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이 세상의 거대한 꿩이다
헤르타 뮐러 지음, 김인순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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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문학상이 세계 문학계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누구나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작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독일계 루마니아 작가 헤르타 뮐러가 처음으로 우리나라를 찾았다. 그녀가 우리나라를 방문하고 있는 이 순간에, 헤르타 뮐러의 책과 네 번째로 만났다. 꼭 노벨문학상을 받아서가 아니라,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의 비현실적인 전체주의 독재와 2차 세계대전 후 소련에 끌려갔던 독일계 루마니아인들에게 호기심으로 시작된 헤르타 뮐러 읽기는 자연스레 전작주의로 날 인도하고 있다.

1986년에 발표된 헤르타 뮐러의 초기작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은 이 세상의 거대한 꿩이다>는 루마니아 속담으로 현실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없는 무력한 인간적 존재를 빗댄 표현이라고 할까. 이 작품은 영어로 <The Passport>로 번역이 되어서 출간되었다고 하는데, 궁극적으로 주인공 빈디시 가족이 그토록 원하던 것이 바로 조국 루마니아를 탈출할 수 있는 여권이었다는 사실에서 이 자전적 소설의 키워드라고 할 수가 있겠다.

독일 서남부의 슈바벤 지방을 연상시키는 루마니아 독일계 주민이 사는 바나트 지방의 슈바벤 지방을 배경으로 <인간은 이 세상의 거대한 꿩이다>는 펼쳐진다. 개인적으로 헤르타 뮐러 작가의 민족적 정체성에 대해 과연 독일어로 글을 쓰는 그녀가 독일인인가 아니면 루마니아인인가 하는 궁금증이 드는데, 루마니아에 살면서 독일인으로 살아온 소수 민족으로서의 독일계 루마니아 사람들에 대한 이모저모가 작가 특유의 간결한 문체와 몇 겹의 은유로 쌓인 채 조금씩 드러난다.

책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빈디시-카타리나 가정의 아멜리에 외에 다른 이들은 모두 목수, 야간경비원, 재단사 그리고 모피가공사 같은 그들의 직업으로 명명된다.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철통 같았던 차우셰스쿠 독재 치하에서 쓰인 글이어서 그런지 철저하게 익명성을 담보한다. 이 슈바벤이라는 마을의 독일인들은 루마니아 사람들을 ‘왈라키아인’이라고 부르면서 철저하게 독일의 문화적 정체성을 고수하며 살고 있다. 이런 사실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루마니아인들과의 정치, 사회, 문화적 충돌을 유추해본다. 전쟁이 끝난 다음, 독일계 주민이 소련으로 강제로 끌려갈 때 과연 그들이 왈라키아인이라고 부르던 이들의 반응이 어땠는지 궁금하다.

야간경비원의 사과나무 주둥이가 사과를 먹는다는 말에, 라틴어 미사를 드린 신부가 사탄이 사과나무에 들어 있다고 선언하면서 중세풍의 화형식을 선고한다. 동시에 수많은 슈바벤의 가정들은 루마니아 정부의 수탈, 착취와 억압을 피해, 동족이 사는 독일로의 이주를 꿈꾼다. 그래서 빈디시 역시 정나미가 뚝 떨어진 조국 루마니아를 떠나고 싶어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권이 필요한데, 이 여권을 받기 위해 상상을 초월하는 파렴치한 짓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나마 남아 있는 가장(家長)으로서 한 조각의 양심 때문에 빈디시는 고통으로 몸부림친다.

한편, 독일계 루마니아인들은 추축국의 일원으로 대소전에 참가했었다는 이유만으로 전쟁이 끝난 뒤, 소련의 강제노동 수용소에 끌려가 가난과 추위 속에 참혹한 시절을 보낸다. <인간은 이 세상의 거대한 꿩이다>에서는 비교적 간략하게 소개된 이 에피소드가 헤르타 뮐러의 최근작 <숨그네>에서 훨씬 풍부하고 자세하게 그네들이 겪은 고통에 대해 적나라한 해부를 시도한다. 그녀의 부모 세대에 공통으로 각인된 고뇌의 유전자가 작가를 통해 다시 한 번 재현된다.

헤르타 뮐러의 소설 작법의 특징인 간결하면서도, 산문시를 연상시키는 그녀의 시적 표현들은 <인간은 이 세상의 거대한 꿩이다>에서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올빼미가 마을의 구성원의 죽음을 예고하는 슈바벤에서 “일주일간 하늘은 깡그리 불탔”고(39쪽), 부정과 부조리가 만연한 가운데 “성당 톱니바퀴들이 죄의 시간을 재”고 있었다(49쪽). 평범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보통 사람의 숨통을 옥죄어 오는 전체주의의 망령 앞에 그들에게 주어진 것이라고는 어서 이 악몽의 순간이 지나가길 바라는 “빗물의 기도”(79쪽) 밖에 없었다.

“자기와의 의사소통, 대화 그것이 문학이었다”라는 말로 차우셰스쿠 독재 치하의 암울했던 시대를 문학으로 승화시킨 헤르타 뮐러는 자신이 저술한 텍스트가 독자와의 교감을 통해 사회고발적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고 인터뷰에서 설명한다. 작가가 직접적으로 의도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있는 사실 그대로의 서술만으로도 진실성을 담보할 수 있다는 점이야말로 문학의 근원적 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 이제 다음 차례는 <마음짐승>인가? 헤르타 뮐러 전작주의에 대한 발자국이 한 걸음 더 가벼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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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득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4
제인 오스틴 지음, 원영선.전신화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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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제인 오스틴의 작품을 책으로 접할 수가 있었다. 사실 올 연초에 이번에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시리즈로 출간된 제인 오스틴의 <설득>을 텔레비전 영화로 먼저 봤다. 그동안 영화와 텔레비전 드라마로 제인 오스틴의 작품 세계를 간접 체험했지만, 정작 원작으로는 만나볼 기회가 없었다. <설득>은 42세의 이른 나이에 타개한 제인 오스틴이 이 세상에 남긴 모두 6편 소설 중의 마지막 작품이다.

<설득>의 내용은 그녀의 문체만큼이나 간단하다. 준남작 가문인 엘리엇 가의 둘째 딸인 앤 엘리엇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어려서 어머니를 여읜 앤은 올해 27살의 노처녀다. 외모와 사회적 지위에 무척이나 신경을 쓰는 아버지 월터 경과 언니 엘리자베스는 기울어 가는 가세보다는 주변 사람들의 평판에 더 신경을 쓰고,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계속 낭비한다. 현실에 입각한 앤의 부채 상환 계획은 무시되고, 결국 그들의 영지가 있는 켈린치 홀을 어쩔 수 없이 크로프트 제독 내외에게 세를 내준다.

지금까지가 엘리엇 가문을 덮친 경제적 위기였다면 이제부터는 제인 오스틴의 장기인 남녀 간의 로맨스가 등장한다. 앤의 마음을 뒤흔든 사나이는 바로 8년 전에 그녀에게 청혼했던 프레더릭 웬트워스 대령이다. 그 당시만 해도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고, 사회적 지위마저 불안정했던 웬트워스의 청혼을 앤의 정신적 지주라고 할 수 있는 죽은 어머니의 친구 레이디 러셀의 ‘설득’으로 그만 거절하고 만다.

전 유럽을 뒤흔들었던 나폴레옹 전쟁을 통해 해군으로 사회적 지위와 재산까지 얻은 웬트워스 대령은 딸 가진 부모라면 누구나 탐을 낼만한 그런 일등 사윗감으로 급부상한다. 그런 웬트워스는 앤을 냉담하게 대하면서, 오히려 앤의 여동생인 메리의 시누이 자매에게 호감을 표시한다. 영국의 전원인 서머싯셔의 켈린치 홀, 어퍼크로스, 바스와 라임을 오가며 벌어지는 청춘남녀들의 알콩달콩하면서도 잔잔한 로맨스가 제인 오스틴의 손끝을 통해 재탄생한다.

19세기 초,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 전 세계를 주름잡던 영국은 조지 3세의 통치 아래 미국 독립전쟁을 비롯한 가장 강력한 맞수 프랑스와의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소설에 명백하게 등장하는 1814년이라는 시대 상황은 영국과 러시아가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 제국에 승리를 거두고, 전쟁에 이긴 군인의 귀향이 이루어지던 시기다. 남자들에게 전쟁은 사회적 신분상승과 상당한 재산을 축적할 수 있는 사회경제적 기회다. 이런 정치사회적 이슈를 제인 오스틴은 여성 특유의 필치로 예민하게 짚어낸다. 전쟁이 끝나고 평화의 시대를 맞은 전쟁 영웅들은 고향으로 돌아와 불안한 현재를 마감하고 안락한 가정을 꾸리고 싶어 한다. 다시 말해서, 결혼시장이 분주해졌다는 말일 게다.

제인 오스틴은 바로 이 전쟁을 통해 성공한 남자의 모델로 프레더릭 웬트워스 대령을 남자 주인공으로 낙점한다. 그의 상대역으로 시골 마을에서 조용하게 사교 활동을 하고, 책을 읽는 섬세한 감성의 소유자 앤 엘리엇을 골랐다. 물론 소설의 극적 긴장감과 재미를 위해 주변에 앤과 프레더릭에 못 미치는 캐릭터들과 음모를 꾸미는 악당 역도 빼놓지 않는다. 그 반대편에는 스미스 부인, 하빌 대령과 벤윅 대령 같은 온건하면서도 따뜻한 감성을 가진 조연을 배치한다. 월터 경과 앤의 언니 엘리자베스로 대변되는 구세대의 인물에 대한 웬트워스라는 신흥 부르주아 계급의 보이지 않는 경멸을 제인 오스틴은 소설의 곳곳에 은근하게 표시한다.

귀족이라는 신분을 내세우며 갖은 점잔을 빼며 체면을 중시하지만, 정작 한 꺼풀 벗겨 내고 보면 그네들의 허영과 가식으로 가득한 실상이 바로 드러난다. 체면을 차리기 위한 소비로 가계가 허물어져 가는데도 월터 경과 엘리자베스는 조상이 전해 준 가문의 이름에 덧씌워진 신기루를 좇는다. 그래서 앤의 우월한 존재감이 더 빛나는 걸까? 라임에서 루이자 머스그로브의 분별력 없는 행동으로 사고가 발생하자, 신속하게 사람들을 지휘해서 일을 처리하는 앤의 모습은 19세기 영국 숙녀의 전형으로 다가온다.

로맨스 소설 <설득>의 핵심은 여전히 옛사랑을 잊지 못하는 앤과 웬트워스의 사랑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아무리 시대가 지나도 만고불변의 진리인 사랑 이야기를 소설꾼은 놓치지 않는다. 제인 오스틴의 간단하면서도 흡입력 있는 문장이 마음에 들었다. 짧은 대화에도 시시때때로 변하는 주인공 감정의 이입은 물론이고, 상대방의 반응에 애달파 하는 사랑의 순간들을 어쩌면 이렇게도 멋지게 그려낼 수 있는지 절로 감탄이 나올 뿐이다. 이상이 앤의 감정이라면, 젊은 시절 자존심 때문에 사랑을 잃었던 웬트워스의 질투와 늦게나마 앤의 우월함을 깨닫게 된 그의 행동을 보면서 역시 사랑은 타이밍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이제 50권까지 나온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시리즈에서 유일하게 두 명의 역자가 번역을 맡아서 그런 진 몰라도, 번역이 더 매끄럽다는 느낌이 들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제인 오스틴이 그린 이상적 행복론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됐다. 과연 일개 독자로 저자의 의도한 바에 얼마나 도달했는지는 자신은 없지만, 행복에 후회는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서로의 사랑은 확인한 앤과 웬트워스처럼 말이다. 아무리 시간이 많이 지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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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이미 여우는 사냥꾼이었다
헤르타 뮐러 지음, 윤시향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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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타 뮐러의 책을 읽으면서, 계속해서 연상되는 인물이 한 명 있다. 그의 이름은 바로 작가의 조국 루마니아를 철권통치하면서 엉망진창으로 만든 4선 대통령이자 희대의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다. 국가 지도자로서 그가 행한 악덕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을 정도라고 한다. 1989년에 발생한 시민혁명으로 결국 독재자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하지만, 그가 남긴 전제적 경찰국가 루마니아의 상흔은 오늘날에도 지워지지 않고 있다.

2009년 노벨문학상에 빛나는 작가 헤르타 뮐러는 자신의 글이 정치선언문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분명하게 의사를 밝혔지만, 개인의 자유가 극도로 억압되고 비밀경찰의 감시와 체제유지를 위한 고발이 장려되던 암울한 차우셰스쿠 독재시기에 대한 그녀의 문학적 증언은 작품 곳곳에서 돌출한다. 그녀의 글에 표현된 시대의 불안이 나치 독일에 협력했던 과거 루마니아의 역사와 화학반응을 일으키면 어떤 폭발력이 발생할지 문득 궁금해졌다.

소설의 주인공 아디나와 클라라는 억압된 공기의 무게를 느끼며 노동영웅의 도시에서 일상을 영위한다. 사방에 널린 독재자의 사진은 시신경처럼 그가 통치하는 국민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다. 사람들은 일상의 불안을 떨쳐내기를 포기하고, 불안과 동거를 선택한다. 헤르타 뮐러는 이 불안의 정체를 밝히는 대신, 반복해서 곱슬머리 독재자의 초상을 언급한다.

무질서하게 들어선 공동주택, 물자부족 탓인 배고픔이 만연한 독재 치하에 대한 은유가 이어진다. 남자들은 애꿎은 화주를 물처럼 들이키고, 아이들은 풀줄기의 유액을 빨아 먹는다. 마치 전쟁이 끝난 뒤, 소련의 강제수용소에서 독일계 루마니아인들이 겪었던 기아의 악몽이 다시 엄습한다. 시대가 바뀌어도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던가, 그들이 처해 있는 질곡은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수렁처럼 보인다.

노동영웅을 칭송하는 사회에서, 토마토 농장 경영자는 아디나가 가르치는 아이들을 농장으로 동원해서 토마토 수확을 하는 방법으로 어린이들의 노동력을 착취한다. 오페라광장의 늙은 남자들은 공허한 눈빛으로 시간을 죽인다. 철사공장의 노동자는 경비원에게 잠재적 도둑 취급을 받는다. 사랑하는 남자를 묶어 두기 위한 멜론 피의 주술은 물자부족으로 화장지 절도 때문에 화장지 대신 무 잎사귀를 사용하라는 교장의 어이없는 연설에 비하면 사치에 가깝다. 교장은 교사를 추행하고, 공장장은 사고당한 노동자가 술에 취했다고 조작도 마다하지 않는다. 곳곳에서 상충하는 사회적 모순은 냉소적 니힐리즘으로 전이된다.

군 복무 중인 일리예는 가능하지 않은 아디나와의 일방적 열락을 상상한다. 병영생활에 억눌린 그의 리비도는 “열기의 무자비함”(142쪽) 때문에 폭력적으로 변해 자신을 옥죄는 사회주의 아니 더 나아가 인류의 역사보다도 더 오래된 바퀴벌레를 으깨어 죽인다. 추악한 오욕칠정의 도가니 철사공장에 대한 묘사는 너무나 사실적이다. 한 때 공장에서 번역가로 일했던 헤르타 뮐러의 실제적 체험이 바탕이 된 것이기 때문이리라.

한편, 클라라는 유부남이자 자칭 변호사라는 파벨의 애인이 된다. 몇 가지 기호품을 대가로 사실은 비밀경찰인 파벨과 관계한다. 아디나가 학생들을 가르치러 나간 사이, 그녀의 아파트에 들어온 비밀경찰은 여우 모피의 꼬리, 뒷발 그리고 앞발을 차례로 잘라간다. 결국, 아디나는 남자친구 파울과 잠적한다.

헤르타 뮐러는 차우셰스쿠 독재의 몰락을 미디어 시대의 텔레비전을 통해 담담하게 독자에게 전달한다. 이 독재자의 숙면을 위해 그가 방문한 도시의 수탉과 개들이 수집돼서 버스에 실려 갔노라는 이야기는 차라리 희극에 가깝다. 작가는 무채색 전체주의 국가를 특유의 간결한 문장에 담아낸다. 소설의 제목에 나오는 “여우”는 독재자의 눈과 귀가 되었던 비밀경찰에 대한 상징일까?

루마니아에 살면서 15살이 될 때까지 루마니아어가 아닌 독일어를 사용했던 헤르타 뮐러는 나치 무장친위대 소속이었던 아버지의 잔혹함에 대해서도 가차없이 비판한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어느 인터뷰에서 “질병의 죽음”이었다고 서슴지 않고 말한다. 생래적으로 가부장적 전체주의 특징들인 거짓, 기만 그리고 공포의 테마를 <그때 이미 여우는 사냥꾼이었다>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문장으로 짚어낸다.

“머리카락의 무게를 눈으로 느끼”(24쪽)고
“사람 크기의 그림자가 강에서 자살하는 시각”(272쪽)에도
“모두가 엿듣고, 모두가 주시”(223쪽)한다.


확실히 자신만의 문학적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헤르타 뮐러와의 친밀한 관계 설정은 쉽지 않았다.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스타일에 적응하라는 그녀의 작법이 오히려 매력적으로 다가왔다고 한다면 역설일까? 모름지기 작가라면 이 정도 기개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헤르타 뮐러가 다음번에는 또 어떤 놀라운 언어로 우리 곁을 찾아올지 벌써 기대가 된다.

[뱀다리] <그때 이미 여우는 사냥꾼이었다>는 원래 루마니아 출신의 스테레 굴레아(Stere Gulea) 감독이 연출한 <여우 사냥꾼>(1993)이라는 제목의 영화 시나리오를 소설로 개작한 것이라고 한다. 해리 메르클레와 공동 각본 작업을 한 이 영화는 어떨지 궁금하다. 영화를 보면 헤르타 뮐러의 작품세계에 한 발자국 더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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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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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청개구리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읽는다는 베스트셀러에 대해 태생적으로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가 보다. 그래서 신경숙 작가의 <엄마를 부탁해>를 읽는데도 꽤 오래 시간이 걸렸다. 왠지 한 번 보고 말 책인 것 같아서, 책도 직장 동료에게 빌려서 읽었다. 때마침 전 세계를 강타한 경제위기 속에서, 다시 전통적인 가치인 가족애를 전면에 내세운 <엄마를 부탁해>가 왠지 모르게 거북하게만 느껴졌다.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의 후기에서 작가는 청춘소설을 쓰고 싶었노라고 은은하게 말했는데, 이 소설은 정윤, 이명서 그리고 윤미루라는 청춘들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청춘이 가지는 재기 발랄함보다는 실종과 죽음 그리고 그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안을 그리고 있다. 그들이 모두 사랑했던 윤교수의 임박한 죽음을 앞두고 플래시백으로 과거를 짚어나가기 시작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정윤은 어머니를 잃고 낯선 도시에서 홀로서기에 나선다. 어머니가 병마와 싸우기 위해, 가장 먼저 한 일은 자신을 떼어 놓는 일이었다고 그녀는 회상한다. 그리고 윤교수의 강의시간에 그(명서)와 귀머거리 고양이를 데리고 사는 윤미루를 만난다. 소설의 초반에 ‘인생은 한 번 뿐이고, 독자적이다’라는 선언을 통해 작가의 삶에 대한 태도가 느껴졌다.

이 세 명의 외톨이들은 모두 죽음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다. 정윤은 자기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미루는 자신이 그렇게 따르던 언니 미래의 죽음에 대한 그리고 명서는 자신과 함께 오랜 시간을 보낸 미루의 불안한 미래에 대한 트라우마로 고통받는다. 삶에서 가장 빛나고 즐거워야 할 청춘의 시간에 그들은 모두 과거의 상실 혹은 앞으로 닥칠 상실을 걱정한다. 작가가 의도적으로 가공한 시대적 배경은 혼란을 부추긴다. 명서와 윤이 맞닥뜨리는 시위는 1987년이 될 수도, 2008년이 될 수도 있다. 작가는 독자가 시대에 대해 추적을 할 수 없도록 바리케이드를 친다. 어디선가 출간된 지 30년 된 시집 이야기를 언급했는데, 다시 8년 전으로 돌아가는 계산을 하려니 머리가 복잡해진다. 모든 걸 현재의 시점에 맞추려는 못난 독자의 헛된 노력이었다.

시위라는 특정시대를 상징하는 소재를 사용하면서도, 그들이 왜 시위에 나서는지에 대한 고민의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다. 그들은 취업양성소가 된 지금 대학의 젊은이들처럼 치열하게 공부를 하는 것 같지도 않다. 차라리 그들의 스승인 윤교수의 모습이 오히려 더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윤교수에게 문학이란 세상과 싸워나가는 무기였을까? 나에게 책이란, 그리고 문학이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 보게 해주는 윤교수의 일갈이 내내 머릿속에 맴돈다.

인생의 절정에서 끊임없이 상실을 고민하고, 생성보다는 소멸에 더 무게중심을 두는 정윤-명서-미루 트리오의 이야기는 아무래도 비교하게 되는 <엄마를 부탁해>의 필적할만한 흡입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엄마를 부탁해>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사건에 대한 서술이었다면,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의 아포토시스(apoptosis: 세포소멸)는 그 대척점에 서 있다. 나의 경우만 하더라도, 소설에 나오는 정윤과 명서가 짊어지고 가야 했던 존재의 소멸에 의한 상실은 아직 체험해 본 적이 없다. 그들처럼 어린 나이였다면 더욱 농무처럼 뿌연 허무주의에서 빠져나오기가 어렵지 않았을까?

그래도 작가는 모든 절망의 순간에 희망을 속삭인다. 정윤의 어머니가 죽으면서, 그녀의 대학생활이 시작되듯이 미루 역시 언니가 죽은 뒤에 실종된 사람들을 찾아 나선다. 병상의 윤교수가 손가락 글씨로 제자들에게 말했듯이 생성(발생)이 있으면, 자연히 소멸도 있기 마련이 아니던가. 끝이라고 생각한 바로 그 순간에, 새로운 시작이 잉태된다. 그리고 생성과 소멸이라는 영원회귀는 오.늘.을. 잊.지. 말.자.는 미루의 선언으로 재현된다.

소설의 청춘들처럼 원하는 때에,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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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계자들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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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언수 작가의 래생과의 만남은 충격 그 자체였다. 작년에 가장 좋아하는 작가 중의 한 명으로 꼽는 루이스 세풀베다의 <감상적 킬러의 고백>을 읽고 나서 우리나라에서 킬러를 소재로 한 소설이 나올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딱 1년 만에 나의 그런 편견을 김언수 작가가 신작 <설계자들>로 단박에 빠개줬다.

작가는 <설계자들>에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권장군 암살에 나선 래생이라는 캐릭터를 독자에게 툭 던지는 것으로 소설을 시작한다. 냉혹한 킬러이면서, 동시에 남모르는 과거를 가진 래생의 실체를 한 꺼풀씩 벗겨 내는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자객과 표적과의 갑작스러운 대면은 신선하게 다가왔다. 자객의 세계에서 자객은 표적이 왜 죽어야 하는지, 아무런 의문도 제기하지 않는다. 암살을 주문한 클라이언트와 클라이언트의 주문에 따라 암살을 ‘설계’한 설계자들의 지시에 따라 자객은 움직인다. 래생은 표적 권장군으로부터 좋은 위스키와 인디오식으로 요리한 돼지고기 그리고 감자까지 얻어먹는다. 그렇다고 표적의 운명이 뒤바뀌진 않는다.

자, 이젠 래생의 과거가 등장할 차례다. 태어나자마자 수녀원 앞 쓰레기통에 버려진 래생은 너구리 영감의 ‘도서관’에 입양되어 허드렛일을 하다가 너구리 영감의 수석 자객 훈련관 아저씨가 털보의 화장장에서 한 줌의 재가 된 후, 본격적인 자객의 길에 나서게 된다. 그는 엄청난 양을 자랑하지만 아무도 찾지 않는(순수하게 책을 읽기 위핸 목적으로는!) 도서관에서 스스로 글자를 깨치고 너구리 영감이 읽지 않을 만한 책만 골라 읽는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절름발이 너구리 영감의 도서관은 지난 90년간 온갖 추문이 얽힌 암살과 납치 그리고 실종이 얽힌 푸주의 입구였다.

그나마 영화 속의 레옹은 여자와 아이는 “클린”하지 않는다지만 래생에게는 애당초 그런 원칙 따위는 없다. 래생과 절친한 동료 자객 추가 이발사라는 이름의 칼잡이 고수에게 당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그의 죽음에 얽힌 이야기가 소개된다. 자객의 세계에서 표적을 처리하라는 지시를 따르지 않는 자객에게 합당한 대가는 죽음뿐이다.

한편, 래생과 같은 도서관 출신의 한자는 미국유학파로 경호 보안업체로 대표로 있으면서 뒤로는 깔끔한 대형마트의 살인청부업을 수행한다. 아날로그 방식의 청부를 담당하는 래생과 기업식 킬링을 서비스하는 신사 한자와의 대결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래생은 집에서 사제폭탄을 발견하면서, 자신이 표적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데...

김언수 작가의 신작 <설계자들>에 뿌리내린 서사구조는 독자가 거부할 수 없는 주술적 마력을 가지고 있다. 글을 읽을수록, 아무런 감정 없이 표적을 처리하는 래생의 삶과 하릴없는 시간을 죽이기 위해 독서를 하는 그의 인문학적 감성이 언제고 사고를 치겠지하는 우려가 동시에 교차한다. 책 읽는 낭만자객 래생의 덤덤한 “클린”은 암살이라는 극단적 폭력에 대한 독자의 사고를 무장 해제시켜 버린다. 작가는 주문, 설계, 암살 그리고 사후처리에 이르는 푸주 시스템을 자본주의적 욕망의 아바타로 서술한다. 우리가 소비하는 제품들이 어떤 방식으로 생산되었는지 관심이 없듯이, 돈만 주면 귀찮을 일을 처리해주는 흥신소 직원들처럼 래생들은 움직인다.

17살 때부터 업계에 투신해서, 15년간 다양한 종류의 “클린”을 해온 래생이 표적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너무나도 많다. 래생 자신이 자객이라지만, 인간의 본성대로 래생 역시 살고 싶다. 자신의 동료 추가 그리고 ‘그림자’ 정안이 차례로 이발사의 칼에 죽어 나가는 것을 보면서 그는 복수를 꿈꾸었을까? 자신의 실력이 이발사의 그것에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잃을 게 없다는 식의 아포토시스(apoptosis: 세포자살), 다시 말해서 자기희생을 통한 발생과 분화의 스텝을 따른다. 이 과정에서 래생의 자기희생은 자기보다 앞서 자발적 아포토시스를 결정한 미토를 그리고 그녀의 동생 미사의 생명연장에 대한 분화로 보는 것은 지나친 해석일까? 아포토시스란 결국 존재의 궁극적 갱생을 의미하는 것일 테니 말이다.

소설의 전반과 중반의 빼어난 전개와 서사 구조와 비교하면, 미토가 등장하는 후반부가 상대적으로 아쉬웠다. 연재가 계속되면서 결말에 대한 압박 때문이었을까. 예상치 못한 급작스런 결말이 조금 당황스러웠다. 도서관의 주인장 너구리 영감이 자신에 도전하는 한자에 대해 제대로 한 건 해주리라고 기대를 했었는데, 그대로 침몰해 버리는 모습에 실망했다. 푸주 세계의 의자를 치워 버리겠다는 미토의 당찬 아이디어는 애초에 이루어질 수 없는 망상(delusion)이 아니었을까? 그래도 예상하지 못했던 캐릭터의 재등장과 반전은 일품이었다.

김언수 작가의 유머 코드는 개인적으로 아주 마음에 들었다. 폭력남편을 의뢰하기 위해 미나리 박을 찾아온 아줌마가 도저히 실행에 옮기지 못하겠다고 하면서, 가격을 흥정하는 장면에서 그만 빵 터져 버렸다. 지긋지긋한 삶의 불안요소를 제거하는데도 시장가격 이상은 내지 못하겠다고 버티는 그녀의 태도는 정말 쿨했다! 팬티도 안입고 설쳐대는 곰돌이 푸우를 비롯해서 소설을 읽으면서 메모를 해두지 않아서, 어느 장면이라고 꼬집어서 말은 못하겠지만, 곳곳에서 빛나는 김언수 작가의 언어유희에 푹 빠져버렸다.

21세기 낭만자객으로 4년 만에 다시 돌아온 김언수 작가의 성공적인 연착륙을 기원한다. 작가와의 첫 만남은 대단히 만족스러웠다. 아 참, 그리고 소설을 읽으면서 등장하는 책들을 계속해서 검색했는데 결국 다카하시 겐이치로의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는 결국 주문하고 말았다. 이 고질병은 당최 어찌해야 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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