낢이 사는 이야기 시즌2 3 - 그런 시절도 있었더랬다 낢이 사는 이야기
서나래 글.그림 / 씨네21북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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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웹툰이 나의 일상 속으로 슬그머니 밀고 들어왔다. 사실 웹툰 그림체가 딱히 마음에 들지 않고 왠지 유치하다는 생각에 멀리 하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조석님의 <마음의 소리>를 통해 그런 개인적 고정관념을 안드로메다로 날려 버리게 됐다. 만화의 그림체도 물론 만화 구성과 선택의 중요한 요소겠지만, 역시 뭐니 뭐니 해도 스토리텔링이야말로 웹툰의 정수가 아닐까 한다. 물론 계속해서 연재되는 만화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서나래 만화가의 새로운 웹툰책이 출간되었다는 말에 가장 먼저 나의 머릿속에 떠오른 그녀의 캐릭터는 바로 둥글레 씨였다.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야말로 휙휙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작가의 애완 달팽이 생각이 나다니, 놀랄 일이지 않은가 말이다. 두 번째 시즌에서도 애완 달팽이 둥글레 씨는 반갑게도(?) 열심히 먹고 싸며, 미끈한 것을 쉴 새 없이 그렇게 생산해 내고 있었다.

 

이야기가 좀 곁길로 샜지만, 이제 막 서른이 되었다는 서나래 만화가는 이번 시즌에서는 옛날 아날로그 시대에 대한 이야기로 독자의 감성을 자극한다. 그 시절에 카세트테이프로 노래 좀 들었을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그런 체험들, 그야말로 마르고 닳도록 들어서 늘어난 카세트테이프가 들려주는 기괴한 소리하며, 끊어진 테이프 이어 붙이기 신공 등 한 번쯤은 해봤을 법한 이야기에 슬며시 미소가 떠오른다.

 

다이어트 강박시대에 사는 나 역시 그녀의 다이어트 그리고 언젠가 나도 운동을 해야지 하는 평범한 보통 사람의 이야기에 절로 귀가 솔깃해진다. 10KM 단축 매러썬에 나선 그녀의 이야기에선 멀리 이웃나라 작가 하루키 선생까지 갈 것 없이 달리기/매러썬에 중독되어 도가니가 나간 지인의 에피소드가 떠오르기도 했다. 나야 그렇게 운동할 일이 없으니 그럴 일은 없겠지만.

 

아날로그 시대의 타임머신을 좀 더 돌려 보면, 분홍이-뽀얀이-곱슬이 그리고 흰둥이 같은 촌스럽지만 정감 넘치는 인형과 보내던 시절 이야기도 나온다. 하지만, 역시 압권은 어머니가 고무장갑을 끼고 먹여 주시는 배추보쌈의 추억이다. 일손이 달리는 김장철에 고양이 손이라도 돕겠다고 무지막지하게 정신없이 갈다 보면 반드시 피를 보게 되는 그 공포스러운 기억이라니. 노동에 부차적으로 따르는 보상 같은 예의 배추보쌈 맛을 그 무엇에 비할 수 있을까 싶다.

 

단순명료하면서도 독자에게 가하는 불의의 일격이야말로 낢 씨의 평범해 보이면서도 그렇지 않은 에피소드의 진수가 아닐까 싶다. 그녀의 명랑쾌활한 만화를 보면서 아날로그 시대를 거쳐 한참 진화한 디지털 모바일 시대에 웹툰은 또 어떻게 진화해 갈지 참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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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누스 - 격변의 시대, 영혼의 치유와 참된 행복을 찾아 나선 영원한 구도자
피터 브라운 지음, 정기문 옮김 / 새물결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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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받아 본 순간, 우선 두께에 놀랐고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성 어거스틴의 삶 자체가 시대정신의 발현이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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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열정 (양장) -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아니 에르노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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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경우 작가에 잘 모를 경우, 리서치를 해서 조금이라도 알아보고 북글을 쓰는 편인데 오늘은 그러지 않으련다. <단순한 열정>의 작가 아니 에르노의 작품은 김탁환 선생의 독서열전을 통해 알게 됐다. 책을 통해, 다른 책을 만나게 되는 즐거움을 그 무엇에 비할까. 여담이지만 김탁환 선생의 책을 통해, 자신이 체험한 것이 아니면 쓰지 않는다는 아니 에르노(아주 도발적인 선언이었다!)와 중국 거시사를 다룬 레이 황 교수와의 만남은 개인적으로 큰 수확이었다.

 

그렇다면 아니 에르노의 자전적인 소설(아니 소설이라기보다 은밀한 사적 체험담이라는 표현이 더 맞지 않을까?)의 내용은 무엇일까. 그건 바로 동유럽 출신의 어느 남자 A와의 뜨거운 열정이 담긴 사랑이었다. 자신의 첫 포르노 시청 경험으로 시작하는 권두가 가히 충격적이었다. 역자의 후기에서 아니 에르노의 행동에 대해 도덕적인 잣대를 대지 말 것을 권유하는 부분이 있었는데, 아마 프랑스에서 한다하는 작가가 자신의 혼외정사를 다룬 내용의 책을 발간했다는 파격 때문이었을까.

 

아니 에르노의 주체할 수 없는 뜨거운 열정의 대상은 연하의 동유럽계 남자이다. 그리고 유부남이란다. 시작에서부터 무언가 헤어 나올 수 없는 족쇄들이 열거되고 있다. 아니 에르노는 자신의 걷잡을 수 없는 연애 행각에 대해, 변명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것 같다. 단지 있는 그대로 자신의 감정의 전이들을 담담하게 혹은 뿌리칠 수 없는 유혹에의 상념들을 글로 표현하고 있었다.

 

물론 철저하게 변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었는지, 두어 가지 핑계거리를 제시하고 있다. 하나하나 설명하고 싶지 않은 자신의 열정을 이야기하고, 자신의 욕망(열정)을 위한 권리의 투쟁이라는 식의 이야기들. 결정타는 39쪽에 나오는 대로 A와의 관계의 노출은 시답잖은 대중을 위한 노출이 아닌 현재진행형인 노출이라고 했던가. 어쨌거나 아니 에르노는 자신의 열정이 담겨 있었던(그녀가 원하는 대로 반과거 시제로 표현해줄까) 이야기들을 글의 소재로 써먹지 않았던가.

 

<단순한 열정>은 도대체 맹목적인 열정에 눈먼 사랑인가? 아니면 제목 그대로 단순한 열정인가? 열정(passion)은 본래대로의 뜻도 있지만 또 한편으론 수난과 고통이라는 뜻도 함께 가지고 있다. 아니 에르노에게 A와의 관계는 뜨거운 열정이면서도 동시에 전부를 소유할 수 없는 고통과 비애도 수반하고 있었다. 그와 만남은 그녀에게 전부이면서도 동시에 예고된 이별에 뒤따르는 상실감, 우울증 그리고 음주의 그림자를 비추고 있다.

 

그녀는 이런 복잡다단한 감정을 그녀의 전공인 글쓰기로 통해 돌파하려는 욕구를 강력하게 천명한다. 타인과는 다른 시공간에 사는 그녀는 자신 외에 모두를 배제한 철저한 1인칭 시점을 고수한다. 그녀가 고집하는 반과거 시제의 사용은 지나간 A와의 사랑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미망의 은유적 표현일까, 마치 연애의 선수처럼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는 작가의 센스가 놀랍기만 하다.

 

우리가 느끼는 열정의 순간들이 휘발되어 버리고 난 뒤에 남는 감정들은, 아니 에르노가 말한대로 살아 있는 텍스트들이 (감정의) 찌꺼기와 무의미한 흔적들로(63) 치환되어 버리고 마는 그래서 결국에 가서는 다른 사람들처럼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 버리는 순환구조에서의 실종처럼 다가왔다.

 

아니 에르노는 또한 죽음의 가정법의 사용도 마다하지 않는다. 무엇무엇을 할 수만 있다면 바로 죽어도 좋다는 식의. 그것조차 제한된 사랑 뒤의 결말처럼 들린다. 그녀는 자신이 쓴 대로 욕망이라는 자산을 모두 탕진시켜 버리고 난 뒤에 오는 쾌락에 반대급부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마치 타인의 육체에 대한 기억이 없는 공허한 피로감처럼 엄습한다.

 

아니 에르노는 도대체 왜 소설을 썼을까? 책을 덮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냥 자신만의 일기장에 고이 모셔 두어도 족했을 법한 글을 말이다. 자신은 A를 소설의 등장인물이 아닌 자신의 존재를 위한 선택이었다고 썼지만, 과연 한 때 아니 에르노 열정의 대상이었던 A도 그렇게 생각을 했을지 궁금하다. “직접 체험하지 않은 허구를 쓴 적은 한 번도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아니 에르노의 문학세계에 나는 그렇게 단순한 독서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첫발을 내딛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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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렛 수녀는 왜 모두의 적이 되었는가 - 17세기 수녀원의 내밀한 역사
크레이그 할라인 지음, 이영효 옮김 / 책과함께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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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읽을 책을 고를 때 어떤 기준을 가지고 있을까? 물론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주제에 따라 책을 고를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내가 좋아하는 두 가지 주제가 크로스오버된다면 두말할 것 없이 그 책을 살 것이다. 크레이그 할라인의 <마가렛 수녀는 왜 모두의 적이 되었는가>는 내가 책을 고르는 기준에 있어 안성맞춤인 책이었다.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종교 개혁 시대 그리고 미시사(microhistory)라니. 정말 오래 간만에 읽는 활자 책의 책장이 술술 넘어갔다.

 

미국국립인문학기금의 지원을 받아 연구 활동의 일환으로 구 스페인령 네덜란드, 지금의 벨기에의 기록보관서에서 오래된 서류를 뒤지던 크레이그 할라인 교수는 신구교 할 것이 없이 종교개혁의 바람이 몰아치던 17세기 초반 뢰번(나는 왜 루뱅이라는 이름이 더 마음에 드는 걸까)에 있던 회색 수녀회 소속 베들레헴 수녀원의 어느 수녀가 남긴 장문의 편지를 발견해냈다. 그 편지 뭉치가 이번에 읽은 <마가렛 수녀는 왜 모두의 적이 되었는가>의 단초를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뢰번의 마가렛 스뮐더르스 수녀는 프로테스탄트의 신교개혁에 대항해서 구교의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각종 개혁안이 포고되던 17세기 초반, 뢰번의 작은 수녀원 베들레헴 수녀원에서 종신 서원을 하고 수녀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하지만, 예의 수도원 생활은 그녀가 서원했던 신에 대한 경건과 수도의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무엇보다 고해신부의 스캔들로 그녀는 처음으로 수녀원에서 쫓겨나게 된다. 마가렛 수녀는 베들레헴 수녀원을 관할하는 고위 성직자에게 수녀원에서 벌어지는 일을 편지로 알리기로 결심한다. 그 결과 21세기를 사는 우리가 400년 전, 지구 반대편의 작은 수녀원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당대의 사회상을 분석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와 만나게 됐다.

 

마가렛 수녀와 베들레헴 수녀원의 다수를 차지하는 수녀들과의 작은 전쟁은 어느 시각에서 보면 성실한 고해신부 헨리 요스와의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마가렛 수녀의 진정으로 알려진 스캔들 때문에 헨리 요스 신부는 베들레헴 수녀원 고해신부 자리에서 쫓겨나게 된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으로 진정되는 것이 아니라, 개혁과 교정을 원하는 일단 수녀와 기존의 체제를 고수하려는 다수 수녀의 대결로 비화된다. 저자 크레이그 할라인은 마가렛 수녀의 기록을 신중하게 검토하며, 그녀의 손을 들어준다. 그녀가 베들레헴 수녀원으로부터 두 번씩이나 쫓겨나는 치욕을 감내하면서 남긴 기록을 바탕으로 원장 수녀였던 아드리아나 트라위스와 그녀의 충실한 추종자 안나 피흐나롤라와 마리아 요스 일파의 비난이 수녀원의 제일 가는 덕목 중의 하나인 자매애와 상반되는 것이 아닌지 독자에게 꾸준한 질문한다.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경건한 묵상과 성무일도 그리고 공동노동과 분배가 당연하게 이루어질 거라고 생각했던 중세/근대 수녀원의 실상은 마가렛 수녀의 기록과는 정반대였다. 상대적으로 기부금 모금이 자유로웠던 남자 수도원과는 달리 가난할 수밖에 없었던 수녀원에서 연금 형식으로 지원받는 부유한 수녀와 마가렛처럼 그렇지 못한 수녀의 차별 문제는 말할 것도 없고, 누구나에게 공평하게 분배되어야 할 수녀원의 공동재산이 수녀원의 권력을 지배하고 있는 원장과 재무 담당 수녀에 의해 편파적으로 집행되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일부 몰지각한 수녀들이 신에게 헌신이라는 본업보다 질 좋은 맥주를 실컷 마시고 흥청대는 파티를 벌이고, 수녀원의 허드렛일을 도와주는 속인 남자들과 수다 떠는데 열중하는 장면에서는 이들이 신에게 서원한 수녀인가 하는 생각이 다 들 정도였다.

 

아드리아나 원장을 비롯한 대다수의 수녀들에게 수녀원 밖에서 망루의 참새처럼 수녀원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감시하고 상급 성직자들에게 고발하는 마가렛 수녀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대주교가 내린 명령도 가볍게 무시하고, 기존의 문제를 교정하려는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았다. 크레이그 할라인은 그 원인을 문제에 대한 서로 다른 시각차로 분석한다. 용서와 화해라는 종교적 미덕이 두 적대적인 세력 사이에 들어설 자리는 없었다.

 

물론 크레이그 할라인 교수는 마가렛 수녀의 치명적인 실수도 빠트리지 않는다. 마가렛 수녀는 치유를 위해 머물던 성지 스헤르펜회벌에서 후원자들의 허가 없이 베들레헴 수녀원으로 복귀를 감행하면서 파란을 불러 일으켰다. 그녀의 이런 사려 깊지 못한 행동은 그녀의 적들에게 좋은 공격거리를 제공해 주었고, 후원자들을 실망시켰다. 개인적으로 더 궁금했던 점은 왜 그녀가 베들레헴 수녀원에 그렇게 머물기를 원했는지 알 수가 없다. 객관적으로 판단해 봤을 때 자기 정화능력도 그럴 의지도 없는 베들레헴 수녀원과 동료 수녀들에게 미련을 가질 필요가 있었을까?

 

베들레헴 수녀원이라는 제한된 공간에 돋보기를 대고, 종교개혁이나 종교전쟁 같은 거시적인 안목이 아니라 수녀들 간의 불화 혹은 다툼 같은 미시적인 차원에서 접근한 크레이그 할라인 교수의 시도와 관점이 신선하다. 주관적인 점이 없지 않지만, 당시 수녀들을 강제하던 조직적인 시스템과 위계질서에 대항한 마가렛 수녀의 기록은 그런 점에서 매우 매력적이다. 스스로 고립된 수녀원 생활을 선택했지만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편애와 따돌림에 고통 받으면서도 절망하지 않은 그녀의 노력 덕분에 격변의 시대를 간접적으로나마 만나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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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변 십자가 모중석 스릴러 클럽 31
제프리 디버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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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말하는 소셜 네트워킹 서비스(SNS:social networking service)의 시대다. 대중은 트위터와 페이스북 그리고 개인 블로거가 실어 나르는 그야말로 넘쳐나는 정보를 취사선택해서 받아들인다. 그 정보가 얼마나 정제되었는지, 그리고 나에게 유용한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사람들의 입에 오르는 이슈라면 수위를 가리지 않는다. 동작학의 대가 캐트린 댄스가 등장하는 두 번째 시리즈 <도로변 십자가>는 바로 이제는 주변에 안착한 SNS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하는 그런 소설이다.

 

제프리 디버는 <도로변 십자가>5일 동안의 숨 막히는 사건 전개 속에 욱여넣는다. 언제나 그렇듯 미스터리한 사건의 시작은 평이하다. 월요일, 캘리포니아 고속도로 순찰대원이 도로변에 세워져 있는 십자가를 발견한다. 문제는 시간이다. 십자가가 상징하는 죽음은 과거형이지만, 이 십자가의 날짜는 미래다. 불현 듯 예고살인이 연상된다. , 이제 앞으로 희생자들이 가진 연관성이 등장할 차례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저널리스트 출신 전직 변호사 제프리 디버는 해결사 캐트린 댄스를 투입한다. 탁월한 프로파일러이자 바디 랭귀지 전문가인 캐트린 댄스는 전작 <잠자는 인형>에서 다니엘 펠 사건을 함께 했던 마이클 오닐과 함께 수사에 착수한다. 그리고 예고된 희생자들이 모두 하나의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뭐 여기까지는 좋다. 하지만, 제프리 디버는 얼핏 보면 단순해 보이는 사건을 배배 꼬기 시작한다.

 

제프리 디버는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 트래비스 브리검을 범인으로 몰아가기 위해 갖가지 준비를 마다하지 않는다. 이쯤 되면 추리소설 팬이라면 모두 아는 클리셰이라고 해야 할까? 과연 트래비스가 범인일까? 아니면 한 번 더 꼬는 걸까? 베스트셀러 작가와 독자의 심리전이 바야흐로 개시된다. 트래비스가 관련된 예전의 교통사고를 다룬 블로그 칠턴 리포트와 운영자 제임스 칠턴이 가세하면서 제프리 디버 특유의 꽈배기 기법과 단 한 가지의 단서도 놓쳐서는 안되는 긴장감이 독자를 옥죄어 온다. 그와 동시에 역시 제프리 디버 추리소설 특유의 쫄깃한 맛이 유감없이 발휘된다.

 

가장 유력한 용의자를 무대에서 실종이라는 방법으로 무대에서 지워 버리면서 제프리 디버는 독자를 혼란에 빠트린다. 뭐 이 정도 쯤이야. 방심한 틈을 타서 작가는 한 방 더 먹인다. 우리의 주인공 캐트린 댄스는 특유의 본능에 의거해서 그녀가 쫓는 트래비스가 범인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느끼는 순간, 독자는 즉시 멘붕 상태에 돌입한다. 이렇게 쉽진 않겠지만,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범인이란 말인가. 아주 고전적인 전개 방식이다. 도대체 누가 범인인지 궁금해서 책장을 넘기는 손길에 가속이 붙는다.

 

21세기 소셜 네트워크 시대답게 양방향으로 진행되는 온라인 게임 커뮤니티 그리고 블로그를 제프리 디버는 좋은 소재로 삼았다. 일단 긍정적이다. 하지만, 문제는 오프라인에서 맨투맨으로 대면하면서 프로파일링을 진행해야 살 수 있는 캐트린 댄스의 전공이 한 층위 덮씌워진 온라인에서 효과적이었나 하는 근본적인 질문과 맞닥뜨리게 된다. 물론 수면 아래 감추어진 범행의 동기야 작가의 친절한 설명이 없다면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기존의 추리소설의 양태에서 보여주는 예상 범인의 일거수일투족을 통한 분석이 온라인 세상에서 어느 순간 휘발해 버리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게다가 온라인을 즐기는 않는 이들에게는 외계 언어처럼 다가오는 게임 용어 또한 낯설다.

 

그럼에도 첨단 테크놀로지와 감각 수사라는 종래의 수사기법의 균형추를 맞춰 주는 캐릭터로 캐트린 댄스는 매력적이다. 자신의 전공인 동작학에 기반한 프로파일링과 꼼꼼하면서도 범인 검거라는 수사관의 기본 사명에 투철한 여성수사관 아이콘은 앞으로의 활약이 더 기대된다. 전작 <잠자는 인형>이 그녀에 대한 소개였다면, <도로변 십자가>는 진화해 가는 캐릭터의 상징으로 다가온다.

 

다채로운 뷔페의 한켠을 차지한 거대한 음모론은 물론이고, 개인의 일상이 낱낱이 공개된 온라인 세상이 제시하는 디스토피아에 대한 작가의 묵시록적 경고는 마지막 책장을 덮으면서도 내내 마음속에 깊은 잔상을 남겼다. 올해 발표된 예정이라는 제프리 디버의 캐트린 댄스 시리즈 세 번째 인스톨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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