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라 아말리아
파스칼 키냐르 지음, 송의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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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밤 중에 문득 어느 책이 읽고 싶어졌을 때, 바로 그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건 축복이다. 이웃 블로거가 이 책을 먼저 읽었다는 글에 자극을 받았다. 그리고 시기적절하게 사둔 파스칼 키냐르의 신간 <빌라 아말리아>를 골방에서 찾아냈다. 주인공 안 이덴의 이름이 그리고 자신의 남자친구 토마가 자기보다 훨씬 젊은 여자와 만나는 밀회 장소를 미행하다가 정말 우연하게 만난 오래전 친구 조르주 로엘(링거)의 이름이 우수수 지나간다.

 

키냐르의 책 <빌라 아말리아>에서 내러티브가 중요한 요소인가 하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소설의 행간 곳곳에 작가는 한 편의 시를 연상시키는 그런 문구들을 슬며시 삽입한다. 15년간 살을 맞대고 살아온 남편/남자친구의 배신에 안은 괴로워하며 고통의 침잠으로 빠져든다. 그리고 시나브로 이별의 수순을 밟기 시작한다. 토마는 부서진 관계를 회복하려 들지만, 안에게는 이미 과거형일 뿐이다.

 

브르타뉴 출신의 안은 현대음악 작곡가다. 그녀는 잘 다니던 음악출판사를 그만 두고, 자신의 명의로 되어 있던 집의 매매절차를 시작한다. 그리고 토마가 런던으로 출장간 사이 그야말로 감쪽같이 사라지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너무 오랜만에 만나 이제는 반말을 하기에도 부담스러운 그런 관계가 된 옛 친구 조르주에게서 위안을 얻는다. 오랜 친구란 그런 걸까라는 부러운 생각이 들었다.

 

원래 소극적이고 관계에 어설펐던 안은 모로코 마라케시로 떠난다는 말을 남기고 종적을 감춘다. 그리고 독일, 스위스를 거쳐 이탈리아 나폴리 만의 외딴섬 이스키아의 어느 빌라에서 마침내 자신이 갈구하던 평안과 안식을 찾는다. 이 모든 걸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는 안의 재력이다. 아무리 무언가를 하고 싶더라도, 그것을 현실화시킬 있는 돈이 없다면 역설적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 아니던가. 천국보다 낯설지만 천국 이상의 평안을 주던 이스키아 섬의 행복은 느닷없는 비극으로 끝난다. 설상가상으로 안의 유일한 의지처였던 조르주마저 죽어간다.

 

모두 네 개의 장으로 구성된 <빌라 아말리아>에서 처음의 두 장은 안의 시선으로 그리고 세 번째 장은 안이 이스키아 섬에서 만난 샤를의 시선으로 그리고 마지막 장에서는 다시 안의 시선으로 돌아온다. 갑자기 바뀌는 타자의 시선에 잠시 어리둥절해 하지만, 키냐르의 산문시 같은 글은 계속 전진한다. 어쩌면 타자의 감정이입을 거부하는 주인공 안처럼 그렇게 소설의 전개는 무미건조하기까지 하다. 주변을 관조하는 듯한, 사물에 대한 나열이 개인적으로 신선하게 다가왔다.

 

안에게 남동생의 죽음 때문에 어머니와 자신을 떠난 아버지에 대한 트라우마는 남성 일반에 대한 불신으로 체화된다. <빌라 아말리아>에 나오는 관계의 총합이 지향하는 바가 궁극적으로 어디로 도달하게 될지 슬쩍 징조를 보여주는 지점이다. 그래서였을까? 여자와 여자(안과 아말리아 혹은 안과 줄리아), 여자와 아이(안과 레나)의 부유하는 관계 같은 스멀거리는 유대감이 얼핏 스쳐간다. 철저한 고독을 원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위기의 순간에 의지할 사람을 간구하는 현대인의 이율배반적이면서도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고통의 근원을 파스칼 키냐르는 예리하게 해부한다. 소설의 중심축 역할을 하는 키냐르 특유의 타자화된 시선의 묘사 역시 일품이다. ‘괴로움이 일종의 고통스러운 길목’(38)이라거나 가정은 정원 한가운데서 불타고”(99) 표현은 가히 최고였다.

 

2006년에 프랑스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출간된 <빌라 아말리아>는 브누와 쟉꼬 감독 연출, 이자벨 위페르 그리고 장-위그 앙글라드 주연의 영화로 소설 속의 빌라 아말리아가 위치한 이스키아 섬 로케이션으로 진행됐다. 소설에 등장하는 장면은 영화 속에서 그대로 재현됐다. 가장 궁금했던 안의 아지트 빌라 아말리아는 상상했던 그대로였다. 아쉽게도 불어를 하지 못하는지라,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었다. 영화 <베티 블루>의 장-위그 앙글라드는 조르주 역에 안성맞춤인 배우라고 생각했는데,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봄이 오는 길목에서 읽은 파스칼 키냐르의 <빌라 아말리아>는 참으로 만족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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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 평화 - 자연과 놀고, 사람과 놀고, 역사와 놀고, 노래와 놀며 캐낸 평화 이야기, 평화의 상상력
홍순관 지음 / 탐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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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독서모임에 나갔다가 노래꾼 홍순관 씨의 <춤추는 평화>라는 책을 알게 됐다. 제목에 나와 있듯, 이 책의 주제는 평화. 각 장의 끄트머리에 실린 명사들의 평화에 대한 단상을 보면서 나도 내 나름대로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평화에 대한 나의 정의를 리뷰 제목으로 뽑아봤다. 평화, 그것은 조화로운 무소유라고.

 

사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이 책의 저자 홍순관의 존재도 미처 모르고 살았다. 하지만, 평화박물관 건립을 위해 오늘도 부단하게 모금 활동과 공연을 하고 있는 작가의 가열찬 삶에 감명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저 청소년들을 위한 책이겠거려니 하는 단순한 생각에 책을 집어 들었다가, 저절로 책 읽는 자세를 바로 하게 됐다.

 

홍순관 씨는 아이들의 낮은 시선으로 평화에 대한 진중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천진한 목소리로 눈이랑 논다는 아이들의 대답이 참 멋졌다. 더불어 세상의 모든 것은 각자 제 숨을 쉬어야 한다는 말이 계속해서 귓가를 맴돈다. 우리를 피곤하게 만드는 숨 가쁜 경쟁이 아닌 조화로움 가운데, 가벼움을 상징하는 무소유야말로 어쩌면 우리가 갈구하는 이데아(idea)가 아닐까?

 

우리가 살고 있는 87년 체제 속에서 어느 정도 정치 민주화가 되었는지 훗날 역사가 평가해 주겠지만 작가의 주장대로, 신자유주의의 경쟁 시스템 속에서 일상화된 양극화 때문에 보통 시민이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은 그 어느 때보다 최고조에 달해 있지 않을까 싶다. 바로 그 지점에서 홍순관 씨는 무상급식으로 대변되는 평등한 교육이야말로 우리 사회가 직면한 선결 과제라고 힘차게 주장한다.

 

책의 목차 중에서 가장 먼저 나의 눈길을 사로잡은 소제목은 <공부라는 공해>였다. 주지하다시피 신자유주의에서 파생된 극단적 양극화 현상은 우리의 청소년들을 벼랑끝 경쟁으로 내몰고 있다. 그저 내 자식만 잘되면 장땡이라는 이기적 사고는 공교육 시스템에서 우리의 미래 세대가 진짜 배워야할 소중한 주제들을 잡아먹는다. 듣기만 해도 지긋지긋해지는 공부 타령 대신(심지어 작가는 공부가 공해라고까지 말한다, 멋지다!) 자신이 진짜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한가로움을 그들에게 부여해 주는 것이야말로 후세를 위한 진정한 교육의 시발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 점에서 작가가 멋진 교육의 실례로 들고 있는 일본 도호쿠 지방의 우리학교탐방은 책을 다 읽고 나서도 깊은 여운을 남긴다. 우리가 낳은 세계적인 마라토너 손기정을 지도하시기도 한 김교신 선생이 교실에 들어서실 때마다 눈물자락을 보이셨다는 일화를 읽으면서 또 오밤중에 스케이트장을 준비하기 위해 밤잠까지 설쳐 가는 열의를 보여준 우리학교 선생님들의 모습에서 오늘날 참교육자의 모습이 어때야 하는지 다시 생각해 보게 됐다.

 

쿠바의 음악 장인들의 이야기를 다큐멘터리로 만든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역시 빼놓을 수가 없다. 체제 경쟁이나 대위법이니 하는 복잡한 음악 이론보다 정말 음악이 좋아 반평생을 장인들의 이야기 속에서 문득 이 책의 저자 역시 노래꾼으로 앞으로 자신이 살아갈 모습을 슬쩍 비춰 보이기도 한다. 그에 비하면 우리 고유의 가락을 찾는 대신, 대량생산 대량소비 시대에 상업성을 전면에 내세운 일회성 음악이 판치는 오늘날의 음악계를 떠올리며 씁쓸한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어쩌면 작가의 말처럼 평화의 진정한 의미를 아는 참인간이 되는 길은 멀고 험할 지도 모르겠다. 그 좋아하는 육식도 우리가 사는 지구별을 위해 줄여야 하고, 씀씀이를 줄여 평화박물관 건립을 위해 십시일반으로 도와야 하고, 경쟁의 자리에 조화와 공존을 채워야 할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그래도 평평한 세상에서 누구에게나 평범하게 주어진 들숨과 날숨으로 숨쉬기 위해서라면 그것도 충분히 가치 있을 일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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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의 상페
장 자크 상뻬 지음, 허지은 옮김 / 미메시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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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전에 고양 아람누리에서 열린 장 자크 상뻬전을 찾았다. 당분간 상뻬의 원화가 해외 나들이를 할 계획이 없다는 전언에 마음이 분주해졌다. 전시회장에 넘실거리는 아이들 때문에 관람이 생각보다 쉽진 않았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한국의 꼬마 니콜라들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흐뭇해지기도 했다. 더 한참 전에는 두 번째로 들린 파리에서 상뻬의 그림엽서를 사기 위해 가판을 기웃거리던 기억도 떠오른다. 그리고 보니 상뻬에 얽힌 추억이 제법 된다 싶었다.

 

이번에 미메시스에서 출간된 <뉴욕의 상뻬>는 프랑스 보르도 출신의 에일리언(이방인) 장 자크 상뻬가 1978년부터 인연을 맺어온 뉴욕의 저명한 잡지 <뉴요커>에 그린 표지 그림들을 담은 제법 두툼한 책이다. ‘밀레니엄 캐피탈이라는 별명을 가진 대도시 뉴욕에 처음 발을 내딛는 순간, 프랑스 촌놈 상뻬는 정말 어리둥절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프랑스 본토에서 실력을 갈고 닦은 상뻬는 뉴요커들이 삶을 각축을 벌이는 현장에서 전혀 주눅 들지 않고 자신만의 화법으로 한 편의 논문에 버금가는 멋진 그림들을 그의 팬과 <뉴요커>의 독자들에게 선사해 주기 시작했다.

 

엄청난 규모와 다양한 삶의 면면을 자랑하는 뉴욕은 분명 상뻬에게 좋은 소재였음에 틀림없다. 그의 일러스트는 뉴욕의 거의 모든 장소와 인간군상의 양태를 거침없이 망라한다. 한 장 한 장 정성스레 인쇄된 그의 채색 일러스트를 보자니 문득 전시회에서 본 파리 시내에 차를 주차하던 장면을 포착한 그림 생각에 슬며시 미소가 떠오른다. 어쩌면 상뻬가 스케치하는 찰나의 미학이야말로 상뻬 예술의 정수가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상상이 곧바로 뒤따른다.

 

개인적으로 딱히 좋아하는 도시는 아니지만, 수백만의 인파가 몰려가고, 몰려오는 뉴욕의 번잡한 시내에서 유유하게 자전거에 요리에 사용할 재료를 싣고 달리는 요리사의 모습에서, 때로는 이제 막 무대에 오르려는 흥분과 긴장을 가득한 발레리나들의 모습에서, 한창 협주 중에 오케스트라에서 슬며시 빠져 나와 막간에 담배를 피우는 트롬본 연주자의 모습에서 나는 모름지기 아티스트는 이런 순정한 삶의 장면들을 잡아내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상뻬가 시전하는 수많은 대중 속에서 특정한 개인의 특별함을 꼭 집어내는 아티스트 특유의 감각에 독자는 매료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보면 볼수록 마음을 푸근하게 해주는 상뻬의 그림에는 촌철살인의 미학뿐만 아니라 예술적 상대성 또한 빠지지 않는다. 새를 관찰하기 위해 카누를 타고 나선 커플을 오히려 무성한 숲 속에 군락을 이룬 새들이 구경하는 그림은 정말 압권이었다. 투르 드 프랑스를 연상시키는 자전거 랠리에서도 모두가 기를 쓰고 앞으로 질주하는 가운데, 나홀로 자전거 페달을 밟고 있는 캐릭터에 대한 묘사 역시 빼놓을 수 없다. 녹지로도 유명한 뉴욕의 공원에서 건강 증진을 위해 달리고 있는 이들을 넋 놓고 바라보는 커플에게 경찰이 조크를 던지는 장면도 숨 가쁜 삶을 소비하는 뉴요커들의 일상으로 치환된다.

 

거창하게 상뻬의 그림을 보면서 철학을 논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래도 책머리에 등장하는 지인의 말처럼 상뻬의 그림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풍성한 여백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여러 번 곱씹어 봐야할 것 같다. 자고로 백문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라 했다. 종래의 상뻬 팬, 뉴욕을 사랑하는 사람들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여백의 아름다움에 한걸음 다가서고 싶은 이들이라면 일별(一瞥)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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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1. <노인과 바다>

2012년 1월은 미국 출신의 대문호 어니스트 헤밍웨이를 빼고서는 이야기가 되지 않을 것 같다. 사후 저작권 50년 시효가 만료된 후, 국내 출판사들이 다투어 헤밍웨이 책들을 펴내고 있다. 독자로서는 정말 골라 읽는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정말 오랜만에 경험하는 진기한 기회가 아닐 수 없다.

역시 우리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이자 만년의 헤밍웨이에게는 그야말로 <백조의 호수> 같은 작품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노인과 바다>로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저널리스트로 직접 전쟁에 참여한 경험으로 탁월한 전쟁소설을 발표하며 문단의 각광을 받던 대가가 침잔의 세계에서 노장은 여전히 살아 있다는 사실을 전 세계에 알린 문제작이다. 분량도 많지 않아 단박에 읽을 수 있다는 뛰어난 장점을 가지고 있다. 두고 두고 읽어야할 걸작이다.

 

 

 

 

 

 

 

 

 

 

 

 

 

 

 

 

2. <무기여 잘 있어라>

해외작품은 역시 번역이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최근 문학동네판 나온 <노인과 바다>를 번역한 이인규 교수와 영어작품 번역에 있어서 권위자로 인정받는 김욱동 교수의 “만새기” 논쟁이 흥미롭다.

이 작품은 세 번째로 소개할 <태양은 다시 뜬다>와 더불어 헤밍웨이의 대표적인 장편이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오스트리아군에 맞서 북부 이탈리아 전선에 투입된 미군 장교의 전쟁에 대한 담담한 증언이 매력적이다. 극도로 절제된 감정을 바탕으로 전선에서 싸우는 군인의 심리묘사가 정말 탁월하다.

 

 

 

 

 

 

 

 

 

 

 

 

 

 

 

3. <태양은 다시 뜬다>

이번에 헤밍웨이 작품을 소개하며 선택에 있어 두 가지 방향성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봤다. 어느 특정 번역가의 역서를 집중적으로 읽는 것, 다른 하나는 서로 다른 출판사에 나온 책을 고르는 방식. 나는 두 번째 방법을 골랐다. 일전에 나온 헤르타 뮐러의 역자가 달라 같은 작가의 작품이면서도 동일한 균질성을 찾을 수가 없어 아쉬웠던 기억이 난다.

헤밍웨이의 첫 번째 작품으로 왠지 미국식 로드무비를 연상시키는 구성이 돋보인다. 전후 “로스트 제네레이션”의 대표작으로 꼽힌다니 꼭 한 번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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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2-02-09 1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 주목 신간 페이퍼는 헤밍웨이 스페셜이네요! :)
늘 꾸준히 성실하게 활동하시는 것 같아 본받아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ㅠ ㅠ
 
모르는 여인들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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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시중에 풀리기 전에 예판으로 구입을 했다. 바로 읽기 시작했는데, 그 사이에 헤밍웨이와 엑스쿨투라 시리즈 때문에 한 달이나 지나서 마저 읽을 수가 있었다. 신경숙 작가가 8년 만에 새로 낸 단편선이라고 했던가. 후기를 보니 발표하기 위해서 쓴 글이 아니라, 스스로의 위안과 치유를 위해 쓴 글이라는 말이 참 인상 깊게 다가왔다. 작가의 내밀한 세계를 엿보는 ‘피핑 탐’(peeping Tom)이 된 기분이랄까. 독자보다 한 수 위인 작가와의 공공연한 공모다.

 

지난 토요일 독서모임에 가는 길에 오후에 팬 사인회가 있다고 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 읽지도 않은 책을 들고 나섰다. 첫 번째 인스톨은 솔직히 그다지 인상 깊게 다가오지 않아서인지 책에 온전하게 몰입하는데 시간이 좀 걸린 것 같다. 기대했던 독서모임도 팬 사인회도 어긋났지만, 집에 돌아오는 길에 만난 <모르는 여인들>의 다른 인스톨은 정말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답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단편을 읽다 보면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이 한 가지 있다. 보통, 단편선에 실린 단편 중에서 제목을 정하기 마련인데 왜 신경숙 작가는 맨 끝에 실린 <모르는 여인들>을 타이틀로 정했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마치 미로 속을 헤매듯, 마지막 인스톨을 만나기 전까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어쩌면 책을 다 읽고 나서도 맨 끝에서 독자를 기다리고 있던 작가의 후기와 만나기 전까지도. 나와 함께 이렇게 동시대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선물이자 그들이 나누는 삶의 총합이 무언가를 이룰 수 있다는 메시지야말로 이 책의 핵심이 아닐까.

 

개인적으로 <모르는 여인들>의 베스트는 <그가 지금 풀숲에서>라고 생각한다. 이 단편의 서사는 교통사고를 당해 꼼짝없게 된 주인공이 풀숲에 누워 과거를 회상하는 플래시백으로 시작된다. 잘 나가는 온라인 쇼핑몰 기획자인 주인공은 어려서 홀로 된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건강이야말로 남편이 없는 가정에서 자식들을 지키기 위한 홀로 남은 어머니의 최후의 보루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녀는 자신의 건강에 대한 강박증을 보인다. 자식들이야 그렇다 치고, 주인공과 결혼한 아내에게 이 억센 시어머니의 존재는 과연 어땠을까. 바로 그 지점에서 갈등의 분절이 시작된다.

 

초반에 주인공의 파경에 대한 설정이 잠깐 소개된다. 어머니의 과거와 주인공의 파경이라는 두 소재가 묘하게 어우러지면서 이야기는 흥미를 띠기 시작한다. 거기에 아내의 외계인손증후군(alien hand syndrome)이라는 의학적 증상이 추가되면서 <그가 지금 풀숲에서>는 절정으로 치닫는다. 문득 오래 전에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SF 소설에서 접했던 통제할 수 없는 왼손에 대한 글이 생각났다. 신경숙 작가도 베르베르의 책을 읽었던 걸까? 기시감을 지울 수가 없다. 하도 궁금해서 인터넷으로 외계인손증후군에 대한 기사를 다 찾아보았다. 이게 실제로 존재하는 질병인가 하는 마음에. 그리고 최근에 영국 BBC를 통해 소개된 똑같은 이름의 증후군의 실체와 대면할 수 있었다. 놀랍군!

 

http://www.bbc.co.uk/news/uk-12225163

 

(외계인손증후군의 실제 BBC 방송 사례)

 

상실의 시대에 사회를 구성하는 최소 단위인 가정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을 통해 작가는 시대의 우울과 슬픔을 노련하게 제시한다. 주인공의 플래식백을 읽으며 독자는 이미 왜 아내에게 외계인손증후군이라는 기상천외한 질환이 생겼는지에 대해 대충이나마 파악하고 있지만, 주인공은 미처 모르고 있다. 이런 현실세계에서의 어이없는 괴리야말로 실존적 외로움을 극대화하는 장치다. 소설집에 맨 끝에 실린 <모르는 여인들>에서도 이런 반복은 계속된다.

 

20년 전에 헤어진 옛 연인으로부터 넘겨받은 노트를 읽으며 주인공은 옛사랑의 부인이 남긴 행적을 뒤쫓는다. 공교롭게도 자신의 현재 남편도 수술을 받고 입원 중이다. 상처와 회복이라는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 재활을 앞둔 마당에 불쑥 나타나 자신의 상처를 내보이는 남자에게 그녀가 느낀 감정의 실체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소설 속의 화자는 다 외롭고, 아프고, 슬프다고 속삭인다. 그런데 정작 자신의 감정을 보듬어 줄 사람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작가가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그게 아니었을까? 나도 속상하고 외롭단다, 그러니 나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여 주렴.

 

작가의 희망회복 프로젝트의 첫 번째 목표가 감정의 순화였다면, 두 번째는 육체의 회복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정상적인 활동을 하기 위해 섭생을 해야 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신경숙 작가는 바로 그 지점에 주목한다. 실연을 당해 야채 삶은 물 밖에 넘기지 못하는 사람도, 흉악한 살인범에게 온 가족을 잃은 외톨박이도 모두 먹어야 이 슬픔을 극복할 수가 있다. 바로 그 순간에 작가는 감칠맛이 도는 앵두화채로, 새벽에 거둔 파란배추국으로, 또는 멀리 프랑크푸르트 린덴바움(보리수) 특산의 새콤한 사과술로 독자를 위로한다. 김훈 작가에게 이런 디테일을 기대할 수 있을까? 천부당만부당이다. 오직 그녀였기에 가능한 일일 게다.

 

<모르는 여인들>은 나에게 참으로 롤러코스터 같은 독서의 즐거움을 안겨주었다. 어떤 때는 지나친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실망감으로, 때로는 이렇게 멋질 수가 하는 경이로움으로 또 혀 안 가득 고여 오는 엄마표 밥상에 대한 허기의 전주곡으로 각인됐다. 삶의 어느 순간, 관계 때문에 심신이 허전한 이들에게 이렇게 시원한 앵두화채 같은 모르는 인연과의 운명적인 만남을 선사해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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