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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 무덤의 남자
카타리나 마세티 지음, 박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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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책을 읽다 보면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보물 같은 수작(秀作)을 만날 때가 있다. 지난 주말에 우연히 집어든 카타리나 마세티의 <옆 무덤의 남자>가 그랬다. “옆 무덤의 남자라 직관적으로 여성작가가 쓴 글이겠거려니 하는 생각이 스쳐간다. 북구의 나라 스웨덴에서 날아온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달달한 로맨스 소설은 봄날에 슬그머니 기지개켜는 연애감정처럼 그렇게 슬그머니 찾아왔다.

 

레퍼토리는 비교적 간단하다. 어느 날, 묘지의 무덤에서 만난 서로 태생과 배경이 상이한 두 남녀가 티격태격 치고받는 가운데 사랑을 꽃피워 간다는 이야기다. 문제는 위의 간략한 요약에서 나왔듯이 서로 다른 삶의 배경이다. 여주인공 데시레 발린은 최근에 남편이자 조류학자인 외지란을 자전거 교통사고로 잃어 매일 같이 묘지를 찾는다. 그 옆 묘지에 영면한 어머니를 찾아 꽃을 심는 탱고왕벤니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두 주인공 모두 사랑하는 이를 상실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아니 그런데 왜 하필이면 묘지에서 싹트는 로맨스라니, 배경이 낯설고 왠지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지만 사랑은 그야말로 시간과 장소 그리고 상대를 가리지 않으니까라는 말로 넘어가자.

 

쇠똥 냄새가 그윽하게 나는 시골에서 스물네 마리의 젖소와 씨름하며 고단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천연기념물벤니와 세련된 도시에서 자크 라캉의 철학을 논하며 신문에 실린 기사를 보며 남편과 논쟁하기를 즐겨하는 데시레의 미래가 어떤 식으로 흘러가게 될지 대충 짐작이 간다. 그런데 문득, 그 반대의 경우를 상정해 보며 혼자 미소 짓는다. 도시 남자가 시골 여자를 만나면 그림이 어떨까 하고 말이다. 하긴 그렇게 된다면 전형적인 막장 드라마의 재벌 2세 스토리로 흐르게 되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이 찾아든다.

 

어쨌든 데시레와 벤니는 상대방을 품으려는 노력 대신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이해해주고, 상대방의 양보를 일방적으로 요구한다. 아니 사랑이라는 게 원래 이렇게 이기적이었던가? 단 하루라도 자신이 돌봐 주면 안되는 젖소들과 자신 삶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시골 농장을 팔고 자신이 사랑해 마지않는 희멀건 새우의 품에 투항하는 건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던 벤니의 결심은 새우의 바캉스 미소를 보는 순간 봄눈 녹듯 사라져 버린다.

 

자신을 닮은 아이를 쑥쑥 낳아 주고, 소젖을 짜거나 건초 더미를 날라주는 일을 거들고 푸짐하고 맛좋은 미트볼을 만들어 주길 바라는 벤니의 기대를 데시레는 도저히 채워줄 수가 없다. 그렇다고 그야말로 난자가 공중제비를 돌며 원하는 벤니를 놓치고 싶지 않는 데시레의 이율배반적인 모습이 카타리나 마세티의 ‘he said, she said’ 스타일의 교차서술로 형상화된다.

 

 

이 재미진 소설을 읽으면서 호모 사피엔스 종의 남녀라는 개체는 어쩌면 지구인과 화성인처럼 전혀 다른 존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시크한 도시여자의 전형 데시레에게 쇼핑은 백화점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온라인 카탈로그로 하는 것이고 나중에 대금만 지불하면 된다고 철썩 같이 믿는 벤니의 촌스럽기 짝이 없는 선물이 먹히는 게 정말 경이로웠다. 다만, 연애의 과정에서 자극은 일회성일 뿐 반복은 아니라는 점을 벤니가 몰랐을 뿐이다. 데시레가 골라주는 셔츠를 입고 다니다가는 수많은 프러포즈를 받게 될 거라는 벤니의 푸념에 섞인 유머는 최고였다. 다만, 그 프러포즈의 주체가 여자가 아니라는 남자일 거라고.

 

<옆 무덤의 남자>는 우리에게는 생소한 공간인 스웨덴을 배경으로,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한 연인들의 이러저러한 갈등을 그리고 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마당에, 시골 농장을 지키며 가업을 잇겠다는 전업농부 벤니의 사고가 어쩌면 고루한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평생을 농장 일만 하며 살아온 벤니가 데시레의 서식처인 도시에 가서 무슨 일을 할 수가 있을까? 그래서 데시레는 벤니의 중학교 시절 성적표를 보고 나서, 그의 뇌관을 폭발시킨다. 자신의 가치관이 절대적으로 옳을 수 없으며, 상대방이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는 부분을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알면서도 삶의 어느 순간에 통제불능의 상황에 빠질 수도 있다는 걸 데시레와 벤니는 몸으로 격렬하게 보여준다.

 

그렇게 한참 책을 읽다 그런데 카타리나 마세티가 어쩌면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이 평범한 연애소설을 통해 진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무엇일까 하는 성찰에 다다랐다. 호모 사피엔스는 홀로 살 수 없다는 이야기? 아니면 남녀 간에 서로 극복할 수 없는 그 놈의 지긋지긋한 성격 차이?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자. 그저 사랑하고 싶다는 그들의 감정이 아닐까 추론해본다. 상실로 정형화된 과거를 뒤로 하고, 행복한 미래를 꿈꾸는 이들에게 사랑의 묘약은 충분조건이 아니라 필수조건이다. 그렇게 우리는 슬기로운 (도구의) 인간’[Homo sapiens]이기 보다 사랑의 인간’[Homo amor]가 되고 싶은 거겠지.

 

, <옆 무덤의 남자>는 결말의 알쏭달쏭한 데시레의 황당한 제안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데시레와 벤니의 2차전이 곧 출간될 속편 격에 해당하는 <가족무덤>(가제)에서 펼쳐질 예정이다, 그러니 기대하시라. , 그리고 보니 나도 라캉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구나. 나는 시골쥐에 속하는 호모 사피엔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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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 2012-04-13 1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서평 잼 있었습니다~

레삭매냐 2012-04-23 12:4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
 
[스노우맨]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스노우맨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7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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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노르웨이 출신 작가 요 네스뵈의 책 <스노우맨>을 보았을 때, 우선 그 두께에 놀랐다. 그리고 읽으면서 생각처럼 스피드가 나지 않아 두 번째로 놀랐고, 본 궤도에 들어서자 책읽기를 멈출 수가 없어 마지막으로 놀랐다. 엄청난 속도로 이 책이 팔린다는 광고에 조금 허풍에 섞여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오늘 오후 점심시간을 이용해 다 읽으면서 과연 명불허전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근래 읽은 장르소설 중에 가히 최고다. 스칸디범죄소설이 세계적으로 각광받고 있는지 명징하게 알 수 있었다.

 

오슬로 경찰청에 근무하는 안티히어로적인 색깔이 농후한 해리 홀레 반장을 주인공으로 삼은 시리즈의 선풍적인 인기에 힘입어 우리나라에도 드디어 <스노우맨>이 상륙했다. 연쇄살인범과 알코올 중독 마초 형사의 대결을 그린 <스노우맨>은 문득 몇 년 전에 몰두했던 제프리 린제이 원작 미드에 나오는 싸이코패스 주인공 덱스터 모건을 연상시킨다. <덱스터>의 첫 번째 에피소드 주인공 아이스 트럭 킬러처럼 스노우맨도 살인 현장에서 특정한 패턴을 보여준다. 눈사람을 만드는 방식으로.

 

덱스터 모건이 철저하게 음지에서 선(?)을 추구하는 시리얼 킬러였다면, 우리의 주인공 해리 홀레 반장은 그의 직책이 말해주듯 양지에서 뛰는 형사다. 괴물과 싸우다 보면 스스로가 괴물이 되어 버린다고 했던가. 그런 통속적 정의에 해리 홀레는 안성맞춤인 캐릭터다. 이제는 닳을 대로 닳은 장르소설 독자를 위해 작가 요 네스뵈는 한층 자극적이면서도 핑핑 돌아가는 두뇌회전을 요구하는 게임을 시작한다.

 

우선 오래 전 사건을 빌미로 <스노우맨>이 현재진행형이지만 오래 전에 태동된 사건이라는 암시를 슬쩍 내빛친다. 단순해 보이는 부녀자 실종사건이 끔찍한 연쇄살인으로 이어지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시리즈물이다 보니 전작에서 파트너 형사를 잃은 해리 반장의 이야기가 가끔 등장해서, 반장과 처음 만나는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도대체 전 에피소드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리뷰의 제목으로 삼은 삼단 콤보 트위스트는 헛다리짚기라는 호러/추리소설의 클리세이를 이용한 독자 낚기다. 독자보다 한 수 위인 요 네스뵈는 능수능란하게 독자를

 

공교롭게도 요즘 스웨덴 작가와 노르웨이 작가 그러니까 잘 접할 수 없는 스칸디나비아 출신의 작가들의 책을 연달아 읽다 보니 문득 황량한 북구의 냉랭한 기운을 느끼게 된 듯한 느낌이 든다. 영화로 치자면 <13일의 금요일> 스타일의 날것 그대로의 우악스러운 공포가 아니라, 말끔하게 재단된 북유럽 특유의 질서와 추위, 청결한 백색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는 공포서사가 매력적이다. 소설의 복잡한 알레고리는 계속해서 멀어지는 기억 때문에 소설의 앞부분에서 결정적인 무언가를 놓친 게 아닌가 하는 조바심으로 치환된다. 나같이 우둔한 독자로서는 어쩔 수가 없다, 정답이 나오기 전에 계속해서 이미 읽었던 부분을 재독하는 수밖에.

 

장르소설의 가장 기본적인 공식인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범인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가지고 모든 이들을 범인의 범주에 넣고 차근차근 추리해본다. 이거야말로 장르소설을 읽는 최고의 재미가 아니던가. 아무리 말이 안되는 가정이라도 소홀히 하지 말라고 해리 홀레는 독자에게 당당하게 주문한다. 물론 결론에 도달하기 전까지 작가가 슬쩍슬쩍 비쳐준 사소해 보이는 단서만으로는 역부족이다. 수완 좋은 작가는 여러 겹의 층위로 내러티브를 멋지게 포장해서 독자를 골려 먹는다. 하긴 이렇게 쉬울 리가 없지, 게다가 앞으로 남은 페이지를 보라구. 요 네스뵈의 첫 만남에서 범인을 지목해낼 수 있다면 정말 대단한 장르소설 팬이 아닐까 싶다.

 

요 네스뵈는 냉정하면서도 철두철미하게 자신의 모습을 감춘 시리얼 킬러와 일과 술독에 빠진 열혈형사와의 대결 구도를 축으로 우리의 동양식 사고로는 수용하기 어려운 방향으로 진화되고 있는 노르웨이식 가족관계에 현미경을 들이댄다. 어쩌면 <스노우맨>에서 도대체 정체를 알 수 없는 솜씨 좋은 연쇄살인범과의 대결만큼이나 흥미진진한 점이 바로 동물세계 바다표범에 비유하는 전통적 가족의 편린으로 대변되는 위태로운 외줄타기다. 깨어 있는 모든 시간을 범인 체포와 사건 해결에 투자하는 고독한 늑대 해리 반장에게 과거의 동거녀 라켈과 그녀의 아들 올레그는 감정의 잉여처럼 끈질기게 따라 붙는다. 그의 맞수 스노우맨이 해리 반장의 이 약한 고리를 놓칠 리가 없다, 모자의 위기는 그래서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요 네스뵈의 <스노우맨>을 보다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아무래도 우리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노르웨이의 오슬로, 베르겐 그리고 트론헤임 같은 지명들이다. 노르웨이를 비롯한 스칸디나비아에서는 일반화된 브랜드조차도 주석이 없으면 해독이 불가능하다는 점도 마찬가지다. 발음하기조차 어려운 거리 이름으로 대변되는 장소의 낯섬도 작가가 치밀하게 준비한 플롯의 효과를 배가시킨다. 독자가 이 복잡한 지명과 장소에 익숙해지는 순간, 소설의 전개는 그야말로 빛의 속도로 앞으로 튀어 나간다.

 

<스노우맨> 한 편만으로 완전히 요 네스뵈의 팬이 되어 버렸다. 급한 마음에 부랴부랴 그의 다른 작품이 나왔나 하고 검색해 봤지만 아쉽게도 올해 출간된 <팬텀>까지 해서 모두 9편의 해리 홀레 시리즈 중에서 7번째 작품인 <스노우맨>이 유일했다. 곧 출간될 8번째 작품 <레오파드>는 물론이고, 미국 출신 거장 마틴 스코시즈가 메가폰을 잡을 영화판 <스노우맨>도 무척 기대가 된다. 다만, 모쪼록 미국산이 아닌 노르웨이산으로 만나게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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낢이 사는 이야기 시즌2 2 - 혼자 살다 갈 수도 있겠구나… 낢이 사는 이야기
서나래 글.그림 / 씨네21북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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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서나래 작가에게 염장 지르는 말로 시작을 해야 하나. 예전에 웹툰을 즐겨 보곤 했다. 과거형이니 지금은 보지 않는다는 말일 것이다. 그리고 그 시절에 내가 제일 즐겨 보던 만화는 조석 씨의 만화였다. 물론 지금은 조석 씨의 만화도 보지 않는다. 이유는? 모름지기 만화는 골방에서 잔뜩 쌓아 두고 과자부스러기를 집어 먹으며 낄낄대면서 봐야 한다는 고정관념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웹툰 연재를 따라 잡기란 참 쉽지 않은 존재다. 회사에서 보통 휴식(?)을 위해 을이 더듬이 촉각을 있는 힘껏 세우고 레이더를 돌린다면 또 모를까.

 

그런데 어제 읽은 서나래 작가의 <낢이사는이야기>는 물론 그전부터 그 존재는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단행본으로 엮어 나온 책을 보는 것은 또 다른 재미였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어쩌면 이 단행본을 읽고 나서 팬이 되어 버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그만큼 그녀의 소소한 이야기 속에는 재미난 이야깃거리들이 차고 넘친다는 말이렷다.

 

우선 이 천 년대 초반쯤으로 추정되는 낢은 7? 8년째 만화를 그려 먹고 산다고 한다. 일견 소심한 성격으로 보이는 작가는 혼자 살다가 갈 수도 있겠구나라는 말을 되뇌는 골드미스가 아니 실버미스(그것도 아니라면 코퍼미스?)라도 되고 싶어 하는 당찬 커리어 우먼을 꿈꾸는 인기작가다. 일견 로맨스가 등장할 법도 한데, 항상 끼니를 챙겨줘야 하는 웅노인이며 맹군 같은 냥이들이며, 또 언제나 무시로 등장한 둥글레 씨에게 상추우~도 시시때때로 공급해줘야 한단다. 그러니 도대체 언제 연애를 하냐 말이다! , 가만 있자 그녀와 동료 일당들은 그네들이 연애 못하는 이유는 사회와 회사 그리고 조직 탓으로 돌리지 않았던가. 이런 유쾌 발랄한 상상이 그녀의 웹툰 속에서 계속 이어진다.

 

특히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라나는 둥글레 씨를 바라보며 쫄깃쫄깃한 육질이 느껴져라고 외칠 적에는 정말 빵! 터져 버렸다. 그런데 달팽이 둥글레 씨는 식용 달팽이(?)답게 정말 부쩍 부쩍 크는 것 같더라. 거의 낢 씨의 한쪽 손바닥을 다 덮을 정도로 말이다. 달팽이를 공급한 지인이 준 사용설명서의 마지막 부분은 가히 압권이었다. 24시간 단식시키고 어쩌구저쩌구…….

 

낢 씨는 독립된 생활을 꿈꾸며 월급이 통장에 잠시 머물러 가는 지극히 평범한 직장인들 삶의 편린들을 조근조근하게 짚어낸다. 그녀가 무언가 멋져 보이는 오피스 레이디가 되고 싶었으나, 실상은 아침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출근하고 플랫슈즈를 사랑하며 토 반 떡 반으로 끼니를 때우며 X을 생산해낸다고 당차게 외친다. , 정말 그녀의 이런 하이퍼 리얼리티 묘사에 격하게 공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미 나도 모르게 팬이 되어 버린 걸까.

 

웹툰연재 300회를 기념하며 그동안 자신이 그린 낢 씨의 추억의 발자취를 되새겨 보는 장면도 무척 인상적이었다. 단행본으로 나온 그림체에 익숙하다 보니 그전에 그렸던 그림들이 어찌나 촌스럽게 느껴지던지. 확실히 마우스로 그리던 시절보다 연륜이 쌓여서 그런진 몰라도 태블릿 PC 시절에 진화된 그림체가 훨씬 마음에 든다. 21세기 하이테크와 작가의 연륜을 칭송할지라.

 

오늘은 아무래도 이 책을 전후로 해서 그동안 못 본 낢 씨의 웹툰 스토리 서핑을 좀 해야할 것 같다. 물론 번개 같은 알트탭 기술과 후천적 더듬이레이더기술이 꼭 필요하겠지? 앞으로도 한층 더 업그레이된 발랄하면서도 재미난 스토리들을 꾸준하게 생산해 주시길 바란다. 천하의 게으름뱅이 작가에게 너무 무리한 요구라고? 어쩔 수 없다, 난 팬이니까.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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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헨리 단편선
0. 헨리 지음, 김욱동 옮김 / 비채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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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 전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오 헨리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즉석에서 연극으로 재현했던 기억이 난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남녀의 역할을 바꿔서 두 아마추어 배우가 열연을 펼쳤다는 점이다. 그런데 내가 이 이야기를 책으로 그전에 읽었던가? 다독가가 흔히 저지르는 실수 중의 하나는 모두가 다 아는 유명한 책이어서, 실제로는 읽지 않았으면서 그 내용을 이런저런 경로를 통해 다 앍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읽었다고 착각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읽은 오 헨리의 단편선도 예외는 아니었다. 정말 어디선가 다 한 번쯤은 접해 본 이야기의 원전이 바로 김욱동 교수님의 번역으로 비채에서 새로 출간되고 있는 <모던&클래식> 시리즈 중 <오 헨리 단편선>에 오롯이 실려 있다.

 

언젠가 김경욱 작가와의 만남 시간에 왜 굳이 장편보다 단편을 고집하느냐는 질문을 들은 기억이 난다. 장편소설 옹호론자 입장에서는 짧은 단편이 장편보다 더 쓰기 쉽지 않겠냐는 말을 할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반대로 생각해 보면, 짧은 분량을 통해 독자의 확실한 시선을 사로잡고, 그들에게 진한 페이소스(pathos)를 남겨 주기 위해서는 단편 소설에 더 내공이 필요한 게 아닐까 하는 추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지난 세기 초 미국에서 화려하면서 강렬한 10년의 작품 활동기간을 보여준 오 헨리야말로 진정한 단편 소설의 대가(大家)라는 호칭이 딱 어울릴 것이다. 우선 그의 작품의 배경이 되는 공간은 주로 화려하면서도 모두가 선망해 마지않는 대도시다. 특히 뉴욕 같은 대도시에는 화려한 전기 불빛만큼이나 어두운 밤거리도 빼놓을 수 없다. 아니 어쩌면 바로 느와르적인 밤거리야말로 도시의 화려함을 대조적으로 더 빛나게 해주는 요소가 아닐까.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수많은 사람들로 넘실대는 대도시의 이야기야말로 오 헨리의 화수분처럼 넘치는 소재의 원천이었으리라. 평소에는 도저히 꿈꿀 수 없는 엄청난 비용의 호텔에 체류하는 귀부인의 꿈을 동경하는 평범한 샐러리맨의 이야기에서, 너무 가난해서 사랑하는 이에게 줄 선물을 구하지 못해 결국 자신이 가진 가장 소중한 것을 팔아야 했다는 그야말로 도시 전설의 비애, 매서운 겨울바람 앞에 매달린 가녀린 이파리에 희망을 거는 보통 사람의 이야기야말로 세기를 지나도 독자의 마음을 울리기에 충분하다.

 

오 헨리는 그런 감동에 더해 때로는 스릴러적인 요소를 가미한 미스터리로 독자를 당혹스럽게 만든다. 지방 도시인 테네시 내슈빌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다룬 <어느 도시 보고서>는 빌 머레이 주연의 <그라운드혹 데이>를 떠올리게 한다. 자기의 주머니에서 나간 돈이 어떤 경로를 통해 자신이 관계한 이의 손에서 떠나지 않는지 그야말로 미스터리다. 때로는 거두절미하고 본론으로 독자를 인도하거나 <어느 도시 보고서>처럼 좀 뜸을 들이면서 호기심을 자극하는 테크닉은 역시 고수답다.

 

돈을 털러 왔다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고질적인 류머티즘에 시달리는 고객(!)과 죽이 맞아 한 잔 사겠다고 제의하는 멋쟁이 도둑님의 모습에서 그리고 사업 밑천을 벌기 위해 어느 마을의 말썽꾸러기를 납치했다가 된통 혼이 나고 오히려 아들의 아버지에게 돈을 줘가면서 도로 넘겨주는 희비극 같은 상황에서는 정말 두 손 두 발 다 들 정도였다. 이십년 후에 성공해서 만나자는 어릴 적 친구의 약속에 우선하는 청교도적 정의감은 이제는 찾아볼 수 없게된 미국적 가치의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조금 씁쓸해지기도 한다.

 

오 헨리의 단편선을 읽고 나서 든 생각은 역시 대가의 작품은 시간과 공간을 떠나 어느 곳의 독자에게서나 같은 질량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구나하는 점이었다.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에서는 기시감에 준거한 만족감을 그리고 조금 생소하지만 다양한 스펙트럼의 광휘를 발하는 다양한 이야기는 그만큼 매혹적이다. 곁에 두고 생각날 적마다 뒤적이고 싶은 그런 걸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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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차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24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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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차 [火車]

생전에 악행을 저지른 망자를 태워 지옥으로 실어나르는 불수레

- 악인이 한 번 타면 절대로 내리지 못하고 지옥으로 가는 불수레 (나꼽살 주석)

 

정말 오래간만에 리뷰를 쓴다. 그동안 악마의 게임에 빠져 리뷰질에 소홀했었다. 여전히 헤어나진 못하고 있지만, 이번 주말에 있을 독서 모임을 위해 꾸역꾸역 <화차>를 읽었다. 이 기세로 한 달째 손에 내려놓지 못하고 있던 오 헨리 단편선도 마무리 지어야지 싶다. 게임 때문에 빠졌던 독서 슬럼프에서 이제 기지개를 켤 시간인가 보다.

 

각설하고 오늘의 주제인 미야베 미유키, 다들 미미여사의 최고 걸작이라고 불린다는 <화차>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처음 출간된 지 20년 만에 새롭게 단장해서 독자를 찾아온 전설의 베스트셀러는 아무래도 20년이라는 시차 때문인지 아니면 일본 문학에 대한 개인적 편견 때문인지 읽는 내내 심드렁했다. 최근에 변영주 감독 연출로 세간의 화제가 되고 있는 영화 <화차> 그리고 즐겨듣는 팟캐스트 방송에서 언급될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다는 점이 나로 하여금 이 책을 읽게 만든 추동력이 아니었을까.

 

언뜻 어느 라디오 PD가 이 책의 키워드를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허상 같은 행복추구(pursuit of happiness)로 규정했던 리뷰가 떠오른다. 이미 십 년 전인 2003년 카드대란을 직접 체험한 세대여서 그런지, 돌고 도는 운명의 불수레에 거침없이 올라탄 주인공 세키네 쇼코 아니 신조 교코에 동정심이 앞선다. 결혼을 앞둔 한 남자가 자신의 약혼녀가 개인파산자라는 사실을 알고, 그 사실을 그녀에게 추궁하자 여자는 그야말로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졸지에 약혼녀를 잃고, 막막해진 약혼남은 사고로 마침 휴직 중이던 사촌 혼마 슌스케 형사에게 자신의 약혼녀를 찾아 달라고 부탁한다. 42세로 교통사고로 아내 지즈코를 잃고 홀로 아들 사토루를 키우던 혼마는 그렇게 사건에 뛰어들게 된다.

 

마쓰모토 세이초의 사회파 미스터리를 떠올리는 1980년대 말 일본 버블 경제의 붕괴 이후, 사회를 휩쓸던 신용대출, 개인파산이라는 사회적으로 민감한 주제를 미미여사는 전면에 배치한다. 아울러 실종된 묘령의 여인을 찾는 과정에서 헤진 속살을 조금씩 드러내는 한편,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한 심층적 분석으로 독자를 사로잡는다. 소설 속에서 혼마 본인도...

 

여기까지 리뷰를 쓰다 말고 마무리를 짓지 못했다. 아마 왜 그렇게 혼마가 세키네 쇼코를 추적하는 일에 매달렸을까 하는 심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했었나 보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렇게 중요한 포인트가 아닌 듯 싶기도 하다. 어쨌거나 리뷰를 마저 쓰지 못하고 참석한 독서모임에서 소설, 드라마 그리고 영화에까지 이르는 방대한 이야기에 취했었다. 책읽기가 개인적 체험이라면, 책을 읽고 나서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누는 독서모임은 개인적 독서의 외연 확대가 아닐까 싶다. 그래서 소설과 일본 드라마 그리고 각색을 통한 재창조라는 평을 듣는 변영주판 <화차>의 차이점을 비교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각각의 장르에서 보여주는 소재의 변주(variation)가 아주 인상적이었다.

 

독서 모임에서 지인은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캐릭터로 쇼코의 어릴 적 친구 다모쓰의 아내 이쿠미를 지목했다. 현재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여자로서 질투심을 무릅쓰고, 쇼코의 행적을 찾겠다는 남편을 보내야 하는 심정이 참 절절하다고 했던가. 개인적으로 결혼을 약속한 애인이 사라져 버린 구리사카 가즈야가 가장 안됐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정작 사건의 발단을 제공해준 사람이 소설의 어느 부분에선가 홀연히 사라져 버리고 최초의 의뢰가 실종되어 버리는 점이 마음에 걸린다. 가즈야가 나중에라도 모종의 역할을 하지 않을까 하는 상상은 그야말로 허공으로 날아가 버렸다.

 

소설 <화차>에서 미미여사는 개인의 문제에서, 사회의 문제로 그리고 다시 개인의 문제로, 새로운 단서를 제공하는 결정적 인물의 등장,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그야말로 돌고 도는 윤회적 구성으로 긴장의 끈을 바짝 조이는데 성공한다. 이런 소설의 흥미진진한 전개에 비한다면, 결말은 다소 아쉽기까지 하다. 스릴러의 특성상, 개연성의 개입은 어쩔 수가 없겠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너무 자주 필연 대신 우연(偶然)이 미리 결말의 김을 뺀 게 아닌가 싶다.

 

소설 <화차>가 담보하는 많은 담론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개인의 주관적 판단에 맡겨야할 것 같다. 특히, 신용카드의 무분별한 사용에 따른 개인의 책임과 그런 환경을 제공한 사회 혹은 기업의 책임에 대해서는 좀 더 진지한 논의가 뒤따라야할 것 같다. 다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적 행복의 추구는 반대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이십 년 전에는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나에게 <화차>는 너무 늦게 도착한 것 같다.

 

[뱀다리] 영화 개봉에 맞춘 재출간 타이밍은 정말 최고였다. 가히 시너지 효과에 준거한 쌍끌이 흥행이라고 부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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