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나쓰메 소세키 지음, 진영화 옮김 / 책만드는집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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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이 한낱 고양이보다 못하다는 상상을 해본 적이 있는가? 지금으로부터 1세기 전, 일본 작가 나쓰메 소세키 씨는 어쩌면 우리네 호모 사피엔스가 하릴없이 골목을 누비는 고양이보다 못할지도 모른다는 문학적 상상력으로 인간들을 위한 우화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창조해냈다.

페르시아 종으로 보이는 이름 없는 고양이 “나”는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학교에서 선생으로 근무하는 구샤미 씨네 집에 기거하게 된다. 고양이 녀석의 탄생에서부터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인간의 삶을 작가는 넌지시 꼬집는다. 만성 위장병으로 고생하는 구샤미 선생은 스스로 지식인이라 자부하며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보이지만, 나의 관찰에 의하면 무엇하나 빼어나게 잘하는 건 없다. 지식인이 달래 지식인이던가.

내(고양이)가 보기에 선생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좋은 직업이다. 특히나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구샤미 선생은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연구합네 하고 서재에 틀어박히기 일쑤지만, 정작 제대로 공부한 적이 거의 없다. 고양이의 날카로운 관찰이 번득이는 순간이다. 지식인 흉내를 내기 위해 어려운 책도 읽는다고 하지만 실제 용도는 수면 활성제란다. 이름 하나 없는 고양이 주제에 이렇게 냉소적이기까지!

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동양의 종주국이라고 할 수 있는 청나라를 격파하고, 강국 러시아마저 소설에서도 잠시 언급되는 뤼순전투에서 격파하면서 세계열강의 하나로 인정받은 20세기 초반 일본의 기개가 하늘 높은 줄 모르던 시절이다. 부국강병을 모토로 삼은 메이지 유신의 성공으로 잔뜩 고양된 당대 지식인과 달리 고양이인 내가 보는 구샤미 선생과 그의 친구 메이테이 등은 하나같이 더리적어 보일 뿐이다.

구샤미 선생의 제자인 미즈시마 간게쓰의 뒷조사를 위해 예고도 없이 선생의 집으로 쫓아온 가네다 집안 여주인의 코를 골려 먹는 장면도 빼놓을 수 없다. 돈은 많지만 어떻게 보면 성공한 상인에 지나지 않는 실업가를 면박하는 지식인의 단면도 빠지지 않는다. 가네다 집안의 하수인으로 등장한 스즈키 도주로의 관계는 제국주의 침략전쟁이 본궤도에 오르는 과정에서 보이는 경학유착의 전형으로 보인다.

문학이라는 변용을 통해 보는 고양이의 시선만큼이나, 고양이에게 인간사는 알쏭달쏭하게만 느껴지는 걸까? 호기심 많은 고양이 녀석은 주인이 먹다 남긴 떡국을 먹다 떡이 이빨에 걸려 춤을 추는 우스꽝스러운 광경으로 독자를 즐겁게 해준다. 남의 연애사에는 왜 이렇게 관심이 많은지 들키면 작대기에 두들겨 맞을지도 모르는 위험을 무릅쓰고 일본에서 자신처럼 잠입에 뛰어난 닌자 고양이는 없을 거라며 가네다 집안에 침투하기도 한다. 이렇게 인간보다 잘났다고 주절대는 이름 없는 고양이 이야기가 참 재밌다.

한편, 고양이가 주제넘게 너무 인간사에 많이 개입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시시콜콜한 묘사에서는 좀 지루한 감이 없지 않았다. 게다가 구샤미 선생의 지나친 잘난 척과 문학작품의 인용은 소설의 흥미진진한 전개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 어쩌면 그 점이 나쓰메 소세키 선생의 스타일일지도 모르겠다. 일본의 셰익스피어라고 불리는 작가의 한 작품만으로 그를 평가한다는 것이 무리였을까.

우리가 생각하는 보통 고양이처럼 쥐잡기에도 능하지 못하고, 이웃의 검둥이처럼 다랑어 토막을 탐내지도 않는 이 이름 없는 고양이의 안분지족(安分知足)하는 삶의 자세가 어떻게 보면 부럽게 느껴졌다. 자그마치 한 세기 전에 아직까지도 살아 숨 쉬는 것 같이 놀라운 캐릭터를 만들어낸 나쓰메 소세키 선생의 필력에 그저 존경을 보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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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의 미궁호텔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6
야자키 아리미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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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색 표지의 분홍 돼지 인형 일러스트가 마음에 들어서 바로 읽기 시작했다. 야자키 아리미라는 금시초문의 작가인데, 어떻게 이런 발칙한 상상을 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게다가 이 시리즈가 일본에서는 선풍적 인기를 끌어서 10권이 넘는 책이 나왔다고 했던가. 제목에 나오는 대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연상시키는 판타지스러운 주인공 돼지돼지 씨가 주인공이다.

배구공만 한 크기의 귀여운 분홍 돼지 인형이 사람들이 좋아하는 그랜드 호텔의 버틀러(집사)로 홀을 종횡무진 누비며, 호텔 종업원들을 교육하고 떨어진 쓰레기를 줍는 것은 물론이고 아픈 투숙객을 정성껏 모시는 그야말로 신출귀몰하는 활약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 돼지돼지 씨는 평소에는 눈에 안 띄는 모양이다. 무언가 마음에 기대와 희망을 품고 사는 이들에게만 눈에 띄는 걸까?

엉뚱한 상상일진 모르겠지만, 이런 친절한 돼지돼지 씨와 만난다면 그랜드 호텔에서의 투숙이 더욱 즐거워질 것 같은 느낌이다. 가만 그런데 돼지돼지 씨의 실존은 뭐지? 봉제인형이라는 데 말도 하고, 손님을 접대하고 심지어 연극무대에까지 오른다? 이렇게 너무 따지기 좋아하는 독자라면 <앨리스의 미궁호텔>에 흥미를 잃을 지도 모르겠다. 판타지는 그저 판타지로 보자.

마을의 벚꽃 축제 20주년 기념연극으로 아마추어 배우들을 기용한 셰익스피어의 비극 <오셀로>가 이상야릇한 방식으로 소설의 중심에 연착륙한다. 프로 연출가 스자쿠 선생의 지휘 아래, <오셀로>에 대한 캐스팅이 진행된다. 오셀로나 데스데모나보다 실질적인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이아고 역에 우리의 돼지돼지 씨가 뽑힌다. 아무리 아마추어 연극이라지만, 정식으로 무대에 오르는 연극에 부담감을 가진 출연진들은 돼지돼지 씨도 하는데 나라고 못할 게 무어냐는 자신감으로 연극에 달려든다. 다양한 군상들이 그랜드 호텔이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연극과 접촉하게 되면서 이야기는 흥미를 더해 간다.

영화 <샤이닝>과 <미저리>를 연상시키는 외딴곳에 갇혀 글을 쓰는 소설가는 그랜드 호텔에서 칙사 대접을 받지만, 글의 실마리가 풀리지 않아 고민한다. 이 소설가도 돼지돼지 씨의 도움으로 글쓰기의 돌파구를 찾는데 성공한다. 자신의 딸 히로코와 화해를 원하는 아버지 우도는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돼지 봉제인형의 격려에 힘입어 연극 오디션에 응모하고 결국 주인공 오셀로 역을 따낸다. 히로코 역시 얼결에 오디션에 도전했다가 전격 캐스팅된다. 회사에서 잘나가는 미인 가나에와 그랜드 호텔로 꿈꾸던 밀월여행을 떠난 아키미쓰는 보기 좋게 그녀에게 차이고 돼지돼지 씨에게 위로를 받는다.

마치 지구의 정반대에서 온 것 같이 서로 공통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캐릭터들이, 그랜드 호텔에 모여 연극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자신이 잊고 있었던 소중한 무언가를 찾게 된다는 한 편의 동화 같은 설정에 마음이 절로 흐뭇해진다. 야자키 아리미 작가가 창조해낸 소설의 구조는 이 모든 것을 맨 끝에서부터 하나씩 차근차근 풀어낸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구성지다. 이런 연작이라면 환영이다. 과연 또 다른 버전에서는 돼지돼지 씨가 어떤 활약을 할까 하는 기대를 품어본다.

책의 노란 겉표지 속에는 쪽지를 들고 있거나, 호텔의 카펫을 밀고 있는 혹은 소파에 앉아 쉬고 있는 돼지돼지 씨를 볼 수 있다. 호텔에 사는 요정처럼 쉼을 찾아온 이에게만 보이는 돼지돼지 씨를 나도 언젠가 만나 보고 싶다는 상상에 빠져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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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씨 비가
쑤퉁 지음, 허유영 옮김 / 비채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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쑤퉁 작가의 <화씨 비가>를 다 읽고 난 느낌은 먹먹하다였다. 가난과 고통의 질곡에 시달리는 화씨 가족사는 제목 그대로 비극 그 자체다. 중국의 역사를 20년 정도 뒤로 돌렸다는 문화혁명기를 지나 1970년대를 시작으로 이십 년에 걸친 슬픈 가족사를 읽다 보니 “왜”라는 질문이 끝없이 터져 나온다. 왜 어머니 위펑황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가? 왜 주인공 화진더우는 이승을 떠나지 못하고 화씨 일가를 맴도는 걸까? 왜 화씨들은 대오각성하여 새로운 삶을 개척할 생각을 하지 못하는 걸까?

어머니 위펑황이 죽고, 아버지 화진더우 마저 방화죄로 감옥에서 스스로 세상을 하직한다. 아니 남은 가족들은 어떡하라고? 정말 무책임한 가장이 아닐 수 없다. 사군자 매란국죽(梅蘭菊竹)을 따서 이름 지은 네 딸 신메이, 신란, 신주, 신쥐와 철부지 막내아들 두후 그리고 이들을 돌보는 화진더우의 누이 고모가 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여전히 가부장제를 고수하면서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해서는 아들이 최고라는 봉건적 사상에서 벗어나지 않는 인간 군상의 모습을 쑤퉁 작가는 화진더우와 고모를 통해 적확하게 짚어낸다.

그렇게 배를 곯으면서도 아들 두후에게는 잘 먹이려는 것이 어머니이자 아버지 역할을 떠맡은 고모의 마음이었을까. 손위 누이들마저 그렇게 두후 녀석을 떠받치다 보니 그만 망나니가 되어 버렸다. 게다가 이상한 친구를 만나 게이의 길을 걷질 않나, 두후란 놈은 부모가 속 터져 죽게 만드는 비상한 재주를 가지고 있는가 보다. 그러니 구천을 떠도는 원혼 화진더우는 지상에서 돌아가는 꼴이 하나도 제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더러운 윗물 때문에 아랫물이 깨끗하겠냐고 자조한다.

화씨 일가의 비극은 아버지와 어머니 대에서 끝나지 않고, 자손에게까지 계속된다. 둘째딸 신주는 임신해서 중절 수술을 하던 중에 불의의 사고로 그만 꽃다운 나이에 죽고 만다. 큰딸 신메이는 우여곡절 끝에 결혼하지만, 가정불화에 고모의 말실수로 그만 신랑이 반신불수가 된다. 양아치 건달이 된 두후 놈은 매춘 혐의로 경찰에 연행된다. 헌신과 봉사로 화씨 집안을 받쳐온 고모는 조카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노구를 이끌고 나서지만, 결국 객사하고 만다. 어쩌면 이렇게 구질구질한 인생들일까. 문득 작년에 읽은 천명관 작가의 한국판 막장 드라마 <고령화 가족>이 떠올랐다.

쑤퉁 작가는 화진더우 일가의 비극을 통해, 사회주의 국가 중국에서 진행된 전통적 가족관에 대한 해체를 그리고 있다. 삶의 마지막 보루가 되어야 할 가족은 서로에게 짐이 될 뿐이다. 어머니의 죽음을 인정할 수 없는 딸들은 차례로 위펑황이 죽은 연료 창고의 주임 류페이량을 찾아가 행패를 부린다. 합리적인 사고 대신 감정적 대응으로 얻어질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그들은 세상을 향해 분풀이를 늘어놓는다.

유물론을 기반으로 한 사회주의 체제에서 이승을 떠도는 원혼이라는 초자연적 존재를 주인공으로 삼은 작가의 대담함이 새삼 눈에 띈다. 현실감각을 잃지 않은 쑤퉁은 화진더우를 물리적 현실세계에 개입시키지 않고 오로지 관조적 자세의 서술자로만 활용한다. 하긴 귀신 화진더우가 활약을 했다면 <화씨 비가>는 판타지가 되었겠지. 소설 속에서 화씨들은 가난과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렇게 처연한 몸부림을 치지만, 가장의 부재로 인한 빈곤의 질곡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죽음이라는 방법으로 가장이 가져야 할 경제적 책임으로부터 해방된 화진더우의 존재는 가족에게 외면당하기 시작한다. 설상가상으로 위펑황의 죽음에 대한 미스터리와 아들 두후 출생의 비밀이 밝혀지면서 화진더우의 위신은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친다. 조금이나마 품었던 해피엔딩에 대한 기대를 한 방에 날려 버린다.

사실 소설 초반에 이런 비정상적인 캐릭터들의 향연에 적응하지 못해 애를 먹었다. 하지만, 고모와 신주가 낙향해서 위펑황의 경고를 무시하고 임시중절을 시도하다 봉변을 당하면서 쑤퉁 작가의 서사는 힘을 얻는다.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문화혁명 시기에 화진더우가 지주 계급에 대한 악의적 공격을 했던 사실이 밝혀지고 그에 따른 인과응보의 순환이 밝혀지면서 비극은 절정으로 치닫는다.

짝으로 나온 <성북지대>가 불량소년들의 성장기를 그렸다면, <화씨 비가>는 가족의 구성과 해체를 그 중심에 두고 있다. 어쩌면 가족 내의 희생과 헌신이 이제는 미덕이 되지 못한 새로운 시대의 초상이라고나 할까. 자신을 속이면서까지 차마 자식들을 떠날 수 없었던 어느 아버지의 솔직한 고백은 그래서 더 진한 여운을 남기는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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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에서 온 아이 펭귄클래식 21
오스카 와일드 지음, 김전유경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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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부터 책을 많이 읽었다. 그 시절에는 주로 동화를 즐겨 읽었던 것 같은데, 지금도 기억나는 작품으로는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소공자> 그리고 <소공녀>다. 지금처럼 책을 읽고 나서 리뷰를 쓰지 않아 어떤 느낌이 들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때 조금이라도 기록을 했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든다. 왜 뜬금없이 오래전 독서 타령을 하냐 하면, 지금 막 읽은 책이 바로 어른들을 위한 동화 모음집이기 때문이다.
 
당대에 소설가보다는 극작가로 필명을 날렸던 오스카 와일드의 작품 <별에서 온 아이>를 읽었다. 여기저기서 오스카 와일드의 이름을 듣고, 심지어 그가 조연으로 등장하는 미스터리물도 읽었지만 정작 오스카 와일드가 직접 쓴 작품은 읽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아, 그건 아니다. 모두 9편으로 구성된 <별에서 온 아이> 첫 번째로 등장하는 <행복한 왕자>를 읽었었구나 다만 그게 그의 작품인 줄 몰랐을 뿐.
 
아일랜드 출신으로 영국 옥스퍼드에서 수학한 오스카 와일드는 자신의 문학 세계보다, 동성애와 송사로 관련된 스캔들로 더 유명한 셀러브리티였다. 극작가로서의 짧은 성공, 친구 아니면 적이라는 관계 공식, 오히려 자신에게 독이 되었던 송사로 2년간의 강제 노동형을 선고받고 육신이 만신창이가 된 상황에서 외롭게 세상을 뜬 외로운 영혼이었다. 게다가 그의 작품은 죽고 난지 한 세기가 지나서야 조금씩 인정받고, 재평가가 이루어졌다. 하긴 거의 유명한 예술가들의 삶이 그렇지 않았던가. 고흐가 어디 살아서 자신의 그림 값을 제대로 받았던가 말이다.
 
<별에서 온 아이>는 19세기 말에 출간된 오스카 와일드의 <행복한 왕자>와 <석류나무 집> 두 편의 단편모음집을 한데 묶은 책이다. 잊고 있던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운 <행복한 왕자>가 일번 타자로 등장한다. 고백하건대 <행복한 왕자>가 오스카 와일드의 작품이란 걸 처음 알게 됐다. 스토리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작품인데 말이다. 초반에 인상적이었던 건, 세상에 ‘행복한 사람’이 하나라도 있어서 다행이라는 말과 아이들의 꿈마저도 용납하지 않는 제도 교육을 담당한 수학 교사의 말이었다. 놀랍군!
 
철새인 제비인 이집트 행을 꿈꾸지만, 번번이 불쌍한 이웃을 돕자는 행복한 왕자의 말에 주저앉는다. 그래서 왕자가 지닌 루비, 사파이어 그리고 금박을 드레스 가공업자, 작가지망생, 성냥팔이 소녀 그리고 굶주린 아이들에게 물어다 주는 메신저 역할을 맡는다. 이렇게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나눠주자 행복한 왕자는 졸지에 “불쌍한 왕자”로 전락하게 된다. 하지만, 자신이 가진 것의 나눔을 통해 그 누구보다 행복하게 된 왕자를 불쌍하다고 부를 수 있을까. 물질만능주의가 판을 치던 19세기 말, 빅토리아 시대에 대한 작가의 적나라한 풍자다.
 
이런 왕자를 보다 못 한 제비는 자기가 이집트에 가서 보석을 가져오겠다고 제안한다. 아, 원작에 이런 제안이 있었구나. 나름 현실적인 이야기인데 왕자는 당장 불우한 이웃을 돕느라 제비의 제안을 가볍게 물리친다. 결말에서는 다분히 기독교적 색채를 보이면서도, 내세의 약속보다는 현세를 중시하는 작가의 생각이 반영된 느낌이 들었다.
 
<자기만 아는 거인>과 <별에서 온 아이>는 인류 구원자로 이 세상에 강림한 예수 그리스도를 떠올리게 한다. 아름다운 정원을 홀로 독차지하려는 이기적인 거인은 자신의 정원에서 마음껏 아이들이 뛰노는 것이 아름다운 정원의 비밀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 그런 깨달음은 정원을 둘러싼 담장을 허물어 버리고 평안한 안식의 세계로 거인을 인도한다. 별에서 온 아이는 자신의 빼어난 외모로 자기밖에 모르는 삶을 산다. 그러다가 자신을 아들이라고 주장하며 찾아온 거지 여인을 매몰차게 박대했다가, 나락으로 떨어진다. 자신을 구원할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한 우매한 인류에 대한 패러디일까. 도시의 왕이 된 별에서 온 아이가 3년 만에 세상을 떴다는 설정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삼 년과 기가 막히게 일치한다.
 
<어린 왕> 역시 이상의 두 이야기와 비슷한 궤적을 그린다. 출생의 비밀을 가진 어린 왕은 아름다움에 도취해 있다. 왕위 계승을 앞둔 어린 왕은 대관식 전날, 놀라운 세 개의 꿈을 꾼다. 자신의 대관식에 입을 옷을 만들기 위해 불철주야 고생하는 직공, 왕관과 홀에 사용될 진주와 루비를 캐기 위한 흑인 노예의 희생과 죽음의 신 그리고 탐욕의 신이 다투는 장면에 어린 왕위 계승자는 그만 소스라치게 잠에서 깬다. 그리고 염소지기 그대로의 모습으로 대관식에 나서겠다는 어린 왕의 말에 주위 신하들은 한목소리로 반대한다. 자신들의 이해를 위해 권력자는 허영과 부도덕함이 필수라는 말로 그를 설득한다. 나사렛의 목수였던 예수 그리스도의 문학적 현현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오스카 와일드는 정곡을 찌른다.
 
<어부와 그의 영혼>에서도 인어와의 사랑을 위해 자신의 영혼마저도 포기한 어부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어부에게서 억지로 분리된 영혼은 광야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유혹한 사탄처럼 지혜와 재물 그리고 소녀들의 흰 발로 유혹하지만, 어부의 사랑에 대한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 영혼의 끊임없는 유혹에 흔들린 어부의 사랑은 비극으로 끝나게 되지만, 방황하던 영혼이 비로소 안식을 찾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별에서 온 아이>에 실린 9개의 단편은 서문을 쓴 이언 스몰 교수가 말한 사랑과 자제심이라는 공통된 주제로 유기적인 연결체를 형성한다. 동성애라는 19세기 영국 형법으로 처벌된 금단의 사랑에까지 도달했던 오스카 와일드는 ‘꿈꾸는 것이 금지’된 어른을 위한 동화에서 기독교 사상의 바탕을 이루는 사랑에 대해 설교한다. 이런 걸 사랑의 역설[irony]이라고 부르는 걸까? 신의 사랑과 인간의 세속적 사랑이 교차하는 중간계가 조금은 혼란스럽다.
 
한편, 사랑에 버금가는 미덕으로 자제심을 상징하는 중용(中庸)을 오스카 와일드는 강조한다. 사랑과 우정도 지나치면, 부족함만 못하다는 고래의 진리가 반복된다. <공주의 생일>에서 자신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인지하지 못한 난쟁이의 나르시서스 같은 모습은 파멸의 전주곡이다. 예술의 이기적 속성을 예리하게 짚어낸 <나이팅게일과 장미꽃>에서도 능력 이상의 것을 대가로 요구하는 사랑의 속성을 파헤친다.
 
오스카 와일드와의 첫 만남은 쉽고 평안했다. 지금으로부터 또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다시 만나게 될 <행복한 왕자>는 또 어떻게 다가올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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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지대
쑤퉁 지음, 송하진 옮김 / 비채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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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최근에 읽은 쑤퉁 작가의 책은 <측천무후>였다. 중국 역사상 유일무이했던 여황제의 삶을 조명했던 쑤퉁 작가는 ‘성북지대’라는 가상의 공간에 네 명의 발칙한 청소년 성장기를 욱여넣는다.

우선 쑤퉁 작가는 성북지대(城北地帶) 참죽나무길이라는 공간에 자신의 문학적 페르소나를 투영한다. 장소가 준비되었으니 그 공간을 채울 캐릭터를 만들 차례다. 사사건건 문제를 일으켜 학교에서 퇴출당한 네 명이 바로 그들이다. 화냥 진란과 바람이 나서 그녀의 고향 칭다오로 줄행랑을 치는 선쉬더, 철사꼬챙이로 동네 개를 날름해 버리고 모른척하는 쩔룩이, 이웃집 소녀를 겁탈하고 ‘푸른잔디길’에서 9년을 복역하게 된 홍치 그리고 언젠가 영웅적 삶을 살겠노라고 호언장담하다가 저탄장에서 비운의 삶을 마친 리다성에 이르기까지 ‘뭐 이런 녀석들이 다 있어’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비범한 캐릭터의 향연이 펼쳐진다.

소설 소재로 써먹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지만, 참죽나무길에 사는 이들의 운명은 하나같이 가혹하기만 하다. 우리네 소시민들의 특별할 것이 없는 일상 가운데, 아이들은 사람이 죽어나가는 장소를 순례하고 어른들은 이웃에서 벌어지는 아귀다툼에 눈과 귀를 집중한다. 도무지 희망이나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건, 사고는 끊이지 않는다. 이곳이 사회주의 이상국가 중국이란 말인가? 아버지와 아들이 화냥 진란과 관계하고, 십수 년째 홀로된 아버지를 부양한 딸의 귀가가 늦었다고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가 봉변을 당하질 않나, 과부가 된 딸은 뱀장수 아버지를 매몰차게 내쫓아 결국 한겨울에 동사하게 하는 원인을 제공한다. 요즘 한창 인기 있는 막장드라마 뺨치는 수준의 자극적인 이야기가 <성북지대>를 수놓는다.

이런 상황에서 청소년들이 올바르게 자라는 것이 더 이상한 게 아닐까? 학교 교육은 오수가 터져 흐르는 참죽나무길의 진창처럼 엉망이고, 교사들은 학생들을 선도할 의욕마저 상실했다. 교내 폭력이 난무하는 가운데, 말썽꾼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기 위해선 총기와 실탄이 필요하다고 교사들은 자조 섞인 농담을 날린다. 이렇게 쑤퉁 작가는 전체주의 국가와 당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 대신 인민들의 치부를 있는 그대로 묘사한다. 이데올로기가 인간의 욕망에 우선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찌질한 이 네 청춘이 그렇다고 나중에 극적인 반전을 도모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불행의 선순환은 억울하게 죽은 메이치의 유령처럼 참죽나무길을 휩쓴다.

쉬더, 쩔룩이, 홍치 그리고 다성 이 네 악당의 우정의 깊이는 얇은 종잇장보다도 가볍다. 이들에게 진지함이란 다른 별나라의 이야기고 오로지 말초적인 즐거움만이 지고의 선이다. 신세를 망치고, 목숨을 잃는 순간까지도 도무지 뉘우치는 빛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보이질 않는다. 도대체 얼마만큼 더 망가져야 정신을 차릴 수 있을까? 하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기회마저 사라져 버렸으니.

중국어를 전혀 몰라 과연 어떻게 번역이 되었는지 가늠할 길이 없지만, 표의문자인 한자를 번역하는 건 우리말과 같은 표음문자인 영어와는 또 다른 차원의 상상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몹쓸 공상을 해봤다. 읽으면서는 재밌고 즐거웠지만, 다 읽고 나서는 희극보다는 비극에 가까운 결말에 마음이 좀 허전해지는 느낌이었다. 중국 소설치고는 너무 한자가 없어서 오히려 더 작품을 이해하는데 어렵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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