아쉬울 따름이다. 폴 린치의 <예언자의 노래>와 더불어 올해 만난 최고의 책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han22598 2025-03-31 15: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면도날 너무 재밌죠? ㅎㅎ 저도 너무 좋아하는 작품이고 작가입니다!

레삭매냐 2025-03-31 17:44   좋아요 1 | URL
네 너무 재밌게 읽었답니다.
마지막 장에 등장하는 절대자와의 합일
부분이 좀 빡시긴 했지만요 :>

예전에 사서 묵혀둔 <케이크와 맥주>
도 이참에 도전해야봐야겠습니다.

고양이라디오 2025-04-03 17: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공감100배 리뷰입니다ㅎ 저도 면도날 달과6펜스 인생의베일 정말 재밌게 읽었죠ㅎ

케이크와 맥주 저도 읽어야 되는데 잘 안되네요ㅎ

레삭매냐 2025-04-04 07:24   좋아요 1 | URL
넵! 저도 <달과 6펜스> 아주 재밌게
읽은 기억입니다.
그리고 보니 <인생의 베일>도 참
인상 깊었죠.

<케이크와 맥주> 빨랑 읽어야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