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와 준 펭귄클래식 57
아나이스 닌 지음, 홍성영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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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전고투 끝에 아나이스 닌의 일기 <헨리와 준>을 다 읽었다. 책을 읽다 보면 정말 나하고는 궁합이 맞지 않는 책이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경우가 있는데 이번이 그랬다. 수도 없이 책을 읽겠다고 집어 들었다가 내팽개쳤다가 또다시 집어 들고를 반복했으니 말이다. 책을 다 읽고 나서도 그 이유가 궁금했다. 나중에 독서모임을 하면서 궁금증이 풀렸다. 이래서 홀로 하는 독서보다 함께하는 독서가 좋은 걸까.

아나이스 닌은 실재 인물로 개인적으로 보헤미안 같았던 그녀의 삶이 부러웠다. 특히 스페인어를 하는 아버지에, 프랑스어를 하는 어머니 그리고 미국에서 살았다는 그녀의 국제적인 커리어가 마냥 부럽더라. 제도 교육을 충실하게 받지 못한 아나이스는 11살부터 자신의 기록을 남기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20살 즈음에 소설(<헨리와 준>을 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에도 등장하는 자신의 남편 이언 휴고와 결혼해서 프랑스 파리에 보금자리를 틀었다.

자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데카당스한 분위기의 문화수도 파리는 당시 세계 각지의 예술가들의 집합지였다. 그런 인연으로 해서 만나게 된 헨리 밀러와 그의 아내 준과의 만남은 아나이스의 삶에 극적인 전환점을 제공했다. 아나이스는 책에서도 언급하다시피, 헨리가 자신의 문학적 원천이라고 생각하는 준과 헤어지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매우 잘 알고 있었음에도 헨리가 지닌 야수성과 그의 천재적 재능에 반해 기존의 결혼제도를 뛰어넘는 파격적 사랑에 돌입한다.

책을 읽다 보면, 아나이스는 자신의 은밀한 일기를 남편인 휴고가 볼 것을 염려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과연 휴고는 자신이 그 누구보다 사랑하는 아내의 부정을 과연 몰랐을까? 아니 어쩌면 알면서도 사랑의 조그만 부분이라도 차지하려는 생각으로 아나이스의 부정을 눈감아 줬던 건 아닐까? 책을 읽는 내내 그런 의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역설적으로 남편에게는 보여주지 않았던 자신의 일기를 헨리에게는 스스럼없이 보여주기도 한다. 책에서 계속해서 말했던 것처럼 자신은 문학을 하는 시인이자 작가여서 그래도 괜찮다는 걸까? 보통사람의 사고로는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그런 변명처럼 다가왔다.

또 한 가지 궁금했던 점으로는 헨리는 아나이스의 경제적 지원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 하는 것이다. 당시 파리의 살롱에는 빠트롱(patron) 문화가 널리 유행하고 있었다고 한다. 전형적 부르주아 직업군인 은행가 휴고를 남편으로 둔 아나이스는 헨리의 작품 활동을 위해 재정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금전적으로 여유가 있을 때에도 물론이고, 그렇지 못한 상황에서도 ‘문학을 위해’ 그녀는 자신을 희생해 가면서 헨리를 돕는다. 그런데 이 헨리란 작자는 그렇게 지원받은 돈을 그야말로 허랑방탕하게 소진한다. 이들의 사랑은 정말 이해 불가하다.

휴고와 결혼을 유지하면서, 과거의 사랑이었던 사촌 에두아르도, 현재 불같은 사랑에 빠진 헨리 그리고 자신의 심리 분석을 해주다가 자신의 모든 것을 알아버린 알렌디 박사와의 관계는 통속적인 삼각관계의 틀을 완전히 부숴버린다. 아나이스 닌이야말로 기존의 도덕관념과 사회적 통념의 벽을 모두 뛰어넘은 시대를 앞서 간 진정한 자유부인이 아니었을까? 바로 이 지점에서 여성작가가 쓴 글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과연 남성작가가 기술했다면 그녀의 감성처럼 그렇데 디테일한 묘사를 할 수가 있었을까?

개인적으로 <헨리와 준>에서 가장 주목한 인물은 바로 알렌디 박사다. 알렌디 박사 앞에서는 아나이스가 하는 거짓말은 무장해제당한다. 남편 휴고에게 거짓말을 하면서 느낀 죄책감, 아버지에 대한 트라우마, 스스로 준과 라이벌 관계를 설정하고 고통과 번민 속에 몰아넣은 그야말로 복잡하기 짝이 없는 심리 상태를 알렌디 박사에게 고백하면서 아나이스는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 알렌디 박사 역시 환자 아나이스와의 정신 분석, 심리 분석의 과정을 거치면서 이 팜므 파탈의 저항할 수 없는 유혹에 빠져 버린다. 기존의 통념에서 일탈한 주인공들의 균형을 잡아 주는 역할이라고 해야 할까? 그 앞에서 발가벗겨진 듯한 느낌을 받은 아나이스의 심정이 이해가 되는 것 같다.

그다음에 등장하는 질문은 예술과 외설이라는 그야말로 해묵은 논쟁이다. 주도권을 행사한 주체가 여자냐 아니면, 객체로서 타자의 시선으로 보느냐에 따른 이분법적 분류는 너무 도식적인 게 아닐까. 몇몇 어휘에 있어 불편한 점이 없진 않지만, <헨리와 준>은 굳이 외설에까지 도달하지는 않는 것 같다. 아나이스는 자신의 사적 기록인 일기를 작품으로 생각했을까? <헨리와 준>(1986)이 처음에 출간되었을 때와 다른 모습이라는 걸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그녀가 이 세상을 뜬 다음에 출간된 점을 고려해볼 때, 굳이 선정적 묘사로 상업적 이익을 추구한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는다. 역시 이 점은 읽는 이의 판단에 맡겨야 할 것 같다.

자, 이제 처음에 던졌던 문제로 다시 돌아갈 시간이다. 내게는 왜 이렇게 <헨리와 준>이 읽기 어려웠을까? 책을 읽은 이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깨닫게 됐다. 일기라는 사적 영역의 글이다 보니, 작가에게는 정말 익숙한 캐릭터지만 독자에게는 생소한 탓을 들 수가 있겠다. 심리적으로 갈팡질팡하는 아나이스 내면세계에 접근하기란 정말 어려웠던 것 같다. 게다가 처음부터 출간을 목적으로 한 글이 아니다 보니, 정보 전달이라는 점으로부터 자유로웠다. 자신에게는 편리하겠지만, 글을 읽는 사람에게 이보다 더 불친절할 순 없었을 것 같다. 이런 분석을 통해 책 읽기가 왜 이렇게 어려웠는지 그리고 철저하게 가려진 그녀의 심리세계에 한 발짝 다가서기가 어려웠는지 이해가 됐다.

어쨌든 쉽지 않은 도전이었지만, 일단 완독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할만한 독서였다. 다음에는 아나이스가 그렇게 열렬하게 사랑하고, 심지어 책이 출간되는데 재정 후원도 마다하지 않았던 헨리 밀러의 <북회귀선>을 읽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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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교본
베르톨트 브레히트 지음, 배수아 옮김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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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인터넷 언론매체인 프레시안에 토요일마다 올라오는 책소개 코너를 유심히 본다. 주류 언론에서 다루지 않는 그래서 아예 그런 책이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그런 책들과 만나는 행운을 종종 얻곤 한다. 지난 주말에 내가 그렇게 해서 만난 책이 바로 독일 출신의 시인이자 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2차 세계대전 당시 언론에 보도된 보도사진에 4행의 사진시(詩)를 단 <전쟁교본>이다.

나치의 핍박을 피해 신산한 삶을 살았던 브레히트는 독창적 시선으로 독자에게 전쟁의 실제 모습을 알려주는 방법을 제시한다. 비주얼화된 사진이라는 이미지는 카메라맨에 의해 포착된 순간이다. 어제 지인과 이 책을 함께 보면서 한 장의 사진이 얼마나 많은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가에 대해 잠시 이야기를 나눴었는데, 브레히트가 선별한 사진을 통해 그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가 있었다.

개인적으로 2차 세계대전에 많은 관심이 있어서 눈에 익은 몇몇 사진들을 <전쟁교본>에서 볼 수가 있었다. 마치 복습을 하는 듯한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동남아의 새로운 식민지배자로 등장한 일본군에 맞서 싸운 미군의 모습에서 새로운 지배자의 모습을 본다거나, 독일군으로부터 해방한 이탈리아 시칠리아에서 미군정 장교가 잉여생산으로 남아도는 밀을 해방지역 시민에게 파는 장면 등은 겉으로 보이는 이미지 속의 숨겨진 이면의 고발하고 있었다. 골수 제국주의자였던 영국의 전시수상 윈스턴 처칠이 기관단총을 든 사진은 무력으로 세계정복을 하려던 히틀러의 그것과 너무 흡사했다.

자신이 형제라 불렀던 독일 농민과 노동자의 아들들이 러시아 전선에서 역시 자신과 같은 계급의 러시아 사람들과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인 장면에서도 브레히트는 반전 평화주의자로서의 모습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패전한 병사들의 철모에서도, 작가는 그 모자가 주인공들에게 머리에 올려져 있을 때가 실제 비극의 클라이맥스였다고 고발한다. 도대체 어떤 가치를 위해 싸웠단 말인가? 미국과 영국이 스탈린의 줄기찬 요구에도 미적거리던 제2전선은 결국 스탈린이 이끄는 적군이 독일 영토에 들어선 다음 순간에야 비로소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전쟁교본>을 통해 처음 알게 됐다. 그동안 서방세계가 끈질기게 주장해온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2차 세계대전의 승기를 잡게 되었다는 주장의 허구를 엿봤다고나 할까.

나치 세 거두로 명명한 히틀러, 괴링 그리고 선전장관 괴벨스를 다룬 일련의 사진에서도 작가의 풍자와 조소는 끊이지 않는다. 1차 세계대전 전쟁영웅이자 제국의 이인자였던 괴링, 히틀러의 순장조였던 괴벨스는 나누는 가상의 대화는 브레히트 특유의 블랙유머가 작렬하는 순간이다(27번째 사진, 괴링과 괴벨스). 독일의 전쟁영웅이었던 6명의 원수(Field Marshall)의 사진에서도 브레히트는 그들을 ‘살인자’라고 명명한다.

사회주의자였던 이 망명 작가에게 암울했던 나치 시절은 꼭 청산하고 넘어가야 할 대상이었다. 그래서 어느 편지에서 나치 시대의 비극을 축출하고, 냉정하고 올바른 평가를 할 것을 주문한다. 동시에 이 신성한 의무를 후대로 미루지 말라고 말한다. 이런 그의 의지는 책의 맨 끝 페이지에 실린 그가 남긴 단 한 편의 <평화교본>에 잘 들어나 있다. 새로운 시대의 전범으로 브레히트가 <평화교본>을 완성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반세기가 흘러 이런 의식 있는 지식인의 글을 만나는 기쁨을 무엇에 비할까, 책을 읽는 내내 전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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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닝 에브리원
다이애나 피터프로인드 지음, 이소은 옮김 / 비채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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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오래전에 레이철 맥아담스가 나오는 <Mean Girls>를 보고 참 캐스팅 한번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철없는 십 대 소녀 역할을 어찌나 그렇게 잘하던지. 그런데 이미 그 시절에 그녀는 이십 대 중반이었다. 이번에 <굿모닝 에브리원>으로 돌아온 그녀는 여전히 자기 나이보다 한참 앞선 배역을 연기하고 있었지만, 아무 문제 없을 정도로 멋져 보였다. 다이애나 피터프로인드의 원작소설 <굿모닝 에브리원>은 그렇게 영화와 같이 쌍둥이처럼 우릴 찾아왔다.

소설을 읽기 전에 먼저 영화부터 봤다. 아무래도 소설보다는 영화가 보기 편하니까. 영화를 한 절반 정도 보고 나서, 소설도 따라 읽었다. 아니 이렇게 완벽할 수가! 마치 영화 대본을 보는 것처럼 영화는 소설에 충실했다. 물론, 영화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부분은 소설에서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놀랍군 놀라워! 이렇게 원작소설을 충실하게 재현한 영화가 있었던가.

줄거리는 비교적 간단하다. 미국 뉴저지 출신의 책임 프로듀서 베키 풀러는 어린 나이에 방송계에 투신해서 십 년간 <굿모닝 뉴저지>라는 아침 프로그램에서 경력을 쌓아왔다. 그녀의 커리어가 한 단계 앞으로 나아가려는 순간, 그녀는 자신의 천직이라고 생각했던 프로듀서 직에서 짤린다. 그것도 자신보다 월등한 학력을 가진 새내기에게 말이다. 소설의 첫 장면은 그녀가 일과 수도 없이 걸려오는 전화 때문에 데이트에 실패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데, 방송일을 제외한 다른 일에는 젬병인 그녀다. 특히 연애사업에는! 새벽에 일어나 방송을 준비하고 오후 8시면 잠자리에 드는 보통사람과는 전혀 다른 삶의 패턴을 가진 그녀가 과연 정글 같은 방송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해고된 뒤에, 수많은 인터뷰 끝에 IBS 방송의 <데이브레이크>라는 프로그램의 책임 제작자로 화려하게 복귀하지만, 실상은 끔찍하다. 첫날 남성 앵커를 자르고, 자신의 우상 마이크 포머로이를 새로운 앵커로 내정하지만, 그와 여성 앵커 칼린 펙의 불화는 극한으로 치닫는다. 방송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두려워하는 시청률에 목을 맨 프로듀서의 스트레스가 영화와 소설을 통해 피부로 와 닿는다. 그녀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6주! 그 6주 안에 괄목할 만한 시청률 상승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47년 역사를 자랑하는 장수 프로그램은 그걸로 끝이란다. 게다가 누구나 선망하는 멋쟁이 훈남 애덤 베넷과의 달달한 로맨스도 이어가야 한다. 아기 새 베키의 맨해튼 둥지 틀기는 악전고투의 연속이다.

영화는 로맨틱 코미디를 표방하지만, 과연 “이런 씨바아아아아~”라고 외치는 기상해설자 어니의 시청률 올리기 고군분투와 앙칼처녀의 직장 생존기는 코미디처럼 다가오지는 않는다. 실업이 곧 사회에서 도태를 의미하게 된 현 세태에서 뉴스 프로그램에 올인하는 베키의 모습은 그야말로 돈키호테처럼 보인다. 거물 뉴스 리포터를 자신이 만드는 프로그램의 앵커 자리에 앉혔지만 풋내기 프로듀서가 포머로이를 자신의 마음으로 조종하기란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때로는 협박으로 또 때로는 읍소로 호소해 보지만, 마치 하나의 오케스트라 팀처럼 모든 것의 조화가 이루어져야 하는 방송은 그녀의 생각처럼 만만하지 않다.

영화에서 대충 생략된 부분은 소설에서 정말 친절하면서도 재밌는 베키의 독백으로 만날 수 있다. 영화의 비주얼로 형성된 이미지를 책으로 확인 사살하는 격이라고나 할까. 마치 보너스처럼 따라붙는 베키의 독백은 완전 재밌다!!! 보통 책을 읽고 나서 영화를 보는 편인데, 이번만큼은 영화를 먼저 보고 나서 책을 본 게 탁월한 선택이었다. 숨 가쁘게 돌아가는 방송계의 일면을 생생하게 그리면서, 그 방송을 만드는 이들의 애환을 진솔하게 담아낸 <굿모닝 에브리원>은 기대 이상이었다. 물론, 레이철 맥아담스 주연의 영화도 한몫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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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레슬러 - The Wrestler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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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작품을 봤다. 그의 장편 데뷔작 <파이> 이후 아마 처음이지 싶다. 극장에서 처음으로 만난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파이>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유대 카르발라 신비주의 같은 수로 이루어진 세계의 비밀을 파헤치는 남자의 이야기, 드릴을 든 주인공의 마지막 장면은 잊지 못할 것 같다. 요즘 나탈리 포트만 주연의 <블랙 스완>으로 작품 인생 최고의 순간을 만끽하고 있는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2008년 <레슬러>를 뒤늦게 봤다. 이유는 단 한 가지, 이듬해 아카데미상은 이 영화에서 열연한 미키 루크에게 돌아가야 했다는 기사를 읽고 나서였다.

미키 루크가 누구던가? 1980년대 킴 베신저(지금은 베이싱어로 불리지만, 오래전 이 이름이 더 좋다)와 함께 출연했던 <나이 하프 위크>에서 그 멋진 꽃미남 배우가 아니던가. 한 때 권투선수로 배우 대신 외도도 했다고 하는데, 환갑 줄에 들어서서 엉덩이마저 다 드러내고 출연한 영화가 바로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레슬러>였다니! 놀랍기만 하다. 레이거노믹스로 힘센 미국을 주창하던 바로 그 시대, 1980년대에 대한 향수가 느껴진다. AFKN을 통해 가끔 보던 WWF(World Wrestling Federation) 시절이 떠올랐다.

미키 루크가 맡은 랜디 더 램 로빈슨은 1980년대 끗발 날리던 레슬링 선수였다. 당대의 호적수 아야톨라와 경기에 대한 미디어 뉴스가 파노라마처럼 소개된다. 1989년 4월 6일 그리고 20년이 지난 현재, 랜디는 그저 예전의 영광과 추억을 뜯어 먹고 사는 한물간 레슬러일 뿐이다. 오래전부터 미국 레슬링이 쇼라고 했지만, 그 사실을 확인해주듯 랜디는 경기에 나서기 전에 면도날 트릭 같은 고전 수법과 대결할 선수와 사전 조율을 한다. 한 때, 국가적 영웅으로 부상했지만 지금 그에게 남은 건 링 위에서의 격투로 인한 청력 상실 그리고 근육강화를 위해 시시때때로 복용한 약물에 찌든 육신뿐이다. 게다가 트레일러 월세마저 못내 관리인에게 문전박대를 당하고 생업을 위해 인근 대형마트에서 파트타임으로 뛰고 있다.

그의 유일한 위안은 스트립클럽의 댄서 캐시디(마리사 토메이 분)와의 짧은 만남이다. 싱글맘으로 근근하게 하루하루를 사는 캐시디는 단골 손님인 랜디의 말에 곧잘 귀를 기울여준다. 어라, 이거 너무 신파조로 흐르는 거 아냐? 은퇴를 앞둔 레슬러와 스트립클럽 댄서의 사랑이라. 그렇다, 그들이라고 해서 행복한 미래에 대한 꿈을 꾸지 말란 법이 없다. 다만, 그들이 벗어나려고 하는 수렁이 너무 깊을 따름이다.

랜디는 어느 시합에서 결국 무리 끝에 정신을 잃는다. 혼수상태에서 깨어나 보니 심장수술을 받고 누워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담당 의사는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고(almost died) 랜디에게 경고한다. 그의 말을 가볍게 흘려 들은 랜디는 곧 있을 아야톨라와의 20주년 재시합에 대비해서 몸만들기에 나서지만, 심장수술을 받은 몸으론 무리다. 캐시디에게 조언을 구한 랜디는 역시 가족뿐이라는 말에 거의 의절하다시피 한 딸 스테파티(에반 레이철 우드 분)을 찾아가지만, 그녀에게 문전박대당한다. 아버지로서 의무를 다하지 못한 랜디에게 스테파티는 폭언을 퍼붓는다.

레슬러로서의 인생과 가족에게마저 인정받지 못한 아버지는 도대체 어디로 가란 말인가. 대런 아로노프스키는 이제부터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한다. 잃어버린 가족애를 되찾고, 자신이 사랑하는 캐시디 아니 팸과의 로맨스를 위해 랜디는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기 위해 노력한다. 문제는 그가 어떤 방식으로 사랑으로 하고 어떻게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의 삶은 오로지 레슬링뿐이었고, 그를 구속하는 다른 책임으로부터 도망쳤었다. 이제 모든 것을 정상으로 되돌리기에는 너무 늦은 걸까?

퇴락한 영웅 랜디 역에 미키 루크 만큼 어울리는 배우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나이 든 미키 루크는 그야말로 혼신의 연기를 펼쳐 보인다. 관객들의 흥분된 환호에 중독된 레슬러는 링 위의 삶이야말로 자신이 가족보다, 연인보다도 더 사랑하는 것이라고 몸으로 외친다. 현대판 로마의 검투사처럼 상대방을 향해 돌격하는 쇼비즈니스 업계의 전사는 그렇게 자신의 몸을 학대한다. 딸 스테파니와 모처럼 조성된 화해 분위기를 한 번의 실수로 날려 버린 랜디는 결국 목숨을 걸고 마지막 무대에 오른다.

방부제를 복용한 것 같이 나이를 먹지 않은 배우 마리사 토메이는 어느새 지천명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홀로 아이를 키우면서 랜디에게 조금씩 사랑을 느끼기 시작하는 스트립댄서라는 밑바닥 인생을 그야말로 품위 있게 연기한 중견배우 역할이 그녀만큼 적격인 배우도 없을 것 같다. 전면에 나서지 않고, 주연 배우인 미키 루크를 지원사격하는 최고의 연기였다.

캐시디의 조언으로 스테파니의 선물을 고른 랜디와 바에서 맥주를 마시며 래트의 “Round and Round"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둘이 서로 교감을 나누는 장면도 빼놓을 수 없다. 모멘텀이라고 할까? 랜디에게 닫혀 있던 캐시디의 마음이 조금씩 열리게 되는. 특히, 랜디의 마지막 무대를 앞두고 스트립클럽에서 뛰쳐나간 그녀가 랜디의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심장을 걱정하는 장면은 정말 압권이었다. 하지만, 아야톨라와의 경기를 앞두고 건즈 앤 로지즈가 부른 “Sweet Child O'Mine"의 그 유명한 기타 리프가 흘러나오는 순간, ”오! 컴 온!“이 절로 터져 나온다.

내가 좋아하는 하진 작가처럼 <레슬러>의 연출을 맡은 대런 아로노프스키 역시 특이할 것 없는 평범한 이야기에서 관객의 심금을 울리는 그런 짜릿한 감동을 연출해낸다. 과거의 영광을 뒤로하고, 살기 위해 자신이 그렇게 좋아하는 레슬링 포기하고 삶의 현장에 뛰어들지만 적응에 실패한 옛 영웅의 이야기는 너무나 현실적이다. 게다가 과거의 영화를 되새겨 주는 헤비메틀이 전성을 구가하던 시절의 음악까지 곁들이니 더 바랄 게 없었다. 랜디의 마지막 다이빙은 전율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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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행관람차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7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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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여행을 하다 보면 참 관람차를 많이 본다. 오다이바의 비너스 포트에서도, 그리고 고베와 오사카 가이유칸에서도 엄청나게 큰 관람차를 많이 봤다. 너무 궁금해서 오사카 시내에서 결국 관람차를 타봤는데, 한 바퀴 남짓 도는 동안 메트로폴리탄의 이모저모를 볼 수가 있었다. 미나토 가나에의 신작 <야행관람차>의 첫 이미지는 나에게 그렇게 다가왔다.

충격적인 데뷔작 <고백>으로 이미 수많은 열혈 독자를 확보한 미나토 가나에 작가는 이번에도 전작의 영광을 재현한다. 히바리가오카라는 고급주택가에서 끔찍한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사건이 벌어진 다카하시 가는 겉보기에 정말 화목하고 부러운 가정의 표본이다. 아버지는 의사로 일하고 있고, 교양과 미모를 갖춘 어머니 슬하에 남매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명문학교에 재학 중이다. 도대체 무엇하나 부족할 것 없어 보이는 이 가정에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그와는 대조적으로 고급주택이 즐비한 히바리가오카에 어울리지 않는 엔도 가가 있다. 엔도 마유미는 단독주택에서 살고 싶다는 일념으로 남편을 졸라 무리를 해가면서 히바리가오카에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자식에게 좀 더 좋은 환경과 자신의 꿈을 이루겠다는 소박한 어머니의 꿈은 딸 아야카가 사립명문학교 진학에 실패하면서 비극으로 치닫기 시작한다. 아야카가 부리는 히스테리에 정말 기가 찼다. 어쩌면 이렇게 얄미운 캐릭터를 창조해낼 수 있었을까? 아무리 버릇이 없다지만 부모를 당신이라 부르며, 모든 걸 부모의 탓으로 돌리는 철부지의 언행은 정말 한참 도를 넘어섰다. 이렇게 거의 날마다 전쟁을 벌이니 이웃이 보기에도 사건이 터진다면, 다카하시네 집보다는 오히려 엔도네 집이 먼저가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미나토 가나에 작가는 <고백>에서와 마찬가지로 사건에 직접적으로 연루된 당사자들의 시선으로 사건의 실체에 조금씩 다가선다. 어떤 경우에는 사건 발생의 이전의 시간으로 돌아가기도 하면서,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좋은 학교에 진학하고, 좋은 직장 또 좋은 혼처 같은 부모들의 강압적 권유를 이해못하는 건 아니지만, 과연 당사자가 그걸 감당해낼 수 있을까 하는 점에 의문점이 찍힌다. 어떻게 보면 아야카 역시 엄마 마유미의 빗나간 성공 욕망의 희생자가 아닐까?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일탈이 용서되는 건 아니겠지만.

등장인물의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이 차례로 소개되면서 아직 소개되지 않은 두 사람의 말이 궁금했다. 사실 어떻게 보면 그 두 명의 진술이 이 소설에서 가장 핵심이니 말이다. 하지만, 끝까지 마지막 한 명의 이야기는 소개되지 않는다. 어쩌면 그렇게 마무리된 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비극의 불편한 진실이 걷게 될 숙명이라고나 할까.

<야행관람차>를 보면서 구로사와 아끼라 감독의 <라쇼몽>이 떠올랐다. 사건을 바라보는 개인의 시각차가 이렇게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이 미나토 가나에의 <야행관람차>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겠구나 싶었다. 피해자의 가족이면서도, 동시에 가해자의 가족으로 생면부지의 타인에게 사이버 테러를 당하고 이웃사촌으로부터 경멸의 시선과 돌팔매질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 묘한 동정심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그런 증오와 분노의 실체는 너무나 이기적이었다. 자신이 어렵게 가꾼 히바리가오카의 이미지가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자신이 다니는 학교에 가해자의 자식과 함께 다닐 수 없다는 극단적 증오의 표출에 어이가 없어졌다. 아무리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라지만, 조금은 타인의 심정도 헤아려 주어야 하는 게 아닐까? 미나토 가나에 작가는 조용한 목소리로 그렇게 독자에게 속삭인다. “너는 어때?”하고 말이다.

스크린셀러가 대세인 요즘 <야행관람차>도 분명히 영화화될 거라고 확신한다. 소설에서 사건의 핵심적인 증인 역할을 하게 될 다카하시 신지 역을 누가 맡을지 궁금해졌다. 아이돌 뺨치는 준수한 외모의 소유자라고 하니, 잘 나가는 아이돌을 캐스팅해도 무난하지 않을까 싶다. 소설의 영상화, 한편으로는 반가우면서도 소설보다 못한 영화가 되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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